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조직신학/조직신학 기독론

예수사랑 2010. 3. 25. 15:34

단성론(單性論)과 단의론(單意論)

 

 

 

Ⅰ. 서론

 

단성론과 단의론은 칼케톤 종교회의 이후의 기독론 논쟁의 일파(一派)들으로서 단성론이란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교리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의 본성만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단의론은 정통교리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오직 하나의 의지만을 가졌다고 주장했던 이론으로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있다고 확고하게 설정된 교리를 기반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했다.

이제 본 논고에서는 이러한 단성론과 단의론의 어원과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피고 그들의 교리의 주장에 대한 찬반에 대하여 논해 보고자 한다.

 

Ⅱ.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

 

1. 어원 및 역사적 배경

단성론은 기독교 교회 내의 일파(一派)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칼케톤 공의회(AD 451)에 의하여 하나의 표준으로 공식화 된 교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교리를 잘못되었다고 여겼던 사람들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한 본성”을 그들의 신앙의 표어으로 여겼다.

단성(μία φύσις, 單性)이라는 말은 한 본성 또는 보다 정확하게 그 안에 고통과 제한된 지식 아래 있음을 본래 지니고 있는 로고스의 단 하나의 반식적인 본성을 말한다. 이러한 단성론을 옹호하는 단성론자들은 칼케톤 공의회의 기독론 교리의 결정 후 칼케톤 신경에 대한 반대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레오 감독의 편지와 칼케톤 공회의의 교리 결정은 두 얼굴을 가진 우상으로 여겨져서 시릴의 단성론을 다시 옹호하였다.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므로 육이 된 한 본성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성은 그 자체로는 인격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기독론의 추종자들은 칼케톤 신경은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들의 통일성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파의 대변자들은 칼케톤 신경을 거부하고 그 신경에 대항하여 백여 년에 걸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칼케톤 신경의 반대 세력들이 득세하여 정통파를 능가하게 됨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일부와 아르메니아 지방에서는 단성론자들이 우세하여 황제들이 협박과 양보를 하여도 그들의 정통파에로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 로마제국의 지방들은 점점 제국과 제국 수도에서 멀어져 갔고, 단성론자들은 민족성과 결합하여 독립적인 민족 교회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오랜 격렬한 투쟁 후 단성론자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때는 바실리쿠스 황제가 등극한 475년이다. 바실리쿠스는 그들의 고소를 받아 칼케톤 신경을 자신의 476년 회람에서 거절하였고 대략 500명의 감독이 문서에 서명을 했다. 그의 사위와 계승자 제노는 문제들을 타협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482년 소위 헤노티콘이라고 명명한 그의 유명한 칙령은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유티케스주의자들을 정죄했고 시릴의 12 저주문을 받아들이고 칼케톤 신경을 무시하고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2. 단성론의 대변자와 반대자

 

1) 안디옥의 세베루스(456-538)

 

