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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 2014. 2. 26. 20:59

선생은 고종 원년((張志淵)1864) 11월 30일 경북 상주목 내동면 동곽리에서 부친 장용상(張龍相)과 모친 문화 유씨 (文化柳氏) 사이에 독자로 출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지윤(志尹)이었는데 지연(志淵)으로 개명(改名)하였고 자는 화명(和明)에서 순소(舜韶)로 고쳤고 호는 숭양산인(崇陽山人) 또는 위암(韋菴)이라 했는데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위암이다.

선생이 언론을 통해서 우유부단한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이 성주군수의 자리를 주겠다면서 유혹하였으나 단호히 거절 하였고 불의와 부정한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면박을 주었으며 한 평생 권력과 부귀에 아부하지 않았으므로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전국시대 위나라 서문표(西門豹)가 급하고 강경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서 부드러운 가죽(韋)을 차고 다녔다는 고사를 빌어서 자신의 호를 위암(韋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인동 장씨 32세이고 여헌 선생의 12대손이다.

고종 6년(1869)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총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였다고 한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어린나이에 슬픔을 이겨낼 수 없건마는 상례 절차를 잘 수행하여 주위 사람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모친을 여이고 할머니께 의지 하였는데 그 할머니마저 어머니가 돌아가신 3년 만인 선생이 12세 때 돌아가시니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이듬해 5월에 인동 율리(栗里:칠곡군 북삼면 율리)로 가서 외숙 유기만(柳基萬)에게 의지하면서 장주학(張柱鶴)에게 글을 배우다가 14세 때 오산(吳山:구미시오태동)으로 가서 족조(族祖) 오하(梧下) 장석봉(張錫鳳)에게 유학(儒學)을 배웠다. 장석봉은 판서 장석룡의 백씨(伯氏)인데 음직으로 전주 판관을 지냈고 학문이 박통(博通)하고 문장이 능숙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그 문하에서 5년 동안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경. 전. 자. 사(經傳子史)를 통달(通達)하여 유학자로서 기반이 확립되었다.

고종 9년(1882) 12월에 용전(龍田:구미시 상모동)에 사는 벽진 이씨(碧珍李氏)와 결혼 하였고 이듬해 영남의 거유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와 방산(舫山) 허훈(許熏)에게 나아가 경학(經學)의 진수를 전수받고 이분들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 장차 전통적인 유학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화파가 주장하는 의제개혁(衣制改革)에 반대하는 소(疏)를 안효제(安孝濟)를 대신해서 썼을 뿐만 아니라 시정(時政)의 폐단과 무당인 진령군(眞靈君)을 베라는 상소문도 대작(代作)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고종 22년(1885) 6월 향시 응제과(鄕試應製科)에 합격 하였으나 회시(會試)에서 낙제하여 실망한 나머지 숭산(崇山)을 유람하면서 친구들과 풍류를 즐기고 유숭산기(遊崇山記)란 글을 남겼다. 그리고 10월에는 운계수창집서(雲溪酬唱集序)를 쓰고 고종 24년(1887)에는 지진이 나는 것을 보고 지진설을 썼다. 이렇게 선생은 약관 때부터 저술을 하는 실력을 갖추었으나 과거운이 없어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해 8월에 정시(庭試)에 응시했으나 낙방되고 고종 27년(1890)에 세 번째 도전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선생은 단념하지 않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면서 더욱더 분발하면서 고종 29년(1892) 1월 29세의 나이에 네 번째로 응시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선생은 과거 제도가 문란하고 정실과 뇌물에 의해 당락이 좌우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집념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이 자신의 웅지(雄志)를 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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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나라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신구(新舊) 군인들의 갈등이 폭발한 임오군란(1882)은 왕비를 충주까지 도망가게 했고 그 결과 진령군(眞靈君)이란 무당이 왕비를 부추겨 조정이 어지러웠고 개화파의 정변(政變1884)으로 수구(守舊)파 대신들이 살해되고 의제 개혁 단발령 등으로 선비들의 사회가 술렁거리고 이런 와중에서 러시아 청국 일본 등 열강들은 조선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난맥상을 좌시할 수 없는 선생은 다시 도전하여 고종 31년(1894) 31세의 나이로 마침내 진사 병과(進士丙科)에 급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에게는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동학 농민 봉기(1894)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고 동학군의 진압을 구실로 출동한 청일(淸日) 양국의 군인들의 출동은 드디어 전쟁으로 변하여 이듬해 끝이 났던 것이다.

