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2. 7. 17. 15:45

  우리의 회색도시는 지독한 사막

 

하지가 지나 그런가, 덥다. 불과 두세 달 전만 해도 왜 이리 춥나 불만이었는데, 이젠 덥다. 6월 하순에 들어섰으니 분명 여름은 여름인데, 장마철 뒤 무더위처럼 더우니 견디기 어렵다. 기상대에서 관측 이래 가장 더운 6월의 날씨라고 귀띔해주려나.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요즘 계절이 하수상하다. 이제 관측 이래 어쩌고 하는 기상대의 언질이 더는 새롭지 않다. 식상할 정도가 됐다.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은 대개 명확하지 않지만, 예년의 6월 하순의 더위와 사뭇 다르다. 쉽게 지치게 만든다. 기상 캐스터들이 호들갑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요즘보다 더 더운 6월이 있던 모양인데, 왜 이번엔 유난하게 느끼는 걸까. 혼자 힘겨워하는 건 분명히 아니다. 혀를 내두르는 이, 주위에 적지 않다. 104년 만의 가뭄으로 산하가 타들어가도 고개만 돌리면 시원한 생수를 구할 수 있는 곳이 도시다. 전력 예비율이 위험수위에 다가간다고 정부와 전력당국에서 시민들을 겁박해도 실내공간은 시원하기만 하다. 생수를 되도록 피하고 집에 에어컨이 없어 그런가, 밖에 잠시 나가도 숨이 턱 막힌다.


전문가들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이상 발달해 중국에서 다가와야 할 저기압이 밀려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는데, 북태평양 고기압이 장마철에 이상 발달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지구온난화와 무관할까. 원인이 그리 간단치 않겠지만, 장마가 와야 할 때 오지 않자, 먼저 닥친 무더위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몸을 지치게 한다. 기상청은 7월 초에 장마전선이 북상한다고 예보했다지만, 걱정이다. 수돗물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야 어떻게 견디겠지만 농산물은 어쩌나. 콩을 비롯한 대부분의 밭작물이 흉작을 피할 수 없을 텐데, 아직 모내기를 못한 논도 있다. 그러고 보니 농작물만 문제일 수 없다. 농산물을 먹는 사람도 큰일 아닌가.


도시에는 생수 차갑게 해서 상점이 곳곳에 있고, 대부분의 집과 자동차와 건물에 냉방장치가 완비돼 있는데, 이 갈증 나는 날, 뙤약볕에서 하늘만 바라보는 농민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가까운 산에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낫겠는데, 요즘 같으면 바람조차 시원할 것 같지 않다. 사람이야 미지근한 물이라도 마실 수 있지만 산록의 나무와 풀은 갈증을 피할 방법이 없다. 농작물은 소방차를 총동원하는 관공서 덕분에 이따금 목을 축일 수 있다지만, 산록의 초목은 꼼짝없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논밭에 물을 주려 깊게 파놓은 시내는 어떨까. 물고기들은 이 가뭄을 이겨낼 수 있을까.


도시는 지독한 사막이다. 사막이라면 더위와 갈증을 감내하지만 도시는 아니다. 모래사막은 내리는 빗물을 바로 흡수하지만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는 다르다. 조금도 흡수하지 못한다. 뜨거운 바닥에서 바로 증발할 정도 이상의 비가 내리면 즉각 어디론가 흘려보내고 만다. 따라서 도시는 모래사막보다 지독한 사막이다. 모래사막은 비 내린 뒤 한동안 물을 머금는다. 내리는 빗물을 즉각 배제하고 마는 도시는 비가 올 때 흥건하지만 그치자마자 바싹 마른다. 모래사막에 잠시 고이는 물은 수많은 생물들의 갈증을 그 순간 풀어주지만 도시는 그럴 요량도 없다.


도시에 풍부한 물은 먼 곳에서 많은 에너지를 퍼부으며 가져왔다. 인천을 포함한 수도권의 수돗물은 팔당에서 가져온다. 생수는 더 먼 곳에서 온다. 강원도와 제주도에서 오지만 요즘은 남태평양의 피지나 남극에서 꽤 가져온다. 남극이야 연구 빙자하며 돈 많은 나라에서 파견된 인력이므로 걱정 없지만, 피지는 요즘 곤혹을 치러야 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상표를 달고 세계 각국으로 수출하는 생수 때문에 피지 인들은 마실 물이 늘 부족하다. 깨끗한 물이 사라지면서 수인성전염병에 시달린다고 생수 관련 다큐멘터리는 전한다. 수도권에 물을 공급하는 팔당도 사정이 비슷하다. 집의 증개축도 마음대로 못한다고 주민들은 불만이다.


