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 남효은 (추강거사) /약천 남구만 선생

아베베 2013. 2. 9. 21:04

 


 

약천집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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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승(家乘)
족보 서(族譜序)



남씨(南氏)가 성을 얻은 것은 처음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이때 수행하던 신하 김공(金公) 휘 충(忠)이 안렴사(按廉使)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의 예주(禮州)에 이르니, 바로 지금의 영해(寧海)이다. 공은 말하기를, “중국과 외국이 똑같은 천하이니, 황제의 땅 아님이 없다.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 하니, 경덕왕(景德王)은 천자에게 아뢰고 공이 우리나라에 살려는 소원을 허락해 주었으며, 중국의 여남(汝南) 사람이라 하여 남씨(南氏)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였는데, 영양(英陽)에 거처를 정하여 그대로 본적(本籍)을 받았다고 한다.
뒤에 고려조에 이르러 삼 형제가 있었으니, 군기시 주부동정(軍器寺主簿同正) 휘 홍보(洪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휘 군보(君甫), 고성군(固城君) 휘 광보(匡甫)이다. 홍보는 그대로 영양을 관향으로 삼았고 군보는 의령(宜寧)으로 관향을 옮겼으며 광보는 고성(固城)으로 관향을 옮겨서 족보가 비로소 셋으로 나누어졌다. 군보의 후손 휘 재(在)는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을 보좌하여 개국 공신이 되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로부터 의령 남씨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현달한 자들은 대부분 그 후손이다.
구보(舊譜)와 신보(新譜) 두 족보가 있는데, 연대가 아득히 멀어서 기재한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고(故) 판서 선(銑)이 자료를 모으고 수정하였으나 또한 미비한 점이 많았는데, 지난번에 고 참판 익훈(益熏)이 여러 종인(宗人)들에게 묻고 보태어서 권질(卷帙)을 만든 다음 북도(北道 함경도)의 관찰사가 되어 목판에 새겨서 널리 인쇄하여 집안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먼 후손과 미천한 후손들로 하여금 모두 성씨를 얻게 된 유래와 파가 나뉜 까닭을 알게 하였으니,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과 종족을 수합하는 정의(情誼)가 부지런하고 또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 족보에 기록된 것을 보면 본적을 받은 뒤로부터 관향을 옮길 때까지가 500여 년이 되는데 보첩(譜牒)에 기록된 것은 겨우 6대뿐이니, 유실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천보 연간에 현종이 촉으로 파천할 때에 수행한 신하로서 사명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에 온 사실은 《당서(唐書)》와 우리나라 역사책에 모두 기록된 것이 없으며 안렴사라는 직함은 또 천보 연간에 있었던 벼슬이 아니니, 이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을 들은 대로 기록하여 고증할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밀직공(密直公) 이상은 의심스러운 내용을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밀직공 이하는 믿을 만한 내용을 사실대로 전할 뿐이다.
민마보(閔馬父)가 《시경(詩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일컫기를 ‘옛날부터〔自古〕’라고 하였고, 옛날을 ‘재석(在昔)’이라 하였고, 예전을 ‘선민(先民)’이라 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이제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 수 있는 것이 유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감히 사실을 없앨 수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성주(成周)의 제도에 성(姓)을 받은 것을 관장하기 위하여 사상(司商)이라는 관직이 있었고, 세계(世系)를 정하기 위하여 소사(小史)라는 직책이 있었으니, 성씨와 세계가 국가의 정치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관청을 만들고 관직을 세우기를 이와 같이 거듭하고 또 많이 하였단 말인가.
내가 짐작건대 천하는 한 나라를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나라는 한 집안을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집안은 한 사람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의 몸이 성씨가 있어 그 적(籍)을 나타내고, 집안이 있어 그 종(宗)을 세우고, 족보가 있어 그 대수(代數)를 기록하여, 계통이 후세에 밝아져서 유풍이 그대로 보존되고, 친애하는 마음이 먼 선조에까지 미쳐서 남긴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교화가 한 집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러 교화가 점점 이루어짐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성씨와 세계를 소중히 여긴 것이 어찌 아무 이유가 없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어서 뿌리를 상고하고 계파를 분별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이는 선조의 덕을 높이고 어짊을 본받아서 낳아 주신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영의공(英毅公)은 타국에서 온 나그네 신하로 몸을 삼가 후손을 도와서 끝내 해동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을 이루었고, 충경공(忠景公)은 나라가 혼란할 때를 당해서 개국하는 시기에 경륜하여 마침내 대려(帶礪)의 훌륭한 공신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후손들이 그 공렬(功烈)을 잇고 그 발자취를 계승해서 무궁한 후세에 이르도록 실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만약 단지 세차(世次)를 드러내고 벼슬과 지위를 기록해서 집안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고 가문의 갑을(甲乙)을 정하려고만 한다면 어찌 오늘날 이 족보를 편찬하는 본의이겠는가.
익훈(益熏)의 중씨(仲氏) 치훈(致熏)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바닷길로 이 목판본을 수송해 갔고, 해임하여 돌아오게 되자 또 밀직부군(密直府君)의 묘소가 있는 의령으로 판본을 옮겨 왔으며, 막내인 지훈(至熏)은 현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판각을 보관할 집을 경영하여 오래도록 보관할 계획을 하고 있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주갑(周甲)이 되는 정축년(1697, 숙종 23) 8월에 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구만(九萬)은 삼가 쓰다.


 

[주D-001]민마보(閔馬父)가 …… 하였다 : 민마보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大夫)로 민자마(閔子馬)라고 칭하기도 하며 선민(先民)은 옛날의 성인(聖人)을 이른다. 《시경(詩經)》 상송(商頌) 나(那)에 “예로부터 옛적에 선민들이 공경한 일을 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하여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였다.〔自古在昔 先民有作 溫恭朝夕 執事有恪〕” 하였는바, 민마보는 이 시를 인용하여 옛 성인들은 이 공경하는 도를 자신이 처음으로 했다고 하지 않고 ‘자고(自古)’니 ‘재석(在昔)’이니 ‘선민(先民)’이라고 하여 반드시 옛날에 근본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國語 卷5 魯語》
[주D-002]대려(帶礪) : 나라와 함께 복록을 누릴 공신이란 뜻으로 흔히 개국 공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도 나라가 길이 보존되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寧 爰及苗裔〕”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세승 서(世乘序)



청양(靑陽)의 사군(使君) 남반 유안(南磐幼安)은 바로 나의 10대조인 충경공(忠景公)의 11대 종손이다. 하루는 그가 손수 기록한 가승(家乘)을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충간공(忠簡公) 이상은 선조가 나와 똑같았고 의령군(宜寧君) 이하는 유안(幼安)과 계파가 나뉘었다. 우리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그 선대부(先大夫 조고친)에 이르기까지 채택함에 근거가 있고 기재함에 빠뜨림이 없어서 가풍(家風)을 기술하고 세덕(世德)을 열거하였으니, 어찌 부화함과 과시를 일삼은 반악(潘岳)의 글과 육기(陸機)의 부(賦)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문견이 적었고 늙을수록 더욱 혼미하고 우둔해져서 선대의 모든 유문(遺文)과 고사(故事)에 대해 실로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 유안이 편집한 책을 보고서 비로소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아, 유안은 백세토록 체천(遞遷)하지 않은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어 집안사람들이 공경히 섬기는 종손(宗孫)이 되었으니, 이 사업에서 선조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점에 대해 남모르게 감동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 선조인 충경공과 충간공은 조선 초기에 국운이 흥왕(興旺)하여 지극히 성할 때를 당해서 조손이 연달아 정승이 되어 공적이 기상(旂常)에 기록되고 사적이 역사책에 찬란하게 빛나 우뚝이 천지에 남아 있으니, 진실로 신도비에 새겨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후손들의 추모하는 뜻을 가지고 말한다면, 유택(幽宅)에 묘표를 세워서 단지 몇 글자를 새긴 조각돌만으로서는 너무 지나치게 검소해서 크게 걸맞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우리 후손들이 선조의 남은 음덕(蔭德)을 입고 벼슬을 이어 대대로 고관을 지내어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마침내 국전(國典)의 장례 법령에 있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한 지가 이제 수백 년이 되었으니, 모든 우리 후손들이 어찌 마음에 서운함이 없지 않겠는가.
유안이 먼 선조를 추모하는 효성이 돈독하여 이미 이 가승을 지었으니, 바라건대 또 그 뜻을 미루어 우리 집안사람들을 힘써 인솔해서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하여 용머리에 거북 좌대(座臺)로 된 신도비를 두 선조의 묘역에 세워 무궁한 후손에게 길이 보여야 할 것이니, 이는 실로 종손이 해야 할 일이요, 또한 집안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다.
무인년(1698, 숙종 24) 2월 5일에 종인(宗人) 구만은 재배하고 삼가 쓰다.


 

[주D-001]반악(潘岳)의 …… 부(賦) : 반악과 육기(陸機)는 진(晉)나라 문장가로 육기는 《변망론(辨亡論)》과 《호사부(豪士賦)》 등을 지었고, 반악은 무제(武帝)가 친히 적전(籍田)을 갈 때에 그 일을 찬미하는 부를 지어 재명(才名)을 세상에 날렸다.
[주D-002]기상(旂常) : 《주례(周禮)》 춘관(春官) 사상(司常)에 “용의 형상을 서로 어긋나게 그린 것을 기(旂)라 하고, 해와 달을 그린 것을 상(常)이라 한다.” 하였는데, 옛날 신하 가운데 국가에 공덕이 있으면 여기에 기록하여 드러내어 밝혔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4대 조고(祖考) 고려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부군 묘추지(墓追誌)



고려 때 통헌대부 추밀원 직부사를 지낸 남공(南公) 휘 군보(君甫)는 영양(英陽)에서 의령현(宜寧縣)으로 관향을 옮겨 묘소가 또한 이 고을에 있는데, 세대가 멀어서 실전(失傳)되었다가 후손들의 꿈에 나타나 잃었던 산소를 찾아서 다시 봉분하고 비석을 세워 처음 장례할 때와 같이 하였는바, 이 일이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지은 묘표 음기(墓表陰記)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백년이 지나서 글자 획을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인 지훈(至熏)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묘표를 다시 새기고 음기는 자기(磁器)를 구워 지석(誌石)을 만들어서 장차 유택에 묻으려 한다고 하였다.
내가 들으니, 토지와 노비를 장만하여 재계하는 사찰에 주고 또 부역을 면제하여 묘소를 지키게 한 것은 실로 우리 고조인 승지공이 처음 시작하였는데, 본도의 우병사 이흥(以興), 순찰사 훤(翧), 통제사 두병(斗柄), 의령 현감 두장(斗長), 군위 현감(軍威縣監) 득붕(得朋), 송라 찰방(松蘿察訪) 종백(宗伯), 고성 현령(固城縣令) 몽뢰(夢賚), 의령 현감 두추(斗樞), 칠곡 부사(漆谷府使) 취성(聚星), 동래 부사(東萊府使) 익훈(益熏), 의성 현령(義城縣令) 상훈(尙熏), 신녕 현감(新寧縣監) 치훈(致熏)이 또 앞뒤로 봉급을 내어서 노비와 토지를 더 장만하였으며, 순찰사 선(銑)이 또 담장을 쌓고 문을 세워 때때로 여닫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비석을 다시 세운 것은 우도 병마우후 택(澤)이 이 일을 주관하였으며, 상훈이 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고 치훈이 또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어서 힘을 합해 이룬 것이다.
숭정 기원 후 주갑이 되는 정축년 8월 일에 14대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구만은 삼가 쓰다.

