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5. 5. 9. 10:39

 

노인성 치매는 걸리는 병일까? 든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치료와 예방이 가능한 질환이라기보다 과정으로 보는 게 타당한 건 아닐까? 몸은 늙어도 마음이 어릴 적 모습으로 되돌아가므로 치매에 든 노인은 기억이 흐려지고 말이 어눌해지며 배설물을 흘린다. 그런 어머니를 철근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시골의 땅으로 모시고 와 여생을 편안하게 살핀 한 귀농인의 경험담은 치매에 대한 우리의 성마른 시선을 바꾸도록 인도한다.


제 아이가 대소변을 가리기 시작하면 젊은 부모는 무척 반가워한다. 물론 진자리와 마른자리도 기쁜 마음으로 정돈하겠지만 그 이의 부모도 오래 전에 그랬다. 그랬던 부모가 나이 들어 치매에 들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 치매에 든 부모를 사탕과 완력으로 다룰 수 없는 고충이야 이해해지만, 등급을 받아 기관으로 얼른 떠넘기려는 자식들의 처사는 측은함을 넘어 차갑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자식에 치매가 온다면 부모는 요양원부터 수소문할까?


최근 9년 사이에 50대 치매환자가 2.4배 늘었다는 신문보도가 나왔다. 초기 정신질환으로 의심했던 병원이 중중으로 진행되어야 치매로 판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주저앉은 자식의 대소변을 다시 받아야 하는 부모의 심경은 어떠할까? 수입이 보잘것없는 노인에게 아기가 된 50대 자녀를 보살피는 부담은 여간이 아닐 텐데. 우리 사회는 젊은 치매환자에 대한 대책이 거의 없어 보인다. 40대 치매도 같은 기간에 1.5배 늘었다는데, 전문가들은 심혈관질환과 알코올 의존에 의한 영양결핍을 젊은 치매의 원인으로 본다.


50대 치매는 걸리는 걸까 드는 걸까? 전문가들은 노화가 아닌 원인을 의심하므로 걸린다고 해야 옳을 텐데, 다른 원인은 없을까? 소 내장을 소 사료로 사용한 이후 치매가 무려 9800% 늘어난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평균수명이 늘수록 치매에 드는 노인이 늘어나더라도 9800%까지 급증할 리 없는데, 그렇게 늘어난 환자들 중 40에서 50대 연령층도 상당할 게 틀림없다. 광우병 요인이 있는 쇠고기가 원인이라는 미국 전문가의 주장은 오래 전부터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 우리나라의 사정과 전혀 무관할까?


최근 우리의 미국 쇠고기 수입량이 광우병 경각심이 클 때보다 상당히 늘어났다. 당연히 소비하는 이도 늘었을 게 틀림없는데, 막창구이 식당도 전보다 성황이다. 대부분 미국인들이 잘 먹으려 하지 않는 미국산이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막창과 곱창은 프리온이 특히 많은 특정위험물질이다. 프리온이 몸에 들어오면 뇌가 구멍 뚫린 스펀지처럼 바뀌며 광우병 환자가 될 가능성이 몹시 높아진다. 치매로 오인될 가능성도 높다. 그 환자가 50대라면 특히.


치매가 9800% 늘어난 미국에서 이제 소 내장을 사료에 섞어 소에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좋을까? 광우병 요인이 사라졌다고 믿는 유럽이라면 모르지만 미국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소 내장을 돼지와 닭에 먹이고, 돼지와 닭 내장을 소에 먹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른바 교차오염이다. 광우병으로 크게 혼난 유럽은 어떤 육질사료도 소에 먹이지 않는다. 이후 광우병은 소와 사람에게 발생하지 않는데, 젊은 치매는 어떨까? 미국 쇠고기를 마지못해 조금 수입하는 유럽도 우리처럼 늘었을까?


대장암 용정이 5배 가까이 늘었다는 최근 소식을 듣고 GMO를 원인 중의 하나로 의심하는 이가 있다. 대장암 검사를 하는 시민이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미국계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우리 식탁을 점령한 마당에 미국산 쇠고기가 어느새 늘었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가능성을 부정하는 우리 정부는 GMO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정부가 50대 치매 증가의 원인을 분석할 리 만무하다. 어디 연구비 넉넉한 독립 과학자 없나?


