蔚山 素識/蔚山의 發展史.

β 베타 2012. 1. 30. 12:04

 

[2012 새해특집]우렁찬 발파음 ‘공업울산’의 신호탄
[2012년 연중기획]공업도시 50년, 이제는 글로벌 경제도시로
1. 특정공업지구 왜 울산이 선택됐나 -(4) 전국민 관심속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2012년 01월 29일 (일) 20:34:42 강태아 기자 kt25@ksilbo.co.kr
1962년 2월3일 매암동 납도마을서 기공식…박정희 의장 등 참석
3만여명 수송 위해 울산역서 장생포까지 네차례 무료열차 운행
“대규모 공단 시기상조” USOM 단장 발언에 멱살잡이 해프닝도

◇납도에서 열린 울산만 역사 이래 최대 잔치

울산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울산공업지구 설정 및 기공식은 1962년 2월 3일 토요일 오후 1시께부터 한 시간반 가량에 걸쳐 매암동 납도마을 인근 흰등산(흰디기산)에서 열렸다. 납도마을은 마을 앞바다에 납도(개구리섬)가 있어 불리던 이름이다.
   
▲ 남구 매암동 납도마을 인근 흰등산에서 열린 울산공업지구 기공식 장면. 사진제공=울산상의 30년사

울산만이 깊숙이 들어온 곳에 자리잡은 납도마을은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형성된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인근의 흰등산 일대가 6·25때 미군들이 포탄을 저장했던 곳으로 평탄작업이 돼 있어 기공식을 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공업지구 기공식대 발파장면은 납도 앞바다에서 진행된 것이다.

울산만 역사이래 최대의 잔치인 공업지구 기공식에 참석한 인원은 3만여명으로 추산된다. 61년말 울산읍의 인구가 3만3000명이었던 점으로 미뤄 볼때 당시 울산지역 주민 대부분이 기공식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주민들의 경우 구장이나 반장을 통해 참석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울산농고와 울산고, 울산여고는 물론 울산중, 대현중, 제일중, 청량중 등 학생 동원이 많았다.

당시 대현중 1학년생으로 기공식에 참석했던 박채은(66·국사편찬위 사료조사 위원)씨는 “얇은 교복 하나로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몹시 떨었던 기억이 난다”며 “2시간여의 사전 예행연습과 1시간 반 동안의 본행사가 진행됐다. 납도에선 다이너마이트 발파식도 열렸다”고 기공식 당시를 회상했다.

구경거리로 알고 몰려드는 주민들을 위해 당시 울산역에서 장생포역까지 네차례에 걸쳐 무료 임시열차가 운행, 쉬지 않고 군중을 날랐다.
   
▲ 기공식에 참석한 지역 주민과 학생.

사진제공=사진으로 보는 울산상의 40년


기공식에는 국가재건회의 박정희 의장과 10여명의 최고위원, 송요찬 내각수반 등의 정부각료와 샹바르 주한외교사절단장 등 각국 외교사절, 기업인 등 200여명의 내빈이 참석했다. 공단조성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새무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송요찬 당시 내각 수반은 이날 “국내 최초의 공업센터로서의 울산지구 종합건설계획은 경제재건에의 하나의 중추적 거점이 될 것”이라며 울산공업지구 지정 의미를 밝혔다.

이어서 박 의장이 울산공업지구 설정을 선포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합제철공장, 비료공장, 정유공장 및 기타 연관 산업을 건설하기 위하여 울산읍, 방어진읍 등지를 공업지구로 설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선언문 낭독 뒤 박 의장을 비롯한 행사 참석 내외 인사들은 공업지구의 성공을 다짐하며 기공의 첫 삽을 들고 이어서 발파의 스위치를 눌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을 기원하듯 발파의 폭음이 우렁차게 퍼져 나갔다.

이날 이병철 외자도입 주미 교섭단장과 이정림 구주 교섭단장 등 모두 26명에게 기념품으로 금메달이, 내빈에게는 은메달이 전달됐다.

이날 기공식뒤 경주 불국사 호텔의 연회에서는 김용태 고문과 미국의 유솜(USOM·미국의 대한(對韓) 원조기관) 처장 킬렌간의 멱살잡이가 벌어졌다.