안디옥의 세베루스는 512년에 안디옥의 대주교가 되어 강하게 단성론을 대변하였다. 518년에 내어 쫓기워 알렉산드리아로 갔으나, 여러 글을 통하여 단성론을 다루고 니케야 신경이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을 충분히 표현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세베루스는 성육신을 영원한 로고스의 마지막 구원사적 상태로 보았다. 즉 삼위일체의 제 2 위격이 우리에게 내려오사 사람이 되셨다.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한 인간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로 들어오셨다.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연합하여 두 본성으로부터 한 그리스도가 나왔다. 그러나 각 본성은 자기의 고유한 본성을 가진다. 이 본성의 특징은 혼합 없는 합일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았다고 세베루스는 주장하였다. 세베루스는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들을 인정하여 두 본성들을 말하는 것은 우리와 네스토리우스 간에 공동적인 것을 이름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로고스와 육의 차이를 악기까지 하는 것이라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한 주로 한 얼굴로 한 위격으로 한 본성으로 나타나셨다. 즉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이런 견해는 합일 후에도 오직 육이 된 로고tm의 한 본성만을 인정하고 또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즉 연합 후에는 본성의 분리를 거부하고 한 본성과 신인 위격을 고백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시릴의 용어대로 위격을 따른 연합은 본성들의 구체적인 통일로 특징 지워졌다. 그 후에는 그리스도도 구체적인 존재이고 사람이 된 하나님, 한 얼굴, 그리고 한 본성 혹은 한 위격이다. 그래서 바다 위를 걸은 데서 나타난 것처럼 한 본성과 한 에너지가 예수의 행동들에 나타났다고 하였다. 여기서 두 본성들을 어떻게 든 나눌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신적인 본성이 발과 함께 또 인간 본성이 물 위에로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통일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본성에 어떤 것이 속하고 어떤 본성에는 어떤 것이 속한다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본성은 우시아(ουσια)처럼 그 자체 안에 많은 위격들을 포함하는 것과 같이 일반적인 것을 지시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한 로고스의 한 위격, 로고스의 육이 된 한 실체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개별존재의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연합을 통하여 발생한 한 본성 혹은 실체인 것이다. 교부들이 두 본성들을 말하였지만 지금의 발전단계에서는 두 실체들을 말함은 두 인격 혹은 두 얼굴에 이르게 된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두 실체는 두 인격이기 때문이다.

세베루스의 견해에 의하면 두 본성들은 결합을 통해서 구체적인 본성이거나 한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한 신인적인 활동에서 역사하는 한 본성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베루스는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보다는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그의 성육신 교리에 있어서는 이 성육신이 아버지에 의한 로고스의 영원한 출생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로고스는 아버지를 떠남 없이 인간이 되셨다.

이러한 확신에서 단성론자들은 자기들이 인간 존재에로 완전히 들어온 그리스도에 의해 둘러싸인 것으로 느꼈다. 또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로고스가 인간이 되시면서도 아버지를 결코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현존에서 사는 신비주의 곧 그리스도 신비주의가 가능해졌다. 그리스도론은 인간 구원의 근거로 여겨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본질로는 하나이고 로고스로는 아버지와 본질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육체가 언제 불멸성을 얻었느냐에 대하여 세베루스는 부활 시에 그의 육체가 불멸성을 얻는다고 답하였다. 대다수의 단성론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다. 이 견해에 대한 반대자들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세베루스주의자들은 부활 전에는 가식적인 것을 경배하였다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세베루스주의자들은 이 견해는 가현설이어서 그리스도도의 몸은 외양적 몸이라고 가르친다고 반대하고 투쟁하였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칼케톤 신경이 다시 힘을 얻게 될 때 레오의 편지와 칼케톤 신경을 배척했기 때문에 이단이 되었다.

2) 비잔틴의 레온티우스(485-543)

 

레온티우스에게 있어서 칼케톤 공식은 교회가 공포한 범할 수 없는 교리였다. 그러나 그는 네스토리우스자우의자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 세베루스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칼케톤 신경을 변호할 때 교리적, 종교적 고려보다는 철학적 관념들에 의해 교리를 해설하는 것에만 주목하였다. 그는 실체, 유, 종, 개별 존재와 실체를 구성하는 속성들과 불가분리적인 우연성과 분리할 수 있는 우연성들을 다루었다. 그리하여 그는 최초의 스콜라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 2차 실체의 개념에 최우선의 자리를 줌으로서 칼케톤 신경을 정당화하였다. 그는 아폴리나리우스와 시릴이 제시한 선들을 따라 칼케톤 정통주의를 세웠다. 오히려 시릴의 신학을 강조하고 우선권을 줌으로 그렇게 하였다.

레온티우스는 스키디아 수도승의 하나라고 하나 최근 조사로는 맞지 않는다고 보고 그는 단성론의 반대자이지만 오리려 하나님 수난 공식을 받아들이고 안디옥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네스토리우스 신학에서 멀리 떠났고 이 신학은 당대 교회 신학자들의 견해를 대변하여 제 5차 공의회에서 교리화 되었다.

