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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군자 2021. 6. 15. 21:52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초중말복 5진주 세명. 5+5+5(6)=15(16).마지막 5진주는 판모리 6서시.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엄밀히 말하면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밝혀지는 '천지공사 진법을 설명해주는 안내서'로 <통합경전 서문>입니다.<통합경전> 전체는 본문 포함 기독교 신구약 두배가 넘는 분량입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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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공사도의 속뜻에 대한 이해 [대 우주는 정성기운으로 운행 돌아갑니다.

 

2020. 10. 3. 11:44

 

성(정성스러울 성)장공사도!

성장공사도의 원형으로 보이는 고문자도 치(부끄러울치)

(좌) 작자미상. ‘백이숙제(伯夷叔齊)’.  국립민속박물관. (우) 작자미상. ‘문자도 치(恥)’가회민화박물관.

은·주(殷周)의 교체기는 기원전 1046년입니다.

아득하게 먼 그 시절에도 은인자중 불사이군과 적폐청산 혁명 혁신은 있었읍니다.

그 시대의 현인 현자 문신 무신들은 그들 나름의 정치철학과 사명의식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노선을 결정했읍니다. 물론 서열에서 밀리거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도 수두룩했죠.

그들은 이념 대신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 하기도 했고 우왕 좌왕하던 시류는 자연스럽게 온건 보수파와 혁명급진파로 나뉘었읍니다.

은나라를 지키자는 쪽이 온건파였다면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쪽이 급진파였죠.

☆☆ 문왕과 강태공은 주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간 급진파였읍니다.

반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그 대척점에 선 사람들로 은나라를 무너뜨리는 무도한 일은 할 수 없다는 온건파였었고요.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급진파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여차직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입산할 각오가 되어 있던 온건파도 거리낄 것이 없었읍니다. 이념과 가치관이 다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노선과 색깔이 다른 사람들이 한 치 양보도 없이 맞부딪쳤으니 불꽃 튀는 부딪침은 어느 한쪽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끝날 수 없는 싸움이었읍니다.

어떤 선택이 옳은가요?

황제가 아닌 일꾼 신하의 관점에서 강태공과 백이 숙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강태공은 문무이왕을 주군으로 혁명과 전쟁을 선택하였고.

폭력을 폭력으로 바꿀 수 없었던 백이 숙제는 수양산에 올라 은둔하였읍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백이 열전’에서 백이숙제의 이야기를 공자(孔子)의 말로부터 시작합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스승에게 물었죠.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는 <“옛날 현자(賢者)들이시다.”>

ㅡ저희 생각엔 어떤 현자입니까?

어떤 생애를 살았기에 현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읍니까?

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줄 알았는데 ㅡ자공은 우리 생각처럼 묻는 대신 대뜸 “원망했습니까(怨乎)?” 라고 물었죠.

공자는 <“인(仁)을 추구하다 인을 얻었는데, 다시 무엇을 후회했겠느냐.”>

인은 공자가 강조한 최고의 도덕 원리 입니다.

공자는 인의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실천방법으로 효(孝), 제(悌), 충(忠), 서(恕), 예(禮), 악(樂) 등을 제시했읍니다.

공자는 백이숙제가 그중 한 가지를 실천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도리를 다했는데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백이숙제는 원망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후회하는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원망했습니까(怨乎)?”라고 물었을 때의 원(怨)에는 후회하다(悔)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겠죠.

사마천은 공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백이의 심정이 슬펐을 거라고 추정하고 공자와는 다른 기록이 있어 그 이야기를 적는다면서 비로소 그들의 생애를 들려줍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아들이었는데 왕위를 형제에게 양보했다. 그들은 서백창(西伯昌·문왕)이 노인을 잘 모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으나 주나라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대신 서백창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시호를 문왕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제를 치러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이렇게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 신분으로 군주를 죽이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백이숙제의 간언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수구 보수 온건파가 문왕과 무왕의 봉기에 회의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그들이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서 ‘음모수덕(陰謀修德)’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강태공이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문왕이 도덕과 인의를 음모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이 문왕과 무왕을 추켜세웠지만 알고 보면 그들 또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인의를 빌려왔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백이와 숙제였다고 생각합니다.

ㅡ생각은 있으나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런데 백이숙제는 기어이 효와 인 이라는 말을 들먹이며 기세등등한 군사들을 가로막고 나섰죠

이 모습을 본 무왕의 신하들이 백이 숙제를 칼로 베려고 했고. 이때 강태공이 나서서 사태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강태공은 3600개 낚싯대를 버리고 문왕 진영에 합류해 은나라 타도에 앞장서고 있었읍니다.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백이숙제를 일으켜 세워 가게 했읍니다.

그 뒤 무왕은 은나라를 평정했고 천하는 주나라가 종주(宗主)가 되었읍니다.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의롭게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었고 살았읍니다.(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採薇而食之, 遂餓而死). 그들은 수양산에서 굶주려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런 노래를 불렀다.

<< “저 서산에 올라/ 고사리를 캤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이때부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먹는 백이숙제의 모습은 절개를 지킨 인물의 상징으로 그림의 주제가 되었읍니다.