킬렌의 “자본, 기술, 자원이 모두 부족한 한국이 이런 대규모 공단을 조성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라는 발언이 발단이 됐다.

이날의 해프닝은 3년 뒤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월남을 방문한 김용태 고문이 그곳 원조기관에서 근무중인 킬렌과 다시 만나는데 킬렌이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됐다.

기공식장에서 박 의장이 읽은 울산공업지구 설정 선언문 원본은 박 의장의 수석 전속부관이었던 울산 출신 손영길 전 준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가 몇년전 울산시에 기증, 울산시립박물관에 전시, 관리되고 있다.

강태아기자 kt25@ksilbo.co.kr

자료 도움 = ‘울산학 연구’ 울산학 연구센터

‘울산공업센터 반세기’ 울산 남구청



공업지구 지정 치사문 요지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생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榮盛)을 재현하려는 이 민족적 욕구를 이곳 울산에서 실현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민족 재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는 것이고, 자손 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이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수레 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기공식장에서 박 의장이 읽은 울산공업지구 설정 선언문 원본. 울산 출신 손영길 전 준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가 울산시에 기증했다. 현재 울산시립박물관에 전시, 관리되고 있다.

빈곤에 허덕이는 겨레 여러분! 5·16혁명의 진의는 어떤 정권에 대한 야욕이나 정체(政體)의 변조에도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로지 이 겨레로부터 빈곤을 구축(驅逐)하고 자손만대를 위한 영원한 민족적 번영과 복지를 마련할 경제재건을 성취해야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에서 궐기했던 것이다.

이 울산공업도시의 건설이야말로 혁명정부의 총력을 다할 상징적 웅도(雄圖)이며 그 성패는 민족 빈부에 판가름이 될 것이니 온 국민은 새로운 각성과 분발과 협동으로써 이 세기적 과업의 성공적 완수를 위하여 분기 노력해 주시기 바라마지 않는다.

울산공업지구 지정 선언문

대한민국 정부는 제1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합제철공장, 비료공장, 정유공장 및 기타 연관사업을 건설하기 위하여 경상남도 울산군의 울산읍, 방어진읍의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의 두왕리, 범서면의 무거리, 다운리 및 농소면의 화봉리, 송정리를 울산공업지구로 설정함을 이에 선언한다.

1962년 2월3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육군대장 박정희

 

1·2차 경제개발 거치며 중화학공업 기반시설 구축
2. 울산공업단지 50년 발전사 - (1) 울산 공업의 태동기
2012년 02월 05일 (일) 20:14:00 강태아 기자 kt25@ksilbo.co.kr
   
 
  ▲ 1967년 5월15일 제1차 정유시설 확장공사가 완료된 남구 고사동 울산정유공장. 이 때부터 5만5000배럴의 석유제품 생산이 가능해졌다. 왼쪽 위쪽이 장생포항이다.    사진제공=사진으로 보는 울산상의 40년  
 
1962년 울산공업센터의 출범으로 50년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 우리나라 자치단체로는 유일하게 연간 수출이 1000억달러를 넘는 도시로 발전했다. 이에 본보는 공업도시 50주년을 맞는 올해 ‘공업도시 50년, 이제 글로벌 경제도시로’라는 2012년 어젠다를 내걸고 연중기획물을 내놓고 있다.

지난 1월 한달간 경제계·학계·행정계 전문가를 초청한 좌담회(본보 1월2일자 보도)와 공업센터 지정 당시 현장의 주역들을 초청해 이야기를 들어보는 방담회(본보 2월3일자 보도)를 가졌으며 1부 특정공업지구 왜 울산이 선택됐나를 주제로 4차례 연재했다. 이어 2부 울산공업단지 50년 발전사를 태동기, 성장기, 발전기, 도약기로 나눠 4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1962년 울산 2차산업 종사 4% 불과
정유·화학·車 공장 등 들어선 1970년
34.5%로 종사자 9배 이상 급격히 늘어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 완벽한 기반 갖춰

공업센터 지정 원년인 1962년 울산의 산업구조는 1차 산업종사자가 전체 취업인구의 71.4%를 차지하는 농수산업 중심의 지방 소도읍에 불과했다. 당시 3차산업 종사자는 18.4%, 2차산업 종사자는 4%에 그쳤다.

