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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 2013. 11. 17. 16:22

 

 

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 인물(人物) 약기(略記)

 

(1)생애(生涯)

 

여헌 선생은 자(字)가 덕회(德晦)이고 여헌(旅軒)은 호(號)이고 현광(顯光)은 휘(諱)이다. 도덕이 높고 학문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여헌선생 이라 일컫는다.

여헌 선생은 명종 9년(1554) 1월 22일에 인동현 인선방(仁同縣 仁善坊:구미시 인의동)에서 증 이조판서 열(烈)과 정부인 경산 이 씨 사이에 6남매 중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무렵 관향산(貫鄕山)인 옥산(玉山)에 영지(靈芝)가 나서 사람들은 장씨 가문에 훌륭한 인재가 날 것이라고 하였고 선생이 나던 날 정침에는 보랏빛 서기가 어렸다고 하니 예사로운 징조가 아니었다. 과연 선생은 자헌대부(資憲大夫)의 높은 품계에 올랐고 학문과 도덕이 한 세상을 울렸던 것이다.

선생이 4세(歲) 때 귀한 손자를 보려고 염원하고 온갖 정성을 다 쏟은 조부 참판공 계증(參判公 諱 繼曾)께서 서거하였고 8세 때 부친마저 서거하니 공부가 일시 중단되었다. 7세 때 부친으로 부터 글을 배워 글자를 모아 글귀를 만들던 재주를 그냥 놀릴 수 없다고 판단한 모친은 선생을 맏사위인 송암(松庵) 노수함(盧守諴)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다. 어느 날 송암공의 친구 정각 공(鄭慤公 신당 정붕의 자)이 와서 보고 “내 평생에 이런 아이를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타고 온 말을 선물하려고 하기까지 하였다. 14세(歲) 때는 11촌 숙(叔)인 학거(鶴渠) 장순(張峋) 선생에게 나아가 차원 높은 공부를 하였다. 16세경에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 소강절(邵康節)의 저술인 그 어려운 황극경세(皇極經世)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혼자서 학문 탐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18세 때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종합하고 포괄하여 앞으로 학문할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우주요괄(宇宙要括)이다.

23세 때 재주와 행실이 특이한 것으로서 조정에 천거되었고 28세 때는 향시(鄕試)에 나아가 합격하였고 30세에는 향시 별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 만 마음을 쏟았다. 38세 되던 가을에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란 나갔다가 1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42세 때 보은현감(報恩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여섯 달 만에 사퇴하였고 의성현령도 여섯 달 만에 사퇴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나아가지 않았고 어전에 나아가 사은(謝恩)한 것은 선조 때 한 번 인조 때 두 번 등 세 번 밖에 되지 않는다. 인조 5년(1627)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선생에게 호소사(號召使)의 특명이 내렸다. 선생은 명을 받은 즉시 관부(官府)에 나아가 각 고을에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고을 마다 의병장을 정하고 의병을 모아 북진(北進)할 채비를 차렸으나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 하였다. 호소사란 난리가 났을 때 임금의 명을 받고 지방에 나아가 군사를 불러 모으는 일을 맡은 임시직이다. 75세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고 77세 때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에 제수 되었으나 신병으로 인하여 나아갈 수 없다는 소장을 올렸고 81세 때 공조판서(工曹判書), 82세 때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었으나 고령(高齡)으로 인하여 사퇴하였고 83세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함창까지 가다가 병이 나서 되돌아왔다.

인조14년(1636)12월에 오랑캐가 침입하여 임금님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창의(倡義)를 도모하였으나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이듬해 3월에 선영에 영원한 하직을 고하고 영천 입암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해 8월 보름께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9월7일에 영면(永眠)하시니 향년 84세였다. 선생이 서거하던 전날부터 우레와 폭우가 산을 무너뜨릴 기세로 퍼부었고 이튿날 아침에는 하늘이 해를 가려 온 천지가 깜깜하였고 사나운 비바람이 천지를 뒤흔들었는데 선생이 운명하자 그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선생의 서거 소식을 들은 임금님께서 몹시 슬퍼하시어 조회를 폐하고 경상도에 교지를 내려 초상(初喪)에 드는 모든 비용을 도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장모는 어질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옛 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내가 마땅히 공경하고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제 홀연히 서거하니 내 마음에 심히 슬프다." 고 하셨다. 그리고 11월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유철(兪撤)을 보내어 제사하게 하셨다.