***작자미상의 위 ‘백이숙제’는 민화 ‘고사인물도10폭병풍(故事人物圖十幅屛風)’에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역시 수양산에 입산한 이후의 백이숙제 모습이죠. 병풍에 들어 있는 작품이라 세로가 매우 깁니다. 세로가 긴 화면은 상단의 제시, 중단의 산과 솟아오른 언덕, 하단의 인물과 배경으로 구분되는데 하단으로 갈수록 복잡하고. 그 복잡한 하단 중앙에 오늘의 주인공인 백이숙제가 서 있읍니다. 그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어깨에는 바구니를 걸쳤고. 이미 고사리 채취가 끝났는지 바구니가 나물로 수북합니다. 백이숙제 뒤로는 그들이 살았을 법한 소박한 초가삼간이 보이고. 초가삼간은 오른쪽의 소나무와 함께 이 그림이 조선 그림임을 백이 숙제가 동이족임을 알립니다.

그림의 상단 빈 공간에는 ‘주속의불식 채미수양산(周粟義不食 採薇首陽山)’이라는 제시가 적혀 있죠. ‘주나라 곡식을 의롭게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백이열전’의 ‘의불식주속(義不食周粟)’을 ‘주속의불식’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ㅡ사마천은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서 굶어 죽은 이야기로 그들의 전기를 끝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노자가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백이숙제는 착한 사람이 아닌가?》》.

요즘 세상에도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한평생을 편안하게 즐거워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폼나게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조심하고 말도 가려 하면서 공평하고 바른 일만 하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것이 과연 하늘의 도라면 그 도는 옳은가, 그른가? 사마천의 심도 있는 한숨 소리는 요즘도 우리가 자주 집어삼키는 하늘에 묻는 바로 그 내용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청절의 상징으로 추앙받은 백이숙제.

{{중국 고전문학 전문가 이나미 리쓰코(井波律子) 여사는 ‘중국의 은자들’에서 중국 고대의 은자들은 양극단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쪽 극단에는 누구한테도 속박당하지 않는 생활을 즐기려는 자유지향형 은자가 있다.

허유와 소부가 대표적이다. 반대쪽 극단에는 긴급 피난하듯 은둔의 길을 택해 자신을 다스리려 하는 금욕형 은자가 있다. 백이숙제가 그런 경우다. 후대에 이름깨나 날린 은자들은 거의 다 자유지향형과 금욕형 중 한쪽을 선택했다. 거기에 자신만의 기이한 행각을 덧붙여 개성적인 은자 캐릭터를 만들었다.

문제는 그들 중에서 가난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 물질적 금욕주의자는 수두룩한 반면,

백이숙제처럼 정신까지 자유롭게 해방된 은둔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ㅡ그만큼 백이숙제의 신념은 무겁고 의지는 강했다}}.

***백이숙제가 지키고자 했던 신념과 의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맹자(孟子)는 ‘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백이숙제에 대해

{{“섬길 만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부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으며,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러워지면 물러나 숨은 분”}}이라고 규정하였고.

그러면서 {{“성인 가운데 맑은 분(聖之淸者也)”}}이라고 칭송했읍니다.

☆☆‘문자도 치(恥)’는 글씨 그림입니다. 문자도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의 여덟 글자에 그 의미와 관련된 이야기나 대표적인 상징물을 그려 넣는데. 문자도는 18세기 이전부터 장식병풍으로 많이 제작되었고 19세기에는 민화로도 유행했었죠.

ㅡ‘치(恥)’의 글자를 파자해 보면 耳+心으로 구성되어 있읍니다. 왼쪽의 耳가 큰 변형 없이 원형을 유지했다면 오른쪽의 心에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추정할 만한 단서들을 직접적으로 그려 넣었읍니다.

心의 중앙에는 비석 같은 충절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백세청풍 이제지비(百歳淸風 夷齊之碑)’>>라는 글자가 칼로 새긴 듯 또박또박 적혀 있읍니다.

비석 위의 공간에는 <<‘천추청절 수양매월(千秋淸節 首陽梅月)’>>이라는 글씨를 흘려 쓰듯 자유롭게 적었고. 왼쪽 상단에는 매화꽃과 달이 장식되어 있읍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글자와 매와 달 등의 소품들은 전부 백이숙제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읍니다. ‘백세청풍’은 ‘일백 세대의 맑은 기풍’, 즉 영원히 맑은 기상을 뜻합니다.. 송(宋)의 주희(朱熹)는 백이숙제를 사모하여 수양산의 백이숙제 묘에 ‘백세청풍’ 네 글자를 썼다고 합니다. ‘이제지비’는 ‘백이와 숙제의 비’를 줄인 말이다.

‘천추청절 수양매월’은 ‘천추에 빛날 청절은 수양산의 매화와 달’이라는 뜻이고. 매화와 달은 청절의 상징입니다.

두 사람의 맑고 깨끗한 절개가 매화와 달처럼 환하게 비춘다는 의미이죠. 청풍, 청절은 맹자가 말한 ‘성인 가운데 맑은 분(聖之淸者也)’과 상통합니다. 결국 문자도 ‘치’는 백이숙제의 고귀한 삶을 글씨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ㅡ문자도에 나온 치(恥)는 흔히 염치(廉恥)와 함께 쓰는데. 우리가 입버릇처럼 “염치 좀 알아라” “염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염치입니다. 그렇다면 염치는 무엇일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죠. 우리는 흔히 낯가죽이 두꺼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무치’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고. ‘맹자’ 의 ‘진심상(盡心上)’에는 ‘무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대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은 왜 중요한가? 맹자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네 가지 기본 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단(四端)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 부끄러워하고 염치를 아는 수오지심, 이익과 도움을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 시비를 명확히 가릴 수 있는 시비지심이 사단입니다. 이 사단이 있어야 사람이다. 반대로 이 사단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맹자는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이야말로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이라 할 수 있읍니다.

☆☆강태공이 옳은가 백이숙제가 옳은가?