 

 

 약천연보 제1권
[연보(年譜)]



약천(藥泉) 문충공(文忠公)의 시조는 중국 사람이다. 당(唐)나라에서 명령을 받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 때문에 신라의 유린군(有隣郡) - 지금의 영해부(寧海府) - 에 표류하니, 이때 나이가 40여 세였다. 신라왕은 그가 신라에 살기를 원하자 이 사실을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었다. 여남(汝南)에서 왔기 때문에 그것과 연관하여 남씨(南氏) 성(姓)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하여 영의공(英毅公)에 봉하니, 마침내 영양(英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에 척(倜)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익(翼)은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로 영양군(英陽君)에 봉해졌는데, 태자첨사는 고려 문종(文宗) 이후의 관직이다.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휘 군보(君甫)에 이르러 본관을 의령(宜寧)으로 옮겼다. 통헌대부는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충선왕(忠宣王)이 개정한 관계(官階)로 종2품이었다. 이때에 밀직사(密直司)를 파하였으나 이해에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복구하였으며, 2년 뒤에 종2품을 고쳐서 상등(上等)을 광정대부(匡靖大夫)라 하고 하등(下等)을 봉익대부(奉翊大夫)라 하였으니, 통헌대부 밀직부사는 충선왕 초기의 관직이다.
의령 남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대장군 휘 진용(鎭勇)은 바로 밀직부사 부군(府君)의 선고(先考)인데, 영양 남씨(英陽南氏)의 옛 족보에는 이와 반대로 되어 있고 또 봉호를 의령군(宜寧君)이라 하였으며,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 휘 익지(益胝)를 의령군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의령 남씨의 족보에는 대장군의 손자라고 하였으니, 지금 감히 그 사실 여부를 자신할 수 없다.
풍저창 부사 부군은 문충공에게 13대조가 된다. 이분이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휘 천로(天老)를 낳았는바, 공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천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경렬공(敬烈公) 휘 을번(乙蕃)을 낳았다. 그리고 휘 을번이 영의정으로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진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를 낳았는데, 우리 태조(太祖)의 개국 일등 공신에 책록(策錄)되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는바, 공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휘 재는 병조 의랑(兵曹議郞) 휘 경문(景文)을 낳았다. 그리고 휘 경문이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를 낳았는바, 공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휘 지가 간성 군수(杆城郡守) 휘 구(俅)를 낳았는데 형제 중에 셋째이다. 휘 구가 부사과(副司果) 휘 계(悈)를 낳았는바, 공이 묘표를 지었다. 휘 계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 치욱(致勗)을 낳았는바, 공이 묘표를 지었다. 휘 치욱이 좌승지 휘 언순(彦純)을 낳았는바, 공이 묘표를 지었다. 휘 언순이 부호군(副護軍) 휘 타(柁)를 낳았는데 형제 중에 셋째이다. 공이 이분의 증손이 된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바, 공이 묘표와 묘지(墓誌)를 지었다. 부인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장사랑(將仕郞) 덕형(德亨)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휘 타가 평강 현감(平康縣監) 휘 식(烒)을 낳았는데 공이 이분의 손자가 된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바, 공이 묘표와 묘지를 지었다. 부인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참판에 추증된 주(澍)의 따님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휘 식이 금성 현령(金城縣令) 휘 일성(一星)을 낳았는데 공이 이분의 아들이 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바, 공이 행장(行狀)과 묘표를 지었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엽(曗)의 따님으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은 휘가 구만(九萬)이고 자가 운로(雲路)이다.

1세 기사년(1629, 인조7)
인조대왕 7년 12월 3일 계축일 유시(酉時)에 공이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 이때 권 부인(權夫人)이 누암에 근친(覲親)하러 갔다가 공을 낳았는데, 공의 오른손 손바닥과 팔뚝 사이에 일곱 개의 까만 점이 있었는바, 모양이 북두칠성과 같았다.

2세 경오년(1630, 인조8)

3세 신미년(1631, 인조9)

4세 임신년(1632, 인조10)

5세 계유년(1633, 인조11)
4월 4일에 증조비(曾祖妣) 현 부인(玄夫人)이 별세하니, 공은 어버이를 따라 정릉(貞陵) 소동(小洞)의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6세 갑술년(1634, 인조12)

7세 을해년(1635, 인조13)

8세 병자년(1636, 인조14)
11월에 어버이를 따라 청나라 침략군을 피해 용안(龍安)으로 갔다.

○ 이때 조고(祖考) 평강(平康) 부군(府君)이 용안 현감(龍安縣監)이었는데, 공은 어버이를 따라 용안현에 있었다.

9세 정축년(1637, 인조15)

10세 무인년(1638, 인조16)
어버이를 따라 결성(結城)에 있는 구산(龜山)의 전려(田廬)로 돌아왔다.

○ 공이 태어나기 1년 전에 평강 부군이 구산에 전려를 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노친을 봉양하였다.

11세 기묘년(1639, 인조17)
10월 29일에 증조고(曾祖考) 부호군(副護軍) 부군(府君)이 별세하였다.

12세 경진년(1640, 인조18)

13세 신사년(1641, 인조19)

14세 임오년(1642, 인조20)
가을에 충주(忠州)의 외가에 머물러 있었다.

15세 계미년(1643, 인조21)
12월에 부호군 부군을 홍주(洪州)의 모과동(木瓜洞)에 장례하였다.

○ 이보다 앞서 부호군 부군을 임시로 장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남응민(南應敏)으로 하여금 묏자리를 정하게 하였다. 남응민은 충경공(忠景公)의 아우인 강무공(剛武公) 은(誾)의 후예로서 방기(方技)로 이름이 났는데, 공의 숙부인 의졸공(宜拙公 남이성(南二星))과 공의 관상(觀相)을 보고 말하기를,
“두 분 모두 반드시 높이 현달할 터인데, 조카의 관상이 더욱 완전하고 좋으니 축하할 만합니다.”
하였다.

16세 갑신년(1644, 인조22)

17세 을유년(1645, 인조23)

18세 병술년(1646, 인조24)
관례(冠禮)를 치르고 어버이를 따라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19세 정해년(1647, 인조25)
○ 10월에 숙부 의졸공(宜拙公)이 평강(平康)의 임소(任所)로 평강 부군을 근친하러 갔는데, 이때 공이 배율(排律) 120운(韻)을 지었다. 그 내용에 “아름다운 시절 해마다 이르러, 인생의 곳곳마다 만나네.〔佳節年年至 人生處處逢〕”라고 하였으니, 약관의 나이에 기상(氣像)과 문리(文理)가 갖추어진 것이 이와 같았다.

20세 무자년(1648, 인조26)
1월에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맞이하였다.

○ 부인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의 현손(玄孫)이고 봉사(奉事) 정수(鄭脩)의 따님이니,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21세 기축년(1649, 인조27)

22세 경인년(1650, 효종1)
효종대왕 원년 7월 25일에 조고 평강 부군이 별세하였다.

23세 신묘년(1651, 효종2)
7월에 공은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 3등에 제61인(人)으로 입격하였다. 11월 12일에 훗날 조씨(趙氏)의 며느리가 되는 딸이 태어났다.

○ 이때 공은 이민적(李敏迪) 형제와 교분을 맺고 학업을 익혀 과시(課試)에서 여러 번 1등을 차지하였는데, 이백강(李白江)이 한번은 공이 초한 원고를 보고 감탄하기를,
“이 사람의 문필을 보건대 정신이 충만해 있으니, 앞으로 차지할 명성과 지위가 결코 내 자식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 공은 모두 4녀를 낳았는데, 세 명은 요절하였다.

24세 임진년(1652, 효종3)
6월 22일에 조비(祖妣) 서 부인(徐夫人)이 별세하였다.

25세 계사년(1653, 효종4)

26세 갑오년(1654, 효종5)
2월 7일에 아들 남학명(南鶴鳴)이 출생하였다.

○ 이해에 공은 논(論)에서 이상(二上)으로 별시(別試) 초시(初試)에서 1등을 차지하였다.

27세 을미년(1655, 효종6)

28세 병신년(1656, 효종7)
7월에 아들이 태어났다.
8월에 별시 을과(乙科)의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11월에 가주서(假注書)에 차임되었다.
12월에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다시 가주서로 친정(親政)에 입시(入侍)한 공으로 6품으로 승진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 아들이 8세에 요절하였다. 뒤에 무신년(1668, 현종9)과 기유년(1669)에 두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한두 살이 못 되어 요절하였다.
○ 공이 대책문(對策文)으로 별시 초시에서 1등을 차지하고, 그다음 달에 마침내 급제하였다. 방(榜)이 막 붙을 무렵에 공이 장인 정공(鄭公)을 찾아가서 문후하였는데, 말하는 도중에 정공이 묻기를,
“방이 언제 나오는가?”
하니, 공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오는 도중에 들으니 제가 급제했다 합니다.”
하였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관인(館人)들이 떠들썩하게 찾아와 축하하므로 온 집안 식구들이 뛸 듯이 기뻐하였으나 공은 여느 날처럼 조용히 행동하며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고 돌아왔다. 공은 어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뻐도 크게 웃지 않고 노여워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결하고 순수한 기운이 얼굴과 등에 배어 나오고 자애로운 마음이 말과 행동에 넘쳐났다. 그리하여 행동거지가 위엄이 있고 말소리가 온화하였으니 천성이 본래 그러하였던 것이다.
○ 고사(故事)에 의하면 오직 상주서(上注書)만이 친정(親政)에 입시한 공으로 승진하는 법인데 이때에 이르러 격식을 뛰어넘어 제수되었으니, 이는 공이 기록하고 응대하는 것이 성상의 뜻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에 사헌부에서 명의 개정을 청하는 계사(啓辭)를 네 차례 올리고 정지하였다.

29세 정유년(1657, 효종8)
1월에 겸 중학교수(兼中學敎授)로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2월에 선조실록수정청등록관 겸 춘추관기사관(宣祖實錄修正廳謄錄官兼春秋館記事官)에 차임되고, 동당 초시(東堂初試) 이소 시관(二所試官)에 차임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사서에 제수되었다.
3월에 병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7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8월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언으로 옮겼다.
9월에 시강원 문학에 제수되고 실록 세초연(實錄洗草宴)에 참여하였다.
10월에 활을 하사받았고 세자의 회강(會講)에 참여하여 홍면주(紅綿紬)와 남주(藍紬)를 하사받았으며, 국청(鞫廳)의 문사 낭청(問事郞廳)에 차임되었다.

○ 3월에 감기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평소 이동규(李同揆)와 서로 친하지 않았는데, 이동규가 마침 교외에 나갔다가 공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공의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의 기국(器局)과 식견이 반드시 여기서 끝나지 않을 줄을 아니, 병세의 차도를 자세히 알아보고서 나에게 알려 달라.”
하였다. 그 후 십수 일 만에 과연 공의 병이 나았다.
○ 9월에 문학에 제수되었는데 10월에 진선(進善) 권시(權諰)가 강관(講官)을 구임(久任)시킬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근래에는 강관 중에 재주와 학식이 세자를 보필하고 인도할 만한 자가 있더라도 자주 체직되어서 실효가 없습니다.”
하니, 이로부터 공이 시강원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30세 무술년(1658, 효종9)
3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4월에 춘당대 문신 정시(春塘臺文臣庭試)에 입격하여 지필묵(紙筆墨)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고 비변사 낭청(備邊司郞廳)에 차임되었다.
5월에 홍천(洪川)의 삼성추고 경차관(三省推考敬差官)에 차임되었는데, 이달에 복명하고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6월에 재차 상소하여 타위(打圍)하겠다는 명을 중지할 것을 간하여 이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으며, 지제교(知製敎)로 뽑혔다.
7월에 지평에 제수되었다.
9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사서(司書)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12월에 문학에 제수되었다.