10월에 입암에서 발인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호상꾼이 500여 명이나 따랐다. 12월 기유 일에 금오산 동쪽 기슭 유좌(酉坐) 묘향(卯向)에 장사하였다. 인조 17년(1639)에 오산서원 길 야은(吉冶隱)선생 묘(廟)에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인조20년(1642)에 임고서원 정 포은(鄭 圃隱)선생 묘(廟)에 위판을 배향하고 이해에 성주 천곡서원 정자(程子) 주자(朱子) 두 선생 묘(廟)에 종향하였고 선산 금오서원에 위판을 봉안하였고 선산 원당(元堂)에 영정을 봉안하여 선생의 탄신일인 1월 22일에 생신 향례를 올렸다. 효종 5년(1654)에 부지암 서원을 세워 이듬해 위판을 봉안하였는데 숙종 2년(1676)에 동락서원으로 사액이 내렸다. 그리고 영천 입암서원. 의성 빙계서원. 청송 송학서원에도 각각 위판을 봉안하였다.

효종 8년(1657)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文康)이란 (諡號)가 내렸다. 그 뜻은 도덕이 높고 견문이 넓으니 문이요(道德博聞曰文) 근원이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하니 강이다.(淵源流通曰康)라는 것이라고 한다. 시장도 없이 시호를 내리면서 천하가 다 아는데 시장이 무선 소용이야 하면서 시호를 내렸다.

 

(2)학문과 사상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선생의 문집 40권에 집대성되어 있다. 일반 문집인 전집이 13권 속집이 10권이고 특이한 학문인 성리설이 8권 역학도설이 9권이다. 이렇게 방대한 학문과 사상을 몇 장의 원고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차원 높은 이론은 학자들의 연구 과제로 돌리고 여기서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 대략을 서술하여 대체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선 선생의 학문은 도(道)에 바탕 한다고 하겠다. 그러면 도(道)란 무엇 인가?. 도(道)란 사람이 떳떳이 행해야 할 도리라고 하겠다. 선생은 도통설(道統說)에서 “사람이 떳떳이 행하지 않을 수 없어서 잠시라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도(道)라 이름 한 것이니 도(道)는 도로(道路)를 빌려서 비유(比喩)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을 통해 보면 도(道)는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도(道)란 사람이 떳떳이 걸어 다니는 길과 같은 것,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 앞을 보고 순리대로 가야지 뒷걸음질 치거나 역행해서는 목적지에 갈 수 없다. 만약 도로에서 차가 역주행을 하면 큰 사고가 나고 통행이 일시 마비되듯이 사람이 도를 역행한다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질서가 파괴되고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처럼 도를 올바르게 행하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왜? 사람은 도(道:어떤 도리)에 의해서 태어나고 도(道)바른 도리)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도(道)와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이다. 선생은 도통설에서 다시 말한다. 사람의 “몸은 도 때문에 몸이 되고 도는 몸을 얻어 도가 되어서 도와 몸을 합한 것을 사람이라 하니 사람이 진실로 도를 떠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 하였다.