백이숙제는 불의에 항거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청절(淸節)로 후세에 절의의 상징이 되었고. 직접적으로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수양산이나 고사리만 언급해도 백이숙제의 이야기임을 알아먹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사회 프레임을 구축한 나라였읍니다.

유교의 핵심적인 가치가 효와 충 이었으니 백이 숙제만큼 그 가치를 정확하게 실천한 인물이 없었고. 그래서 백이숙제는 군주에게는 충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신하들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모델로 인기를 얻었읍니다.

물론 조선시대 내내 백이숙제가 추앙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읍니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 초기에 고려에 충성하려던 정몽주를 백이숙제처럼 여겨 결국 그를 제거하였고.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 운운하는 것도 일절 금지하였읍니다.

그런 이방원도 나라의 기틀이 잡히자 백이숙제를 높이 평가하고 두둔하기까지 했었읍니다.

자신의 왕조 또한 백이숙제 같은 충성스러운 신하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미묘한 상황은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고. 조선시대에 백이숙제를 그린 그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도 이 고민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ㅡ입장이 바뀌면 평가도 바뀝니다. 야당이 여당이 되면 자신들이 야당 시절에 극구 반대했던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야당이 야당 시절의 생각이 옳은가?

아니면 야당이 여당이 된 후의 생각이 옳은가.?

누가 옳고 그른가의 잣대로 평가하면 결론이 나지 않읍니다.

그 법안이 국민의 백년대계를 위해 마땅한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 후대의 역사가들 또한 무왕과 백이숙제를 두고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었죠.

무왕과 백이숙제 중 누가 옳은가.

만약 무왕이 옳다면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내려왔어야 마땅하고, 백이숙제가 옳다면 그는 폭군을 옹호한 기득권자에 불과하죠.

결국 사마천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강태공과 무왕도 높이고 백이숙제도 높이는 식>>으로 글을 마무리했읍니다.

3000년 전에 있었던 시비가 전혀 다른 시공간인 지금 이곳 대한민국에서 재현되는 것은 그만큼 명분과 실재가 다르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from주간조선 조정육 칼럼 보완)

당신의 생각은 어떻읍니까?

♡저의 생각은 마음은 백이 숙제의 단심으로 행동은 택화혁괘의 강태공으로...

☆☆☆

안내성사명기 도안의 세살림 말복도수의 비오!  

상제님께서 내려주신 성장(誠章)과 신장(信章)의 사명기에 보면, 수양매월(首陽梅月) 만고유풍(萬古遺風), 청조전어(靑鳥傳語) 백안공서(白雁貢書)의 가르침이 적혀 있습니다. 원래 성장(誠章) 공사도의 수양매월(首陽梅月) 만고유풍(萬古遺風)의 성구(聖句)는 민화에서 치(恥)를 그림으로 그린 후 수양매월(首陽梅月) 이제청절(夷濟淸節)이라 씌여진 글귀입니다. 이제청절(夷濟淸節)대신 만고유풍(萬古遺風)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은나라 고죽국의 백이숙제가 주나라의 녹봉을 먹는 것이 부끄럽다하여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만 캐먹고 살며 매화와 달을 벗삼아 살았다는 고사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죽은 뒤 매화가 피어나고 달빛이 밝게 비추었다고 합니다. 이같이 백이숙제의 절개를 형상화한 매화와 월상도에는 수양산에서 매화가 필 때 달 속에서 토끼가 나와 월계수 아래에서 방아를 찌는 모습을 민화로 그려 넣었는데 매화는 군자의 절개와 고결함을 월계수는 예로부터 선비의 고아함과 소박함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 기러기가 새 소식을 전해준다는 백이숙제의 고사를 빗대어 가르침을 내려주신 사명기의 깊은 의미는 앞으로 동지한식 105제, 사오미 개명 이후의 미래를 밝히는 밝은 등불이 될 것입니다.

태모 고수부님의 임피 흑운 명월도수 말씀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기러기가 새 희망의 소식을 전하듯이 사오미 개명의 밝은 달이 어두운 구름을 뚫고 도안(都安) 세 살림 소식을 전하며 휘영청 떠오른 것이 수양산 백이숙제의 고아한 절개위에 비춰지는 ((매월))입니다.

☆ 동지한식 백오제가 오기 전까지는 사명기가 무어 그리 대단한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고 그냥 다들 그렇게 그냥저냥 신앙했습니다.

또 그 사명기가 누구에게 내린 건지도 몰랐고 내린 의미도 몰랐습니다.

전명숙 장군도 최 수운 대신사도 사명기가 없어 한을 품었다 하시고 친히 사명기를 내리는 공사를 따로 보신 적 있습니다.  

이 사명기가 없어 최 익현도 전 명숙 장군도 피노리에서 잡혀 그 한을 풀지 못하고 포한이 되었다며 호소합니다. 상제님은 3 초(哨,招) 공사에 이은 대인大人출세 공사를 보시면서 손병희 이후 숙구지 문왕 공사를 통해 경만장 안 내성 성도의 도안都安 세 살림 출세 공사를 집행하십니다. 

이 세 살림 공사를 위해 안 내성(安乃成) 성도로부터 3 床 폐백공사를 받는 공사를 친히 집행하시고

<<청홍황 사명기와 함께 이를 증명할 성장(誠章), 예장(禮章), 신장(信章) 등 세 개의 사명도>>를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친히 내리어 후세를 위해 사가에 깊숙히 비장시킵니다.

사실 안 내성(安乃成) 성도도 자신에게 내린 사명기의 의미를 모른 채 1949년 선화하고 맙니다.

