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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군자 2020. 10. 31. 16:02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주 세명.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엄밀히 말하면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밝혀지는 '천지공사 진법을 설명해주는 안내서'로 <통합경전 서문>입니다.<통합경전> 전체는 본문 포함 기독교 신구약 두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Digest:

에센스 축약다이제스트통합경전.pdf

 

 

 

 

이율곡과 유지와의 러브 스토리

이율곡 선생은 조선시대 천재를 뛰어넘는 동방성인이자 토정 이지함, 북창 정렴, 격암남사고와 같은 도통군자이시다.

조선의 3대 천재 기인(奇人)”이라 불리는 매월당 김시습이 자신의 전생이라 했다. 공자가 환생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습에 대해 ‘전신정시김시습(前身定是金時習, 내 전생은 김시습이었다)’이라고.  blog.naver.com/cleanercw/40122240084

거기에 더하여 “절의를 표방하고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보면 가히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툴 것이며… 백대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이다”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자가 환생하여 매월당으로 왔고 매월당은 율곡으로 환생하여 다시 조선 말에 성포 고민환으로 다시 환생해 미륵부처님이자 천주님이신 증산상제님과 인연을 맺어 천지공사의 추수사명에 깊숙이 개입되었다.

 

♤구월산을 지나 해주   
           고을 이야기♤ 
 
* 1. 황해감사 이율곡과
동기(童妓) 유지사(柳枝詞) 
 
김삿갓은 다행하게도 구월산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 가을철에 찾아왔기 때문에 실감나는 구월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황해도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해주(海州)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어, 이번에는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해주 고을에 발을 들여놓자, 무엇보다도 김삿갓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거유(巨儒)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동기(童妓) 유지(柳枝)와의 연정(戀情)의 애틋한 이야기이다.
이이의 호가 율곡인 이유는 그의 고향이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율곡에서 본딴 것인데, 알밤이 자라고 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며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여성 예술가이자 한국의 어머니상인 신사임당과 그 남편 이원수의 아들이며,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이자 정치가. 우리나라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이다. 신사임당의 초상이 오만원권 지폐의 도안에 쓰이면서, 모자가 모두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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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1574년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 적이 있었다.
황해도 관찰사가 된 것은 이율곡이 몸이 병으로 인하여 몸이 약해져 그것을 이유로 관직을 제수하여도 사양하기를 여러 차례나 하였습니다.
조정은 그의 학식과 품성을 높게 사서 중요한 관직을 제수하여 맡기고자 하였지만 이율곡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한 것이 이율곡이 약해진 몸을 요양하려
황해도 해주에 있는 처가나 황주에 있는 누이집으로
자주 간다는 것을 알고 황해도 관찰사를 하며 요양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율곡은 이를 받아들이고 해주에 간 것입니다.
해주 관아로 가서 선화당 별채에 머무는데 저녁이 되어 주안상이 한 관기에 의해 들려서 들어오고 이어 뒤에는 어린 기생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몇 살인고?”
“열두 살이옵니다.”
얌전한 행동거지에 말투 또한 온순했다. 유지에게 들어본 즉 부친은 선비였고 모친은 양가집 여인이었는데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기적에 오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시침 들려고 온 것이냐.”
너무나 어린 소녀였다. 유지는 아직 갈래 머리 동기였다.
“행수 기생의 명을 받들고 왔사옵니다.”
“아니다. 수종이나 들거라.”
이를 안타까이 여긴 율곡은 딸처럼 귀여워해 주며 늘 옆에 두고 유지와 말벗을 하며 즐겁게 지냈다. 예뻐해 주었으나 율곡은 갓피어난 꽃봉오리를 꺾지 않았다.
얼마 후 율곡은 관찰사 임기가 다되어 이율곡은 서울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린 기생 유지는 율곡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어서 언젠가는 다시 모시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기생에게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수절하다시피 지내며 율곡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1582년 율곡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로 평양으로 가는 길에 해주 관아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날 밤 율곡의 침소로 유지가 찾아왔다.
두 번째의 만남이었다.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율곡은 깜짝 놀랐다. 유지는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갓 피었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대학자와 재회하다니 유지는 가슴이 뛰었고 어쩔 줄을 몰랐다. 유지는 그날 밤 율곡을 모시고자 했으나 율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다시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해가 바뀌었다.
때는 율곡이 48세이던 1583년 가을이었고 율곡은 벼슬을 그만두고 처향(妻鄕)이자 자기의 집이 있는 황해도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에 있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찬성(右贊成)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지만 임금 선조(宣祖)와 끝내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해 있던 차에 나라 안 최고 미녀 국중일색(國中一色)인 유지를 만났다. 세 번째의 재회였다. 여기에서 유지와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시면서 애틋한 마음을 나누었다.
율곡은 한양으로 길을 떠났다. 그녀는 멀리 절에까지 따라와 율곡을 전송해주었다. 저녁이 되어 재령의 어느 강마을에 투숙하게 되었다.
텅 빈 숲 속에서 호랑이가 어흥! 어흥! 울어대는 밤에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유지가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헤어진 남자를 다시 보기 위해 멀리 밤길을 걸어 온 것이었다.
유지는 율곡의 건강 상태와 더불어 이 조우가 생애에서 마지막이 될 것을 예감하고 다시 밤에 찾아간 것이다.
“아니, 이 밤에 무슨 이유로 찾아온 것이냐?”
"공의 명성이야 온 국민이 모두 다 사모하거늘, 하물며 명색이 기생된 계집이야 어떻겠습니까?
그 위에 여색을 보고도 무심하오니 더욱 더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이별하면 다시 만날 기회가 아득하기에
이렇게 감히 멀리까지 왔나이다."
율곡은 여인네가 위험한 밤길을 달려온 것에 율곡은 문을 열고 유지를 맞아들여 가운데 병풍을 치고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날 밤도 율곡은 인을 실천했고, 유지와 몸을 가까이 하지 않아 의를 지켰다.
밤을 꼬박 새우며 담소한 이튿날 아침, 영결(永訣)이 되고만 이별을 할 때 율곡은 그녀에게 장시(長詩) 한 편과 칠언절구(七言絶句) 3수를 지어준다. 이 시편(詩篇)을 적은 두루말이 원고를 유지사(柳枝詞)라 부르는데 원본이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수장(收藏)되어 있다. 너무나 절절한 유지사(柳枝詞), 한 치도 숨김없이 사연을 서술하고 관련 직정(直情)과 별리(別離)의 아픔을 토로하며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노래한다. 
그녀는 율곡이 그다음 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삼년상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율곡의 여자’로 평생을 살았다 한다. -이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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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48세 때 그는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황해도를 방문했다. 거기서 율곡은 황해도 황주 관아에 딸린 기생 유지(柳地)를 만났다. '율곡전서'에 따르면 유지는 선비의 딸인데, 가문이 몰락해 기녀가 됐다. 그녀를 두고 율곡은 이렇게 기록했다.


"날씬한 몸매에 곱게 단장하여 얼굴은 맑고 두뇌는 영리하므로, 내가 가련하게 여겼으나 처음부터 정욕의 뜻을 품은 것은 아니다."


A급 외모에 똑똑한 머리. 요즘으로 치면 명문대를 나온 미모의 배우 김태희쯤 됐지 싶다. 둘은 꽤 친했다. 유지가 율곡을 따랐다. 역시 율곡전서의 한 구절이다.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갈 때에도 유지를 데리고 여러 날 술잔을 함께 들었고, 해주로 돌아올 때에 그녀는 조용한 절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당시 유지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구봉 송익필>의 저자 이종호 교수는 16살이 채 못 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선비의 탄생>을 쓴 김권섭은 율곡이 원접사로 해주에 방문했을 때 율곡은 48세, 유지는 20대 중반이었다고 말한다. 어찌됐건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나는 사이였음은 분명하다.


당시 관습에 비추었을 때 중년의 남성이 20대의 기녀를 가까이 하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율곡은 유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신체 접촉을 피했다.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다.


"율곡과 유지가 서로 몸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은 '도의'를 지키는 일이었다. 여느 기생들 같으면 남정네가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부끄럽게 여기거나 심지어 불쾌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지는 도리어 율곡의 도의에 감복하고 진심으로 따랐다."


그러나 어디 사람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가.
율곡은 시를 지어 유지를 향한 마음을 대신했다.

이쁘게도 태어났네 선녀로구나
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
돌 같은 사내기야 하겠냐마는
병들고 늙었기로 사절함일세
나뉘며 정든 이같이 설워하지만
서로만나 얼굴이나 친했을 따름
다시 나면 네 뜻대로 따라가련만
병든 이라 세상 정욕 찬채 같은 걸
길가에 버린 꽃 아깝고말고
'운영이'처럼 '배항이'를 언제 만날꼬
둘이 같이 신선 될 수 없는 일이라
나뉘며 시나 써 주니 미안하구나

여기서 운영과 배항은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배항이 운영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백 일 동안 절구에 신선약을 찧어주고, 둘이 나중에 신선이 됐다는 고사다. 율곡은 옛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이런 시가 하나 더 있다. 유지가 찾아온 밤에 율곡이 지었다는 시구다. 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율곡의 안타까운 마음이 드러난다.
"문을 닫으면 인(仁)을 상할 것이요/ 동침을 한다면 의(義)를 해칠 것이다"
결국 율곡은 어떻게 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율곡은 문을 열고 유지를 맞아들임으로써 인을 실천했고, 유지와 몸을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써 의를 지켰다. 현명한 선비의 풍모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보답하듯 유지는 율곡이 죽자, 3년상을 치른 후에 머리를 깎고 산 속에 들어가 남은 생을 보냈다고 한다. 종합하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러브 스토리라 할 만하다.

 

 

유지는 열세 살밖에 안 되는 동기(童妓)였지만 , 그녀 역시 이율곡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

그러나 이율곡은 몸이 몹시 쇠약한데다가, 유지의 나이가 너무 어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면서도 몸은 범하지 않았다.

사랑하면서도 몸만은 범하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율곡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인가.

율곡이 유지를 두고 읊은 시를 보면 그간의 심정을 족히 가름할 수 있다.

 

若有人兮海之西 鍾淑氣兮禀仙姿
약유인혜해지서 종숙기혜품선자 

綽約兮意態 瑩婉兮色辭
작약혜의태 형완혜색사 

아아! 황해도에 사람 하나
맑은 기운 모아, 선녀 자질 타고났네
생각이며 자태 곱기도 해라 
맑기도 해라! 그 얼굴이랑 말소리여

金莖兮沆瀣 胡爲委乎路傍
금경혜항해 호위위호로방

春半兮花錠 不薦金屋兮哀此國香
춘반혜화정 불천금옥혜애차국향 

새벽하늘 이슬같은 해맑음이어늘 
어쩌다 길섶에 버려졌는지
봄도 한창 청춘의 꽃 피어날 제
황금 집에 옮겨가지 못하련가 슬픈 그대 아름다움이여

昔相見兮未開 情脈脈兮相通 
석상견혜미개 정맥맥혜상통 

靑鳥去兮蹇脩 遠計參差兮墜空 
청조거혜건수 원계참차혜추공 

처음 만났을 땐 아직 안 피어
정만 맥맥히 서로 통했고
중매 설 이가 가고 없어
먼 계획 어긋나 허공에 떨어졌네

展轉兮愆期 解佩兮何時
전전혜건기 해패혜하시 

曰黃昏兮邂逅 宛平昔之容儀 
왈황혼혜해후 완평석지용의 

이렁 저렁 좋은 기약 다 놓치고서
허리띠 풀 날은 언제런가
아아! 황혼에 와서야 이리 만나다니
그래도 모습은 옛날 그대로구나

曾日月兮幾何 悵綠葉兮成陰
증일월혜기하 창록엽혜성음 

矧余衰兮開閤 對六塵兮灰心
신여쇠혜개합 대육진혜회심 

그래도 지난 세월 그 얼마였던가
슬프다 그늘을 이룬 인생의 푸르름이여 
나는 더욱 몸이 늙어 여색을 버려야겠고
티끌 세상을 마주해서는 마음조차 쉬었으되 

彼姝姿兮妧姩 秋波回兮眷眷 
피주자혜완연 추파회혜권권 

適駕言兮黃岡 路逶遲兮遐遠 
적가언혜황강 로위지혜하원 

저 아름다운 여인이여
사랑의 눈초리를 돌리는가
내 마음 황주 땅에 수레 달릴 때
길은 굽이굽이 멀고 더디구나

駐余車兮蕭寺 秣余馬兮江湄 
주여차혜소사 말여마혜강미 

豈料粲者兮遠追 忽入夜兮扣扉 
기료찬자혜원추 홀입야혜구비 

절간에서 수레 머물고
강뚝에서 말을 먹일 때
어찌 알았으랴 어여쁜 이 멀리 따라와
밤되고 내 방문 두들길 줄을

逈野兮月黑 虎嘯兮空林
형야혜월흑 호소혜공림 

履我卽兮何意 懷舊日之德音 
리아즉혜하의 회구일지덕음 

아득한 들 가에 달은 어둡고
빈 숲에 범 우는 소리 들리는데
나를 뒤밟아 온 것 무슨 뜻인가
옛날의 명성을 그이워서라네

閉門兮傷仁 同寢兮 害義
폐문혜상인 同寢兮 해의

撤去兮屛障 異狀兮異被 
철거혜병장 이상혜이피 

문을 닫는 건 인정 없는 일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은 일
가로막힌 병풍이야 걷어치워도
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

思未畢兮事乖 夜達曙兮明燭
사미필혜사괴 야달서혜명촉 

天君兮不欺 赫臨兮幽室
천군혜불기 혁림혜유실 

失氷泮之佳期 忍相從兮鑽穴
실빙반지가기 인상종혜찬혈 

정분을 못 나누니 일은 틀어져 
촛불을 밝히고 밤새우는 것
하늘님이야 어이 속이리
깊숙한 방에도 내려와 보시나니
혼인할 좋은 기약 잃어버리고
몰래 하는 짓이야 차마 하리오

明發兮不寐 恨盈盈兮臨歧
명발혜불매 한영영혜임기 

天風兮海濤 歌一曲兮悽悲
천풍혜해도 가일곡혜처비

동창이 밝도록 잠 자지 않고
갈라서자니 가슴엔 한만 가득
하늘엔 바람 불고 바다엔 물결치고
노래 한 곡조 슬프기만 하구나

繄本心兮皎潔 湛秋江之寒月
예본심혜교결 담추강지한월 

心兵起兮如雲 最受穢於見色
심병기혜여운 최수예어견색 

士之耽兮固非 女之耽兮尤感
사지탐혜고비 여지탐혜우감 

비단 위에 그 본심은 밝고도 깨끗해
가을 강물위에 찬 달이로구나
마음에 선악 싸움 구름같이 일 적에
그 중에도 더러운 것 색욕이거니
선비의 탐욕이야 진실로 그릇될 터 
계집의 탐욕이야 말해 무엇하나 

宜收視兮澄源 復厥初兮淸明
의수시혜징원 복궐초혜청명 

倘三生兮不虛 逝將遇爾於芙蓉之城
당삼생혜불허 서장우이어부용지성 

마음을 거두어 근원을 맑히고
밝은 근본으로 돌아갈지라
내생이 있단 말 빈말이 아니라면
가서 연화세계에서 너를 만나리.(불교적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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弱質羞低首    

<약질수저수>     

어린 몸 수줍은 듯 고개 수그려

秋波不肯回    

<추파불긍회>     

추파를 보내도 받아들이지 못하네

空聞波濤曲    

<공문파도곡>    

마음은 부질없이 설레건만

未夢雲雨臺    

<미몽운우대>     

운우의 정은 풀지 못했네.

爾長名應檀    

<이장명응단>     

너는 자라서 이름을 떨칠 것이나

吾衰闔己閉    

<오쇠합기폐>     

나는 너무도 늙어 사내가 아니로다

國香無定主    

<국향무정주>     

미인에게는 정한 임자가 없는 법

零落可憐哉    

<영락가련재>     

장래에 영락할 것이 가련하구나

노쇠한 선비와 앳된 동기와의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은 애간장이 타는 일이었을 것이다.

율곡은 동기 유지를 두고 이렇게도 한탄 하기도 하였다.

天姿綽約一仙兒    

<천자작약 일선아>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워

十載相知意能多    

<십재상지 의능다>    

사귄지 십 년에 사연도 많았는데

不是吾兒腸木石    

<불시오아 장목석>     

너도 나도 목석은 아니건만

只緣衰弱謝芬華    

<지연쇠약 사분화>   

다만 몸이 쇠해 사양했을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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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유지에게 써준 친필 초고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율곡이 황해도 관찰사 재임 중이던 39세 때 알고 지낸 유지를,
48세 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율곡리와 해주를 다녀가다
다시 만났을 때 써준 시이다.
(비교: 퇴계 이황은 48세에 단양 군수에 부임해서 관기(官妓)
두향(杜香 18세)을 만 18세 연하 기생과 22년을 사랑을 했다)

젊은 날 좋은 기약 다 놓치고서
이제 황혼(黃昏)의 나이에 와서야 다시 만났으니…,
내생(來生)이 있단 말씀이 빈 말이 아니라면,
가서 저 부용성芙蓉城(연꽃 핀 저승의 신선나라)에서
너를 다시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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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통석(通釋)하면 다음과 같다.
이율곡(李栗谷)이 기생(妓生) 柳枝에게 지어준 시

연약한 체질에 머리를 살짝 숙이고도
눈짓을 보내지 않네.
허공에 들리는 건 파도소리요
운우(雲雨)(섹스)는 꿈이 아닌 것을
오로지 응하는 것은 너의 긴 이름(柳枝)으로
침방(寢房)은 열었으나 내가 쇠약한 것을
국향(國香:官妓)은 정해진 주인 없으나
시들어 (老妓)가는 것이 가련(可憐)키만 하다.

*이율곡이 행주관찰사로 황주를 순시하다
천침(薦枕:잠자리 시중 기생)을 한
유지(柳枝)에게 지어준 시이다

“아름답고 가냘픈 한 선녀
십년을 서로 알면서 의태(意態)도 많았던 것을
내 간장(肝臟)이 목석(木石)이 아닐세.
나이 많아 분화(芬華)를 사랑하는 것일세.”

그 뒤 율곡이 원접사(遠接使)로 황주에 왔으나 유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계미년에 일이 있어 다시 황주에 들르니
유지가 소사(蕭寺)에서 송별(送別)하였다.
율곡이 강촌(江村)으로 돌아오자 유지가 강촌으로 찾아왔다.
그를 위해 지은 시이다.

병신년 사월 스무아흐레 취람 여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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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대현자  이율곡

 

 

10년뒤에 벌어질 일본의 침략을 예언하고 왕을 구한 조선의 관리이자 대현자

 

 

 화석정

임진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에 위치해 있다.

율곡선생은 평소 자주 이곳 화석정에 들러 명상을 할 때면 하인에게 항상 기름걸레로 마루 바닥을 닦도록 시켰다고 한다.

 

 

이율곡 선생은은 국가에 전쟁이 날것을 미리 예언했다. 그의 나이 45세에 전쟁이 있을것을 미리 예언한 그는 당시 조선의 왕인 선조에게 장차 일본이 쳐들어 올것이므로 십만명의 정예군대를 양성할 것을 선조에게 간청올렸다. 그러나 그 주장은 당시 조선에서 10만명의 대병력을 양성할 경우 엄청난 군비의 문제로 경제가 파탄이 날수 있다는 반대주장에 막혀 좌절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전 이율곡선생이 사망하면서 유서를 남겼는데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열어 보라"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율곡 선생이 사망한후 10년뒤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을 정복한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내부의 군대들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반란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외부로 돌려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며 정복전쟁에 나섰다.

 

 

100여년 이상 전쟁속에 살아온 이들 일본군대들은 조총이라는 신식무기와 함께 잘 훈련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그당시 조선은 각 군대가 모여있지 않고 각 마을 단위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소규모의 군대만 흩어져 있었기에 밀려오는 수만명의 군대를 막아낼수 없었고 3일만에 서울의 부근까지 일본군들이 쳐들어오게 되었다.

 

 

이율곡 선생의 말대로 전쟁이 벌어지자 일어나 개성으로 도피하던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칠흙같은 밤에다 여름 장마철의 비가 많이 내려 횟불을 들고도 한치앞도 보이지 않았고 배가 어디있는지 찾을수가 없었다. 왜군들은 불과 하루 정도의 거리에 이미 당도해 있었다. .

 

한편 일본이 침략했다는 소식이 이율곡선생의 집에 전해지자 즉시 가족들은 율곡선생의 유서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모월 모시 밤에 임진강변의 화석정에가서 불을 질러라” 라고 적혀 있었다. 영문을 알수 없었던 가족들이지만 율곡선생의 예언은 단 한번도 틀린적이 없기에 가족들이 가서 그대로 행했다.

 

아침이 되기전에 강을 건너야 하고 강을 건너야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릴수 있는 선조의 일행은 위기에 처했다.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의 관문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던 군대가 패전했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졌던 것이다. 불과 몇시간이면 선조일행은 일본군에게 잡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선조와 서애 유성룡대감, 오성과 한음 대감 일행은 장대같은 빗속에서 횃불을 들고 배를 찾으러 다녔다.

 

그때 강건너편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강일대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율곡이 전한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라는 유서대로 이율곡의 가족이 유서에 적혀있는 정확한 시간에 불을 질러 강가 일대는 대낮같이 환해진 것이다. 한여름 장마의 빗속에서도 평소에 기름을 먹인 정자는 잘 불타올라서, 선조일행은 무사히 배를 찾아 강을 건너 피신을 갈 수 있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을 모시고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피난을 다니다가 왜란이 평정된 뒤에 『징비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일 그의 말을 시행하였다면 나라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랴! 또 그 전후의 계책을 혹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모두 척척 들어맞는다. 만일 율곡이 있으면 반드시 오늘에 맞는 일을 할 것이니 참으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는 명백한 일이다.' 고 진술하면서 율곡의 정확한 예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그당시는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으며 일본과의 교역도 거래도 활발하지 않아 다른나라의 사정을 알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율곡선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10년전에 임진왜란이 발생할 날짜를 미리 알았다. 그때는 일본을 도요      도미 히데요시가 통일하기 전이다. 일본이 곧 통일 될것도 알았던것이다.

2. 일본이 3일만에 서울로 진격한다는 것과자신의 수명도 미리 알고 있었다.

3. 한양함락 직전 밤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것과 피난갈 시기를 알았다.

4. 개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가는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

 

 

이러한 이율곡선생에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율곡선생에게도 스승격이 되는 사람이 있었다. 이율곡선생이 29세에 지었다고 알려진 『천도책』은 송구봉의 저서라는 설도 있다. 송구봉은 서자라서 관직에 등용될수 없었으며 서애 유성룡이 선조에게  천거하여 선조가 만나본적이 있었으나 무지몽매한 선조는 송구봉이란 조선 500년 역사에 드문 인재를 못알아보고 등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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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1. 임진왜란(AD 1592년~1598년 2차에 걸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일본은 이때 이미 유럽을 통해 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선에는 없었다. 초기에는 조선이 밀렸으나 세계역사 제일의 해군제독인 이순신장군은 우수한 대포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장군에 의해 일본의 지원군과 보급군대가 바다에서 거의 몰살되었다. 이때 조선이 군대를 재정비하여 반격을 하였고 명나라의 4만 군대와 연합하여 승리한 전쟁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승리하였으되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며 일본군을 몰아냈을 때는 반격할 수 있는 병력과 물자가 남아있지를 못했다. 더불어 수많은 사망자와 토지황폐화가 되었고 더불어 명나라 군대의 수탈과 약탈로 인해 조선은 처절한 이중고를 겪어 피해를 본 전쟁이 되어 버렸다.   

 

참조2 이율곡선생 요약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45세에 대사간(현재의 장관급의 중책) 의 직책을 맡아《기자실기(箕子實記)》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이때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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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당파의 이해  역사학   

2010. 11. 8. 11:23

http://blog.naver.com/dasan11/120118098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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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조선조 벼슬아치 중 역사책에 이름 석자 올린 인물치고 귀양살이 한번 안 해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조선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궁금증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각종 실록(實錄)에 한 번이라도 이름이 오른 인물치고 귀양살이 혹은 관직삭탈 등의 이유로 한양바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이는 실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떤 이는 귀양을 가서야 비로소 세상이 깜짝 놀라는 베스트셀러들을 누에 명주실 뽑아내듯 줄줄 내놓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잘못을 그리 많이 저질렀기에 이렇듯 귀양살이를 밥 먹듯 했을까?

 

이것이 다음으로 떠올리게 된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그 답은 어렵잖게 구할 수 있었다. 조선조 중기(선조)부터 본격화 된 당파싸움이 그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언필칭 ‘반만년 찬란한 역사…’ 운운하면서도 조선이 극동의 아웃사이더로 빌빌거리면서 이웃나라의 먹잇감 쯤으로 갖잖게 여겨졌던 가장 큰 이유는 기실 ‘사색당쟁’으로 불리는 당파싸움에 기인한 바 절대적이었다는 얘기다.

 

당파싸움의 가장 큰 병폐는 유능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모든 연고를 초월하여 가장 우수한 인력을 등용할 수 있는 이른바 ‘인재 풀 시스템’이 원천적으로 가동불능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A당파가 권력을 잡았을 땐 B파에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녹사자리 하나 얻지 못했고, 어쩌다 B당파의 세상이 되면 어제까지의 재상, 명현이던 A파들은 모두 원배(遠配)를 하거나 혹형을 당했는가 하면 조그만 당하관 자리 하나까지도 모조리 B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식이었다. 자연히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한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였고, 그러다가 이도저도 어렵다 싶으면 반정(왕을 폐하고 자기네를 총애하는 새 왕을 옹립하는)까지 서슴없이 꾀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라고 일컫는 ‘기축옥사’ 때는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천재들이 능력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스러져버리는 통탄스러운 일이 버젓이 자행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때 평양성을 비우고 철수하던 병조판서 황정국이 “기축옥사 때 정언신만 살았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절규하였노라고, 역사는 기록해놓고 있을까…….

 

한데, 조선의 당파를 들어다 보노라면 동인․서인(후에 공서․청서)․남인(이후 청남․탁남)․북인(이후 대북․소북)․소론․노론(이후 시파․벽파) 등 그 분파가 마치 칡넝쿨 얽히듯 마구 뒤얽혀 있어, 역사공부는커녕 사극조차 노인네나 보는 고루한 것으로 폄하하기 일쑤였던 나로서는 도대체 뭐가 뭔지 헷갈리기만 하였다.