○ 여름에 병조 정랑으로 비변사 낭청에 차임되었는데, 이듬해 여름에도 옥당관(玉堂官)으로 있으면서 또 이와 같이 겸직하였으며, 현종(顯宗) 원년(1660) 겨울에도 전랑(銓郞)으로 있으면서 또 이와 같이 겸직하였고, 그 이듬해 가을에도 이와 같이 겸직하였다.
○ 이해 여름에 상(上)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상(喪)에 두 번 임어(臨御)하였고 다시 세 번째 임어하여 치제(致祭)하고자 하자, 양사(兩司)에서 국조(國朝)의 예문(禮文)에서 시행하지 않던 일이라고 간쟁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옳다. 국조의 예문에 실려 있는 일은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으며, 사람들 또한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일례로 근자에 강무(講武)하고 타위(打圍)하는 등의 일을 거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루어 놓은 법을 실추시킬까 두렵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해서 금년 가을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정언으로서 상소하여 간하기를,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준수해야 할 것은 준수하고 변통해야 할 것은 변통하는 것이 모두 선조의 일을 계승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다만 대신(臺臣)들의 주장에 격분하신 까닭에 이처럼 타위하고 강무하겠다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우리 조종께서는 신무(神武)로 나라를 창건하시고 여러 대를 전해 오면서 크게 형통하고 매우 편안한 때에 수렵(蒐獵)과 군정(軍政)을 시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의 힘을 크게 손상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또 정사에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후세에서 비교하여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살펴보니,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 모시는 신하에게 이르시기를, ‘봄가을로 강무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또한 폐지할 수가 없으나, 백성들을 뽑아 짐승들을 몰게 하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지난번 임실(任實), 태안(泰安), 해주(海州)에 사냥 나간 것을 후회하나 이제 와서 어쩔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이 분부를 살펴보건대, 이것을 후세에게 법으로 물려주려고 하지 않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국운(國運)이 매우 위축된 때에 조종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을 이미 차례로 거행하지 못하셨으면서, 도리어 한때 대신들의 말에 격분하시어 선왕께서도 후회하셨던 일을 행하신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가 진언(進言)한 정성을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며칠 있다가 공이 재차 상소하기를,
“초상에 세 번 임어하는 예(禮)는 옛 경서에 기재되어 있고, 군주가 신하의 상에 친히 제사 지낸 것은 옛날 역사책에 보이니, 대신(臺臣)들이 어찌 이것을 가지고 도리가 아니므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대신들의 구구한, 도에 지나친 계책이 도리어 군주의 훌륭한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도리를 잃고 국제(國制)에 의거하려고 하다 보니 전하께서는 신하들이 군주를 제재하려 한다고 여기시고 반드시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내 말을 어기지 말았으면 한다.’ 하고 바라신 것인데, 그렇다면 우(虞)나라 신하들의 간쟁과 조기(祖己)의 훈계, 난간을 부러뜨린 주운(朱雲)과 옷자락을 붙잡은 신비(辛毗)는 모두 군주를 제재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윗사람을 범한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두 번의 진언에서 나라를 근심하고 군주를 사랑하는 정성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내 이를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중지하였다.
○ 이달에 지제교(知製敎)로 뽑혔다. 수년 후에 현종(顯宗)이 정북창(鄭北窓)의 서원에 사액(賜額)하였는데, 예문관에서 공을 차임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게 하자, 공이 이르기를,
“북창이 유문(儒門)에서는 그 공부의 깊이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 통달했다고 일컫는 이상 이미 잡박한 것이다. 또 타심통(他心通)이 있어 산속에서 산 밖의 일을 알았고 중국에 들어가서 안남(安南)과 유구국(琉球國)의 사신과 모두 말이 통했다고 하니, 방술(方術)이 기이하고 괴이하다. 서원을 만들어 받드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하고는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여러 유생의 요청에 따라 거듭 권하여 마지않았으나 공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말년에 숙종이 김동봉(金東峯)의 사우(祠宇)에 사액하였는데, 서계(西溪) 박공 세당(朴公世堂)이 여러 유생들과 함께 공에게 원장(院長)이 되어 줄 것을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동봉의 인품은 절개가 비록 고상하나 원래 방외(方外)에서 노닐었던 사람입니다. 또 초년에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가 중간에 도로 일반인의 옷을 입었는데, 말년에 또다시 승복(僧服)을 입었습니다. 만약 사우의 제도로 조처한다면 괜찮겠지만 지금 마침내 원장과 유사(有司) 등의 명칭을 붙인다면 이는 바로 서원의 제도입니다. 지금 동봉과 북창을 나란히 놓고 논한다면 인품의 고하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서원에 모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동봉이 더 심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편지를 보내 사양하였다.
○ 9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사헌부에서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진(李袗)이 관향미(管餉米)를 제멋대로 사용하였다고 탄핵하자, 수어사(守禦使) 이시방(李時昉)이 차자를 올려 이미 선혜청이 차용(借用)하도록 허락한 일이라고 아뢰었다. 10월에 대사헌 홍명하(洪命夏)가 차자(箚子)를 올려 이진이 너무 지나치게 차용한 점을 아뢰고, 이어 강화 경력(江華經歷) 이위국(李緯國)이 형벌을 남용해 가며 환곡(還穀)을 거둬들인 것을 사헌부 대간들이 탄핵한 일은 사실과 다르다고 진술하니, 상이 답하기를,
“근래에 수령들이 도리를 어기면서 백성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 본래 이와 같다.”
하고, 또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계사(啓辭)가 진실하지 못한 것이 본래 이와 같다.”
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간하기를,
“전하께서 온 나라의 수령을 통틀어 모두 백성들의 칭찬을 구한다고 의심하시니, 이 어찌 왕자(王者)가 공평한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온 나라의 대간들을 통틀어 모두 진실하지 못하다고 의심하시니, 이 어찌 성인이 겸허한 마음으로 간언을 듣는 도리이겠습니까. 또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신뢰가 우선이고 국방과 식량이 그다음인 것이며, 국가를 보장(保障)하는 계책은 인화(人和)를 우선으로 삼습니다. 지금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국가의 중요한 진영이요 큰 방어진으로서 만일 국가에 변란이 있으면 피난처로 삼아야 할 곳입니다. 그러니 이곳을 지키는 신하의 도리로 볼 때 어찌 오로지 포흠(逋欠)한 것을 독촉하여 받아 내고 창고를 굳게 지키는 것만 가지고 자신의 직책과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진(李袗)이 도리를 어기면서 백성들의 칭찬을 구하려는 마음이 과연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관향미를 차용하여 백성들의 부역(負役)에 보충한 것을 죄로 삼는다면 지나친 것입니다. 그리고 이위국이 쇠사슬로 죄인을 거꾸로 매달고 가시 발〔荊簾〕로 죄인을 둘러싼 일이 있었는지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만일 국가를 위하여 포흠한 것을 징수하려고 하다가 그리 했다 해서 그 죄를 용서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또 도리를 어기면서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한 것은 진실로 가증스러우나, 도리를 어기면서 윗사람에게 칭찬을 구하는 것에 비한다면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근래 고을의 수령과 변방의 장수들에 대해 혹 특별히 군기(軍器)를 마련했다 하여 승진시킨 경우도 있고, 혹 특별히 군량(軍糧)을 마련했다 하여 상을 내린 경우도 있는데, 비용을 줄이고 아껴 써서 그 비용에 충당한 자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이 가운데에는 또한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고 관청의 물건을 줄여서 윗사람에게 아첨하려는 계책을 부린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이들에 대해서는 도리를 어기면서 칭찬을 구했다는 이유로 처벌한 적이 없으시고, 유독 관향미를 차용하여 백성들의 부역에 보충한 자에 대해서는 이처럼 깊이 미워하시고 통렬히 배척하시니, 진실로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혹 그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는 장차 전하께서 단지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만 미워하고 윗사람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는 미워하지 않는다고 여길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이에 홍명하가 다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남구만이 급급히 상소하여 이 일을 맡고 나섰습니다.”
하자, 상은 공을 망녕된 사람이라고 답하였다.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 기어이 자신의 소회를 다 피력하고자 한 것이니, 구태여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진이 관향미를 차용하여 백성을 구휼한 것은 미워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 조서(詔書)를 사칭하고 창고의 곡식을 방출한 자가 있었는데, 만약 오늘날이라면 반드시 용서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젊은 대관(臺官)이 과감하게 아뢴 것은 성명하신 군주께서 좋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해서인데, 성상께서 준엄하게 배척하신다면 천리 밖에서 간언하는 자를 막아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공의 상소를 보다가 “단지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만 미워하고 윗사람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는 미워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에 이르자, 이 부분을 표시하여 칭찬하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만나 보고 싶다.” 하였으며, 판서(判書) 윤이지(尹履之)도 그의 손자를 보내어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공은 연양부원군은 비록 덕망이 있으나 훈귀 대신(勳貴大臣)이므로 끝내 찾아가서 문안하지 않았고, 윤공(尹公)은 80세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쉬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찾아갔다. 공은 성품이 남을 칭찬하거나 당(黨)을 맺어 서로 원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송(兩宋)이 조정을 맡고 있을 때에 온 세상 사람이 몰려갔으나 공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으니, 회천(懷川)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나를 찾아와 만나 보지 않은 자는 남모(南某)와 이만영(李晩榮)이다.”
하였다. 공은 시강원(侍講院)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동춘(同春)이 실로 찬선(贊善)을 전담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서연(書筵)에 출입하면서 깊이 서로 추존하고 허여(許與)하였으며, 공은 또한 동춘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동춘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이백헌(李白軒)이 공이 지은 시문(詩文)을 보기를 요구하였으나 공은 이것으로 남에게 인정받기를 구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여 공손히 사양하였고, 두세 번 강요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후배를 논할 적에 반드시 공을 첫 번째로 꼽곤 하였다.
○ 11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사헌 채유후(蔡裕後)가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여러 번 상의 엄한 전교(傳敎)를 받고 사직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비록 기강이 없으나 채유후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한단 말인가.”
하였다. 12월에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영특한 지혜를 타고나셨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 가운데 누구도 전하의 마음에 차는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신하들을 함부로 대하는 마음이 생기시어 공경하고 예우하는 도리가 부족하십니다. 지난번에 채유후의 사직소(辭職疏)는 대체로 정도에 지나치게 사직을 청한 것일 뿐이지 어찌 기강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까지 하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평소 채유후에게서 공경하고 예우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를 이와 같이 함부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함부로 대하셨다면 또한 어찌 그를 헌관(憲官)의 우두머리 자리에 놓아두실 수가 있으며, 이미 그를 헌관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히셨다면 또 어찌 공경하고 예우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총애하는 신하를 엄격하게 대하는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의 훌륭한 제왕들은 비록 신하들을 언제나 강하게 책려(責勵)하면서도 또한 반드시 한 가닥 염치를 지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스스로 그 의리를 다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시니, 이 때문에 신처럼 어리석고 천한 자도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스스로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기를,
“나는 그대가 진언한 정성을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31세 기해년(1659, 효종10)
1월에 지평에 제수되었다.
2월에 소대(召對)한 자리에서 주강(晝講)과 석강(夕講) 및 소대할 때에 양사(兩司)에 아울러 명하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3월에 군사들을 여러 궁가(宮家)에 나누어 보내는 것을 중지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윤3월에 사서(司書)에 제수되었다가 정언으로 옮기고 이조 홍문록(吏曹弘文錄)에 뽑혔다.
4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하고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으며, 이달에 명을 받고 전남 우도 연해(沿海)의 열세 고을의 암행 어사가 되었다.
5월 4일에 효종대왕이 승하하니, 조정에서는 공에게 일을 마치고 복명할 것을 명하였다.
6월에 공은 강진(康津)과 금성(錦城)에 대해 봉고(封庫)하였다.
7월에 빈전(殯殿)에 복명하고 상에게 서계(書啓)를 올리자, 상이 이조에 내려 용안 현감(龍安縣監)과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파직시키고, 만경 현령(萬頃縣令)과 옥구 현감(沃溝縣監)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으며, 영광 군수(靈光郡守)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게 하였다.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다.
12월에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정랑으로 옮겼으며, 산릉 독보관(山陵讀寶官)이었다 하여 말〔馬〕을 하사받았다.