청음 이 상호 · 남주 이 성영(정립)의 증산<천사 공사기>와 <대순전경> 초판은 車京石 성도와 수석성도인 김 형렬(金亨烈) 수석 성도 양인으로부터 집중적으로 구술을 받아 편찬된 경전입니다.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내린 사명기司命旗 공사는 청음 이 상호가 듣질못했기 때문에 경전 속에 전혀 드러나지 않다가 安乃成 성도 선화이후 법종교法宗敎쪽으로 전해진 이후 알려지게 되는데 정작 그 의미는 묻혀진 채 전혀 밝혀진 바 없었습니다.

이유는 도안都安 세 살림 도수의 진실이 때가 되지 않으면 결코 밝혀지지 않는 건존 증산 상제님과 곤존 태모 고수부님의  은두장미隱頭藏尾 공사성격 때문입니다. 

현무경(玄武經) 또한 도안(都安) 세 살림을 맡은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기유년(己酉年) 정월(正月) 원단(元旦) 천지인신(天地人神)의 비밀을 모두 함축해 신권(神權)을 부리는 조화부(造化符)로 봉인하여 내리신 신부(神符) 입니다.

대흥리 본소 옆에 살던 안 내성(安乃成) 성도는 상제님으로부터 받으신 현무경(玄武經)을 태모님에게 바칩니다.

☆☆상제님은 사명기(司命旗)와 <현무경(玄武經)>을 당시 수석성도인 태운 김 형렬(金亨烈) 성도나 차 경석(車京石) 성도 혹은 문 공신(文公信) 성도나 김 경학(金京學) 성도에게 안 내리시고 경만장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내렸는데, 상제님 천지공사의 종통 핵심은 여기에 모든 천기가 담겨있다고 보면 됩니다. 

☆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내리신 사명기 公事圖는 <현무경(玄武經)>의 심령신대心靈神臺 해부도亥符圖입니다.((사명기. 심령신대 해부도. 소멸음해부. 공히 무속의 무지개 비나리 부인 단예부가 들어 있다.얼마전 소멸음해부 글 참조))

종통 사명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종통 사명기(司命旗)와 현무경(玄武經)을 내리신 천지인신(天地人神)의 신권공사가 일등방문 경만장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게 처결되어 집행된 사실이지 후일 누구에게 전달되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종통문제의 핵심을 한참 빗겨난 사실 왜곡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상제님 친필 현무경(玄武經)이 안 내성(安乃成) 성도 집에서 천지인신(天地人神) 공사로 집행되어 안 내성(安乃成) 성도에 의해 태모 고수부님에게 바쳐졌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안 내성(安乃成) 성도도 곧 이어 상제님의 명을 받들어 태을주 3년 수련공부로 들어가 상제님 어천 사실도 모른 채 전주 수통목(水桶木)으로 옮겨 어천하신 이후 다시 나타나신 상제님으로부터 봉두난발(蓬頭亂髮)공사와 상두쟁이 상투 매는 공사를 친히 받고 태을주 3년 수련공부를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입니다

(신해년 1911). 현무경(玄武經)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상제님 기유년(1909) 6월 24일 어천이후 계축년(道紀 43,1913) 봄 김  형렬(金亨烈) 성도가 태모님 으로부터 필사해 간 이후, 동 계축(癸丑)년(1913) 9월 19일 현무경파 순천도를 창교한 장 기준 (사수)이 찾아와 곤존 태모 고수부님과 차 경석 성도가 함께 약장궤를 처음 개봉해 장기준이 필사해 가면서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정읍 대흥리 안 내성(安乃成)성도 집에서 기유년(1909) 정월 1일 원단 현무경(玄武經) 공사를 집행하시고 이튿날 정월 2일 대흥리 지근거리에 있는 차 경석 집으로 가시어 병세문을 지어 맡기시는 공사를 보십니다. 뒤에 차 경석(車京石) 성도는 상제님께서 하루 전 원단 구정에 이웃에 사는 안내성 (安乃成) 성도 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을 집필해 맡기신 공사내용을 전해 듣고 안 내성(安乃成) 성도로부터 현무경(玄武經)을 빌려갑니다. 그런데 안 내성(安乃成) 성도의 3년간 태을주 수련의 공백기와 함께 차 경석(車京石) 성도로부터 현무경(玄武經)을 다시 돌려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참고하면 태모님에게 현무경(玄武經) 원본을 바친 이외에 별도로 차 경석 성도에게 현무경(玄武經) 원본을 빌려주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불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감안하면 안 내성(安乃成) 성도가 상제님 명으로 3년 수련에 들어가기 전 태모님에게 바친 현무경(玄武經)은 바로 차 경석 성도를 통해 태모님에게 바쳐진 것임을 최종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후일 이러한 바탕에서 태모님에게 바친 현무경(玄武經)은 기유년(1909) 상제님께서 다음과 같은 태모님의 천지대업 불변 다짐 공사에도 쓰시고, 김 형렬 성도 에게 필사본으로 베껴가게 하시기도 했으며, 장기준이 와 필사본으로 베껴가게 되기도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일 차 경석 성도는 현무경(玄武經) 공사에 대해 이 상호에게 기유년(1909) 원단(元旦:정월 1일) 상제님이 안 내성 성도의 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을 집필해 맡긴 것으로 전하지 않아 이 상호는 자신의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1926>에 “기유(1909) 정월 일일 사시 천사께서 현무경을 종필(집필을 마치심)하사 차 경석에게 맡기시다. 原文: 己酉正月一日巳時 天師께서玄武經을終筆하사 車京石의게맛기시다”라고 기록했다가 후에 내막을 알고 <대순전경 초판:1928>에서 안 내성 성도 집으로 바로잡아 기록합니다.