선생은 그들 양국의 세력의 각축장이 된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면서 그해 6월 상주로 내려가 실학에 몰두 하였다. 그리하여 해람편(海覽篇)을 저술 하였는데 이것은 갑오(1894) 을미(1895) 두 해 동안 지은 운문을 모은 것이다.

32세 때 (1895)고향 상주에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소식을 듣고 왕후를 애도하는 만장을 짓고 의병을 일으켜 국모의 원수를 갚으라는 격문을 지어서 전국에 보냈다. 을미사변은 일본 랑인(浪人)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개화정책에 반대하던 민왕비(閔王妃)를 시해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내각이 들어서게 되어 단발령 등 각종 개혁 정책이 시행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정이 불안해지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선생은 술로서 세월을 보냈고 친구들과 산행(山行)으로서 번민을 떨쳐보려고 하였다. 그러하여 친구들과 가야산에 올랐고 영천으로 가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강재(剛齋) 이승희(李承熙)와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국사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면우 선생은 선생에게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선유사를 사퇴하는 소(辭宣諭使疏)”를 보여주었다. 그 골자는 “의병을 일으켜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면서 선유사(宣諭使)를 사퇴한 것이다.

선생은 이 소를 읽고 선유사의 임무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관직까지 버리는 면암 선생에게 감명을 받고 홀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어 그해 11월에 상경하여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유년(1897) 1월에 러시아 공관에서 1년 가까이 머물러 계시는 국왕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 운동에 동참하여 선생이 그 소장(疏狀)을 제술(製述)하였고 2월에는 국왕의 황제즉위(皇帝卽位)를 요청하는 만인소를 제술하였다. 선생은 그 소장에서 “중국의 신하에서 벗어나 당당한 독립국가의 체모를 위해서 임금님께서 황제위(皇帝位)에 올라 국기(國基)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고 하면서 즉위(卽位)할 것을 촉구 하였다.

이해 7월에 사례소(史禮所) 직원(直員)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로부터 선생의 관직생활이 시작되었고 사회활동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8월에는 내부주사(內部主事)를 겸임하게 되었다. 사례소는 내부대신 남정철(南廷哲)에 의해 창설된 역사와 예의에 관한 책을 증보 편찬하는 기관이다. 선생은 남정철의 추천에 의해 임명 되었고 여기서 일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와 예전에 관한 저술이 매우 많다.

선생은 생활이 안정되자 35세 되던 3월에 비로소 서울에다 집을 마련하여 가족을 옮기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그 동안 축적한 학문적 역량을 십분 발휘하였다. 이해 10월에는 내부주사를 사임하고 남정철 김택영과 함께 대한예전(大韓禮典) 10책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여하여 그 총무위원을 맡아 활동하였는데 이로써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언론계에도 첫발을 내디디게 되어 4월에는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간부로 취임하였고 9월에는 황성신문(皇城新聞) 창간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36세 되던 해(1899) 1월에는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에 취임하여 언론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3월에는 고종황제에게 황후 영입을 촉구하고 장헌세자(莊獻世子: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할 것을 청하는“의진황례편소(擬進皇禮篇疏)”를 올렸다. 7월에는 시사총보의 주필을 사임하고 9월에는 황성신문(皇城新聞) 주필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 주필은 오래 가지 않았다. 37세(1900)되던 10월에는 광문사(廣文社) 편집원이 되어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저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다. 38세되던 봄에 황성신문에 복귀하였다가 9월에는 사장에 취임하였다. 40세되던 9월에 신문 기사가 당국의 비위를 거스리게 되어 체포되었다가 다음날 석방되었다. 이로부터 선생은 언론으로 인하여 종종 수난을 겪게 된다.

42세(1905)되던 4월 민영환(閔泳煥)의 주품(奏稟)에 의해 승훈랑(承訓郞:정6품)의 품계를 받았고 7월에는 민영기(閔泳綺) 윤치호(尹致昊) 등 관원 50여 명과 함께 일본을 시찰하고 그 기행문 동유일기(東遊日記)을 썼다. 11월 20일 일본과 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에“이날을 목 놓아 통곡하다(是日也放聲大哭)”는 논설을 싣고 이 조약에 찬동한 대신들을 매도하였다.