그러면 도는 차원이 높고 실행하기 어려운 것인가? 아니다. 땅이 생기면 길이 나듯이 사람이 나면 도는 자연히 몸에 갊아 있어서 일거 일동이 모두 도인 것이다. 선생은 제자(弟子) 경우(慶遇)에게 말씀하셨다. “도(道)를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도는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나 다만 나의 타고난 본성(本性)을 따라 일상생활의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 시행할 뿐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타고난 본성대로 일상생활에서 행할 뿐이고 특별히 의도적으로 행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생의 시한 편에도 도가 갊아 있고 논(論) 서(序) 설(說)등 영역에서 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선생의 글은 대체로 장문(長文)이 많다고 하겠다 시(詩) 축문(祝文)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편짓 글 등을 제외한 논(論) 설(說) 등은 대체로 장문이 많다. 정 한강(鄭寒岡)선생의 행장이 무려12000여자가 된다. 이것은 200자 원고지로 빈칸 없이 60매 분량이고 번역문은 약 270여 매나 된다. 또 김한훤당(金寒暄堂) 선생의 신도비명이 2580여 자나 되는데 이것은 보통비명의 배가 넘는다. 자신의 호설(號說)이 3700여자, 이기(理氣)에 대한 수상록인 평설(評說)이11600여 자(字),구설(究說)이 7660여 자나 되어 보통 글의 몇 배가 된다. 선생의 글은 이렇게 길면서도 내용이 잡다(雜多)하지 않고 서술함에 있어서 조리가 있고 평이(平易)하여 독자로 하여금 지루한 감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문장들은 그만한 글을 쓸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하고 그만한 자료가 있더라도 그 자료를 능히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해박한 지식과 능란한 문장력이 없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셋째로 선생의 학문은 폭이 넓다고 하겠다. 선생은 유학자이면서 유학에만 억매지 않았고 도학자이면서 도학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선생의 학문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우주 요괄첩(宇宙要括帖) 8첨을 보면 제자백가(諸子百家)와 노불(老佛)까지도 열거 되어있다. 이것은 다만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써 놓은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들의 학문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일반적인 경향은 유교 만을 정통적인 학문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학문은 잡학(雜學)이라 하여 경시하거나 무시하였다. 더욱이 불가(佛家)와 노자(老子)의 학설은 유교에 해독을 끼치는 이단(異端)이라 하여 금기시(禁忌視)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거론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매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자백가나 노불의 학문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니다. 선생의 역학도설 9권에는 유교 경전 외에 여러 학설을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도설을 저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예를 들어 보면 도설 8권에는 태현(太玄)이 있는데 이는 중국 전한(前漢) 때의 학자 양웅(揚雄)이 저술한 태현경(太玄經)을 말한다. 이 태현경은 노자의 사상과 깊은 관계가 있고 매우 어려워서 여간한 지견(知見)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선생은 양웅의 이 태현경 10권을 읽어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 도설에 인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 학설을 탐색하고 연구하여 주역과 결부시켰던 것이다.

넷째로 선생의 학문은 자연과 합일(合一)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우주 자연과 하나 되는 영원한 우주자연인으로서의 일생을 살았다. 선생의 좌벽제성(座壁題省)에 “마음은 우주에 논다(遊心宇宙)”라는 말이 있다. 복잡하고 좁은 지구를 벗어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에서 노닌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누가 이 가운데 허공 법계(法界)를 자가 소유로 이전 증명 낸 사람이 있느냐? 형상 있는 것만 자기 소유로 하려고 하지 말고 형상 없는 허공 법계를 자기 소유로 하도록 노력 하라”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의 말이다. 선생이야 말로 허공(우주)를 자기 소유로 하여 자기 마음대로 노닐었던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호설(號說)인 여헌 설(旅軒說)에서 말하였다.“천지사이에 붙어사는 모든 물건이 나그네 아님이 없다”고 하고 “천지도 도(道) 가운데 한 나그네” 라고 하면서 자신도 영원한 나그네임을 자처하였다. 그래서 천지가 자신의 땅 아닌 곳이 없고 가는 곳마다 자신의 집(軒)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야 말로 우주가 자기 소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원한 그늘과 푸른 나무 아래에 이르러서도 또한 나의 집(軒:집)이며 흰구름과 푸른 산 위에도 또한 나의 헌(軒)이며 꽃다운 풀과 시냇가 또한 나의 헌(軒)이며 시원한 바람과 산 둔덕 또한 나의 헌(軒)이다“ 고 하면서 우주자연과 하나 되는 자신을 자신의 호설(號說)에서 말하고 있다.

