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보는눈

미완의광복 2006. 1. 6. 23:06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될 당시의 미국과 소련, 그리고 각지의 '반식민지 저항세력'은 공동의 적을 앞에 놓고 비교적 순탄한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가 분명해지고 전리품을 챙겨야 될 순간이 다가오자 이들 상이한 각 진영들은 심각한 이해의 대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을 대신하여 아시아 지역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애써 대일본 전선에 끌어들였던 소련의 진출범위를 최소화시킴과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와 혈전을 벌여 온 아시아 각 나라의 '반식민지 저항운동'이 독립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하였다.

 

이를 보다 명료화하기 위해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얻어낸 정치적 소득을 규정지은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였다.  이 명령은 모든 작전지역에서의 일본군은 연합국의 항복접수에 협력할 것과 무엇보다도 해당지역의 승인받지 못한 무장저항단체(중국공산당 휘하의 동군, 조선의 조선인민혁명군, 베트남의 베트민 무장부대, 필리핀의 후크단 등으로 이들 무장세력은 공통적으로 반제 반봉건 혁명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항일전선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에 항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이 명령은 조선,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와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일본으로부터, 맥아더가 선정하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력에게 이양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같은 일반명령 1호의 방침에 따라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해병대는 전쟁이 종결된 직후부터 일본군과 연합하여 중국내 반식민지 무장세력(주로 모택동의 홍군)을 새로운 적으로 하는 전투에 돌입하였다.  또한 미군에 의해 탈환된 필리핀에서는 식민지 부활을 위한 계획이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을 점령함으로써 소련에 대항한 親美的 日本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같은 방침은 즉각적으로 소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소련측으로서는, 미국이 병력을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유럽에서의 소련군의 희생 덕분이며 소련이 연합국의 대의에 다대한 기여를 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정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소련군이 71만 4천명의 일본군과 맞붙은 2주간의 격렬한 전투에서 최소한 8천명의 인명손실을 입으면서도 여순과 대련항에 대한 공정부대 투하를 포함한 신속한 공격을 한 덕택에 미국은 중국에서의 전투에 발이 묶이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에서의 점령군 정부구성에 대한 소련의 참여요구를 '단 며칠 동안 전쟁에 참가한 나라로서 점령군 정부구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며 즉각 거부했다.  결국 8월 11일 미국정부는 동맹국들이 여하한 부대를 일본에 파견할지라도 통일 점령군 정부의 최고사령관을 지명하는 것은 오직 미국뿐이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책각서를 최종 공표하였다.  영국과 소련은 이 결정에 반대를 표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상과 같은 사태진전 속에서 한반도를 두 동강 내는 시초가 되는 38선 설정이 이루어졌다.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하였으며 16일에는 훨씬 더 남쪽인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공추세에 비추어볼 때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단순한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미군에게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대가 한반도에서 60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 향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소련에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의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하였던 국무성 일반참모부의 딘 러스크 대령은 훗날 의회에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육군측은 가능한 한 북쪽에서 항복받기를 원하는 미국의 정치적 욕구와 미군이 그 지역에 도달하기에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는 점을 조화한 제안을 요청했다.  우리는 38도선을 권고했는데.....이것은 미군의 책임지역 내에 한국의 수도를 포함시켜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한반도 분할점령에 관한 미국의 제안을 별다른 반대없이 받아들였고 서울에 진출해 있었던 일부 소련군은 그 즉시 38선 이북으로 되돌아갔다.  소련군이 그 당시 한반도 전 지역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분할점령 제의를 간단히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뚜렷하지 않다.  단지 몇가지 방향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우선 소련은 한반도에서의 양보를 통해 일본에 대한 군사점령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내고자 희망했을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파괴를 경험한 소련으로서 그 복원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가급적이면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에 발맞추어 맥아더는 9월 2일 일본의 공식항복 서명과 함께 이를 포고하고, 한반도에서 38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렇게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순수한 군사적 목적'에 의해 임의적으로 설정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냉정히 살펴보면 순수한 군사적 목적에 의한 38선 설정이란 전혀 불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8월 15일 아베 총독과 여운형 사이에 협약이 맺어진 사실을 통해서 드러나듯이 조선 내의 일본군과 총독부 관리들은 본국의 패망과 함께 가급적이면 별 탈없이 조속하게 철수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점이 미처 미군에 의해 확인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피로에 지쳐 있는 자국 군대를 애써 한반도에 투입하는 것보다는 이미 손쉽게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달성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 있던 소련군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순수한 군사적 관점'에 부합하는 조치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불과 얼마전, 약간의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도 관동군에 대한 공격임무를 소련에게 떠맡기고자 무척이나 애썼던 미국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여하튼 미국이 38선을 확정하게 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 미군이 남한 땅에 진주하기 이전에 도리어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도록 종용했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히 밝혀진다.