 

물론앞에서 나열한 파벌을 큰 틀에서 본다면 이조전랑 자리 때문에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정철에 대한 처분 문제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고,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고, 서인은 남인에 대한 처분을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고, 노론은 사도세자 문제 때문에 다시 ‘시파’와 ‘벽파’로 갈렸다는 식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서투른 수영솜씨로 인터넷 바다를 허우적거려 보아도 걸려 올라오는 내용들이라는 것들이 때론 너무 난해하고 때론 너무 단편적이고 때론 너무 주관적이어서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을 얻지 못하였던 게 사실이다.

 

더욱이, 조선의 명운마저 뒤흔들어 놓은 사색당쟁의 시발점이 한갓 두 선비 간의 사감(私感)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역사 교과서에 명망가로 묘사되어 밑줄 그어가며 달달 외웠던 유수한 인물들이 실은 사적(私的) 감정에 의해 파당을 만들고 허구헌날 싸움질에나 침몰함으로써 민족을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은 주범(?)들이었다는 점 등은 내게 적잖은 충격과 함께 많은 의구심을 안겨 주었다. 아무려면 진짜 그랬을까 하는….

 

하여, 사색당파가 생겨난 근본 원인에 대하여 좀더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이곳 저곳 들쑤셔 본 바, 여기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1,000원짜리와 5,000원짜리 지폐를 통해 매일 얼굴을 대하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정철․유성룡․조식․성혼․이발․우성전․송시열․허목․이산해․정인홍․이이첨․박순․윤두수․이덕형․김성일․윤선도.윤증.채제공.김종수.심환지.정약용 등등 그 면면이 가히 ‘장동건’ 급에 비견될 수 있을 만치 초호화 진용이었던 것이다. 

 

하면, 우리 역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어쩌다가 하나같이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그들에게는 어떠한 연유가 숨어져 있었으며,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담보하면서 스스로 당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을까?

 

이 같은 원론적인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어설프게나마 이 글을 쓰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서, 사색당파의 생멸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해놓은 김동인의 장편소설 ‘운현궁의 봄’을 뼈대로 하고 인터넷과 사료 등을 통해 얻은 신빙성 있는 자료들로 살을 붙여서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생멸 과정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이를테면 ‘내가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정리하기 시작하였던 글이라고나 할까.)

 

전문적인 역사학도의 분석이 아니므로 일부 세세한 대목에서 오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사색당파를 이해하는데는 그런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 내용을 몇 회로 나누어 여기 올려보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을 소개하기 전에 한 가지 강조할 점이 있다면, 그들이 어느 날 잠실체육관 같은데 모여 ‘동인당 창당 발기인대회’나 ‘서인당 창당주비위원회’ 같은 걸 열고 만세삼창으로 창당을 결의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당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시나브로 그야말로 물흐르듯이 분당과정을 밟아 나갔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사책 암기하듯이 이 글을 읽지 말고 옛날 이야기책 대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 글쓴이 김삿갓 -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작성자 김삿갓

 

 

 

'동인'과 '서인'의 탄생 배경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 7년에, 문명이 높던 젊은 선비 김효원(1542~1590)이 전임자 김계휘에 의해 이조전랑으로 천거된 일이 있었다.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는 내외 문·무관을 천거·전형하는 임무를 맡아보는 벼슬이었는데, 장관인 판서(判書)는 물론 의정부의 3정승도 간여하지 못하는 특유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어 낮은 품계(品階)에 비해 중요한 관직으로 꼽히는 자리였다.

 

한데, 이에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이 공식석상에서 강력한 태클을 걸고 나왔다. 이유인 즉, 명종 때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의 집에 갔을 때 그 곳에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봤는데 문명 있는 자가 젊은 나이에 척신(임금과 성은 다르지만 일가인 신하)에 빌붙어 아첨이나 하려 드는 것으로 보아 ‘싹수가 노란’ 자이므로 이조전랑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김효원으로서는,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던 이조민과의 친분 때문에 자주 방문하였을 따름인데 이를 빌미 삼아 심의겸이 자신을 배척하려 하니 이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없었다. 김효원은 우여곡절 끝에 이조전랑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심의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만무였다.

 

한데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그가 이임할 즈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 후보로 천망에 오르게 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심충겸이 사림(士林)에 아무 명망도 없는 사람인데 단지 척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조전랑의 벼슬을 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심의겸은 ‘아무려면 외척이 원흉(윤원형을 이름)의 문객만 못하겠느냐’며 되받아 쳤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김효원과 심의겸 간에는 극렬한 상호 비방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심의겸은 김효원을 일컬어 이전의 원한을 그런 식으로 풀려고 하는 쫀쫀한 인간이라고 비난하였고, 김효원은 심의겸이 제 누이 ‘빽’만 믿고 설쳐대는 비루한 인간이라고 몰아세우는 식이었다.

 

마치 80년대 현대와 대우가 신형차 ‘소나타’와 ‘르망’을 내놓고는 ‘소나타는 차’ 혹은 ‘노망 들린 차’라고 상호 비방전을 극렬하게 전개하였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후 양자간에는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한데 양자 간의 싸움이 점차 확대일로를 걷다 보니 자연히 김효원을 지지하는 쪽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쪽으로 패가 갈리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상황은 장년층과 청년층의 세대간 싸움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심의겸은 비록 척신이었으나 일찍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교류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장년층 학자이자 정치가들과 친분이 있었고, 이에 대해서 김효원은 김종직 학파의 김근공에게 수학하였을 뿐더러 이조전랑으로 있으면서 많은 젊은 사림파를 등용하여 신진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시비는 선조 8년에 이르러 더욱 격렬해지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 파 중 한 쪽에 붙어서 사사건건 시비를 벌이며 반목․질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몰락한 정적(政敵) 훈구파 및 외척세력(윤원형 일파 등)을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처단할 것인가에 대한 큰 입장 차이로 인해 양 계파의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심의겸 일파는 명종 때부터 정치에 참여해 왔던 기성세대가 대부분인 관계로 훈구파․외척의 처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선조 때부터 새로 정치를 시작한 신진세력으로 구성된 김효원 일파는 이들의 처단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김효원은 도성의 동쪽 낙산 밑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시장 터)에 살았기에 김효원 쪽 사람들은 동인(東人)으로 불렸고, 심의겸은 도성의 서쪽 정릉방(지금의 정동)에 살았기에 심의겸 쪽 사람들은 서인(西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치 70년대 ‘동교동계(DJ계)’와 ‘상도동계(YS계)’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요, 사색당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1575년)

 

동인과 서인은 비교적 연로하고 명종 때부터 명망을 쌓아온 허엽(허균․허난설헌의 부친)과 박순(성리학의 대가)을 각각 종주(宗主)로 모셨고, 동인의 중요인물은 이발․송응개․ 박근원, 서인의 중요인물은 윤두수․정철 등이었다. 

 

동인은 야은 길재의 영향을 받은 영남지역 선비들이 주류를 이뤄 ‘영남학파’라고도 불렸고, 서인은 기호지방, 즉 경기와 충청 일대의 선비들로 이루어져 ‘기호학파’로도 불렸다.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동인은 현실비판적인 성향이 강했고, 서인은 상대적으로 현실지향적인 성향이 강했다.       

  

                          

 

 

한편, 당쟁의 폐해로 인해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지경으로 흘러가자, 율곡 이이가 이들의 중재자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아홉 번의 과거를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지던 이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었기에 중재자역을 자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의 중재로 만난 서인의 영수 정철과 동인의 영수 이발의 대면에서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는 불상사가 일어나 동인과 서인 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이는 다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촉발한 중심인물들을 모두 중앙에서 내보내자는 조정안을 냈고, 이 조정안에 따라 나라에서는 그 근원이 되는 김효원과 심의겸을 각 경흥부사와 개성유수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조정책은 오히려 두 파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개성은 이 나라의 중요한 고장이었으나 경흥은 함경도 한 구석에 박힌 외딴 고장이었다. 때문에 개성유수라는 벼슬은 영직이었으나 경흥부사라는 자리는 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벼슬이었던 것이다. 이 조치는 두 파벌을 중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인을 높여주고 동인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비춰져 동인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고 급기야 이 조치의 장본인인 이이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데 그 공격의 양상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선조는 동인 측의 송응개․박근원․허봉을 각각 회령․강계․종성에 귀양보내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 것이 이른바 ‘계미삼찬’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이이는 조정자 혹은 중립자의 위치에서 어느덧 서인의 거두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자연스럽게 동인(주로 영남학파)의 거두는 이황과 조식, 서인(주로 기호학파)의 거두는 이이와 성혼 등 당대의 대석학들로 진용을 재편하게 되었다.

                                                                                                                            -계속-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2|작성자 김삿갓

 

 

 

'남인'과 '북인'의 탄생 경위

 

동인과 서인의 싸움에서 초반 주도권을 잡은 쪽은 동인이었다. 신진세력이다 보니 주로 ‘입 바른 소리’만 골라 했고 이이가 사망한 이후 심의겸 마저 파직되는 등 중심인물이 사라지면서 서인이 흔들리자 자연히 권력의 추가 동인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조 연간 중기로 넘어가면서 동인은 서인을 낡은 정치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기세를 드높였고 이후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모든 건 지나치게 팽창하면 분열되는 게 세상의 이치이듯이 세력이 비대해지다 보니 내부에서 분열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황과 조식이라는 당대 유림 최고의 석학들이 갖고 있던 사상과 철학이 달랐던 터이라 이들의 학풍이 공존하고 있던 동인에 있어서 분열은 어쩌면 예고된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던 사건이 선조 22년에 있었던 조선 최대의 비극 ‘정여립 모반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이황과 조식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임없이 생겨났고 분열의 기운은 곳곳에서 감지되기 시작하였다.(역시 80년대 YS와 DJ가 만들었던 통합민주당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나뉘어 싸움질만 일삼았던 대목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동인 몇몇 거두들의 사감(私感)에서 비롯된 반목과 갈등이었다. 그 중 가장 유치찬란한 것(?) 한 가지만 소개하면 이런 것이 있다.

 

이황의 문하생이자 후일 남인의 거두가 된 우성전(1542~1593)이 평양에 갔다가 기생과 정을 통하였는데, 우성전의 부친 우언인이 병으로 서울로 돌아와 있을 때 당시 평양감사가 우성전이 사랑한 기생을 우성전의 집으로 보내 주었다.

 

마침내 우언인이 죽자 많은 조문객이 왔는데, 그때 원래 우성전과 사이가 좋지 않던 동인의 영수 이발이 우성전의 집에 그 기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부친이 병으로 벼슬을 버리고 왔는데, 아들은 무슨 마음으로 기생을 싣고 왔느냐며 비아냥 거렸다. 이것이 우성전과 이발의 경쟁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남산 밑에 살아서 우성전은 남인, 이발은 북악 밑에 살아서 이발은 북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확실히 쪼개지는 단초로 작용한 사건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저 유명한 ‘정여립 모반사건’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서인의 거두 정철이 있었다.

 

정여립 모반사건이란,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었던 동인의 실력자 정여립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상소가 선조에게 올라와 동인(특히 호남출신)의 선비들이 1천여명이나 옥사 또는 귀양을 갔던 비극적 사건을 말한다.

 

『…전주 출신의 정여립은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西人)에 속하였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東人)에 가담하여 이이를 비롯하여 서인의 영수인 박순·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의 미움을 사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1587년(선조 20)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승복,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이상 네이버 검색)

 

한데, 동인세력이 비대해져 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던 선조는 이 사건을 동인세력 견제에 이용하면서 ‘수사책임자’(위관)로 서인의 거두이던 정철을 임명하였다.

 

다음은 KBS-TV 「한국사 傳」에서 방영하였던 ’시인은 왜 당쟁의 투사가 되었나?‘ 편을 발췌한 내용이다.

 

『…1589년 10월. 역모가 고발된다. 조정 대신들 중에는 역모자였던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동인. 선조는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에게 기축옥사의 수사를 맡기게 된다. 그로부터 1000명의 넘는 선비가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가 시작된다. 

 

혼인을 안 하고 한방에 안질 않아요. 정철이 손하고 우리 손하고는 한방에 앉질 않아. 방에 갔다가 정철이 손이 있으면 그 방에 앉덜 않고 나와버려.”<광산 이씨 후손 인터뷰 中>

                                                              

전라도 나주 지역의 광산 이씨 집안. 200여년 전까지 그들은 성씨를 바꾼 채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후손들은 정철의 후손과 왕래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수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철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을까? 

 

기축옥사 당시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기축옥사 때    멸족 당한 이발의 집안. 사람들은 옥사를 이용해 정철이 개인적인 복수를 한 것이라 여기고 있다.

 

 

 

 

 

"정철이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역적의 변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오늘이야말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날이라 여겨 자신이 신문하는 관원이 되어 일망타진 할 계책을 세웠습니다."<선조실록 84권 中>

 

정철을 위관으로 등용하여 옥사를 다스린 선조. 기축옥사는 선조의 지시로 이루어진 대규모 참사였다. 정철을 이용해 동인의 힘을 눌렀던 선조. 그러나 선조는 기축옥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철을 파직 한다….』

 

당시 정철이 파직 당했던 이유는 건저문제(建儲問題-세자책봉)를 제기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당시 세자로는 공빈 김씨의 둘째아들인 광해군이 가장 유력하였는데, 문제는 광해군이 적자가 아닌 서자(왕비가 아닌 빈의 아들)란 것이었다. 이를테면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때문에 선조는 늙은 나이에 얻은 인빈 김씨의 자식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의사를 영의정인 이산해에게 물어보려 하였는데, 선조의 의중을 꿰뚫어본 이산해는  ‘와병’을 이유로 궁궐에 나가지 않고 말았다. (요즘 말로 하면 아프다는 이유로 ‘땡땡이’를 쳐버렸다고나 할까)

 

당시 영의정은 동인인 이산해, 좌의정은 서인인 정철, 우의정은  동인인 유성룡이 맡고 있었는데, 이산해가 예고없이 ‘땡땡이’를 치자 선조는 다음 순번인 좌의정 정철에게 의중을 물어보게 되었다. 본시 동인과 서인이 광해군을 추천하기로 합의한 사실이 있었던 지라, 정철은 선조의 의중이 신성군(인빈 김씨의 둘째아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광해군을 추천하였다.

 

이에 선조는 격노하고 말았다. 때를 같이 하여 ‘정철이 주색(酒色)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고 있다’는 안덕인의 논척과 양사의 논계 또한 빗발쳤다. 결국 정철은 파직된 뒤 명천․진주․강계 등지를 떠돌며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후 유성룡은 좌의정으로 영전되었고 선조는 서인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다시 동인을 중용하였다. 

 

그 후 조정에는 정철에 대한 처단 문제가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동인 내부에서도 의견이 팽팽히 갈리었다. 이산해 등은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고, 우성전․유성룡 등은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느냐는 온건론을 폈다. 요컨대, 정철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문제로 동인은 결국 분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던 것이다.

 

이산해가 낙북(洛北)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강경파는 북인(北人), 우성전은 남산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온건파는 남인(南人)이라고 하였다. 남북 분당은 또한 학통의 분기이기도 했는데, 북인은 이산해, 정인홍 등 주로 남명 조식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고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이덕형, 김성일 등 영남쪽 퇴계 이황의 문인이 주축을 이뤘다.

 

이것이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기(1591년)된 경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 사진 : 기축옥사 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호남선비들 위폐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3|작성자 김삿갓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핵분열 된 이유

 

옛속담에 뱀은 꿈틀거리는 버릇 평생 못버린댔다고, 오랜 단련 끝에 싸움질이 숫제 체질화되다보니 전란 중에도 그들의 당쟁은 멈추지 않았다. 1594년 남인과 북인은 이조전랑 추천문제로 다시 한번 ‘다구리’를 붙고 말았다. 남인 정경세가 남이공 등이 후임자로 추천한 북인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을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문인이었으므로 이산해는 즉각 유성룡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어댔고, 1598년(선조31년) 끝내 탄핵과 함께 삭탈관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전란 때 도망(고상한 표현으로 '몽진'이라 한다)가기에 급급했던 선조 ․ 조정 대신들과는 달리 북인들은 ‘주전론(主戰論)’으로 일관하며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명분의 우위에 있었다고나 할까.

 

임금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망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선조는 그 책임을 동인에게 돌리며 서인에게 잠시 정권을 주었다가 이를 다시 북인에게 주었다. 서인도 고경명 같은 이름높은 의병장이 나오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의병장의 주류는 단연 북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도 북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입으로만 하는 정치에 신물이 나있던 백성들에게도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문하로 이루어진 북인이야 말로 ‘발로 뛰는(?)’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참신한 세력이었을 터이었다.

 

그러나 배운 도둑질 못 고친다고, 임진왜란이 끝나기 무섭게 북인은 다시 분열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1599년 북인 홍여순이 대사헌에 오르려 할 때 같은 북인 남이공이 이에 반대하자 북인은 홍여순 파(대북)와 남이공 파(소북)로 나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1602년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에 오르면서 소북이 득세하여 정권을 잡고 한동안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대북과 소북이 사생결단으로 치고받는 일이 발생하였다. 세자책봉문제 때문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분조(分朝-나라를 나누어 다스림)까지 한 바 있고 광해군 또한 전란 중 분조의 책임자로서 많은 공을 세운 바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조의 마음이 싹 변해버린 것이었다.

 

제위 35년(1602년)에 서른 두 살 아래의 인목왕후와 재혼한 선조는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그에게 후사를 잇게 하고 싶어 했다. 평소 조선 최초의 방계승통(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 소생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다)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선조는 자신처럼 후궁 소생인 광해군 보다는 정비 소생의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함으로써 이를 떨쳐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두고 북인은 완전히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세자 책봉 이후 16년간 함께 정사를 다룬 노장파인 대북은 당연히 광해군을 지지하였고, 광해군과 인연이 적은 소장파 중심의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하였다. 대북은 아기인 영창대군이 어떻게 국정을 돌보느냐고 주장했고, 소북은 왕통은 당연히 적자가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북의 중심인물은 이산해, 정인홍 등이었고, 소북의 중심인물은 유영경, 남이공, 김개국 등이었다.

 

그러나 영창대군이 세 살일 때 선조가 사망하면서 결국 왕위는 광해군이 이어받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대북정권의 출범이었다. 소북인 영의정 유영경과 병조판서 박승종 등이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34세의 광해군을 두고 3세의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현실적이었다.

 

유영경의 광해군 배척은 상식을 벗어났던 것이기에 심지어 소북 내에서도 반대파가 속출하여 유영경을 지지하는 탁소북(柳黨-유연경당)과, 그를 반대하는 청소북(南黨-남이공당)으로 다시 쪼개지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정권을 잡은 대북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를 요구한 골북(骨北), 육북(肉北)과 이에 반대한 중북(中北)으로 갈라지는 핵분열 사태를 겪게 되었다.(참으로 당 만들어내는 데는 귀신같은 조상님들이었다. 뚝딱 하면 당 하나가 만들어지곤 하였으니까)

 

광해군은 즉위 후 자신을 지지한 대북을 중용해 내정(대동법 시범실시 등)과 외교(등거리외교정책)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이이첨 등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적통(嫡統)인 영창대군을 살해하는가 하면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는 등 실정도 끊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재위 5년만에 터진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이었다.

 

영의정 박순의 아들 박응서 등 문벌의 서자로 태어난 일곱의 서자들, 스스로 '죽림칠현'이라고 부르며 무륜당이라는 거처를 짖고 시와 술을 가까이 하던 이들 일곱명이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 대한 그들의 불만과 배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왜란이 발발하고 곤궁에 놓인 조정은 서자들의 의병참여를 이끌어내려고 그들에게도 과거응시 기회를 주겠다는 공약을 하였으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 정국이 안정을 되찾게 되자 말을 바꾸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심한 제재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 일곱의 서자가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상인의 하인에게 뒤를 밟혀 모두 잡혀버리고 말았다.

 

한데, 단순한 서자들의 강도행위처럼 보였던 사건은 역모로 확대되어 거대한 피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박응서는, 모반에 필요한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강도짓을 했으며 배후에는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있다고 자백하였다.

 

가뜩이나 정통이나 역모에 민감했던 광해군은 광분하였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이후 계속되었던, 세자책봉과 관련한 마음고생이 올곶이 되살아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가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하여 방을 뜨겁게 해서 데워 죽이는 증살을 당하였고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아들 능창군(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구금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드디어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이 폐모론을 놓고 대북권력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가장 강력한 주장을 펼친 이이첨이 실권을 장악하는 대신 이를 반대하였던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김덕함 등은 귀양을 가고 말았다. 조선의 종묘사직에 최초로 대북파 '1당독립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잉행위가 반동을 낳는 것은 세상사의 원리-. 이는 한동안 은인자중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던 서인으로 하여금 반정을 결심케 하는 구실을 만들어 주고 말았다.

 

서인은 광해군의 -명나라도 후금(여진족)도 아닌 - 실리 위주의 중립외교정책을 명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는 한편 그의 폐륜행위 또한 극렬히 비판하다가 결국 광해군 15년(1623) 3월 김류․이귀․김자점․최명길․이괄․이서 등이 주축이 되어 선조의 서손 능양군(인조)을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인조반정이었다.

 

광해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강화도로 유배되고 대북파 이이첨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사실상 북인정권의 몰락아었다.

 

능양군(인조)은 선조가 인빈 김씨에게서 낳은 셋째아들 정원군의 아들이었고, 선조가 총애했던 정원군의 형 신성군의 양자이기도 했으므로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반정의 명분이 있었다.

 

또한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신경희의 옥사’(1615년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능창군을 추대하고 양시우, 김정익 등과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대북파의 모함으로 장살됨)에 연루시켜 처형했기 때문에 광해군과 대북정권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능양군(인조)은 반란세력들에 쉽게 동조될 수 있었고, 중종이 반정 과정에서 소외된 것과는 달리 그는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사태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백성들에게 생각보다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하자 서인은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는 것으로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북인이 우당(友黨)이 될 수 있었던 남인까지 축출해 고립을 자초한 반면 서인은 남인을 끌어들여 정권의 외연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서인은 이런 유연한 정국 운용으로 쿠데타에 대한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서인은 대북(大北)이 일당독재를 추구하다가 축출된 전례를 거울삼아 이원익 외에도 이수광․정경세․이성구․김세렴․김식 등 남인들을 등용해 ‘서남연합정권’임을 내외에 과시하려 하였다.

 

비록 이때 등용된 남인들이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명목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이는 명분상 사대부의 화합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반정 정권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발생함으로써 그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괄의 난이란, 서인 사이에 논공행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에 불만을 품은 부원수 이괄이 변란을 기도하여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을 말하는데, 쿠데타 세력의 내부 분열인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북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을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처형시켰다. 이때 희생당한 대부분의 정치범들은 북인, 특히 대북의 거물들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북인은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잔류파는 서인․남인에 흡수됨으로써 완전히 몰락하여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4|작성자 김삿갓

 

 

 

서남공동정권, 그리고 ‘서인’과 ‘남인’의 주도권 쟁탈전

 

인조가 즉위한 이후 서인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비록 쿠데타(반정)에 의한 정권찬탈이었다곤 하지만, 자신들이 손수 임금을 만들어냈으니 기실 거칠 것이 무어 있었겠는가.

 

한데 일이 이상한 방향에서 꼬이고 말았다. 본시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이었던지라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이어왔던 중립외교정책을 집권 직후 ‘친명배금’정책으로 바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후금으로부터 2차례(정묘호란, 병자호란)에 걸쳐 모진 공격을 받았고, 병자년의 2번째 공격 땐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일 효종)까지 볼모로 바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패전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몽골과의 싸움에서는 40여년간 항쟁을 하였고, 왜군의 공격에 대하여는 7년간의 항쟁 끝에 격퇴한 데 반해 병자호란은 불과 2달만에 조선이 항복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김훈의 베스트셀러 ‘남한산성’은 이를 기록한 글이다)

 

‘주전론’을 주창하였던 서인 정권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을 하자고 박박 우겨댔던 건 서인이었으니 그들이 어떠한 식으로든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해서 서인 정권은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번엔 ‘북벌론’을 주창하게 되었고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 또한 심양에서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악연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터이라 김상헌․송시열 등을 중용하여 불벌계획을 수립하고 군정에 힘썼으나 그 사이 후금이 더욱 강성해진데다 효종마저 급작스레 사망하여 북벌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듯 서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자, 그 동안 은인자중 하며 기회만 살피고 있던 남인은 쾌재를 불렀다. 그리곤 허목을 간판공격수로 내세우고 서인에게 전격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역사는 이를 ‘예송논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송논쟁이란, 효종이 죽은 뒤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자의대비)가 상복(喪服)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는냐 하는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2차에 걸친 논쟁을 말한다.

 

오늘의 시각에서야 그깟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가 뭐 그리 대수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엔 그게 그렇지 않았다. 요컨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정권교체’라는 결과까지 낳은 어마어마한 싸움이 예송논쟁이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유교, 특히 성리학을 중시하여 정치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유교의 덕목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던 때였다. 이에 관혼상재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의식에 있어서 예학 -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 등을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 -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는데, 이 규정을 현실화 하는 과정에서 예학에 대한 학문적 견해차이가 발생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라 할 것인 바, 그 전말을 살펴보면 이렇다.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돌아가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자의대비-당시 효종보다 5살 아래였다)의 복상은 서인의 뜻에 따라 1년(朞年)으로 정하고 곧이어 현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660년(현종 1년) 3월 남인의 허목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송시열 등은. 효종이 인조 때 제2왕자였으므로 계모인 조대비의 복상은 1년설이 맞다고 대항하였고, 남인의 윤휴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장남이나 다름없으니 3년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1년설이 그대로 채택되었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남인의 논쟁을 주도하였던 허목은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송논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1674년 효종의 아내요,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또다시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때도 조대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조대비의 복상문제를 에워싸고 또다시 서인과 남인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서인은 효종이 차남임을 강조하며 9개월(大功說) 상복을 결정하였다. 이에 남인은 효종 사망 때 조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주장대로 1년으로 정해놓았음에도 이제 와서 이를 9개월로 고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부당한 일이라고 들고 일어나며, 전번에 정한 대로 1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종은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이번에는 남인 측의 1년설을 받아들여 조대비로 하여금 1년 복상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남인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2차 예송논쟁이었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장희빈과 인현왕후로 유명한 그 임금 숙종이 즉위하였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5|작성자 김삿갓

 

 

 

‘군강신약’의 숙종시대 - ‘남인’과 ‘서인’의 혈투 1

 

조선 19대 임금 숙종(肅宗) - . 많은 국민들은 그를 ‘희대의 호색한(好色漢)’ 쯤으로나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장희빈(장숙정)이라는 ‘요녀(妖女)’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장희빈은 빼어난 미모와 술수로 궁녀에서 일약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쫓겨나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다. 해서 그녀의 이야기는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수차례 극화되었다. 그때마다 함께 등장하여 장희빈의 교태에 넋을 놓고 침을 갤갤 흘리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였던 것이, 그간 우리가 보아온 숙종의 캐릭터였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숙종이 여자들의 치마폭에나 휩싸여 국정을 팽개쳐버린 나약한 임금 쯤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나약하지 않았으며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국정을 내팽개쳐버린 적도 없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통해 왕권(王權)을 되살리고 신권(臣權)을 쥐락펴락하였던 막강한 권력의 군주였으며, ‘가장 정치적인’ 임금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치게임의 도구’였다고나 할까.

