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검도(Kendo)

촛불하나 2008. 7. 28. 20:54
 



◈ 1본목---간합
검도형을 <검 술 형>이 아니고 <검 리 형>으로 보는 것에 의해, 검도형 1본목에 있어서 서로 상단의 이상한 공방의 의미가 보이는 것이다. 즉, 검도형 1본목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상단으로부터의 머리치기>라고 하는 <기술>이 아니고, 검도에서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간합>을 재는 방법과 그 중요성이다.
간합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일족일도의 간합>을 기준으로 해서, 그보다 <먼 간합> <가까운 간합>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간합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초심자의 단계에서는 서로 중단으로 겨눌 때의 검선과 검선이 교차하는 경우에 따라서, 이것을 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검선을 맞추지 않으면 간합을 잴 수 없다고 해서는 곤란하다. 본래 간합이라고 하는 것은, 검선에 의해 재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자신과의 상대적인 거리감을 가지고 재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검도형의 1본목에서는, 스승의 위치에 있는 선도가, 제자의 위치인 후도에 대해서 <간합>의 올바른 <재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부러 검선을 맞추지 않고 상단으로 겨눔자세를 하여, 후도가 검선에 따른 간합을 재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동시에 후도에 대해서도 중단 겨눔자세로부터 그대로의 기위로 곧바로 휘둘러 올려, 서로 검선을 맞추어 간합을 재는 것을 하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선도는 스승의 위치이므로 검도에서 통용되는 올바른 좌상단의 겨눔자세를 잡고 있지만, 제자의 위치인 후도에 대해서는, 그 단계에서 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고, 단지 중단의 겨눔자세에서부터 통상의 타돌동작과 마찬가지로 곧바로 휘둘러 올리는 것만의 겨눔자세를 잡도록 한다. 이 때문에 선도가 좌상단, 후도가 우상단이라고 하는, 쌍방이 약간 다른 겨눔자세가 되는 것이다. 여담이 되지만,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채로 지도자가 마치 검도에는 검도형의 후도가 겨누는 것 같은 <우상단>이라고 하는 겨눔자세가 존재하는 것처럼 가르치면, 초심자 중에는 죽도를 이용한 검도에서도, 이 <우상단>의 겨눔자세가 통용하는 것을 생각해 버려, 상단의 겨눔자세에 대한 혼란을 일으킨다. 검도형에 있어서 <우상단의 겨눔자세>는 검도형에 있어서 간합을 가르치기 위한 편의상의 겨눔자세이고, 검도에 있어서 올바른 상단의 겨눔자세는, 선도가 잡는 <좌상단의 겨눔자세>, 혹은 좌우의 손을 바꿔 넣어서 우수우족 앞으로 좌상단과는 전적으로 역의 모양으로 겨누는 <우상단 겨눔자세>이라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야 한다.

또, 선도, 후도의 쌍방이 상단의 겨눔자세로 검선을 맞추지 않은 상태 그대로 <일족일도의 간합>까지 걸어서 다가온다. 후도는 검선으로 재지 않더라도, 확실히 이 간합을 잡아서 선도와 대치할 수 있도록 되지 않으면 안된다. 선도는, 후도가 올바르게 일족일도의 간합을 재어 제압하고, 언제라도 상단으로부터 후려내리는 선의 기위를 보인다면, 이것을 <기회>로 보아 크게 오른발을 내고, 동시에 검선을 멀리 후려 내듯이 하면서 발아래까지 베어 내리고, 후도에 대해서 선도의 검선이 도달하는 최대의 간합을 가르친다. 여기서 간합의 최대치를 가르치기 때문에, 선도의 체세는 과감히 밟아 들어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가 된다. 한편 후도는 약간 몸을 빼어서, 그 검선을 아슬아슬할 때까지의 간합을 알고, 다시 거기서부터 일보 밟아 들어가서 자신의 검선이 후도의 머리 위에 도달하는 간합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서 선도는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크게 체세를 무너뜨릴 정도로 밟아 들어가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후도는 이 정도로 크게 밟아 들어가지 않고도 후도의 ‘머리’를 치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위 <적보다 멀리, 나보다 가까이>라고 하는 간합의 묘미를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검도형 1본목은 <간합>의 공방을 가르치는 <검 리 형>이다 라고 생각함으로서, 서로 상단으로 겨누는 것, 선도가 오른발을 밟아 나가면서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크게 발아래까지 베어 내리는 도법을 하는 것, 후도가 우상단이라고 하는 특수한 겨눔자세로부터 뒤로 물러나 빼고, 다시 앞으로 나와 선도의 ‘머리’를 베는 것 등등, 여러 가지 의문이나 모순에 대해서도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노우에 선생의 설명↓.

