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7.14. 도봉산 산행

아베베 2011. 7. 14. 20:58

   도봉산 도봉계곡 서광폭포의 모습과 도봉서원앞 계곡에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고

   맑은물과 시원한 물보라가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 고산앙지

옛사람 중에 높은 덕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사모하고, 밝은 행실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그를 모범으로 삼아 행한다는 것으로, 산은 덕을, 길은 행실을 비유하였다. 《시경》〈소아(小雅)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길을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 하였다.
 

농암 김창협의  문집

《시경(詩經)》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길을 가리로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공자는 “《시경》에 담긴 인(仁)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 도(道)를 향해 가서 힘이 소진한 뒤에야 그치나니, 몸이 늙는 것도 잊고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모른 채 매일 부지런히 노력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욀 적이면 늘 감동하여 분발하게 된다.

 

송자대전 부록 제6권
 연보(年譜) 5
숭정(崇禎) 45년 임자. 선생 66세


1월 초하루는 무신(戊申) 18일(을축) 상소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서 직명 및 녹봉을 사직하였다.
이때에 적신(賊臣) 허적(許積)이 선생의 앞서 소에서 논한 바 ‘윤계(尹堦)ㆍ윤가적(尹嘉績)이 어물어물 하였다.’ 한 것은 실로 자기를 지척한 것이라 하여 드디어 사직하고, 윤경교(尹敬敎)가 또 상소하여 허적을 탄핵하니, 상이 윤경교를 ‘흉교(凶狡)ㆍ금수(禽獸)’로 지척하고, 또 ‘다른 사람의 뜻과 부합한다.’ 하였다. 선생이 이 때문에 허물을 자인(自引)하여 아뢰기를,
“전일에 아뢴 바는 망녕된 생각에 ‘대간이 매양 전하께서는 대신을 신임하고 대신은 자임(自任)을 중히 하는 것으로써 말하니, 이는 성현(聖賢)의 훈계를 강구하지 않고 세속의 소견에만 끌릴 뿐이다.’ 하고 여겼으므로 신이 그 잘못됨을 바로 말한 것이며, 그 아래의 ‘대신을 바꾸어 버리라……’ 한 것은 곧 가설로 말한 것이요, 대신이 결정코 적합한 사람이 아니어서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또,
“윤경교의 소가 별안간 나와서 공격하고 지척함이 못할 바가 없이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신이 아는 바가 아닌데, 성명(聖明)께서는 또 ‘그의 말이 신의 의견과 부합된다.’ 하시고 또 그것이 ‘입에 부레풀과 옻을 머금었다.’는 풍자에 격동된 것이라 여기시니, 그렇다면 죄가 윤경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가 성교(聖敎)를 인연하여 비방이 성대하게 일어나서, 신을 근본이라 하고 윤경교를 지류(枝流)라 하니, 그 형적을 구명해 보면 진실로 그렇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윤경교의 흉교(凶狡)는 곧 신의 흉교요, 윤경교의 간상(姦狀)은 곧 신의 간상이요, 윤경교의 금수(禽獸)는 곧 신의 금수가 되는 소이입니다. 이제 신을 꾸짖는 자가 있어서 심지어 ‘신이 몰래 서울 근처에 가서 윤경교와 함께 이와 같이 서로 약속하였다.’ 하니, 이렇다면 신이 윤경교와 귀신이 되고 물귀신이 되는 정상은 실로 차마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 이는 금수 중에도 심한 것이요, 흉교라든가 간상이라 하는 것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제목입니다.”
하고, 또,
“신이 말한 바가 과연 어리석고 망녕되이 도움이 될 것이 없고 곧 난을 일으키기에 알맞다면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불가함을 보여서 일이 나기 전에 방지하는 것이 옳으신데, 곧 도리어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장(褒奬)하여 총애하시어 참으로 그 말이 착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하시니, 대성인(大聖人)이 성심으로 대하는 도가 아마도 이와 같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고, 이어서 직명 및 녹봉을 사직하였다. 그런데 3월에 가서야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경의 소의 사연을 보니 내 마음이 놀랍다. 내가 경에 대하여, 도움이 되는 것은 없고 난을 일으키기에 알맞음이 있다면 어찌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장(褒奬)하며 총애하여, 성심으로 고하지 않고 윤경교로 하여금 이런 무상(無狀)한 짓이 있게 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그렇지 않는 것인데, 경이 어찌 헤아리지 않고서 성의로 하지 않는다고 의심함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부합한다.’ 한 것은 조금도 경을 의심한 적은 없는데, ‘곧 신을 이른다.’는 등의 말로 깊은 혐의를 가지니, 이것이 어찌 내가 평일에 경에게 바라는 바이겠는가. 마음에 참으로 부끄러워서 이를 수 없도다. 아, 이야말로 어떤 때이기에, 경이 정승에 임명된 지 이제 1년이 가까운데 한결같이 사피하여 정승의 자리를 오래 비게 하고 경은 마음에 척연(惕然)하여 생민을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며 속히 마음을 고쳐 올라오라. 녹봉에 이르러서도 곧 받아야 할 일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
하였다.
○ 25일(임신) 탄곡(炭谷)에 가서 권사성(權思誠 권시(權諰))을 조곡(弔哭)하였다.
위에 제문(祭文)이 있다.
○ 29일(병자) 다섯째 손자의 관례(冠禮)를 중씨(仲氏) 군수공(郡守公 이름은 송시묵(宋時默))의 집에서 거행하였다.
동춘(同春)을 초청하여 빈(賓)으로 삼았다. 이름을 회석(晦錫), 자를 희문(希文)이라 하였다.

3월 초하루는 정미(丁未) 21일(경오) 삼산(三山)에 들어갔다.
영동(永東) 옥계폭포(玉溪瀑布)를 두루 구경하고 냉천(冷泉)을 거쳐서 노곡(老谷)에 이르렀다.
○ 상소하여 직명 및 녹봉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초하루는 병자(丙子) 2일(정축) 속리산(俗離山)에 들어갔다.
옥천 군수(沃川郡守) 윤공 형성(尹公衡聖), 보은 현감(報恩縣監) 이석관(李碩寬)이 따랐다.
○ 10일(을유) 상이 별유(別諭)로 소명을 내렸으나 병 때문에 사양하였다.

5월 초하루는 병오(丙午) 27일(임신) 좌의정에 제배한 명과 소지(召旨)를 받고 상소하여 사양하고 대죄하였다.
이때에 동춘(同春)이 상소하여 허적(許積)을 논하되 노기(盧杞)에 비교하니, 상은 당이 다른 사람을 배격한다고 지척하고, 허적은 교외(郊外)에 물러 나갔다. 지평 오정창(吳挺昌)이 소를 올려 허적을 신구(伸救)하는 데 흉악하고 간사한 어구(語句)가 많았다. 대간이 논핵(論劾)하여 죄주기를 청하고, 이윽고 집의(執義) 이공 상(李公翔)이 왕지(王旨)에 응하여 소를 올려 허적의 간상(奸狀)을 극도로 말하니, 왕이 크게 진노(震怒)하여 특명으로 삭출(削黜)하도록 하매, 대사헌 장선징(張善澂)ㆍ장령 정재희(鄭載禧)ㆍ지평 유상운(柳尙運)이 2명을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자, 상은 더욱 노하여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일은 윤경교에게서 근본 되었다.’ 하고 특명으로 윤경교를 극변(極邊)으로 안치(安置)하매, 조정이 몹시 놀랐다. 허적도 정승의 직에서 갈려 나고 김공 수항(金公壽恒)이 대신 영의정이 되고, 선생이 또 차례로 승진하였다. 상이 관례에 의하여 사관(史官)을 보내고 이어서 소명이 있었다. 선생이 소를 올려 허물을 자인(自引)하여 아뢰기를,
“임금은 자기 몸을 닦는 이외에 정승을 논하는 것이 큰일인데, 이제 신을 구차스럽게 이 자리에 채웠습니다. 만약, 신이 지극히 못나고 비루하여 자신의 일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반드시 오게 하려고 한다면, 정승을 둔 도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성덕(聖德)을 ‘사욕을 이기고 예에 돌아간다.[克復]’는 경지에 진취하는 것이 아니요, 만약 신의 범한 죄가 끝내 용서할 수 없어서 반드시 속히 오게 하여 죄주려 한다면 이는 성신(誠信)의 도가 아니니, 어찌 전하께서 이와 같으시겠습니까.”
하고, 또 선유(先儒)가 곽공(郭公)이 망한 것을 논하되 ‘선(善)을 좋게 여기면서 쓰지 못하고 악을 미워하면서 버리지 못하였다.’ 한 말을 인용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윤경교를 근래의 일의 근본이 되었다 하여 안치(安置)의 율(律)을 가하시니, 신은 근본의 근본이니 그 죄가 안치에 그칠 뿐이 아닌데, 전하께서 치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곧 좌의정의 신명(新命)이 있으니, 이 어찌 전하께서 악을 미워하는 도가 이처럼 전도(顚倒)되고 몸소 곽공(郭公)의 망한 전철(前轍)을 밟습니까.”
하고 또, 허적(許積)의 소에서 이른바 ‘같이 성고(聖考 효종(孝宗)을 말한다)에게 명을 받았다.’는 설을 따라서, 허적이 절의(節義)를 헐뜯어 배격하고 윤기(倫紀)를 무너뜨린 것을 극도로 말하고, 그의 언론과 심술이 장차 국가의 화를 빚어내고 사류(士類)를 해쳐서 성고(聖考)의 사람을 아는 밝음에 손상이 되게 한다 하였다. 허적이 보고 펄펄 뛰며 말하기를,
“이 소가 나를 만고의 소인으로 빠뜨린다.”
하고, 선생을 원망하는 것이 도리어 동춘보다 더 심하였다. 7월에 상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경이 정승에 임명된 지 이미 한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초야에 물러나 있으니, 내가 마땅히 예를 다하여 수용(收用)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므로 마음에 진실로 부끄러우나, 경도 끝내 국사를 생각하지 않음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소에서 말한 바 ‘동료 정승’의 일은, 내가 어찌 경이 같이 일하는 사람을 위한 뜻이 이에 이르러 깊고도 간절함을 알겠는가. ‘반드시 오게 하여 치죄하려 한다.’는 말은, 보고 나니 매우 놀랍다. 가을철이 이미 닥쳤고 묵은 병도 나았을 것이니, 온다는 소장을 빨리 결정하고 속히 올라와서 도를 논하여 조야(朝野)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초하루는 을해(乙亥) 5일(기묘) 연산(連山) 이동(梨洞)에 가서 사계 선생(沙溪先生)의 유고(遺稿)를 교정하였다.
이초려(李草廬)도 와서 함께하였다.