 

1674년, 35살의 나이로 사망한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숙종의 나이는 불과 14살이었다. 100여년만에 ‘적장자’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제왕학을 단계적으로 학습한 후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그는 늘 ‘나는 날 때부터 군왕으로 태어났다’고 자부해왔으며, 즉위 4개월만에 수렴청정을 거두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최대의 당쟁가 송시열을 조정에 들였다 내쳤다를 반복하였고, 임금은 아랑곳없이 학문과 스승만을 중시하는 신하들의 폐단을 막고자 서인에서 남인으로, 다시 소론에서 노론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환국(換局-판을 엎어버리는 것)’을 수차례 반복한 임금이기도 했다.

 

이때 보여준 숙종의 카리스마와 행동력은 조선의 역대 왕들과 비교해봤을 때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재위 6년 - 불과 스무살의 나이 - 에 경신환국이, 15년에 기사환국이, 20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나 그때마다 남인․서인 사이에 정권이 바뀌었고, 이제까지 일어났던 사화(士禍)에서 목숨을 잃은 정승보다 더 많은 숫자가 세상을 등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신권은 왕권에 짓눌리게 되었고 신하들은 숙종의 눈치만 살피는 상황이 되었다. 자칫 잘못해 숙종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렇게 되자 서인과 남인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정글의 법칙’으로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숙종시절에 일어난 세 번의 환국으로 숱한 정치인이 주검이 되어 나갔고, 그 뒤 조선 당쟁사에서 정치보복이 일상화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개국이후 수백 년 간 이어져 내려오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권력 패러다임을 일거에 뒤집어 엎어버린 숙종 - . 이른바 ‘판 뒤엎기의 귀재’로 일컬어지는 숙종의 재위기간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 경신환국(庚申換局)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신권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앞에서 언급한 예송논쟁 자체가 신권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였다. 국왕과 왕비가 승하하였는데 신하들이 상복문제를 놓고 다툰다는 자체가 강한 신권의 반영이라 아니 할 수 없었고, 국왕이 된 천자에게 장남이냐 차남이냐, 혹은 적자냐 서자냐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약한 왕권의 반영이라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숙종은 1675년(숙종 1년) 정월 2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덕원으로 귀양보내는 등 서인을 모조리 축출해버리고 허목과 윤휴 등 남인을 요직에 대거 등용하여 정국을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기호세력의 유생들이 결집하고 있던 성균관을 중심으로 송시열에 대한 구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편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반격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은 여전히 예론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현상과는 별도로 조정은 남인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남인 내부에서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처벌문제가 대두되어 강경론자인 우의정 허목은 ‘청남(淸南)’으로, 온건파인 영의정 허적은 ‘탁남(濁南)’으로 분파되는 등 여전히 조정이 갈등으로 들끓자 이에 염증을 느낀 숙종은 척신(어머니 명성왕후의 사촌동생) 김석주를 이용하여 남인세력을 견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가뜩이나 왕위에 오른 뒤 잦은 병환으로 자리에 눕는 일이 많았던 데다 인조반정이 있은 지 60년도 채 안되는 시기였던지라 언제든지 반정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부담감 또한 적지 않았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김석주는 본시 서인이었지만,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정권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2차 예송논쟁 때 남인측 주장을 지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송시열이 제거되자 다른 서인들이 함께 축출되면서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급기야 서인세력의 발언권마저 완전히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송시열 세력과 다시 손잡고 남인세력을 몰아낼 궁리에 골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경신년인 1680년(숙종 6년) 3월에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집에서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시호를 받은 데 대한 잔치)이 있었다. 이즈음 이번 연회에서 병조판서 김석주,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독주로 죽일 것이며, 허적의 서자 허견은 무사를 매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연회에 불참하였고 김만기만 참석하게 되었다. 그 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다. 일명 ‘유악(油幄)’이라 불리는 이 차일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세도가 높은 양반이라도 일체 사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왕실에서만 사용하였고, 왕의 윤허 없이는 사용 자체가 금지되었던 물건이었던 것이다.

 

한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이 왕의 윤허도 받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빌려가서 썼던 것이다. 숙종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허적의 집을 염탐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참석자의 대부분은 남인이었고 서인은 김만기 ·신여철(申汝哲)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울화통이 터진 숙종은 철원에 귀양가 있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에 앉히고 조정(朝廷)의 요직을 모조리 서인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사단이 이쯤에서 일단락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겠으나, 이런 미묘한 갈등 상황에서 다음달인 4월 '남인박멸'에 골몰하던 김석주가 사주하고 정원로가 고해바친 '허견(허적의 서자)'의 역모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 ‘福자 돌림’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 즉,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소현세자의 손자)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고, 때를 같이 하여 도체찰사부( 조선 시대 영의정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을 통제) 소속의 둔군이 그즈음 별다른 이유 없이 특별훈련을 하고 있다는 동향도 숙종에게 즉각 보고되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완벽한 '정치공작'이었으나, 남인을 축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 숙종이 이를 묵과할 리 만무였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 ·복창군 ·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었으며,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惡子)를 엄호하였다 하여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경신환국(庚申換局)이다.

 

이 환국 이후 드디어 저 유명한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 사진 : 서인의 영수 송시열 영정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6|작성자 김삿갓

 

 

 

‘군강신약’의 숙종시대 - ‘남인’과 ‘서인’의 혈투 2

 

○ 기사환국(己巳換局)

 

 

1688년 10월, 궐 안에 산실청(産室廳)이 세워졌다. 숙종의 후궁 장옥정(장희빈)이 출산을 앞두게 된 것이었다. 벽에는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이 붙고, 바닥에는 짚자리가 깔리고, 그 위로는 백문석과 기름종이가 덮이고, 그리고 그 위에 다시 고운 짚자리와 말가죽이 차례로 깔렸다.

 

내의원 전의(典醫)가 순산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말고삐를 거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며칠 뒤인 10월 27일, 고고(高高)의 성(聲)의 울리며 마침내 왕자가 태어났다. 드디어 숙종이 첫아들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즉위한 지 14년만의 경사였다.

 

돌이켜 보면, 첫 번째 부인 인경왕후(1661~1680, 김만기의 딸)가 죽은 후 국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시 집권세력이던 서인의 송시열․김수항 등이 결정한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인현왕후 민씨)을 새 왕비로 맞아들인 지도 어느덧 6년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후궁 장옥정의 ‘득남’ 소식은 집권파인 서인에게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것이 필경 장옥정의 배경이 되는 남인세력의 입지강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기실 역관(통역관) 장경과 종 사이에서 태어나 5촌 당숙 장현(역시 역관이었다)의 집에서 성장한 장옥정은 경신환국으로 정국이 요동치는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세력과의 결탁으로 조대비(자의대비-인조의 비)전에 궁녀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남인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나타나는데, 숙종이 문안 갔을 때 남인측인 조대비가 의도적으로 장옥정을 연결해주어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도 그렇거니와  당숙 장현이 경신환국 때 역모로 죽은 복선군 형제(三福)의 심복이면서 남인세력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유로 함경도에 귀양을 갔었던 과거지사 또한 남인이 정권탈환의 일환으로 그녀를 궁녀로 밀어 넣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장옥정은 일개 궁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꽤 자주 등장하였는데, 국왕의 총애를 받는 궁녀가 조정에서 논란의 핵이 된 것은 장옥정이 유일하였거니와 비난을 제기한 측이 하나같이 서인이라는 점 또한 당시 서인세력이 장옥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때문에 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장옥정이 숙종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다시금 실권(失權)의 악몽에 떨게 할 수 있을 만치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에는 당시 서인의 심사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장옥정의 어머니가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옥교(8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다가 큰 수모를 당한 일이 그것인데, 당시 이를 주도한 서헌부 지평 이익수가 바로 서인이었던 것이다. 장옥정의 어머니가 비록 천민(賤民)이었다곤 하나 유일한 왕자의 외할머니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옥교에서 내려지고 노비들은 흠씬 두들겨 맞았으며 옥교는 불태워져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요컨대 장옥정의 아들은 사직을 이를 왕자가 아니라 남인가(南人家)의 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서인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숙종을 진노케 하였고, 상황은 오히려 장옥정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왕자 균(昀-후일 경종)이 태어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숙종은 원자정호(元子定號), 즉 세자예정자 정하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한다. 만약 선뜻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

 

이에 서인 일색이었던 조정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중전(인현왕후)이 아직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는 것이었다. 특히 숙종의 처가세력인 민유중, 김만중(김만기의 동생) 등의 반발이 거세었다.

 

하지만, ‘꿈에 시어머니가 나타나 장옥정은 전생에 왕이 죽인 짐승이 환생한 요물(妖物)이므로 가까이 두면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하더라’는 말을 숙종에게 고변하는가 하면 장옥정에게 회초리질까지 하는 등 투기(妬忌)성 언행이 잦아진 인현왕후에 노여움을 갖고 있던 숙종이었던 지라,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사태가 너무 늦어 버린 감이 있었다. 게다가 정적인 남인까지 숙종의 결단을 전폭 지지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결국 처음 얘기를 꺼낸 지 불과 닷새 만에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이를 종묘사직에 고해버렸다. 그리고 장옥정은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다. 명실상부한 ‘장희빈’의 탄생이었다.

 

한데 원자 정호문제가 이렇게 마무리되어 갈 즈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려 조정은 다시 불난 호떡집처럼 시끄러워지게 되었다. 송시열의 주장인 즉, 송나라의 철종은 열 살이 지나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뭐가 그리 급해 간난 아기를 원자로 정하려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며 이에 격분하였고 서인이 집권한 상황 하에서는 원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숙종은 정권을 남인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한 후 남인인 목래선, 김덕원을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서인가(西人家)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있는 한 원자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민씨를 내쫒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안국동 사저로 좇겨나고 그 열흘 뒤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로써 경신환국으로 축출된 지 9년 만에 남인은 정권을 탈환하였으며, 조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궁녀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남인은 서인에게 정치보복을 단행하였다. 그간 서인으로부터 받은 정치탄압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남인의 보복의 칼날은 당연히 서인 영수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향하였다.

 

남인들의 공격이 계속되고, 특히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며 그를 공격하자 숙종은 송시열을 삭탈관작 시킨 뒤 제주도로 귀양 보내 버렸다. 그러나 송시열이 살아있다는 자체를 불안해한 남인은 그를 국문(鞠問-왕의 명령에 의하여 국청에서 범인을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당시 83세이던 송시열은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던 도중 정읍 땅에서 사약을 받고 목숨을 거두었다.

 

이후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시작되었다. 김수흥, 김수항과 홍치상 등 거물 정치인 18명이 죽고 59명이 귀양을 갔으며, 이밖에도 26명이 파직과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100명 이상의 서인들이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기사환국’의 전말인 것이다.

 

○ 갑술환국(甲戌換局)

 

장희빈을 떠올리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인현왕후 민씨이다. 서인의 거물 민유중의 딸로 태어나 숙종의 본부인 인경왕후(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가 즉위 6년만에 스물의 꽃다운 나이로 일찍 죽자 서인의 중심인물들에 의해 국상 중에 급히 후임 왕비로 결정된 인물이었다.

 

원래 왕비에 대한 간택권은 왕실에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당시 대비였던 명성왕후(현종비)가 서인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인세력과 명성왕후의 후광으로 인해 민씨는 손쉽게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 장희빈이 먼저 왕자를 낳게 되자 정치적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서인세력과 함께 궁궐에서 축출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정비가 된 장희빈의 행태가 점차 오만방자해지고 그의 오빠되는 장희재 또한 많은 문제를 야기하자 숙종은 장희빈을 멀리하는 한편 민씨를 폐위한 것에 대하여 후회하는 듯한 언행을 자주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인(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세력의 민암 등은 이를 계기로 반대당인 소론 일파를 영원히 축출해버릴 심산으로 김춘택 등 수십 명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폐비사건 이후 장희빈과 연합한 남인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팽창되는 것이 그야말로 '눈엣가시'였을 뿐더러, 그즈음 새로 사귄 여자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에게 사랑과 정열을 마구 쏟아붓고 있는 중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같은 보고를 받은 이후 되려 김춘택 등을 옹호하고 남인을 맹비난하면서 궁지에 몰아넣어버렸다. 판을 다시 엎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하였던것이다.

 

 그렇다면 숙종은 언제, 어떤 연유로 다시 판을 엎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을까? 단순히 남인의 지나친 세력팽창이 눈에 거슬렸다는 이유만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여기엔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서인의 치열한 물밑 공작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서인의 ‘정권 재탈환 프로젝트’는 쌍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소론의 한중혁이 남인의 막후 실력자 장희재(장희빈의 오빠)와 동평군(인조의 손자 )에게 뇌물을 주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한다’는 '양해각서'를 받아내는 프로젝트였다. 이를테면 남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서인의 정계진출을 도모한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신뢰를 최대한 추락시킨다는 프로젝트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서인은 당시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숙빈 최씨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숙빈 최씨로 하여금 남인과 왕비 장씨의 잘못을 지속적으로 일러바치도록 하였다. 예컨대, 왕비 장씨가 자신을 괴롭혀서 못살겠다는 투정을 숙종에게 자주 하는가 하면 남인에 대하여는 소론측 인사들이 인현왕후에게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식으로 세뇌를 시켜버리는 작전이었다.

 

결국 숙종은 이 같은 서인의 양대 프로젝트에 의해 왕비 장씨와 남인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그들을 내쫓아바리기로 마음 먹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문을 주도하였던 민암에게 사약을 내리는 한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귀양조치하였으며, 폐비 민씨를 지지하던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조정의 요직에 등용하였다. 또한 기사환국 이후 왕비가 된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켜 궐 밖의 취선당에 머물게 하였다. 이것이 병술환국이다.

 

이 환국의 타격으로 남인은 완전히 정권에서 밀려나 다시 집권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그 대신 서인에서 분기된 소론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이후부터는 노 ·소론(老少論) 간에 쟁론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 사족(蛇足)…

 

취선당으로 나간 이후 몇 년 동안 장희빈은 숙종에게서나 역사 속에서 ‘잊혀진 여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 장희빈은 또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또다른 여인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가,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었다고 밀고를 한 때문이었다.

 

내용인 즉, 장희빈이 취선당 뒤편의 사당에 인현왕후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을 꽂거나 화살을 쏘는가 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귀신에게 새 옷을 지어주면서 인현왕후를 죽여달라고 빌었다는 것이었다. 이 밀고로 인해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은 지 두달 뒤 끝내 사약을 받고 말았다.[이를 무고(巫蠱)의 옥(獄)이라 한다]

 

그렇다면, 숙종은 왜 한때 총애하였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리고 장차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게 되었을까.

 

신권이 왕권을 넘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이것은 숙종이 즉위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국정지표’였다. 숙종의 이 같은 의지는 장희빈의 사사를 명하면서 내린 비명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장희빈을 죽이는 것이 ‘국가와 세자’를 위한 조치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숙종의 의지는 세 번의 '환국’으로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싹쓸이 하고 패자에게는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르던 환국, 이를 통해 숙종은 신하를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또한 숙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정략(政略)에 이용당한 측면이 크다. 혹자는 숙종의 여성편력을 꼬집기도 하지만, 조선의 역대 임금치고 축첩을 하지 않은 임금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오히려 축첩이 왕권의 상징으로까지 회자되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유독 숙종 대에서 여자문제가 화두로 대두되었던 것은 장희빈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한명의 첩이 아니라 남인이라는 정치세력의 대표 브렌드마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요컨대 숙종은 환국정치를 통해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아니라, 그들의 뒤에 있는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택하였다는 얘기다.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 나가던 시기 ―. 역관의 딸로 태어나 궁녀가 되고 빼어난 미모와 남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바탕으로 왕비라는 당대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여인 장옥정, 그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숙종은, 이 같은 희생을 대가로 얻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7|작성자 김삿갓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 이유

 

서인은 언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까. 이렇게 서두를 떼는 것이 이 단원의 시작으로 합당하겠으나 갑술환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미 - 뜬금없이 - 소론의 몇몇 중요인물들이 등장해버렸으니 이건 이제 서두로서 온당한 것이 되지 못할 듯 하다.

 

하여, 서인은 언제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기에 갑술환국 이후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가 ― 라고 서두를 바꾸면서 이 단원을 새로이 시작하려고 한다. 

 

노론과 소론의 탄생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의 시계바늘을 10년 정도 거꾸로 돌려놓아야 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잠시 ‘삼복의 변(三福之變)’ 직후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1680년 ‘삼복의 변’으로 정권을 탈환한 서인은 내친 김에 남인세력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또 다른 정치공작을 도모하였다. 김석주․김익환 등이 김환이라는 첩자(정보원)로 하여금 남인 유생 허새(許璽)와 허영(許瑛)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자질케 하여 이들을 비롯한 남인 잔당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 또한 척신 김석주의 계략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김석주는 경신환국으로 물러난 남인들이 자신을 보복할까봐 매우 두려워했다. 김석주는 남인의 암살기도를 우려해 서울에 집을 아홉 채나 구입해두고 하루씩 돌아가며 잤다고 한다. 

 

이렇게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김석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남인소탕작전’을 기획하고는  김환이라는 작자에게 허새의 옆집으로 이사가서 그들과 교분을 튼 뒤 역모기미를 포착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김석주는 사은사(謝恩使-은혜 보답을 위해 파견한 임시사절)로 청나라를 향해 떠나게 되었고, 심복인 김익훈에게 이 일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였다.

 

한데 그즈음 김환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김익훈은 일을 서둘렀고, 결국 김환은 허새와 허영이 인평대군의 셋째아들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고변을 하게 되었다. 연이어 김중하와 김환의 사주를 받은 전익대가 김환과 유사한 고변을 하였다. 불과 일주일 동안에 일어난 이 3건의 고변은 모두 남인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사는 이를 ‘임술고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허새․허영은 사형되고, 남인계열의 다수가 파직․유배되고 말았다.

 

그러나 수사(국청) 과정에서 그와 같은 고변은 사실이 아니라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김석주가 김환을 허새의 이웃으로 이사시킨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작정치라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정국은 들끓었다. 남인은 물론이고 서인의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도 척신을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서인 소장파인 조지겸, 유득일, 유명일 등은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인 김익훈을 조사하여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민정중, 우의정 김석주 등 서인 노장파는 김익훈을 옹호하였다. 서인 내부에서 노장파(노론)과 소장(소인)파의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숙종은 당시 사대부들의 인망이 두텁던 송시열, 박세채, 윤증을 조정에 불러들여 파문을 잠재우려 하였다. 그런데 강직한 성품으로 소장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송시열이 김익훈을 맹비난했던 당초의 태도와 달리 한양에 도착하여 노장파를 만난 이후 돌연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섰다. 김익훈이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소장파의 실망은 컸다. 그들은, 이번에는 윤증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숙종의 부름을 받고 고향 논산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윤증은 과천에서 아버지의 제자인 나량좌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먼저 한양에 와 있다가 이를 전해들은 박세채가 윤증을 찾아갔다.

 

윤증은 박세채와 시국을 논하던 중 조정에 나가는 조건으로 다음의 세가지를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남인과 서인의 화평이었고, 두 번째는 3외척(김만기, 김석주, 민정중)의 배척, 그리고 셋째가 당색이 아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이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겨냥한 것이었다)이었다. 이는 소장파의 주장과도 괘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박세채는 윤증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솔직히 토로하였고, 결국 윤증은 사직 상소를 올린 다음 고향으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박세채 또한 고향인 파산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조정에는 세 사람 중 송시열만 남게 되었는데, 그 역시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요컨대, 서인내에서의 송시열 대 윤증․박세채의 인식 차이가 분당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얘기다.

 

한데, 송시열과 윤증이 갈라선 데에는 윤증의 송시열에 대한 구원(舊怨)도 상당부분 작용하였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7년쯤 거꾸로 돌려 이들의 관계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송시열과 윤증은 본시 사제지간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1673년(현종 14년) 아버지 윤선거(尹宣擧)가 사망하자 윤증은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하였다. 한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남인 윤휴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이를 아주 성의없게 써주었다. 비문의 내용인 즉, ‘강화도사건’이라 불렀던 윤선거의 약점을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갔던 윤선거의 가족은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난을 맞았다. 청군(淸軍)이 밀려오자 윤선거 아내는 오랑캐에 몸을 더럽히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목을 매 자결하고, 또 권순장․김익겸 등 그의 동료들도 자결하였지만, 윤선거는 평민복장 하고 마부로 변장 후 몰래 강화성을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하였다.

 

늙은 부친이 살아있어 봉양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강화도,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외치며 청군에 항전하거나 자결한 상황에서 혼자 성을 빠져나온 사실은 명분을 중시하는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윤선거는 이를 일생의 치욕으로 여겨 이후 벼슬도 마다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갔는데, 당시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았던 송시열이 이를 다시 문제 삼은 것이었다. 윤증은 송시열의 유배지인 장기까지 찾아가 이를 고쳐달라고 졸랐으나 송시열은 자구 몇 개만 고쳐줄 뿐 문구는 고쳐주지 않았다.

 

이는 결국 윤증과 송시열의 감정대립으로까지 이어졌고,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당시 송시열이 살던 곳이 대전의 동쪽에 위치한 회덕(懷德)이고, 윤증이 살던 곳이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이산(尼山)이어서 이를  ‘회니시비’라고 하였다.(윤증은 이때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사망할 때 자신의 비문은 짓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지금도 그의 묘비에는 비문이 없다고 한다)

 

이때에 서인의 영수이자 노장이었던 송시열 지지파가 노론(老論)이 되고 한때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던 윤증과,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하던 젊은 선비들이 윤증을 따르게 되면서 소론(少論)이 되었다. 따라서 그 성향도 노론은 다분히 보수적이었고 소론은 개혁지향적이었다.

 

노론 중심인물은 송시열을 비롯하여 김석주․민정중․김익훈․이선․이수언․이이명․이여․김수항 등이었으며, 소론의 중심인물은 윤증을 비롯하여 박세채․조지겸․오도일․한태동․박태보․임영․이상진․남구만 등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양 파벌은 마주치면 으르릉 대기만 하였을 뿐 완전히 딴 살림을 차리고 나선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1970년대 YS계와  DJ계가 당시 신민당이라는 제1야당의 울타리 안에서 사사건건 대립하였던 것과 유사한 형태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렇듯 오랜 갈등관계에서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던 소론(소장파)와 노론(노장파)의 관계가 마침내 비등점을 넘어 파열음과 함께 완전히 쪼개져버리는 사태가 도래하고 말았으니, 그 단초를 제공하였던 사건이 이른바 ‘무고의 옥’이었다.

 

병술환국 이후 소론이 정권을 잡았을 무렵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동생에게 보낸 서신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는 문구가 있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했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왕비 민씨가 죽은 다음에 장희빈이 취선당 뒤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 신당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조정은 장희빈에 대한 처분 문제로 연일 시끄러웠다.

 

당시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을 붙잡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이때 좌의정이었던 노론 이세백은 세자의 청을 외면했고,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눈물을 흘리며 세자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당시 정국은 세자에 대한 지지여부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고, 서인 중에서도 온건파였던 소론은 후일 왕위를 잇게 될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소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희재와 무속인, 그리고 장희빈의 주변인물들을 국문하여 죽였으며, 장희빈에 대한 처벌을 만류하였던 소론세력을 조정에서 쓸어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 소론의 중요인물들이 귀양을 가거나 파면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 뒤 조정은 다시 노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8|작성자 김삿갓

 

 

 

경종을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혈투

 

 

마치 수백년 뒤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거라는 걸 예견이나 했던 듯 파란(波瀾)과 반전(反轉)으로 점철되었던 숙종시대는 1720년 6월 숙종이 즉위 45년 10개월 만에 승하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20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노론과 소론의 싸움이 정점으로 치닫는 정쟁의 한 가운데에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생생히 지켜보아야 했던 경종. 그런 경종의 등극은, 장희빈을 죽이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노론에게 정치적 박해가 뒤따를 것임을 알리는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경종으로서는 즉위하기까지의 과정 또한 그다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경종(당시는 세자)의 나이는 14세였다. 한마디로 ‘알 것 다 아는’ 나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 엄청난 사건은 골수에까지 사무쳤고 이후 경종은 줄곧 병환에 시달렸으며, 후사도 없었다. (그가 후사를 잇지 못한 이유로, 일설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마신 직후 옆에 있던 경종(당시 세자)의 ‘거시기’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버렸기 때문이라고도 하나, 확인된 사실이 아니기에 긴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숙종은 세자의 이런 약점들을 거론하며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후일 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해에 연잉군에게 왕세자 대신 편전에 참석하여 정치를 배우라는 명을 내렸다. 소론이 대뜸 이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났다. 건강을 핑계로 세자를 바꾸려는 수작을 즉시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소론과 노론 간에 너죽고 나살자는 식의 싸움이 벌어졌고, 이 같은 혼란의 와중에서 숙종이 사망하자 경종이 가까스로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데 워낙 병약하여 ‘종합병원’으로 불리는 경종이다 보니, 즉위 초부터 소론과 노론 간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터져버렸다.

 

첫 번 째 사건은 그해 7월 유학 조중우의 상소에 의하여 비롯되었다. 조중우는 상소를 통해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의 명호(名號-이름과 호)를 높일 것을 건의하였다. 즉 장희빈의 작호(爵號-관작의 호칭)를 빨리 회복시켜 나라의 체모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그때까지 정권을 잡고 있던 노론은 선대왕마마(숙종)의 엄중한 결정을 위배하였다 하여 조중우를 죽이고, 동조자인 박경수 등을 귀양 보내 버렸다.

 

이후 경종을 만만하게 본 노론은 곧바로 또 다른 도발을 획책하였다. 노론계인 성균관 유생 윤지술은 숙종의 묘지문에 장희빈이 민비 시해죄로 처형된 사실을 명백히 기입하자는, 임금 앞에서 감히 하기 어려운 방자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소론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그의 망언을 규탄하고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노론의 비호로 무마되고 말았다.

 

이 두가지 사건을 기화로 노론과 소론은 결국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야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노론은 이정소라는 자를 앞세워, 임금이 비실비실 하는데다 후사까지 없으니 연잉군을 세제로 임명하여 사직이 흔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소론의 반대가 거셌지만, 경종은 노론의 위세에 눌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였던 것이다. 이에 소론 유봉휘가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노론의집중포화를 맞고 유배에 처해졌다.