종업원 고용규모로도 울산은 공업센터 이전에는 종업원을 3인 이상 두고 있는 공장이 42개에 그치고 이들 공장 종사자도 742명에 머물렀다. 당시 가장 큰 공장은 종업원이 160명인 삼양사 울산공장 이었으며 종업원 50명 이상인 공장은 삼양사 외에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 울산양조합자회사, 학성양조장 정도에 그쳤다.

그러던 것이 석유화학 등 울산 공업의 기반이 된 공장들의 1단계 시설이 완공되어 가는 1970년에는 울산의 1차산업 비중은 29.38%까지 내려가고, 2차 산업에 종사하는 비중은 34.5%로 9배 가까이 늘어났다.

1963년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는 미국 걸프사와 9개항의 기본협정을 체결하고 투자를 이끌어낸다. 걸프는 우리나라에 진출한 최초의 외국기업이 된다.
   
▲ 1967년 4월20일부터 사흘간 열린 제1회 울산공업축제. 중구 시계탑 사거리에 현수막이 설치돼 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1962~1966년)에 정유, 비료 등의 공장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면 1967년부터 1971년까지 2차 경제개발 계획기간은 석유화학단지와 항만건설 사업이 꾸준히 진행된 기간이었다.

영남화학, 한국비료, 동양나일론 등 12개 공장이 1960년대 후반에 준공되고 1969년 12월 석유화학공업단지 정지공사가 완료되는가 하면 한양화학, 대한유화, 삼경화성 등 석유화학계열 공장들의 공사도 시작된다. 1960년대 후반에 계획된 각종 공장들은 1972년까지 대부분 완공된다.

1962년 2억2000만원이던 울산의 공산액은 1964년 울산정유공장 준공뒤 18억7000만원, 1965년 109억9000만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울산공업센터에 건설된 공장이 본격적인 가동에 나서면서 1962년 26만달러이던 울산의 수출도 1966년 30배인 765만4000달러로 늘어난데 이어 1971년 2439만2000달러로 성장한다.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입지 선정

우리나라의 석유화학공업은 경공업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극일의 야망에서 비롯된다.

오원철 당시 상공부 국장은 “1965년 1월 박정희 대통령 연두 순시때 경공업 원료를 일본에서 수입, ‘고생은 우리가 하고 단물은 일본이 다 빼먹다’는 격이라는 보고를 하며 ‘석유화학공업이 완성되면 경공업이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립할수 있다’고 하자 잠시뒤 상공장관에게 추진계획을 짜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말했다.

정유공장이 준공된 이듬해인 1965년 석유화학산업의 핵심사업인 나프타분해공장 입지선정을 놓고 경제기획원과 상공부가 충돌한다.

경제기획원이 용수부족을 이유로 들어 울산 대신 경공업 공장들이 상당수 들어서 있던 인천에 나프타분해공장을 지을 것을 주장한다. 공장을 가동할때 자연 소모되는 물의 양을 일정 부분 계속 보충해 주어야 되는데 보충수의 비율이 10%나 되기 때문에 울산은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게 경제기획원측의 주장이었다.

이에 맞선 상공부는 보충수가 3%면 충분하다며 반박했다. 관련 자료를 찾느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당시 ‘일본의 화학과 경제’라는 잡지에 보충수 비율이 3%만 되면 충분하다는 글을 발견해 이를 근거로 경제기획원의 반대를 무마시켰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경제기획원 장관이 해임되고 상공부 장관을 경제기획원 장관 자리에 앉히면서 석유화학단지 입지 선정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일시에 제거된다.



◇자동차·비철금속 생산시설 건설도 이어져

1968년 현대건설 펄프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던 울산 염포만 북동연안 일대인 양정동 700번지 7만1890평의 부지에 자동차생산을 위한 기지가 건설된다.