도시의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를 휩쓸며 어디론가 낮은 곳으로 배제되는 물은 바로 강으로 흘러들지 못한다. 빗물만 들어가는 관을 따라 흐르다 강으로 가지만 빗물이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 가끔 아스팔트 위에 호수처럼 모여 교통을 방해하기도 한다. 작년 광화문에서 그랬다. 도로의 오염물질을 씻은 물은 바로 배제해야 한다. 따로 모아 정화해서 재활용하면 좋겠지만 바로 버린다. ‘생태를 참칭하고 직선으로 단장한 청계천의 용도가 거기에 있다. 굴포방수로도 그랬다. 김포평야가 부천의 중동과 상동에서, 인천의 삼산동과 계산동에서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쪼그라들면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빗물이 급증했다. 계양산 주변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어야 했는데, 경인운하가 방수로를 대신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방수로가 운하로 바뀌며 물을 6미터 깊이로 가둬놓게 되면서 배수와 홍수 완충 능력이 약화되었다.


빗물을 즉각 배제하는 도시는 적지 않은 가상수를 가져와야 한다. 그래야 사막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 쇠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려면 물 20만 리터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한다. 소가 물을 많이 마시긴 해도 그 정도로 들이키는 건 아니다. 사료를 가공하는데 들어가는 물, 사료에 들어갈 농작물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물을 포함했다. 광활한 사료용 농작물 재배 농장에서 사용하는 물까지 포함하자는 거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 우리는 그보다 20만 배의 물까지 수입하는 셈이다. 바로 가상수다. 쌀을 제외하고, 우리가 먹는 곡물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수입한다.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미국도 강수량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농장과 목장의 과소비 때문인지, 미국의 막대한 오갈랄라 대수층의 지하수가 고갈되고 있다는데, 미국은 언제까지 우리나라에 가상수를 수출하려 할까.


더우면 나뭇잎들은 기공을 활짝 열어 습기를 내보낸다. 그를 위해 나무뿌리는 지하수를 연실 흡수해야 할 것이다. 햇볕이 몹시 뜨거우면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는 현상은 황순원이 <소나기>를 발표했을 시절 이전으로 제한될 리 없다. 도시에도 낯설지 않았지만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칠갑이 되면서 소나기는 회색도시에서 종적을 감췄다. 도로 가장자리에 가로수를 근사하게 심고, 근린공원에 꽃이 화려한 조경수를 심었어도 지하로 들어가는 빗물의 양이 절대적으로 줄어들면서 나무뿌리는 물을 충분이 흡수하지 못한다. 경작지라도 남았다면 사정이 다르지만 창피하다는 듯 도시에 논밭이 보이면 매립해 건물을 세웠다. 아파트와 공업단지로 논밭이 사라지자 지하수가 부족해지고, 소나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 도시들은 농촌보다 확연히 덥다. 그래서 완충할 수 없게 된 빗물은 배제 대상일 따름이다.


배수 시설에 많은 돈을 쓰며 관리해도 홍수 피해가 발생하는 경험은 동서고금의 많은 도시들이 겪었다. 시행착오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게 한다. 결론은 자연스러움이다. 유럽의 도시들은 숲과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어 빗물을 완충한다. 낮은 곳으로 휩쓸리던 빗물이 공원의 저수지에 모여 지하수를 채우면 피해는 완충되고 나무들은 싱싱하게 자란다. 뙤약볕이 내리 쪼이면 나무들은 기공을 열어 증산작용을 하고, 뿌리는 지하수를 흡수한다. 저수지에서 물이 증발되니 도시는 그만큼 시원해진다. 건물과 자동차는 에어컨을 굳이 켜지 않아도 된다. 배기가스가 줄어드니 공기는 쾌적하고, 사람들은 나무그늘에 들어가 더위를 쉽게 피하니 냉수를 많이 찾지 않는다.