다섯째로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성리학은 중국 송(宋)나라 때 일어난 유학의 한 계통으로 성명(性命:사람의 천성과 천명)과 이기(理氣)의 관계를 논(論)한 유교 철학이다. 이 학문이 조선에 들어와서 활발한 연구와 열띤 논의를 거쳐 꽃을 피웠다. 그리하여 조선 500년 동안에 수많은 성리학자가 배출되었고 제각기 일가견(一家見)한 주장을 하였으나 몇몇 학자를 제외하고는 송 대(宋代)의 이론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이들은 이기(理氣)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理)는 사람에, 기(氣)는 말에 비유하는 인마 설(人馬說)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선생은 이 인마 설(人馬說)을 배격(排擊)하고 이(理)는 경(經:날실) 기(氣)는 위(緯:씨실)에 비유하는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주장 하였다. 그리고 도(道)라는 상위개념(上位槪念)을 설정하여 경(經)은 도(道)의 경, 위(緯)는 도(道)의 위(緯)라고 하였다. 그래서 근래 학자들은 흔히들 선생의 성리설을 도일원론(道一元論) 또는 이기일본 설(理氣一本說)이라고 한다. 선생은 이 이론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베 짜는 데 비유하였다. 원래 같은 실을 세로로 사용하면 날실이 되고 가로로 사용하면 씨실이 되는 것이다. 날(經)은 이(理) 즉 체(體)가되고 씨(緯)는 기(氣) 즉 용(用)이 되는 것이다. 날실과 씨실의 교호작용(交互作用)에 의해서 베가 짜여 지듯이 이(理)와 기(氣)가 상호작용(相互作用)하여 도(道)가 생성(生成)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 되는 (一而二.二而一) 분합이론(分合理論) 이다.

 

                        날   실

 

       실      ↑↓       베

 

                  씨   실

            1 → 2 → 1

그러나 인 마 설(人馬說)은 애초에 사람과 말은 둘이었으며 사람이 말을 탄다고 해도 엄연히 말은 말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사람이 말에서 내리면 사람과 말이 분리되어 합일(合一)이 되지 않으니 일이 이(一而二) 이이 일(二而一)의 이론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선생이 인 마 설을 배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섯째로 선생은 역학(易學)의 대가(大家)임을 꼽을 수 있다. 주역(周易)은 복희씨(伏羲氏)가 8괘(卦)를 그은 이래 문왕(文王) 주공(周公) 공자(孔子)를 거치면서 체계화되고 이론화되었다. 그리하여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학자들을 매혹시켰다. 선생도 주역에 심취(心醉)하여 주역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그 결과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이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래서 선생이 역학의 제1인자라는 정평이 나있다. 선생의 역학도설(易學圖說)은 단순히 64괘(卦)에 대한 부연 설명이 아니고 “천지가 곧 역이다(天地自是易也)”라는 관점에서 천지 만물 만사에 적용하여 논술하였다. 그래서 그 범위는 광대하고 그 이론은 심오(深奧)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역학도설은 도설(圖說)답게 점(點) 선(線) 획(劃) 원(圓) 문자 등으로 이루어진 도(圖)가 360여 개나 있어서 웬만한 역학 공부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유교전적(儒敎典籍)의 번역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마는 이 역학도설의 번역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설사 번역을 한다 할지라도 역학에 대한 소양 없이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문제점도 없지 않다. 참고로 론제(論題)만 열거 해본다. 태극(太極) 천지(天地) 일월(日月) 성진(星辰) 천도(天度) 지리(地理) 조석(潮汐) 음양(陰陽) 오행(五行) 시령(時令) 조화(造化) 풍운뇌우(風雲雷雨) 인신(人身) 하도(河圖) 낙서(洛書) 체용(體用) 서계(書契) 교학(敎學) 예의(禮儀) 율여(律呂) 역기(曆紀) 병진(兵陣) 산수(算數) 태극도설(太極圖說) 황극경세(皇極經世) 황극내편(皇極內篇) 의가(醫家) 술가(術家) 일가(日家) 풍수가(風水家) 등을 주역과 결부시켜 논하였다.

일곱째 선생은 과학사상가로 재평가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헌 선생은 인조 9년(1631) 78세 때 우주설(宇宙說)을 저술하여 조선중기 최고의 우주론을 정립한 자연철학자로서 자연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김석문(金錫文) 홍대용(洪大容) 등의 새로운 우주 형성 론의 토대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문중양 교수는 그의 여헌 우주론의 역사적 위치와 셩격이란 논문에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역학도설(1609)과 우주설(宇宙說)(1631)에서 그 예를 찿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중국 송 대 성리학자들의 논의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세련되고 독창적인 우주론 논의를 펼친 것으로 학계에 잘 알려져 있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여헌의 우주론 또는 자연지식이 조선시대 성리학사 또는 과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듯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 380여 년 동안 매몰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현대과학자에 의해 재평가 되었고 과학기술을 전공한 자문위원의 추천으로 과학기술부에서 과학사상가로 선정하여 국립과천과학관 역사의 광장에 과학 선현 25명과 함께 영정과 안내문이 돌에 새겨져 진열되었다. 이는 고려 말 부터 조선말 까지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출현한 수많은 유학자 중에서 유독 선생이 과학사상가로 선정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선생의 중요 저술 연보이다. 참고로 부기(附記) 한다.