공장건설 첫해에 614대의 차동차를 만든 현대자동차는 1969년 7832대의 자동차를 생산, 순조로운 출발을 예고했다. 하지만 1969년 9월 울산에 120년만의 기록적 폭우(446.5㎜)가 쏟아져 큰 홍역을 치른다.

한국알루미늄이 1969년 7월에 울산공장을 준공한 뒤 알루미늄괴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울주군 온산면 일대가 비철금속산업단지로 성장하는데 서막을 올린 것이다. 한국알루미늄은 당시 알루미늄 국내수요의 90%를 공급했다.

하지만 한국알루미늄은 과중한 타인자본 의존에 따라 어려움을 겪던 중 오일쇼크로 인한 전기료 인상에 따른 원가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적자기업이 되어 1971년 소유와 경영이 한국산업은행으로 넘어갔다.

공업센터의 발전상을 알리는 축제인 ‘울산공업축제’가 1967년 6월 처음으로 열렸다. 축제때 진행된 시가행진에는 모든 기업체가 참여했는데 삼양사는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에게 특별히 포장된 설탕을 나눠줬다. 비료회사는 역시 비료를 시민에게 선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강태아기자 kt25@ksilbo.co.kr

자료 도움 =‘울산학 연구’(울산학연구센터)

‘울산광역시사 산업경제편’(울산광역시사 편찬위원회)

■ 울산공업 태동기(1962~1971년)●주요 일지
1962년  2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6월 울산읍서 울산시로 승격
1963년  2월  국민은행 울산지점 개점
3월  울산정유공장 착공
5월  한국흄관 울산공장 준공
8월  태화강취수탑 준공
9월  울산상의 창립총회·울산항 개항장 지정
1964년  5월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 준공
12월  영남화학 기공식·선암댐 준공·한국석유 울산공장 착공
1965년 9월  한국후지카 울산공장 준공·한국석유 울산공장 준공
12월  사연댐 준공
1966년 3월  동양합섬 울산공장 착공·태화교 준공
5월  울산항 제1부두 준공
7월  울산특정공업지역 확장 고시
8월  한국알루미늄 공장 착공
9월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착공
1967년  1월  울산교 확장공사 준공
4월  한국비료 준공, 제1회 울산공업축제 개최·동양합섬 울산공장 준공 
8월  영남화력 G/T1∼4호기 준공
9월  공영화학 울산공장 준공, 선암정수장 준공
12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착공
1968년  3월  울산석유화학단지 종합기공식
4월  울산민간방송 개국
7월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준공
10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준공
12월  조선비료·태원물산 울산공장 준공
1969년  4월 울산비행장 기공식
7월  한국알루미늄 울산공장 준공
12월  울산어음교환소 설립·울산석유화학단지 부지정지공사 준공·쌍용양회 울산공장 준공·대암댐 준공
1970년  3월  울산공과대학 개교
7월  동서석유화학 착공
10월  울산-서울간 고속버스 운행·울산비행장 준공
1971년  4월  삼경화성·이수화학 울산공장 착공 
7월  대성목재 울산메탄올공장 착공

 

 

[2012 연중기획]정부 전폭 지지 아래 경제성장의 아이콘으로 부상
공업도시 50년, 이제 글로벌 경제도시로
2. 울산공업단지 50년 발전사- (2) 중화학공업 중심의 성장기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거치며 중화학공업 확충
현대車 첫 고유모델 포니 만들고 현대重도 첫 유조선 건조
수출 10년 만에 30배 이상 늘고 인구도 연평균 12% 증가

◇우리나라 경제성장 상징으로 부상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 울산의 공업은 기반이 마련된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여타 부대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 경제는 연평균 9%의 성장을 지속하는데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아래 울산의 공업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이 기간동안 석유화학공업은 기반 확충의 시기로 자동차공업은 확장과 부품공장의 집적화 시기였다. 온산공업단지에는 정유, 비철금속공업의 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울산현대조선소 준공을 비롯해 선경합섬, 한남화학, 삼양특수강, 동해조선, 진양화학 등이 준공됐다.
   
▲ 1972년 10월 대한유화(주) 울산공장 쪽에서 바라본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사진제공=사진으로 보는 울산상의 40년

1972년 1414억원이던 공업생산액은 1976년에 1조6579억원으로 12배 증가하며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72년 14.6%에서 1976년 29.3%로 증가한다. 1981년에는 공업생산액이 4조5451억원에 달했다.