건물 옥상에 풀을 심으면 도시는 그만큼 덜 덥다. 빗물도 천천히 흐른다. 건물에 내리는 빗물을 따로 받아 활용하면 에너지 소비는 줄고, 가뭄은 그만큼 이겨낼 수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이 그렇다. 자동차가 많은 도심의 자동차 제한속도는 시속 30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자전거보다 빠르지 않다. 중앙 분리대에 나무를 충분히 심고, 가장자리를 자전거에 내주면서 도로는 폭이 좁아졌다. 시민들은 도심에서 느릴 수밖에 없는 자동차를 포기하고 자전거를 탔고, 시는 자전거도로와 차도 사이에 나무를 더 심어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자 나무가 늘어난 도시는 더욱 시원해졌고 시민들은 건강해졌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의 모습이 시방 그렇다.


그 정도로 모자란 걸까. 자동차들이 속도를 낼 이유가 없는 주차장에 잔디를 심은 블록을 깔자 바닥이 파릇파릇해졌다. 비가 내려도 급하게 흐르지 않는다. 도시 곳곳에 마련한 텃밭은 먼데서 가지고 오는 농작물의 양을 대폭 줄이는 훌륭한 녹지가 된다. 홍수는 그만큼 완충된다. 건강해지는 시민들은 제가 사는 도시를 여간해서 떠나려 하지 않는다. 정주의식이 높아진다. 삶을 지역에 뿌리내리면서 범죄도 줄어든다. CCTV가 번득이는 건물 뒷골목과 달리 녹색 공간이라면 낯모르는 이를 경계하지 않는다. 금방 친해진다.


     덥고 갈증나게 하는 6월에 전국의 저수지들은 바닥을 드러냈고, 4대강의 대형 보에 고인 물은 아메리카노 커피처럼 썩었다. 가뭄은 홍수를 부른다는데, 7월 장마가 예년보다 드세면 어떻게 될까. 장마 소멸되자마자 극성부리던 국지성호우는 작년 서울의 부자 동네 우면산 기슭을 휩쓸었는데, 인천을 포함한 전국의 도시들은 어떤 대안을 마련했을까. 드물게 텃밭이 생겨 그나마 다행인데, 우리 도시들은 여전히 지독한 사막이다. 이 더위에 사람만 목마른 게 아니다. 공원의 나무와 풀, 텃밭의 농작물도 심각하지만, 회색도시의 갈증도 무시할 수 없다. 녹색의 충분한 보습은 빠를수록 좋다. (푸른두레생협, 20127월호)

 
 
 

도시·인천

디딤돌 2010. 7. 14. 16:24

 

남쪽 지방에 장맛비가 예보된 지난 주말. 그린벨트로 뒤덮인 시흥시에서 요즘 유행하는 걷기에 나섰다. 그 길은 ‘늠내길.’ 13킬로미터의 늠내길은 작은 언덕을 여러 차례 아기자기 넘으며 수도권 그린벨트의 숲을 만끽하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쉬더라도 예닐곱 시간을 걸었으니 내심 힘겨웠을 테지만 서로 기운을 북돋던 10대에서 70대까지 30여 명의 일행은 모처럼 숲 사이에서 도시락을 꺼내 먹는 즐거움을 나누고 이마의 땀을 씻어주는 산바람에 환호할 수 있었다. 다음 일정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이 꾀꼬리와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걷는 즐거움. 그 즐거움을 인천과 가까운 시흥의 숲길에서 만끽하는 가운데 더욱 기뻤던 건, 한 꼬마가 우리에게 인사했다는 사실이다. 평소 걸을 기회가 거의 없는 도시인에게 늠내길이 지나치게 높거나 가파르지 않아도 10여 킬로미터가 넘으니 아무래도 버겁다. 수다 떨다가도 지치면 말없이 터덜터덜 앞만 보며 걷게 되는데, 그때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이를 피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귀찮아진다. 바로 그럴 때, “수고하십니다!” 인사 건네며 다시 활기를 찾는 사람들. 산길은 그래서 좋은데, 한 꼬마가 밝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넨 게 아닌가.

 

철근시멘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점철되는 도시라는 곳. 그 도시의 후미진 골목에서 시민들은 지나치는 이와 눈을 마주하기 극도로 꺼린다. 대도시일수록 그렇고 녹지가 부족할수록 그렇다. 바로 인천이 그렇다. 생각해보라.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 만으로 욕설이 횡행하는 곳이 어디인가. 적어도 녹지는 아니다. 숲길은 더욱 아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시의 뒤편이거나 술집에서 그런 폭력이 난무한다. 언어폭력에서 그치지 않는다. 문을 걸어잠가도 부시고 들어와 성폭력을 자행하고, 전화를 길게 건다는 어른의 핀잔에 칼부림하는 자들이 활보한다. 도시의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들은 서로 모른다. 군중 속의 외로움. 회색도시는 배려할 이웃이 없다. 삶이 뿌리 내리지 않은 익명의 공간이다.