아! 저 개 돼지만도 같이 못한 이른바 정부 대신이란 자는, 자기네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어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어 사천년을 이어온 강토와 오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생령(生靈)을 모두 남의 노예 노릇을 하게 하였다.

고 하면서 통곡 했던 것이다. 이 신문이 나가자 신문은 즉시 압수되고 신문사는 정간처분이 내렸다. 그리고 장지연 사장이하 관련된 사원이 모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듬해 2월 두 달 만에 출옥한 선생은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고 3월에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집위원에 취임해서 5월에는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고 편집업무를 수행하다가 6월에 사퇴하였다. 증보문헌비고는 우리나라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문물제도를 분류하여 정리한 책으로 영조 46년(1770)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미비한 것을 보충하고 수정한 250권 50책이다. 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간행을 위해서 광무 7년(1903)에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고 편집 작업을 시작하여 융희 2년(1908)에 완성하였다.

광무 10년(1906) 4월에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발기하였고 6월에는 조양보(朝陽報) 편집원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신식교육을 하는 휘문의숙(徽文義塾)의 의숙장이 되어 학생들에게 가르칠 고등소학독본(高等小學讀本) 중등수신교과서(中等修身敎科書) 등을 편집하고 또 동국역사(東國歷史) 대동문수(大東文粹)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등을 저술하여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평양 일신학교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이렇게 선생은 정통 유학자에서 점차 개화사상가로 변신하게 되어 봉건적인 유학으로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처할 수 없음을 역설하면서 역사 지리 농학(農學)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서 국민을 계도하고 만민공동회 대한자강회 야학회(夜學會) 등에 참여하여 민중을 계도하였다.

그리고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신문에다 “나라의 빚을 논함(論國債)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보상하자.(斷煙保國債) 금연으로 빚을 갚는 문제(禁煙償債問題)” 등의 논설을 게재하여 민중을 깨우쳤다. 그리고 윤효정(尹孝定) 오세창(吳世昌)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8월에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밀사 사건으로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고종황제가 아들에게 양위하게 되자 대한자강회를 통해서 고종황제 폐위를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민중 계몽운동과 민족자주정신을 고취하던 선생은 일본 통감부의 감시가 심해지자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융희 2년(1908)에 소련 불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그 곳 해조신문(海朝新聞)의 주필에 취임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간악한 침략상을 폭로하여 세계에 알리고 동포들에게 애국심과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그러나 해조신문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둘째 아들이 유학하고 있는 상하이(上海)로 가서 동지들을 만나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논의했다.

그리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배 안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았고 난칭(南京)에 도착해서도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선생은 더 이상 중국에 머물 수가 없어 이해 8월에 상처를 안고 귀국하였다. 선생은 귀국하자 곧바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여러 달 동안 조사를 받았다. 선생이 없는 동안에도 일본 헌병이 와서 가택수색을 하고 맏아들을 연행해서 조사하였다.

망명에서 돌아온 선생은 잠시 몸을 추스린 뒤 다시 조국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융희 3년(1909) 한 해는 실로 지칠줄 모르는 한 해였다. 1월에 교남학회(嶠南學會) 편집원에 취임하여 그 취지문을 작성하였다. 교남학회는 신교육에 관심을 가진 영남 유지들의 모임이었다. 2월에는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정부에 드리는 글(呈政府文)”을 기초(起草)했고 만국 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를 완성했다. 이 만국사물기원역사는 총 28장(章) 360여 페이지나 되는 대작(大作)으로 국한문 혼용이나 한문에 토를 단 정도이다.