○ 처음에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즉시 간관에게 명해서 경연에 입시하여 일에 따라 규간(規諫)하게 하였으며, 중종(中宗)은 일정한 때 없이 대관(臺官)들을 매우 자주 접견하였다. 그리고 선조(宣祖)는 때로 정전(正殿)을 피하여 비현각(丕顯閣)에서 개강(開講)하였는데, 지형이 협소하여 지사(知事)와 특진관(特進官)은 모두 들어가지 못하였고 대간(臺諫)만 대신(大臣), 강관(講官)과 함께 들어갔다. 인조 4년(1626)에 이르러 정언 이경석(李景奭)이 대간으로 대궐에 나아간 자가 만약 경연을 열 때를 만났으면 곧바로 들어가 논계(論啓)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이해 2월에 소대할 적에 공이 지평의 신분으로 아뢰기를,
“대간이 군주의 좌우를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옛날 우리 선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규례에는 오직 조강(朝講)에만 양사(兩司)가 입시하도록 되어 있으나 조강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대신(臺臣)들이 군주를 접견할 수 있는 때가 마침내 없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시종관(侍從官)이라고는 하나 군주께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시니, 이 때문에 군신 간에 서로 믿는 아름다움이 없고 서로 막혀 통하지 못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인견하고 소대할 때에 계사(啓辭)를 가지고 입시하는 것으로 말하면 예전부터 진실로 이러한 규례가 있었으나 갑자기 탑전(榻前)에 들어가 황송하여 몸을 굽히고 아뢰다가 성상의 답하는 말씀이 내리면 즉시 물러 나오니, 어떻게 자신의 소회를 차분히 반복해서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주강과 석강 및 소대할 때에 양사의 관원 1명씩을 차례대로 돌아가며 입시하도록 아울러 명하소서.”
하였다. 상이 전례를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자, 공이 아뢰기를,
“대간을 접견하는 것은 본래 폐단이 되는 일이 아니고 또 조종조의 옛 규례가 있으니, 어찌 굳이 근래의 규례를 지키려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한 바가 이와 같으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 3월에 공이 아뢰기를,
“지방의 기병(騎兵)을 서울에서 번(番)을 세우는 것은 본래 숙위(宿衛)하고 순찰하여 비상시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각 관사의 수직(守直)은 각자 그 관사에 딸린 전복(典僕)이 있고, 역군(役軍)을 고용하여 세울 경우에는 따로 보병(步兵)에게 거두는 군포(軍布)가 있으니, 이는 조종조의 좋은 법으로 군사와 백성들이 이 때문에 원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다사다난한 이후로 법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 각 관사의 수직 및 여러 곳의 입역(立役)에 모두 번군(番軍)을 나누어 보내니, 이미 조종조의 본뜻이 아닙니다.
근래에 듣자 하니 여러 궁가(宮家)에는 담장 밖에 모두 군보(軍堡)를 설치하고 군졸을 나누어 보내는데, 궁가 사람들이 모두 이들을 종처럼 부려먹는다 합니다. 궁가 근처에는 간혹 예전부터 이미 성 밑에 군보가 있었는데, 지금 혁파한 뒤에도 여전히 군졸을 정하여 보내서 궁가의 부역에 응하게 하고 있으니, 비단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명분을 참람되게 하고 어지럽히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니, 지금부터 여러 궁가에 나누어 보내는 군사를 모두 감제(減除)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리고 동료들이 거듭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은 작은 일에는 능하면서 중대한 일에는 능하지 못하니, 매우 애석하다.”
하였다. 공이 인혐(引嫌)하여 아뢰기를,
반영(繁纓)을 하고 조회하는 것은 사가(私家)에 군보(軍堡)를 설치한 일에 비하면 작은 문제일 뿐인데도 중니(仲尼)는 이것을 애석해하셨습니다. 지금 이번에 논한 것을 성상께서 만일 옳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하찮은 작은 일이라서 굳이 들을 것조차 없다고 하신다면 또한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하는 일이 불쾌하기 때문에 며칠 동안 일부러 윤허하지 않았던 것인데, ‘작은 일’이라는 말에 격하여 인피(引避)하는 말이 이와 같으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기풍이 크게 무너져서 여러 궁가의 일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만 사대부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지난번 전남도 어사(全南道御史)의 서계(書啓)에 ‘한 사대부가 완도(莞島)에 전장(田莊)을 설치했다.’라고 하였는데도 대간들이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무슨 사리인가.”
하였다. 이날 상이 전교하기를,
“대간들이 말한, 궁가에 정하여 보내는 군사를 지금 이후로 보내지 말라.”
하니, 공이 다시 인혐하여 아뢰기를,
“완도의 일은 이미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으니, 경솔하게 이보다 앞서 논열(論列)하는 것은 실로 우매한 신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 윤3월에 이조 홍문록(吏曹弘文錄)에 뽑히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은 한미한 가문의 출신인데 다만 재주와 식견이 특출함으로 인해 청요직(淸要職) 같은 엄격한 선발에서 항상 명망 있는 자들 중에 으뜸을 차지했다.”
하였다. 뒤에 대관(大官)과 장상(將相)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말하였다.
○ 4월에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병조의 낭관을 엄격하게 선발할 것을 청하자, 공이 홍문관의 부수찬에 임명되어 아직 숙배(肅拜)하지도 않았는데 그날로 옮겨서 병조 정랑이 되었다.
○ 이때에 상이 바야흐로 정신을 다잡아 훌륭한 일을 하였으나 서해에는 바닷물의 색이 붉어지고 동해에는 얼음이 얼었으며 강물이 혹 끊기고 흐르지 않으니, 나라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공이 부교리로서 상소하기를,
“신이 들으니, 제갈량(諸葛亮)이 군주에게 아뢰기를, ‘궁중(宮中)과 승상부(丞相府)는 모두 일체이니, 잘하는 자를 올려 주고 잘못하는 자를 벌주는 데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를 범하거나 또는 충성과 선행을 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형벌과 상을 논하게 함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분명한 다스림을 밝혀야 할 것이요, 편벽되이 두둔해서 궁중과 궁 밖에 법을 다르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군주에게 아뢰기를, ‘옛날 성왕(聖王)들은 모든 음식과 거처, 기용(器用)과 재정, 또 환관과 궁첩에 대한 정사를 모두 해당 관서의 법으로 통제하여 눈 한 번 깜짝이고 숨 한 번 쉬는 시간이라도 털끝만 한 사욕을 숨김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정치가 안에서 밖으로 파급되어 가고 은미한 데에서 환히 드러나는 데 이르기까지 조금의 하자도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유풍(遺風)과 훌륭한 업적이 그대로 남아 후세의 모범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신은 삼가 두 현자의 말씀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삼가 들으니, 근자에 대궐 안에서 죄를 범한 자들을 모두 내수사(內需司)에 맡겨 내관(內官)과 서제(書題)로 하여금 심문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내수사라는 명칭부터 본래 공명정대한 것이 아닙니다. 당초에 이것을 설립한 뜻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재물의 출납을 관장하는 데에 불과하니, 이곳이 어찌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죽이는 장소이겠습니까. 아, 훌륭한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으니, 그렇다면 내수사는 진실로 혁파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혁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은 도리어 사람을 형벌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폐해의 근원이 한번 열려 그 폐해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이후로는 반드시 이로 인하여 점점 끝없이 좋지 않은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내수사에서 사람을 국문(鞫問)하는 규정을 속히 혁파하시어 비록 궁중의 사람이라도 죄를 범한 일이 있으면 모두 법을 처리하는 기관에 맡겨서 법률에 따라 결단하게 하되, 이것을 법조문으로 만드시어 후세에 영원히 남기소서. 그리하여 궁중과 조정이 모두 일체가 되어 털끝만 한 사심도 숨기는 것이 없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내수사의 설치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조정의 신하 중에 혁파할 것을 건의하고 요청한 자가 또한 한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훌륭한 정치를 하시려는 이때에 만일 또 이것을 혁파하지 못하신다면 앞으로도 끝내 혁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에 천하의 재정과 세금을 모두 대영고(大盈庫)에 저장하고 환관에게 이것을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환관들이 이것을 굳게 틀어쥐고 점거하여 건드릴 수가 없었는데, 양염(楊炎)이 머리를 조아리고 그 폐해를 한번 아뢰자 덕종은 당일로 조서를 내려 모두 좌장(左藏)에 귀속시키고 궁중에서 해마다 사용하는 경비를 계산해서 봉입(捧入)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장차 세상에 드문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자 하시는데 그러면서도 아낌없이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좋아하는 것이 도리어 덕종이 한 것만 못하시니, 다른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안으로 마음을 결단하시고 밖으로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이를 일체 혁파해서 재정을 담당한 관서에 모두 맡기소서. 그리하여 궁중의 모든 수용(需用)은 모두 밖에서 진공(進供)하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성인의 사심이 없는 덕을 보여 주시고 한편으로는 수백 년 동안 내려온 끝없는 병폐를 고치소서. 이렇게 한다면 공평하고 분명한 정치를 밝혀서 후세의 모범이 됨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에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나 내수사를 혁파하지는 않았다.
○ 이달에 상이 암행 어사 8명을 나누어 보냈는데, 공은 전남 우도 연해의 함열(咸悅), 용안(龍安), 여산(礪山), 익산(益山), 김제(金堤), 영광(靈光), 만경(萬頃), 옥구(沃溝), 임피(臨陂), 금성(錦城), 강진(康津), 영암(靈巖), 부안(扶安) 등 열세 고을을 암행하였다.
○ 5월 10일에 강진의 남성(南城) 밖을 지날 적에 감영(監營)의 이문(移文)을 받았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4일 오시(午時)에 대전(大殿)이 승하했다.”
하였다. 공은 통곡하고 객사(客舍)에 들어가서 예조의 이문을 받았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어사들의 공무 수행에 대해 대신에게 여쭈었는데, ‘반드시 즉시 올라오라.’라고 말했다.”
하였다. 이에 공이 마침내 급히 달려가면서 중도에서 성복(成服)하려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고 이르기를,
“《오례의(五禮儀)》에 ‘밖에 있는 사신(使臣)은 부고를 들은 지 6일째 되는 날에 성복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조정에 돌아갈 수 없는 자를 이른 것이다. 지금 나는 일을 끝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올라가므로 조정에 돌아가 성복하겠다.”
하였다. 공주(公州)에 이르러 이조의 이문을 받았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장령(掌令) 허목(許穆)이 아뢰기를, ‘무릇 사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국상을 만난 자는 반드시 일을 마친 뒤에 빈전(殯殿)에 복명하는 것이 예(禮)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도의 암행하는 신하가 미처 일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예조에서 이를 살피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오라는 관문(關文)을 갑자기 전하였습니다. 당초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어사를 보내어 염찰하신 뜻을 그대로 버려두고 거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왕의 명령을 풀숲에 내버리는 것이니, 어찌 심히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도의 어사 중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는 그대로 일을 끝마치고 복명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하였다. 19일에 공은 공주의 객사에 이르러 성복하였다.
○ 6월에 공이 해남(海南)에 도착하여 들으니, 전관(前官)이 가렴주구한 것이 끝이 없으며, 새로 부임해 온 사또가 진휼(賑恤)한다는 명목으로 부유한 백성들에게 제멋대로 사채(私債)를 요구하여 백성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하였으며,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관청에 남아도는 저축이 있는데 창고를 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공이 통영(統營)의 환자곡을 조사해 보니, 회외미(會外米)로 변란에 대비하여 창고에 남겨 둔 것이 180여 석이었다. 마침내 이 가운데 150석을 꺼내어 신관 사또로 하여금 굶주린 백성들에게 백급(白給)하게 하고 이어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었으나 해남은 열세 고을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여 죄줄 것을 청하지 못하였다. 강진(康津)에 도착하여 현감(縣監) 김명열(金命說)이 제멋대로 세금을 거두어 자신의 배를 채웠다 하여 봉고파직하고 죄줄 것을 청하였으며, 금성(錦城)에 도착하여 현감 심지명(沈之溟)이 백성들의 부역을 제멋대로 바꾸었으며 명성을 얻고자 백성들에게서 많이 취했다 하여 봉고파직하고 죄줄 것을 청하였다.
○ 7월 11일에 공이 빈전(殯殿)에 복명하고 상에게 아뢰기를,
“용안 현감 김세필(金世泌)은 감영에서 지급한 무명을 나누어 주되 환봉(還捧)의 어려움을 미리 염려하여 생활 터전이 있는 사람에게 1인당 혹 심지어 여러 동(同)을 받게까지 하면서도 곤궁한 사람은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영암 군수 전명룡(全命龍)은 대동미(大同米)의 남은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 관리와 양반 등은 5, 6석까지 받게 하면서도 형편이 더욱 나쁜 굶주리는 백성들은 혹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만경 현령(萬頃縣令) 김여량(金汝亮)은 청근(淸謹)함이 승려와 같으며, 이웃 고을 사람들도 이르기를, ‘피해를 입은 참혹한 실상은 만경이 제일이지만 태수의 어짊은 만경이 으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구 현감(沃溝縣監) 이정(李晶)은 상사(上司)에서 지급해 준 것 이외에 별도로 곡식을 마련하여 구휼한 것이 거의 100여 석에 이르렀고, 영광 군수 홍수(洪燧)는 구휼할 때에 저축된 곡식이 다 바닥났으며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했습니다.”
하였다. 이달에 이조에서 복주(覆奏)하니, 용안 현감 김세필과 영암 군수 전명룡은 파면하고 만경 현령 김여량과 옥구 현감 이정에게는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으며, 영광 군수 홍수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 공이 상계(上啓)할 때에 또 아뢰기를,
