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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신화와 옛이야기

나, 후안 데 파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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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외국 동화

2021. 2. 22.

전기, 사실과 허구 그 사이

《나, 후안 데 파레하》(엘리자베스 보튼 데 트레비뇨 글/다른/2008년)

 

흔히 한 인물의 일생의 행적을 적은 글을 전기문이라고 한다. 즉 전기문학은 어린이책에서의 위인전, 혹은 인물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위인전일까? 아닐까? 보통 위인전의 경우 동화와 구분하여 위인전 혹은 인물이야기라는 타이틀을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신분을 초월한 사제지간의 우정과 예술이야기’라는 부제는 있지만 위인전 혹은 인물이야기라는 타이틀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여러 모로 볼 때 전기의 성격이 강하다.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후안 데 파레하가 실존 인물이고, 기본적으로 그의 일생을 따라가며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안 데 파레하는 17세기 초 스페인에서 태어난 노예 출신 화가다. 17세기의 사람, 더구나 노예 신분으로 있던 사람의 삶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남겨진 기록이 없을 가능성이 거의 100%이기 때문이다. 이름만 알려져 있고,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이 실재했던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름 외에 다른 모든 건 허구로 쓰여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건 전기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홍길동이란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고 해서 『홍길동전』이 전기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후안 데 파레하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그의 주인이었던 벨라스케스 덕분이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궁정 화가였고, 인상주의와 사실주의 화법의 선구자라는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덕분에 벨라스케스의 주변을 살피는 가운데 후안 데 파레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알려진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맺는 말’에서 작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의 친척으로부터 후안 데 파레하를 상속 받은 것, 그리고 벨라스케스가 이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 또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에서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 후안 데 파레하는 결국 그의 그림이 유럽의 몇몇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을 만큼 숙달된 화가가 되었다는 것, 벨라스케스가 왕과 상호 존경과 애정으로 굳게 맺어진 것처럼 그의 노예였던 후안 데 파레하와도 존경과 애정으로 묶인 관계였고, 마침내 그에게 자유를 주고서는 그를 조수로 임명했다는 것 정도이다. 여기에 당시 스페인에서는 노예가 장인이 될 수는 있었지만 예술은 할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는 당시의 상황 정도가 추가될 뿐이다.
작가는 이처럼 많지 않은 사실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인물들을 걸쳐 놓으며 이야기를 써나간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확실히 알려진 사실들이 얼마 되지 않기에 ‘진실의 실은 여리고 이음새가 끊기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는 허구의 이야기가 얼마나 촘촘하게 잘 짜여져 있느냐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돋보인다. 작가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는 한계를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을 해석해서 틈을 메움으로써 극복한다.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당시의 사회 상황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노예였지만 다른 노예들과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던 후안 데 파라하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벨라스케스는 후안 데 파라하가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노예였음에도 다른 일을 시키지 않고 그가 그림을 그릴 때 시중을 들게 한다. 이는 벨라스케스가 후안 데 파라하에게 조수 역할을 맡겨도 좋다는 판단 근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후안 데 파라하를 그의 첫 번째 주인의 시동으로 설정하면서 주인의 문화를 가깝게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나, 주인으로부터 글자를 배우게 한 것도 그가 벨라스케스 곁에서 늘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설정이었을 것이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공감이 간다. 후안 데 파레하가 노예는 예술을 할 수 없다는 법을 어기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베끼면서 그림 공부를 해 나가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후안 데 파레하와 벨라스케스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은 작가가 엮어놓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근거 있는 허구와 결합을 해서 있었던 사실을 더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여준다.
다시 처음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은 전기일까? 아닐까? 실존했던 인물을 사실에 바탕해서 쓴 책이란 점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고민이다(사실 이런 구분을 꼭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긴 하다). 이는 실존했던 인물을, 사실을 바탕으로 썼지만 그 초점이 반드시 후안 데 파레하에게만 맞춰지지 않는다. 후안 데 파레하에게 벨라스케스의 존재는 절대적이었고, 주인과 노예로서 혹은 화가와 조수로서 둘은 삶의 대부분을 함께 했고, 결국엔 벨라스케스가 그를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줌으로써 화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 준 만큼 벨라스케스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의 형식은 후안 데 파레하가 자신의 삶을 일인칭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이 벨라스케스와의 관계 속에서 펼쳐진다. 즉, 이 책은 후안 데 파라하만의 이야기도, 벨라스케스만의 이야기도 아닌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의 부제처럼 어느 한 사람의 인물이야기가 아니라 ‘신분을 초월한 사제지간의 우정과 예술 이야기’가 딱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가 후안 데 파라하 자신이 태어나는 이야기부터 시작했지만 화가로 성공하는 이야기까지 가지 않고, 벨라스케스가 죽고 난 뒤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을 보며 전기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했던 건 이 책 자체에 대한 분류 때문이 아니라 위인전 혹은 인물이야기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린이 책에서 위인전(인물이야기)은 특별한 몇몇 경우를 빼고는 동화 형식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고민될 때가 많았다. 이런 고민은 그 인물이 아주 오래 전의 인물이거나 혹은 남겨진 자료가 없을수록 커진다. 심한 경우는 허구가 너무 지나쳐 사실에서 벗어나 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특성상 허구까지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실존했던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사실과 허구 사이를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시사하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작가가 ‘맺는 말’에서 밝힌 것처럼 허구까지 다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기 보다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알려주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24호(2008년 5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