☆☆ 성장(誠章)에서 ‘수양매월(首陽梅月) 만고유풍(萬古遺風)’이라 한 것은 청사에 이러한 유풍이 길이길이 전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장(誠章)의 물형 안의 ‘백세청풍이제원(百世淸風夷齊院)’에서 예시하는 백이숙제의 유풍을 말한 것이고. 백이숙제의 유풍은 사실 조선 선비들의 유풍이며 전통이고 이는 성장(誠章)에 그 선비들이 지키고 이어가고자 하였던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포은 정몽주(鄭夢周)가 정안군(이방원)과 조영규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피살된 1392년으로부터 두문동에 은거하였던 고려 유신으로부터 백이숙제는 청절의 상징으로 정신적 지주이며 존숭의 대상이었다 할 것이고. 물론 이는 목은 이색이나 그의 제자 야은 길재를 통하여 조선조 사림에 깊숙이 뿌리내린 전통이었읍니다.

이러한 정신은 사실 동이 배달의 풍류정신과도 연관이 있읍니다.

또한 성장공사도와 두문동 성수도 공사는 깊은 연관이 있읍니다.

☆☆고려사열전에는 정몽주(鄭夢周, 1337 丁丑~1392 壬申)의 이름에 대하여 ‘자가 달가(達可)이며... 그 모친 이씨(李氏)가 임신했을 때 꿈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 놀라서 깨어 난 뒤 낳았으므로 이름을 정몽란(鄭夢蘭)이라고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하게 빼어났으며 어깨 위에 검은 점 일곱 개가 북두칠성처럼 벌여져 있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을유년) 모친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기에 놀라서 깨어 나가 보니 바로 정몽란이었죠. 그래서 정몽룡(鄭夢龍)으로 고쳤으며 관례(冠禮)를 하고 나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ㅡ이러한 탄생에 얽힌 꿈 이야기는 포은보다 200년 후에 태어난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에게서도 보입니다.

ㅡ이율곡은 덕수이씨 이원수와 신사임당 사이에서 1536년(중종 31년, 丙申) 강릉 북평현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는 이원수가 강릉에 오랫동안 세거하여 온 신씨집안에서 데릴사위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율곡은 학문과 그림으로 명성을 떨친 어머니 신사임당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사임당은 '어린아이의 머리는 백지와 같다. 부모의 가르침으로 백지에 무엇을 그리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서화에 능하였던 사임당의 곁에서 율곡은 다소 자유분방하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글을 배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석류알을 보고 율곡에게 물었다. "아가, 이것이 무엇 같으냐?" 잠시 생각에 잠긴 율곡은 고시를 인용하여 "석류 껍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石榴皮裏醉紅珠]"이라고 답했다. 이때의 율곡의 나이는 겨우 입을 떼고 말을 더듬거릴 수 있는 고작 세 살에 불과했죠. 이는 율곡이 세 살 때 이미 말과 글을 배우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율곡의 나이 여덟 살 때 이원수가 파주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 율곡은 임진강 화석정(化石亭)에서 살게 되었다. 원래 이곳은 야은 길재(吉再)가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하루는 율곡과 우계 성혼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혼은 백인걸에게 수학한 뒤에 퇴계 이황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율곡과 성혼은 한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하루는 성혼이 자랑하듯이 말했다. "나는 일곱 줄을 한꺼번에 읽을 수가 있소." 율곡은 웃으면서 "나는 한꺼번에 겨우 대여섯 줄밖에는 못 읽소."라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열 줄을 한꺼번에 읽었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했을 때 용이 아이를 감싸 품 안에 넣어주는 꿈을 꾸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임당은 어린 율곡을 현룡(見龍)이라고 불렀읍니다.

☆유교의 경전이 제대로 도입되기 전에 이미 성리학에 정통하였던 포은의 이름이 ((주나라))를 꿈에 그리워 한다는 뜻의 몽주(夢周)인데 초명이 몽룡(夢龍)이었던데 비하여 정확히 200년의 시차를 두고 율곡의 초명이 현룡(見龍)인 점은 기이하다 할 것입니다.

포은의 시호가 문충(文忠)인데, 포은이 1392년 임신년 선죽교에서 피살된 지로부터 8×8= 64년 만인 1456년 병자년에 사육신이 죽었고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인 성삼문의 시호가 충문(忠文)인 것과 성삼문의 오랜 동료였던 신숙주의 시호가 포은과 동일한 문충(文忠)인 것도 특징적입니다.

♤♤♤

만고 충신 성삼문! 진정한 유학자요 선비!

혁명도 일으켰고 충의도 지켰다.

성장공사도에 성삼문의 정신도 있다.

오늘 글의 결론 입니다.

대구 거창의 사육신 사당 육신사에서 이 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서 하룻 밤을 뜬 눈으로 세웠읍니다.

☆☆ 백이숙제를 꾸짖은 성삼문!

중국의 역사에서 유학(儒學)사상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유학을 창시한 성현은 공자였읍니다. 인(仁)이라는 중심사상을 전제로 하여 ‘논어( 語)’라는 언행(言行)을 기록한 책이 유학의 제일인걸로 아는동양의 유학사상은 바로 그러한 인의를 얼마나 실천하느냐로 그 시대를 평가하고, 그 인간을 평가하게 되어있읍니다.

