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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 2021. 6. 23. 08:49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


2021년 6월 22일,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를 찾아서..

무위사에서 잠시 머물다가 어둠이 내려 월남사지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는다.

어둠이 깃든 월남사지의 풍경과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1988년12월21일)로 지정된 월남사지(月南寺址)는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남사재월출산남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 - 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된 듯하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지』에 ‘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동국여지지를 쓸 당시(1649∼1659) 이미 월남사는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근에 있는 무위사의 사적기에 임진왜란 때 주변의 절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내용이 있어 월남사도 이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지(金堂址)에는 월남사의 건물 초석과 기단으로 보이는 축대가 남아 있으며, 마을 어귀의 돌담장 근처에서 기와편과 청자·백자편, 탑재로 쓰인 직사각형의 판석들이 발견되었다.

1980년대 중반 모전석탑 우측에 있는 어느 민가의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월남사지에는 원래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모전석탑과 또 하나의 석탑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발견된 옥개석의 세부 기법이 모전석탑 양식과 다른 신라의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절터에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였던 것이다.

기록대로 진각국사가 창건하였다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모전석탑의 조성시기 또한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같은 백제계 탑들이 고려 초기부터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 월남사의 중창일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민가가 있으며 마을 입구 양쪽에 월남사지 모전석탑(보물 제298호)과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가 있다.

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였던 것 같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고 있다.

가람배치 형식은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만들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좌우측으로도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축선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뿐인데, 기와류는 문양·태토(胎土)·소성도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유물은 극소수이고 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자기류도 완·접시·병·대접 등 다양한데 모두 고려시대 유물들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298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되었으며, 월남사지 모전석탑으로도 불린다.

월남사지에 남아 있으며 멀리 월출산 천왕봉을 뒤로 하고 과거 법당이 있던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민가에서 발견된 또 다른 석탑의 옥개석 부재는 이 절터와의 관련성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북쪽 가까이 언덕에는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보물 제313호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비가 남아 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2014년 구조적인 문제점이 발견돼 정밀 안전진단을 실시했으며 붕괴위험이 우려된다는 진단결과 문화재청이 전체 해체보수를 결정했다.

해체‧보수 과정에서 청동병이 3층 탑신석 하부에서 발견되었으며, 2020년 2월 복원 후 일반에 공개하였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마찬가지로 모전석탑 양식을 보이는 3층 석탑이다.

탑 주위에는 측면과 윗면은 다듬어져 있으나 내부는 자연석 그대로인 여러 개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탑구가 둘러져 있는데 일부 부재는 깨져 있다.

지대석은 두꺼운 기단 하대석과 함께 대형 판석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는 기단 면석이 놓이는 곳에 낮은 턱을 마련하여 여러 돌로 이루어진 면석을 받고 있으며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기단 갑석은 여러 개의 다소 얇은 편평한 판석으로 하대석과 거의 동일한 폭으로 결구되어 윗면에는 기단부와 같이 낮은 턱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2층까지 여러 판석형 부재로 구성되었는데 대체로 모서리 한쪽은 다른 면의 측면이 기둥으로 표현되고 다른 쪽은 기둥을 모각하는 방식을 보인다.

2층은 이러한 짜임이 4매로 이루어져 좀 더 규칙적이고, 3층은 한 돌로 조성되었다.

탑신부는 옥개부와 함께 일정한 체감을 보여 주나 초층 탑신부의 높이는 2, 3층 탑신부의 감축률이 적어 길어 보인다.

옥개부는 1, 2층 받침이 호(弧), 모를 죽인 직각, 호로 이루어진 3단으로 각 단은 두껍고 여러 개의 부재로 결구되어 있다.

3층은 각, 호로 이루어진 2단으로 되어 위로는 하부 층급과 대칭된 크기와 모습으로 3단의 층급이 마련되어 상층 옥신을 받고 있다.

역시 여러 부재로 구성되었으며 3층 옥개석은 2층으로 조성되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로 추정되는 부재가 남아 있는데 노반은 우주가 표현된 몸체와 하부를 내만 시킨 지붕 형식으로 다듬은 갑석 부분이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로 일반적인 복발과 보상화문이 새겨진 앙화가 놓여 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만드는 석공에게 아름답고 젊은 아내가 있었다.

석공은 집과 아내 곁을 떠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아내에게 ‘탑을 완성하고 돌아오는 날까지 절대로 나를 찾지 마시오.’라며 월남사로 떠났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연락이 없자 아내는 남편이 보고 싶어 몰래 월남사를 찾았다.

먼발치에서 석탑을 쪼는 데 열중한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는 그냥 돌아서기가 아쉬워 작은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혼잣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은 아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순간 벼락이 치며 석탑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아내는 돌로 변해버렸다.

석공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어루만졌지만 아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석탑을 만들어야 했지만 인근에 쓸만한 돌이 없어 석공은 생각 끝에 돌로 변한 아내를 옮겨 눈물로 이 석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보물 제313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월남사지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는 전체 높이 3.58m, 비신 높이 2.6m, 너비 2.3m이다.

건립연대는 고려 고종 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월남사 창건주인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진각국사 혜심은 송광사 16국사 중 제2대조이다.

편마암의 석비가 오랜 풍상에 마멸되고 깨져 현재 비신 일부와 귀부만 남아 있다.

마멸이 극심하여 비신의 앞면은 판독이 전혀 불가능하고 비신의 옆면은 비어 있으나 비음(碑陰: 비의 뒷면)에 지름 3.3㎝ 정도의 글자 30행 600여 자가 남아 있다.

전체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당시의 명신이었던 최항(崔沆) 등의 이름이 보이며, 서체는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충실히 반영한 당태종(唐太宗)의 필의가 완연하다.

구전에 의하면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가 지었다고 한다.

대석과 귀부(龜趺)는 한 돌이며, 귀부는 네 발의 발톱에 보이는 사실성이나 머리, 목 등 세부의 생동감 있는 표현 등 강렬한 사실적 조각기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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