“부안, 만경, 옥구, 임피, 용안, 함열, 여산, 김제, 익산 등 아홉 고을은 대부분 물가에 임해 있어서 지세가 낮고 평평하여 물이 한 번 불어나면 빠지지 않으니, 참혹한 피해가 다른 고을보다 심합니다. 지금 백성들의 힘을 다소라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재해의 정도에 따라 급재(給災)하고 환자곡의 봉입을 줄여 주며 감영 소유의 무명을 탕감해 주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이 만경 현령의 말을 들어 보니, 금년 봄에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이르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을 구휼해 주는 것은 우리들이 굶주리는 것을 민망히 여겨서 반드시 살려 주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선 밭을 갈고 김을 매도록 구제하여 추수한 뒤에 징수하려고 해서인가?’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이 가엾고 애처로우니 가장 먼저 체념(體念)해야 할 일입니다. 무릇 조정의 호령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항상 믿지 않는 것입니다. 금년 봄에 백급(白給)으로 준 곡식이 있었으나 백성 중에 죽을 지경에 이르지 않은 자는 굶주림을 참고 받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민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근심하고 탄식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릇 함께 고생하는 것은 좋아하고 혼자만 편안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정이 모두 그러하니, 옛사람이 이 때문에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동미를 충청도에서는 10두를 거두고 전남도(全南道)에서는 13두를 거두었으니, 조정에서 앞으로 세금을 줄이고 늘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명이 있었으나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13두가 전날의 부역보다 무겁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다만 똑같은 한 나라의 대동법으로 전남도에서만 3두를 더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다시 헤아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 효종(孝宗)이 즉위했을 때에 우상(右相)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대동법은 공역(公役)을 균등히 하고 백성들에게 편의를 주는 것으로, 비록 여러 도에 두루 시행하지는 못했으나 경기와 관동(關東) 지방은 이미 시행하여 효과를 보았습니다. 만약 또다시 이것을 양호(兩湖)에 시행한다면 나라에 유익한 방법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3년 뒤에 이것을 호서(湖西)에 시행하고 지난해에 또 호남(湖南)에 시행하였는데, 호남의 감사(監司) 권우(權堣)가 아뢰기를,
“쌀을 거두는 것이 늘어나면서 민정이 불편해합니다.”
하자, 김육이 이르기를,
“13두는 영구히 정한 것이 아니다. 1년의 비용을 살펴보아서 10두 외에 3두를 2두로 줄이고 2두를 1두로 줄이는 것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대동미의 고르지 못한 실정에 대해 말하였는데, 3년 뒤 가을에 마침내 일체 12두를 정수(定數)로 삼았다.
○ 이번 암행 어사가 출발할 때에 효종이 봉서(封書)를 내려 이르기를,
“해방(海防)이 지극히 허술하다 하니, 각별히 살피라.”
하였는데, 공이 복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계하였다.
“각 포구의 주사(舟師)에 소속된 정병(正兵)은 으레 대부분 육지에 있는 속오군(束伍軍)의 군역(軍役)을 겸하니, 군역을 이중으로 부담하는 것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이들이 주사로 입번(入番)할 때에는 육지에 있는 속오군의 대오는 곧 비게 됩니다. 또 주사 중에 새로 뽑은 무학군(武學軍)과 충장위(忠壯衛) 등 여러 색목(色目)에 소속된 자들은 모두 육지에 있는 속오군의 대오에 속해 있는 사람인데, 이들도 각 포구에 모두 나누어 보내어 한 달간 번을 서게 하니, 공사 간의 이해로 헤아려 보건대 모두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이러한 부류를 모두 조사해서 전속(專屬)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그 액수(額數)가 많아서 대신할 자를 구할 수 없는 점을 어렵게 여깁니다만 한 사람이 두 군데에 이름을 등재하고 있으니, 성책(成冊)을 살펴보면 결원이 없는 듯하지만 갑자기 두 곳에 다 쓰려 할 때에는 한 사람을 나누어 두 사람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다만 목전의 눈가림을 위한 계책일 뿐이고 난리에 임하여 낭패를 당할 염려는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후일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싸워야 할 사람들이니, 평소에 특별히 더 우대하고 돌봐야 합니다. 어찌 두 군데의 군역에 응하게 하여 살을 깎아 내고 골수를 빼냄으로써 임금을 친애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을 먼저 끊어 버리게 한단 말입니까. 비록 결원이 있어도 대신할 사람이 없어 액수가 많이 줄어든다 해도 한 사람을 두 군데에 소속시키는 폐단은 시급히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각 포구의 물력(物力)이 매우 잔폐한 상황입니다. 국가에서 지급해 준 것은 차경전(借耕田) 4, 5섬지기나 6, 7섬지기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병작(幷作)을 주기 때문에 추수가 많을 경우에는 3, 4십 석이고 적을 경우에는 2, 3십 석이며, 어떤 경우에는 원래 차경전이 없는 포구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 매월 입방(入防)할 때에 요군(料軍)과 지군(紙軍)을 각각 1명씩 지급해 주어서 그 군포(軍布)를 거두어 이로써 요미(料米)와 지지(紙地)의 값을 마련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가지고 관청의 일을 잘 거행하고 군기(軍器)를 정돈하기를 바란다면 진실로 밀가루 없이 수제비를 만드는 격입니다. 그런데도 혹 이것을 마련한 경우 그 물력의 출처를 따지면 모두 군포에서 나온 것인데, 조정에서는 혹 별도로 준비했다 하여 이들에게 상을 내리고 혹 점검할 때에 부족하다 하여 벌을 내리고 있으니, 이는 실로 서로 모순되는 일입니다. 또 차경전을 본읍(本邑)에서 모두 수세(收稅)하고 있기 때문에 전삼세(田三稅)와 대동미(大同米)를 각 포구에서 모두 납부하는 셈입니다.
신이 들으니 도감(都監)의 둔전(屯田)은 온 나라가 모두 세금을 면제받고, 속오군 또한 50부(負)를 급복(給復)하도록 허락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각 포구의 차경전은 결수(結數)를 정하고 부족한 것은 혹 관둔전(官屯田)을 더 주되 모두 세금을 면제하여 공적(公的) 비용을 충분히 마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군포를 사사로이 쓰는 폐단을 또한 일절 금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공은 또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지금 조정에서 과외(科外)로 징수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 또한 조정의 덕(德)을 베푸는 뜻을 잘 알고 있으나 그 가운데 홀로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바로 시노비(寺奴婢)입니다. 모든 시노비의 신공(身貢)을 연해(沿海)에서는 모두 쌀로 환산하여, 사내종은 1구(口)에 공목(貢木)이 2필인데 쌀 20두로 환산하고, 계집종은 1구에 공목이 1필 반인데 쌀 15두로 환산하며, 또 저화(楮貨), 작지가(作紙價), 역가(役價), 강창가(江倉價) 등도 쌀로 환산하는데, 지난해 조정에서 특별히 배려하여 공목 1필을 모두 쌀 6두로 환산하고 저화 또한 줄여 주니, 저들이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호조에서 사내종과 계집종을 막론하고 각각 후목(後木) 반필을 쌀 1말 2되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니, 이는 전에 없던 것으로서 별도로 생긴 명목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모두 이르기를, ‘감히 저화를 영원히 탕감해 주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만약 후목을 바치지 않게 해 준다면 참으로 큰 다행이겠다.’라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헤아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또 지금 비록 흉년 때문에 공목 1필을 쌀 6두로 환산하여 줄여서 정하였으나 평상시에는 1필에 10두이거나 10여 두를 넘기도 합니다. 조정에서 대동미를 무명으로 환산할 때에는 5두에 1필인데, 노비의 공목을 쌀로 환산할 때에는 1필에 10두이니 수량의 다과에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그리하여 매양 많은 이익이 국가로 돌아가게 하고 적은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니, 위를 덜어 내어 아래에 보태 주는 정사에 비한다면 어찌 거리가 멀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노비의 공목을 쌀로 환산하는 것을, 만약 대동미를 무명으로 환산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 매양 2필에 10두로 정한다면 저들이 큰 혜택을 입어 다시 생명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숨기고 누락시켰던 자들이 자수해 오고 도망갔던 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니, 국가에도 반드시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서 조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우도(右道)의 봄가을 수조(水操)를 예전에는 매년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서 시행하였는데, 기묘년(1639, 인조17)에 유림(柳琳)이 통제사(統制使)로 있을 때 비로소 통영(統營)에서 합동 조련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임피(臨陂) 이하의 각 고을과 위 지방에 있는 여섯 포구는 2월 보름 이후에 배를 띄우고 수영(水營) 이하의 각 고을과 아래 지방에 있는 일곱 포구는 3월 초에 배를 띄워 서로 만나 합동 조련한 뒤에 돌아오는 노정이 4월 이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두세 달 왕래하는 사이에 양식을 싸 가야 하고 농사를 폐하게 되며, 천리 풍파 속에 훈련 기간은 한계가 있고 배가 표류하다가 침몰할 위험도 매우 우려할 만합니다. 그리고 수영과 각 포구에는 비록 입번(立番)하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이 있으나 모두 배 타고 노젓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방패선(防牌船) 등의 경우에는 원래 격군(格軍)을 정하여 보내는 일이 없고, 모두 토졸(土卒)을 동원하되 대가(代價)를 주든 주지 않든 모두 윤격(閏格)이라 칭하고 강제로 배정하여 배에 타게 합니다. 그리하여 합동 조련을 할 때마다 영진(營鎭)의 가내(家內) 남정네들이 토졸이 되어 전부 배를 타서 봄과 여름을 헛되이 보냄으로써 해마다 농사를 망치고 있습니다.
대체로 수사(水使) 또한 대장(大將)이니, 소속 병사들을 거느리고 앞바다에서 조련하는 것이 미진함이 없을 듯하고, 만일 통제사가 주장(主將)이므로 병기 상태를 직접 검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수사의 임기가 24개월이므로 격년(隔年)으로 합동 조련해도 통제사가 재임 중에 한 번 검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와 백성들이 겪는 폐해가 제거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성(錦城)은 경진년(1640, 인조18)부터 염목(鹽木) 60동(同)을 마련하여 호조에 바치고 있는데, 당초의 사목(事目)은 각처의 염분(鹽盆)에 대해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을 막론하고 모두 중지하고 혁파하여 모두 염철(鹽鐵)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한 후 시일이 오래되자 점점 침탈당하여, 본현(本縣)의 염분 도합 34좌(坐) 중에 7좌는 내수사(內需司)에 속하고 4좌는 정명공주방(貞明公主房)에 속하고 6좌는 정혜옹주방(貞惠翁主房)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다만 17좌뿐입니다. 염목을 마련하여 바칠 때에 본현에서 백방으로 구해 장만하기 때문에 민간에 폐해가 미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갑신년(1644)에 본도(本道)에서 해조에 보고하여 염목 25동을 감면받았으나 그 나머지 35동을 마련하여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금년 봄에 영광(靈光)의 백성들이 감사에게 하소연하는 글을 올려 이르기를, ‘영광과 금성은 토지와 인민의 많고 적음이 현격하게 다른데, 금성은 염목이 단지 35동이고 영광은 60동에 이르니, 감사가 해조에 보고하여 금성에서 지난번에 감면받았던 염목을 다시 그대로 바치도록 함으로써 영광 백성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대체로 염목이 나오는 것은 염분에 달려 있고, 인민과 토지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영광은 고을이 비록 작지만 염분이 74개인데 폐지된 것이 7개이고, 금성은 고을이 비록 크지만 염분이 34개인데 침탈당한 것이 17개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토지의 크고 작음을 일컬으면서 염분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음으로써 이미 면제받았던 부세를 금성에 다시 더하였으니, 이는 일의 실정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금년에 사복시(司僕寺)에서 본도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이르기를, ‘금성의 별장(別將)이 관장하고 있는 여러 섬의 염분과 어살을 본관(本官)에서 절대로 침해하여 징수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섬에 있는 염분 15좌가 장차 모두 별장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고 본현에 속한 것은 2좌뿐이니, 2좌의 염분을 가지고 60동의 염목을 내게 하는 것은 일이 온당치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서 변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처의 목장(牧場)에 모두 감목관(監牧官)이 있으나 근래 사복시에서 별장을 정하여 목장 근처에 보내어 둔전(屯田)과 소금을 굽는 일, 어물을 채취하는 등에 관한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목장은 본래 말을 먹이기 위한 것인데 지금은 말이 없는 곳도 목장이라고 칭하고는 곳곳마다 둔전을 설치해서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많이 점유하고 있으니, 이른바 별장을 사복시로 하여금 혁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 공이 이번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을 때 인물을 물색해 보니, 금성(錦城) 사람으로 전(前) 세마(洗馬) 김만영(金萬英)과 담양(潭陽) 유학 유진석(柳震錫)이 있었다. 유진석은 고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후손이다. 그러나 봉서(封書)에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다. 2년 뒤 봄에 공이 혜성측후관(彗星測候官)에 임명되었을 때 상소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아뢰자, 상이 재주에 따라 전형하여 서용하라고 명하였으나 승정원에서 이것을 이조에 내리지 않았다. 그다음 해 봄에 공이 영남 진휼 어사(嶺南賑恤御史)로서 겸하여 인재를 물색하라는 명에 따라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금 조정이 대체로 성실성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이 천거한 자가 만약 거짓되고 망녕되다면 지금 다시 천거하더라도 실로 일에는 유익함이 없고 단지 먼 지방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혹여라도 그렇지 않다면 지난번에 천거했던 자를 오히려 등용하여 시험해 볼 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특별히 승정원에 명하시어 신이 지난번에 올린 상소문을 다시 가져다 유사에게 내리소서.”
하였다. 이에 이조에서 그 인재를 거두어 쓸 것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32세 경자년(1660, 현종1)
현종대왕(顯宗大王) 원년 1월에 금성(金城) 부군(府君)을 진천(鎭川)의 임소에서 모셨다. 이달에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3월에 문신의 삭시사(朔試射)에 나아가지 아니하여 파직당하였다.
11월에 다시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뒤이어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12월에 명을 받들고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시호를 광주(廣州)에 내려 주었다.