여러 이유로 많은 이에게 육식을 피하라고 권하지만 별 효과는 없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높일 방법을 찾고 싶은데, 효과가 있을는지. 그 전에, 유기농 막창이라도 생활협동조합 매장에 놓였으면 좋겠다. (살림이야기, 20155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12. 31. 13:30

 

요즘 돋보기가 없으면 의기소침해진다. 배포된 자료를 읽기 어렵고 주고받는 명함의 작은 이름을 식별하지 못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거기까지다. 돋보기만 있다면 큰 불편함이 없다. 한두 마리였던 왼쪽 눈의 파리가 서너 마리 날지만 오른쪽 눈이 보완해주니 별 문제는 없다. 안경이 없었던 조상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별로 걱정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글자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그나마 글이 필요 없는 삶이 더 많았으니 안경 따위를 알 필요도 없고, 알았어도 부재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었겠지.


일본의 어떤 의사가 암 수술 받을 필요 없다는 소신을 펴 우리 언론에 주목을 받은 적 있다. 두어 달 전이다. 그는 암을 진짜와 가짜로 구별했다. 가짜 암은 수술이 필요 없고 진짜 암은 수술해도 소용없다고 했다. 극단적 주장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없으니 암 치료에 진력을 다해온 그 의사의 경험을 반박할 수 없다. 다만 암 진단이 나왔을 때, 수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을지 아직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진단기술이 무척 정교해진 요사이, 건강검진이 일반화하면서 암이 될 가능성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수술이 남발된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멀쩡한 몸에 칼을 댄 뒤부터 허약해진 이가 많다.


대학병원장으로 정년을 마친 어떤 의사는 평생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다고 친구들 앞에서 실토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무서워서!”였다고.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의사도 무서워하는 암을 어떤 의사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나이 들어 사망하는 원인에서 뇌혈관과 심혈관 질환, 그리고 암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데, 간병하는 식구 지치게 만드는 뇌혈관이나 유언 남길 틈도 없이 쓰러지는 심혈관 질환보다 남은 삶을 스스로 정리하며 마무리할 수 있게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암 수술을 피할 것이라고 단언한 그는 노환을 지연하게 하는 생활을 젊은이이게 주문했다.


갈수록 실버산업이 뜰 거라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대형 마트에 노인 의료용품이 아동용품 못지않게 쌓였고 노인 요양시설이 교외에 전에 없이 늘었다. 치매 요양병원도 성황인 모양이다. 직장과 학교에 매달리는 가족에게 요양병원은 불가피한 면 없지 않지만, 요양병원이 있기에 노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 가족이나 이웃과 마음을 나누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될 수 있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치매는 노화다. 노화는 질병일까. 나이 들어가는 현상을 질병이라고 규정하면 건강은 어떤 연령에서 멈추는 걸까.


80대 중반에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를 서울의 아파트에서 시골로 모신 귀농인이 있다. 똥꽃이라는 책에서 농사지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전희식, 그다. 감내하기 어려운 어려움이 한둘 아니었지만 90대 중반에 들어가는 어머니의 몸은 조금씩 왜소해질 뿐,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치매에 든 노인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은 아니겠지만, 4각 철근콘크리트에 갇혀 텔레비전의 요란한 화면과 소리에 세월을 맡기면서 몸과 정신의 건강을 해친 건 아닐까. 젊어서 익숙했던 땅으로 돌아가면서 치매 증상이 완화되는 전희식 모친은 자신의 삶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는지 모른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고령사회로 치닫는 우리사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이렇게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얼마 안 가 젊은이 두 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된 지 오래고, 추세가 계속된다면 500년 이후 대한민국의 인구는 사라질 것으로 1차함수를 그리는 이도 있다. 아이를 낳는 일은 현재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삶에 여유가 없으면 아이를 낳기 꺼려질 테고, 경제 뿐 아니라 정신적 여유가 있다면 더 낳는데 큰 고민이 없을 것인데, 요즘 우리네 사정은 그리 녹록치 않은 게 분명하다. 지원책을 쏟아내도 출산율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고령사회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걱정은 공허하다. 노인의 삶과 무관한 탓이다. 체력과 의지가 남은 노인의 일자리가 거의 없는 현상만이 아니다. 한참 일할 나이에 명예퇴직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청년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는 제공되지 않는다. 고령사회 운운하며 아이를 더 낳으라는 정부와 대기업 산하 연구소의 요구에 살가운 정책적 배려는 없다. 노인의 처지에서 고려하는 정책은 보이지 않고 그저 건강검진과 서푼 어치 연금이 고작이고 행정은 실버산업에 미룬다. 노인 부양의 부담을 들먹이며 아이 더 낳기를 종용하는 기업의 본심은 예측되는 기업의 노동력 부족을 걱정할 따름이다.