7월 초하루는 갑진(甲辰) 5일(무신) 중씨(仲氏) 군수공(郡守公)의 상을 당하였다.
이동(梨洞)에 있다가 군수공이 병이 들었음을 듣고 급히 돌아와서 살펴보았는데, 이때 와서 상을 당하자 성복(成服)하고 화양(華陽)에 돌아왔다.
○ 21일(기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소의 대략에,
“신의 앞서 소에서 말한 바는 망발 아닌 것이 없으나,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더욱 심하여, ‘놀랍다.’는 성교(聖敎)를 내리게 하였으니, 신이 여기서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만약 이로 인하여 스스로 반성하기를 ‘신하가 내 마음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혹 내가 신하의 마음을 알지 못함도 이와 같지나 않은가.’ 하여, 무릇 진언(進言)하는 사람이 있거든 반드시 서서히 연구하여 근원을 찾아보는 도리를 가하면 임금의 도가 아래에 통하고 신하의 도가 위에 행해져서 태평의 공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8월에 상이 승지를 보내어 비답을 내렸다.

8월 초하루는 계묘(癸卯) 9일(신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28일(경오) 중씨(仲氏)를 공산(公山) 신오(新塢)에 장사 지냈다.
○ 30일(임신)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일렀다.

9월 초하루는 계유(癸酉) 2일(갑술) 소를 올려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이때 상이 허적의 일 때문에 위노(威怒)가 크게 떨치어, 조신(朝臣) 중에 조금이라도 노여움을 격발하면 견벌(譴罰)이 내려졌다. 선생이 끝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여러 번 소를 올려 해면을 빌었더니, 10월 17일(무오)에 상이 비로소 비답을 내려 체직을 허락하고 별유(別諭)로 소명을 내렸다. 비답은 다음과 같다.
“경의 고사(固辭)가 갈수록 더욱 굳으니, 성의가 믿음을 받지 못함이 매우 한탄된다. 옛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바는 마음 아는 데에 있었다. 경을 조정에 오게 하려는 것은 진실로 직임의 유무(有無)에만 있지 않다. 지금 경의 말을 들어주기는 하나 경이 마음을 고쳐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은 갈수록 더욱 급하여,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 이상이니 오히려 형언할 수 있으랴. 말도 다하고 뜻도 궁하다.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속히 올라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보니 경은 알지어다.”
○ 22일(갑오) 이태지(李泰之 이유태(李惟泰))와 신오(新塢)에 모여 교서(校書)하였다.

10월 초하루는 임인(壬寅) 10일(신해) 고조고(高祖考)ㆍ증조고(曾祖考) 고비(考妣)의 조주(祧主 체천(遞遷)한 신주)를 사당에 모셨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최장방(最長房)의 예는 오로지 제사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라면 차장방(次長房)의 집에 옮겨 모시는 것은 반드시 최장방의 상을 마치기를 기다릴 것이 없다.”
하고, 일찍이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 윤공(尹公)에게 말하였더니, 석호가 따랐다. 이때에 와서 다시 동춘(同春)에게 의논하고 말하기를,
“최장방(最長房)이 조주(祧主)를 모시는 것은 그 사체(事體)가 종가(宗家)와는 다른데, 이제 3년 동안 제사(祭祀)를 폐(廢)하는 것이 미안한 바가 있다.”
하고, 드디어 중씨(仲氏) 군수공(郡守公)의 장사 뒤에 곧 옮겨 모셨더니, 식견 있고 예를 좋아하는 집안이 흔히 따랐다.
○ 19일(경신) 마암(馬巖)을 경유하여 화양동(華陽洞)으로 들어갔다.
○ 30일(신미) 석호(石湖) 윤여망(尹汝望 윤문거(尹文擧))을 조곡(弔哭)하였다.
선생이 윤공(尹公)과 교도(交道)가 시종 변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여망은 착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다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가 여망(汝望)보다 낫다고 하나, 나는 여망의 인품이 길보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여긴다.”
하였다. 이때 와서 그의 상을 듣고 자리를 베풀어 놓고서 곡하였다. 뒤에 또 제문을 가지고 가서 곡하고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11월 초하루는 임신(壬申) 3일(갑술)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였다.
이날은 동짓날이다.
선생이 상소하여 소명을 사양하고 계고(誡誥)를 대강 진달하여 상에게, 덕을 닦고 사욕을 버리어 천심(天心)에 보답하기를 청하였더니, 이듬해 1월에 비로소 비답을 내렸는데 이러하다.
“경이 과인(寡人)을 훈계하는 뜻이 간략하면서도 지극하다 하겠다. 내가 민첩하지 못하나 띠에 써서 명심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의정의 소임을 체직하게 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나, 경이 병을 끌어대어 굳이 사양하고, 또 마음을 고쳐 나설 뜻이 없으니, 내가 섭섭함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으랴. 말이 다하고 뜻이 궁하니 경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봄날 화창할 때에 속히 올라와서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 24일(을미) 동춘(同春)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돌아가 보았다.
선생이 이때에 화양에 있다가 동춘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곧 떠나서, 26일(병신) 아침에 동춘당(同春堂)에 이르니, 동춘이 손을 잡고 기뻐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형의 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소요부(邵堯夫)처럼 희학(戲謔)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동춘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그런 역량(力量)이 없다.”
하였다.
동춘이 일찍이 병중에서 손자 병원(炳遠)에게 명하여 ‘고산앙지(高山仰止)’ 4자를 써서 벽에 걸게 하고 말하기를,
“우암(尤菴)이 이를 당할 수 있다.”
하고, 또 ‘일조청빙(一條淸氷)’ 4자를 써서 걸게 하고 말하기를,
“이는 선배(先輩)들이 하서(河西)ㆍ율곡(栗谷)을 흠모하고 숭상한 말인데 지금 세상에는 이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때 와서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쓴 글씨를 가리키며 선생에게 이르기를,
“이 4자는 공에게 해당한다.”
하니, 선생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일조청빙(一條淸氷)’ 4자는 형에게 해당합니다.”
하니, 동춘은,
“어찌 감히 하겠으며,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동춘이 죽자 선생은 3개월 동안 복(服)을 입고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대개 선생은 동춘과 어려서부터 같이 배웠으며, 서로 장대(長大)한 뒤에 정분이 매우 깊었다. 비록 조정에 벼슬하면서 논의할 때에 더러 엇갈리는 것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대체는 다 마찬가지로 돌아갔었다. 동춘이 죽은 뒤부터 더욱 서로 의지할 데가 없어서 항상 외로운 탄식이 있었다. 장사 때가 되자 제문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광중(壙中)에 가서 영결(永訣)하였다. 뒤에 묘지문(墓誌文) 및 유사(遺事)를 지었다.
○ 이해에 자운서원(紫雲書院)의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지었다.
서원(書院)은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아래에 있으니, 실로 율곡 선생(栗谷先生)을 제향(祭享)하는 곳인데, 곧 율곡 선생의 무덤 아래이다. 묘도(墓道)에 옛날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그 글에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므로 사류(士類)의 제공(諸公)이 선생에게 고쳐 짓기를 힘껏 청하였다. 선생이 여러 번 사양하여도 되지 못하였다. 제공(諸公)이 또 예전 비를 없애 버리고 세우려 하므로 선생이 힘껏 그 불가함을 말하고 또,
“만약 회암사당비(晦菴祠堂碑)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율곡(栗谷) 화석정(花石亭)이나 서원(書院)에 세우면 일이 근거가 있고 신구(新舊)에 서로 구애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원(書院)의 묘정(廟廷)에 세웠다.


 

[주D-001]노기(盧杞) : 당 덕종(唐德宗) 때의 간신. 재상이 되어 권력을 독차지하고 충량(忠良)한 신하를 해치고 시기하였다. 《唐書 卷223下 姦臣傳下 盧杞》
[주D-002]소요부(邵堯夫)처럼 희학(戱謔) : 소요부(邵堯夫)는 송(宋)의 학자 소옹(邵雍). 자가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소옹이 병이 위독하자 장재(張載)에게 말하기를 “함께 한번 죽어 보세.” 하니, 장재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은 자기가 볼 수 있거니와, 자기가 또 어찌 자기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였다. 《性理大全 卷39 諸儒1 邵子》
[주D-003]회암사당비(晦菴祠堂碑)의 고사(故事) : 송(宋) 나라 주희(朱熹)의 사당(祠堂)에 비를 세운 고사를 가리키는데, 자세하지 않다.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 高山仰止
큰길을 간다 / 景行行止

 하였으니, 비록 거기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마음이 향하여 가는 것이 바로 백성들이 본래 타고난

  떳떳한 천성이다

 

 

 

 

도봉서원(道峯書院)

 

조선 선조(宣祖) 때 경기도 양주(楊州)에 건립한 서원. 건립한 해인 1573년(선조 6)에 사액되고, 조광조(趙光祖)·송시열(宋時烈) 등을 배향함.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四

 [記]
道峯書院李珥 a_022_095d


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022_096a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道峯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間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彥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仰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022_096b役粗完。凡百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昶。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槁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湊者。有年數矣。珥未克一觀。自恨嬰疾。022_096c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間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柱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022_096d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祥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022_097a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具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022_097b表表異衆云。是年暮春旣望。後學德水李珥。記。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五
 年譜
[靜菴先生年譜] a_022_106a


