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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 2014. 2. 26. 21:03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 생애(生涯)

선생의 휘(諱)는 복추(福樞), 자(字)는 경하(慶遐), 호(號)는 사미헌(四未軒)이다. 순조 15년(1815) 11월 2일 각산리(角山里: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서 출생 하였다.

7세에 조부 각헌공(覺軒公 諱 儔)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공부가 날로 성취되어 13세에는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능통하였고 점차 자람에 경, 사, 자, 전,(經. 史 子 傳)을 두루 읽어 학문이 순숙(純熟)하였고 23세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학구(學究)에 몰두하였는데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 등을 참구(參究)하면서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25세에 자신을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어 구학입지(求學立志)하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리하여 26세에 때는 연평문답(延平問答)을 주해할 정도로 학문적 틀이 잡혔다. 연평문답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스승 이동(李侗)과 학문상의 문답을 모은 책이다. 그리하여 31세 때는 모원당 강회에 사석(師席)에 임석(臨席)하였고 70세되던 해 봄에도 모원당에서 강의하였는데 그 강의 내용을 담은 강의록(講義錄)이 문집에 편집되어 있다.

41세 시에 훈가구잠(訓家九箴)을 찬술했고 45세 시에 거실을 사미헌(四未軒)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장차 선생의 호가 되었다. 이 사미헌은 중용 13장(章)에서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군자의 도(道) 넷에 나 구(丘:공자)는 하나도 능한 것이 없다(군자(君子之道 四 丘未能一焉)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부모 섬기는 것을 능하게 하지 못하며(所求乎子 以事父 能也) 신하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임금 섬기는 것을 능하게 하지 못하여(所求臣 以事君 能也) 동생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형 섬기는 것을 능하게 하지 못하며(所求弟 以事兄 能也) 친구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먼저 베푸는 것을 능하게 하지 못한다(求乎朋友 先施之 能也)”에 있는 미(未)자 넉자를 취한 것이라 생각 된다. 이 얼마나 겸손한 말씀인가. 선생은 부모 섬기는 일(孝), 임금 섬기는일(忠) 형 섬기는 일(悌), 벗 사귀는 일(信)이 누구보다도 훌륭하였지마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효제충신(孝悌忠信) 네 가지는 아직 내가 다하지 못한 것으로 잠시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거실 문 위에다 “四未軒” 이란 편액(扁額)을 걸고 늘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졌던 것이다.

고종18년 67세 때 선생의 학문과 덕망이 조정에까지 들려 이해 8월에 선공감 가감역(繕工監 假監役)에 제수되고 이어서 9월에는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를, 11월에 통훈대부 경상도 도사(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흔히들 선생을 김흥락(金興洛) 유주목(柳疇睦)과 함께 한말의 삼 징사의 한 분 이라고 일컫는다. 징사(徵士)란 조정의 초빙에 응하지 않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은사(隱士)라고 한다.

또 고종 18년에 조정에서 공조판서 응와 이원조 (凝窩 李源祚)선생에게 시호가 내려지고 예조좌랑 최석규(禮曹佐郞 崔奭奎) 공이 시호 교지를 받들고 내려왔을 때 선생이 영접하는 일을 주례(主禮)하였는데 능숙한 처사는 매우 훌륭하였다. 조정에 돌아간 최공은 임금님께 실제상황을 가감 없이 보고 하였는데 임금께서 들으시고 “아름다운 일이로다” 하시면서 찬탄하셨다고 한다.