은퇴 이후에 인생을 2모작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찾자는 제안이 고맙지만, 퇴직금이나 모아둔 자금이 두둑하지 않은 이에게 공허하게 들린다. 그렇다고 정부와 기업에 퇴직 이후의 삶을 의뢰할 수 없다. 인생은 은퇴 이후 2모작보다 첫걸음부터 자신의 일로 시작해야 바람직하다. 돈과 이목 때문에 원치 않은 일에 발목 잡히지 않았다면 2모작이 필요 없다. 나이 들어가면서 몸과 정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데 의기소침하지 않는다면 정년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자신의 길이라면 은퇴한 직장인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농부나 어부, 작가와 상인에게 정년은 없지 않은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는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젊었을 때로 한정되지 않는다. 나이 들면서 깊어지는 경륜은 실패를 줄이고 싶은 젊은이에게 인생의 지침이 된다. 나이 든다는 걸 인생의 마감으러 낙담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길을 가는 노인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가끔 뇌에 스쳤던 생각과 마주 앉은 이의 이름을 듣자마자 민망하게 잊곤 하지만, 계단 두 칸 씩 뛰어 오르지 못하고, 내려올 때의 어려움 때문에 젊은이와 높은 산에 오르는 걸 마다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주관, 삶의 확신을 유지한다면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아름답다.


인생의 2모작은 특별하지 않다. 젊었을 때 꿈이 용두사미처럼 줄었더라도, 새치가 백발이 되고 검버섯이 만개해도 인생은 얼마든지 계속된다. 다만 더 많은 인생을 살아갈 젊은이의 삶을 희생시키는 일은 자제하길 선배와 친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면서, 초로의 갑오년 새해를 맞는다. (작은책, 20141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2. 11. 8. 14:40

   내일을 위한 오늘의 휴식

 

갈무리하는 가을이다. 파란 하늘 아래 연한 갈색이 도드라진 감 한 송이는 가을이 어느새 깊어졌다는 걸 알린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 부지런히 탄소동화작용을 한 생명들은 휴식에 들어갈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단풍이 지고 으악새 슬피 울겠지.


가을은 차분하지만 때로 쓸쓸하다. 바빴던 일상을 정리하니 안정을 찾아 그런가. 불현 듯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싶다. 관객과 박수갈채가 사라진 극장에서 허전해진 연출가는 어디론가 급히 떠나고 싶을지 모른다. 을씨년스러운 무대는 말끔히 치워지고 곧 새 다른 배우와 연출가를 맞아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겠지. 무대를 벗어난 배우도 다음 연극을 준비하기 전에 충전이 필요할 것 같다.