 

 한데, 보자보자 하니 보자기로 안다고, 그 두 달 뒤 노론은 조성복을 앞세워 이번엔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왔다. 요컨대, 경종이 병도 많거니와 1717년 선대왕(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케한 사례(정유고사)도 있었으므로 왕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경종으로 하여금 아예 정사에서 손을 때라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경종은 이 요구 또한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론의 좌참찬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이 간절히 말리고 중앙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학생 및 지방의 유생까지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취소를 간청하고 나섰다. 게다가 당사자인 연인군 또한 4차례나 이의 철회를 간청하고 나섰다. 노론은 결국 자신들의 주장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종은, 한 번 내뱉은 말 바로 거둬들이는 건 체통에 관계된다고 생각하여 "나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내려버렸다. 그러자 노론측은 경종의 마음이 대리청정 쪽으로 굳어졌다고 판단하여 왕명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대리청정 요구 취소'를 다시 '취소'하고는  재차 대리청정을 요구하게 되었다.(이를테면 경종과 노론간의 심리전 양상이었다고나 할까)   

 

노론의 태도가 다시 대리청정 요구 쪽으로 선회하자 이번에는 경종이 적이 당황하였다. 의례적인 '립서비스' 차원의 '외교적 하교'일 따름이었는데 노론측이 이를 자신의 참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경종은 소론 조태구를 불러들여 이의 해결을 요청하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대리청정은 숙종이 춘추가 높은데다 병이 중하여 부득이 행한 조치였으나 지금은 전하의 나이가 불과 34세이고 즉위한지도 1년밖에 안될 뿐더러 병세 또한 숙종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므로 대리청정은 부당한 것'이라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다.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 대신들도 다른 명분이 없게 되었다. 이에 노론 측은 얼마 전 재차 올렸던 대리청정 요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또다시 이의 '취소'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대리청정 요구를 두고 일관된 명분을 보여주지 못한 노론 측에 여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졌음은 물론이고, 정적인 소론으로부터도 무차별 적인 비난성명이 연일 쏟아져 나왔다.

 

한편, 명분에서 앞서있던 소론은 이 기회에 노론을 박멸하기로 하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띄워버렸다. 그 해 12월 김일경 등 ‘7인의 특공대’가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노론의 4대신(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에게 '부당하게 정권교체를 획책한 역모자'라는 죄를 뒤집어 씌워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 상소 ‘한 방’으로 갑술환국 이후 지속되어 왔던 노론의 권력기반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동안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물경종’이라는 비아냥까지 감수해야 했던 경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4대신을 파직한 후 지방으로 내쫓아버렸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 또한 대부분 조정에서 쓸어내 버렸던 것이다.(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판 엎기(환국)’이다보니 적절한 타이밍에 이를 제대로 한번 써먹은 셈이다)

 

그리고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을 기용하는 등 소론의 중심인물들을 정권의 최일선에 배치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소론정부시대’의 도래를 만방에 알렸다.

 

한편, 조정을 장악하면서 탄력 한번 제대로 붙은 소론은 이 절호의 기회를 어찌 헛되이 보내랴를 줄창 외치며 노론측 인사들에 대한 축출작업을 더욱 가속화하기 시작하였다.

 

한데 타이밍 한번 절묘하게도, 그즈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이란 지관이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고 모의하였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 : 칼로 살해, 소급수 : 약으로 살해, 평지수 : 모해하여 페출)을 들고 나와 주었다.(하지만 소론이 노론 척결을 위하여 목호룡을 매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숙종 말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노론이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었는데, 신분상승을 위해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곡예를 하던 목호룡이 소론에게 권력이 넘어가자 새삼 예전의 음모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김용택․이기지․이희지․심상길․홍의인․김민택 등 대부분 노론 4대신의 자식 또는 조카, 혹은 추종자들이었다.

 

조정은 다시 발칵 뒤집어졌고, 노론의 운명은 벼랑 끝에 매달린 형국이 되었다. 경종은 기다렸다는 듯 국청을 세웠고 관련자들을 모조리 처단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쫓겨가 있던 노론 4대신 또한 한양으로 압송하여 도륙을 내버렸다.

 

당시 노론의 피해상황을 보면, 사형된 자가 20여명, 맞아 죽은 자가 30여명,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끌려와 죽은 자가 13명, 귀양 114명, 자살한 부녀자가 9명 등으로, 졸지에 불어닥친 피바람으로 노론 집안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데, 이 모해음모사건의 보고서에는 왕세제 연잉군도 가담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전례로 봤을 때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를 왕자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을 뿐더러 연잉군이 대비 인원왕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까지 내놓겠다는 배수진을 치며 결백을 호소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노론을 치죄하는 과정에서 소론은 강경파인 준소(峻小), 주모자만 처형하자는 온건파인 완소(緩少), 왕세제의 보호를 표방하는 청류(淸流) 등으로 나눠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 사건을 폭로한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하여 역사는 이를 ‘신임사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임사화 이후 조정은 소론세력의 독무대였다. 하지만 늘 비실비실하던 ‘비운의 왕’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만인 1724년 8월, 소론이 권력의 단 맛을 채 음미하기도 전에 훌쩍 세상을 떠났으며, 그를 떠받쳤던 소론의 전성시대도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역대 임금 중 ‘가장’ 오랜 기간(52년)을 재위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살았던(83세) 타이틀 2관왕의 소유자 '영조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9|작성자 김삿갓

 

 

영조시대① - 탕평(蕩平)정국

 

조선시대 궁궐에서 근무한 여자들 중 실제 궁궐 살림을 책임졌던 상궁 이하 실무자들의 품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궁,상의(정5품)⇒상복,상식(종5품)⇒상침,상공(정6품)⇒상정,상기(종6품)⇒전빈,전의,전선(정7품)⇒전설,전제,전언(종7품)⇒전찬,전식,전약(정8품)⇒전등,전채,전정(종8품)⇒주궁,주상,주각(정9품)⇒주변치,주치,주우,주변궁(종9품)

 

위에서 나열한 다양한 궁녀의 명칭은 오늘날로 볼 때 행정서기보․전기주사…등등에 해당하는 직류․직급별 분류라 할 것이고, 평상시에는 단지 '상궁'과 '나인'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나인은, 궁중에서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종5품 이하의 궁인직 여인을 말한다. 그러다가  대체로 35∼36년쯤 근무하면 정5품을 제수 받게 되어 이때부터는 ‘상궁’이라 불리었다.

 

그렇다면, 『무수리』는 어떤 일을 맡은 여인이었을까. 각 처소에서 물 긷기, 불 때기 등 험한 잡역을 맡아 나인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을 통칭하여 무수리라고 불렀다. 그들은 대부분이 기혼자로서, 가슴에 패(牌-출입증)를 달고 주로 궁 밖에서 출퇴근을 하였는데, 궁녀가 정규공무원이었다면 무수리는 이를테면 잡급직 혹은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

 

조선조 21대 왕 영조는 바로 이런 무수리의 아들이었다.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재임 중 3명의 왕비(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두었으나 슬하에 아들은 한 명도 두지 못했다. 정작 그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주인공들은 장희빈과 무수리 최씨 등 이른바 ‘창밖의 여자’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경종을 낳은 여인이 장희빈이요, 영조를 낳은 여인이 무수리 최씨였던 것이다. 더욱이 최씨는 결혼까지 한 전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말하자면, 경종과 영조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긴 자식들이었다는 얘긴데, 요즘 같으면 만사 재치고 가정법원부터 직행하였을 중차대한 가정파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궐 내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잔치까지 성대히 벌어졌을 터이니, 세상 참 불공평(?)하단 말밖에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다.

 

각설하고, 영조에게는 이처럼 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태생적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즉위 초기엔 일부 반대파 - 특히 소론 강경파 - 에서 그를 임금으로 간주하지 않는 행태까지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임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길이야 말로 이를 불식시키는 첩경임을 직시하고 평생 근신하는 자세로 국태민안을 위하여 온 몸을 던짐으로써 조선의 발전을 크게 앞당긴 입지전적인 임금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즉위와 함께 영조가 내지른 제일성은 ‘탕평책(蕩平之策)’이었다. 기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붕당의 폐해가 누구보다 뼛골 깊숙이 와 닿았을 것이었다.

 

영조는 이를 몸소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자신과 대척점에 있었던 소론의 이광좌․조태억을 영의정과 좌의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세제 책봉을 격렬히 반대하였던 유봉휘를 우의정으로 발탁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러면서 조정의 기강을 다잡는 차원에서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만들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 첫 번째 타켓은 뭐니뭐니 해도 ‘7인의 특공대’중 대장 격이었던 김일경이었다. 때마침 노론 송재후로부터 신임사화 조사결과서(교문)에 연잉군 시절의 영조를 음해(경종을 독살하려했다는)하는 문건이 있으므로 김일경을 단죄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 상소 이후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처에서 빗발쳤다.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심문)하였으나, 영조에게 ‘나으리…’ 운운 하며 임금을 임금으로 대하지 않는 방자함으로 일관하던 김일경은 끝내 공모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처형되었다.

 

또한 노론 역모설을 고변하여 신임옥사의 또 다른 단초를 제공하였던 목호룡도 친히 국문하였으나 같은 행태를 보임에 따라 당고개에서 목을 자른 후 3일간 거리에 매달아놓는 참형을 시켜버렸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하였던 나머지 6명도 귀양을 보내버렸다. 영조의 왕세제 시절 소론이 저지른 행위들이 모함으로 속속 드러나고 공작정치에 대한 비난이 비등해지자 기를 편 노론이 다시 벌떼처럼 소론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영조는 이광좌, 조태역, 유봉휘 등 소론 핵심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민진원, 정호, 이관명 등 노론측 인사들로 진용을 다시 짜는 대대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아울러 노론의 4대신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임옥사를 ‘거짓으로 죄를 꾸민 것’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신원하는 조치를 단행하는 한편 과천에 노론 4대신을 기리는 사충서원도 세웠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하지만 노론 측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영조를 압박하였다. 이를테면 즉위를 도와준 자신들에게 정치적 빚을 갚으라는 ‘빚 독촉’이었던 셈이다.(이 정도면 지지세력이 아니라 반 공갈․협박세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싶다) 특히 민진원, 정호 등이 주동이 되어 신임옥사에 대한 보복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국정의 제1목표로 설정하였던 영조로서는 소론의 반발이 뻔히 예상되는 이 같은 주장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노론은 ‘얼음과 숯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빙탄불상용)’는 논리를 내세우며 차제에 소론과 노론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다시 압박하고 나왔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는 한편, 이로 인하여 정국이 다시 정쟁으로 혼란에 빠지자 전가의 보도 같은 ‘판엎기(환국)’를 통해 이를 타개하였다.

 

 

민진원, 정호 등 노론 대신들을 전격 파면시켜버리고 그 자리에 얼마 전 몰아냈던 소론의 이광좌, 조태억 등을 다시 기용하는 한편 소론세력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그리고 경종 연간에 있었던 세제책봉 상소 건과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 상소 건 등을 모두 불충(不忠)한 행위로 규정하였다. 하여, 을사처분에 의하여 ‘사충(四忠)’으로 신원되었던 노론의 4대신은 졸지에 ‘사역(四(逆)’으로 처지가 뒤바뀌고 말았다.

 

그런데 즉위 4년째 되던 1728년 3월, 뜻하지 않은 반란이 일어났다. 한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과격세력이 경종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의 교체를 기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름하여 ‘이인좌의 난’이었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주군을 잃은 소론은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 일부 소론 과격세력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축출되어 있던 남인의 급진세력을 포섭하여 영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설의혹이 있으며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몰아내고 밀풍군(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왕으로 추대하는 모반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모반를 정당화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박필현 등은 영조 즉위 직후부터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지방의 유력인물들을 포섭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양과 지방에 속속 조직이 만들어졌고 지역별 대표도 선임해놓았다. 아울러 평안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도 구어 삶아 놓았다.

 

이윽고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의 동생 심유현의 말("주상께선 승하하시기 전 검은 피를 쏟으셨다"는 말)을 빌어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전국 곳곳에 이 같은 내용의 괴문서가 돌아다녔다. 이들은 이 소문에 동요를 일으킨 양민, 노비, 화적 등을 군사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았다. 동기가 모호해졌던 것이다. 때문에 동조자들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용인에 퇴거하여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에 의해 모반계획이 조정에 고변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김중만 등은 반역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영조는 모반자들의 색출을 명령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반역세력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1727년 3월 15일 청주의 이인좌가 청주성을 습격하여 병사(兵使) 이봉상(이순신의 손자), 군관 홍림 등을 살해한 뒤 성을 접수하였다. 그리고는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하고 스스로를 대원수라 지칭하며 곳곳에 격문을 만들어 붙이고 관의 곡식을 풀어 민심의 동요를 획책하였다. 그는 모든 군사에게 흰옷을 입히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인좌의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하였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새로 도순무사(변란이 일어났을 때 지방에 파견되어 군무를 맡기도 하고 지방관들의 비정(秕政)도 살폈던 벼슬)에 임명된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고 말았으며, 청주성을 지키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성에서 밀려나온 뒤 상당성에서 패함으로써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것은 소론이었다. 그러나 주모자 대부분이 소론측 인사였다는 이유로 인해 이후 소론의 입지와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반면, 영조는 이 사건으로 국정의 제1목포로 설정하였던 탕평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해 나갈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소론측으로서는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반란이었고, 영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론을 정책에 반영할 명분이 제공된 고마운(?) 반란이었던 셈이다. 왕을 제거하려 한 반란이 도리어 왕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니, 이런 역설이 세계의 반란사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이인좌의 난이 진압되고 정국이 안정을 되찾아가자 영조는 당파싸움 타파에 의한 탕평의 실현이라는 명목 하에 새로운 정국운영방식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조문명․조현명 형제와 송인명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노․소 안배의 공동정권을 구성하는 탕평책이었다.

 

그는 노․소론간의 ‘충역(忠逆-충신과 역적)시비’를 똑같이 인정하고 똑같이 처벌한다는 ‘양시쌍비(兩是雙非)’ 논리에 의해 편파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때까지 노론과 소론 간에 충역시비가 상반되었던 신임옥사에 대한 판정을 절충해 이른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다. 그리고 소론의 조문명․조현명․송인명․서명균 등과 노론의 홍치중․김재로․조도빈 등 탕평파 인사를 주축으로 ’노․소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정책을 실현하였다.

 

영조는 관직을 임명할 때에도 반드시 노․소론 관원을 1:1로 배치하는{쌍거호대(雙擧互對)}정책을 시행하였다. 예컨대,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吏曹)의 인적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을, 참의에 소론 서종옥을 앉히면, 전랑에는 노론 신만을 앉혀 상대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리하여 정국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지만, 늘 명치 깨에 무언가 꽉 막힌 듯한 채증 증세 같은 걸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경종 연간에 자신을 추대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던 노론측 인사들의 신원(일종의 명예회복)문제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는 영조 자신의 도덕성이나 정통성 문제까지도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유처분 이후 정권에 참여한 소론을 간곡히 설득하고 이들의 양해를 얻어 점진적으로 노론의 피화(被禍)자들을 신원시켰고, 1740년 노론 4대신에 대한 완전한 신원과 함께 신임옥사가 조작된 무옥(誣獄)임을 인정하면서 이를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이로써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노론과 소론은 물론 전 백성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영조는 노․소론 사이에서만 진행하였던 종전의 소극적 탕평을 남인과 북인까지 함께 참여시키는 대탕평으로 확대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노․소론을 1:1로 배치하는 방식에서 더 나아가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정책{유재시용(惟才是用)}을 도입하여 오광운․채제공 등의 남인과 남태제․임개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선조 이후 때론 치열하게, 때론 격렬하게, 때론 사생결단으로 싸워왔던 사색당파가 조선 땅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 역사가 이쯤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방점을 찍을 수 있게 흘러왔더라면 이 글도 여기서 끝맺었을 터이고, 조선이란 나라 또한 이즈음부터 강성부국의 토대를 확고히 마련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탕평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몸이 근질근질 해진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며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762년에 터진 ‘사도세자 사건’이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0|작성자 김삿갓

 

 

 

영조시대②-‘시파’와 ‘벽파’의 잉태기  

 

○ 사도세자 사건의 전말

 

1735년 1월, 영조는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을 얻었다. 정비 정성왕후와 계비 정순왕후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데다,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첫째아들 효장세자마저 요절한 후 7년 동안이나 후사가 없어 애를 태우던 상황이었다. 세자의 어머니는 영빈 이씨였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의 탄생은 곧 왕권의 안정을 의미했다. 더구나 마흔이 넘어 얻은 아들이었기에 왕자에 대한 영조의 사랑은 각별하였다. 그만큼 아들에 대한 기대 또한 컸다. 영조는 왕자가 두 살이 되던 해에 서둘러 세자로 책봉하고 세살이 되던 해부터 제왕학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영조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책을 직접 써서 교재로 삼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임금들 중 유례가 없는 높은 교육열이었다. 아니,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기(氣)까지 팍 꺾어버리는 지독한 교육열이었다. 부왕의 기대에 걸맞게 세자는 어린 시절 영특한 자질을 보여 주었다.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까지 실천하였다.

 

영조는 종종 세자를 불러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곤 하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넘치다보니 하루 속히 왕세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주길 바란, 조급한 부정(父情)의 발로였다고나 할까. 한데 언제부턴가 세자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영조는 그럴 때마다 추상과 같은 불호령을 내렸다.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봐 불안했고, 그 추상같은 꾸짖음이 두려웠다. 세자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때문에 세자는 성장하면서 점차 학문보다는 무예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후일 정조가 만들어낸 ‘무예도보통지’의 근간이 되는 ‘무기신식’이라는 책을 만들 정도로 세자는 무예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1749년, 세자가 열 다섯 살 때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게 되었다. 영조는 군사권과 인사권 등의 민감한 사안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사를 세자에게 맡겼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건강문제였지만, 이는 당쟁 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였다. 이를 굳이 ‘승부수’라고 하는 이유는, 영조가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세간의 혐의를 떨쳐내기 위하여 왕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자 수차에 걸쳐 세자에게 정사를 대신 돌보게 하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끝에 단행한 결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수차례에 걸쳐 ‘임금짓 못해먹겠다’(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릴거다)고 몽니를 부린 전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대리청정을 계기로 그들 부자사이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경륜이 부족한 세자가 국정운영에 미숙한 것은 어떠면 당연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영조는 사사건건 세자를 질책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리기 시작하였다.

 

세자는 대리청정 하는 동안 정국을 주도한 노론세력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노론의 전횡이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의 즉위와 관련된 「신임의리(신임사화 때 영조의 정통성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이 처형됐던 일에 대해 영조가 노론이 옳고 소론이 잘못이라고 판정한 일)」와 같은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도 아버지와 다른 견해를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 영조가 세제 시절 노론과 손잡고 경종을 몰아내려 했던 것은 분명 역모로 볼 소지가 있었다. 영조와 노론처럼 경종 때의 행위는 숙종과 영조에 대한 충성이었다고 강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위는 경종의 위치에서 볼 때 분명 역모에 가깝거나 역모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다. 영조 31년(1755년), 나주 객사에 영조와 노론세력을 비방하는 한 장의 괘서가 내걸렸던 것이다. 이는 정국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곧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고, 관련자들은 속속 체포되었다(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또한 역모 가담 누명을 쓰고 이때 체포되었다). 범인은 김일경 사건에 연루되어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윤지를 비롯한 소론의 강경파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노론세력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기도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영조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동안의 지속적인 탕평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론은 여전히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적 반대파까지 끌어 앉히면서 탕평을 유지하려한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소론에 대한 영조의 자제심은 무너져 버렸고, 조정에서는 이후 3개월 동안 거의 매일같이 친국(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수 백명의 소론측 인사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세자의 보호세력이었던 소론은 제거되고, 정국은 노론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국정의 제1목표였던 ‘탕평책’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같은 정국의 변화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세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론은 이 기회에 소론세력을 완전히 박멸할 것을 세자에게 요구하였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한결같이 ‘不從’, 즉 ‘따르지 않겠노라’였다. 또한 노론 유생들의 송시열, 송준길 등에 대한 문묘종향 요청과 노론 4대신에 대한 정려요청 등에 대하여도 그는 '不從'으로 일관하였다.

 

그런 반면 나주괘서사건과 연이어 터진 토역경과(討逆慶科-역적을 토벌한 기념으로 시행한 과거) 투서사건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소론의 반발에 대하여는 온건하게 대응하였다.

 

이러한 세자의 태도 때문에 노론은 세자의 정치적 입장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노론은 세자를 겨냥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이 내세운 것은 ‘세자가 영조임금이 정한 ’신임의리‘의 국시를 뒤집으려 한다’(번안국시-翻案國是)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노론의 정치적 공세에 세자에 대한 모함이 더해지면서 영조의 아들에 대한 의심은 점점 깊어져 갔다. 수시로 아들을 불러들여 질책하기를 반복하였다. 1752년에는 정사를 멋대로 하였다고 크게 꾸짖자 세자가 홍역에 걸린 몸으로 3일 동안이나 눈 속에 꿇어앉아 죄를 비는 안타까운 장면도 연출되었다.

 

아버지의 질책이 심해지면서 세자의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은 커져만 갔다. 세자는 평상시에도 아버지의 호출명령이 떨어지면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아버지를 뵙고 나오던 중 까무러쳐서 혼절한 사건도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생긴 마음의 병, 결코 표현할 수도 풀 수도 없었던 억눌린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인 모습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내린 ‘금주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폭음을 해대는가 하면 외부 여자를 궁 안에 들여 살림을 차리는 등 점점 난폭해지고, 거칠어지기 시작하였다.

 

세자의 병증은 무언가에 억눌린 심리상태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정신병 증세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세자가 앓았던 병은, 공포증, 우울증, 공황발작, 강박증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신경병 증상이 혼합되어 때와 장소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여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었다.

 

세자 스스로도 자신의 병세를 의식하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번은 장인 홍봉한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의 고민을 어루만질 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비밀리에 약제를 만들어 보내줄 것을 부탁한 일까지 있었다.

 

세자는 이렇듯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결코 사리를 분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아이를 낳은 혜경궁 홍씨의 몸조리를 걱정하면서 또 처가의 생일을 직접 챙기는 등 자상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병세를 걱정하면서도 장인에게 한강 이남의 지도와 군사, 말사료, 곡물 등에 관한 책을 구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 군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치적 우군을 잃어버린 데다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회복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60년(영조 36년) 영조가 처소를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기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부자 사이에 이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 줄어들게 된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부자는 몇 달간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세자는 병을 핑계로 부왕에 대한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고, 영조 또한 세자를 만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자인 왕과 왕세자 사이가 멀어지게 되면 반드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세력, 특히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노론의 김상로, 숙의 문씨 오빠 문성국 등은 정순왕후, 숙의문씨, 화완옹주(세자의 여동생) 등을 이용하여 세자를 모함하면서 부자 사이를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영조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즈음 세자가 영조 눈을 피하여 관서지방을 3개월 남짓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또 발생하였다. 이는 모반을 위한 준비로 의심(김귀주의 고변)받기도 하여 세자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노론은 장령 윤재겸 등을 앞세워 세자의 행동을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격노한 영조는 관서여행에 관여하였던 자들을 색출하여 모두 파직시켜 버렸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회복불능 상태로까지 깊어져 갔고, 1962년(영조 38년) 급기야 파국을 예견케 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경기도관찰사 홍계희, 전 형조판서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10여 조목에 걸쳐 나열한 소를 영조에게 올리는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 소식을 들은 영조는 즉시 국청(임금 앞에서 직접 심문하는 것)을 설치하였다. 이 자리에서 나경언은 소매 속에 감추어 두었던 고변서를 꺼내 직접 영조에게 올렸다. 여기에는 10여 가지에 달하는 사도세자의 비행이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었다. 고변서를 읽은 영조의 얼굴은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영조는 고변서를 다 읽은 다음 곧바로 불태워버렸다. 따라서 구체적인 고변내용은 영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였다.

 

“네가 후궁을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였느냐? 그리고 성문 밖으로 나가 방탕하게 놀았다고 하는데, 그게 과연 세자가 할 일이냐?”

 

영조의 말에 따르자면, 세자는 정신병으로 인해 수많은 비행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혹자는 일개 중인 신분이었던 나경언이 어떻게 세자의 비리를 임금에게 직접 고변할 수 있었을까 의아해 하겠지만, 그의 뒤에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였던 노론세력이 버티고 있었으며 영조 또한 그즈음 노론의 정치적 파워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런대로 이해가 되리라 본다.)

 

나경언의 고변 직후부터 세자는 죄수복을 입고 석고대죄를 시작하였다. 죄의 유무를 떠나 일국의 왕세자로서 고변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의 부덕을 자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죄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도록 신하들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임금에게 알리는 이가 없었다. 세자가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침내 세자는, 당시 춘천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의 중심인물 조재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재호는 세자를 돕기 위해 상경하였으나 홍봉한 등의 무고로 사약을 받고 말았다. 세자와 소론세력의 제거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경언은 얼마 뒤 고변내용이 거짓이었음을 실토하였다. 결과적으로 일개 대신의 청지기가 일국의 세자를 음해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셈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처벌을 미루려는 태도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나경언의 배후세력을 조사하라는 신하들의 태도를 꾸짖고 역정을 내기까지 하였다.

 

“나경언이 어찌 역적인가? 오늘날 그대들의 당파다툼으로 인하여 부당(父黨)․자당(子黨)이 되었으니 조정의 대신들이 다 역적이다.”

 

이는 나경언의 고변서에 당파싸움과 관련된 정치적인 내용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세자의 죽음에는 ‘정신병’그 이상의 문제, 즉 정치적인 무언가가 숨어있었다는 얘기다.

 

주지하다시피, 영조가 치세 내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이 당쟁의 종식, 즉 탕평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이 원대한 프로젝트는 세자의 대리청정 이후 영조를 둘러싼 세력(노론)과 세자를 둘러싼 세력(소론) 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무위로 돌아갈 형편에 처해졌고 급기야 나주괘서사건 같은 소론의 역모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나주괘서사건으로 비롯된 ‘을해옥사’ 이후 세자에게는 어떠한 보호세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해 세자를 모함하는 상소는 빗발치듯 올라왔고 그 중에는 세자가 직접 거병(擧兵)해서 무력적으로 대항할지도 모른다는 내용도 상당수 있었다. 영조는 본격적으로 세자의 역모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불과 얼마 전 세자가 관서지방을 몰래 다녀온 일이 또 드러났거니와 그 여행의 목적이 역모를 위한 모병문제 때문이었다는 상소까지 올라온 일이 있었다. 여기에 세자의 무인(武人)적인 기질 또한 모함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심지어 세자가 성밖으로 나가 군사를 모집하고 변란을 계획한다는 모함까지 올라왔다. 요컨대, 영조는 이런 모함의 영향을 받아 세자의 반란을 우려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지 20여일 후, 영조는 마침내 세자를 창경궁 취령전으로 불러냈다. 그때 영조는 비상시에 준하는 군사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모든 호위병들에게 칼을 빼들게 한 다음 궁궐문을 걸어 잠그고 신하들의 출입을 봉쇄하였다. 자신 또한 칼을 빼는 채 영조는 이윽고 세자를 매섭게 추궁하기 시작하였다.