인의가 제대로 실천되는 시대는 좋은 세상이요, 좋은 나라였으나 인의가 무너지고 인의가 사라진 세상은 나쁜 세상이요, 나쁜 나라였읍니다.

그래서 인은 역시 의보다는 한 단계 높은 경지였고. 인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한 공자는 성인(聖人)으로 존숭되었고, 의를 실천한 맹자는 아성(亞聖)이라 하여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니 역시 의는 인의 아래 단계라고 여길 수 있읍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조선 500년은 어떤 시대보다도 유학사상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배우고 실천했던 시대였읍니다. 

ㅡ완전무결한 인의 실천이야 성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그래도 의는 인간이 노력하면 실천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의를 위해 생명까지 바친 의인들이 나타났으니, 고려 말 대표적인 충신이자 의인이던 포은 정몽주야말로 의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읍니다. 포은을 이어서 조선 초기에 등장한 사육신들 또한 조선을 대표했던 의인이자 의의 실천자로 여기는 것에 이견이 없읍니다.

천재적인 두뇌와 뛰어난 학식, 탁월한 충성심으로 세종대왕을 보필하며 한글을 창제하고 세종의 치세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박팽년(1417∼1456)과 성삼문(1418∼1456)은 사육신 중에서도 쌍벽으로 39세와 38세라는 한창의 나이에 의를 지키다가 능지처참의 악독한 형벌로 세상을 떠난 의인들이었죠.

팔과 다리 등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그런 죽음이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일이었던가요. 

ㅡ인간이 의를 실천하고 의리를 지키는 일은 그렇게 무서운 일입니다.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의는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젊은 시절부터 성삼문은 아버지가 중국의 사신으로 가는 때가 많아 그를 따라 중국을 여행한 때가 많았고. 동양 5,000년 역사에서 의를 말하면 맨 먼저 거명되는 사람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였었죠. 주(周)의 무왕(武王)이 혁명을 위해, 악독한 임금 주(紂)를 정벌하려고 말을 타고 나가자 주(紂)의 신하였던 백이ㆍ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당기며 신하가 임금을 정벌함은 인(仁)도 의(義)도 아니라고 간(諫)했다고 하죠. 결국 무왕이 성공하여 주(周)가 천하를 통일하자 백이ㆍ숙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를 내세우고 수양산에 들어가 숨어살면서 고사리만 캐먹고 살다가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읍니다. 만고의 충신이 된 백이ㆍ숙제를 위해 수양산 아래에는 이제를 찬양하는 비가 서 있는데 이른바 ‘이제비(夷齊碑)입니다.

☆☆중국에 간 성삼문은 우연히 이제비가 서있는 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지었읍니다.

♧ 그때 말고삐 당기며 그르다고 감히 말했으니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해와 달처럼 빛나더라 (大義堂堂日月輝)

풀과 나무 또한 주나라 이슬과 비로 자라는데 (草木亦霑周雨露)

그대여 수양산 고사리 자신 것 부끄러하소 (愧君猶食首陽薇)♤

(‘六先生遺稿’)

☆☆ 무왕이 천하를 통일했으니 수양산 또한 무왕이 통치하는 주나라 땅이고, 거기서 자라는 고사리 또한 주나라 생산품인데 그걸 먹고 살았으면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라는 성삼문의 호통이었다. 전하는 말로는 그 시를 이제비에 딱 부쳤더니 비가 부끄러워 땀을 쭉쭉 흐르더라는 전설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시는 시조로도 전해진다.

☆☆ 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와 숙제 애달파한다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뜯어 먹어야 되는가

비록 푸성귀라도 그게 누구 땅에서 났던고?☆☆

ㅡ 천하의 충신이자 의인이던 백이숙제가 부끄러워 땀을 쭉쭉 흐르게 했던 <<성삼문,>>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만한 의리를 지닌 성품의 사나이였을까!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恨)하노라”의 한이란 바로 한스럽게, 애달프게 여긴다는 뜻이었으니, 성삼문의 그 뛰어난 기개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대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참조>>

임신년인 1392년에 포은이 피살되고 64년이 지난 1456년 병자년에 사육신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81년이 지난 1472년 임진년 12월 세조실록이 완성되었다. 매월당 김시습은 신묘년인 1471년 봄에 한양에 들어왔다가 성종3년이던 이 해 가을에 수락산에 터를 잡고 은둔할 마음을 먹었다. 태종 17년인 1417년 정유년(丁酉年) 6월 정유일(丁酉日)에 태어났던 신숙주(申叔舟)는 3년 뒤인 1475년 성종6년 을미년(乙未年) 여름 6월 무오일(戊午日)에 세상을 떠났다. 병자년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참화를 당하고 다시 64년이 지난 1519년(중종 14) 기묘년 음력 11월에 조광조, 김정, 박훈, 김식 등의 사림파가 숙청을 당하는 기묘사화의 참변이 또 일어난다. 신숙주가 세상을 떠난 지 45년째 되던 해입니다.