55세 때 우산서원(愚山書院)의 복원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우산서원은 상주에 있고 우복(愚伏) 정경세 선생(鄭經世先生)과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선생을 모신 서원인데 대원군 집정 때 훼철되고 이때까지 복원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의제를 고치지 말 것을 청하는 소(請勿改衣制疎)” 를 올렸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국군기무처(國軍機務處)에서 각종 제도를 개혁 공포하면서 의제(衣制)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선생은 위의(威儀) 의례(儀禮) 등을 들어서 반대 상소를 했다. 또 오도학관소(五道學館疏)도 올렸다. 이렇게 선생은 산림(山林)에 은거하면서도 절실한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80세 되던 정월달에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었고 82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고종 37년(1900) 노환으로 와병 중에도 하루에 2,30명씩이나 내방하는 문병객을 일일이 맞이하면서 위의(威儀)가 조금도 흩으러 지지 않았다고 하니 선생께서 평소 안으로 쌓은 정력(定力)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이해 늦은 봄에 환후가 침중(沈重)해짐에 자제에게 장례를 간소하게 하라고 이르면서 “실지에다 마음을 두고 분수대로 행함이 옳다”고 하시고 문인들에게는 성실하게 힘써 행하라고 하면서“마음 세움을 강철 같이 굳게 하고 박실(朴實)하게 행동하라”고 유언하시고 거연(居然)히 서거하시니 향년이 86세 였다. 이해 8월 20일에 저전(楮田) 선영 아래 해좌(亥坐)에 장사하니 회장자가 2000여 명이었다. 그리고 복을 입은 문인도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선생이 서거한 뒤 후손과 후학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현창하는 사업을 경영하였는데 선생께서 일생을 마치신 각산리(角山里)에 유적비(遺蹟碑)가 세워졌고 경남거창군 가조면 당동(慶南居昌郡加祚面唐洞)에 유적비가, 경남 창녕군 이방면 죽전리(慶南昌寧郡梨坊面竹田里)에 유촉비(遺囑碑)가,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慶北金泉市甑山面修道里)에 장구비(杖屨碑)가 세워졌다.

선생은 만년에 이르도록 자신을 닦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하였고 후학을계도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칠곡군 기산면에 있는 구욱재(求勖齋)와 녹리서당(甪里書堂) 그리고 성주군 금수면에 있는 묵방정사(墨坊精舍) 또 경남 거창군에 있는 당동서당(唐洞書堂)에서 왕성한 강학(講學) 활동을 하시니 문인이 700여 명에 이르는 거대한 학단(學團)이 형성 되었다. 문인들의 분포는 경북 중부 이남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과 전라도 무주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사수(四秀) 십 군자(十君子)라는 현철(賢哲)이 배출 되었다.

선생은 평소 성품이 효순하여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고 우애가 유별나게 돈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효는 천성에서 나왔고 인품은 도(道)에 가깝다”고 하면서 칭송하였다. 모부인의 병환에 3년 묵은 쑥을 구해서 뜸질로 낫게 하였고 그 후 노쇠하여 보행이 부자유해지자 업고서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바깥바람을 쏘이게 하였다. 또 “술을 삼가하라” 는 부모님의 훈계를 종신토록 가슴에 세겨 어떠한 자리에서도 한 잔에 그침을 철칙으로 삼았다.

선생은 우애 또한 유별하여 형제가 한방에 거처하면서 따뜻한 자리를 서로 양보하였고 별미가 있으면 동생에게 손수 멱여주었는데 늙어서도 동생을 어린 아이 처럼 보살폈다. 어느 해 겨울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매서운 바람이 불자 자신의 옷자락을 헤치고 동생의 얼굴을 파묻게 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2003년에 사미헌 선생 기념 사업회를 창설하여 해마다 학술 발표대회를 개최하고 사미헌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그리고 향후 추진사업으로 사미헌 문집의 국역과 원사(院詞)의 건립을 계획하여 선생의 학문을 널리 보급하고 아울러 추모사업도 펼쳐나갈 것이라고 한다.

(2)학문(學問)과 사상(思想)

한평생 학구(學究)에만 진념한 선생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선생과 함께 한말 삼학자(三學者)의 한 분이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선생의 문집 19권(본집 11권 속집 2권 부록 6권)속에 용해되어 있는데 그 중요 저술로는 26세에 독서쇄록(讀書灑錄), 40세에 역학계몽(易學啓蒙), 43세에 사서계몽(四書啓蒙) 50세에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 52세에 가례보의(家禮補儀) 58세에 삼강록(三綱錄 ) 62세에 훈몽요회(訓蒙要會), 75세에 문변지론(問辨至論), 77세에 동몽훈(童蒙訓), 80세에 성리잡의(性理雜儀) 등이다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은 선생이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제10도에 근거하여 서술한 것이다. 이 제10도는 송나라 진백(陳栢)의 숙흥야매잠을 퇴계선생이 도표화한 것이다. 숙흥(夙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남이고 야매(夜寐)는 저녁에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한 가지 일도 소홀함이 없고 한 순간도 나태함이 없게 매사에 공경(敬)하여 본심을 보존하고 천성을 기르자(存心養性)는 것이다. 선생의 숙흥야매잠설은 퇴계 선생의 도표를 기본 틀로 하고 이 대산(李大山 諱 象靖)선생의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의 사례에 따라 여러 설을 채집하여 넣고 부록에 정자 주자 등의 설을 수록해서 만든 것이다. 선생은 숙흥야매잠집설 서(序)에서 그 편찬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퇴계 선생의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에 근거하여 퇴계선생의 분장(分章:장으로 나눔)을 따르고 소재(蘇齋 盧守愼)의 본주(本註)를 인용해 놓았다. 그리고 부록은 한강 정선생의 심경발휘(心經發揮)의 예를 따르고 주석은 퇴계, 소재, 한강, 대산 제선생의 설을 간략하게 채집하여 그 뜻을 보충해서 밝혔다. 선조 여헌 선생의 설은 사적으로 추모하는 마음에 간혹 뽑아 기록 했다. 그리하여 이를 합해서 한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숙흥야매잠집설’ 이라 하였다”.