수출은 1972년 6031만달러에서 1976년 7억745만달러로, 그리고 1981년에는 23억2195만달러로 늘어났다.

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수는 1975년 2만8911명에서 1980년 6만8907명으로 급증했다. 울산의 공업의 업종별 구성비율을 보면 1980년에 기계 67.8%, 화학 17.7%, 목재 2.6% 식품 1.8%로 중화학공업 중심의 구조 패턴을 보였다. 이를 산업별로 구분하면 1차산업 종사자는 21.2%, 2차산업 49.3%, 3차 산업 29.5% 등이다.

1977년 30만명 수준이던 울산 인구도 1981년 45만명 수준으로 연평균 12% 늘어났다.



◇국산차 고유모델 1호 ‘포니’

1974년 6월 시작(試作)차 1호를 완성한 현대자동차는 모델명을 공모에 나선다. 5만8000통의 응모작중 ‘아리랑’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았고 ‘유신’ ‘무궁화’ ‘새마을’ 등의 이름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현대적 감각을 살린 모델에 어울린다며 ‘포니(PONY 조랑말)’로 결정된다. 그해 10월 토리노국제자동차박람회에 출품된 포니승용차는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갖게된 우리나라 고유모델이다.

1976년 1월부터 포니가 본격 생산될 당시 포니의 국산화율은 90% 내외였다. 당시 최고속도, 등판능력, 가속능력 등 주행성능에서 타 차종보다 월등히 나아 시판 첫해부터 1만726대가 팔려 승용차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수출도 1976년 7월 남미 에콰도르에 6대를 수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1978년 8317대, 79년 1만9355대로 크게 늘어난다.
   
▲ 1974년 6월28일 현대중공업 선박 진수 장면.


종업원 100인 이상 자동차 관련 업체들은 70년대 많이 들어선다. 대일공업 두서공장과 덕양산업, 세종공업, 한국프랜지공업 1공장, 한일이화, 현대공업, 현대모비스 울산지점, 태성공업 등이 이 시기에 들어선 업체들이다.

자동차 생산대수는 1968년 생산 614대이던 것이 1979년에는 10만3835대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TV로 생중계된 초대형 유조선 명명식

울산현대조선소가 1972년 3월 조선소 도크를 파기 시작해 2년3개월만에 준공된다. 1974년 2월 15일 그리스 리바노스사로부터 주문받은 1호선의 진수식이 치러진다. 하지만 전날까지 준설되지 않아 배 밑바닥이 땅에 닿을 지경이어서 배가 도크밖으로 나올수 없었다. 왕회장(정주영 회장)의 주도로 밤을 세워 준설을 한 끝에 진수식을 무사히 마쳤다. 당시 진수식때에는 26만t급 선박을 운전할 수 있는 선장이 없어 외국에서 단 한번의 작업을 위해 선장을 초빙했다. 그해 6월 28일 진행된 명명식은 TV로 전국에 생중계 됐다.

우리나라 중공업의 메카로 70년대 초반 수학여행의 필수코스가 된 현대중공업에는 73년 한해 10만4597명의 방문객이 다녀 갔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연간 40만명을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잡는다.

1976년 20세기 최대의 역사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수주금액 9억4000만달러는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공사에 쓰인 10층 높이의 철구조물을 울산에서 제작해 6750마일의 뱃길을 뚫고 19차례에 걸쳐 현지로 수송됐다. 1978년에는 지금의 현대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꿔단다.

청구조선공업사(현 세광중공업)는 70년까지 트롤선 위주의 소형 어선을 건조하다가 70년대 들어서 포경선, 연근해 어선 등을 건조했다. 1974년 설립된 동해조선(현 한진중공업)은 남구 용잠동에 화학물 운반선 건조를 전문으로 하는 울산조선소를 기공, 1976년부터 탱커, 다목적화물선 등을 건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기술력 부족으로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다가 경영상태 부진으로 81년 대한조선공사에 인도·관리된다.