 

“네 이놈! 경성왕후가 내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에(눈앞에) 있다고 하였다.”

 

영조가 내건 혐의는 세자가 변란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죽으면 삼백년 종사는 망하고, 네가 죽으면 삼백년 종사는 보존될 것이니 내 어찌 너 하나를 베지 않고 종사를 망하게 하겠느냐?”

 

그러면서 영조는 세자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명령하였다.

 

“너는 죽을 죄가 있다.”

“신은 죄가 많지만 죽을 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네가 어찌 모르겠느냐? 네가 세자궁 후원에 굴을 파고 상복과 지팡이를 갖다 둔 이유는 무엇이냐?”

 

영조는 세자가 상복을 입고 자신을 저주했다고 의심하였다. 사도세자는 그것이 경성왕후가 사망했을 때 사용한 것이라고 해명하였고, 확인결과 이는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영조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상소를 통해 세자에 대한 인식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정적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세자는 울면서 잘못을 빌었고, 세손 또한 눈물로써 아버지에 대한 관용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영조의 마음을 돌려 세우기에는 이미 사태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영조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직접 뒤주에 못질을 하였다. 움직일 수조차 없는 뒤주 속에 갇혀 세자는 서서히 죽어갔다. 음식은커녕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채 그렇게 뒤주 속에 갇혀 지내던 세자는, 결국 8일 뒤 한 많았던 28년간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였다. 세자가 죽어가던 그 시각, 노론 대신들은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조정은 두 패로 갈리고 말았다. 세자가 광폐하여 변을 자초하였으니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측과 세자가 억울하게 폐위되었다며 이를 동정하는 측으로 양분되었던 것이다. 전자는 노론의 주장이었고, 후자는 일부 비판적인 노론과 남인, 그리고 소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각 정파가 표면에 내세운 명분일 뿐 그 이면에는 숙종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노론과 남인 간의 해묵은 감정대립이 도사리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써서 당파싸움을 막으려 했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는 자신도 서서히 그 수렁 속으로 빠져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장기집권자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친위세력구축에 대한 집착이 영조에게도 예외 없이 나타났던 것이다.

 

영조는 '정파간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완론탕평(緩論蕩平-노.소론 온건론자들이 지지하는 탕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지지하는 노론측 대신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안정된 국정수행을 위한다는 구실로 척신정치를 시작하였다는 얘기다. 나주괘서사건 이후 이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그 중심인물은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었다.

 

김귀주를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은 남당(南黨)이라 불리는 척신당을 조직하였고, 반면 영조로부터 세손(후일 정조) 보필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 홍봉한 일파는 북당(北黨-홍봉한의 집이 정순왕후의 집 북쪽 안국동 위치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척신당을 만들어 이에 대응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호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한편으론 남당으로부터 노론의 우위를 방기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양 당 모두 노론 핵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당시 소론과 남인 쪽에 경도(傾度)되어 있었던 사도세자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였다. 더욱이 '포스트영조'시대에도 노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하여야 할 '공적1호'가 사도세자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물론, 생모인 영빈 이씨와 세자의 누이 화완옹주 등 혈육까지도 노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세자 제거에 전력투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은 김귀주를 앞세운 남당이 주도하였고, 홍봉한의 북당이 동의하였으며, 영조가 최종 판단을 하게 된, 범 노론세력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비록 표면적으로야 강경론(남당)과 온건론(북당)으로 갈리는 모양새를 취하긴 하였지만.

 

그러나 사도세자 사건을 놓고 펼쳐진 보다 큰 틀의 대립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의 책임론을 놓고 불거진「노론 주류」 대 「노론 일부를 포함한 반(反)노론 연합」 간의 대립이었다.

 

세자와 대립각을 세웠던 노론 주류는, 국왕으로서의 자질에 큰 하자가 있는 세자를 죽인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므로 노론대신의 처신에 큰 잘못이 없다고 본 반면, 일부 비판적인 노론 및 소론과 대다수의 남인은 세자가 개인적인 결함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죽일 만 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음에도 정국의 전권을 장악하였던 노론의 집권 주류가 모함하여 죽게 한 것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이 싸움을 노론 내부의 분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노론과 남인 간의 해묵은 감정다툼의 연장선상으로 놓고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이다(이를테면 '노론 벽파', '노론 시파'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론 벽파', '남인 시파'로 보는 학자도 다수라는 것). 말하자면 노론 주류세력에 대항마로 나선 남인세력을 노론 일부 비주류와 몰락한 소론세력이 지원해준 형국이었다는 분석인 것이다.

 

다만, 비록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양측의 다툼의 결과가 바로 ‘벽파’와 ‘시파’의 분기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시각이 아니다. 이러한 입장차이가 「시파」와 「벽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정파 분립으로 구체화 된 것은 정조(正祖) 대에 이르러서였기 때문이다.

 

본시 「시파」와 「벽파」라는 말 자체가 정조의 정책에 어떤 입장을 취하였느냐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즉 ‘시파’란 정조가 펼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책들에 동의하지 않은 무리(주로 노론 주류세력)가 이에 동의하는 무리를 ‘시류에 편승한다’ 고 얕잡아 부른데서 기인하였고, ‘벽파’란 정조의 정책에 동의하는 무리(시파)가 그 반대되는 세력에 대해 ‘시류에 따르지 못하고 편벽(偏僻)되다’고 하여 붙여준 이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조실록'에도 정조 4년부터 시.벽의 분리가 진행되다가 정조 12년 정민시의 상소를 통하여 처음으로 시파.벽파의 호칭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대부분의 문헌에서 시.벽의 용어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정조 8년 이후부터였다고 하니 이 점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그렇다면, 조선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개혁정치의 원조’ 정조시대에 ‘시파’와 ‘벽파’는 어떻게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생멸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1|작성자 김삿갓

 

 

 

정조 즉위 초기의 정국(政局)과 「홍국영 전성시대」

 

모르긴 몰라도, 정조가 요즘 세상에 살았더라면 그의 별명은 필경 ‘이짱’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홈페이지는 연일 손님들로 북적거렸을 것이고, 팬클럽 또한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짱 신드롬’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였을 거라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는 가문 출중하고 학업성적 뛰어난데다 무술실력 또한 탁월한 '엄친아'였기 때문이다.

 

한데 이쯤에서 우려되는 점이 딱 한 가지 있긴 하다. 그의 외모와 관련하여서다. 혹자는 그의

 이름을 들을라치면, 먼저 안성기(영화 ‘영원한제국’)나 이서진(드라마 ‘이산’) 같은 준수한 용모부터 떠올릴 런지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접해온 그의 용모 또한 매우 준수한 편이었다. 마치 안성기와 이서진을 섞어놓은 얼굴형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교과서에 실린 어진(御眞)은 정조의 실제 모습을 담은 것이 아니다. 그건 1989년 제작된 이길범 화백의 상상도일 뿐이다. 워낙 학식이 뛰어났던 임금이었던지라 성군(聖君)의 이미지를 강조하다 보니 ‘곱상한’ 지금의 어진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실제 어진이라 믿어지는 조선시대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에 담겨있는 정조의 얼굴은 그동안 우리가 늘상 보아왔던 정조의 얼굴과 사뭇 다르다. 아니, 사뭇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전혀 딴판이다. 말하자면, 안성기나 이서진 쪽 보다 차라리 야인시대의 ‘무옥이’(개그맨 이혁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쪽에 더 가까운 외모인 것이다.

 

 때문에 KBS-TV는, 이 어진에서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

다’며 「무인(武人) 정조대왕」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하기까지 하였다. 작위적인 느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니 그 또한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각설하고, 그의 생김이 어떠하였든 조선 22대 왕 정조는 조선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임금 중 하나였음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그가 경연에서 날고 긴다는 대신들을 직접 가르쳤음을 증언하는 문헌이 적지 않을 뿐더러 활쏘기 실력이 신기에 가까웠다는 기록(어사고풍첩)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문(文)․무(武)에 두루 뛰어난 정조였지만, 그가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하기만 하였다. 조정을 접수한 노론세력의 노골적인 반대 속에서 온갖 위협과 고초를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손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다가는 자칫 연산군 때 처럼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참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노론세력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손이 비록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하였으되 그는 엄연히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게다가 사도세자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까지 목격한 당사자가 아니던가.

 

때문에 굳이 '삼종(세 임금)의 혈맥'을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세손이 아니라 경빈 박씨의 후손인 은전군이어야 한다는 것이 노론세력의 생각이었다. 나인시절 방애라고 불렸던 경빈 박씨가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그 아들 은전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한 노론세력은 세손을 제거키로 하였다. 당시 세손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였으므로 이런 기회를 살려 속전속결로 끝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선두에 홍봉한․홍인한 형제와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 서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장인이 사위를 제거하려 할 만큼 당론이 모든 것을 압도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세손의 편이었다. 세손의 어머니이자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가 세손의 제거를 결사적으로 막고 나섰던 것이다. 비록 권력유지를 위해 남편(사도세자)까지 버렸던 그녀였지만, 아들을 향한 모성애가 권력욕을 눌러버린 셈이었다. 이로 인해 딸 덕분에 정승자리까지 해먹었던 홍봉한은 잠시 주춤해졌지만, 홍인한은 세손을 제거하겠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홍인한은 세손의 작은 할아버지인 관계로 당초에는 세손 편에 섰었으나 탐욕이 많고 포학하다는 이유로 세손이 배척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당시 권세를 누리던 정후겸에게 붙으면서 세손의 ‘원수’가 된 인물이었다.

 

이로써 ‘이산 대리청정 반대투쟁위원회’는 홍인한과 정후겸의 ‘투톱체제’로 진용이 짜여지게 되었다. 홍인한은 장외(혹은 현장)투쟁을 담당하고, 정후겸이 지휘본부를 총괄하는 역할분담까지 그런대로 마무리지었다.

 

1775년 11월(영조 51년) 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영조가 대리청정의 뜻을 밝혔다.

 

"몸이 매우 안좋으니 공사를 펼치기가 어렵다. 내가 국사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친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알겠는가? 국사나 조사(조정의 일)를 제대로 알겠는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누가 해야 하는지를 알겠는가? 세손에게 전서하고 싶지만 어린 세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우므로 대신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좌의정 홍인한이 기다렸다는 듯 반대 주장을 피력하였다.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나 조사는 더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손은 정사를 알 필요가 없다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었다. ‘왜 필요 없는지’ 따위는 없었다. 이를테면 ‘내가 현정화라 하면 그냥 현정화‘란 논리였다.

 

그리고 1775년(영조 51년) 12월 노환이 깊어진 영조가 신하들 앞에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밝혔을 때는, 현장투쟁 담당답게 영조 앞에서 ‘깽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세손까지 지켜보는 자리에서였다.「영조실록」은 당시의 어수선했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 이때 좌의정 홍인한이 승지의 앞을 가로막고 앉아서 승지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임금의 하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들을 수 없게 하였다.

 

어이그,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저걸 확…. 영조는 내심 울화통을 터뜨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으리라. 하지만 82세의 ‘파파할아버지’인 영조로서는 더 이상 옥사를 일으킬 기력이 없었다. 그 대신 영조는 세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세손에게 순감군(巡鑑軍)의 지휘권을 넙죽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도 홍인한 등의 이산 즉위 반대투쟁은 계속되었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머리에 '결사반대' 글자 선명한 띠를 질끈 동여맨 채 영조의 침소 앞에 거적데기 깔고 드러누워 영조의 출입자체를 원천봉쇄하는 극단적 투쟁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늙으면 고집도 세진다고, 영조 또한 대리청정의 고집을 쉬 꺾지 않았다. 당시 건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자신의 명운(命運)이 다했음을 노인 특유의 직감으로 느끼고 있던 영조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더욱이, 이미 옥쇄 등도 세손에게 넘긴 상태였으므로 기실 공식적인 발표만 남겨놓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한데 좌의정이라는 자가, 더욱이 세손의 외할아버지란 자가 제 손자놈이 임금되는 걸 막기 위해 허구헌 날 ‘땡깡’이나 부리고 있으니…ㅉㅉ, 이래저래 영조의 시름은 깊어만 갈 따름이었다.

 

한편 ‘이반투위’ 지휘본부에서 이 모든 상황을 체크하고 있던 정후겸은 정공법만으론 세손을 제거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 썼던 변칙공격까지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세손이 민가에 돌아다니며 금주령 중에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리는 한편, 세손의 시중을 드는 내관들을 꾀어 음탕한 놀이를 권하게 하는 방식 등으로 세손이 결코 왕재(王才)가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하였다. 다행히 세손은 이 꾐에도 쉬 넘어가주질 않았다.

 

하지만, 단 한번 위기가 닥쳐온 적이 있었다. 세손이 당시 금기시 되었던 ‘시전요아편(詩傳蓼莪篇)을 읽다가 영조에게 걸릴 뻔 했던 것이다. 영조는 이산을 세손으로 책봉한 이후 시전요아편을 읽지 못하도록 특별 분부를 내린 적이 있었다. 요아 편에는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자칫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은 세손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으니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할진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여도 다 할 수가 없구나」(父兮生我 母兮鞠我 欲報深恩 昊天罔極) 같은 대목이 그것이었다.

 

한데, 세손이 바로 이 구절을 읽고 큰 슬픔에 젖어 눈물 콧물을 짓이길 즈음 이 장면을 목격한 내관이 쪼르르 영조에게 달려가 냉큼 고자질해버리고 말았다. 영조는 크게 노하여 대뜸 세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세손이 앉은 앞에서 내관에게 방금까지 세손이 보고 있던 책을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세손은 당황하였다. 급히 부름을 받고 오느라 시전 요아 편을 그대로 펼쳐둔 채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관이 가져온 시전에는 요아편 부분이 오려져 있었다. 이때 시전의 요아편을 잘라내 세손을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 바로 홍국영이었다. 때마침 동궁에 들렀던 그가 급히 어전에 불려가는 세손의 행보를 이상히 여기고 세손의 방에 들어가 보니 시전요아편이  펼쳐져 있는지라 그 부분을 미리 칼로 오려내 두었던 것이다.

 

영조가 그 부분이 오려진 연유를 묻자 세손은 엉겁결에 그 책을 읽지 말라는 분부 때문에 그러하였노라고 대답함으로써 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게 되었다.(정조는 세손시절의 ‘존현각일기’에 홍인한과 정후겸 등 특권외척들이 자신이 어떤 공부와 대화를 하는지 항상 염탐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왕위계승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공세를 멈출 노론이었다면 이들을 애초에 노론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세손을 마치 ‘손안의 공기돌(手中之物)’ 정도로 여기며 이후로도 끊임없이 모함과 위협을 가해왔다.

 

- 흉도들이 심복을 널리 심어놓아 밤마다 엿보고 탈취했으며 위협할 거리로 삼았다.<정조의 ‘존현각일기’ 중에서>

 

정적들이 끊임없이 감시하고 위협하는 이 시기 정조는 죽고 싶은 심경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한다. 그러나 노론들의 노골적인 반대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홍인한의 극렬한 반대는 점점 그 도를 더해 가기만 하였다. 영조나 세손에게 있어 홍인한은 그야말로 ‘웬수 중의 상웬수’ 같은 존재였으나 그를 따르는 무리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한숨만 푹푹 토해낼 뿐 달리 어쩔 도리도 없는 난감한 형국이었다.

 

이처럼 홍인한․정후겸 등 노론 외척당의 모함이 정도를 넘어 급기야 왕세손의 지위까지 위태로워질 즈음, 세손으로 하여금 그들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하는 '회심의 한방’이 터졌다. 스물일곱살의 소론계 공신 서명선이 홍인한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의 전횡을 폭로하는 상소를 전격적으로 올렸던 것이다.

 

이 상소는 세손이 영조에게 직접 올리려고 계획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서명선이 정민시․홍국영과의 막후교섭을 통해 그 위험부담을 혼자 떠맡고 나섰던 것이다. 때는 1776년 1월하고도 하순이었다.

 

영조는 원임대신들과 양사 그리고 상소문의 장본인 서명선을 부른 후 서명선으로 하여금 직접 상소문을 읽도록 명하였다. 서명선은 하등의 망설임없이 상소문을 읽어내려갔다. 그는 상소문을 통해 홍인한의 '삼불필지설'에 대하여 실랄히 비판하는 한편 영의정 한익모가 하였다는 '좌우는 걱정할 것 없다(산하들이 잘 하고 있으니 대리청정은 필요없다)'는 말에 대하여도 강도높은 비판을 가하였다. 서명선의 상소가 끝나자 영조는 대신들에게 상소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영조의 물음에 모호한 답변만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이에 흥분한 영조가 다시 한번 다그쳤으나 대신들은 '여론을 잘 알지 못해 대답을 못하겠다(김상복)'는 등 여전히 모호하게 말을 돌리며 시비 여부를 판정하지 않았다.

 

격분한 영조는 중추부영사 김상복과 판중추부사 이은, 김양택을 해임하고 대사헌은 삭직시켜버렸다. 그리고 한익모와 홍인한의 이름을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지우도록 명하였다.

 

‘앓던 이’ 홍인한이 조정에서 쏙 빠지자 대리청정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조는 1776년 1월 27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그 3일 뒤인 1월 30일 대리청정 의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 3개월 뒤 영조는 사망하였다.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에 세손이 왕위를 승계하는데 걸림돌이 될만한 것을 깨끗이 제거해주고 그렇게 떠나갔던 것이다. 미상불, 그즈음 세손은 노론 대신들의 파상공세에 내내 시달려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신의손’ 영조의 ‘철벽블로킹’으로 숱한 위기들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였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세손에게마저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명선의 상소 이후 소싯적부터의 ‘라이벌’ 정의겸이 심상운이라는 자로 하여금 서명선의 상소를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사주하여 조정이 또 한번 불난 호떡집이 되긴 하였지만, 대세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 이야긴 이쯤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한 부사직이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 한 장이 정국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뒤바꿔 놓았고, ‘개혁군주’ 정조의 시대는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개막의 팡파레를 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직후 정조는 대신들 앞에서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대신들은 경악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지도자의 취임 일성은 새 정권의 국정운용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정은 아직 그 아버지를 제거한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세력은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논리로 정조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은 무리였다. 때문에 정조가 임금으로 즉위한 것은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였던 것이다. 한데 그런 임금이 스스로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나섰으니 다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여 그가 초장부터 숙종처럼 ‘환국’를 통해 조정을 바둑판 뒤엎듯이 발칵 뒤집어 놓았는가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워낙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뒤끝이었거니와 당시 조정은 여전히 노론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미상불 섣불리 판엎기를 시도할 상황도 아니었다.

 

실제로 즉위년 8월 영남유생 이응원이 '영조 38년에 사대부도 아닌 일개 중인 나경언이 임금에게 상변서를 올린 것은 노론의 음모에 기인하는 것'이라며 관련자들의 척결을 요구하자, 이는 '어리석은 짓 아니면 미치광이 짓'이라며 오히려 이응원 부자를 '대역부도'로 처벌하기까지 하였다.

 

정조에게 있어서 아버지 문제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방정식' 혹은 '뜨거운 감자'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아버지를 따르자니 할아버지가 울고, 할아버지를 따르자니 아버지가 우는, 그야말로 진퇴양란의 입장이었다고나 할까)

 

다만 즉위 초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으로 하고 사당을 '경모궁'으로 높이는 숭모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시범케이스'로 자신을 축출하려 하였거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대표적인 인물에 대하여는 역모죄 등을 적용하여 응분의 책임을 물었다. 이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여, 세자시절 사사건건 맞섰던 ‘이반투위’의 투톱 홍인한과 정후겸을 여산과 경원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하고 화완옹주를 사가로 내쫓았으며, 문 숙의의 착호를 삭탈하고 그 오라비 문성국을 사사하는 한편 그의 어미는 제주도로 보내 노비로 만들어버렸다.

 

대비인 정순왕후에 대하여는 직접 공격을 자제하였지만 2인자 홍국영을 앞세워 그 오빠 김귀주 일파를 모조리 숙청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척신들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정치판에 끼어든 환관들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다만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치죄를 요구하는 내외의 여론이 빗발쳤음에도 혜경궁 홍씨가 단식까지 하면서 극렬하게 반대하여 처벌에 어려움이 있었다.

 

영조 38년 사도세자를 죽인 후 극도로 비대해졌던 외척세력이 이런 정조의 배척으로 즉위 반년만에 일단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조선의 외척은 발본색원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었다. 여전히 궁중 깊숙한 곳에 ‘정순왕후’와 ‘혜경궁’이라는 외척의 뿌리는 건재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틈을 엿보고 있었다.

 

또한 정조의 이 같은 조치는 그와 반대편에 서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아연 긴장케 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고 정조가 세손이었던 시절 그를 핍박하였던 이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로서는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결국 정조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정조 1년에 있었던 3건의 반역사건이 그것이다.

 

이 3건의 반역사건은 공교롭게도 모두 홍계희의 가문에서 주도하였다. 홍계희는, 주지하다시피 ‘나경언의 상소 사건’을 배후조종한 인물이었다. 홍계희는 1771년 이미 사망하였지만 그 가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누구보다 불안하게 여기는 형편이었다. 이에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은 궁중에 암살단을 침투시켜 정조를 살해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1777년(정조 즉위년) 7월 28일, 홍상범에게 포섭된 천민 출신 장사 전흥문과 궁궐 호위군관 강용휘를 선발대로 한 20여명의 암살단이 궁궐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궁중별감 강계창과 나인 월혜의 길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없이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존현각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하나씩 들어내는 순간, 때마침 독서 중이던 정조 - 그즈음 그는 신변에 대한 위협 때문에 밤에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 가 수상한 기척을 감지하고 호위내관들을 긴급 호출함으로써 암살단은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정조에 대한 이들의 암살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주범 홍상범과 홍대섭, 유배지에서 이를 배후조종한 홍상범의 아버지 홍술해․홍지해 형제, 그리고 홍상범의 4촌 승지 홍상간 등 등을 숙청시키면서 사건수사는 마무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것이 끝은 아니었다. 궁궐 난입사건에 대한 수사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배당한 홍술해의 처(효임)가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을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였던 것이다.

 

효임의 의뢰를 받은 점방은 다섯 군데의 우물물을 받은 다음 홍술해 집과 홍국영 집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합하여 한 그릇을 만들고는 그 물을 홍술해의 우물에 부음으로써 홍국영의 기를 빼앗고자 하였다.

 

또한 붉은 모래로 정조와 홍국영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 화살을 꽂아 땅에 묻어버린 다음 홍국영의 집에 저주의 부적까지 만들어 붙였다. 이 저주사건 또한 얼마 뒤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검거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홍계희 가문의 모반사건은 여기서도 그치지 않았다. 홍계희의 팔촌에 해당하는 홍계능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사실이 또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홍 씨 일문 등 주동자 23명이 처형되었고 은전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처럼 즉위 초에 있었던 3대 모반사건은 정조의 신변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전․현직 벼슬아치 뿐만 아니라 환관과 궁녀, 심지어는 임금을 보호하여야 할 호위군관까지 여기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에 최측근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국영은 숙위소에서 모든 정사를 결재하면서 정조의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홍국영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특권적 문벌가문 출신의 야심가 홍국영 - . 정조 즉위를 극력 반대한 노론세력에 맞서 기민한 판단과 대담한 행동으로 세손의 기반을 굳히고 그를 결국 즉위에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이 홍국영이었다.

 

정조는 이런 홍국영을 즉위 3일만인 3월 13일 승정원 동부승지에 앉혔다. 정조의 명령으로 간행된 '명의록'에 의하면, 이 조치는 정조를 보호한 '의리의 주인'으로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내려진 것이라 하였다.「정조실록」에 ‘특별히 발탁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매우 이례적인 발탁임에 틀림없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후 그는 국왕의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 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조정의 모든 실권은 홍국영에게 있었고, 홍국영을 통하지 않고서는 임금을 만날 기회조차 봉쇄당하였다. 마치 서슬 퍼렀던 유신시절 경호실장과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모두 끌어안고 있었던 것과 같은 권세였다고나 할까.

 

정조시대 초기는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시대'였다. 그의 정치적 파워는 최규하 정권시절의 국보위원장 전두환을 능가할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때 홍국영의 나이는 불과 서른살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렇듯 유례없는 수직상승의 벼락 출세가도를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었을까. 과거에 11등으로 급제하였다는 '그렇고 그런' 머리로 말이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가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그는 뼈대있는 '빵빵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는 선조임금의 딸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이었다. 정명공주는 광해군 때 비명에 간 영창대군의 친누나로 인목대비의 소생이었다. 홍주원의 가문은 왕실과 연혼관계를 맺으면서 오랫동안 서울을 근거로 뿌리를 내려온 대단한 문벌가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영조 대부터 권세를 누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홍국영에게 10촌 할아버지가 되었다. 정조와도 12촌 형제지간이었다. 요컨대 홍국영은 영조 재위 당시 영조․혜경궁 홍씨․정순왕후 등과 모두 인척관계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조가 홍국영을 특히 신임하여 수 년 동안 사관(史官)으로 옆에 두고 아주 귀여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홍국영이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예문관 사관(史官)과 세손을 보좌하는 세자시강원 설서까지 겸하게 되었던 것은 우연이라거나 권모술수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든든한 가문 덕을 보았다 함이 보다 정확한 분석일 듯싶다.

 

다음으론, 시기적으로 적절한 때에 관직에 진출하였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좌하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은 그가 출세가도를 질주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말하자면 홍국영은 어느 날 위험에 빠진 정조를 구하고자 하늘 저편에서 홀연히 나타난 로봇태권V나 우주소년 아톰이 아니라 영조의 인사발령에 의하여 업무적으로 세손을 만나고 또 세손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면서 그의 환심까지 사게 된, 오늘날에도 - '가신' 혹은 '측근' 이라는 이름으로 -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출세의 길을 밟았을 뿐이었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정조와 나이도 비슷한데다 한번 궁에 들어오면 정조에게 세상의 모든 일을 꾸밈없이 전해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겨(마치 사내 대장부가 첩에게 미혹 당한 것과 같으시어) 더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분석도 전해진다. 혜경궁 홍씨의 분석이다.