사서계몽(四書啓蒙)은 명초(明初)에 편찬된 사서(四書:대학.중용.맹자.논어)의 주석인 사서대전본(四書大全本)이후에 나온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모은 주석서(註釋書)이다. 그러나 대학과 논어의 주석은 일실되어 없고 중용과 맹자 뿐이다. 선생은 왜 사서에 대해서 다시 주석했는 지를 문인 장상학(張相學)이 선생의 행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서차의(四書箚疑:사서계몽의 처음 편명)는 후유(後儒)들이 경전을 해석하면서 천착(穿鑿:학문을 깊이 파고 들어감)하고 부화뇌동하는 것이 많자 선생은 한결같이 주자의 집주장구(集註章句)의 뜻을 따르면서 후유들의 설을 취사선택하고 또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그 의리를 발명한 것이다.”고 하였다.

가레보의(家禮補疑)는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일상적인 예법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마는 특수한 상황에 따른 의례(儀禮)에는 소략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하면서 그 가례에 명시되어 있지 않는 특수한 의례에 관한 여러 설을 채집하여 보충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례제도는 대체로 주자가례를 따르고 있으나 중국과는 지역적으로 실정이 다르고 주자와는 시대적으로 수백 년의 차이가 있고 또 복잡다단한 인사를 주자가례로 만 적용할 수 없어 선생이 고금의 변례(變禮:특수 상황에 따른 예)를 수집 분류하여 어떠한 장합에도 당황하지 않고 쉽고 명확하게 적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가례보의는 시의(時宜)에 적합하게 관습과 변례를 적극 수용하여 편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문변지론(問辨至論)은 퇴계 선생과 대산 선생의 이기(理氣) 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의 성리설을 뽑아서 무극태극지변(無極太極之辨) 등 58개항으로 나누어 편술(編述)한 것으로 정당한 문로(門路:수단과 방법)와 진적(眞的:참되고 틀림 없음)한 지설(旨說)을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라고 문인 장상학이 선생의 행장에서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퇴계학파 내부의 여러 이설(異說)을 종합 절충하고 종래 퇴계학파로부터 소외되었던 정구, 장현광의 학문을 퇴계학에 연결시키는 성향을 띄고 있다고 최영성(崔英成)교수는 말하였다.

성리잡의(性理雜儀)는 이기(理氣)와 성리(性理)에 관해서 언급한 송나라 유학자들의 학설을 조목별로 부류하여 채록해 놓은 것이다.

역학계몽(易學啓蒙)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대해 설명한 본도서(本圖書)와 괘획(卦劃)에 대해 고찰한 원괘획(原卦劃)과 점치는 법을 밝힌 명시책(明蓍策)과 장재(張載)의 정몽(正蒙)에 관해 주자 등이 해석한 정몽일(正蒙一 )로 되어있다.

보삼강록(補三綱錄)은 조선조 500년에 걸쳐 충신 효자 열녀 1000여 명의 기록으로 그 방대한 기록에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삼강(三綱)이란, 임금은 신하의 벼리(근본)가 되고(爲君臣綱) 아비는 자식의 벼리가 되고(父爲子綱)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된다(夫爲婦綱)고 하는 충(忠) 효(孝) 열(烈)의 이 세 강령이다.