1975년 4월에 탄생한 현대미포조선은 독자 도크를 보유하지 못하고 현대중공업 건조도크를 사용하다가 1977년 도크 2기·78년 12월 도크 1기를 추가해 본격적인 선박수리 및 개조사업에 나선다.



◇석유화학공업의 수직계열화 완성과 비철산업

1972년 합동준공식을 가진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내 공장들 사업주체는 석유공사와 한양화학, 동서석유화학, 이수화공, 대한유화, 한국합성고무, 삼경화성, 석유화학지원공단 등 이었다.

울산석유화학콤플렉스의 준공으로 그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석유화학의 원료를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고 개발국으로서는 개발이 어려운 석유화학공업을 성공리에 완수해 경제발전의 저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원료에서 최종제품에 이르기까지 계열적으로 생산하는 석유화학콤플렉스를 보유한 동남아 두번째 국가가 된 것이다.

1973년 온산에 비철금속 제련기지 건설계획이 수립됐다. 78년 고려아연 연산 5000t 규모의 아연제련소를 준공된다.

1979년 전기동 8000t 생산규모의 온산제련소(현 LS니꼬 동제련)가 준공됨으로써 우리나라는 동, 알루미늄, 연, 아연 등의 4대 비철금속 제련설비를 모두 보유하게 된다. 1980년 7월 풍산금속은 온산비철금속단지내에 연산 10만t 규모의 종합신동공장을 준공한다. 대량생산, 대량판매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강태아기자 kt25@ksilbo.co.kr

자료 도움= ‘울산학 연구(울산학연구센터)’

‘울산시사 산업경제편(울산시사 편찬위원회)’

■ 1972~1981년 주요일지
1972년 


2월  대한아스팔트 울산공장 준공 
3월 현대조선소 기공식·한성기업 울산공장·국제탱크터미널 준공
5월 삼양특수강 울산공장 준공
10월 울산석유화학단지 종합준공식(8개사)
1973년



1월 공영화학 울산공장 한국프라스틱 합병
5월 경남은행 울산지점 개점 
6월 미포항 개항장 지정·산언은행 울산지점 개점
8월 제일은행 울산지점 개점
9월 진양화학 울산공장 준공
1974년



5월 선경합섬(현 SK케미칼)울산공장 준공
6월 현대조선 1·2호선 명명식
7월 울산무기화학 공장 착공
8월 울산탁주공동제조장 준공
12월 한국에탄올 울산공장·한국카프로락탐 울산공장 준공
1975년



5월 울산­부산간 고속버스 운행
6월 울산 시민의 날 제정 공포
9월 미원상사 울산공장 준공
10월 삼지화학 울산공장 준공
12월 진양화학 울산공장 준공
1976년



1월 대덕공업 공장 준공 
3월 울산지방항만관리청 개청 
5월 한국불화 울산공장 착공
10월 대농유화 울산공장 준공
12월 한국감정원 울산지점 개점
1977년

6월 코오롱유화 울산공장 준공
9월 그랜드호텔 개관
12월 울산지방해운항만청 개청·중소기업은행 울산지점 개점
1978년


3월 울산정유공장 나프타분해공장 준공
4월 울산석유화학 공장 준공
11월 현대엔진 엔진공장 준공·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준공
12월 울산알미늄(현 효성금속) 공장 준공
1979년

10월 온산공업단지협의회 설립
11월 한주 제염공장 준공
12월 온산동제련 준공
1980년


5월 한국은행 울산지점 개점
7월 풍산금속 온산공장 준공
8월 럭키 온산염료공장 준공
11월 태화호텔 개관
1981년
 
2월 오우션호텔(코리아나호텔) 개관
11월 울산투자금융 개점
12월 울산중소기업협의회 창립총회

 

 

 

 

[2012년 연중기획]3대 주력산업 수출비중 1980년 44.9%서 1990년 64.4%로 증가
2. 울산공업단지 50년 발전사- (3) 3대 주력산업의 발전기
공업도시 50년, 이제 글로벌 경제도시로

자동차 산업 급성장…규모 커지고 부품업체 집적도 활발
석유화학업계는 ‘3저현상’ 힘입어 설비 신증설 붐 일어나
가파른 성장 거듭하던 조선업, 노사분규에 발목 잡히기도

◇민간주도로 경제체질 재편

1960·70년대 저돌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울산의 공업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개발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형평에 관심을 갖게된다. 민간주도의 개발 진행으로 경제체질도 재편된다.
   