 

익명의 도시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심 없이 도와줄 이웃은 가까이에 없다. 뼈대를 치우면 사람이 위아래 좌우로 사람이 빼곡한 아파트단지에서 주민들은 식구 이외에 마음을 함부로 터놓지 못한다. 공연한 오해살 수 있고 사기당할 두려움도 크다. 응급환자를 위한 기관이 있지만 살갑지 않고 사회복지 시설이 있지만 따뜻하지 않다. 운 좋으면 박제된 친절을 은행과 대형 상가에서 멋쩍게 만나지만 흔쾌하지 않다. 규정과 일정에 치이는 담당자들은 고객의 사정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시간과 편의를 제공하는 게 아니다.

 

어떤 생물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이 인간이건만, 요즘 사람은 내 옆에 있는 다정한 이웃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목표에 도달해야 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불안감을 조성하는 경쟁이 치열할수록,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다. 타인의 도움과 배려 없이 하루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으면서 내 옆에 있는 이웃의 희로애락을 공유하지 못한다. 속도와 목표를 숭상하는 도시가 그런 구조를 강요했다. 뒤처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불안감이 지배하는 회색도시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칠 가능성을 항상 끌어안고 살지만 이웃의 외로움과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으니 행복하지 않다.

 

낳은 아기를 산후조리원에 맡겨야하는 부부보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보살펴주는 부부가 더 행복하다. 엄마와 아빠가 보살피는 아이가 바쁜 부모 대신 할머니가 키우는 집의 아이보다 행복할 것 같다. 식구와 친척의 관심 속에 자라면서 동네의 언니와 오빠, 누나와 동생이 마을에서 어우러질 수 있는 아이의 행복이 그렇지 못한 아이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그런 동네라면 이웃에 삼촌도 많고 이모도 많다. 옛 이야기 들려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많을 것이다. 에어컨이 시원한 실내에서 국영수 과탐 사탐만 파다 엄마 아빠 없을 때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청소년에 비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클 게 분명하다.

 

사이코패스와 같은 범죄는 삶이 뿌릴 수 없는 토양에서 쉽게 배양된다. 거리를 감시하는 카메라가 도시의 안전을 도모하는 건 아니다. 시민의 삶이 마을에 뿌리내릴 수 있는 도시라야 한다. 이웃과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도시라야 시민들은 마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도시의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다. 어려울 때 도움을 나눌 수 있는 이웃과 함께 삶을 뿌리내릴 수 있는 마을을 도시에 만드는 거다. 규정에 의한 사회복지와 보상을 요구하는 친절이 아니라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며 개성을 배려하는 친절과 도움으로 따뜻한 안전망이 돈독한 사회를 만들자는 거다. 바로 녹색도시다.

 

이웃에는 앞뒤와 위아래의 집 식구만이 전부가 아니다. 내 삶을 지탱해주는 농민과 상공인, 세탁소와 배달 직원도 당연히 포함되어야겠지만, 맑은 산소를 제공하는 나무와 풀, 귀를 싱그럽게 하는 아파트 단지의 직박구리와 여름이면 찾아오는 숲속의 꾀꼬리도 들어가야 한다. 내게 익숙한 언어와 생활문화를 전해준 조상의 삶은 아니 그럴까. 주변의 생태계는 물론이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역사와 문화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 도시를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똑똑한 전문가의 멋진 아이디어를 밀어붙여 완성되는 게 아니다. 사회 구성원이 팔 걷고 함께 나설 때 만들어갈 수 있고, 그런 도시라야 후손에게 자부심으로 물려줄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낙후되었다면서 요구하는 개발은 주민들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 새로 지을 거대한 아시안게임 주경기장은 적자를 회피하기 위해 온갖 상업시설을 유치할 텐데, 빚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처지의 인천에서 시방 이웃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을까. 아시안게임 후 놀릴 가능성이 높은 선학동의 하키 경기장은 그린벨트를 반드시 허물어야 하나. 갯벌을 매립하고 들어선다는 151층 쌍둥이빌딩은 일대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울 텐데, 시민들은 덮어놓고 환영하란다. 송도11공구는 어렵게 둥지를 친 세계적 희귀종인 우리의 이웃, 저어새의 터전이건만 매립이 예정돼 있다. 강화 일원도 갯벌은 어패류의 산란장이자 수도권의 산소탱크이건만 조력발전으로 희생시키겠다고 벼른다. 녹지가 태부족한 인천의 유일한 외곽의 S자 녹지축은 고속화도로에 뜯기고 찢길 예정이란다. 이런 공간에서 나와 이웃의 삶은 뿌리내릴 수 없다. 남보다 많은 돈을 빨리 벌어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한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비싼 가격으로 팔아치우려 드는 건지, 세간에 ‘명품도시’를 운운하는 자가 많다. 아무나 들고 다닐 수 없는 명품 핸드백처럼, 화려하게 솟아오른 명품도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보장할 것 같지 않다. 두바이가 화려할 수 있었던 건 여권을 빼앗긴 채 착취되는 가난한 이웃을 그늘에 감췄기에 가능했다. 한데 그 화려함은 거품을 유지하게 하는 돈이 마르자 한갓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게 드러났다. 인천이 추구하는 명품도시의 진면목은 무엇인가. 내 건강한 삶을 보장해주는 시민 모두의 행복을 진정 보장하는 것인가. 내일의 인천시민인 후손의 삶을 뿌리내리게 배려하는가.