 

아무튼, 홍국영은 조정을 쥐락펴락 하는 막강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자신의 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조카’에게 왕위를 잇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혼례를 올린 지 1년이 채 못되어 동생인 원빈 홍씨가 훌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홍국영에게 큰 충격이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꿈이 무산되자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혜경궁 홍씨는 ‘제 누이 홀연히 죽으매 국영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 누이의 내전 나인 여럿을 잡아다 칼을 빼들고 무수히 치며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고 「한중록」에 기록해놓고 있다.

 

홍국영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청명당계열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핍박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조를 직접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당시 효의왕후는 비록 아이는 낳지 못했어도 후덕한 인품으로 인해 조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왕비였다.

 

홍국영은 이런 왕비를 물증도 없이 핍박하였고 이는 내외의 큰 발발을 불러오게 되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 역시 정조 즉위 뒤 가문이 몰락한 배후에는 홍국영이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홍국영이 왕비까지 압박하자 거세게 반발하였다. 홍국영은 어느덧 왕대비, 혜경궁, 왕비를 비롯한 궁궐 내 모든 세력의 '공적 1호'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그는 여동생(원빈) 살아있을 적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여동생의 양자로 삼는 등 왕위계승권에까지 개입하려 한 전례도 있었다. 정조는 비로소 냉철한 시각으로 홍국영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것 같았던 그의 모습에 야심이 철철 넘치는 한 사내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결국 홍국영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한데 홍국영이 정조에게 먼저 떠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자신이 구설에 오른 것이 누이를 후궁으로 들인 데 기인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를 승낙하였다. 홍국영은 조만간 정조가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정조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에게서 야심가로서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정조는 끝내 그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고, 홍국영은 마음의 울분을 이기지 못한 채 떠돌다가 정조 5년(1781년) 강릉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셋이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2|작성자 김삿갓

 

 

 

시파」와 「벽파」의 탄생 ․ 대립, 그리고…

 

홍국영의 사망은, 한편으론 진정한 정조시대가 개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정조는 홍국영의 구상이 아니라 세손시절부터 꿈꿔 왔던 자신의 구상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상불, 즉위 초 몇 년간 정조는 모든 국사를 홍국영에게 지나치게 위임한 경향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혹자는 그가 왕의 직무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였고, 혹자는 후일을 도모키 위하여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위장한 것일 뿐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하였다.

 

내 책장 한 켠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검정색 양장의 ‘한국사대사전’ 하권에도, 정조는 ‘정치에 뜻이 없어 홍국영에게 정치를 맡기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한 임금’으로 묘사되어 있다. 진실은 정조 본인만 알 일이지만, 적어도 즉위 초 몇 년간 그가 왕의 직무에 전념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아무튼 정조시대의 시파․벽파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조 후반기의 정치상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영조의 탕평책은 각 파당 간의 ‘타협’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이었는데, 여기에 노론과 소론의 온건론자(완론)들이 적극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를 ‘완론탕평’이라 하였고, 그 참여자들을 묶어 ‘탕평당(하나의 결사체라기보다 ‘무리’ 또는 ‘집단’ 정도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영조의 ‘완론탕평’은 이렇듯 각 정파가 함께 가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하였으나, 기반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막강 세를 과시하던 노론의 우위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각 정파의 ‘청류’를 자처하는 부류에서 반대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남인의 ‘청론(청남)’, 소론의 ‘준론’, 노론의 ‘청명당’이 그것이었는데, 이렇게 형성된 정파 전체를 ‘청류당’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의리와 명분을 숭상하고 붕당의 타파를 주장하는 강경(준론) 탕평파였다.

 

영조는 이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혼인관계를 통해, 특히 온건한 노론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음으로써 그들을 지지세력으로 삼게 되었다. 영조의 완론탕평은 당파간 극심한 대립을 수습하는 데에는 그런대로 효과를 발휘하였으나 혼인관계를 수단으로 지지세력을 확보한 나머지 정국 운영에서 척신(戚臣)의 비중을 지나치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특히 영조대 말기로 접어들면서는 이들 척신이 새로운 세도가로 부상하여 많은 역기능을 불러왔다. 때문에 “탕평을 주장하는 당이 옛날의 붕당 보다 더 심하다”는 비판 또한 등천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정조가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의 국정 제1목표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이었다. 노론에 의해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정조이기에, 노론의 나라가 되다시피 했던 당시 조선을 다시 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왕의 나라’로 되돌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가 재위 중 펼쳤던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도 기실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정책적 성과물이었던 셈이다.

 

조선을 ‘왕의 나라’로 되돌려 놓기 위하여 정조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은 노론이었다. 미상불 당시 노론세력의 권세는 나라보다도 높은 실정이었다. 돈과 인맥, 명분, 더구나 왕실의 안방까지, 사실상 조선의 모든 것을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노론은 노론대로,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개국 이래 쿠데타(반정)로 임금이 둘씩이나 쫓겨났음에도 종묘사직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 또한 사대부가 나라를 이끌어왔기 때문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다. 

 

정조로서는 노론세력의 이 같은 현실인식을 깨부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감함 개혁정책’이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위민(爲民)’을 앞세운 강력한 개혁정책의 추진 - , 노론의 기득권을 깨부수는데 이것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을 것이었다. 요컨대 가장 강력한 왕권강화책은 강력한 개혁드라이브의 지속적 추진이었던 것이다.

 

정조가 즉위년부터 ‘규장각’ 설치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그것을 통해 각양각색의 인재들을 직접 발굴․등용함으로써 집권 수구(노론)세력 및 외척세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함이었으며, 기존 ‘오군영’을 배척하고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설치한 것도 강력한 호위조직을 옆에 둠으로써 노론 대신들로 하여금 감히 ‘맞먹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는 얘기다.

 

뿐더러, 재능있는 젊은 문신들을 선발하여 일정한 기간동안 규장각에서 공부하게 하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 또한 친위세력 구축- 즉 ‘내 사람 만들기’ - 을 위한 다각적인 시스템 중 하나라 할 것이다.(정약용이라는 걸출한 인물도 이 제도를 통해 발굴하게 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 “침전에다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아놓고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면서 나의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서로 다투던 사람들을 화합하게 함으로써 온 세상을 황극(당파적 이해를 떠나 국왕에게 추종)의 자리로 모으고 황극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영도’하려 하였던 정조의 정치적 목표를 잘 드러내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정조에게 있어 탕평이라는 용어는 국왕을 중심으로 국론 통일을 이루는 정치적 목표와 각 당파간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인 ‘인사정책’을 함께 아우르는 용어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조제보합(調劑保合-약국에서 약을 조제하듯이 인물을 서로 섞는다는 뜻)의 인재등용을 골자로 하는 영조 식 인사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사대부들의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 해온 ‘청류’들을 조정에 대폭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즉위 초 노론의 우위(우월성)를 강조하는 기존의 척신당(남당, 북당)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 확립의 한계를 절감한 터였기에 그간 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권력의 중심부로 대폭 끌어들여 이들을 중심으로 ‘준론탕평’을 강력히 펼치려 하였던 것이다.

 

준론탕평이란,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을 말하는 것으로서, 특권세력을 배척하면서 각 붕당의 입장이 아닌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준론(날카롭고 비판적인 재목)을 정치일선에 끌어내어 국왕이 이들을 직접 통솔하는 국정운영방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시파와 벽파는 언제, 어떠한 연유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을까.

 

먼저 형성시기를 살펴보면, 문헌상 언급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가 주목을 끈다.

 

첫째는, 분파의 기미가 정조 4년(1780년)부터 있다가 12년 정민시의 상소를 통해 처음으로 시파․벽파라는 호칭이 나타났다는 설〈정조실록〉, 둘째는, 정조 19년 이후 영조 만년의 남당과 가까웠던 자들이 벽파, 북당과 가까웠던 자들이 시파로 분립하였다는 설〈순조실록〉, 그리고 셋째는, 남당․북당 때부터 시파 벽파가 존재하였으나 정식 호칭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던 것은 정조 8년부터였다는 설〈순조실록〉등이 그것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영조 말년 남당과 북당이 이와 유사한 기류를 형성해오다가 정조 4년 분파의 기미를 보이고, 정조 8년부터 12년 사이, 혹은 정조 12년부터 19년 사이 정식으로 시파․벽파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시파와 벽파의 분립은 정조의 탕평책이 더욱 성숙해가던 시기인 정조 8~19년 사이로 봄이 정확할 듯싶다.

 

그렇다면 시파․벽파의 형성 경위는 어떠하였을까.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정조는 즉위 초 홍국영을 앞세워 김귀주 계열과 홍인한 계열 등 이른바 탕평당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 청류당 세력을 중용하고 규장각 설치와 초계문신제도 등을 통하여 친위세력을 키워나감으로써 왕권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노론 청명당의 윤행임, 김조순 등이 발탁되어 정조의 친위 학자군을 이루었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노론 청류 뿐 아니라 청남의 채제공과 같은 남인․소론계 인재들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쯤에서, 청류당의 각 정파별 형성 및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남인 ‘청남’의 경우 1722년(경종 2년) 당시 소론의 실력자로 떠오른 김일경이 남인과의 탕평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던 시기에 결집하였으며, 정조 즉위 이후 정조의 탕평을 이끄는 청류당의 한 기둥으로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정조 4년 홍국영이 축출되고 소론(준론)의 서명선 내각이 출범한 뒤 청남의 지도자 채제공이 홍국영과의 유착관계를 빌미로 정계를 떠남으로써 침체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후 이가환, 정약용 같은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며 다시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정조 12년 채제공이 우의정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을 계기로 소론(준론) 및 정조 직계 신하들과 연대하여 김종수, 윤시동이 주도하는 노론(청명당)계열을 강력하게 견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론 ‘준론’의 경우는 경종 2년 임인옥사 전후로 결성된 소론의 강경파로서 영조 때 서명선이 정조를 위기에서 구해낸 인연으로 인해 정조 즉위 초부터 주류세력으로 부각되었다. 그 결과 서명선․이복원․정홍순․이시수 같은 준론계열과 이재협 같은 강화학파(강화도에 은둔하며 노론의 주자학 유일사상에 맞서 양명학을 연구하였던 정제두의 학파)가 재상으로 등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부에서 학통분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여 청남계열보다 많은 관료를 배출하였으면서도 독자적인 정파로서의 역할은 정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 가장 관심을 끄는 노론 ‘청명당’은 영조 46년 전후에 결집되었으며 김치인․정존겸․윤시동․유언호․홍낙성 등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강력한 정파였다. 정조가 기존 노론세력에 대하여는 ‘생태적인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뉴(new)-노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청명당’에 대하여 만큼은 꽤 우호적인 생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으론 그럴 수밖에 없다 싶은 것이, 청명당의 당수인 김종수는 정조에게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정치이론을 가르친 스승이었고, 정민시는 홍국영과 함께 왕세손 시절 정조를 보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정조 즉위 초반에는 청명당이 단연 집권주류로 부각될 수 있었다. 단지 이들은 정조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지지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비판적으로 지지’한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즉 신권(臣權) 우위의 나라라는 인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정조 즉위년이 ‘병신년’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60년 전 숙종의 ‘병신처분’, 즉 노론 영수 송시열이 옳고 소론 영수 윤증이 틀렸다고 판결한 결정을 다시 확인하는 한편, 영조 대에 확립된 ‘신임의리(신임사화 때 영조의 정통성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이 처형됐던 일에 대해 영조가 노론이 옳고 소론이 잘못이라고 판정한 일)’를 재확인하는데도 성공하였다. (이는 노론의 맹주자리를 노린 홍국영의 활약에 힘입은 바 매우 컸다)

 

그러나 청명당은 정조 4년 노론출신 홍국영의 축출을 둘러싼 입장차이로 분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노론 우위’의 상징 같았던 홍국영의 불명예 퇴진을 지지하는 것이 과연 노론 정치원칙을 지키는데 득이 되느냐 실이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내부적 입장이 갈렸던 것이다.

 

그리고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문제를 놓고 청명당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판결한 영조의 처분을 뒤집는 것이 노론의 정통의리 전체를 뒤집는 사태로 이어질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해석 차이로 더 이상 메우기 힘든 틈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양쪽은 서로 아부꾼이라는 뜻이 담긴 ‘시파’니 나랏일을 도외시한다는 뜻이 담긴 ‘벽파’니 하는 명칭을 붙이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말하자면, 최초로 시파․벽파의 씨앗이 발아(發芽)된 곳은 노론 청명당 내부였으며, 이 것이 이후 정조의 정책에 대한 지지․반대의 입장차에 따라 모든 정파로 확대되었다는 얘기다.

 

특히 노론과는 오래 전부터 대척점에 서 있었던 남인 ‘청남’의 경우 사도세자 문제는 노론 중심의 정국운영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더없는 호재였으므로 이 문제를 적극 이슈화하기 시작하였고, 영조 대에 그 세가 형편없이 쪼그라들긴 하였으나 여전히 붕당의 일각을 형성하면서 노론과 앙숙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소론 ‘준론’ 또한 골수노론에 반기를 들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시파는 ‘남인+소론’에다 정조의 정책을 지지한 일부 노론세력을 포괄하는 호칭이었고, 벽파는 초지일관 정조의 정책에 딴지를 걸어 왔던 골수 노론세력들을 일컫는 호칭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건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의 분류일 뿐이며 일도양단으로 시파와 벽파를 구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골수 노론세력이라 하여 모두 정조의 반대파라 단정할 수 없었고, 남인․소론이라 하여 모두 정조 편이라 단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엔 누가 시파고 누가 벽파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60년대 야당의 ‘사꾸라 논쟁’처럼 그때그때의 처신이나 행태에 따라 즉흥적으로 분류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사꾸라 논쟁’이란, 60년대 중반 야당의 한 강경파 인사가 당시 당수이자 상대적 온건파이던 유진산을 향해 “사꾸라(벚꽃의 일본말)!”라고 외침으로써 야기된 야당 내부의 논란을 말하는데, 이는 자신의 정체를 위장하여 반대파(여당)와 내통하는 자를 비꼬는 말로서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말과 함께 당시 크게 유행하였다. 어떻게 보면 ‘시류에 영합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때문에 이를 하나의 파당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왜냐하면 시파와 벽파는 문벌이나 학연, 지연, 혹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분립된 것이 아니라, 단지 지도자(정조)의 정책에 대한 각자의 정견에 따라 ‘찬성파(시파)’와 ‘반대파(벽파)’로 새롭게 이합집산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론벽파’란 단어 자체가 고유명사로 인식될 만치, 당시 막강하던 노론세력은 대부분 ‘벽파’의 입장에 서있다 보니 그것이 하나의 ‘당색’인 것처럼 인식되어 졌을 따름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정조의 입장에서는 벼슬아치를 등용할 때 여전히 ‘어느 붕당에 속한 인물인지’를 파악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이후로도 정조는 이 분류법(노론이냐, 남인이냐, 소론이냐 하는)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고 상호 견제케 하는 정치를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이열치열(以熱治熱)’과 ‘대승기탕(大承氣湯)’ 등 한의학용어로 지칭되는 독특한 인사방식의 도입이었다. 이 인사방식은 정조가 왕권강화의 토대를 어느 정도 닦은 뒤인 즉위 12년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어떻게 보면 ‘당파의 해체’를 추구하였던 즉위 초기의 강경 탕평책에서 ‘당파간의 조화’라는 차선책으로 한 발 물러선 온건 탕평책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열치열의 인사방식은 한마디로 숙종의 ‘환국방식의 탕평책’에 대비되는 인사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 당파에서 반역자가 나오면 그를 반대당파의 반역자와 대비시켜 처벌하고, 한 당파에서 충신이 나오면 반드시 반대당파의 충신과 대비시켜 표창하는 방식이었다.

 

예컨대 즉위 직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일파(남당)와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일파(북당) 등 당시 대립하고 있던 두 외척세력을 한꺼번에 찍어낸 것이나, 집권 중반기에 노론이 천주교와 관련된 남인계를 공격하자 이른바 ‘문체반정(당시 유행하던 패관소품체를 과거시험지나 상소문 등에 사용한 노론 신하들을 처벌하거나 파직한 사건)’을 통하여 노론계 신하들의 학문 풍조를 속학(俗學)이라 하여 동시에 견제하였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에 반대되는 것이 ‘이수치열’의 통치방식인데 이것은 한 당파의 반역을 다른 당파의 충성과 대비시켜 반역자가 나온 당파 전원을 제거하는 물갈이 방식으로 숙종이 자주 사용한 ‘환국정치’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정치는 오히려 당파간 격렬한 싸움을 촉발하는가 하면 대립하는 가문 사이의 감정을 엉키게 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 정조의 진단이었다. 즉, 잦은 정국 변동이 오히려 각 파당의 불안감을 조장하여 그 지도자들로 하여금 특정 왕위를 선택적으로 지지 - 예컨대 숙종 말기 남인과 소론의 경종 지지, 노론의 영조지지 - 하여 안전판을 구축하려는 현상을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환국은 속에 맺혀 있던 것을 확 풀어내는 통쾌함은 있지만 그에는 반드시 정치적 후유증과 폐단이 따른다는 것이 정조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정치를 ‘누가 오르고 누가 그른가’라는 시비론적 차원에서 보는 게 아니라 ‘누구 의견이 더 우수한가’라는 우열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이열치열 인사방식의 요체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정조는 또 각 당파의 강경파 인물들을 함께 재상으로 쓰는 방식도 도입하였다. 특히 학식과 인망을 갖춘 각 당파의 핵심인물의 경우는 8년간 정치와 인연을 끊어야 할 정도의 시련을 준 후 다음 8년간 절대적으로 등용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 대상자로 정조가 직접 밝힌 면면은 김종수, 윤시동, 채제공이었다. 

 

한편 ‘대승기탕(大承氣湯)’의 인사방식은, 국왕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을 맞서게 하되 두 정치세력을 매개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제3의 세력을 함께 등장시켜 서로 조화를 이루고 각기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예컨대 집권 초기 소론의 서명선(영의정)과 노론의 정존겸(좌의정)을 맞서게 하는 한편 탕평당 계열의 김상철과 남인의 채제공을 중재세력으로 이용한 것, 집권 중반기에도 남인의 채제공과 노론의 김종수를 맞서게 하는 한편 이성원․이재협 등 소론세력을 이용하여 중재케 한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대승기탕 방식은 이열치열 방식과 마찬가지로 국왕의 탁월한 통합력과 신뢰성, 즉 성왕의 정치를 전제로 하는 탕평책이었다. 때문에 왕권이 강화된 중반기에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었으나, 집권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장용영 설치, 수원성 건설 등에 대한 노론의 의구심이 커지고 종친문제(은언군)로 노론 벽파와 정조가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등 정국이 경색되면서 이 탕평책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3|작성자 김삿갓

 

 

 

개혁정국「환상의 복식조」- 정조와 채제공

 

그렇다면, 김종수를 필두로 한 노론벽파는 정조의 탕평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초지일관 정조의 탕평책을 비판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들은 국왕의 탕평책이 정치원리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관직을 당파별로 배분함으로써 무능한 자들이 대거 자리를 꿰차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왔다.

 

정조가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사정책을 국정에 접목하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철웅성같은 노론벽파의 반대에 부딪혀 기대했던 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론세력은 정조의 ‘정치행위’ 자체까지도 집요하게 부정하였다.

 

‘전하가 정치하는 것은 근본을 버려두고 말단만 다스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국가를 조종하는 방술이 부족하다’고 비판(즉위년 11월 정언 한후익)하기도 하고, 심지어 ‘임금 자신의 뜻만 내세우고 신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즉위 4년 3월 서장수)거나 ‘국왕이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 신하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다’(즉위 13년 11월 김종수)는 비난까지 서슴없이 쏟아내는 실정이었다.

 

남인과 노론, 소론를 번갈아 등용하고 때에 따라서는 노론에게 3정승 자리를 모두 맡기는 등 정국안정을 위하여 ‘웬수같은’ 노론세력의 비위를 맞추는 국정운영까지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노론세력에 의해 ‘소수파의 임금’정도로 폄하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결국 이 같은 ‘수구꼴통’세력를 제압하지 못하는 한 정치발전은 요원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간 좌고우면 않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쳐온 결과 정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는 괄목할 만 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즉위 2년째 되던 해에 군제개혁에 착수하였고, 재위 9년에는 서얼을 요직에 임용하는 사회개혁을 시도하였다. 재위 10년과 13년에는 언론개혁과 관료제 기강확립 차원에서 이조전랑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3류’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가 더큰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 대다수 신료들은 '개혁'이라는 명칭 자체의 사용을 꺼렸고 '개혁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려 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정조의 시름이 점차 깊어갈 즈음, 그의 뇌리를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한 인물이 있었다. 채․제․공―. 그랬다. ‘영조가 보증한 충신’ 채제공이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1788년(즉위 12년) 홍국영

과 친교가 있었다는 죄목으로 조정에서 밀려난 후 서울근교 명덕산 일대에서 8년간 은거하고 있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우의정에 제수하였다.

 

채제공은 일찍이 도승지의 신분일 때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폐위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하여 이를 철회시킨 바 있었고,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금등-쇠줄로 봉해 비밀문서를 넣어두는 상자)의 서(書)’를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선택될 만큼 영조의 신임이 각별한 인물이었다.

 

채제공은 이때 황극(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이 될 만한 법도)을 세울 것 등 6가지 요구사항을 정조에게 진언(6대 진언)하였고 정조는 이를 모두 받아들이는 한편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북학파를 대거 등용하게 되었다. 남인의 정약용․이가환 북학파의 박제가 서얼출신의 유득공․이덕무 등이 모두 이때 활약하게 되었다.

 

채제공의 우의정 등용은, 특히 남인의 근거지였던 영남 사대부들을 고무시켰다. 무려 80년 만에 남인이 정승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미상불 사대부들만 놓고 보았을 때 조선 후기에 차별을 받은 지역은 단연 영남이었다.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은, 영조 4년(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영남지역 전체가 ‘반역향(叛逆鄕)’으로 낙인 찍히면서 출사길 자체가 봉쇄당했었다.

 

그들은 비(非)노론 국왕이 등장해야만 자신들이 조정에 진출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음을 당하자 실망했던 남인들은 그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다시 환호성을 터뜨렸다. 더욱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정조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우의정에 전격 임명하였던 것이다.

 

남인은 드디어 자신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즈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행 정치체재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한 정조는 사도세자 묘의 천장(遷葬=이장)과, 이와 연계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정조에게 있어 서울은 이미 80년 이상을 집권한 ‘노론의 수도’였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다 할 경우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역시 노론의 반발이었다. 그들은 사도세자 문제만 거론되면 본능적으로 알레르기 반응 같은 걸 나타내곤 하였으니까.

 

정조의 이 같은 고민을 해결해준 인물은 그의 고모부 박명원(연암 박지원의 8촌형)이었다. 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이었지만 일절 정사에 개입하는 법이 없어 왕실 외척의 모범을 보여준다는 평을 듣던 박명원이 처남인 사도세자 묘의 천장을 요구하고 나서주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매형되는 사람이 천장을 요구하니 제아무리 노론이라도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정조는 즉위 13년(1789년) 10월 7일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영우원)를 오래 전부터 점찍어 두었던 수원 용복면 ‘화산(華山)’으로 옮기고, 이곳을 현륭원이라고 불렀다.

 

정조는 이후 매년 현륭원을 찾았다. 이는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정조의 원행 때 어가를 따르는 인원이 6천명을 넘었고 동원된 말만도 1천 4백 여필이나 되었으니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던 백성들에게 이는 기실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백성들은 정조의 원행 때면 구름같이 몰려나와 행차를 구경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 백성들과 직접 만나는 것을 선호하였다. 할아버지 영조가 폐지하였던 신문고를 부활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신문고는 백성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궁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진솔한 의견수렴엔 한계를 노출하였다. 이에 정조는 현륭원을 찾는 길에 달려드는 수많은 백성들의 절실한 호소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였다.

 

하여 어가가 쉬어가는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올리는 상언(上言)이나, 어가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징을 쳐 소원(訴願)의 기회를 만드는 '격쟁'에 대해 약간의 벌을 주되 이를 접수하여 그들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었다.

 

상언이 소장(訴狀)을 갖추어야 하는데 비해 격쟁은 구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낮은 신분에서 이를 행한 경우가 많았다. 정조 19년 원행 때는 창원의 한 여인이 부사 이여절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정준)의 사정을 호소하자 정조가 이여절을 유배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그의 ‘오른팔’ 채제공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지 2년 뒤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때는 영의정과 우의정이 공석이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모친상으로 정국에서 물러나고 영의정 김일 또한 출사를 거부하여 조정에 정승이라고는 채제공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이후로도 3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 3년간을 일컬어 ‘채제공의 독상시대(獨相時代-나홀로 정승시대)’라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 ‘독상시대’는 정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노론의 세가 가장 허약해진 시점을 택해 ‘노론제압’과 ‘개혁추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욱이 「J-C(정조-채제공)라인」은 개혁군주 정조가 생각해낸 최상의 조합이기도 하였다.

 

숙종 대에 짧은 권력의 단맛을 본 이후 만년야당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채제공의 남인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았으므로 당연히 개혁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를 개혁의 적기라고 판단한 정조의 뜻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제 조정에서 정조와 마주앉아 국정을 논하는 자는 채제공 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두 ‘개혁 콤비’는 정조 15년(1791년) 조선 상업사 최대의 사건을 합작하여 만들어냈다.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이 그것이었다. 신해통공이란, 사상(私商)들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해준 조치를 말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의 육의전(六矣廛-조선시대에 종로에 있던 여섯종류의 어용(御用)상점, 오늘의 ‘조달청’격)을 비롯한 시전상인(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대신 도성 내에서 독점적으로 장사할 수 있는 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상업활동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금난전권(禁難廛權-‘난전’을 못하게 하는 권리)을 얻어내 사상(私商)들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의 상업활동 독점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는 등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정조는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들의 특권을 모두 폐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신해통공은 그 이전부터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왔던 노론에 대한 응징의 측면이 강한 조치였다. 그들은 금난전권을 보유한 시전상인들과 결탁하여 각종 이권(수입세, 자릿세 등)을 챙기는 등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정조와 채제공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노론세력에 흘러들어가는, 어떻게 보면 노론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줄(돈줄)’ 자체를 끊어버리려는 엄청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남인인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천주교식 장례로 치룬 이른바 ‘진산사건’이 터져 남인은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 신봉을 묵인)와 공서파(攻西派-가톨릭교 탄압)로 나뉘어졌고, 채제공은 공서파의 탄핵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1792년 복직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한편, 채제공 독상정부 하에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던 영남의 남인은, 정조 16년(1792년) 경상도 유학 이우 등을 앞세워 1만 57인의 연명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였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 벽파를 처단하는 일이야 말로 선대왕(영조)의 본심을 받드는 것이라며 이들의 정계 축출을 요구하였다.