33세 신축년(1661, 현종2)
1월에 혜성측후관(彗星測候官)에 차임되었다.
2월에 북학 교수(北學敎授)를 겸하였다.
5월에 말미를 얻어 진천에 근친하러 갔다.
6월에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고 교리에 제수되었다.
8월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었다.
9월에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말미를 얻어 진천에 근친하러 갔다.
12월에 헌납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

○ 1월에 혜성이 나타나자 공을 측후관으로 차임하니, 공이 마침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천문학에는 귀머거리나 봉사와 다름이 없는데 마침내 측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조정에서 실제로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신이 천문학에 밝아서 옛날 감석(甘石)과 같다 하더라도 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광망되고 어리석은 신의 계책을 아뢰어, 마음을 다하여 공경히 닦고 반성하시는 전하를 만분의 일이나마 돕는 것이 나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행여 다소라도 그 책임에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가장 친애하고 신임하시며 중외에서 평소 기대를 거는 자는 실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두 사람보다 더한 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빈번하게 부르심이 이미 간절하고 지극하셨습니다만, 이처럼 재앙을 당한 때에는 다시 도움을 청하는 뜻과 자신을 겸허히 하는 정성으로 기필코 조정에 나올 때까지 계속하여 부르셔야 할 것입니다. 전 참판 박장원(朴長遠)은 영화와 이익에 관심이 없어 대신(大臣)이 재상감으로 천거하였고 선왕조에서도 특별히 장려하여 등용할 뜻을 품으셨으나 근래 하찮은 일에 걸려서 오랫동안 물러나 등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의논하는 자들이 애석해하는 바입니다. 청풍 부사(淸風府使) 유경창(柳慶昌)은 청렴과 고행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재신(宰臣)들이 선왕조에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끝내 조정에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오늘날 더욱 먼저 거두어 써서 표창하는 뜻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임유후(任有後)는 훌륭한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고, 또 주군(州郡)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아 훌륭한 업적을 드러냈으나 노쇠하여 장차 죽게 되었는데도 끝내 외직에 버려져 있으니, 국가에서 인재를 장려하고 선비를 아끼는 도리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에 홍수가 범람하여 도성 문까지 밀려드는 재앙이 생기자, 구양수(歐陽脩)는 포증(包拯), 장괴(張瓌), 여공저(呂公著) 등을 등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근본을 모색한 훌륭한 의논이라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 어리석은 신이 구구히 바라는 뜻입니다.”
하였다.
○ 이때 상(上)이 도성 안에 있는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두 비구니(比丘尼) 사찰의 비구니가 궁인(宮人)들과 서로 내통하는 것을 미워하여 승려와 비구니들을 도태하여 환속시키라고 특별히 명하였는데, 대신과 옥당(玉堂)이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고 아뢰어 마침내 먼저 두 비구니 사찰을 철거하였다. 비구니 가운데 나이가 젊은 자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내보내게 한 다음 사찰의 목재를 봉은사(奉恩寺) 승려에게 주었다. 우참찬 송준길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국학(國學)에 오랫동안 북학(北學)이 없으니, 비구니 사찰의 목재로 북학을 설립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2월에 공은 북학 교수를 겸하였다. 이때 봉은사의 승려가 이미 비구니 사찰의 목재를 철거해 가서 오직 주춧돌과 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공은 약간의 창호(窓戶)와 판자 등을 사찰의 승려들에게서 되돌려 받고, 호조에 공문을 보내어 감역(監役)을 정하여 파견해서 관사의 규모를 갖출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네댓 번 회보(回報)한 뒤에야 비로소 감역을 정하여 보냈다. 그리고 병조에서는 또 말하기를,
“북학을 설립하는 것이 비록 성상의 특별하신 분부에서 나왔으나 북학의 수리(修理)는 본래 계하(啓下)받은 공사(公事)가 아니니, 사람을 부리는 값으로 주는 포목을 내줄 수 없다.”
하여 부득이 중간에 그 역사를 중지하고 말았다. 공은 또다시 예조에 보고하여 북학을 수리하는 일을 계하받기를 청하여 봄부터 여름을 거쳐 윤7월에 이르도록 예닐곱 차례 보고하였는데, 그제야 예조에서 비로소 예전에 없던 흉년 때문에 결코 이 일을 의논할 수 없다는 뜻을 글로 써서 보내왔다. 북학에 이미 담장도 없고 벽도 없으므로 공공연히 도둑질이 만연하여 재목과 기와가 날로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관리가 숙직 때 기록하는 생기(省記)에도 매번 ‘공(空)’ 자를 써넣었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영남 진휼 어사로 출발하기에 앞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당초에 조정에서 만약 먼저 유사에게 명하여 학궁(學宮)을 설립한 뒤에 관원을 두어 직책을 맡게 하였더라면 사리가 저절로 순하였을 터인데, 학궁이 완공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필요 없는 관원을 두는 바람에 마침내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낼 때마다 번번이 한 철 혹은 몇 달씩을 끌다가 끝내 큰 흉년을 당하여 그대로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또 금년 가을에 만약 큰 풍년이 들지 않는다면 2, 3년 안에는 결코 수리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후일에 다시 수리한다 하더라도 집은 반드시 모두 썩고 기와와 돌은 반드시 모두 흩어져 잃고 말 것이니, 그때에 이곳의 관리가 되었던 자가 어찌 감히 스스로 자기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난해 가을에 외람되이 옥당의 관리에 임용되었을 때 인대(引對)하는 여가에 이 일을 아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성상의 체후가 편치 않으시어 문자로 번거롭게 아뢰는 것도 심히 외람되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번 성균관과 예조에 보고하면서 본학의 관원을 지금 우선 입계(入啓)하여 감하(減下)하고 본학에서 떼어 받은 재목과 기와를 지금은 우선 호조로 돌려보냈다가 풍년이 들면 다시 의논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성균관과 예조에서는 모두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또 명을 받고 외지로 나가게 되어 돌아올 기약이 아득하니, 신의 작은 정성을 성상께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공연히 관원을 두어 쓸데없이 허비하고 일을 그르치는 걱정이 없게 하시기를 참으로 바라 마지않습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해 또 깊이 서글퍼하는 바가 있습니다. 비구니의 사찰을 혁파하고 학궁을 새로 설립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보기 드문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유사로 있는 자들이 일을 미루면서 하루하루 날짜만 보내다가 오늘에 와서는 과연 이처럼 학궁의 수리를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는데, 지난해 봄에 어째서 한 구역의 집을 보수하여 군상(君上)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지 못했단 말입니까. 서울에 있는 관원이 성상께서 특별히 하교하신 일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데도 시일을 지체하여 결국에는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데, 하물며 저 먼 지방의 미천한 백성이 서울의 아문에 도움을 요청할 경우 어찌 한 철이나 한 달 만에 그가 원하는 대로 그 일이 모두 마감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외람되이 성상의 총애를 입어서 조석으로 출입하여 말씀을 다 아뢸 수 있는 위치인데도 오히려 한번 조용히 앞자리에 나아가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여러 관리와 일반 신료들이 무슨 방법으로 각자 성상께 자신의 소회를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을 미루어 보면 또한 지금의 국사를 돌이켜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성찰하소서.”
하였다. 상은 이 상소문을 이조에 내려 마침내 사찰의 재목과 기와를 우선 호조에 돌려보내 학관(學官)을 감하하였다. 이해 가을에 송 참찬(宋參贊)이 초야에 있었는데, 상소하여 아뢰기를,
“남구만의 상소에 곡절을 자세히 말하였는데, 원근에서는 이 일을 전하면서 웃음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오늘날의 정령(政令)이 대부분 이와 같다는 것을 아신다면 이 일을 통해 후일을 경계하는 데에 도움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 해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사찰의 재목을 옮겨 와 비천당(丕闡堂)과 벽입재(闢入齋)를 만들었다.
○ 9월에 공이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이보다 앞서 정언(正言) 이지익(李之翼)이 ‘중신(重臣) 이일상(李一相)이 곤수(閫帥)의 미곡을 실은 배를 받은 것’을 조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인심이 복종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전형(銓衡)하는 자리에서 발론(發論)하여 이지익을 지평에 첫 번째로 의망(擬望)하였는데, 이조 참판 김수항(金壽恒)으로서는 이를 막고자 하니 말하기가 어렵고 침묵하자니 비방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잠깐 장막 밖으로 나가 쪽지에 글을 써서 공에게 전달하기를,
“지평의 수망(首望)을 말망(末望)으로 바꾸면 어떠한가?”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이 사람이 의망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만이지만 의망을 해 놓고 어찌 아무런 이유 없이 다시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참판이 자리로 들어와 다시 말이 없었다. 이지익이 지평에 제수되고 난 뒤에 예전에 거론했던 이일상의 일을 대대적으로 말하니, 당시의 공론이 전조(銓曹)의 잘못된 인사 탓으로 돌렸다. 이조 참판 김수항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이지익이 외직에 보임되었다가 이제 막 돌아왔으니 곧바로 의망하는 것은 너무 급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낭관이 끝내 기어이 의망하니, 진실로 용렬한 신으로서는 굳이 고집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드러내 놓고 공을 배척하니, 공이 이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였다.
○ 10월에 공은 말미를 얻어 진천(鎭川)에 근친하러 갔는데, 12월에 기한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하여 개차(改差)되었다가 다음 해 여름에 다시 전조의 자리에 들어갔다. 이때 장선징(張善澂)이 부사(府使)로 있다가 급제하자,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그를 호명하며 지평에 첫 번째로 의망하라고 하였다. 공이 붓을 멈추고 말하기를,
“당하관을 통청(通淸)하는 것은 권한이 낭관에게 있는데 저에게 먼저 묻지 않고 곧바로 거명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하였다. 홍공(洪公)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계곡(谿谷)의 아들인 정지(靜之)의 벼슬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낭관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낭관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홍공이 끝내 강요하지 못하였다.

34세 임인년(1662, 현종3)
1월에 경상도 진휼 어사에 뽑혔는데, 상소하여 지나는 길에 진천(鎭川)에 들러서 병든 어머니를 문안할 것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2월에 공이 하직인사를 할 때에 상이 인견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백성을 구제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4월에 공이 장계를 올려 진휼하는 일의 타당한 방안을 아뢰니, 상은 장계를 비변사에 내리고 아울러 감사에게 이문을 보냈다. 이달 공은 경상도의 좌도와 우도를 두루 거쳐 거창 현감(居昌縣監)을 파직하고 성주(星州)를 도회(都會)로 정하여 여러 고을에 보내는 문서를 감회(勘會)하였다. 이달에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5월에 헌납으로 옮겼다.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파직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부모에게 문안할 것을 상소로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
6월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으며, 동학 교수(東學敎授)를 겸하였다. 공은 이달에 복명하고 서계(書啓)를 올려서 상주(尙州) 등 열두 고을의 수령을 표창하고 예천(醴泉) 등 여섯 고을의 수령을 폄하하였는데, 상이 이 일을 이조에 내려서 열두 고을의 수령은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고 여섯 고을의 수령은 파직하였다. 또한 도내의 어진 인재인 하홍도(河弘度), 조임도(趙任道) 등 23인을 천거하니, 상은 두 사람에게 미곡(米穀)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7월에 홍문관부응교 겸 교서관교리에 제수되었다.
8월에 감시(監試) 초시(初試) 일소 시관(一所試官)에 차임되었다.
9월에 말미를 얻어 진천에 근친하러 갔다.
10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정시(庭試) 대독관(對讀官)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장인인 지평 정공(鄭公)이 별세하였다.