3. 저스티니안 1세(527-565)의 교회정치

 

저스티니안 1세는 단성론자들에 대하여 무력진압이 효과적이라고 즉각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은 그의 아내 테오도라의 영향을 받아서 온 것이다. 그렇게 다른 정책을 사영하여 단성론적인 분리주의자들을 교회에서 화해시키려고 했다. 그는 단성론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안디옥 학파의 교리들을 반대하는 어떤 행동들을 취했는데 안디옥 학파는 단성론자들을 유별나게 미워했다. 따라서 544년에 소위 3장(Three Chapter)이란 칙령을 내려 그 안에서 다음을 정죄하였다. ① 몹슈스티아의 테오도르와 그의 저서들 ②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방어하기 위하여 시릴을 반대한 키로스의 에오도레의 저서들 ③ 네스토리우스의 친구인 에데사의 이바스의 편지 이 칙령은 동방 감독들의 대다수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받아졌다. 동의하기를 거절했던 소수는 그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일리리아, 달리티아 그리고 북아프리카 감독들은 그 칙령을 확고하게 반대하였다. 이 저항은 소위 3장 논쟁을 발생케 했는데, 교리적인 관심은 전혀 없는 이 논쟁은 8년 동안이나 교회를 소동시켰다. 이 논쟁을 총회에서 종식시키자는 것이 마침내 결정되어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있었던 제 5차 에큐메닉 공회의는 황제의 칙령을 재가하고, 칼케톤 회의를 인정하였고, 오리겐을 정죄하였으며, 그리고 신수난의 교리를 보충으로 채택했다.

 

4. 제 5차 에큐메닉 공회의의 소집 : 5차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저스티니안 1세는 칼케톤파와 단성론파로 나누어진 제국교회의 통일을 위해 553년 5월에 제 5차 에큐메닉 공회의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하였다. 이 공회의는 황제의 삼대 의안을 토론하도록 되었다. 3장의 칙령과 오리게네스의 정죄와 칼케톤의 해석이었다. 이 해석은 2년 전에 황제가 바른 신앙고백에서 제시한 것인데 이 해석대로 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그 전 세기의 발단한 새로운 해석 유형을 자기 것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새 칼케톤주의로 표시되었다. 이 새 칼케톤 주의는 칼케톤 신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해석을 금하고 단성론적인 해석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두 본성이지만 한 본성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네스토리우스적인 해석은 완전히 배제하여 단성론을 정통으로 확립하였다. 이 노력을 황제 저스티니안 1세는 단성론 교회들을 제국교회에 매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단성론 교회들이 제국교회에서 분립하여 민족적인 교회들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제 5차 에큐메닉 공회의는 150명의 주교들로 소집되어 동방주교들이 대부분이었고 서방주교들은 별로 많이 참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공회의 결정은 서방에서 많은 반대를 유발하였다. 그러나 로바주교 비질리우스가 이 교리들의 결정에 굴복하고 5년 후 에 아프리카 교회가 이 예를 따랐다. 이렇게 하여 비질리우tm 후계자 펠라기우스는 서방에서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북부 이태리의 교회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였고 로마의 주교는 아무런 자유도 없고 단지 콘스탄티노플의 지시대로만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후 그레고리우스 1세 는 북부 이태리에 대한 지배를 되찾았다. 따라서 그의 도움이 아레안주의 이단주의자들과 이방인들의 위협에 대처함에 필수부가결한 것으로 느꼈다. 동시에 서방에서는 신학적인 문제들에 관심이 사라지게 되었다.