皇明憲宗成化十八年 本朝康靖大王十三年 壬寅

八月丁亥。 十日▣時 先生生于漢城府▣▣洞之第。

生而氣質淸粹。容貌端潔。人皆異之。
十九年癸卯 先生二歲
二十年甲辰 先生三歲
二十一年乙巳 先生四歲
二十二年丙午 先生五歲
022_106b遊戲擧止。已有成人儀度。尤好習禮。稍見有非違者。雖在長上。必諷止之。乃已。
二十三年丁未 先生六歲
孝宗弘治元年戊申 先生七歲
二年己酉 先生八歲
三年庚戌 先生九歲
四年辛亥 先生十歲
五年壬子 先生十一歲
六年癸丑 先生十二歲
七年甲寅 先生十三歲
022_106c八年 燕山君元年 乙卯 先生十四歲
九年丙辰 先生十五歲
十年丁巳 先生十六歲
十一年戊午 先生十七歲
始從學于寒暄堂金先生之門
先生旣長。慷慨有大志。博學力行。時史禍大作。金先生宏弼。以佔畢齋門徒謫煕川。而參判公方爲魚川察訪。先生亦從行。素聞金先生學有淵源。遂稟命。往受業焉。金先生甚愛重之。先生自是。一以聖賢之學022_106d爲己任。○其在師門也。厲志定業。堅苦篤信。不違課式。晝講必切問。夜退必近思。鄙倍惰慢之容。未嘗暫設於身。以至記誦詞章之習。亦不少經於心。人或勸治擧子業。則輒以不嫺屬文辭。○金先生嘗得一雉。爲乾之。將送大夫人所。適被貓兒偸食。金先生盛責守婢。辭氣太過。先生進曰。奉養之誠雖切。君子辭氣。不可不省察也。小子竊有疑於心。故敢請。金先生起前握手曰。吾方自悔。而汝言又如此。吾不覺愧服也。022_107a且汝乃吾師。吾非汝師也。自後益加敬重。
十二年己未 先生十八歲
娶夫人韓山李氏 僉使允泂之女○未知何歲姑附于此
十三年庚申 先生十九歲
是歲。丁參判公憂。
凡哭泣衰絰之制。飮食起居之節。一遵朱文公家禮。自初喪。至終制。不敢少違。旣廬墓側。必對墓而坐。饋奠之暇。亦必循繞展省。冽寒暑雨不廢。雖有請見者。不與笑語。未嘗以他事出外。其於謹禮致哀。篤至如022_107b此。
十四年辛酉 先生二十歲
十五年壬戌 先生二十一歲
服闋。築室於龍仁先壟下。
先生旣除喪。哀痛不盡。乃卜於壟下。搆草堂數間。爲永慕之所。又開塘築階。種蓮柏二物。以資遊息焉。○奉養慈闈。執甘旨。謹溫凊。力行之餘。不輟讀書。以小學,近思錄,四書爲主。次及於諸經,性理群書,通鑑綱目。每鷄鳴。盥櫛。肅然危坐。平心易氣。俯讀022_107c仰思。思之未得。雖竟日終夜。期於有得。絶無自畫之念。眞積力久。德器成就。然猶以母自欺。謹其獨爲勉。蓋是時。史禍方逞。人見先生之爲。或稱狂者。或稱禍胎。親舊往往相絶。先生不屑也。
十六年癸亥 先生二十二歲
十七年甲子 先生二十三歲
十月。聞金先生凶訃。
時寒暄堂已移配於順天。至是。因士禍再起。遂不免焉。
022_107d十八年乙丑 先生二十四歲
武宗正德元年恭僖大王元年 丙寅 先生二十五歲
自是。從學者甚衆。
是歲。中廟反正。盡革燕山虐政。士氣益厲。先生始以其學敎授諸生。遠近聞風。來學者甚衆。陶成振作之功。於斯爲盛。○有和終南副守昌壽詩。
二年丁卯 先生二十六歲
三年戊辰 先生二十七歲
四年己巳 先生二十八歲
022_108a五年庚午 先生二十九歲
春。中進士會試壯元。
以春賦送李存吾貶長沙監務詩占魁。考官驚賞不已。
夏。讀書于松都諸山。
五月。先生往遊天磨,聖居兩山。或遇奇絶處。輒徜徉行吟。蕭然有出塵之趣。擇其淸幽蓮社。入處靜讀。沈潛理義之奧。探賾經傳之旨。凝神端坐。兀若塑人。淡餐攻苦。與緇流共之。雖精進闍梨。皆以爲難及。凡對022_108b食如廁外。絶無閒刻。唯三更後五更前。爲脫衣就寢時也。平生用力於學。及此愈篤焉。至秋乃還。○時奇公遵往從之。先生謂曰。措大如是刻苦。不亦勞乎。蓋相長之言也。○先生嘗棲山寺。讀孟子浩然章。一月。乃得通解。
六年辛未 先生三十歲
是歲。丁母閔夫人憂。
致哀謹禮。一視前喪。
七年壬申 先生三十一歲
022_108c八年癸酉 先生三十二歲
九年甲戌 先生三十三歲
贈叔父 元紀 詩序
時文節公。方赴慶源。先生以詩贈之。勉厲甚至。
十年乙亥 先生三十四歲
春。讀書于砥平龍門寺。
先生携二三友人。結榻相討。晝夜忘倦。諸公皆自以爲不及。
夏六月。被成均館薦。
022_108d時先生名行表著。朝廷將大用。成均館有議薦之擧。文節公還書戒之。略曰。直之被薦。喜與憂騈。盛名之下。其實難副。有譽則有毀。此古今通患也。操履之愼於前。尤難。若色言狂驕。害己敗身之戒。則吾於孝直。不當警也。惟吾之所憂。則不在是也。凡人群居天地中。不可以高飛遠走。則必須小同於俗。庶免爲衆所嫉。昔杜祁公。嘗戒門人曰。切當韜晦。毀方瓦合。無露圭角。不然。無益於事。而祇足取禍爾。今吾之識。不022_109a及於杜之涯涘。而汝之知。有裕於杜之門人。則宜不以此警於汝也。然今之時與杜之時。又加邈矣。世路險巇。又加萬倍。吾之所戒。豈無所見而然耶。去秋四館之議。亦其一驗也。當時。不有一二君子沮而抑之。其能無窘於貶者之鋒耶。今聞被薦。而求免於選用。汝之心必以爲一繫名韁。恐不專所業而然也。然吾家自先祖。以廉謹自守。計不求足。而兄又早逝。汝之兄弟三人。俱業儒未成。仕不爲貧。而有時爲貧。爲貧022_109b之仕。豈非今也其時乎。以家貧親老。比不能專業。則爲有間矣。況前聖。以爵祿之辭。至比於蹈刃。凡人好事者。安知不以此爲矯情之誚耶。此吾所憂也。然則是擧。非喜也。乃所以憂之也。唯無咎無譽。眞所謂保身之道也。
銓曹啓請陞宣務郞準職
判書安瑭啓曰。趙光祖。明經術。有行義。爲成均首薦。若拘資格。不足以勸勵士林。請陞宣務郞。準主簿職。以觀其才行。從022_109c之。
除造紙署司紙
先生歎曰。吾本不以利達爲心。不料遭此意外事。必不得已。當由科擧。以通行道之階。若其用虛譽。的然於世。吾甚恥之也。
秋。中謁聖試第二名。
對孔子過化存神策
除成均館典籍。遷司憲府監察。
十一月。拜司諫院左正言。請罷李荇等職。從之。
022_109d先是。靖國之初。成希顏,朴元宗等。議廢王后愼氏。更立章敬王后尹氏。是年二月。誕元子薨。坤儀久闕。朝野疑懼。七月。潭陽府使朴祥,淳昌郡守金淨等上疏。請復愼氏。大司諫李荇等。指爲邪論。大司憲權敏手和之。請拿問。事將不測。左議政鄭光弼議啓曰。祥等。言雖不中。不可罪之。以妨言路。得止徒配。至是。先生拜正言。啓曰。言路之通塞。最關於國家。通則治安。塞則亂亡。朴祥等。當求言而進言。其言雖022_110a若過當。不用而已。何復罪之。臺諫乃復請罪。自毀言路。大失其職。臣今爲正言。豈敢與失職臺諫同事乎。不可相容。請罷荇等。復開言路。屢啓不已。上命盡遞兩司。獨出先生。直提學金安老等。更爲兩是之論。至謂光祖爲言路扶植。荇等爲宗社請罪。自是。廷議角立。互相攻斥。終爲士禍根本。
是歲。子定生。
十一年丙子 先生三十五歲
022_110b春。除戶曹佐郞。○遷禮曹佐郞,工曹佐郞。選拜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先生旣被擢用。銳意格君。遂以堯舜君民。興起斯文。爲己任。每當入講前夕。預加齊戒。將所講書。端坐熟讀。至曉。易服而進。及至上前。一心肅慮。如對神明。反復陳辨。冀必感動於聖聽。乃自天人性情之分。王霸義利之辨。以及修身致治之道。靡不罄竭極論。或至日昃。上亦虛心傾聽。朝022_110c野想望。以爲太平可致矣。
拜修撰。兼如故。
冬。製進戒心箴。
時上命弘文館。製進戒心箴。先生箴序曰。人於天地。稟剛柔以形。受健順以性。氣卽四時。而心乃四德也。故氣之大。浩然無所不包。心之靈。妙然無所不通。況人君一心。體天之大。天地之氣。萬物之理。皆包在吾心運用之中。一日之候。一物之性。其可不順吾度。使之乖戾邪枉耶。然人心有欲。022_110d所謂靈妙者沈焉。梏於情私。不能流通。天理晦冥。氣亦否屯。彝倫斁。而萬物不遂。況人君。聲色臭味之誘。日奏於前。而勢之高亢。又易驕歟。聖上是念是懼。命臣述戒。嗚呼至哉。遂居首。賜毛褥一坐。
十二年丁丑 先生三十六歲
正月。論弭災應天之道。
當筵。啓曰。天之示警有二義。危亡將至。迷而不悟。則天降災異。以譴告之。時事有可治之幾。而上下猶且遲疑。則亦出災異。022_111a使之警省加勉。當此之時。上下若不交修加勉。則天心無常。終必敗亡。可不懼哉。又進曰。君臣上下。須以至誠相孚。通暢無間。然後可以爲治。待大臣臺諫。當用是道也。且君相。常以保護山林爲心。使爲善者有所恃。而知其爲善。則表而用之。不使賢愚混淆。可見至治矣。
請召大臣侍從。商論祖宗舊典。
啓曰。祖宗舊章。雖不可猝改。然若有不合於今者。亦可變而通之。望於燕閒之022_111b中。不拘常例。召對大臣或侍從。論議其可否。可爲之事。則斷而行之。可也。又進曰。君子小人之辨。後世尤難。古者。人君接群臣。不啻如子弟之於父兄。故可以見事聞言。而知其人矣。今則進見有時。禮貌有規。雖不賢之人。入侍之時。修飾善言以啓。故辨之難矣。人君當更體念於此。心地旣明。則邪正不能遁其情矣。但人心操舍無常。若又以正事至言。爲拂逆而拒之。則衆君子皆引退矣。其後。雖欲正之。群邪已滿於022_111c左右。無所及焉。昔宋神宗。賢君也。以堯舜之治爲心。而擯斥司馬光。信任王安石。以致小人幷進。其後。欲斥安石而不可得。臣言實有深遠之慮矣。
二月。拜弘文館校理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當筵。啓曰。人主以唐虞三代爲期。未必卽致唐虞三代之治。然立志如此。而用功於格致誠正。則漸至於堯舜之治矣。若徒騖高遠。而不下實功。則日趨浮虛之地而022_111d已。又曰。人君之德。莫大於敬。內有實踐而後。下人觀感而興起焉。制事應物。如鑑空衡平。可也。人君容色端嚴。則宦官宮妾。亦將不得而近矣。
賜暇讀書於東湖
七月。陞應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承文院校勘。
八月。陳啓。請贈金宏弼爵諡。從祀文廟。不許。
先是。啓曰。今之學術甚壞。館中諸生。立022_112a志甚卑。未見人才之傑特者。士習頹靡。莫大之患也。變化之道。豈無其力。如金宏弼,鄭汝昌者。極加褒奬。則可矣。至是。館學儒生上疏。請鄭夢周,金宏弼從祀文廟。先生亦與副提學金淨等啓曰。金宏弼。性度溫毅。才識明敏。少有大志。力學聖賢。忠信篤敬。動遵禮義。學問精深。道德成立。奮乎絶學。爲世儒宗。其有功於斯文。大矣。請隆爵尊諡。從祀文廟。以明士趨。