 

영남 사대부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상소문이라 하여 ‘영남만인소(萬人疏)’라 불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4월에 있었던 노론 유성한의 상소에서 비롯되었다. 유성한은 정조가 ‘경연에는 참석하지 않고 유흥(국왕의 능행)만 즐겨 여악들이 금원에까지 들어오고 광대가 대가 앞에 외람되이 접근했다’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오히려 이 행차를 즐기는 편이었고,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소하는 기회로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성한의 상소는 사실을 왜곡하였다는 비난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경종의 능 앞을 지나며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로서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윤구종 사건과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유성한의 상소에 영남 사대부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한 사건이 영남만인소였던 것이다.

 

영남만인소는 무인년(영조 34년) 이후 5년동안 조정의 권력을 잡은 당여들이 사도세자에게 저지른 갖가지 만행과 영조 말 척신당 세력이 세손시절 정조에게 저지른 갖가지 만행을 싸잡아 비난하고 영남인들의 임금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은 다음, ‘선세자에게 불충한 자(유성한)가 위로 경종에게까지 그 불충을 미친 것(윤구종)은 그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니 빨리 노적의 율을 사용해 귀신과 사람들의 분을 풀어달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정조는 자신의 지지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상소를 이우로 하여금 소리내어 읽게 하였고, 이우가 상소문을 읽어 내려가는 도중 감정을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말을 잘 잇지 못하였다.

 

이런 목메임을 여러 차례 되풀이 한 뒤에야 정조는 겨우 입을 열어 김상로와 숙의 문씨, 홍인한, 홍계희 등을 치죄한 사실과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한 영조와의 약속 등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을 타일러 영남으로 내려 보냈다. 이를테면 ‘부자의 윤리’(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군신의 윤리’(영조와의 관계)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조의 이러한 반응은 집권 초 영남 유생 이응원이 사도세자 사건 관련자들의 처단을 요구하였을 때 보였던 반응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었다. 당시 정조는 이응원 부자를 ‘대역부도’로 처단했었는데,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는 이 난처한 문제를 자신의 입으로 드러내어 밝힐 수는 없다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반응을 보인 것이다.

 

더욱이 이들의 대표격인 이우를 의릉(경종의 묘) 참봉자리에 앉힘으로써 영남만인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하였다.

 

임금의 변화된 태도를 감지한 영남 유생들은 그 열흘 후 1차 상소 때보다 311명이 더 많은 1만 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사건의 재조사를 재차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조는, 1차 상소때 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을 고무시켰다. 즉, 사도세자 사건을 ‘한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로 부각시키는 한편 “부자 간의 윤리가 있은 연후에야 군신간의 분의(分義)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영남만인소는 비록 정국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지만 정국에, 특히 노론벽파세력에 가히 메가톤급의 충격파를 안겨주었다. 정국의 뜨거운 감자인 사도세자 사건이 언제든 공론화 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는 정조와 영남 남인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한편, 정조는 1793년(재위 17년) 1월 16일, 수원화성을 도성에 버금가는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3년동안 독상정부를 이끌었던 자신의 ‘오른팔’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하였다. 최측근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일개 고을의 수령으로 내려 보낸 것이다.

 

그야말로 화성건설이 정조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인사였다.  자연히 조야에선 정조의 의도를 묻는 여론의 압박이 거세졌다. ‘임금이 노론을 다 죽이려드는 것 아닌가’라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화성에 장용영 외영이라는 최고의 친위부대가 주둔하고 있는데다 대규모 국영농장과 실업기반 등이 속속 들어서는 것에 대하여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만일 이곳에 성곽이라도 쌓아 올린다면 이 도시는 천하의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요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만약 이곳을 기반으로 자신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공세를 펼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화성유수부 축성만큼은 막아야 했다. 게다가 임금은 화성과 장용영 설치에 ‘숨은 뜻’이 있음을 부쩍 강조해대고 있지 아니한가.

 

자신의 속내를 궁금해 하는 노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정조는 승부수를 던졌다. 더 이상 밀릴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사도세자처럼 죽음을 맞거나 정치적으로 죽은 목숨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정조는 1793년(즉위 17년) 5월 화성유수 채제공을 다시 불러들여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숙종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승기탕’ 탕평책의 묘(妙)를 살려 좌의정에는 노론의 영수 김종수를 임명하였다.

 

그런데 영의정에 오른 채제공은 발령장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른바 ‘천토(天討)상소’라는 걸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고 말았다.

 

그는 ‘천지간에 극악무도한 자들의 부자․형제와 그 인척들이 모두 벼슬아치 대장(臺帳)을 꽉 메우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사도세자를 참소하고 무함(誣陷- )했던 큰 수괴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사도세자가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낼 것’을 정조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당시 채제공의 상소는 정조까지 ‘등에 땀이 흐르고 마음이 오싹해졌다〈정조실록〉’고 실토 할 정도로 쇼킹한 것이어서 노론벽파세력이 느낀 위기의식은 대단하였다. 채제공과 함께 좌의정으로 입각한, 채제공의 ‘영원한 맞수’ 김종수가 목숨까지 내놓고 이에 맞불 형식으로 강력히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노론은 자칫 큰 내분과 이탈에 직면하여 회생(回生)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김종수는 채제공의 ‘천토상소’가 국시(國是)를 바꾸려는 책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영남사람 만여 명을 즉각 불러 모을 수 있는 채제공이야 말로 반드시 변괴를 일으킬 사람’이라고 역공을 펴는 한편 ’채제공은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성토하며 사직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정조는 양쪽의 책임을 함께 물어 숙명의 라이벌이자 탕평책의 두 기둥인 ‘좌제공 우종수’를 함께 삭탈시켜버렸다. 임명한지 불과 10여일 만이었다. 어쩌면 채제공은 ‘천토상소’ 한방을 위하여 긴급 투입된 구원투수가 아니었나 하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해(1793년) 8월 이 같은 의혹이 일정부분 이유있음을 입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정조가 대신들 앞에서 ‘채제공의 상소는 당론에서 나오거나 국시를 바꾸려는 음모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의리와 충성의 발로로서, 비록 국왕은 임오의리를 제기할 수 없는 처지에 있지만 ‘금등의 서’를 알고 있었던 채제공의 입장에서는 이를 제기하는 게 의리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라고 ’친절히‘ 변호해주는 한편 승지에게 ‘금등의 서’의 내용 중 두 구절을 베껴낸 작은 종이를 여러 대신들에게 ‘맛보기로’ 보여주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삭장(상제가 짚는 오동나무 지팡이)여 삭장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藤千秋, 予懷歸來望思.(정조실록, 17년, 8월 8일)

 

이 문서는 영조가 당시 도승지였던 채제공을 불러 비밀리에 전해주며 첫 왕비인 정성왕후의 신위 밑에 있는 요 안에 넣어 두도록 명한 것이었다. 여기서 ‘피 묻은 적삼(血衫)’과 ‘삭장 지팡이(桐兮)’는 영조 33년 정성왕후 거상(居喪) 때 사도세자가 쓰던 것으로 영조가 문 숙의의 모함에 빠져 사도세자 처분을 결심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물건이다. 그리고 내용인 즉, 영조가 노론세력의 모함에 의해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생부 사도세자가 무함으로 숨졌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해명되었고, 생부의 명예가 회복됨으로써 정조는 국왕으로서의 정당성이 제고되어 숙원사업인 화성축조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요컨대 노론 측에서 계속 화성축성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올 경우 ‘금등의 서’를 전격 공개하여 사도세자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정조의 서슬 퍼런 승부수에 노론벽파가 꼬리를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미상불 그즈음 들어 정조는 노론벽파를 숫제 ‘적’으로 간주하는 언행을 빈번히 하곤 하였다. 즉,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무리를 ‘우리 당의 선비(吾黨之士)’ 또는 ‘국가를 위한 편’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속(矯俗)의 대상’ 혹은 ‘역적의 편’이라 하면서 노론세력의 ‘전향’을 회유하고 위협하곤 하였던 것이다.

 

특히 사도세자의 능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정조의 이 같은 의도는 더욱 분명히 드러나곤 하였다. 1794년(정조 18년) 1월의 현륭원(사도세자의 능) 행차시에는 ‘슬픔을 더욱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고 기운과 정신을 잃기까지’〈정조실록〉하는 등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곤 하였다.

 

국왕의 효심과 애통함에 대한 비상한 표출은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정치적 원죄’를 진 노론 벽파의 위기감을 크게 자극하였다. 때문에 이 과정에서 일부는 시파로 전향하였고 안동김씨 가문도 이때 시파로 돌아섰다고 한다.

 

정조는 여론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이듬해(1794년) 정월 채제공을 다시 화성성역 총리대신으로 복직시켰다.(이는 정조가 정권을 영위함에 있어 채제공, 더 나아가 남인세력에 얼마나 의지하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일각에서 시파를 ‘남인시파’라고 부르는 소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그리고는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 화성 축성공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4|작성자 김삿갓

 

 

 

개혁군주」정조의 좌절

 

그리고…이듬해인 1795년(을묘년) 윤2월 9일 아침 정조는 저 유명한 ‘을묘원행(乙卯園幸)’을 단행하였다.{임금의 행차를 행행(行幸)이라 하는데, 능(陵-왕과 왕비의 무덤)이 아니라 원(園-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이었으므로 이를 원행(園幸)이라고 불렀다.}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이장한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아버지의 묘소(현륭원)를 참배해왔던 정조였지만, 1795년의 현륭원 참배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원행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갑을 기념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8일간의 원행을 통해 정조는 개혁의 상징공간인 화성에서 자신의 회복된 정당성을 선언하고, 괄목할 만큼 성장한 장용영의 위세를 반대파(노론벽파)에게 확인시켜 줌으로써 왕권을 더욱 확고히 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행차 열흘쯤 전 유언호와 채제공을 불러앉힌 자리에서 노론인 유언호에게 ‘마음 단단히 먹을 것’과 ‘백성이 원하는 정치를 위해 거침없이 진입할 것’임을 천명한 바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이 정조가 그즈음 수차에 걸쳐 언급해 왔던, 그의 ‘숨은 뜻’이었던 셈이다.

 

그 아침, 문무관료와 군인 등 6천 여명이 동원된 거대한 참배 행렬은 돈화문을 출발하여 종루

(보신각)와 숭례문을 지나고 노들(노량)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넌 다음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들었다. 연도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늘어서 이 행차를 ‘관광’하였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황금갑옷으로 갈아입은 정조는 타고 온 뚜껑없는 가마 대신 말로 갈아타고 장승백이 고개를 넘었다. 이를테면 ‘숨은 뜻’을 보여주기 위한 행장을 본격적으로 갖추었다고나 할까.

 

원행 첫날을 시흥행궁에서 묵은 정조 일행은, 둘째 날 오후 화성에 도착하였다. 황금갑옷에 말을 탄 모습 그대로였다. 셋째 날은 낙담헌에서 문무 향시(鄕試)를 치러 문과 5명, 무과 56명을 선발하였고 저녁에는 모레 벌어질 회갑연의 예행연습을 봉수당 마당에서 열었다. 

 

그리고 ‘문제’의 4일째 되던 날, 정조는 어머니와 현륭원을 참배한 후 저녁부터 새벽까지 대대적인 야간 군사훈련(야조식)을 실시하였다. 정조는 병조판서 심환지 등 노론대신들에게 이를 지켜보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조는 화성에서 제일 높은 곳인 서장대에 올라가 군대를 진두지휘했다. 전시도 아닌 시기에 임금이 황금갑옷을 입고 친히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이다.

 

조선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훈련을 지켜본 대신들은 불안감에 떨었다. 그리고 임금 정조의 지나친 위용을 두려워하였다. 정조의 감독아래 훈련에 동원된 병사들은 장용영 병사들이었다.

 

장용영(壯勇營)­. 주지하다시피, 정조의 호위군대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나 단순히 호위군대라 하면 무언가 2%정도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 장용영은 이를테면 정조의, 정조에 의한, 정조를 위한, 정조만의 ‘사병(私兵)’조직이었던 셈이다.

 

당시 군권은 노론을 위시한 양반 세도가문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기존의 오군영은 노론 권력층과 결탁한지 오래였다. 군대가 임금의 손을 떠나 사병화하고 있음을 우려한 정조는 ‘자신만의 군사조직’을 갖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장용영이었다.

 

장용영은, 정조 즉위 8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린 것을 기념해 실시한 무과시험에서 뽑은 30명의 정예무사들을 기반으로 탄생하였다. 정조는 해마다 병사 수를 늘리고 장용내영과 외영을 설치하는 등 장용영의 외양을 확대해 나갔다.

 

정조는 또 병사들을 직접 훈련시키기도 하였는데 특히 18기라는 무예를 집중적으로 익히게 하였다. 정조는 18기의 보급을 위해 이를 집대성한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도 편찬했다. 사도세자가 완성한 18기에 마상무술 6기를 더해 편찬한 책이 무예서보통지이다.

 

정조는 마치 사령관과 같은 모습으로 병사들을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하여, 장용영은 서서히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로 성장하였다. 하루 3000발 이상의 활을 쏘게 하는 등 장용영 병사들의 훈련량은 오늘날 ‘특수부대’의 그것을 능가할 만치 강도가 높았다.

 

정조는 장용영 병사들을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켰고, 병사 하나하나의 훈련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장용영 병사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였다. 장용영 병사가 된다는 것은 곧 임금에게 인정받은 무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30명의 무사에서 출발한 장용영은 이후 정조의 치세 하에서 1만 8천명까지 늘어나며 그 위용을 떨쳤다.

 

한편, 8일간의 원행이 무사히 마무리될 즈음 정조는 화성의 세심대에서 신하들에게 술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신하들의 입에서는 “오늘의 성대한 행사는 천년을 가도 보기 드문 일”이라는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정조는 한껏 고무되었다. 8일간의 원행을 통해 ‘얄미운’ 노론대신들을 납작코로 만들어놓았겠다, 이제 그의 앞에는 어떠한 암초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른바 ‘갑자년 구상’이라는 걸 밝히기도 하였다. 즉 사도세자의 결혼 60주년(回婚)이 되는 10년 뒤 갑자년에 다시 화성에 와서 연회를 베풀기 위해 수라용 그릇들을 화성행성에 그냥 놔두고 갈 것을 지시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이 해(1795년)를 전후로 한 1년 남짓은 오히려 정조에게 있어 재위기간 중 가장 힘든 나날이 되고 있었다. 여전히 ‘대통합의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 또한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었다.

 

화성행차를 앞두고는 측근의 비리를 폭로하는 노론 권유의 상소가 올라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는 ‘전하가 즉위한 지 15,16년이 지나면서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고 민지(民志)가 날로 미혹되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르고 말았다’고 지적하면서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伏誅)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정치적 비리를 폭로한다고 하였다.

 

즉, 정조의 측근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여 화성축조 과정에서 공사비를 빼돌리고 있으며, 장용영과 같은 신설 군영이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정령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여 비리에 연루된 측근 정동준으로 하여금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임금의 위세와 권력을 훔쳐 농단한 죄’로 자결하게 하였다.

 

게다가 연금상태에 있던 고모 화완옹주를 석방하고, 강화도에 유배가 있던 이복동생 은언군을 몰래 불러 창덕궁 북쪽의 훈련도감에 머물게 함으로써 노론세력을 위시한 신료집단과 큰 갈등을 빚었다.

 

사실 이는 정조의 중대한 실수였다.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고 내외척을 멀리한다’는 자신의 정치 원칙을 스스로 저버린 행위였던 것이다. 한번 원칙이 무너지자 왕의 발언도 힘을 잃었다. 국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인척을 풀어줬다는 비판이 쇄도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거부에 돌입하는가 하면 시임․원임 대신들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 후 곧장 시골로 향하기로 결의하였다.

 

정조는 금령(禁令-언로를 통제하는 기구)을 설치하여 그 사안을 아예 거론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였지만, 남인시파까지 가세한 집단적인 반발에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또한, 전 해에 밀입국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관련하여 남인에 대한 노론의 공세가 거세지자, 여론에 떠밀려 남인의 개혁공신 이가환과 정약용을 각 충주목사와 금정찰방으로 좌천하고 말았다.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좌천되자 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공백을 자기들 인사로 채워버렸다. 그동안 어렵사리 조성한 ‘탕평정국’이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이가환과 정약용이 떠난 지 얼마 뒤 ‘전하로부터 신임을 독점했다’는 평을 듣던 정조의 오른팔 채제공마저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금년이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가버렸다.

 

전 해 겨울에는 1년 전 정권의 명운을 걸고 시작하였던 화성건설의 중단을 촉구하는 노론벽파의 상소도 쏟아져 들어왔었다. 그 해 여름에 태풍이 불고 그 여파로 경기․충청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화성축성에 대한 반대여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체제공을 비롯하여 당시 대부분의 대신들은 토목공사를 계속하여 구휼의 효과를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정조는 뜻밖에도 화성공사 중단을 선언하였다. 겨울철에 공사를 강행하는 것이 무리일 뿐만 하니라, 전국적인 규휼책과 대규모 공사의 병행은 재정적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민심을 잃으면 설 곳이 없다는 정조의 지론에 기인한 결단이었다.(화성 축성은 원래 10년 기한이었으나 단축되어 3년만인 정조 20년(1796년) 10월 낙성식을 하였다)

 

이즈음부터 정조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정조의 입에서는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거나 “나 혼자서 천 칸의 창고를 지키는 격”이라는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이를테면, ‘임금짓 못해먹겠다’는 푸념을 연발한 시기였던 셈이다.

 

또 갈수록 독단적으로 변해가는 정조에 대한 노론벽파의 저항 또한 거세어져갔다. 정조의 면전에서 그들은 “명령이란 명령은 모조리 따르라는 하교는 아마도 십분 지당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요 임금이나 순 임금 시대에도 명령을 거부하는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라고 반박한다던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는 못하겠습니다”하는 반발을 공공연히 하는 실정이었다. 임금과 신하들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신의 뜻에 부합되는 무리를 ‘우리당의 선비(吾黨之士)’로,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역적의 편’이라 하는 극단적 편 가르기로 회유와 협박을 더욱 노골화하였던 것도 기실 이때부터였다.

 

게다가 이 해부터 더욱 강화된 금령(禁令), 즉 ‘언로의 통제’는 정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정조는 인사문제나 역적토벌과 관련하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면 해당사항에 대해 금령을 설치하여 신하들의 상소나 치자에서 언급하지 못하게 하곤 하였다.

 

정조가 신하들을 가르칠 상대로만 보고 비판과 조언을 받을 상대로 보지 않은 결과는 정치의 무력화와 통치의 무사안일화로 나타났다. 1798년(정조 22년) 여름에 헌납 임장원은 “이로써 오늘날 전하의 정치가 지금 당장 무기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 동안의 일을 경계하셔야 되리라 느끼고 있고, 전하께서 오늘날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무사안일에 졌다고는 할 수 없을 지라도 앞으로의 일을 더욱 두려워해야”한다고 정조의 통치방식에 직격탄을 날리기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799년(정조 23년) 1월에는 ‘좌우의 팔’이라 할 수 있는 채제공과 김종수가 약속이나 한 듯이 열흘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 그 전후로 군국(軍國)의 기무에 밝았던 ‘윤시동도 가고’, 나라의 재정을 도맡아왔던 ‘정민시도 갔다’.

 

깊어가는 고립감에 괴로워하던 정조는, 재위 24년 5월초 우의정인 소론의 이시수가 현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생 이만수(서명선의 사위)를 이조판서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였다. 그리고는 사도세자의 기일(5월 21일)을 맞아 열흘간 근신재계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 기간중 정조의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글들이 나왔고, 당사자인 이만수까지도 이 인사조치의 철회를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특히 김이재는 이같은 정조의 인사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일을 전후로 한 근신재계를 마치고 나온 정조는 소론의 윤광안을 이조참의에 임명함으로써 이조의 주요 직책을 소론 일색으로 구성해버리는 초강수를 두어버렸다. 일찍이 정조 스스로가 천명하였던 ‘대승기탕 탕평책’의 원칙 자체를 무시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기실, 그즈음 정조는 4년 후의 갑자년을 염두에 두고 당색을 뛰어넘어 ‘소장파’들을 전면에 재배치하는 새로운 인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원로대신들이 거의 떠나간 상황이었으므로 자신이 즉위이후 초계문신제도 등을 통해 키워낸 새로운 신하들을 자신의 임의대로 포진시켜 세대교체를 이루고 자신의 정치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조를 소론 일색으로 구성해버린 것도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고 정조와 신료들간의 극단적 입장차이만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러자 정조는 그해 5월 29일 인사조치에 저항하였던 김이재를 언양으로 귀양보내는 강수로 이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하였다. 하지만 정작 정조가 앞날을 내다보며 특별히 신임을 부여한 우의정 이시수와 이조판서 이만수 조차도 정조의 조치에 반대하면서 김이재에 대한 선처를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정조는, 이러한 정치적 파란과 노론벽파 신료들의 태도에 대해 보다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또하나의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로 하였던 것이다.

 

재위 24년(1780년) 5월 30일, 정조는 이날 경연에서 신하들에게 중요한 하교를 내렸다. 5월의 그믐날이었기 때문에 ‘오회연교(五晦筵敎)’라 일컬어지는 이 하교에서 정조는 ‘참다 참다 내리는 하교’임을 전제한 다음 먼저 자신의 재상임명 기준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정조는 채제공, 김종수, 윤시동을 거론하며, 이들을 등용하고 내보낸 주기가 모두 8년이었음을 밝혔다. 8년의 시련기를 주어 당사자들로 하여금 신망을 기르게 했다는 것이었다.(기실 이 하교는 남인세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남인들은 이를 장차 남인으로 환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또한 등용하고 물리치는 기준이 없었던 선왕들과 달리 자신은 이런 기준을 두고 재상을 등용하였으므로 김이재의 반발은 이러한 자신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한 ‘속된 습속’이라고 몰아붙이는 한편 김이재의 배후에 반드시 조종한 자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배후에서 조종한 자는 사흘 안에 ‘자수’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까지 ‘의리론(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론)‘으로서 바로잡을 것임을 언명하였다. 노론벽파에게는 그야말로 ‘협박’이나 다름없는 하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료들이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정조는 결국 이만수와 유광안의 이조판서직과 이조참의직 임명을 철회하고 말았다.

 

하지만 6월 3일이 지나도 자수하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조의 노여움은 비등점을 향하기 시작하였다. 몇 일 뒤 정조는 벽파의 영수 심환지 등을 불러 최후통첩을 한 뒤 6월 16일, 등에 난 종기 때문에 크게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다시 심환지, 이시수 등을 불러 마지막으로 경고하였다.

 

“아무개가 음침한 장소에서 악인들과 이런 저런 교제를 갖는 작태에 대하여 나도 익히 들은 것이 있다. 내가 입을 열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 기울이고 있어도 자수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이른바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도 한 군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비밀히 내통하는데 이것이 사대부들이 할 짓인가? 내가 그들을 사대부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방치하고 있으나, 내가 한번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결판이 날 판인데 그들은 오히려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인가? "


심환지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같은 노론의 이시수가 나서 '과격한 어조는 몸에 해롭다'고 만류하였으나 정조의 어조는 한층 격해지고 있었다.

 

“경들이 하는 일이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 같은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달라고 청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나를 나약하다 생각하고 감히 이렇게 하고 있으나 조만간에 결말이 날 것이다. 비유하자면 종기에 고름이 잡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반드시 그것이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지만,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나서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빨리 시파로 전향해오라’는 협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환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매한 서민이라도 그 누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또 누가 감히 그 사이에 이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교묘한 답변으로 정조의 추궁을 노회하게 빠져나갔다.

 

이로써 정조와 신하들의 결별은 시작되었고, 양측의 대립은 그 끝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얼마 뒤 정조의 집요한 왕권강화의지도, 세상을 바꿔버리고자 한 개혁에의 꿈도 모두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오회연교 열흘쯤 뒤부터 등에 난 종기 때문에 고통을 겪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즉위 24년 6월 28일.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5|작성자 김삿갓

 

 

 

『정조 독살설』의 전모

 

 

정조의 사망, 그것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무려 82세까지 장수하였던 영조를 바로 앞에 모셨던 탓이었을까, 조정대신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조차 정조가 불과 49세의 나이에, 그것도 발병한 지 스무날도 채 안되어 급서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정국구상을 밝히고 노론벽파의 항복을 노골적으로 을러대던 천하의 정조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정조는 어떠한 연유로 이렇듯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었을까? 단순히 약을 잘못 처방하여 그리 되었을까? 아니면 당시 경상도 남인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던 풍문처럼 반대파, 즉 노론벽파세력에 의하여 독살(毒殺) 당하였던 것일까?

 

정조의 사망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발병이후 사망까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여, 간략하게나마 발병 첫날인 6월 10일부터 사망한 6월 28일까지의 기록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정조가 등에 난 종기로 고통을 겪기 시작한 것은 즉위 24년(1800년) 6월 10일이었다. 그리고 그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그 나흘 후인 6월 14일이었다. 이 무렵엔 등과 가슴은 물론이고 머리 쪽에도 종기가 심하게 돋아났고 열기가 올라와 온몸이 후끈거리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지방의관인 정윤교에게 처음으로 진찰을 받았다. 정조가 무슨 약을 붙이는 것이 좋겠냐고 묻자 정윤교는 여지고가 고름을 빨아내는 데 가장 좋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다시 정조가 상처를 침으로 찢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정윤교는 이미 고름이 터졌으므로 다시 침을 쓸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종기와는 다른 증상을 이야기하였다.

 

“두통이 많을 때는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火氣) 때문이다.” 

 

6월 16일, 음력 6월의 무더위와 투병에 지친 정조는, 전회에서 언급하였듯이 오회연교 후의 숨막힐 것 같은 긴장감 속에 신료들을 향해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하였다. 자신의 병은 가슴 속의 홧병에서 유래하였으며 신료들이 임금의 뜻에 부응하지 않기 때문에 악화되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심환지 등을 향해서는 최후통첩성 발언도 쏟아놓았다. 그러면서도 궁중의 주치의 격인 내의원의 진찰을 받으라는 신하들의 두 번에 걸친 주청을 모두 거부하였다. 대신 해박한 한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홧병을 다스린다는 ‘가감소요산’이나 열을 내린다는 ‘백호탕’ 등의 약을 직접 처방하였다.