5. 단성론자들의 분파

단성주의자들은 여전히 교회와 화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정통 신조를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은 그들 사이에 분열이 있는 다음부터 약화되었다. 안디옥 감독 세베루스를 추종하는 자들인 세베리우스주의자들은 시릴의 기독론과 매우 밀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에 두 본성의 실제를 완전히 인정하였으나 그 두 본성이 융해시킬 수 없이 연합되었기에 단지 한 새로운 신인의 힘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반대의 경향은 할리카르나수스의 감독인 줄리안의 추종자들인 줄리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유티케스를 따랐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되었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런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은 굶주림, 목마름, 피곤함, 땀 흘림, 눈물흘림, 피 흘림과 같은 육체적 연약함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께서 굶주리고 목마르셨을 때 그것은 그 분이 필수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의지적으로 그것을 하시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두 경향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이전에도 그 분의 몸이 부패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에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세베루스주의자들은 부패하는 것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창조되었고 부패될 수 있는 우리의 것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들은 부패할 수 있는 분을 예배하는 자들 즉 프타르톨라트래(phthartolatrae, 썩은 것을 예배하는 자), 코룹티콜래(Corrupticolae)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줄리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은 로고스와 연합하는 그 순간부터 부패할 수 없고 부활 후의 몸과 동일한 특성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프타르톨라트레(aphthartolatrae, 썩지 않는 가현실주의자) 혹은 판타샤스츠(Phantasiasts)라고 불리워졌다.

한 극단적인 학파는 그리스도의 몸은 연합되는 그 순간부터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은 액티스태(Actstae)라고 불리워졌다.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단성론자들의 이념들이 극단으로 옮겨진 다음 논쟁은 또한 그리스도의 인간적 영혼으로 확장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테미스투스에 의해서 인도되었던 세베리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영혼은 지식에 한정이 있는 우리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애그노태(Agnoetae)라고 불렀다. 영속적인 분열 상태로 들어 갔던 단성론자들은 동방에서는 분파들로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시리아에서 제코비테스, 이집트에서 콥트, 애비시니안스와 아르메니안이란 이름으로 그런 분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Ⅲ.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

 

1. 어원 및 역사적 배경

 

단의론이란 정통교리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오직 단 하나의 의지만 가졌다고 주장했던 7세기의 기독교의 한 운동으로 단성론 운동은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가라앉힐 수 없도록 너무나 강력했으므로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한편에서는 페르시아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라센에 의해서 심히 압박을 받고 있던 황제 헤라클리우스(610-641)는 교회와 제국을 위하여 중요한 정치적인 승리에 관심을 가지고 단성론자들을 핍박했다. 622년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길 도중 아르메니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세베리우스주의의 지도자인 바울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칼케톤 신경의 정의에서 특별히 싫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두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단성론자들과 카톨릭 교회를 재연합시키고 싶어서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세르기우스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신인적 힘’ 즉, ‘단 하나의 위격적 에너지’라는 신앙형식을 발표하였다.

이런 행동은 예루살렘의 소피로니우스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는데 그는 그 새로운 교리를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범수에 속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세르기우스 대주교는 교황 호노리우스에게 이 상황을 알렸고 교황은 세르기우스 대주교의 입장과 같다고 자신이 견해를 피력하였다.

따라서 세르기우스는 소위 Ecthssis-신앙의 해석-를 준비하였는데 이것은 638년 황제에 의해서 서명을 받았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 혹은 두 개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의지만이 있다고 진술한다. 이 문서는 호노리우스의 후계자, 세베리누스 그리고 존 4세에 의해서는 거절당했다. 이탈리아와 북 아프리카에서 고백자 막시무스는 폭력적으로 그것을 반대했다. 이 반대는 콘스탄스 2세로 하여금 그 칙령을 철회하고 이런 분쟁에 있는 문제에 대한 잠잠한 자신의 튀포스로 하여금 그것을 대신하도록 했다. 서방 교회는 단성론이 칼케톤과 불일치하는 것으로 저주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에테시스나 튀포스 모두 그리고 그 저자들 또한 비난했다.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두 의지가 있다는 교리인 두 의지론(Dyotheletism)이 정식으로 정의되었고 640년 교황 말틴 1세가 주도한 제 1회 라테란 대회에서 받아들였다. 말틴과 막시무스 둘 다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와 심한 박해를 받아 마침내 죽게 되었다.