모두 잘 알듯, 인천은 대다수의 시민이 사는 마을 주변에 녹지가 아주 부족하다. 건물이 하늘을 가리고 아스팔트가 걸음을 차단한다. 외곽의 녹지와 이어지는 도심의 녹지축이 보잘것없는 만큼 마을을 찾아오는 생태계의 이웃도 매우 드물다. 이웃을 안심하고 만날 공간도 길도 빈약한 인천에서 시민들은 숨이 막힌다. 떠나고 싶다.

 

녹지가 필요하다. 부자들만 즐기는 골프장은 물론 아니다. 살충제를 뿌리는 공원녹지에서 그칠 수 없다. 소통에 목말라하는 이웃과 공유할 수 있는 녹지를 말한다. 다행스럽게 인천에도 제주도의 ‘올레길’이나 시흥의 ‘늠내길’과 같이 시민들이 걷는 이른바 ‘둘레길’을 만들겠다고 62지방선거에 당선된 지방자치단체장마다 약속을 했다. 어떤 개성을 가진 ‘둘레길’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 것인지 궁금한 만큼, 만드는 과정에 지역의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참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웃과 천천히 걷는 길은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까지, 인천시민의 삶에 뿌리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길은 광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웃을 느끼고 배려하면서 아이와 노인들도 안전하게 걸고 만나 속마음 털어놓을 수 있는 광장을 녹색으로 활짝 열어야 한다. 이웃의 개성이 배려되는 녹색의 광장과 둘레길. 다음 세대 시민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도시의 행정이 되어야 한다. 눈이 마주치는 낯모르는 이웃에게 어린 꼬마도 스스럼없이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인천을 위해. (인천in, 2010.7.?)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7. 10. 17. 11:48
 


강의가 마무리 될 즈음이면 학생들과 갈무리를 준비해야 했다. 싫던 좋던 생태적 가치를 들어야 했던 학생의 뇌리에 아스라하게 남은 고향의 정취를 끌어내도록 자극해 삭막한 회색도시를 어떻게 하면 이웃과 소통하는 마을로 바꿀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는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수업은 7, 8년 전부터 시들해졌다. 고향을 기억할 수 없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마을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진 거다. 요즘은 학생들과 고향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영 재미가 없다.


아파트를 전전해온 대학생에게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집안 어른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큰집이 대도시로 옮겨갔고,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들 고향은 이미 옛 모습이 아니다. 아버지가 미역 감았다던 시내는 저수지를 매립하고 들어선 공장의 폐수로 오염돼 복개된 지 오래고 개구리나 새 한 마리 구경하기 어렵게 농약에 찌든 들판에서 얼굴 기억하는 이웃을 만나기 어렵다. 소통이 없기는 고향도 마찬가지다. 속도와 목적지를 숭배하는 포장도로로 갈라진 마을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노인만 늘어난다.


농촌이 쓸쓸하다면 도시는 외롭다. 아기 울음소리는 시골에만 들리지 않는 게 아니다. 도시의 아기들은 산후조리원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운다. 뒤쳐지면 낙오되는 도시에서 바쁘기 그지없는 시민은 이웃의 사정을 배려하지 못한다. 익명이 북적이는 거리도 외롭지만 관공서와 상가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밭떼기 농산물이 넘치는 식품매장에서 ‘고객님’을 향한 점원의 인사는 요란스럽게 정중하지만 감시카메라가 번득이는 공간에서 기계 같다.