 
  ▲ 1983년 현대중공업은 66척의 선박 수주를 이끌어 내며 세계 제일의 조선업체로 부상한다. 사진은 현대중공업 도크. 사진제공=사진으로 보는 울산상의 40년  
 

자동차산업의 급성장으로 자동차 생산규모 확대와 부품업체의 집적이 활발하게 진행돼, 효문지역에 관련 중소기업 43개사가 입주해 자동차 부품 산업단지를 이룬다.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의 주도 업종도 석유화학에서 자동차와 조선 중심의 기계장치 공업으로 변화하면서 명실공히 국내 최대의 중화학산업단지로 발전한다.

1980년대 초반 울산 제조업 고용은 자동차, 조선 등 운수장비업에 특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1986년 운송장비업과 화학업 종사자수는 제조업 고용의 64.1%에 이른다. 울산지역 제조업의 부가가치율은 1982년 26%에서 1991년에는 32.8%까지 높아진다.

주력산업의 수출비중은 1980년 자동차 5.1%, 선박 32.4%, 석유화학 7.4%, 철강 및 구조물 16.5%에서 1990년에는 자동차 24.1%, 선박 23.3%, 석유화학 17%, 철강 및 구조물 3.5%, 컨테이너 및 기계제품 12.1%, 전자제품 7.4%로 바뀐다.



◇‘황금알 낳는 거위’ 석유화학산업

석유화학기업들의 경영수지가 악화되자 1980년 걸프에 이어 1982년 한양화학과 합작했던 다우케미칼 등 외자기업들의 철수가 잇따른다. 정부출자기업의 민영화가 빠르게 진행, 1984년 한국에탄올이 한국알콜산업에, 울산석유화학이 동부그룹에, 1987년 석유화학지원공단이 대한유화 등 16개 기업으로 주도권이 넘어간다.
   
▲ 1981년 3월 울산상의의 건의로 새마을열차가 울산을 통과하게 된다. 사진은 개통식 장면.


1980년대 중반에는 석유화학업체들이 연평균 20%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이 시기 석유화학 산업의 호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묘사된다. 1980년대 중반 3저 현상이 나타나자 석유화학 업체들의 신증설이 앞다퉈 진행된다.

유공(현 SK이노베이션)에 이어 1980년 상업가동에 나선 S-OIL은 1981년 윤활유 공장 가동에 나서 울산이 정유업의 가장 중요한 생산기지로 입지를 다지는데 힘을 보탠다.

유공은 1991년 1조5000억원이 투입된 울산콤플렉스 9개 신규공장의 합동 준공으로 석유개발에서부터 석유화학 하류부문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수직계열화를 달성, 종합에너지·화학기업으로의 위용을 갖춘다.



◇자동차 업계의 숙원 미국 시장 진출

현대자동차는 1986년 1월 엑셀 5도어 차량 1050대를 울산항을 통해 미국으로 수출, 한국 자동차업계의 숙원이었던 미국시장 진출에 성공한다. 수출대상국은 1988년 72개국으로까지 늘어난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1월 현대자동차는 전차종 수출 100만대를 돌파하고 단일 차종으로는 국내 최초로 엑셀차량이 생산 100만대를 넘어선다. 또 6월에는 해외 시장을 겨냥한 최초의 수출전략형 고급중형차 소나타(SONATA)가 탄생한다.

1980년대 중후반 자동차산업 발전을 이끈 원동력은 내수보다는 고유모델 승용차의 대량 수출이다. 1980년 1만6000대 가량이던 현대자동차의 수출은 1991년 22만5393대로 급성장한다.

현대자동차는 1989년 업계 최초의 해외현지공장인 캐나다 브로몽 공장을 준공한다.

1990년 연산 24만대 규모의 제3공장 준공으로 울산공장의 생산능력은 100만대를 넘어선다.