請褒贈成三問,朴彭年及深源。
022_112b當筵。啓曰。金宏弼,鄭汝昌事。已議於大臣。成三問,朴彭年等。亦當幷議。此大公至正之意也。且朱溪副正深源。年二十餘歲。深知姑夫任士洪奸狀。乃請面陳於成宗曰。此他日敗國亡家之人。不可苟容於朝。仍痛泣流涕。厥後。成宗不能遠斥。幾致敗國之禍。其忠言直節。斷可知矣。又曰。三問等。當時。已許身於魯山。故不失其志操如此。若委質於世祖。則亦當爲其忠臣。忠臣義士。已定君臣之分。則更不他022_112c適故耳。斯人忠義。自當萬古不泯。臣等敢請褒揚於今日者。欲勵人臣之志操也。
論鄭夢周從祀
時朝廷始許鄭夢周從祀。大臣引他說以難之。先生啓曰。辛禑之爲王氏與否。當時之人。亦不明知。夢周。本非求功名富貴於辛禑者也。況冊立恭讓之後。乃爲死節。其賢。蓋可想已。昔者。狄仁傑事武后。而終復唐室。安知夢周不以狄公之心爲心乎。高麗五百年宗社。在於一人之身。其身022_112d亡。而宗社卽亡。今何可輕議此人乎。
陞典翰。兼如故。陳啓辭。且請外補。不許。
啓曰。小臣有志於學問。而不能實用其力。職任漸重。心自內愧。私語同僚曰。聖學高明。方有意治理。而如我濫廁侍從。豈可自安乎。當退而力學。學問成就。然後來仕。則必有絲毫之補矣。臣意又謂。乞補僻郡五六年。治民之暇。致意於學術。則治民治學。庶乎兩全。而小臣有意。未敢仰達。又爲典翰。人器不合。與前立志。大不同矣。不次022_113a之恩。豈可冒處乎。
十三年戊寅 先生三十七歲
正月。論經筵坐講。
啓曰。我國。君臣之分隔絶。邇來。屢敎講官平氣以坐。而群臣不知上意之誠否。故未能猝變舊習。以此觀之。習俗之難變。固矣。貞熹王后臨朝時。群臣莫敢仰視。循成此習。若成廟朝。則豈有如此事乎。廢朝。沈順門。以仰視被罪。積威之極。群臣震懾。今之俯伏。亦廢朝之餘習也。
022_113b請不時召對群臣
啓曰。學問。當及時勉勵。苟至於志氣衰暮。則無益也。今値可御經筵之日。亦云。有故而不御。未知內間別有何事乎。雖不御經筵。而不時召對。亦可也。今之接對群臣。只有經筵而已。如臣等。雖無知識。思所以竭誠裨補聖學。則豈無少益乎。殿下卽位已久。不見治效。而災變荐作。士習日頹。朝廷之上。亦無可稱之事。今若不定此習。則人心何時而可變。至治何時而022_113c得見乎。古云。靡不有初。鮮克有終。有始有終。人主之所當勉力者也。天下之勢。不進則退。若遲疑則天變人心。恐不可測也。
超拜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以病辭。不許。
先生會墜馬。病甚。移告。上命遣醫問疾。藥餌交道。未幾獲瘳。
進講大學誠意章。因論修己治人之道。
先生因文。啓曰。古云。至誠感神。又曰。不誠。無物。君之遇臣。臣之事君。皆以誠實。則022_113d治化。可期其成也。我國。地方褊小。人君發一言。則入道之人。一朝皆得聞知。惟當於大臣則敬之。於群臣則體之。百工則來之。庶民則子之。患吾之所以遇臣愛民者有未誠耳。不患其難化也。近來。士氣稍稍振起。民之趨向。亦漸好矣。惟願自上。日加愼獨。誠實工夫。終始不渝。則治化可臻矣。所謂三代之治。今可復致者。雖不可易言。豈全無致之之道乎。自上。先養己德。推之行事。則人皆誠服。不期化而自化矣。若022_114a吾德不修。而修飾於事爲之間。則亦何益乎。須敦厚其德。使萬化自明德中流出。則下民自然觀瞻欣感。有不能已者矣。又非但拱手以守其德而已。必以禮樂刑政。提撕警覺。布置設施。如有可爲之事。當振奮而力行也。
二月。論東漢黨錮事。因請培養士氣。
啓曰。自古。正直之流。盛行於世。則必有大禍隨其後。是故。深於自謀。周於涉世者。不敢抗志直言。以召怨怒。而低回俯仰。周旋022_114b彼此。保其身。全其妻子者。蓋多。此非委質憂國之人也。夫不顧其身。惟國是謀。當事敢爲。不計禍患者。正士之用心也。今之侍從臺諫。豈眞如古之人乎。雖有爲善之人。或慮其終被禍患。而閭閻之間。亦皆以爲大禍必生於朝夕。蓋其懲於前者。深也。今之培養。豈可少忽乎。大臣與小臣。在上前。小臣言之而非者。大臣可以折之。退而在外。言之而非者。大臣亦可以開喩也。但無私心而已。大小之臣。相和如一家。則天022_114c地交泰。而萬物生遂矣。
論義利之辨
啓曰。人主於義利公私之辨。不可不明審也。苟能知義利公私之辨。而不惑焉。則內外修而心地淸。是非好惡。皆得其正。而至於處事接物。無不當矣。
論貢物之弊
啓曰。殿下卽位十餘年。士習漸化。今則庶人。亦有以禮居喪者。士習正。則民生得遂矣。我國田稅。三十之一。而貢物則過多。022_114d以此。民生日困。經費之用。量宜裁減。然後庶可安民矣。國之法制。雖不可輕改。然學問高明。洞照事理。則與大臣同心協力。可損者。損之。可益者。益之。期致於隆平而後已。此正遵守祖宗之成憲者也。又曰。守令賢。則民受一分之惠。然不改規模。而徒責其事爲之末。則治不效矣。今觀各邑之貢。土產不均。又皆防納。一升之納。徵以一斗。一匹之納。徵以三匹。因循積弊。至於此極。朝廷豈不爲生民計也。若於民事有合。022_115a則亦可因其祖宗之法。而改其規模。如此而勵精求治。則可見治道之美矣。
論擇初入仕官
啓曰。擇士。當於入仕之初。若擇之於旣用之後。則吁亦晩矣。庶僚雖多。而無可用之才者。正坐於此弊。若於其初。審取舍。辨賢否。則仕路自趨於正矣。
請謹特旨除官
啓曰。特旨除官。固善。然好惡之發見處。幸有不合於朝議。則未可也。
022_115b請嚴賄賂之禁
啓曰。成宗朝。尙寬厚之政。至如奸贓之罪。或多寬之。賄賂之行。蓋始於是時也。在世宗朝。如萬戶等官。亦皆以廉潔相尙。士習之邪正。治道之汚隆。因此可見也。今世。此弊雖未至甚。必須隨事痛治之。少有所犯。使不得立朝。則人知可畏。而各自砥礪矣。
五月。移拜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022_115c當筵。啓曰。學者。雖處靜中。用功亦難。況人主。深居九重。萬機浩繁。安能如學者處靜中。與朋友討論之功乎。今於經筵。雖得進講。君臣之間。名威隔絶。上有所言。未能盡諭於下。下有所懷。未能盡達於上。如是遷延。歲月易過。幾不可失。若聖學高明。則不必但以講問爲主。幸於思慮之間。或有未穩之事。有時召侍從之臣。論難可否。則情意可通也。但好善之心。不出於誠篤。而徒爲文具。則間亦有垂隙而窺測者022_115d矣。○右承旨金淨啓曰。趙光祖在經幄。輔益弘大。物議咸以爲稱職。承旨。喉舌之地。固當擇任。亦可入侍論難矣。然不若專主其任也。臣得同任。固幸矣。但計其輕重而啓之耳。居數日。移長玉堂。
復拜弘文館副提學。兼如故。
乞暇。省墓于龍仁。
是月十六日。上親政。忽地震三度。殿宇搖撼。先生方在鄕。驚曰。今日。沈貞必判秋曹矣。果然。時安瑭亦陞右相。上以災異。延022_116a訪宰執。禮曹參判曺繼商啓曰。此輩。不有人禍。必有天刑。蓋指右相一隊也。臺諫遂論繼商之罪。先生還朝。亦極言繼商罪。貞則已被論遞矣。
七月。上疏。請罷昭格署。從之。
時臺諫請罷昭格署。累月不允。弘文館亦逐日論啓。先生遂上疏。極陳道治一純之致。繼陳昭格訓邪之失。且曰。殿下寅畏天命。祇懼丕基。孜孜學問。虞夏皇王之道。探究體認。凡所以抑詭類。拔正道者。022_116b靡不用極。而獨此一事。唯蔽聖明。將除而復信。欲革而還疑。大失乾剛精粹之德。臣等猶恐殿下之心。其於精一之功。或有所未至也。一則直方。而守義理之正。精則粹白。而卞邪正之分。用之於身而道明。施之於事而政善。惟左惟右。罔有不一之功。苟或未盡。邪念潛藏。引類暗長。以至衆僞朋興。而側媚邪佞之徒。又因緣交締。則將來之禍。有不可勝言。臣等正爲此懼焉。因進曰。近日。官中降香外方等事。皆上022_116c所不知也。夫以格致誠正之功。推而至於治國平天下。宮中之事如此。則聖明格致誠正之功。可謂未盡矣。一心邪正。因事而著焉。如昭格署之是非昭然者。猶不分明處之。抑恐邪念潛藏。而有時或發也。一日。率同僚詣政院。謂之曰。日已暮矣。言官雖退。我輩當竭誠論列。以回天爲期。仍留不出。終夜論啓。至鷄鳴不止。上始允之。○先生於闢異端尤力。又嘗曰。奉先,奉恩二刹。緇釋之根柢。先斷其本。則其餘。可不022_116d勞而治矣。
請勿潛襲野人。從之。
時會寧府野人速古乃。潛與深處野人通謀。入甲山府界。多掠人畜。至是。因南道兵使祕啓。先諭密旨于本道。遣李之芳。往伺隙掩捕。上御宣政殿。臨遣。將相環侍。先生自外來。請對。進曰。王者之待夷狄。當實邊鄙。緩民力。使不生事。而彼若先擾我邊。不得已而應之。然當審度兵力事勢。不可輕動。況無名之擧乎。臣聞。昔成宗朝。022_117a滿浦僉使許混。擒遊獵之虜。因此數年。邊患不息。成宗誅混。以懲後人。今者。朝廷遣大將。邀虜於草莽之間。以行盜賊之謀。於事何如。臣恐重傷事體也。上卽命更議。左右爭言。兵家有奇正。詢謀已同。不可以一人之言遽改。上猶却衆議。罷遣。
八月。進講論語。
講畢。啓曰。着力於此書。則治化當自此出。若悠悠泛泛。則歲月易往。難得者時。易失者機。且不緊公事。紛紜出入。聖學恐022_117b不專一。須於深宮燕閒之時。潛心體道。然後德化出矣。
九月。論主敬工夫。
啓曰。整齊嚴肅。則自然主一無適。而應物精當。言動中禮矣。常人之不能若此者。皆不能整肅故也。此是聖學之始終。而形容之極難。必於心地惺惺。無昏雜懈弛之時。可見矣。故先儒以主一無適爲言。夫整齊嚴肅。正衣冠尊瞻視者。乃不昏惰之工夫也。因進曰。人主學問。非止澄明一心而已。022_117c當見諸施爲之際。今者。聖學已至高明。若失此機。後不可圖。須與一二大臣。參酌古今。行之以果。若徒於經筵論難。而不措諸事業。近於釋氏之學。若以措諸事業爲先。而不務自修。亦恐不可。須敬以直內。義以方外。內外交相養也。
十月。進講近思錄。因論輔養元子之道。