콘스탄스 후계자 지배 아래서 논쟁이 더욱 과열되었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이해개 다시 중재 되었을 때, 새로운 황제 콘스탄틴 포고나투스는 총회를 소집할 필요를 느꼈다. 그 총회가 바로 680년 제 1회 트롤란 회의 혹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있었던 6공회의이다.

2. 6차 에큐메닉 공회의 : 680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이 회의에서 콘스탄스 황제가 170명의 주교를 회집하고 정치적인 근거에서 단의론을 포기하기로 하고 서방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주교 자리를 굳게 뒷받침해주기로 하였다. 로마의 주교 아가또는 로마 황제와 제 6차 에큐메닉 공회의에로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의 기독론은 막시무스가 작성한 기독론인데 황제의 호의로 레오 감독의 편지처럼 공회이 앞에서 읽혀졌다. 그리고 이 아가또의 편지에 의해서 680년 에큐메닉 공회의가 그리스도의 두 의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교황은 로마의 교리로 두 본성의 귀결인 그리스도의 두 의지를 확정하였다. 즉 두 본성처럼 자신 안에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작용을 가진다고 하였다. 삼위일체 안에 본성적인 의지가 있듯이 의지 일반도 본성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두 본성을 인정하는 자는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작용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의지와 부정은 그의 영혼을 부인함에 이른다. 인간적인 의지는 여러 본문들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작용하였고, 하나님의 의지에 인간의 자원적인 순종으로 나타났다.

680년 에큐메닉 공회의는 이러한 아가또의 편지와 다른 교부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두 본성 곧 두 실체를 가졌으므로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본성적인 활동을 가진다고 결정하였다. 황제의 제창에 의해서 두 의지와 두 본성적인 역사를 결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안에 한 의지와 한 활동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한다고 결정하였다.

 

3. 기독론 논의의 종결

 

제 6차 에큐메닉 공회의는 성육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두 본성을 가졌으므로 두 본성대로 두 의지와 두 역사를 갖는다고 확정하였다. 이로써 성육신을 완성하고 기독론 논의를 종결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의 가르침대로 성육신한 본성을 강조한 단성론자들의 세력이 대폭 약화되었으므로 로마교회가 주도해서 결정한 칼케톤의 결정을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게 하였다. 즉 두 본성대로 두 본성적인 의지와 두 본성적인 역사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모든 기독론 교리의 논쟁을 종식하였다. 이제 성육신에 따른 다른 기독론적인 논의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들 교리를 그대로 수용하느냐, 아니면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하거나 성육신의 부정 외에는 다른 길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공회의가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를 정죄하므로 교황 무오설 위에 서 있는 로마교회로 하여금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Ⅳ. 결론

 

기독론 논쟁은 처음부터 결론이 없었다. 칼케톤 신조로부터 제 6차 공회의에 이르기까지 기록론 논쟁은 부정적인 해답을 내렸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지식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증거로서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오로지 신앙고백만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철학적인 개념으로써 두 본성의 상호관계를 말하려는 몯느 시도를 정죄하였다. 동시에 이 논쟁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우위를 차지하려는 시도를 또한 배격하였다. 기독론 논쟁은 인간의 부족을 깨닫게 해 주는 또 하나의 주제로서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사전류

 

1. 기독교 대백과사전. V. 3, 1982.

2.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 V. 4, 1993.

 

-국내서적

 

1. 서철원. 「교리사」서울: 총신대춣판부, 2003.

2. 차종순. 「교리사」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번역서적

 

1. 곤잘레스, 유스토. L. 「중세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 은성출판사, 1995.

2. 맥킴, 도날드 K. 「9가지 신학논쟁」. 정종현 역. 서울: UCN(기독교연합신문사), 2005.

3. 벌콥, 루이스.「기독교교리사」. 신복윤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93.

4. 클로제, E. H.「기독교교리사」. 강정진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