 

선조 4년(1571) 18세 우주요괄(宇宙要括)

선조 27년(1594) 41세 평설(評說)

선조 28년(1595) 42세 관물부(觀物賦)

선조 30년(1597) 44세 여헌설(旅軒說)

선조 32년(1599) 46세 혼의(婚儀)

선조 33년(1600) 47세 관해부(觀海賦)

선조 40년(1607) 54세 야은죽부(冶隱竹賦)

선조 41년(1608) 55세 역학도설(易學圖說)저술 시작(9권)

광해 13년(1621) 68세 경위설(經緯說)

인조 2 년(1624) 71세 한강 선생 행장찬(寒岡先生行狀撰)

인조 4 년(1626) 73세 한훤당 선생 신도비명찬(寒喧堂先生神道碑銘撰)

인조 6 년(1628) 75세 만학요회(晩學要會)

인조 7 년(1629) 76세 오선생 예설 발문(五先生 禮說跋文)

동강 선생 행장 찬(東岡先生行狀撰)

인조 8 년(1630) 77세 역괘총설(易卦總說) 구설(究說)

인조 9 년(1631) 78세 우주설(宇宙說) 답동문(答童問)

인조 10년(1632) 79세 태극설(太極說)

 

(3) 맺는말

 

조선 중기 혜성처럼 나타난 선생은 일생을 산림처사로서 학문에만 전심(專心)하여 여헌집13권 속집10권 용사일기2권 성리설 8권 역학도설 8권이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래서 일본학자 다가하시(高橋)도루는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최대의 성리학자”라고 하였고

최영성 교수는 한국유학 사상사에서 “조선 성리학의 6대가의 한 사람”이라고 했고 김낙진 교수는 조선중기 이퇴계 이율곡과 함께 “3대가의 한사람”이라고 하였다.

또한 서울대 국사학과 문중양 교수는 “여헌 우주론의 역사적 위치와 성격”이란 논문에서 역학도설(1609)과 우주설(1631)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합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중국 송대(宋代) 성리학자들의 논의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세련되고 독창적인 우주론 논의를 펼친 것으로 학계에 잘 알려져 있다.고 하면서

여헌의 우주론은 주희(朱熹)조차도 성공적이지 못했던 송대 성리학적 자연이해의 세 가지 전통 모두를 완전하게 소화하는 단계를 넘어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정합적이고 자연이해의 틀에 결코 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진취적인 사색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라고 하였고.

선생은 학문을 생활여사(生活餘事)로 한 것이 아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임했으며 학문탐구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알고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선생의 학문은 주관이 뚜렷하고 주체의식이 확고하였다. 김필수(金弼洙)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여헌 장현광의 생애와 그의 역학도설에서 “조선조 유학자 중에서 여헌 만큼이나 경서 해석에 일관성 있는 주장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밀고 나가면서 개성을 지킨 선비도 그리 흔하지 않았고 주역도 오의(奧義)에 그만큼 심취(心醉)한 사람도 드물다고 할 것이다”고 하였다. 김 교수의 말처럼 자신의 주장을 고집스레 밀고 나가는 선생은 남의 주장에 부화뇌동 하지 않고 정론(正論)을 폄에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확고한 신념으로 일관한 선생의 학문이 조선 유학계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랜 기간을 사장(死藏)되다시피 한 것은 어째서 일까? 김필수 교수는 상기 논문에서 다시 말한다. “당시 양대 산맥인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보수적 주체세력이었기 때문에 학파를 달리 한다든지 독자적인 체계를 세운 탁이자(卓異者)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현실로 굳어지게 되었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선현들의 학문은 이어 받았으나 16세 이후에는 뚜렸한 서승은 없이 독학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이 글은 장인체 여헌학 연구회 부이사장이 인터넷 박약(博約 第10號 2007년 4월 25 일)에 기고한 것을 보완하여 게제 하였다

참 훌륭한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