○ 1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 행 호군(行護軍)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삼남(三南) 지방의 기근이 날로 심해지니, 진휼 어사를 일찍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엄밀하게 선발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예전에 보냈던 암행 어사의 서계는 부적당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에서 묘당과 의논하여 엄밀하게 선발해서 영남과 호남에 먼저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공이 경상도 진휼 어사가 되었다.
○ 2월 3일에 하직 인사를 할 때 상이 두 어사를 인견하였는데,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말하고 싶은 일을 일일이 계달(啓達)하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진휼청(賑恤廳)에서 계하(啓下)받은 사목(事目)이 자못 자세하나 외방의 형세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비록 사목 가운데 기록된 일이 아니더라도 편의상 백성을 구휼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행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의 형편상 약간 늦추어도 되는 것은 즉시 계달하고, 만일 불에 타는 자와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는 것처럼 급한 일은 편의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앞서 중종 임인년(1542, 중종37) 봄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구황적간 어사(救荒摘奸御史)로 진천(鎭川)에 이르러서 시를 지었는데, 그 네 구절에,
아픈 백성들은 단비가 온 뒤에 소생하고 / 民病欲蘇時雨後
봄빛은 나그네 시름 속에 다 보내노라 / 春光都盡客愁邊
황정은 참으로 어진 수령이 있어야 하니 / 荒政儘由賢守宰
삼 년 묵은 약쑥 함께 버리지 마오 / 莫令幷棄艾三年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진천을 지나며 문안할 적에 객사의 판각(板刻)을 보고 감동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는 예로부터 잘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러한 중임을 담당하니, 선현이 시행하신 것은 과연 어떠하였는지 모르겠다. 퇴계(退溪)께서 당시에 시행하신 것을 지금 고증할 수가 없으니, 공경히 차운(次韻)하여 세월이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같음을 표할 뿐이다.”
하였다.
○ 이때 진휼청에서 정한 사목에 이르기를,
“각 고을의 관수(官需)에 사용하고 남은 곡식과 통영(統營)의 곡식, 함경도, 강원도의 곡식을 재해가 특별히 심한 곳에 나누어 보내어 환자곡으로 나누어 지급하되, 요컨대 수량의 많고 적음을 적절히 헤아려 공평하게 하라.”
하였다.
○ 2월에 공이 고성(固城)에 이르러서 성내(城內) 통영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 4600여 석을 인근 연해의 고성, 진해(鎭海), 웅천(熊川), 김해(金海), 창원(昌原), 함안(咸安), 칠원(漆原), 양산(梁山) 등 여덟 고을에 나누어 주되, 재해의 경중과 인민의 다과에 따라 모곡(耗穀)을 제하고 환자를 갚게 하였다. 공은 이날 통영에 이르러 통영에 있는 조곡(租穀) 700석을 양산의 감동창(甘同倉)에 보내어 건량(乾糧)과 죽미(粥米)를 재해가 더욱 심한 연로의 선산(善山), 인동(仁同), 대구(大丘), 창녕(昌寧), 현풍(玄風), 영산(靈山) 등 여섯 고을에 백급(白給)하게 하였다. 며칠 있다가 사천(泗川)에 이르러서 감사(監司)에게 공문을 보내 산군(山郡)의 곡식을 인근 우도(右道)의 재해가 심한 고을에 나누어 주고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운반해 온 쌀을 좌도(左道)에 나누어 주며, 그 나머지를 우도에까지 나누어 주게 하였다.
○ 3월에 공은 이 일을 모두 장계로 아뢰었다. 이때에 정언 이무(李堥)가 아뢰기를,
“더욱 심한 재해를 입어 곤궁한 자들에게는 여러 고을에서 환자를 되돌려 받기 어려울까 염려하여 애당초 나누어 지급할 때에 초입(抄入)하지 않았습니다. 양남(兩南)의 회부곡(會付穀)의 경우는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우나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운반해 온 미곡의 경우는 결코 환자를 갚게 할 수가 없으니, 모두 백급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 상소문을 비변사에 내리니,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수년 동안 계속하여 거듭 기근이 드니, 환난을 염려하는 방도를 생각할 때 국가의 저축을 일시에 모두 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장차 죽게 될 백성들도 곡식을 얻으면 살 수가 있으니 가을 추수 뒤에 환자의 상환이 어려울 것인가 쉬울 것인가를 곡식을 나누어 줄 때에 따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만, 더욱 심한 재해를 입은 부류를 혹 초입하지 않았다면 과연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사와 도신(道臣)에게 거듭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4월에 공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도내(道內) 여러 고을의 경우 좌도와 우도와의 거리가 매우 먼 관계로 곡물을 나누어 줄 때에 각각 가까운 곳을 따라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북쪽에서 운반해 온 쌀을 좌도에는 전부 주고 우도에는 혹은 나누어 주기도 하고 혹은 아예 나누어 주지 않기도 하였는데, 만일 백급하게 한다면 그 혜택을 골고루 입을 수 없게 될 것이니, 원래 행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본도의 원회곡과 각 아문(衙門)과 각 영(營)의 곡식은 흉년이 들어 거둘 수가 없으므로 현재 남아 있는 수가 적습니다. 장부를 살펴보고 문적을 고찰하면서 거두어들일 명목을 물어보면 지극히 작은 고을이라도 거의 1만 석이 넘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민간에서 비록 풍년을 만나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것은 모두 환자곡의 수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약간 백급한다 하더라도 하늘의 은택을 입어 추수할 때에 다소 풍년이 들어서 바쳐야 할 것을 바치고 나면 저축이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염려할 것이 아니고 혹여라도 또다시 흉년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문제인데, 이럴 경우 비록 문적에 나와 있는 환자곡의 수량이 다시 곱절이 된다 해도 결코 국가의 재정에는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곡물은 장차 가을에 추수한 뒤에 반드시 도로 바쳐야 하므로 곤궁한 백성들의 경우 반드시 더욱 심히 궁핍한 자에게 먼저 주게 하니, 이는 결코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신이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물정(物情)을 물어보니, 초봄에 굶주린 백성들을 초출(抄出)할 때에 조정의 분부에 따라 소와 말과 가마솥과 전택(田宅)이 있는 자는 모두 초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3, 4월이 되자 그들의 굶주림과 곤궁함이 초입(抄入)한 자에 비하여 도리어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추가로 넣는 것을 허락하자니 그 수효가 끝이 없고, 전결(田結)에 따라 환자곡을 나누어주자니 소유한 결부(結負)가 없어서 전혀 곡식을 얻지 못하거나 결부의 수가 적어서 얻는 것이 몇 되와 몇 홉에 지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여러 고을에 분부하여 이와 같은 무리들을 별도로 초출해서 식구를 계산하여 환자곡을 나누어 주되 한결같이 기민(飢民)의 예(例)대로 시행하여 누락될 염려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백급하도록 허락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 이에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재해가 더욱 심해서 환자곡을 바치기 어려운 자는 모두 구휼한 뒤에 개록(開錄)하여 서면으로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 경우는 마땅히 조처하는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여러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의 숫자와 재해를 입은 정도에 대해 이미 그 대략을 알았으니, 만약 도회관(都會官)의 문서를 마감할 때에 기민에게 지급할 죽미(粥米)와 건량(乾糧)의 수량을 미리 계산하여 회감(會減)하고 다시 재해를 입은 실태의 경중을 헤아려서 여러 고을에 각각 1, 2백 석이나 혹은 2, 3백 석을 출연(出捐)하여 백급한다면 전염병에 걸려서 막사에 나와 있는 자와 더욱 심하게 가난에 쪼들리고 잔약한 자의 환자곡을 탕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조정에서는 곡식을 출연할 때에 허실을 서로 속이는 폐단이 없을 수 있고, 여러 고을에서는 세금을 낼 사람이나 빚을 진 사람이 죽거나 달아나서 세금을 받을 길이 없는 경우 제멋대로 징수할 우려가 없으며, 굶주린 백성들은 겨우 죽음을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환자곡을 갚으라는 독촉으로 곤란을 겪는 일이 없을 것이고, 공곡(公穀)의 원수(元數)도 이 때문에 크게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각 영(營)의 회록(會錄)하고 남은 곡물도 백급으로 쓰기에 미진한 것이 있으니, 만약 이것을 옮겨다가 회감하게 하면 더욱 편리하고 합당할 듯합니다. 이번에 아뢰는 바는 중대한 사안에 관계되니, 성상께서 밝게 생각하시어 가부를 분명히 살피셔서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그 득실을 참작하여 속히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이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어사의 장계를 자세히 살펴보니, 진휼 상황을 자세히 고찰하여 반복하여 진달한 내용이 그 실제를 제대로 갖추었으니 실로 사의(事宜)에 부합합니다. 세 등급으로 나누어서 회감하면 비록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이라 해도 줄여 주는 양이 300석을 넘지 않을 것이니, 이런 뜻으로 감사에게 아울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회감하는 수량의 경우 그 등급을 획일적으로 매기면 자연 열 배, 백배의 차이가 생기게 되므로 세 등급으로 나누는 것보다 곤란한 점이 있다. 즉 작은 고을이라도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인 경우에는 줄여 주는 수량이 혹 100여 석을 넘는 경우도 생기고, 큰 고을이 재해를 당했을 경우에는 굶주린 백성이 혹 십수 배에 이르는데도 반드시 300석으로 제한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장차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른바 300석이라는 것도 미(米)와 조(租)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비록 수량을 정하여 제한하더라도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지 못하는 병폐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재해가 가볍고 고을이 작은 곳은 혹 6, 7석을 줄여 주거나 아예 감면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고을이 크고 재해가 심한 곳은 혹 300석 이상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5월에 공이 장계로 자세히 보고하였는바, 추가로 초입한 굶주린 백성들이 원래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재해의 심한 정도를 따지지 않고 모두 절반으로 줄여서 탕감해 주었는데 허비한 바가 그다지 많지 않고 탕감하지 않은 수효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감사인 민희(閔熙)에게 약속한 대로 복명할 때에 ‘모두 탕감하도록 허락하되 그 방식은 상평창(常平倉)에 남아 있는 곡식 3, 4천 석과 감영의 별회곡(別會穀)을 회감하는 식으로 할 것’을 청하였다. 이 일을 비변사에 내리자,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추가로 초입한 기민들은 생활 터전이 없는 자와는 차이가 있으니, 어사가 아뢴 대로 탕감하여 조정의 은혜로운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공이 하직하고 떠날 적에 아뢰기를,
“도내의 각 아문과 각 영의 둔전(屯田) 및 여러 궁가(宮家)의 농장에 있는 미곡을 진휼하는 데에 전량 가져다 사용하고, 그 값으로 도내의 무명을 올려 보내면 양쪽 다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공이 대구(大丘)에 이르러 창원(昌原)의 용동궁(龍洞宮) 둔전 백성이 올린 정장(呈狀)을 보니, 도장(道掌)이 해마다 침탈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공이 창원 현감 김여량(金汝亮)으로 하여금 이 일을 조사하게 하였다. 3월에 공이 창원에 이르러 캐물으니, 둔전 64결(結) 중에 태반이 재해를 입어서 실제 결수가 29결이 못 되는데도 그대로 64결로 하여 1결마다 10석씩을 거두었으며, 도장이 잡곡으로 1결마다 8두를 사사로이 거두었다고 하였다. 공이 마침내 현감으로 하여금 먼저 도장을 내쫓아 손을 쓰지 못하게 하니, 둔전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소생한 것처럼 절하고 기뻐하며 발을 굴렀다. 4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도장은 본래 궁인(宮人)의 족속으로 세력을 믿고 공갈을 치면서 못하는 짓이 없어서 현감들도 대등하게 맞서지 못하니, 이들의 포악함이 어찌 경주(涇州)의 전지(田地)에서 납입하기로 한 숫자만을 알 뿐이라고 한 초영심(焦令諶)의 포악한 행위에 그치겠습니까. 비록 선왕조에서 계하한 공사(公事)를 받들어 경작하는 자를 곧 도장으로 삼는다 해도 마침내 반드시 그 안에서 함부로 징수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본관(本官)에서 거두어들이는 것만 못합니다. 이와 같은 곳이 다만 한 고을이나 한 도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융통성 있게 잘 조처해서 백성들이 뼈를 깎아 내고 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모두 면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영남의 좌수영(左水營)에서 양산(梁山)의 구법곡(仇法谷)에 도청(都廳)을 설치하고 시장에서 곡식을 말〔斗〕로 될 적에 세금을 거두었는데, 3월에 공이 양산에 이르러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을 듣고는 수영에 이문을 보내 통렬히 근절시키며 말하기를,
“배와 수레에까지 세금을 거두는 것도 옛사람들은 오히려 백성을 해친다고 말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되와 말에까지 세금을 거두니, 더욱 놀라고 탄식할 만하다.”
하였다. 공은 또 서계(書啓)를 올릴 적에 연해의 선세(船稅)가 선척(船隻)의 유무를 따지지 않는 병폐를 아뢰니, 상이 각 아문과 각 궁가에 명하여 지금 있는 선척 외에는 숫자를 계산하지 말도록 하였다.
○ 공이 하직하고 떠날 때에 63개의 고을을 일일이 다 다니기 어려운 점을 아뢰니, 상이 사세를 살펴서 잘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재해를 입은 고을에 이르러서 다시 생각하기를,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은 진실로 직접 다니면서 방문하지 않을 수가 없고, 곡식을 다소 수확한 고을도 반드시 직접 완급(緩急)을 살핀 뒤에야 곡식을 내어 재해를 입은 고을에 옮겨 지급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좌도와 우도를 두루 돌아다니되, 남해(南海), 거제(巨濟), 개령(開寧), 금산(金山), 지례(知禮) 등 다섯 고을은 곡식을 다소 수확하였고 길이 멀기 때문에 다만 문서로 신칙하였다. 4월 16일에 공이 다시 대구에 이르렀는데, 그달 하순인 맥추(麥秋)에 이르면 여러 고을들이 사목에 따라 모두 진휼을 끝내도록 되어 있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모맥(牟麥)이 처음 익을 때에 죽을 끓여 먹이던 수많은 백성들을 한꺼번에 풀어 돌려보내면 갑자기 먹을 것이 없어서 기로에서 방황하다가 굶주려 죽어 시신이 골짜기에 버려질 염려가 있고 또한 반드시 좀도둑질이 공공연히 만연할 우려가 있다.’ 하여, 마침내 여러 고을에 분부해서 비록 진휼을 끝냈더라도 그중에 더욱 의지할 곳이 없고 힘없는 자들을 가려 혹은 본관에서 조처하거나 혹은 약간의 진휼곡을 내어서 6, 7일 동안 더 먹인 다음 모맥이 익기를 기다린 뒤에 풀어 돌려보냄으로써 보리 이삭을 주워 먹어 연명할 방법이 있게 하였다. 또 날씨가 더워서 전염병이 심하니, 비록 모맥이 익었더라도 막사를 나가는 무리들이 보리를 베어다가 방아를 찧어 먹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여, 마침내 여러 고을로 하여금 남은 환자곡을 나누어 주되 진휼할 때와 똑같이 시행하여 전공(前功)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장계로 자세히 아뢰었다.
○ 이때 성주(星州)를 도회로 정하여 여러 고을의 문서를 감회(勘會)하였다. 공이 5월에 감회를 마치고 장계를 올리기를,
“구휼하는 정사는 마땅히 관청에서 마련한 곡식과 굶주리거나 병들거나 죽은 백성의 다소를 가지고 수령들의 상벌을 정해야 할 듯합니다. 신이 일의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니, 저축이 많은 부유한 고을은 수령이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곡식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지극히 잔폐하고 작은 고을은 수령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선한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곡물의 많고 적음은 수령이 유능한가 유능하지 못한가를 가늠하는 실적이 못 됩니다. 그런데 수령이 스스로 마련했다 하여 논공행상한다면 허위를 조장하는 병폐가 있을 듯합니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에 대해 여러 고을에서는 혹 삼가 돌보지 않아 이렇게 만들었다는 책망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와서 보고하는 자가 전혀 없으므로 신이 별도로 공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윗사람을 섬기는 데 있어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하나하나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데 더구나 사람이 죽은 경우이겠는가. 아마도 오래 기근이 들고 질병이 더욱 극성한 탓일 터이므로 조정에서도 사세를 헤아릴 것이니, 혹시라도 죽은 자를 누락시킨다면 각별히 죄를 청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후로 속속 와서 보고하는 자가 있으나 아직도 줄여서 보고하는 일이 없지 않은데, 달리 상고할 방법이 없으니, 수령이 스스로 보고한 숫자만 가지고는 결코 공과 죄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두 건(件)을 책으로 만들어서 이미 개록(開錄)하고 이러한 실정을 먼저 아룁니다.”
하였다. 6월 25일에 공이 복명한 뒤 입대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일을 마치고 올라왔는데, 도내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깊이 염려해 주시고 수령들도 모두 삼가 두려운 마음으로 임했기 때문에 겨우 구제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흉년이 든 해이기는 하나 별달리 도적이 창궐할 염려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년에 도적이 창궐하는 것이 으레 백성들의 우환이 되었는데, 이제 그럴 염려가 없다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하였다.
○ 공이 하직하고 출발할 적에 아뢰기를,
“신의 출행이 이미 암행이 아니니, 수령들 중에 가장 유능한 자와 유능하지 못한 자를 뽑아서 서계(書啓)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4월에 공은 거창 현감(居昌縣監) 성진흡(成震熻)이 옮겨 온 미곡이 2분은 조(租)이고 1분은 미(米)라 하여 파직하고, 5월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사기(趙嗣基)가 신칙을 태만히 하고 문서가 뒤섞여 두서가 없다 하여 파직한 다음 모두 장계로 아뢰었다. 공이 복명할 때에 아뢰기를,
“수령들 중에는 필시 가을이 된 뒤에 거관(去官)하고자 하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인데, 금년 가을에 민사(民事)를 조처하기가 진휼할 때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반드시 시말을 자세히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해야 하니, 금년 겨울까지는 절대로 가볍게 체직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조에 말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이어 서계를 올려서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성기(李聖基), 선산 부사(善山府使) 권성원(權聖源),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원정(李元禎),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지온(李之馧), 인동 부사(仁同府使) 양일한(楊逸漢), 안동 부사(安東府使) 성후설(成後卨), 함안 군수(咸安郡守) 권희(權曦), 청도 군수(淸道郡守) 목내선(睦來善), 전 창원 현감(昌原縣監) 김여량(金汝亮), 진해 현감(鎭海縣監) 박영계(朴永繼), 함창 현감(咸昌縣監) 이최만(李最晩), 진보 현감(眞寶縣監) 채익준(蔡翊俊)을 표창하고,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운장(金雲長), 자인 현감(慈仁縣監) 우규(禹糾), 양산 군수(梁山郡守) 김하현(金夏鉉),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후석(李後奭), 장기 현감(長鬐縣監) 신경윤(申慶胤), 김제 군수(金堤郡守) 남천택(南天澤)을 폄하하였다. 다음 날 이조에서 복주하기를,
“이성기, 이원정, 이지온에게는 모두 말을 하사하고, 성후설, 목내선, 김여량, 이최만에게는 모두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권성원, 양일한, 권희, 박영계, 채익준은 모두 승진시키고, 김운장 등 6명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다.
○ 이번에 진휼 어사로 나갈 때 겸하여 인재를 물색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3월에 공이 여러 고을에 이문을 보내기를,
“경내에서 행실이 크게 드러난 인물은 각각 그 이름 아래에 행적을 자세히 쓰고, 한두 구(句)로 범범하게 제목을 쓰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고을을 지나갈 때에 길가에 있는 자는 직접 만나 보았고, 거리가 조금 먼 경우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묻곤 하였다. 공이 이때에 별도의 단자(單子)를 올려 아뢰기를,
“영남(嶺南)은 평소 인재의 부고(府庫)로 알려져 있는데, 인재의 명성이 뚝 끊어짐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습니다. 먼 지방에서 고요히 자신을 지키는 선비는 비록 훌륭한 행실과 세속을 초월한 높은 뜻이 있더라도 명성이 조정에 알려지지 못하여 작은 녹봉도 얻지 못하고, 사판(仕版)에 이름이 나열된 자들은 사사로이 청탁하고 권문세가에 붙어서 애걸하고 뇌물을 쓴 무리들입니다. 이 때문에 시골 백성들이 태수를 논할 때에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오기를 바라고 지방에 있는 사람이 오기를 원치 않으니, 서울 사람이 모두 지방에 있는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시골에서는 그보다 더 염치없는 자들이 끝내 벼슬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공은 이어 진주(晉州) 사람인 전 현감 하홍도(河弘度)와 함안(咸安) 사람인 전 좌랑(佐郞) 조임도(趙任道)의 어짊을 아뢰기를,
“본도(本道)에는 예로부터 선생과 장자(長者)가 많아서 후진들을 잘 이끌어 주었는데, 불행히도 근자에 고을에는 존경하여 우러를 만한 사람이 없고 지방에는 본받을 만한 스승이 드물어서 법도와 현자가 살아 있던 땅이 도리어 시끄럽게 송사하는 고을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국가에서 선한 자를 표창하고 악한 자를 구별하여 기풍을 세우는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도내에 들어간 뒤로 인사(人士)들이 함께 추앙하고 복종하는 자를 물어보니, 모두 이 두 사람을 들었습니다. 조임도는 집이 다소 멀어서 직접 찾아가서 만나 보지 못하였고, 하홍도는 가서 만나 보았는데 비록 늙고 병들어서 세상에 쓰이기에는 마땅하지 않았으나 서당에서 학문을 닦고 강독하며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예전에 이미 표창하였으니, 다시 거두어 녹용(錄用)하거나 혹은 특별히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비단을 내려 주고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묻는 것이 인물을 장려하는 방도에 합당할 듯합니다. 조임도는 이미 나이가 많으니 더욱이 그가 살아 있을 때에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서 피폐한 교화와 나쁜 풍속이 흥기될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다. 공은 또 만나 본 현풍(玄風)의 유학(幼學) 곽태재(郭泰載), 합천(陜川)의 유학 배일장(裵一長), 안음(安陰)의 유학 박이점(朴爾點)을 천거하고, 또 소문으로 들은 영해(寧海)의 전 참봉(參奉) 이휘일(李徽逸), 성주(星州)의 유학 이석견(李碩堅), 진주(晉州)의 유학 박만(朴曼), 안동(安東)의 전 참봉 김시온(金時榲), 청송(靑松)의 생원(生員) 조함세(趙咸世), 금산(金山)의 유학 배상유(裵尙瑜), 상주(尙州)의 전 현감 정도응(鄭道應), 영천(永川)의 무인(武人) 정호례(鄭好禮), 봉화(奉化)의 전 부솔(副率) 강흡(姜恰) 등을 천거하니, 상이 하홍도와 조임도에게 쌀과 곡식을 차등 있게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 8월에 감시(監試) 초시(初試) 일소 시관(一所試官)에 차임되니, 공은 오로지 연구하여 고시(考試)하는 데에 힘썼다. 종전에는 감시에서 사서의(四書疑)를 지은 자는 몇 사람 안 되고 그 밖에는 대부분 그대로 옛것을 본뜨고 앞뒤만 약간 바꾸었는데, 공은 그런 것들을 모두 떨어뜨리느라 17일 만에야 비로소 방(榜)이 나왔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15일 만에 방을 내었고 완양군(完陽君) 이충원(李忠元)도 열흘 남짓이 걸렸으며, 그 밖에는 모두 8, 9일을 넘지 않았다.” 하였다.