이율곡이 태어난 것은 사육신이 참변을 당한 해로부터 80년째이며 세조실록이 완성된 1471년 임진년으로부터 64년, 기묘사화가 일어난 해로부터 18년째에 해당하는 해였다. 이율곡이 태어난 1536년(丙申)은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태어난 해이기도 한데 6년 뒤인 1542년 임인년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태어나기도 하였고. 조선조 최대의 첨예한 논쟁인 기축옥사의 중심에 선 인물인 정여립(鄭汝立, 1546∼1589) 이 태어난 것은 율곡과 송강이 태어나고 10년이 지난 뒤인 병오(丙午)년입니다. 1589년 기축년 옥사사건은 3년간 진행되었는데 정여립을 비롯하여 1000여명이 참화를 입은 조선조 최대의 선비들의 화란이었던 이 사건의 발단과 경과의 중심에 해당하는 인물이 이율곡과 정철이었으니 1592년 임진년에 왜란을 당하고 이듬해 정철이 강화에서 굶어 죽기까지는 조선개국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때였다.(1392년 임신년에 포은이 피살되고 1393년에 조선이 개국하였고 1592년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 기축옥사가 일어난 것도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70년에 해당하고 3년간 참화가 진행되었으니 72년이란 시간을 채운 이 참변 끝에 찾아온 것이 임진란이었읍니다.

 

중종 37년 1542년 임인년 10월 의성의 외가에서 아버지 유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조 최고의 경세가로 불린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유성룡은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는데 4세 때 이미 글을 깨우친 천재였다. 20세에 관악산 암자에서 홀로 맹자를 읽고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들은 승려가 도둑으로 변장하여 유성룡의 담력을 시험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굳은 의지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글을 읽었고, 승려는 그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전한다. 1562년 가을, 21세의 유성룡은 형 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형 운룡에 이어 유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감탄하였고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기축년에 사옥이 일어나고 서인이 전권을 장악했을 때 유성룡은 나이 50으로 좌의정이 되어 이조판서를 겸직했고, 51세가 되던 이듬해 임진년(1592)에 선조의 특명으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군기를 관장하게 되었고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곧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 전시 상황의 군사 업무를 관장하면서 전국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게 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편성했다. 다시 신임을 얻어 영의정에 복귀하여 1598년까지 조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해 일본과의 화친을 주도했다는 누명을 씌운 북인 세력의 거센 탄핵으로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듬해 고향인 하회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뒤에 누명이 벗겨지고 관직이 회복되었지만 그가 받은 상처는 7년동안의 선조의 부름을 거절하며 고향을 지키게 하였다. 이충무공에게 선무1등공신 녹훈과 좌의정이 증직되었던 1604년(甲辰)에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의 저술을 마치게 된다.

정암 조광조의 시호가 문정(文正)인데 이율곡의 시호가 문성(文成)이었고 퇴계 이황의 제자로 충무공 이순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또 임진란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면서 징비록을 남겼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시호가 또 포은과 신숙주와 시호와 같은 문충(文忠)이다. 

이들의 시호와 태어난 해, 시대의 격변이 일어난 해의 의미는 두문동성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성장(誠章)의 ‘백세청풍이제원(百世淸風夷齊院)’과 ‘수양매월(首陽梅月) 만고유풍(萬古遺風)’에 대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두문동 성수의 중심에 64와 81이란 숫자가 있고 거기에 포은과 성삼문과 신숙주와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이율곡과 정철과 정여립이 있고 유성룡이 있다. 기묘사화 때의 성균관대사성 동천(東泉) 김식(金湜) 또한 조광조와 같은 임인생이었다.

 

☆☆ *좌측 7봉은 병7군화. 우측 9봉(구릿골 구성산 용천검) 신9금ㅡ병신.

*백세청풍 이제원 일곱(7)글자는 칠성도꾼 범증산도가 추수판.

*수양매월. 수양은 천간은 갑3.

매월.매화는 음력 2~3월 묘월 진월에 핀다.

수양매월은 갑묘나 갑진년 묘율이나 진월인데 최근 세운상 갑묘는 무의미하고 갑진년2024 3월로 봅니다.

갑진년 진월에 만세를 내려온 풍류의 충의가 이제원(동이가 세상을 구원하는 집)에 내린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80리.

두문동 성수도공사 참조.

♤ 성장(誠章)이 병신(丙申)의 물형이라고 하였으므로 이에는 이율곡을 불러 그 사명을 맡겼다고 할 수 있고, 거기에 포은에서 성삼문에 이르는, 또 조광조와 김식에 이르는 이제원의 도수가 붙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정여립을 비롯한 조선 사림의 원혼을 푸는 도수가 들어 있다 하겠다.

이 가운데 멸문을 당하여 중천신이 된 성삼문이 있고 그 전후로 수양대군과 매월당 김시습이 있다면 성장(誠章)에서 백이숙제이제원과 수양매월 만고유풍의 의미는 충분히 설명이 되고도 남습니다.

천문지호에 세 개의 문(三門)이 있다고 하였는데, 성삼문의 태어나고 죽는 일에도 ‘삼초(三哨)’의 문답이 있었다. ‘태어날 때 세 번 묻더니 죽을 때도 세 번 신문 당하고 죽었다’는 성삼문의 운명이 참으로 기이하지만 하늘이 그를 특별히 쓰기 위하여 큰 업을 남겼다고 볼 수밖에 없겠읍니다.

☆ 여기서 꼭 하나 되짚어 보고 싶은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의미입니다. 성리학적 토대 위에 설립된 조선에서는 왕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교육을 통하여 학업을 쌓아야 했고 왕세자의 자리는 고된 학업을 쌓고 또 시험을 통하여 그 성취도를 검증받아야만 했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성리학적 이상에 얼마나 충실하려 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통 적장자 계승의 왕위계승의 정통성이란 원칙은 이상하리만치 지켜지지 못했죠.

즉 적통인 정실인 중전 소생의 아들이어야 하고, 적통 중에서도 장자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조선의 왕위계승에서는 불가피하게 적용되기가 어려웠읍니다.