上御不時經筵。先生進講近思錄。講訖。上曰。此書言。操則存。舍則亡。書曰。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操存省察之功。豈022_117d不難乎。先生曰。上敎聖狂之說。甚爲要切。心是活物。若有感而動。則事爲之主。有似不亂。未接物時。常人之心。尤爲散亂。若欲着於一處。則是以敬直內。非操存之道也。所謂操存者。非必每存善念也。但矜持虛靜。敬以直內。雖非應事接物之時。而常惺惺之謂也。上曰。七情。人所共有。而發之中節。爲難也。先生曰。堯舜桀紂。俱有七情。而善惡懸殊者。以其情之發。有中有不中也。雖善人。爲氣所激。則喜怒或過中焉。022_118a今日。在座之人。孰不欲爲善哉。但能克去己私。則可學聖人矣。古人曰。希顏亦顏。要在用心剛。願上克念古昔帝王之所爲而勉力焉。上曰。欲爲善。而或有過失。改之不吝。可也。若故爲惡。而乃曰。後當改之云爾。則非也。先生曰。雖顏子。亦不能無過。但知非之後。痛自刻責。可也。若有過失。不自反求。而更爲文飾。則何事得其當乎。又曰。元子年歲稍長。知識異常。近來。未聞講學之如何。憂慮實深。雖待正位東宮。乃設022_118b僚屬。但擇賢宰相。加定輔養官。而或令承旨。或史官。或本館年少之官。時時進見。觀其遊戲而敎導之。可也。程子請以士大夫幼子侍太子。當使早歲。有親賢士大夫之心也。但不可急迫而已。
十一月。特陞嘉善大夫兼同知成均館事。○移拜司憲府大司憲。
先生每膺寵擢。惕然不自容。至是。憂懼益甚。屢形於色。○時有與先生爲同年進士者。不協於室家。意欲出之。使人來稟。先022_118c生正色。答曰。夫婦。人倫之始。萬福之原。所關至重。婦人之性。陰暗無知。雖有所失。爲君子者。當率以正。使之感化。其成家道。此是厚德也。或未盡於表率之道。而遽欲去之。不近於薄乎。聞者歎服。
兼元子輔養官
請設賢良科。從之。
時政府與禮曹合啓。請依西漢孝廉賢良科例。令京外各薦所知。以爲臨軒親試之地。上意未決。先生進曰。以上之志022_118d于治。久未見成效者。由不得人材也。若行此法。人材不患不得。遂準請。
論顏子好學。因請揭四箴於座右。
先生嘗侍經筵。論孟子好學之功曰。顏子克去己私。理不爲氣所動。故能不遷怒。不貳過。因論理氣之分曰。理爲主而氣爲所使。則可矣。顏子義理昭晳。私氣消沮。故能如此。大抵耳目口鼻。聲色臭味之欲。無非以氣而出也。使之合理則善也。因論男女之慾曰。男女。人道之大倫。而過則爲害。022_119a上自公卿。下至百僚。常失於此。終至喪其本心者。有之。若顏子之四勿。是工夫下手處也。程子四勿箴。當揭于左右。以備省覽焉。
請澄汰成均館儒生。及以未出身人。爲大司成。
啓曰。近日。學校之事。有名無實。志學之士。皆不欲居館。其寄齋者。皆非俊秀。申光漢爲大司成時。欲澄汰而未果。臣意亦然。但如臣者。不能敎誨而在其職。其可乎。祖022_119b宗朝。姜碩德。非由科擧以進。而亦得爲大司成。自上敎以非由科目者。亦兼帶學官之職者。甚當矣。
是歲。子容生。
十四年己卯 先生三十八歲
遞拜同知中樞府事。因政府啓。仍任。
時有金友曾者。以毀誣士林事庭訊。先生以臺長參鞫。不欲窮治。兩司論遞付西樞。右相安瑭啓言。臺諫請鞫。囚於殿庭。是不能引君當道也。請勿遞光祖。上從022_119c之。
二月。被抄進講性理大全諸員。
四月。復拜副提學。兼如故。
啓曰。惟大人。爲能格君心之非。苟欲有爲。宜得大賢之人。可以上安宗社。下庇生民者。置之左右。每以堯舜之道。陳于經幄。可也。臣無學術。逢此之會。反顧內愧。豈有極乎。漆雕開之言曰。吾斯之未能信。古人雖有學問之功。以一毫未盡。而不欲出仕。況如臣者耶。臣怠惰成習。公退之暇。雖欲勤022_119d學。而力未及焉。每欲退居爲學。學成然後復仕。而不敢瀆達。此非私計。亦是爲國家計也。○先生晩好羲經。手未嘗釋。
六月。還拜大司憲。
先生在憲府。執法平允。敎導兼至。習俗爲之一變。市井小民。事其父母。生養以誠。死葬以哀。衰麻三年。軍卒賤隷。亦爲居廬。祭用木主。墓必立石。遠近風動。每出。市人羅拜馬前曰。吾上典來矣。○時儒生方遭變者。人稱其罪。以父子相奸。遂具由呈憲府。022_120a先生進而敎之曰。此事之辨。在汝而已。今日之後。汝若飭躬自修。以善人聞。則今雖未辨。人必曰。前言誣耳。汝若行事。以不善人聞。則今雖得辨。人必曰。前言不虛耳。其辨與不辨。直在於汝。汝其勉之。某甲遂叩頭而出。其後。一鄕果不以相奸爲疑。論者以爲先生於此處疑之道。勸人之善。兩得之矣。
請因私服往還於濟物。許之。
先生妻父李公允泂。爲濟物萬戶。卒於任022_120b所。無長成子弟。先生啓請斂殯而來。上許焉。
論文昭殿陵寢諸祭
當筵。啓曰。今之弊習。多矣。原廟三時之奠。陵寢朔望之祭。皆非正道。而創自世宗朝。以此觀之。世宗才氣英斷。而恐於學問有所未盡也。此非敬先之道。反爲煩瀆矣。但非自下論執之事。須自上。晝思夜度。斷自聖衷。則事神之道。得矣。欲得如伊,呂之佐。與之圖治。則必先去此022_120c等事而後。可也。
論大臣臺諫相濟之義
啓曰。小臣冒忝憲長。欲與大臣相和。乃本意也。每欲相議曰。大臣所爲。無乃不可乎。臺諫所論。無乃不合乎。如是論難。乃可相濟。而若不相規。則豈相和之道乎。元祐,紹聖之時。有邪正兩存之說。由是。邪正雜進。此苟且之論也。若朝廷有是非混淆之事。則大臣當辨決而處之。若人君與大臣。徒務包容而不辨。則爲害多矣。大抵朝廷有022_120d邪議者。大臣之過也。宋時。韓琦,司馬光,呂公著。與士林皆是一心。後世大臣則不然。不能主張公論。而歸之臺諫。大臣過於包容。臺諫過於峻絶。因此有相異之弊矣。
論親行宗社大祭
啓曰。宗廟社稷之祭。所當親行。以細故不行。甚不可也。今之士大夫家。或以婦女妖說。或以世俗禁忌。不行祭者。滔滔皆是。聖學高明。必不拘此例。臣不疑焉。但深宮之中。所當益愼也。
022_121a七月。以病陳啓再辭。不許。
蓋因與一時論議不協而發。時士類雖得志。而敗症已見。識者甚憂之。先生乃與李公耔,申公鏛,權公橃等。謀欲調適其間。不至敗闕。而如權磌者。反以先生爲依違苟且。亟欲劾去之。故先生自處。不得不然也。○時奇公遵。致簡先生曰。欲棄官綬。斂身山林。無復世路之念。先生曰。亦當如是。益見其雅志所在矣。○一日。夜對。玉堂僚員啓曰。方今欲致太平。須擢相當代第一022_121b人。李延慶進曰。是謂趙光祖。光祖誠賢。然用人。必踐歷多。人望洽。然後可授以大任。先生聞之。馳見泣謝焉。
請勿出養元子於閭家。因陳預防士禍之道。
時元子避寓于閭家。先生啓曰。我國。因循俗習。王子出養于閭閻。甚不可也。須養闕內。親敎善事。且擇宰相中賢德者。使之親近薰炙。以成德性。可也。至於君子小人之進退。吉凶安危之消長。義理善022_121c惡之幾微。反復常說。則雖不能盡解。聞見習熟。自然與智俱長。隱然之中。所益甚大。且於經筵。使在座側。與聞朝廷是非。生民休戚。使自少親接朝臣。可也。乃曰。近來。祭魯山及復昭陵等事。皆前日。志士欲行而未得者。而至於聖世。侍從之臣。建白行之。且愼氏復立之議。朴祥,金淨至於上疏。亦是正論。而其時議者。欲置之大罪。此皆小人所藉口者也。士林之禍根。潛伏於此。聖上不可不知。而亦不可不言於022_121d元子也。臣每於中夜思之。感歎之餘。不無恐懼之念矣。先是。先生進曰。成宗朝。培養士氣。可謂至矣。然至於廢朝。朝臣苟容。氣節掃地。特立不撓之士。世不易得也。今國家修擧之事。皆先朝所未遑。他日。小人若假紹述之說而中之。則善類殆矣。又曰。大抵我朝。自開國以來。士林之禍不絶。若有君子。力於國事。庶幾有成。則無不敗之時。甚可懼也。小臣目覩廢朝之禍。頓無仕宦之念。第以士生斯世。不可恝然。故022_122a不得已從仕立朝矣。但其恐懼之心。人皆有之。自古邦國。雖得鞏固於一時。鮮不傾殆於後嗣。當此幾會。須振作士氣。固定邦本。預防後日之患。可矣。古人云。人之云亡。邦國殄瘁。善人之於國家。所繫豈不大耶。至是。尤致勤懇焉。
論責勉大臣之道
啓曰。政化。當自政府而出。近來。臺諫多建白政令。雖出於不得已。非其任也。政府當與六曹。論議國事。振奮修擧。大事啓稟。小022_122b事自決。臺諫則糾察闕失而已。自上勵精圖治者。不爲不至。而尙無其效者。恐綱領節目。有所未盡也。隨宜斟酌而運用之。全在政府。今者。三公贊成。皆入侍矣。豈可不勉力乎。政府統率百司。猶人之元氣也。爲三公者。以一國之事。皆置于胸懷。密勿圖之。可矣。若政府委靡。則猶無元氣也。人君雖欲有爲。其能獨運乎。
八月。率成均館儒生。詣闕講書。
入對思政殿。見元子。講小學。
022_122c先生以輔養官入侍。啓曰。今聞元子聲音。甚仁厚。臣不勝喜悅之至。今之敎養。不可過於急迫。當從容訓誨。使之浸漸成就。可也。輔養之人。須責老成厚德之人。如臣者。爲臺諫。尙不能盡職。況且大任乎。若不加輔養之名。而常使往來從遊。則臣亦有欲侍之情。豈敢辭乎。觀其德器。有若已成。誠國家之福也。
論王伯之辨
啓曰。百姓安業。則庶幾無憂矣。古人云。如022_122d保赤子。愛民誠能如愛赤子。則民之視上。亦必如父母。何患治化之不成乎。自古。人君多好伯功。鮮行王道。尙伯者。雖易致國富兵強之效。豈復有仁義之道乎。行王道。雖未見朝夕之效。終必悠久而大成矣。故孟子歷聘齊,梁。丁寧告戒者。只是勸行王道而已。
九月。請於拜陵時。從官用公服。從之。
舊例用戎服。故先生啓之。
十月。論不哭申用漑喪。
022_123a時左相申用漑卒。上欲依例擧哀。大臣禮官等議持難。不果行。先生啓曰。用漑之卒。上欲擧哀而還寢。何也。臣聞。柳寬之卒。世宗哭聲徹於外。至今聞者。莫不竦動。前日。下敎之意甚美。而大臣乃謂無別殿可爲。其不能將順。甚矣。○野言別集云。承旨親啓。此祖宗朝舊例。在中宗己卯年間。趙先生等遵而用之。先生被禍後。遂不行。○東閣雜記云。己卯。上議于大臣。八道監司。幷率眷。再朞以遞。有府022_123b尹處則兼府尹。慶尙分爲左右道。趙先生等敗。旋復舊。 右二事。雖非先生所建白。而其實相關。故幷附焉。
請改正靖國功臣
先是。戊寅冬。先生啓曰。靖國時。朝臣識見不高。功臣官爵。猥濫太甚。小臣近作臺官。欲爲國事。而利源一開。莫知所救。念及於此。至欲忘身而極言之。不革此弊。則社稷將不能支持矣。至是。與兩司諸官。伏閤論啓曰。靖國功臣。已久之事也。其初。大臣若有遠慮。臺諫若持公論。則豈022_123c不改正乎。成希顏雖有大功而無學識。朴元宗亦不學者。希顏與柳子光相知。故乃以磨勘大事。委諸奸人。其後。雖有奮不顧身。欲正國事者。而猶不敢請改。恐聖學未臻高明。以爲重難故耳。利源開張。爲國家膏肓之疾。人心壹鬱。急欲論改。而事有漸次。故今始重發。今若不能痛塞。則必有不忍說之事矣。屢啓不已。