 

따라서 미국이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제의한 것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군사적 목적이 아닌 일반명령 1호에서 포괄적으로 기도되고 있는 것처럼 전쟁에 대한 정치적 소득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 문제는 그로부터 얼마 후 미군이 38선 이남에 진주한 이후 보여주었던 행위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군이 남한 땅에 진주한 것은 9월 8일이었다.  이는 8월 15일 해방된 날로부터 약 3주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 일본총독부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통치권을 이양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총독부 건물에는 의연히 태극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미군 선발대가 비밀리에 도착하여,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계속 유지하되,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고하였다.  미국의 통고를 받은 조선총독부는 8월 18일 오후에 여운형에 대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발표하고, 일단 인계하였던 신문사와 학교 등을 다시 접수하였다.  이와 함께 건물에 게양되었던 태극기도 다시 일장기로 바뀌었다.

 

물론 이러한 사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건국준비위원회는 계속적으로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9월 6일 역사적인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계속적인 활동에 당황하게 된 조선총독 아베는 8월 28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한반도의 일반적 상황을 전하고 치안유지의 권한을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공산주의자와 선돌가들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회답이 맥아더로부터 조선총독 아베에게 왔다.  "귀하는 우리 군대가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38선 이남 지역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기구를 보전할 것을 지시한다. ....나는 귀하에게 그곳의 질서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지시하는 바이다."  이를 받아본 아베 총독의 회신은 "귀하의 명철한 회답을 받고 본인은 지극히 기쁘다."라는 것이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하루 전인 9월 7일 맥아더 사령부는 38선 이남에 대한 점령정책을 명시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고 이 포고문은 그 즉시 비행기로 남한의 상공에 뿌려지게 되었다.

 

                          『조선 인민에게 고함』

 

본관은 태평양 방면 미육군총사령관으로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으로써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및 조선 인민에 대한 군정을 펴면서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통치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된다.

 

제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이 명예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제4조  주민의 재산권은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직무에 종사한다.

 

제5조  군정 기간에 있어서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에 해석 또는 정의가 불명하거나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영어 원문으 기본으로 한다.

 

제6조  앞으로 모든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될 것이며, 주민이 이행해야 할 사항들을 명기하게 될 것이다.

 

                                   일본 요꼬하마에서  1945년 9월 7일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

 

이와 함께 이틀 후에 발표된 포고 제2호에서는 "조선인으로서 포고명령을 위반한 자는 사형 등의 엄벌에 처하겠다."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제24군단 소속 4, 6, 7 보병사단으로, 총 병력은 7만 2,000여명에 이르는 대부대였다)은 공군의 엄호 하에 완전무장을 하고 마치 적진에 상륙하듯 무시무시하게 인천에 상륙했으며 미리 일본 군경을 동원, 조선인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금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들이 '해방군'인 미군에 대한 반가운 마음으로 이들을 환영하고자 외출했고, 결국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의 총격을 받아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조선인들이 이에 항의하자 미군 당국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오히려 살인을 저지른 일본경찰을 두둔하였다.

 

어느모로 보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태도는 정복자의 그것이었지 해방자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발표한 포고문 내용 속에는 조선의 해방을 경축하는 구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복종의 강요와 저항에 대한 경고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일본인들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마치 동지를 대하는 것과 같은 극히 우호적인 것이었다.  일본인 역시 진주한 미군을 열렬히 환영하였고 쉽게 협조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9월 11일자 사설에서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