파란 하늘에 황조롱이 선회하고 과수원마다 탐스럽던 열매를 다 땄을 때, 들판의 쥐와 산속의 토끼들은 지리산의 반달가슴곰이나 뒷산의 다람쥐처럼 토실토실하다. 겨울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황조롱이도 이맘때를 잘 넘겨야 한다. 겨울철에 건강해야 봄에 맘에 드는 짝을 만나 건강한 새끼들을 잘 낳을 게 아닌가. 삼라만상의 동물만이 아니다. 들판의 곡식도 그렇다. 곡식을 갈무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황금빛 벌판이 갑자기 텅 비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은 가을이지만, 자연에 조울증은 없다. 엉클어지던 수많은 생물이 일순간 조용해지지만, 다시 올 내일을 준비한다. 울긋불긋 단풍 든 잎을 떨어낸 가지들은 새로운 잎눈과 꽃눈으로 내년을 기약할 것이다. 5월 부끄러운 잎사귀를 펼쳤던 잎사귀들은 가을비에 휩쓸려 추레하지만 새 꽃과 잎을 위한 영양분을 준비해놓았다.


치매 노인은 추레하다. 쓸모없을까. 치매에 들었든 뇌출혈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든, 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정리하는 노인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인간 사회는 질서를 잃지 않는다. 치매는 질병일까. 치료가 필요하고, 치료로 나을 수 있는가. 최첨단 현대의학과 관계없이, 노인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는 생명의 소중함을 절로 느낄 것 같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던 부모가 늙어 제 진자리 마른자리를 스스로 만드는 건 생명이 잉태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숭고한 몸짓인지 모른다. 현대의학이 아무리 고쳐야 할 질병이라고 외쳐도, 치매에 든 노인이 치열했던 삶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젊었던 자신의 삶을 아무리 반추하려해도, 노인은 곧 젊은이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노인은 손주를 극진히 돌본다. 삼라만상의 내리사랑이다. 생물학은 건조하게 답한다. 생식능력을 잃은 개체는 생식능력이 생길 개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버섯이든, 모든 세포는 분열한다. 분열하면서 수를 늘리지만 다 자라면 더는 늘리지 못한다. 그렇게 버티던 개체들은 머지않아 삶을 정리할 텐데, 세포들이 분열만하는 게 아니다. 분열하는 중간에 꼭 쉰다. 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까. 아니다. 쉬는 세포는 다음 분열을 준비하며 생명현상을 지속한다. 그렇게 개체는 성장하고 생활하며 늙어갈 것이다. 세포가 분열만 계속한다면? 그 세포는 암이다. 암을 통제하지 못하는 개체는 삶을 잃는다. 휴식을 잃은 세포 때문이다.


모든 개체는 삶 속에 휴식이 필요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긴 원고를 쓰는 소설가도 한 장을 마치면 잠시 쉬야 한다. 여행도 다녀오고 사람도 만나면서 다음 장을 준비할 것이다. 뙤약볕에 허리 구부리던 농부들은 모내기 중간에, 갈무리 중간에 새참을 먹고 나무그늘 아래 낮잠을 늘어지게 청한다. 휴식이 없으면 모 뿌리가 고르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갈무리 즐거움이 온전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다음 추수까지 먹을 양식을 마련했다는 기쁨보다 힘겨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농회사가 맡아 키운 농작물은 살갑지 않다.


휴식이 충분하면 다음 일에 열정을 쏟는데 인색하지 않다. 여행을 다녀온 연출가, 책을 많이 읽은 배우, 산책을 즐기는 시인, 해가 지면 농구를 챙기는 농부들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준비할 수 있다. 하루에 서너 꼭지를 취재한 기자는 이튿날 푹 쉬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특종은커녕 독자의 원성을 살 수 있다. 피로한 몸과 마음으로 편중되지 않는 기사는 나오지 못한다.


성장호르몬은 소에 광우병을, 돼지에 구제역을, 닭과 오리에 조류독감을 안겼다. 비닐하우스와 농약은 농부에 하우스병을 안긴다. 하루 온종일 돌아가는 공장은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해도 사고를 피하지 못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지진과 쓰나미만이 폭발의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니다. 구미시 봉산리의 한 공장에서 불산이 터져 수확 직전의 농작물을 타들어가게 한 것도 충분하지 못한 휴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암세포는 개체의 몸에만 있는 건 아니다. 휴식 없는 사회에도 엄존한다. 불산에 타들어간 마을의 당산나무가 살아나길 바라면서, 건강한 내일을 위해 오늘 맞는 휴식의 가치를 새삼 생각해본다. (MS오토텍 사보, 2012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