論南衮避事之罪
啓曰。禮曹判書南衮。請差英陵香使出022_123d歸。以一品之人。逢此廷議。觀望圖避。甚爲邪慝。宰相用心。豈可若是乎。
率臺諫辭職。始準改正之請。
啓曰。意與事乖。將失大機。固欲翩然引去。不復區區往來。惜時之念。愛君之誠。猶有所不忍。而累日徘徊。不卽便決。事君之道。深有愧於古人。又曰。禍在顯著者。易見。而禍在隱微者。尤可畏也。此事非如一政之失。人人但知有利。而不知有仁義。以此成俗。將無所不至。慮至於此。豈不動念乎。屢022_124a啓不止。上竟允之。蓋先生大意。只欲上格君心。下與大臣。同議國事。以正士習。變弊法。庶幾少伸其堯舜君民之志而已。若其古制美法之可行者。猶在其次。故於童丱,鄕約,齒坐之議。每示持難。至於闢異端。塞利源。實衛道圖治之大要。非此。無以爲國者。故乃因臺諫所爭。而極言之如此。
十一月乙巳。因南衮,沈貞,洪景舟等密告。下獄。安置綾城。
時諸賢被上寵擢。布列朝廷。知無不言。022_124b言無不行。而年少新進。勇於改絃。不度時宜。持議益峻。人皆側目。及侍筵中。進講文義。縱橫出入。辭語太蔓。以至朝講日晏乃罷。聖體有時疲倦。欠伸或徙坐。戛然有聲。而諸賢不覺也。南衮,沈貞,洪景舟等。曾爲士類所駁斥。及他舊臣之在散者。鼓吻旁伺。思欲甘心者。久矣。至是。揣知上意有厭諸賢色。乃使景舟。敎其女煕嬪。因小民稱道先生之說。以一國人心。盡歸趙氏。且以甘汁。寫走肖爲王四字於禁苑木葉。022_124c及被山蟲剝食。仍以上聞。有若符讖者然。又白武士等怨嫉彼輩。謀欲殺害。若朝廷不先處置。則必生大亂也。適會改正功臣。大小人情俱怒。乃於是月十五日二更。衮,貞,景舟。與金詮,高荊山,金克愊,成雲等。密開神武門以入。俄逮先生及刑曹判書金淨,承旨尹自任,朴世熹,朴薰,副提學金絿,大司成金湜,應敎奇遵等。致于闕庭。將殺之。乃傳曰。趙光祖,金淨,金湜,金絿等。交相朋比。附己者。進之。異己者。斥之。聲勢022_124d相倚。盤據權要。引誘後進。詭激成習。使國論顚倒。朝政日非。在朝之臣。畏其勢焰。莫敢開口。尹自任,奇遵,朴世熹,朴薰等。和附光祖等詭激之論。幷下義禁府。先生獨痛哭。諸公相與勉之。先生曰。從容就義。吾豈不知。但不得復見吾君耳。若見吾君。豈至如是乎。○十六日。先生供曰。士生斯世。所恃者。君心而已。妄料國家病痛。在於利源。故欲新國脈於無窮而已。頓無他意。命光祖,淨,湜,絿四人賜死。其餘安置。先生022_125a聞之。始乃裕如也。領議政鄭光弼請入對。涕泣極諫。且請召左相安瑭議。又會參議以上多官。議之。遂命先生等四人。決杖遠方安置。餘有差。門人成守琮,洪奉世等。解衣賂杖者。得輕。十七日夜三鼓。出獄還家。十八日早朝。出東小門外人家。上命還聚諸公於禁府。使成雲傳聖旨曰。汝等。俱以侍從之臣。本欲君臣同心。佇觀至治。汝等人物。亦不爲不良。但近來。凡事過誤。使不平常。朝廷日非。故不得已罪之。然022_125b予心何安。朝廷大臣。亦何有私意哉。汝等之事至此者。皆予不明。不能先防其微也。若罪以律。則必不止此。特爾等。非有私心。但爲國事。不自知其過激之過也。故末減罪之。汝等知之而去。回啓曰。他人則無所言。惟趙光祖曰。臣雖此去。君心豈不知乎。臣等所爲。果有過激矣。是夕。還宿東小門外。赴謫。聞者莫不咨嗟涕泣。往往不覺失聲痛哭焉。先生至謫所。乃撤墻北隅。坐必向闕。以紓戀主之懷。每言。臣罪當死。022_125c上恩至重。其愛君憂國之念。形於色。發於言。寢食不敢弛也。
太學生李若氷,副提學李思匀,大司憲柳雲,典翰鄭譍,校理梁彭孫。俱上疏伸救。
時太學生聞先生被逮。爭先詣闕。幾千餘人。李若氷,申命仁,朴光佑等。相繼上疏。明先生無罪。爲門者所拒。發憤闌入。闕庭號哭。哭聲徹大內。上聞之。命下獄。生員林鵬等數百餘人又上疏。伸救先生。請與若氷就獄。坊里鄕約諸人亦上疏。不知其022_125d數。先是。李公思匀,柳公雲。內有志槩。而外無拘檢。爲諸賢所斥。至是。俱長臺閣論思。乃極力伸救先生。鄭公譍上疏亦切。皆不納。
十二月乙亥。命自盡。
儒生黃李沃。初與李若氷上疏。伸救先生。至是。又上疏請斬。繼而大司憲李沆,大司諫李蘋等合辭。請加罪。竟依允。賜死于謫所。都事柳渰將命至。先生謂都事曰。主上賜臣死。合有罪名。請恭聽而死。都事022_126a無應。先生就庭下。北面再拜。跪受敎旨。問上體若何。次問三公,六卿,臺諫,侍從姓名後。修家書。無一字差誤。遺命歸葬先兆。都事有迫促之意。先生歎曰。古之人有抱詔書。伏哭傳舍者。何其異耶。遂沐浴更衣。正席就座。書所懷曰。愛君如愛父。憂國若憂家。又曰。白日臨下土。昭昭照丹衷。遂仰藥。猶不絶。府卒欲就縊之。先生曰。聖上欲保微臣首領。汝何敢如此。益飮毒酒而臥。血出七竅而終。故事。凡賜死大臣。不022_126b用御寶文字。只用王旨施行。及都事宣旨。先生以爲國家待大臣。不可若是草草。其弊將使奸人。得以擅殺所惡者。欲疏陳一言。而竟不果。○先生賜死命下。弟崇祖奔往於路傍。有老嫗自山中哀哭而來。問曰。郞君。何事而哭也。答曰。吾喪兄故哭。嫗則何哭也。曰。聞國家殺趙光祖。賢人死矣。民必不得生。故哭之。
校理梁公彭孫。殮殯先生。
時校理梁公。亦罷斥家居。遂與先生。日夕022_126c相守。每以處困不失亨交勉。先生曰。吾儕此禍。實繫時運。吾則有死而已。又曰。吾兩人從遊於此。殆不偶爾。相與切偲。以遂初志。庶無大過。梁公曰。今人情椓喪。吾儕竄逐。而天使我團聚于茲。竟究平日未卒之業。此天意亦能勝人者耶。及先生賜死之命遽至。梁公執手相訣。皆無一言。但曰。各自靖獻吾王而已。吾輩幾何不相從耶。是日。雪深尺餘。風悽日慘。人不堪其寒。梁公獨於謫廬外。終日哭泣。躬自殮殯焉。
022_126d十五年庚辰
春。返葬于先壟深谷里之原。
以牛車返櫬于龍仁。葬訖。白虹繞日。東西三匝。南北各一匝。而南北繞外。各有二條虹如垂紳者竟天。又於申未方。別有一條虹長丈餘。皆移時乃滅。成守琮與洪奉世,李忠楗等赴葬。李延慶亦來會。有祝獻以奠。相携長慟而返。
參判金世弼。因入對伸救。
時金公以賀至赴京。及還。入對。伸救先生。022_127a遂被鞫配。自是。無敢爲先生伸辨者。
夏。建祠于綾州中條山下。
學圃梁公。常語及先生事。輒慨然流涕。返柩之後。建祠于雙峯中條山下。每逢先生受命之日。必齋沐痛哭。使門人子弟。春秋享祀。
世宗嘉靖元年壬午
二十年辛丑
左贊成金安國因入對。請還給職牒。不許。
時有旱災。金公因延訪。請給職牒。明示士022_127b林。上命三公議。竟不行。
二十四年乙巳榮靖大王元年
六月。命復官爵。
時太學生朴謹等上疏。極論先生學行及被誣之由。且曰。趙光祖自少。有求道之志。受業於金宏弼。宏弼學於金宗直。宗直之學。傳於其父叔滋。叔滋之學。傳於吉再。吉再之學。得於鄭夢周之門。夢周實爲東方理學之祖。此光祖學問之淵源也。請還職牒。以正士趨。三疏。批曰。汝等居首善之地。022_127c好古而論時。疏章三上。辭懇意直。所學之正。何以如此。我先王敎育之澤。亦可想矣。然言之不從。有意存焉。太學。雖曰公論所在。是非之定。自有朝廷。汝等言是非。則得矣。期於定是非。非諸生事也。姑退而更思之。及上疾大漸。傳曰。趙光祖等復職事。予未嘗忘于懷。第以事在先朝。不敢輕改。今予疾如此。不可不爲。光祖等。其幷復職。
二十五年丙午恭憲大王元年
022_127d三十六年丁巳
十二月二十四日。遷葬于同山西偏。
是年。夫人卒。乃改卜墓西數百步許。遷窆。以夫人祔焉。
穆宗隆慶元年丁卯
二年戊辰昭敬大王元年
四月。命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三月。太學生洪仁憲等上疏。請以先生從022_128a祀文廟。副提學朴大立等。因請贈以高官美諡。大司諫白仁傑等。請仍列文廟從祀。領議政李浚慶等。亦相繼力請。遂贈爵。○九月。上於經筵。問判中樞李滉曰。朝議欲追贈趙光祖。其人學問行事如何。對曰。光祖。天稟秀出。早有志於性理之學。居家孝友。中廟求治如渴。將興三代之治。光祖亦以爲不世之遇。與金淨,金湜,奇遵,韓忠等。相與協力同心。設立法條。以小學爲敎人之方。且欲擧行呂氏鄕約。四方風022_128b動。若久不廢。治道不難行也。但當時年少輩。不無欲速之弊。舊臣之見擯者。失職怏怏。搆成罔極之讒。一時士類。或竄或死。餘禍蔓延至今也。又曰。己卯之禍。正由南衮之奸。而終爲中廟之累。可謂罪通於天矣。今若褒贈光祖而罪衮。則是非分明也。
三年己巳
贈諡文正公
道德博聞曰文。以正服人曰正。 諡議見附錄
022_128c四年庚午
建竹樹書院於綾州
卽先生結纓之地。而因朝令。移奉中條山祠版建之文。因沙溪金先生議。配梁公學圃。○萬曆癸丑。重修書院。靈巖郡守趙纘韓著記。○院之西麓。舊有臺。庚戌。監司朴承宗。名以天日。仍著記。
神宗萬曆元年癸酉
道峯書院於楊州
卽道峯山寧國寺舊基。先生少時。愛其泉022_128d石。往來棲息。立朝之後。亦乘公退。命駕遊焉。至是。牧使南彥經創始之。
二年甲戌
典籍趙憲上疏。請先生及金宏弼,李彥迪,李滉四賢。從祀文廟。 疏見附錄
四年丙子
夏。建兩賢祠於煕川。
卽寒暄金先生編配時。先生受學之所也。監司金公繼輝。倡諸生營立。祀以兩先生焉。
022_129a九年辛巳
戶曹判書李珥。因筵對。啓請先生及李滉二賢。從祀文廟。 啓見附錄
三十三年乙巳
建深谷書院於先生墓下
三十八年庚戌 光海君二年
八月。遣禮官。賜祭家廟。 文見附錄 九月。從祀文廟。 文見附錄
熹宗天啓元年辛酉
三年癸亥仁祖大王元年
022_129b毅宗崇禎元年戊辰
二十三年庚寅孝宗大王元年
二十九年丙申
建迷源書院於楊根
先生嘗與金公湜。遊迷源。愛其山水。約與同居。有手植檜焉。至是。多士議建書院。以祀先生及金公。○此外京鄕書院之建。厥數甚繁。如海州之紹賢。羅州之景賢。礪山之竹林。永興之興賢。其最著者也。
靜菴先生文集附錄卷之五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一
 致祭文
正廟壬子道峯書院致祭文 a_022_154b