은평구는 서울에서 제법 고즈넉했다. 장마철 맹꽁이 소리는 걱정 많은 이의 심사를 달래주었고, 안개에 둘러싸인 북한산은 주민은 물론 지나는 이에게 그윽한 자연 경관을 베풀어주었다. 한데 그 자리를 헐고 들어서는 뉴타운은 은평구의 오랜 면모를 헝클어뜨릴 공산이 크다. 어쩌다 살아남을 맹꽁이는 소음에 묻힐 거고 북한산의 경관은 평수 큰 아파트가 독점할 거다. 그게 어디 은평구뿐이랴. 한데 그런 은평구의 한양주택은 어떤가. 평당 400만 원 이하에 팔지 않겠다는 현수막 내걸었다 600만 원을 받고 터전 떠난 주민들과 달리 개발 굴삭기의 폭력에 저항하다 쫓겨나고 말았다.


원조 군사독재 정권이 북한 손님 보기에 허전하다며 서둘러 지은 한양주택은 날림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모아 골목에 꽃을 심고 집을 수선한 주민들은 자신이 사는 공간을 정을 나누는 마을로 바꾸었고, 그런 만큼 이웃과 떨어지기를 거부했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를 전전하며 프리미엄 챙기는 회색도시 시민의 일상적 투기, 시쳇말로 ‘먹튀’(먹고 튄다는 뜻)와 근본이 다른 ‘정주의식’이 주민에게 오롯이 깃들었다. 태어난 곳은 아니어도 서울의 변두리에 터 잡은 주민들은 한양주택을 고향으로 여기며 뿌리내렸던 것이다.


투기에 휩쓸리는 시민의 삶은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하지만, 그들에게도 고향은 필요하다. 익명이 가득한 회색도시에서 어떻게 고향을 찾을 수 있을까. 흙을 딛을 수 없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에서 어떻게 이웃과 마음을 나눌 수 있나.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돈 없이 찾을 수 없는 찻집보다, 제 자식 비교하는 학부모 회의장보다, 민원이 등등한 집회 현장보다, 나무와 잔디가 푸른 마을 공원에서 이웃과 마음을 편안히 주고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문 걸어 잠근 아파트에서 지내던 시민은 이웃과 눈 마주하기 서먹하다. 얼굴 익히고 마음 나눌 기회를 어떻게 만들까. 두드리면 열린다. 도시의 특징을 역이용하는 방법도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담을 헐어 주택 사이의 소통을 끌어낸 사례가 대구에서 있었지만 담을 헐어낼 수 없는 아파트는 전화선으로 연결돼 있다. 이용자가 가상으로 만나는 인터넷을 활용해 마음을 공유하면 어떨까. 사는 곳이 떨어졌더라도 가상공간에서 친해지면 현실공간에서 만나고 싶어진다. 시민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가진 회원과 만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 외로움은 극복된다. 돈보다 우정과 환대로 상품과 서비스와 농작물을 회원과 나누는 지역화폐도 좋은 방법이다. 대전의 ‘한밭레츠’ 인터넷 사이트에 가면 그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현실공간에서 만나는 가상공간의 이웃들은 산과 들을 어울려 다니며 책이나 시를 함께 읽거나 텃밭을 일구고 같은 생각을 갈무리할 수 있다. 집안에서 외롭던 아이는 이웃의 언니와 누나와 동생들과 반갑게 어울릴 수 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보다 어른들이 들려주는 생생한 옛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공감하고,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사이에 소통이 자연스럽고, 종교와 계층과 세대 사이에 이해와 배려가 돈독해질 수 있다. 가상과 현실로 교차하는 도시 속의 고향, 이른바 ‘대안 공동체’다.


소통은 배려를 낳고 배려는 신뢰로 이어진다. 가상과 현실에서 신뢰를 쌓은 이웃은 우정과 환대로 소통할 수 있다. 계속된 기상이변 뒤로 회색도시에도 가을은 깊어간다. 도시에 대안 공동체를 만들면 회색도시의 이웃은 외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 겨울이 더 혹독해지기 전에 삶이 뿌리내리는 소통 공간을 회색도시에서 갈무리하는 거다. 소통을 멈추지 않는다면 가능하다. (야곱의우물, 2007년 12월호)

가상 공동체인 사이버 커뮤니티 실험도 많은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과 같은 고민,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