훈가구잠(訓家九箴)은 선생이 41세 때의 저술로서 가족을 훈계하는 아홉가지 잠언(箴言:경계하는 말)이다. 첫째 부모를 잘 섬기는 일(事父母) 둘째 형제 간의 우애(友兄弟) 셋째 부부간의 삼가하는 일(謹夫婦) 넷째 자손을 잘 교육하는 일(敎子孫) 다섯째 제사를 공경히 받드는 일(敬祭祀) 여섯째 손님과 벗을 잘 대접 하는 일(接賓友) 일곱째 친척 간에 돈목(敦睦)하게 하는 일(敦親戚) 여덟째 독서를 힘쓸 일(勉讀書) 아홉째 농사와 길쌈을 부지런히 해야 하는 일(勤農桑) 등으로서 고차적인 이론이 아니고 일상생활에 절실한 규범들이다.

훈몽요회(訓蒙要會)는 선생이 62세 때의 저술로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재라 할 수 있고 동몽훈(童蒙訓)은 의복 음식 언어 걸음걸이 등 20개 조항에 걸쳐 바람직한 생활습관을 형성하는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선생은 아동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교육 지침들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것은 주자가 말한 “사람이 나서 여덟 살이 되면 왕과 귀족이하 모든 서민의 자제를 다 소학에 입학시켜 물뿌리고 마당 쓸고 응하고 대답하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도를 가르친다,(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고 하는 뜻과 부합되는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의 학문 정신은 고차적인 이론보다는 생활과 직결되는 가례(家禮) 가훈(家訓) 인륜 도덕 아동교육 등 실천철학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은 한평생 영달과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산림처사로 일관하면서 학문하는 목적을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성기(成己)와 사물의 완성을 돕는 성물(成物)에 두고 그 실천 방법으로 참되게 알고(眞知)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학문 태도는 “진지(眞知)=실천(實踐)”이라는 등식(等式)이 성립된다고 하겠다.

경상대 최석기(崔錫起)교수는 그의 논문 “사미헌 장복추의 학술과 그 의미”에서 선생의 학술적 특징을 “성리학적으로 이설(異說:다른 헉설)을 대립적 관점에서 만 바라보지 않고 통합하려 하였고 예학에서는 현실에서 실제 행해지는 관습을 수용하려 하였으며 경학(經學) 방면에서는 대전본(大全本:사서의 주석서) 이후의 설을 수용하여 집성(集成)하려 하였고 사상 적으로는 퇴계학과 남명학의 융합 및 정구 장현광의 통합적 학문정신을 계승하였다.”

고 하면서 선생의 학문적 특징을 수용과 회통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선생의 학문자세를 “신중”함에 두고 있다 즉 “장복추는 자신의 설을 제기하는 데는 대단히 신중하였고 .....남의 설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기하는 데는 매우 신중하였다.”고 하면서 선생의 신중한 학문 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 다른 면도 놓치지 않았다. 즉

“남의 견해를 수용하는 데는 과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고수했던 설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남의 견해를 받아들여 다시 이치에 맞는지를 사유하는 자세는 소통에 적극적인 면을 보여 준다.”고 하면서 선생의 학문자세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선생의 학문방법을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첫째 정설(定說)을 지키며 고묘(高妙)한 신론(新論)을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선인(先人)의 설을 묵수(墨守) 하는것이 아니라 의문이 들면 회의(懷疑)하고 회통(會通)을 모색했다. 셋째 하나의 관점을 고수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으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한다. 넷째 매일 차근차근 공부를 해나가며 체험하는 것을 통해 도달한다.” 고 하면서 선생이 선유(先儒)의 학설을 계술(繼述)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다(述而不作)는 공자의 말씀을 잘 따르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선유의 학설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또 선생의 학문 방법은 고루하거나 고집불통이 아니라 융통(融通)자재(自在)한다고 하였고 비근한 것부터 차근차근 공부하여 고차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 학문방법이라고 했다.

선생은 여헌 선생의 8대손으로 가학연원이 깊다고 하겠다. 그래서 선조의 영향을 어느 자손보다도 많이 받았다고 하겠고 선조의 모든 제도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문인 최헌식(崔憲植)공은 선생의 행장에서,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문(禮文)에 있어서 고금이 다르다. 대체로 선조가 행하던 것을 자신이 예를 안다고 해서 경솔하게 고치면 선조는 모르는 것이 되니 심히 미안한 일이다. 만약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없으면 조용히 선조를 따르는 것이 옳다.(至於禮文 古今異 先祖先有所行者 謂知禮而率爾改之 則是以祖先爲不知 甚未安也 若無大悖於義者 則從容從先可也)” 고 하면서 선생의 선조를 따라야 한다는 뜻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녹리고택(甪里古宅)의 가례(家禮)가 남산 종택의 예(禮)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