是歲壬子之重陽翌朝。爲謁光陵。路出先正文正公趙光祖,宋時烈祠前。還途。遣近侍。侑祭兩賢。其文曰。
022_154c壁立之峯。如覿靜尤。志在堯舜。意炳陽秋。地與人遭。雨賢一院。曠世之想。殽觴是蕆


靜菴先生續集附錄卷之一
 致祭文
正廟道峯書院賜祭文 a_022_154c


崒彼道峯。壁立萬丈。廬岫精神。武夷氣像。其下有祠。兩賢攸享。地與人遇。百世瞻仰。維趙文正。倡道吾東。寔天生德。瑞日和風。洛閩其學。堯舜吾君。路異男女。士別蕕薰。三百年來。繄誰隣德。維宋文正。應期而作。稟得間氣。磊落光明。源溯石潭。嫡承考亭。春秋義炳。魚水契融。逮我先朝。其報益崇。左海文明。實維二公。前已後已。022_154d其禍亦同。何傷乎德。益彰于後。群壬自屛。斯道以壽。尊德象賢。我家禮宜。世遠地邇。鑾蹕爲遲。昔所寤寐。今庶朝暮。遣官侑靈。敬禮斯寓。


村隱集卷之三枕流㙜錄
 寧國洞林莊圖題詠
楊州之樓院迤西。有寧國洞。洞中。重建靜庵先生書院。洞外。卽大路也。七十九歲人劉希慶舊莊。在洞之東北隅。今欲結茅。將終老焉。倩龍眠李澄筆。寫之爲圖。以南郭相公所題詩若序來示余。要和其韻。遂書以與之。孤山。柳公根 a_055_053d


浮天嶽勢移圖畫。出洞溪流割路歧。安得休官偕爾去。道峯書院謁吾師。

丈巖先生集卷之二十二
 祭文
道峯書院追享尤庵先生祭文 a_157_512a


157_512b正德己卯。曁今己巳。屈伸消長。垂二百祀。時非乏明。主豈不聖。運氣所使。奈天不定。中廟盛際。有趙先生。資稟純粹。造詣深精。道該體用。志存君民。丘園養德。玉潤蘭芬。王庭羽儀。瑞鳳祥麟。明良相遇。迥出千載。鄒魯之敎。大明於世。三代之隆。可指其日。梟鳴夜半。駭機猝發。參天豫章。一斫斯倒。片片丹衷。天日獨照。朝野色沮。士女巷哭。斯文云喪。天胡罔極。公議之定。不待百年。歷朝加褒。異時興歎。後學尊慕。建祠妥靈。孝廟御極。有宋先生。學闡繼開。道大德宏。確乎難拔。泰山喬嶽。廓然無滯。天高海闊。首膺弓旌。契合157_512c風雲。麟經大義。煥焉復伸。庶展抱負。以答知遇。弓劍遽遺。天不我助。忠報一念。白首三朝。禮遇益隆。德望彌高。士知矜式。國有蓍龜。闢異閑聖。自任不疑。厲階潛祟。怨仇倂滋。譖售三至。匪母不慈。十數年間。再綴湘蘺。素履無愆。處困愈亨。臨命一疏。可質神明。四民齊號。三光失晶。山頹樑摧。士林安仰。天啓聖衷。昭幽伸枉。復爵祀牢。申命節惠。執古揆今。有足感涕。道之所同。蹟又相契。楚山竹樹。萬古一色。心期相照。寒水秋月。維玆廟庭。尙徵遺躅。同堂腏享。於禮亦合。章甫籲請。聖主肯許。穀朝斯涓。盛典是擧。序用先後。157_512d位分右左。其禮罔愆。其儀不頗。溫溫德容。巖巖氣象。彷彿若覿。於戲不忘。虔誠潔牲。式薦芬苾。有感斯應。庶幾歆格。

杞園集卷之七
 
道峯書院感懷 a_183_520c


萬丈峰前百世祠。閒來杖屨每相隨。光風霽月元深契。春暖秋凉自好期。壇掃落花無筭酌。枕鳴流水幾編詩。殘生更洒蒼崖淚。永日幽吟出▣遅

 

간이집 제6권
 초미록(焦尾錄)
차운하여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제하다. 도봉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찰(寺刹)이 처음 창건될 때부터 붙여졌다고 한다.


옛 절터에 새 서원 영욕이 서로 점철된 듯 / 榮辱新規與舊基
도봉이란 그 이름 기이한 인연을 깨닫겠네 / 道峯終覺設名奇
봉우리마다 수려한 빛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 巖巖秀色當空聳
콸콸 흐르는 찬 시냇물 잠시도 쉬질 않는구나 / 活活寒流不蹔衰
선현을 모신 이곳 혼령이 오르내리나니 / 揭妥前賢森陟降
학문 닦는 후학이여 미위를 삼가 살필지라 / 藏脩後學謹微危
만정의 이적보단 정사가 더 낫고말고 / 幔亭異迹輸精舍
오늘날 우리 동방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보겠도다 / 今見吾東一武夷


 

[주C-001]도봉서원(道峯書院) : 선조(宣祖) 6년(1573)에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봉산에 세워진 사액(賜額) 서원이다.
[주D-001]미위(微危)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십륙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주D-002]만정(幔亭)의 …… 낫고말고 : 만정은 무이산(武夷山)의 산신인 무이군(武夷君)이 진 시황(秦始皇) 2년에 마을 사람들을 산꼭대기로 초청하여 만정(幔亭)의 연회를 베풀고 술과 음식을 주었다는 ‘무이만정(武夷幔亭)’의 고사를 말한다. 《雲笈七籤 卷96》 정사(精舍)는 주희(朱熹)가 한탁주(韓侂冑)를 피하여 무이산으로 들어가서 문인들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였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각각 절간과 서원의 비유로 사용하였다
 시(詩) ○ 칠언 절구(七言絶句)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쓰다.

푸른 절벽 깎아 세운 듯 동구 열렸으니 / 蒼崖削立洞門開
도랑물 잔잔히 몇 굽이 돌아왔나 / 澗水潺湲幾曲廻
요순 군민 만들려는 당시의 뜻을 / 堯舜君民當世志
후인들 사당 앞에 와서 기리네 / 廟前空有後人來
홍재전서 제22권
 제문(祭文) 4
도봉서원(道峯書院) 치제문

이해 임자년(1792, 정조16) 중양절 다음 날 아침에 광릉(光陵 세조(世祖)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갈 때 길이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는 서원의 사당 앞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근신(近臣)을 보내어 양현(兩賢)에게 다음의 글로 제사를 드리게 하노라.

절벽이 선 듯한 봉우리여 / 壁立之峯
마치 정암(靜菴)과 우암(尤菴)을 보는 듯하네 / 如覿靜尤
뜻은 요순에 있었고 / 志在堯舜
의는 춘추(春秋)에 밝았네 / 義炳陽秋
땅이 사람과 더불어 만나니 / 地與人遭
양현을 한 서원에 제향하네 / 兩賢一院
광세의 감회가 있어 / 曠世之想
안주와 술을 이에 바치네 / 殽觴是蕆

정암집 ( 靜菴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靜菴先生文集
판심제  靜菴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29年刊
권책  目錄ㆍ原集 5권ㆍ附錄 6권ㆍ續集目錄ㆍ續集原集 1권ㆍ續集附錄 5권 합 5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21.3×15.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한-46-가92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2
 저자
성명  조광조(趙光祖)
생년  1482년(성종 13)
몰년  1519년(중종 14)
 孝直
 靜菴
본관  漢陽
시호  文正
특기사항  金宏弼의 문인
 가계도
 趙衷孫
 成均館司藝
 趙元綱
 監察
 驪興閔氏
 縣監 閔誼의 女
 趙榮祖
 監察
 趙光祖
 