1980년대 생겨난 자동차 부품업체는 한주금속, 한일튜브, 삼주기계, 두올상사, 동희산업, 동남정밀 등이다.



◇현대중공업, 1983년 세계 제일 조선업체로 부상

조선업의 1980년대는 부침이 심한 시기다. 1981년 대한조선공사에 관리가 맡겨진 동해조선은 1989년 한진그룹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한진조선으로 이름을 바꾼뒤 1990년 한진중공업 흡수합병, 한진중공업 울산조선소라는 이름으로 중형 컨테이너선 신조와 영도조선소 블록 공급 등의 역할을 맡는다.

방어진철공조선주식회사는 1980년대 후반 화학운반선 건조에 나서는데 이것이 소형화학운반선 건조의 원조로 기록된다.

현대중공업은 80년대 초반 조선 미니붐에 힘입어 1983년 66척 207만G/T의 선박을 신규 수주, 세계 수주량의 10.6%를 차지하며 세계 제일의 조선업체로 부상한다. 그해 제작한 살물선 ‘널바나호’가 세계 최우수 선박에 선정된 뒤 현대중공업은 8년 연속 세계 최우수 선박을 건조한다.

1987년 6월 민주화 선언을 계기로 우리나라 산업사상 초유의 대규모 노사분규가 전 산업·전 지역을 휩쓴다. 현대중공업의 건조량도 그해 13.8% 감소한다.



◇도약기 맞은 비철산업

자동차, 전자, 기계공업의 성장으로 정밀소재 수요가 확대되면서 제련설비능력 확장이 이루어지는 등 제련산업이 도약기를 맞는다.

1982년 한국광업제련은 온산동제련을 합병해 LG계열사가 되면서 1사 2제련소 체제를 구축한다. 온산제련소는 88년 연 14만t의 전기동을 생산한다. 1989년에는 럭키금속(현 LS-NIKKO동제련)으로 이름을 바꾼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도 확장·증설을 통해 1987년 연간 16만t의 전기아연을 생산할 수 있게 되고 풍산금속은 1988년 연산 10만t 규모의 제2신동공장을 준공, 단일 업체로는 세계 최대의 신동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1985년 대한알루미늄의 경영권이 현대가 확보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듬해 대한알루미늄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40%를 기록한다. 하지만 1988년 전기료 할인 혜택이 중단되고 국제 가격이 하락하면서 적자생산을 하다가 1990년 3월 공장 가동을 중단으로 국내 유일의 알루미늄 제련공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강태아기자 kt25@ksilbo.co.kr
자료 도움= ‘울산학 연구(울산학연구센터)’
‘울산시사 산업경제편(울산시사 편찬위원회)’

◇주력산업 발전기(1982~1991) 주요 일지

1982년 3월 회야댐건설사업소 설치, 6월 이화 준공, 11월 현대미포조선 제2공장 준공·영풍식품 준공·경기화학 준공.
1983년 3월 제일증권 울산지점 개점, 12월 울산상의 신축회관 준공.
1984년 5월 어음교환 광역화 시행, 12월 한국방송공사 울산방송국 개국
1985년 1월 럭키 폴리에티렌공장 준공, 2월 현대자동차 승용차공장 확장 준공.
1986년 4월 영우화학 공장 준공, 5월 대한알루미늄 합금공장 준공, 6월 코리아나호텔 개관, 9월 회야댐 통수식.
1987년 1월 장원산업 설립, 3월 경남은행 울산지역추진본부 설치, 4월 럭키 온산 에폭시수지공장 준공, 6월 울산석유화학지원(주) 창립, 10월 동양포리머(주) 설립.
1988년 1월 동양나이론 제2공장 준공, 6월 신한종합비료 공장 준공,
1989년 3월 제1회 울산상공대상 시상·농수산물도매시장 건립 기공식, 7월 (주)금양 온산공장 준공, 10월 서울­울산 새마을호 운행.
1990년 4월 동울산세무서 개청, 5월 대구은행·부산은행 울산지점 개점, 9월 울산농수산물도매시장 개장, 10월 울산신역사 준공.
1991년 2월 한국오츠카 온산공장 준공, 11월 한국비료 연관공장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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