개국조인 태조 이성계부터가 우선 차남이었고, 최초의 적장자였던 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병사하였고, 그 뒤를 이은 단종 또한 정변으로 물러나서 시해되었다. 성종의 맏아들로 등극한 연산군은 31세로 폐출당했고, 중종의 적장자인 인종 또한 재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31세로 병사하였다. 명종 사후 적통이 끊어지게 되어 후계가 없자 중종의 후궁 소생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가 방계로 즉위한다. 이후 효종의 적장자로 현종이 등극하였으나 34세로 병사하였고, 현종의 적장자였던 숙종이 재위 45년 10개월로 60세의 일기로 승하하니 적장자로 유일하게 제대로 재위를 한 임금입니다.

개국조인 태조부터 고종까지 26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 출신 임금은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 등 여섯 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적장자가 폐출당하는 정변까지 일어나면서 기구하게 이어져 온 조선의 왕위계승은 당요(唐堯)가 순(舜)에게 선양한 것에 못지아니한 숙명적이고도 강제적인 상황이었다 할 것이니

이것이 단종의 한인가, 단주의 한인가. 오백년 동안 종묘사직을 떠받친 성리학적 전통 속에서 백이숙제의 한만큼이나 뿌리 깊은 왕통의 한이 의미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성삼문이 지키고자 했고 우려하고 우려했던 일이 이런 것이었을까.?

 ♡♡ 청풍명월 증산도가.

대각기원 복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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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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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宗統. <선도신정경(정영규)>*-천지대사가 6월 7월 8월, 나는 바닥에 일1 붙은 줄 알고 빼느니라.-

http://blog.daum.net/cheramia/15691071

 

종통宗統. <선도신정경(정영규)>*-천지대사가 6월 7월 8월, 나는 바닥에 일1 붙은 줄 알고 빼느니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익명으로 다운만 받아도 됩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종통宗統. 종통 인사문제 6,7,8 월생 부연설명 <선도신정경(정영규)>* -천지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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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宗統. 대순진리회, 증산도 및 범 증산계 40년 신앙 도반 동료들에게 진심을 다해 드리는 글.By 慧光 大仙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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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宗統. 대순진리회, 증산도 및 범 증산계 40년 신앙 도반 동료들에게 진심을 다해 드리는 글.B

상제님 천지공사의 핵심은 종통 인사문제이며 누가 마지막으로 선천 상극의 역사를 종결하고 상생의 만사지 조화세계인 후천을 개창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인사문제의 최종결론 수지지어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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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宗統.종통문제의 노른자 핵심, 핵심 중의 핵심- 진주 가구판 15진주 노름 판에 대한 최종정리 By혜광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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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통宗統.종통문제의 노른자 핵심, 핵심 중의 핵심- 십오진주노름 판에 대한 최종정리 By慧光 大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西神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통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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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복운수의 본부 근무자와의 진리전쟁에서> 보낸 카톡글 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By 慧光 大仙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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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복운수의 본부 근무자와의 진리전쟁에서> 보낸 카톡글 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By 慧光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통합경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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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곳에 들른 과객들에게. 이것 하나만 건지고 가시오. 나가면 깜부기요 들어서면 만복동이라.건존 천지공사 9년, 곤존 신정공사 10년 도합 건존곤존 음양합덕공사 19년의 최종 결론은 낙종물(태을교, 선도교)-이종물(보천교)-추수 세살림 문왕사명자 인사문제라는 것. 이 카드가 펼쳐지는 원리가 선천운수 궁팔십달팔십한 강태공이 문왕 만나 달팔십했듯, 추수종통의 만날 사람 만나는 문왕 추수사명자 만나는 것. 문왕사명자 도안의 초중말복의 내피 속살 카드 소위 히든카드는 사마중달이며 세살림 전개는 사마중달-사마사-사마소로 전개된다는 것이며, 문왕사명자인 사마중달의 정체는 살아생전 드러나지 않아 '지금운수는 동지한식백오제'에 열리는 사오미개명장에 진법이 열려 세살림 전체 얼개 인사문제가 드러나 문왕 사명자가 초복살림을 여는 사마중달이며 중복도정 책임자 안경전 전 종정이 사마사사명자라는 것. 사마중달 3부자이자 문왕사명자 3부자가 초중말복 추수사명을 매듭짓는 삼련불성(三聯佛成)이 삼불산(三佛山), '삼련불성(三聯佛成) 되게 되면 천하만사 아련마는 어느 누가 알쏘냐.(도전11:309:8)' 문왕사명자 선화등천이후 혼란에 편승해 상제님 진리세계에 마지막 자작사당의 난법이 판치니 현무지도 그 중의 하나라는 것. 선천 말 마지막 운수놀음에 척신발동에 넘어가지말고 마지막으로 부디 인연법줄 잘 잡아 만복동이 되시오들.

말복운수로 보는 인사와 도수, 그리고 현실 시리즈5-2, 포교 50년 공부 종필에 대하여(2)- 慧光 大仙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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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운수로 보는 인사와 도수, 그리고 현실 시리즈5-2, 포교 50년 공부 종필에 대하여(2)- 慧光 大��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초중말복 5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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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운수로 보는 천지공사의 도수와 인사 그리고 현실 !-시리즈 3-1>-By慧光 大仙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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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운수로 보는 천지공사의 도수와 인사 그리고 현실 !-시리즈 3-1>-By慧光 大仙師

동지한식백오제 105년만에 공개된 운암강수만경래 경만장 안내성 성도 私家에 전한 임술생 문왕 사명자 3父子 都安 초,중,말복(壬戌, 甲午, 丙申) 세살림 司命旗 엠불럼(emblem) 로고. <통합경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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