 韓山李氏
 僉使 李允泂의 女
 趙定
 
 趙容
 郡守
 趙崇祖
 牧使

기사전거 : 世系圖 및 行狀(李滉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성종 13 1482 임인 成化 18 1 8월 10일, 漢陽에서 태어나다.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17 寒暄堂 金宏弼의 문하에 들어가 受業하다.
연산군 5 1499 기미 弘治 12 18 韓山 李氏와 결혼하다.
연산군 6 1500 경신 弘治 13 19 부친상을 당하다.
연산군 8 1502 임술 弘治 15 21 부친 묘소아래에 草堂을 짓다.
연산군 10 1504 갑자 弘治 17 23 10월, 한훤당 김굉필의 訃音을 듣다.
중종 1 1510 경오 正德 5 29 봄, 진사시에 장원하다. ○ 여름, 松都의 天磨山, 聖居山에서 독서하다.
중종 6 1511 신미 正德 6 30 모친상을 당하다.
중종 10 1515 을해 正德 10 34 봄, 砥平의 龍門寺에서 독서하다. ○ 6월, 成均館의 천거로 造紙署司紙가 되다. ○ 8월, 문과 을과에 합격하다. ○ 成均館典籍이 되다. ○ 사헌부 감찰이 되다. ○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다. ○ 朴祥 등의 처벌을 주장한 大司諫 李荇 등의 파직을 啓請하여 체직시키다. ○ 長子 趙定이 출생하다.
중종 11 1516 병자 正德 11 35 봄, 호조ㆍ예조ㆍ공조좌랑이 되다. ○ 3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經筵檢討官 春秋館記事官을 겸하다. ○ 홍문관 수찬이 되다. ○ 11월, 〈戒心箴〉을 제진하다.
중종 12 1517 정축 正德 12 36 1월, ‘災異를 그치게 하고 天意에 應하는 도리’를 陳啓하다. ○ 大臣, 侍從을 召對하여 祖宗의 舊典을 논의하고 시행할 만한 일은 결연히 시행할 것을 啓請하다. ○ 2월, 홍문관 교리가 되어 經筵侍讀官 春秋館記注官을 겸하다. ○ 賜暇讀書하다. ○ 群臣을 不時에 召對하는 일을 啓請하여 採納되다. ○ 7월, 홍문관응교가 되어 經筵侍講官 春秋官編修官 承文院校勘을 겸하다. ○ 8월, 寒暄堂에게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文廟에 從祀하는 일을 계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梅竹軒 成三問, 醉琴軒 朴彭年과 朱溪副正 李深源의 褒贈을 계청하다. ○ 弘文館典翰이 되다.
중종 13 1518 무인 正德 13 37 1월,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經筵參贊官 春秋館修贊官을 겸하다. 病으로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大學」 誠意章을 進講하고 인하여 ‘修己治人之道’를 陳啓하다. ○ 2월, 士氣를 培養하는 일을 계청하다. ○ 貢物의 폐단을 진계하다. ○ 3월, 賢良科의 설치를 계청하여 허락되다. ○ 特旨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을 신중히 하도록 계청하다. ○ 入仕할 처음에 人材를 가려서 등용하는 일을 진계하다. ○ 뇌물을 엄금하도록 계청하다. ○ 5월, 同副承旨가 되다.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 휴가를 허락받아 龍仁에서 省墓하다. ○ 7월, 同知成均館事를 겸하다. ○ 8월, 上疏하여 昭格署의 革破를 계청하다.(9월에 허락되다.) ○ 「論語」를 進講하다. ○ 野人 速古乃를 엄습하지 말 것을 계청하여 採納되다. ○ 10월, 「近思錄」을 진강하고 元子를 補佐, 敎導하는 도리를 진계하다. ○ 大司憲이 되다. ○ 次子 趙容이 태어나다.
중종 14 1519 기묘 德正 14 38 3월, 체직되었으나 右相 安塘의 계청으로 유임되다. ○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 4월, 同知成均館事를 겸하다. ○ 5월, 다시 대사헌이 되다. ○ 政院의 추천으로 「性理大全」을 진강하다. ○ 丈人喪을 당하다. ○ 7월, 병으로 거듭 사직을 계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여염집에 居處하고 있는 元子를 대궐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여 교양하도록 계청하고 因하여 士禍를 예방하는 도리를 進言하다. ○ 8월, 成均館 儒生을 인솔하고 入闕하여 講書하다. ○ 元子補養官이 되다. ○ 9월, 拜陵할 때 從官은 公服을 착용하도록 계청하여 허락되다. ○ 靖國功臣의 改正을 계청하여 허락되다. ○ 15일에 南袞ㆍ沈貞ㆍ洪景舟 등의 密告로 하옥되다. 綾城에 安置되다. ○ 성균관 유생 李若水 등이 상소하여 伸救하다. 대사헌 柳雲이 계품하여 伸救하다. ○ 12월 20일, 賜死되다.
중종 15 1520 경진 正德 15 - 봄, 龍仁 深谷里의 先山에 安葬되다. ○ 金世弼이 入對하여 伸救하다. ○ 여름, 梁彭孫이 綾州 中條山 아래 祠堂을 건립하다.
중종 36 1541 신축 嘉靖 20 - 金安國이 入對하여 職牒의 還給을 계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인종 1 1545 을사 嘉靖 24 - 6월, 復官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 4월, 영의정에 추증되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 ‘文正’(道德博聞曰文 以正服人曰正)의 시호가 내리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 綾州에 竹樹書院이 建立되어 享祀되다.
선조 6 1573 계유 萬曆 1 - 楊州에 道峯書院이 건립되어 향사되다.
선조 7 1574 갑술 萬曆 2 - 趙憲이 상소하여 先生과 金宏弼, 李彥迪, 李滉의 文廟從祀를 계청하다.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 여름, 監司 金繼輝 등이 熙川에 兩賢祠를 건립하고 김굉필과 함께 향사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 李珥가 先生과 李滉의 文廟從祀를 계청하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 겨울, 神道碑(盧守愼 撰)가 세워지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 墓下에 深谷書院이 건립되어 향사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 8월, 禮官을 보내어 家廟에 致祭하다. ○ 9월, 文廟에 종사되다.
효종 7 1656 병신 崇禎 29 - 楊根에 迷原書院이 건립되어 향사되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 李箕疇ㆍ李選이 수집한 遺文ㆍ事蹟과 5대손 趙渭叟의 家藏草本 등을 모아 朴世采가 定稿本을 완성하다. 이 定稿本을 5대손 조위수가 附錄을 줄이고 年譜를 除外하여 南原에서 간행하다.(湖本)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 朴世采가 大邱에서 문집을 중간하다.(嶺本)
고종 29 1892 임진 光緖 18 - 梁會淵이 湖南 儒林들과 협의하여 관찰사 閔正植의 후원으로 綾州 三芝齋에서 문집을 중간하다.
- - 1935 을해 - - - 韓圭復ㆍ李弼薰 등이 龍仁에서 문집을 중간하다.

기사전거 : 年譜ㆍ中宗實錄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문집은 李箕疇가 수집한 先生의 遺文ㆍ事蹟과 李選이 수집한 先生의 遺文 및 5대손 趙渭叟의 家藏草本을 모아 朴世采가 校訂ㆍ編次하고 附錄과 年譜를 붙인 定稿本을 조위수가 附錄을 줄이고 年譜를 除外하여 1681년에 南原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湖本》 1685년에는 朴世采가 定稿本대로 大邱에서 重刊하였다.《嶺本》
그 후 梁會淵이 湖南士林과 협의하여 監司 閔正植의 협조하에 위 兩本을 바탕으로 再編하고 附錄을 增補하여 1892년에 綾州 三芝齋에서 木板으로 重刊하였다.《三芝齋本》
1929년에는 梁會奎가 이 三芝齋本의 일부분을 補刻하고 追刻한 것을 간행하였다.《後刷本》 그 후 1935년에는 韓圭復ㆍ李弼薰 등이 새로 찾은 疏ㆍ箚ㆍ筵中記事 등을 추가하고, 편집하여 龍仁에서 石印으로 重刊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1929년에 간행된 三芝齋本의 追刻後刷本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5권ㆍ附錄 6권ㆍ續集原集 1권ㆍ續集附錄 5권 합 5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肅宗御製詩 〈讀靜菴集有感〉, 1730년(영조 6) 閔鎭遠이 쓴 御製詩에 대한 後識, 宋時烈의 序文, 宋秉濬의 重刊序文과 原集 및 附錄의 목록이 있다.
原集의 권1은 賦 1편, 詩 5제, 권2는 對策 1편, 疏 1편, 啓辭 12편, 書 2편, 箴 1편, 墓碣 1편, 供狀 2편, 권3은 經筵陳啓 44편, 권4는 經筵陳啓 37편, 拾遺(啓 5편, 弘文館書啓, 副提學時書啓), 권5는 筵中記事 4편, 拾遺(筵中記事와 遺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권2의 〈弘文館請罷昭格署疏〉는 1518년에 소격서의 혁파를 奏請한 상소문으로, 性理學의 입장에서 異端을 배척한 내용을 담은 글이다. 〈司諫院罷兩司啓〉는 1515년에 올린 것으로, 臺諫이 求言에 따라 進言한 朴祥ㆍ金淨을 벌할 것을 계청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 주장하고 言路를 넓힐 것을 力說한 내용을 담은 글이고, 〈兩司請改正靖國功臣啓〉는 1519년에 올린 것으로 靖國功臣의 錄勳에 잘못이 있었음을 논한 글이다.
附錄의 권1은 事實, 권2는 語類, 권3은 啓ㆍ箚ㆍ疏, 권4는 追贈官諡時傳旨, 諡議, 五賢從享文廟後頒敎文(李廷龜 製), 祭文, 祝文, 記, 蘭竹屛跋, 권5는 世系圖, 年譜, 권6은 行狀, 墓誌銘, 神道碑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권3에는 〈伸寃疏〉, 〈請褒贈啓〉, 〈請加褒贈從祝文廟箚〉, 〈請二賢從祀啓〉 등이 실려 있다.
續集에는 目錄이 있으며, 續集原集 권1에는 詩 12제가 실려 있고, 續集附錄 권1에는 致祭文, 권2에는 疏ㆍ箚ㆍ啓, 권3에는 事實(補遺), 권4에는 記ㆍ詩ㆍ贊ㆍ上樑文ㆍ祭文, 권5에는 碑ㆍ詩ㆍ門生錄이 실려 있다. 이 중 권3의 事實(補遺)은 鄕禮合編ㆍ己卯遺蹟ㆍ金光遠諡狀ㆍ崔新齋謝復安處順書ㆍ崔新齋實記ㆍ生員朴公以洪墓碣(李縡 撰)ㆍ竹亭集ㆍ秋坡集ㆍ眉巖集ㆍ己卯諸賢傳 등에서 저자와 관계있는 기록을 가려 뽑아 輯錄한 것이고, 권4의 詩는 楊熙止ㆍ姜顯ㆍ朴祥ㆍ柳馨遠ㆍ崔岦ㆍ宋時烈ㆍ權尙夏ㆍ李縡 등의 저자와 관계있는 시를 모은 것이다.
권미에는 鄭範祖와 후손 趙命敎가 쓴 重刊跋文이 실려 있고, 이어 1929년에 和順 三芝齋에서 간행된 사실을 담은 版權紙가 있다.

필자 : 鄭弼溶


   송시열 선생의 송자대전의 기사에

  萬瀑等宛然 金剛山中萬瀑洞盤石。刻先生筆所寫晦翁詩。淸溪白石要同趣。霽月光風更別傳之句。余於戊辰入山時。尙亦宛然。李公時以平康宰見之。而書中及之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