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미소친구 2015. 7. 3. 01:57

1985년이었다.

아이아빠의 직장 이동으로 우리가족은  기장읍에서 영광으로 영광에서 광양으로 1985년에 이사를 왔다.

정말 오래 살아온 곳이 광양읍이다.

30년이나 훌쩍 넘었으니 정말 오래 산것이다.

내가 태어난  고향에서는 18세까지 살았고 서울에서 1년 살다가 덕소로 가서  살았고 또 기장으로 가서 살았다.

아마 어쩌면 내 인생은 모두가 덤으로 살아온 셈이기도 한 것같다.

덤이라면 무조건 감사할만 한테 감사할 일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 간의 삶속에는 무지한 종교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투병생활이 10 여년 동안이나 길었으니 객지에 나와 돈도 벌어 놓은게 없이 부모형제의 짐이 되기도 한적도 있었다.

 

성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지니 때가 되면 거두리라.. 이런 구절... 내가 참 좋아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금만 선을 베풀었더라도 그게 갚아지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가차없다.

기다리는 미덕이 없고 참아 주는 미덕이 없더라.

 

광양숲의 나무들을 보면서 그런생각을 한다.

저 나무들이 400 여년을 살아오면서 어찌 평탄하게만 살아왔을까나.. 생각해 본다.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모진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꿋끗히 한자리를 지켜온 저 나무들을 보라.

나의 종교 생활도 참 기막힌 사연은 많았지만  너무 어이 없었던 것은 수준 이하의 목회자라는 자들이다.

내가 진정 갈곳없이 병들어 힘들 때 내 몰라라 하던 목회자들이 병이 낳고 건강을 회복하자 그저 돈돈 돈이나 충성이나 요구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너무나 많은 회의를 느끼곤 했었다. 솔직히 목회자라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의 그들을 보면서 의무감에서 억지로 교회를 간적도 있었다.  목회자라는 이름도 붙여 주기가 아까운 그년들 나를 자른년들이다. 진정 나를 돌봐 주던 사람은 부모형제들이건만... 부모형제에게 갚을 겨를도 없이 교회에서는 너무 많은 봉사를 요구했다. 개인의 어려운 일 앞에서는 내 몰라라 하면서 충성만 요구 한다고 되남.

내 친여동생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죽었는데도 장례식에도 못가게 하는 그런년이 목회자로 아직도 단상에서 설교랍시고 나불거리고 있다.

못가게 해서 간 터라서 장례도 다 마치지 못하고 왔는데 나에게 고함을 치면서 자기는 어머니 돌아가셔서도 안갔다고 했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가장 기초적인 인간의 도리마져도 모른것들이 하나님을 위한다니 어불성설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기대했다. 이젠 내가 너희들을 버려주마.

 

나는 이제 내마음의 저항과 함께 그들의 의해서 종교생활을 접었고  두번 다시 이젠 종교는 택하고 싶지가 않다. (장혜ㄱ.조승ㅇ. 니들이 나를 퇴교시켜 놓고 빌지말고 차라리 나쁜년들이라고 하라고 말한 것 기억하니? 그래도 나쁜년들인지는 알더구나. 이 나쁜년들아.. 이제사  장혜ㄱ 너가 원했던 그말 돌려주마 이 나쁜년들아... 니년들은 그래도 단상에서 양심의 법을 외치고 있니? 참 가소롭다.)

 

나무를 괴롭히고 나무가 병들었을 때는 발로 차더니 나무가 모진풍파를 이기고 잘자라니까 마치 자신이 길러준 것처럼 자신의 나무라 하는거나 다를게 없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이젠 나는 종교는 독약처럼 생각하리라.

더이상 하나님은 종교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똑똑히 알아라.

차라리 자연인이 더 좋다. 더 인간적이다. 더 하나님과 가깝다.

자연인으로 저 나무들처럼 살고 싶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며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시원한 그늘 아래서 쉼도 즐기면서 행복도 느끼면서 그렇게 사람답게 살아가리라.

이젠 저 나무들처럼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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