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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하나 2008. 8. 12. 07:00
 


거합도 임현수 관장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칼집에서 3분의 1 가량 빠져나오는 순간 잠시 주춤거린다. 활인검(活人劍). 적에게 다시 한 번 무모한 결투를 중지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반 호흡의 멈춤 다음에는 그야말로 일사천리. 칼집을 빠져나온 칼은 그대로 적의 관자놀이를 베고, 연이어 상대의 머리를 양단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시원하다. 고수는 칼이 아니라 몸으로 벤다고 했던가. 칼날 길이만 85㎝에 무게는 1.5㎏. 웬만큼 검을 다룬 이도 버거워 할 장도(長刀)를 그는 몸의 일부인 양 자유자재로 다룬다. 발검에서 착검까지 조금의 동요도 없다. 무쌍직전영신류(無雙直傳永信流) 거합도(居合道) 한국대표인 정기관 임현수(60) 관장이다.

“거합의 ‘居’는 모든 상황을 의미합니다. 앉아 있거나 걸어갈 때, 혹은 누워 있을 때 적의 갑작스런 공격에 대처하는 검법이지요.”

거합은 발도(拔刀)와 동시에 상대를 양단하는 다양한 기법과 격검(擊劍)을 연마하는 일본 고류 검술이다. 스포츠화한 죽도 검도와 달리 진검수련을 한다. 무쌍직전영신류는 5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거합도의 본류이자 백미로 꼽히는 유파다.

임 관장은 합기도와 검도계의 살아 있는 역사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시절엔 당수(唐手)를 익히다가 1965년 영남대 재학시절 최용술 선생을 만나면서 평생 무도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고(故) 최용술 선생은 일본에서 유술(柔術)을 배워와 한국에 전파한 인물로, 한국 합기도계의 시조다. 그는 최 선생을 말년까지 모신 제자다.

최 선생에게서 혹독한 훈련을 받던 그는 어느 날 헌 책방에서 한 권의 무술책을 발견한다. 일본어로 된 낡은 검도 책이었는데 합기(合氣)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대구 약전골목의 한 노인에게서 “합기란 칼과 칼이 마주쳐 상반되게 견주고 있는 힘의 상태”라는 해석을 듣는다. 그래서 검을 수련하면 합기도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검도에 입문한다. 1974년엔 정기관을 세워 검도와 합기도를 함께 가르쳤다. 정기관 검도부는 당시 유일한 사설 검도 도장이었고, 1000여명의 검사를 배출한 명문 도장으로 발돋움한다. 하지만 그는 죽도 검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검도를 아무리 오래 해도 진검을 접할 수 없었고, 배우려고 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 스승을 찾았다. 1982년 한 일본 무도잡지에서 일본 고전무도연맹 거합도 회장을 소개한 글을 본 것이다. 무쌍직전영신류 21대 종사(宗師) 세키구치 다카아키(關口高明) 선생이었다. 무작정 일본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답장이 온 것이다. 이후 그는 세키구치 선생에게서 20여년간 거합을 배우게 된다.

진검을 다루는 거합은 위험하다. 자칫 실수하면 자신을 벤다. 더구나 베는 상대는 가상의 적이다. 이 때문에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음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수련에 몰입하게 되고 그 상태가 바로 참선이 된다. 가상의 적을 베면서 자신의 마음을 베는 것이다.

“거합에선 칼을 먼저 뽑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최대한 인내하는 것이죠. 하지만 일단 발도하면 반드시 베어야죠. 칼을 안 빼고도 상대를 제압하는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결국 칼집 속에 모든 승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