 

임금이 직접 약을 조제하였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바꿔 생각해보면 이는 당시 정조가 심환지를 최고 책임자로 하는 내의원에 얼마나 큰 불신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좋은 방증이라 하겠다. (이날 이후 정조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정사를 돌볼 겨를 없이 투병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실록은 기록해놓고 있다.)

 

6월 20일 정조는 가감소요산 복용을 중지하고 유분탁리산 한 첩과 삼인전라고 및 메밀밥을 지어오라고 명하였다. 메밀밥은 종기에 붙여 고름을 빼는데 사용할 의도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정조는 약원의 제신과 대신, 각신들을 불러 고통을 호소하였다.

 

“종기가 높이 부어올라 당기고 아파 고통스러우며 한열도 있어서 정신이 흐려져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렇듯 병세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음에도 정조는 자신의 종기를 대신들은 물론 의관들에게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내의원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정조가 이시수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진찰에 응한 것은 그 이틀 후인 6월 22일이었다. 이때에도 어의 피재길(그는  7년전 정조의 얼굴에 난 종기를 자신이 지은 고약으로 완치시킨 전력이 있었다)에게 지방의관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할 것을 명하였다. 이 역시, 어의는 이미 적에게 매수되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에 기인한 조치였다.

 

6월 23일,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다음과 같이 고통을 호소하였다.

 

“고름이 나오는 곳 이외에 왼쪽과 오른쪽이 당기고 뻣뻣하며 등골뼈 아래쪽에서부터 목뒤 머리가 난 곳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그 크기가 어떤 것은 연적(硯滴)만큼이나 크다.”

 

이날 이시수는 어의 강명길의 말을 인용하면서 경옥고를 쓰자고 주청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조는 스스로 자기는 어려서부터 더운 약을 먹지 못했고 또 경옥고를 먹은 후에는 5,6일 동안 밥을 먹을 수 없었다는 경험담까지 들려주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4일, 다른 약들이 효험이 없자 정조는 결국 서정수가 사용하여 효과를 보았다는 민간요법인 ‘연훈방’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연훈방은 환부에 연기를 쏘이는 처방이었는데, 바로 이 처방이 정조 사후에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고 말았다.

 

연훈방을 건의한 '심연'이라는 인물이 심환지의 친척이었던 것이다. 후일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 ‘의원(심연)을 시켜 왕을 죽인 정승’이라고 적은 인물이 심환지였고, 그가 사용하였다는 ‘독약’이 바로 연훈방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성전고와 함께 연훈방을 사용한 6월 25일 정조의 증세는 한결 좋아졌다. 연훈방을 사용하고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속적삼과 요자리에 번질 정도로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정조는 몇 되가 넘을 정도의 피고름이 나왔다고 말했고, 이시수를 비롯한 조정의 각신들은 피고름이 다 나온 것은 근이 녹아내린 때문이라며 하나같이 기뻐하였다.(그러나 그 피고름은 근이 녹은 게 아니라  더운 피가 위로 올라와 그것이 터져서 따라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 후 밝혀졌다)

 

6월 26일, 정조는 이시수가 다시 경옥고를 권유하자 몇 차례 갈등하다가 이번엔 결국 경옥고를 연훈방 처방과 함께 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부터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운명의 6월 28일 아침이 밝았다. 정조는 지방의관 김기순 등이 대령하였다는 보고에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불러들여라.”하고 냉소적으로 대답하였다.

 

진찰을 마친 후 정조는 창경궁 영춘헌에 거동해 새로 임명한 좌부승지 김조순 등을 불렀다. 그러나 이즈음 정조는 급속히 위독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곧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근신인 김조순․서정수․서용보․이만수 등과 약원 도제조 이시수, 그리고 심환지․김재찬․조윤대와 약관들이 부복한 가운데,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정조는 “수정전”이라고 들릴락말락하게 말하였다. 정조는 뭔가 더 말을 하려 하였지만 곧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수정전은 왕대비 정순왕후의 거처였다.

 

곧바로 혜경궁 홍씨가 달려와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 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한다”면서 신하들에게 잠시 물러나 기다리게 하였다. 혜경궁이 돌아간 다음 수정전에 있던 정순왕후가 승전색(承傳色-내시)을 통해 의견을 전해 왔다.

 

“이번 주상의 병세는 선왕(영조)의 병술년(영조 42년)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드셨던 탕약을 자세히 상고하여 써야 할 일이나 그 때 성향정기산을 복용하고 호과를 보았으니 의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올리게 하시오.”

 

도제조 이시수는 주저함 없이 의관 강명길에게 성향정기산을 올리게 하였다.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서 정조의 입에 넣자 약이 입속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 나오기도 하였다. 다시 인삼차와 청심환을 올렸으나 정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시수가 강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고, 진맥을 마친 강명길이 엎드려 말하였다.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모두들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이시수는 수정전의 정순왕후에게 경과를 보고하였다. 비상사태에 대비해 궁성을 호위하는 가운데 이윽고 정순왕후가 영춘헌에 나타났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방으로 향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부하였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다시 문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잠시 후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조는 결국 정순왕후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지극히 엄한 국가의 예법’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는 게 400년 동안 엄히 이어져 온 조선왕조의 예법이었던 것이다.

 

한데, 정조가 사망한 지 달포쯤 지나서부터 이른바 '정조독살설'이 슬금슬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두달 후쯤에는 오늘의 대통령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처리한 사건과 행정사무 등을 매일 기록한 「승정원일

기」에도 기록될 만치 독살설은 이내 공론화되기 시작하였다.

 

1800년 8월 29일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승정원엔 왕의 죽음과 관련한 한 건의 모반사건이 보고되었다. 누군가 왕의 죽음에 의관이 개입되고 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보고에 따르면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경상도 인동(현재의 구미)지방에 사는 장시경이란 인물이었다.

 

장시경은 대대로 영남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학자 집안의 후손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1780년 8월 15일 추석. 장시경은 그의 두 형제와 주동해 노비 등 60여명을 불러모았다.

 

이들은 의관이 약을 과하게 지어 왕을 죽였으니 그 역적을 잡아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인동관아를 습격해 무기와 군량을 탈취한 후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동관아의 관원들로부터 제지를 받아 관문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무리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고, 장시경 3형제는 추격대에 몰려 천생산으로 도주하였다가  모두 천생산 낙수암에서 자결함으로써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이후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특히 창원, 의령, 하동 등 경상도 지역에서는 왕의 죽음을 빌미로 백성을 선동하는 익명의 괘서들이 연이어 나붙어 조정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그렇다면 왜 유독 경상도 지역에서 정조 독살설이 이처럼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을까?

 

주지하다시피, 경상도 지역은 정조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였던 남인의 본거지였다. 때문에 그들은 정조가 죽기 20여일 전 신하들에게 하교한 이른바 ‘오회연교’를 크게 주목하고 있었다. 남인들은 특히 시대상황에 따라 의리도 달라진다고 지적한 대목과 재상을 쓸 때는 8년 정도 시련을 준 후에 다음 8년을 믿고 쓴다는 대목에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기준에 의하면 다음번 재상후보는 남인의 이가환이나 정약용이었고, 그렇게 되면 남인들의 정치원칙을 제대로 한번 펼쳐 보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노론의 의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노론벽파로서는 ‘오회연교’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당시 정조의 측근이었다가 벽파로 전향한 이서구는 나누어 질 수 없는 의리를 나누어 해석하려 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정조의 죽음은 곧 노론의리를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또한 이러한 상황이 당시 남인 사이에 정조 독살설이 널리 퍼지게 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조는 독살되었던 것일까?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은, 정조가 온 몸에 번진 종기로 사망하기 직전의 마지막 사흘간  ‘연훈방’이라는 처방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정약용과 장시경이 말했던 ‘독약’이라는 것도 기실 이 연훈방을 뜻하는 것이었다.(다만, 여기서 말하는 독약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독극물이 아니라 효과가 강한 약을 과도하게 썼다던지, 병세와 반대되는 처방을 써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를테면 한방적 개념의 독약이라는 의미다)

 

연훈방은, 수은이 자연상태에서 굳어 만들어진 천연광물질(경면주사)를 가루로 만들어 다른 약재와 함께 한지에 말아 불에 태웠을 때 나는 연기를 환부에 쐬어 치료하는 민간요법을 말한다. 종기에 고름이 잘생기게 하여 일반적으로 종기치료에 많이 쓰이던 방법이었다.

 

한데 경면주사가 황화수은으로 구성되어있다 보니 이걸 태우게 되면 황과 수은으로 나뉘어지게 되어 이 치료를 10여 차례 받은 정조가 수은에 중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독살설의 요체였다.

 

그러나, 비록 연훈방에서 수은이 나올 가능성은 있다 해도 불과 사흘 간의 처방이 중독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이었는지에 대하여는 회의적이라는 것이 한의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KBS-1TV, 「조선 최대의 의문사 - 정조는 독살됐나?」)

 

연훈방으로 인한 수은중독 가능성이 낮다면, 혹 다른 단서는 없을까?

 

앞에 소개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노라면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예컨대, ▲의학적 조예가 깊었던 정조가 내의원들의 처방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처방을 내리는 모습을 수차례 보여준 점 ▲정조가 거부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시수가 거듭 경옥고를 권하여 결국 복용케 한 점 ▲특히, 정조가 임종 직전 남긴 한 마디 “수정전”의 의미와, 그 수정전의 주인인 정순왕후가 임종시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점 등이 대표적인 의문점들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독살설’을 명쾌히 입증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결정적인 사료가 나타나주지 않는 한 진실은 앞으로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남인들 사이에 정조 독살설이 끊임없이 떠돌아다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 정조 사후 풍비박산된 남인계 인물들이 느꼈던 공통된 심정(좌절감), 혹은 정서가 그렇게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6|작성자 김삿갓

 

 

 

사색당쟁 최후의 승자는?

 

 

드라마〈이산〉에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악의 축’이었다. 표독스런 표정으로 세손 음해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간교한 정순왕후를 바라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은 공분(公憤)해마지 않았다. 때문에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시청자들은 이산이 이 ‘얄미운’ 여인을 통쾌하게 ‘조져’ 주길 학수고대했었다.

 

미상불 이산이 왕위에 오른 직후 정순왕후를 자못 모질 게 몰아세우는 듯하자, 당시 이산 게시판은 환호와 격려의 문구들로 뒤덮였었다. 하지만 정조는 끝내 정순왕후를 응징하지 못한 채 급서하였고, 시청자들은 다시 좌절하였다. 이후 펼쳐질 정순왕후의 전횡들이 눈에 잡힐 듯 선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정조의 죽음과 함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정순왕후의 ‘눈꼴사나운’ 갖가지 독선과 전횡을 접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쯤에서 드라마가 끝나 준 게 차라리 고맙기도 하였으리라…

 

하지만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정순왕후의 존재감을 분명히 각인시켜 주긴 하였으되,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데는 다소 미흡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왜냐, 정순왕후는 그야말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악의 축’이었으니까. 오죽했으면 그녀가 조선에 입힌 피해는 ‘임진왜란의 그것과 맞먹는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까지 하였을까….

 

정순왕후의 전황이 4년 정도에서 종지부를 찍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그녀는 짧다면 짧은 그 4년의 기간이나마 온전히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버린, 무서운 여인이었다. 그것도, ‘인간도살(人間屠殺)’이라는 처절한 피바람의 역사를…

 

*            *            *

 

 

정조가 급서한 뒤 왕위(제23대)를 이어받은 사람은 순조였다.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순조는 그해 7월 4일 즉위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11세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조정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즉위와 동시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정순왕후의 등장은 노론 벽파의 재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개혁세력의 와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여느 대비의 수렴청정과 본질부터가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 여군(女君-여자임금)을 자임하면서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냈고, 신하들 또한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국왕에 상응하는 칭호와 권위를 행사하였다.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사(人事)였다. 정순왕후의 인사권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수행되었다. 그녀는 심환지를 영의정에 재수하는 등 노론벽파세력을 요직에 대거 등용하고 자신의 6촌 오빠인 김관주에게도 이조참판이라는 힘있는 벼슬을 내리는 한편 시파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다. 요컨대, 노론벽파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였던 것이다.

 

정순왕후와 노론벽파는 내친 김에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세력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인세력을 ‘체제부정세력’으로 몰아야 했다.(당시 성리학에 도전한 사상은 천주교였는데, ‘친 천주교’적 입장을 취하였던 남인과 노론시파가 ‘신서파’를, 이를 공격하는 입장에 있던 노론벽파가 ‘공서파’를 각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인을 성리학을 부정하는 사교(邪敎)집단으로 몰아 숨통을 끊어놓기로 하였다. 그렇잖아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에 나선 직후부터 "사학이 서울에서부터 시골까지 불길 번지듯 번지고 있으니 사학 배척 방도로 코를 베어 씨를 없애버리겠다"고 수차례 공언해온 바 있었던 터였다.

 

드디어 순조 1년(1801년) 1월 10일, 정순왕후는 사학엄금(邪學嚴禁) 교서, 즉 「금교령」을 반포하였다. 

 

선왕(정조)은 바른 도리를 빛나도록 힘쓰면 사악한 도리는 저절로 소멸되리라고 자주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말에는 상궤를 벗어난 도리가 아직도 존재하며 서울에서 시골 구서구석에 이르기까지, 특히 호중(기호지방)에 날로 더 퍼진다 하니 어찌 떨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인륜을 지킬 때에 비로소 참 사람이 되며, 한 나라는 지식과 참 도리에서 비로소 그 생명을 찾아낸다. 그런데 문제의 사학은 부모도 국왕도 몰라보고 일체의 근본을 배척하며 사람을 오랑캐와 짐승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무식한 백성은 점점 더 그것을 받아들여 그릇된 길을 방황하고 있으니, 강으로 달려가 빠져 죽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찌 마음의 충격을 받지 않겠으며, 어찌 저 가련하고 불행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각 고을의 감사와 수령들은 저 무식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새 교를 믿는 자들은 진심으로 행실을 고치고, 그 도를 따를지 않는 자들은 단단히 가르치고 경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선왕이 그렇게도 너그럽게 주려고 힘쓰신 가르침과 빛나게 한 광명을 짓밟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엄한 금령이 내린 뒤에도 아직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각 고을 수령들은 각기 자기 관할지역 전역에 서로 연대책임을 지는 ‘오가작통의 법’을 만들어, 만일 그 다섯 집 중에 사학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그 감시를 맡은 통수는 수령에게 보고하여 개심(改心)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국법이 있으니 그들을 싹도 다시 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버리라. 나의 뜻이 이러하니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그것을 알아 시행하라.“

 

첫 부분부터 정조의 치세를 부인한 이 교시는 실로 인간도살의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 9일 뒤(1월 19일) 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려던 정약종의 ‘책상자’가 기찰포교에 의해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정약종의 머슴 임대인이 경기도 포천에 거주하는 남인학자 홍교만의 집에 임시로 보관했던 주인의 책상자를 서울 아현동 황사영의 집으로 몰래 옮기다가 불심검문에 걸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노론벽파의 잇단 상소의 빌미가 되어 이윽고 전국 도처에서 광란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전개된 양상만 보면, 그해 2월 9일 이가환․정약용․이승훈․홍낙민 등이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기 시작하였고, 2월 14일에는 정약전이, 16일에는 이기양이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남인의 주요 지도자들과 천주교 지도급 인사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 시작하여 26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2월 26일에는 정약종․홍교만․홍낙민․최창현․최필공․이승훈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포청에서 심한 매질을 당한 후 장독으로 옥사하였으며, 배교를 선언한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경북 장기현(지금의 포항)과 전남 신기도(지금의 흑산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또한 3월 17일에는 한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궁안에 피신시키고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며느리도 사사되었으며,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또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5월 사사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보호막도 없던 일반 백성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혹하였다.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도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도 함께 화를 당하는 이른바 ‘오가작통법’은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이와 같은 박해는 경향 각지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채 그 해 12월 22일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정조 때 정계에 다시 등장하여 정조와 정치적 입장을 함께 하며 든든한 원군이 되어주었던 남인세력은 뿌리까지 뽑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역사는 이를 ‘신유박해(辛酉迫害)’ 혹은 ‘신유사옥’이라고 부른다.

 

정순왕후는 또 정조 개혁정책의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영을 전격 해체하고, 규장각의 특별한 기능과 권한은 회수하여 역대 왕들의 글과 도서를 관리하는 기구로 격하시키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조치도 줄줄이 내놓았다.

 

한데 이렇듯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마구 휘두른 정순왕후였지만, 그녀도 막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순조의 중전간택 문제였다. 그녀는 내심 노론벽파 집안에서 중전을 간택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고, 김관주․김일주․김용주 등도 시파인 김조순의 딸이 중전으로 간택되는 데 대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후일 있을지 모를 시파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정조 말년에 초간택(1차 심사), 재간택(2차 심사)까지 이루어진 상태였고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최종간택만 미루어지고 있던 터라 이를 뒤엎을 명분도 달리 없었거니와 김조순이 비록 시파라고는 하나 원만한 성품의 인물이었고, 심환지를 비롯한 다수의 벽파세력도 반대하지 않아 결국 이를 뒤엎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생전의 정조는 왜 김조순 딸을 중전으로 간택하려 하였던 걸까?

 

김조순의 저서 <풍고집>에 따르면, 1785년(정조 9년) 김조순이 약관(20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

에 급제하였을 때 정조는 “김상헌의 자손이 등과했다”며 매우 기뻐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친히 이름을 ‘김낙순’에서 김조순으로 바꿔주고 ‘풍고(楓皐)’라는 호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정조가 이 처럼 김조순에게 이름과 호까지 하사하면서 특별히 배려하고 가까이 두려 한 것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거두였던 김상헌의 후손이자 부자(父子) 영의정을 배출한 김수항과 김창집(그는 노론 4대가의 한명으로 꼽힌다) 가문의 자손인 김조순을 근처에 둠으로써 노론세력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등창이 악화되어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김조순을 불러 앉힌 자리에서 세손(순조)에게 “이 사람(김조순을 지칭)은 네 스승일 뿐 아니라 내 동기(同氣-형제)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다음 김조순을 돌아보고는 “임금의 처지는 실로 외롭고 위태로운 것”이라면서 “장차 원자(순조)의 뒤를 돌보고, 또한 세도(世道)를 맞아 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김조순이 “용렬한 천신(賤臣)이 그런 대임을 맞을 수 없다”고 아뢰자 정조는 다시 김조순에게 “경이 아니면 어느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큰 그릇은 두루 통용되어 국한되지 않는 법”이라면서 앞으로의 정국운영까지 김조순에게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발언까지 하였다.(<풍고집>별집, 영춘옥음기)

 

이는 1795년의 은언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정조가 스스로 천명하였던 ‘우현좌척’의 원칙을 또다시 뒤집는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초계문신 출신이며 노론시파이되, 세자빈이 될 사람의 아버지로서 ‘외척’이 될 입장이었던 김조순에게 세도(世道)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정조가 일찌감치 김조순에게 세자의 안위를 맡기기로 결정한 징후들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본 것이 아니라 노론의 명문가인 김조순의 집안을 보고 중전을 간택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명문가 딸을 중전으로 간택하려 한 것은 아주 파격적인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100여년에 걸친 집권기간 동안 노론이 취한 최우선 전략은 ‘왕비가문 사수’였다. 숙종조 때 장희빈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남인의 세상이 되었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당시는 서인)은 최악의 상황을 맞은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이후 노론은 ‘국혼의 절대고수(勿失國婚)’를 당론의 제일 원칙으로 삼았다. 왕비 가문을 놓치는 것은 작게는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맡게 돼 있는 국왕 경호업무 및 그와 관련된 핵심 정보원을 잃는 것이요, 크게는 정권재창출(왕자 출생)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한 가지 불문율 같은 것을 두었으니, 비록 자기세력 내에서 국혼의 대상을 찾긴 하되 되도록 세력이 미약한 집안에서 왕비가 선발되게 하였던 게 그것이었다. 강력한 가문이 외척이라는 칼자루까지 쥐게 되면 자칫 노론 전체가 요동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묵계였다. 서종제, 홍봉한, 김시묵의 가문이 선발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벽파의 이러한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았다. 며느리만큼은 자신의 의중대로 선택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는 “금번 세자의 국혼은 ‘간택’이 아닌 ‘중매’방식을 택하겠다”고 전격 선언하였다. 후보자 물색과정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되자 도성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졌다. 정조가 마음을 둔 곳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정조는 즉위 24년 정월 초 시파인 정민시와 이만수, 그리고 벽파인 서매수를 부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규칙도 발표하였다. ‘옛 규례에는 4조(祖) 가운데 현관(顯官-높은 벼슬)이 없는 집은 그 명단을 빼버렸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 모든 집안을 대상으로 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언뜻 보기엔 ‘별 볼일 없는’ 집안의 규수도 빼놓지 말라는 지시처럼 들리지만, 달리 해석하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여식도 아울러 대상에 넣으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다분히 김조순의 가문을 의식한 하교였다. 그리고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김조순의 딸은 1, 2차 간택을 단연 1등으로 통과해주었다.

 

순조는 즉위 2년째인 1802년 9월 6일, 13세의 나이로 드디어 김조순의 딸(순원왕후)과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다. 김조순은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영안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정국은 여전히 서슬 퍼런 정순왕후와 노론벽파 대신들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고 있었다. 다만, 이 해에 자파의 거두 심환지를 잃은 것은 통한의 아픔이었다.

 

순조가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은 1804년, 정순왕후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부터였다. 정순왕후가 건강악화를 이유로 수렴청정을 거두자 노론벽파는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공포정치(실록에는 ‘迫擊’정치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덤벼들어 몰아친다’는 뜻이다)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온 세력이, 그 중심축의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공포감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혹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라는 듯,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절대권력자 정순왕후도 흐르는 세월을 붙잡아 두는 능력만큼은 가질 수 없었던지 다음해인 1805년, 61세를 일기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순조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때 순조의 나이는 15세였다.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사람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었다.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뜻을 받들어 김조순을 자신의 ‘스승’처럼 모셨고, 최고의 실세가 된 김조순은 서서히 권력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김조순이 이렇듯 정치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정조의 당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나치게 어질고 착하기만 하였던 순조의 성정에 기인 한 바 또한 적지 않았다. 집권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화를 낸 적이 없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럽기만 한 성격이다 보니 외척 김조순 등이 헤집고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그만큼 많이 남겼던 것이다.

 

아무튼 정순왕후의 사망 이후 정국은 다시 급변하였다. 이번엔 벽파에 대한 시파의 대대적인 보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조순은 순조의 외척인 반남 박씨 박종경 세력과 풍양 조씨 조만영 세력의 협력을 얻어 시파 탄압의 선봉이었던 이안묵을 유배시키는 것을 필두로 김조순 딸과 순조의 결혼을 반대하였던 권유, 김노충 등 노론벽파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형, 유배시켜버렸다.

 

또한 경주 김씨의 대표 격인 김관주를 유배(유배 중 병사)보내는 한편 이미 죽은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역적의 율’로 다스리고, 안동 김씨이면서 노론벽파 중심인물이었던 우의정 김달순까지 사사하는 등 대다수의 벽파인물들을 중앙정계에서 축출하였으며, 노론벽파의 양대 거두 심환지와 김종수의 관작 또한 추탈(追奪)해버렸다.

 

이로써 지난 100여년간 조선에서 주류세력으로 호위호식하며 시대를 호령하였던 노론(벽파)은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쫓겨나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고, 친 정조세력인 시파가 조선왕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역사의 반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김조순이 있었다.

 

김조순은 이후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빈자리를 하나 둘 문중 사람들로 채우기 시작하였다.

 

하여, 조선은 그로부터 60여년에 걸쳐 김조순, 김명순, 김문순, 김희순, 김이익, 김이도, 김이교, 김이재, 김조근, 김좌근, 김교근, 김문근, 김좌근, 김흥근, 김홍근, 김수근, 김병기, 김병덕, 김병시, 김병국, 김병학 등 안동 김씨 일파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물론, 판서와 참판, 좌찬성, 훈련대장, 대제학, 대사헌, 함경감사, 홍문관제학, 한성부판윤 등 조선의 핵심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까지 싹쓸이하여 한 나라를 제멋대로 유린하는 ‘세도정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는 또한, 선조대에 김효원과 심의겸이라는 두 선비 간의 반목에서 비롯되어 모든 관료와 지식인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사생결단의 권력투쟁에 나서는 양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던, 사색당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출처] 사색당파의 이해-17|작성자 김삿갓

 

 

 

맺는 말

 

조선조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전말을 이 블러그에 올려야겠다고 작심했을 즈음, 기실 나는 ‘유배생활’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바람이나 쐴 겸 모처에 잠시 다녀오라는 인사권자의 당부(?)가 있던 순간에, 그리고 임지(任地)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황량한 겨울바다를 내다볼 때도, 또한 임지에 도착하여 세찬 바닷바람 맞으며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 헤맬 때까지도, 내 머리 속에는 줄곧 이런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울렸었다.

 

그래, 이건 유배(流配)다….

 

이 글은, 그 유배지의 사무실 뒤 전망 좋은 흡연장에서 드넓은 호수 쪽으로 담배연기를 후후 뿜어내다가 '불현듯' 어떤 영감(?)에 사로잡히면서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남루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되, ‘눈 맛’ 하나 만큼은 몇 해 전 들렀던 해월루(海月樓-다산초당)에 비할 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문득 정약용을 떠올렸던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옛날이야기 풀어가듯 가볍게 써보리라 작정했었다.

 

하지만 영조 대에 이르러서부터 과부하(?)가 걸려 - 마감시간에 에 쫓기듯 -  사건 나열에 급급해버린 점, 전반부에 비해 영․정조 대 이야기가 지나치게 장황해진 점 등은 못내 아쉬운 대목으로 남는다.(추후 전반부에 대한 보완작업을 통해 이 같은 불균형을 바로잡아볼 요량이다)

 

모두 17개의 카테고리로, 2008년 3월 17일 시작하여 7월 9일에 온점을 찍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내 유배기간과 괘를 같이 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정약용의 〈목민심서〉, 윤선도의 〈고산유고〉, 정철의 〈사미인곡〉 등과 마찬가지로 이 글 또한 유배지에서 쓰여 졌으니 ‘유배문학’이라고 불러야 할까나….^ ^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은 남의 원단(原緞)을 몰래 가져와 자르고, 잇고, 오리고, 붙이고, 덧대고, 꿰맨 ‘누비문학’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자신의 원단이 ‘손을 탔다’며 분개하고 계실 몇몇 분들에게는 심심한 사죄의 인사를 올린다.

 

아울러, 모쪼록 누추한 방까지 찾아와 글 같지도 않은 글 읽어주시느라 시력 깨나 버리셨을 모든 방문객 제위께도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아! ‘세월여류(歲月如流)’라고 했던가. 이 글을 마무리 짓고 나니, 내 유배생활도 얼추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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