◈ 1본목 <정>
검도형 1본목에 있어서, 선도, 후도의 쌍방이 상단으로 겨누는 것은 <정>의 상징이다. 고래로부터 <싸움>은 <정의>와 <정의>의 부딪침이다. 자신이 <정의>를 주장하여 싸운다면, 상대도 상대나름의 <정의>를 주장하여 도전하는 것이다. 가면 라이다*는 <정의>이고 거기에 대한 쇽카**는 <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검도의 시합 등에서 자신의 팀은 <정의>이지만, 상대의 팀은 <악>이라는 것은 없다. 싫은 쇽카라도 쇽카나름의 정의는 있는 것이다. 농민민족인 일본인으로서는 영토의 확장은 <정의의 행위>였다. 서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 이윽고 경계선에서의 부딪침이 생긴다. 여기서 이기면 이기는 쪽이 <정의>이고, 진 쪽은 영토를 잃는다. 이것이 <정의의 싸움>이다. (주 * **--사전에 안나오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음)

<정의의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고, 그 상호관계를 항상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을 1본목의 형은, 검술에 있어서의 <간합>의 확인과 <선선의 선>의 기위를 통하여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스승의 위치인 선도는, 후도가 서로의 <간합(관계)>를 끝까지 보는 관찰안과 상대의 동향을 놓지지 않고 항상 선수를 취하여 대처할 수 있는 <기위>가 충실한 것을 본다면, 이것을 <기회>라고 보고, 크게 밟아 들어가면서 후도의 양 주먹과 코등이를 함께 바로 정면 양단하는 칼날로 내려 베어, 결과적으로 선도의 검선이 도달하는 그 최대의 <간합>을 후도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후도는 선도의 치고 들어옴과 그 칼날을 순식간에, 그리고 아슬아슬할 정도로 피해서, 거기서부터 밟아 들어가 자신의 칼이 선도의 두개(머리)를 가르는 일족일도의 <간합>을 배운다. 항상 <선선의 선>의 기위와 정확한 <간합>을 끝까지 봄으로서, 적의 공격에 순식간에 대응하여 격퇴하고 <정의의 싸움>에 승리하는 순간이다.

두개가 갈라진 선도는, 술리상은 그 자리에서 넘어진다.
사람에 따라서는, 선도는 넘어지지 않고, 줄줄 피를 흘리면서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상태로 있으면서, 선도가 타돌 직후의 검선을 내리고 약간 앞으로 숙어지는 자세를 가진채 일보, 이보 물러나는 것은, 약간 부자연스럽다. 아직 절명하지 않고 반격을 위해서 뒤로 물러난다고 말한다면, 우선은 검선을 올리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 자연스런 것은 아닐까.

거기서 나는, 선도가 후도에게 맞은 후에, 그대로의 자세로 작게 1보 물러나가는 것은, 베어진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의 <형으로의 행위>는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흔히 칼싸움 연극에서 베어지는 역이 주인공에 의해 베어지면, 그 베어진 그대로의 자세로 뒤로 물러나면서 무대의 끝으로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 광경을 보는 일이 있다. 연극의 이야기 상에는 베어진 자는 그 자리에서 넘어지는 것이지만, 그래서는 베어진 사람이 무대의 가운데 여기저기 있는 것이 되어, 다음 연극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베어진 동시에 무대의 끝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관객은 베어진 역이 무대의 끝을 피했다는 것이 아니고 베어진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해석하여 연극을 보고 있다. 이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두개가 갈라진 선도는 그 자리에서 넘어지지만, 그것을 형으로서는 베어진 그대로의 자세로 1보 물러난다고 하는 행위로 표현한다. 그러나, 넘어졌다는 것만으로 절명한 것인가 어떤 것인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아직 숨이 남아 있어 반격해 올지도 모른다. 거기서 후도는 넘어진 선도에게 검선을 붙여서 <방심이 없는 잔심>을 나타낸다. 본래대로라면 넘어진 선도에게 검선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검선을 하단으로 붙이는 것이지만, 형으로는 선도가 서 있는 그대로 1보 물러나는 것이므로, 그 안면에 검선을 붙이는 것에 의해, 이 <방심이 없는 잔심>을 표현한다. 즉 <형 상>으로는 안면에 향하여 조금 검선을 내리는 것뿐이지만, <술리상>으로는, 넘어진 선도에게 방심없는 검선을 붙이는 마음 가짐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도는 여기서부터 다시 더 1보, 그대로의 자세를 가진 채 뒤로 물러난다. 이것은 선도의 절명, 소위 <사>를 표현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선도의 죽음을 확인한다면, 더 반격당할 무서움은 없다. 거기서 후도는 상단으로 휘둘러 올린다.

이 상단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선도는 이미 죽어 있으므로 반격에 대한 준비의 잔심은 없는 것이다. 또 설사 <준비>라면 하단으로 붙이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이것은 <정의의 싸움>에 확실히 이긴 것을 표현하고, 그리고 자신의 정의를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소위 <승리의 이름 대기>의 자세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노우에 범사는 <단순한 승리의 이름 대기는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설사 정의의 싸움이었다 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악행이다. 인간이라면 정의를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어쩔수 없는 살인을 범했다는 것에 따르는 참회의 기분이 반드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후도가 최후로 상단을 취하는 것은, <<참회>>의 기분과, 빼앗은 생명을 하늘로 돌려 보내는 <기도>의 기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고 이 <참회>의 기분이 있으므로야말로 2본목의 이념에 연결되어 간다는 것이다.

확실히, 일반 사회에 있어서도 <정의>를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때로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나 자신도 사소한 정의를 주장하는 것에 의해, 결과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아도 좋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 버린다든지, 그에 따라서 나의 편이 될 사람을 적으로 돌려 버린다든지 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상, 결코 정의만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하는 반성을 넣어서, 검도형 2본목의 고찰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출처 : 검미사
글쓴이 : 무영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