그러나 이 전까지는 사서삼경(四書三經) 만 유일한 학문인줄 알고 중국과 일본 만이 이웃 나라인줄 알던 한국 사람에게 구미(歐美)각국의 물물제도를 알게 하는 획기적인 저술이라 하겠다. 그리고 나무 접붙이는 법(接木新法) 화원지(花園志) 과원지(果園志) 등을 편찬하고 채소재배전서(菜蔬栽培全書)도 편찬하였는데 이는 조선 중기부터 일기 시작한 학문상의 실학(實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지 실행할 수 있는 실학(實學)이라 하겠다. 접목신법에는 접붙이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지가위 등 접목에 필요한 도구와 접목 과정 등을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어 한문문장만 읽던 사람들에게는 일대 혁신의 학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7월에는 야학회를 열어 역사와 지리를 강의하여 중국의 역사(資治通鑑)와 중국의 지리(書傳의 禹貢) 만을 알던 선비들에게 단군을 알리고 삼국을 강의하고 삼천리 강토에 애착을 갖게 하였다. 9월에는 진주로 내려가 촉석루에서 개최되는 연설대회에 참가하였고 10월에는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주필을 맡았다. 이 경남일보는 한국 최초의 지방신문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듬해(1910) 4월에 대한 매일신보사 사장 베델(裵說)의 묘비문을 찬하였다.

베델은 역국 사람으로 언론인이다. 한국에 와서 광무 9년(1905)에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여 일제와 싸우면서 한국 사람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베델을 추방하기 위하여 융희 원년(1908) 5월에 영국영사관에다 베델이 한국인을 선동하여 반일 운동을 한다면서 고소하였다. 베델은 영사관에서 재판을 받고 중국 상하이로(上海) 압송되어 3주일 간의 금고형을 살고 석방되었다. 이 때 선생이 상하이에서 베델을 만나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던 것이다. 이 베델이 한국에 돌아와 언론 활동을 계속하다가 융희 3년(1909) 봄에 병사하여 서울 양화진에 묻혔다.

경술년(1910) 8월 한일 합방이 되자 여러 날을 통곡 하혔다. 10월에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명시 4수를 경남일보에 실었는데 이로 인하여 신문이 압수되고 정간되었다. 매천은 한말의 시인이고 우국지사이다. 호남에서 신교육기관을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한일합방의 비보를 듣고 음독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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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911) 진주로 이사하여 날마다 술로서 망국의 한을 달래고 친구들과 비분강개하면서 창주(唱酬)로서 세월을 보냈다.

5월에는 경남일보 주필을 사퇴하고 마산 월영리(月影里)로 이사하였고 56세 때 가을에는 다시 수정(壽町)으로 이사하여 여기서 생을 마쳤다.

선생은 마산에 정착한 7~8년 동안 왕성한 문필 활동으로 민중을 계몽 하였는데 고전전고(古典 典故) 풍속 국학 등 정통 문화를 신문에다 연제하였다. 고재만필(古齋漫筆) 33회, 기창만필(羈窓漫筆) 7회, 만필쇄어(漫筆鎖語) 96회, 만필한화(漫筆閑話 )25회, 송재만필(宋齋漫筆) 16회, 지리관계(地理關係) 5회, 북정록(北征錄) 8회, 관서고사(關西故事) 9회, 조선세시기(朝鮮歲時記) 40회, 조선유고연원(朝鮮儒敎淵源) 125회, 등이다. 그리고 남귀기행(南歸紀行)의 초고(草稿)를 쓰고 대동시선(大東詩選) 일사유사(逸士遺事)를 완성 하였다.

58세에(1921) 7월에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억지로 일어나 소장한 도서를 정리하고 10월 2일 아들에게 “내가 죽은 후에 묘비에 직명을 쓰지 말고 오직 嵩陽山人숭양산인 이라고 만 쓰라”고 유언하고 나라를 찾지 못한 한을 품은 채 눈을 감았다.

10월 29일에 경남 창원군 구산면 독마산(慶南昌原郡龜山面犢馬山:마산시 현동)에 안장하니 묘비는 우당(宇堂) 윤희구(尹喜求)가 찬하였다. 우당은 선생과 함께 사례소(史禮所)에서 증보문헌비고를 찬집하던 분이다.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장 단장(單章)을 받았고 1965년 1월 9일에 한국편집인협회의 결의에 따라 우리나라 유공 언론인 5명중에 한 분으로 선정되었고 1967년 10월 2일 한국 신문편집인협회 성금으로 묘소를 정화하고 묘비를 건립하여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1989년 11월 2일 위암 장지연선생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메년 11월 1일 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하고 학술상 언론상 방송상을 시상하고 있다. 1993년 11월 문화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 동안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에서 선생의 평생 저술을 수집 정리하여 장지연전서(張志淵全書) 10권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