35세 계묘년(1663, 현종4)

1월에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다.
2월에 사헌부 집의로 옮겼으며, 감시(監試) 복시(覆試) 참시관(參試官)에 차임되고 부응교에 제수되었다.
3월에 영녕전수개도감 낭청(永寧殿修改都監郞廳)에 차임되고 문과(文科) 복시(覆試) 일소 참시관(一所參試官)에 차임되었다.
4월에 문과(文科) 전시(殿試) 대독관(對讀官)에 차임되었다.
5월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다.
7월에 집의에 제수되었다.
8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사도시 정(司䆃寺正)에 제수되었으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제수되었다.
9월에 집의에 제수되었다가 부응교로 옮겼다.
10월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수어청 종사관(守禦廳從事官)에 차임되었다.
12월에 사인에 제수되고 유생 전강의 참고관에 차임되었으며, 남한산성 번고 어사(南漢山城反庫御史)에 차임되었다.

○ 예전에 태조 3년(1394)에 종묘를 세우고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네 분을 봉안하였다. 세종 3년(1421)에 정종(定宗)을 부묘(祔廟)하려 할 적에 예조에서 송(宋)나라 소희(紹熙) 연간의 사조묘(四祖廟)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이로 인해 정전(正殿) 네 칸을 종묘의 서쪽에 짓고 이름을 영녕전(永寧殿)이라 하여 목조를 제1실(室)로 체천(遞遷)하였고, 세종을 부묘할 때에 익조를 제2실로 체천하였으며, 세조를 부묘할 때에 도조를 제3실로 체천하였고, 예종을 부묘할 때에 환조를 제4실로 체천하였다. 성종을 부묘할 때에 연산군(燕山君)이 처음으로 정종을 영녕전 협실(夾室)로 체천하니, 이후로 체천한 신주를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5년 후에 선조(宣祖)가 종묘를 중건(重建)할 적에 도궁(都宮)의 옛 제도를 회복하려 하였는데,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한결같이 임진왜란 이전의 제도를 따랐다. 효종을 부묘하려 할 때에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송나라 조정의 의논하는 자들이 희조(僖祖)를 별전(別殿)으로 체천하려고 하자, 주자(朱子)가 그 잘못을 극력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목조는 바로 송나라의 희조와 같아서 주(周)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에 비견되는 분인데 태묘(太廟)에 으뜸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신주를 체천하고 부묘할 때에 목조를 옮겨 봉안하여 시조로 삼음으로써 한결같이 주나라의 옛 제도와 같이 하셔야 합니다. 또 태묘에 동서의 협실을 만들어서 익조 이하의 체천한 신주를 봉안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의리가 분명해져서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해도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일을 예조에 내려서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니, 정태화(鄭太和)와 심지원(沈之源)이 그 불가함을 아뢰어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해 3월에 이르러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인 김좌명(金佐明)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영녕전 동서의 익실(翼室)이 매우 좁아서 다시 세우자는 의논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서쪽 익실의 서북쪽 모퉁이 담장에 생긴 틈이 점점 벌어져서 반드시 철거하고 중수해야 하니, 이번 기회에 고쳐서 다시 세우소서.”
하자, 마침내 수개도감(修改都監)을 설치하였다. 공이 낭청이 되어 아뢰기를,
“정전(正殿) 네 칸의 서쪽에 마땅히 여섯 칸을 늘려서 협실에 모신 정종 이하 체천한 신주를 일체 정전에 봉안하소서.”
하니, 도제조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는 곧 종묘가 둘인 것이니, 다만 익실을 세 칸 늘리소서.”
하였다. 4월에 상이 정전을 본떠 좌우로 세 칸을 세울 것을 명하니, 입대한 재신(宰臣)들의 의견이 똑같았는데, 사인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기를,
“자손의 체천한 신주를 시조의 협실에 봉안하는 것은 바로 옛 제도입니다. 우리나라 태묘의 제도는 이미 태조를 제1실로 삼고 있으니, 사조(四祖)의 체천한 신주를 협실에 내려서 봉안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녕전을 둔 것이니, 영녕전의 협실은 바로 목조의 협실입니다. 공정대왕 정종(定宗) 이하의 체천한 신주를 협실에 봉안하는 것은 비록 옛 제도에 온전히 부합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자손의 체천한 신주를 시조의 협실에 올려서 봉안하는 뜻이 있습니다. 영녕전의 제도가 이미 사조의 별묘(別廟)가 된다면 체천한 여러 신주를 함께 제향하는 사당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기어이 변통하고자 할 경우 혹 정종 이하의 체천한 신주를 태묘의 협실에 봉안하는 것은 그래도 근거할 만한 점이 있지만 영녕전의 정전에 일체 봉안하는 것은 옛날과 지금의 제도를 참고해 보건대 모두 근거할 바가 없으며, 다만 조종조에서 협실에 봉안하게 한 깊은 뜻을 도리어 낮추고 구차하게 만드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가을에 이단상이 다시 편지를 보내 공에게 묻자, 공이 답하기를,
“지금 종묘의 예(禮)를 논하는 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합하여 도궁(都宮)을 만드는 것이요, 두 번째는 주자(朱子)가 정한 것을 따르자는 것이요, 세 번째는 정종 이하의 체천한 신주는 태묘의 서쪽 협실에 옮겨 봉안하자는 것입니다. 지난날 상하가 의문을 제기하며 논란할 적에도 모두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존형(尊兄)께서 상소하여 건의한 것에도 이 문제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다만 영녕전의 정전(正殿)에 정종 이하를 함께 봉안하는 것과 그 협실에 내려 보관하자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겠습니다.
만약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에 대해 영녕전의 제도가 종묘의 제도와 구분되지 않아 종묘가 둘이 되는 혐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주례(周禮)》를 상고해 보면 선공(先公)의 체천한 신주를 후직(后稷)의 사당에 보관하고, 선왕(先王)의 체천한 신주를 목(穆)은 문왕(文王)의 묘실에 보관하고 소(昭)는 무왕(武王)의 묘실에 보관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이미 태묘를 세우고 또 영녕전을 세웠으니, 이미 종묘가 둘이 되는 혐의를 면치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영녕전에 있는 협실을 가지고 혐의를 피하고 은미한 것을 밝히는 방도로 삼으려 한다면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제 생각에는 체천한 신주를 협실에 보관하는 것은 바로 태묘의 제도이므로, 이제 영녕전을 이미 조묘(祧廟)라 해 놓고 다시 그 협실에 신주를 보관하는 제도를 둔다면 진실로 이것이 혐의쩍은 일이지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이 혐의쩍은 일은 아닐 듯합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상공(相公)이 이른 바 종묘가 둘이 되는 혐의가 있다는 것과 형의 상소문 가운데에 ‘어찌 다만 사당이 둘이 되는 혐의만 있을 뿐이겠는가.’라고 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에 대해 조종(祖宗)의 본의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면서 망녕되이 고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악을 만든 것은 세종조(世宗朝)에 시작되어 성종조(成宗朝)에 이루어졌으니, 《오례의(五禮儀)》는 바로 성종조에서 완성한 책입니다. 《오례의》의 영녕전 도본(圖本)을 살펴보면 그 아래 글에 이르기를, ‘영녕전에는 체천한 신주를 봉안한다.’라고 하여, 사조(四祖)를 별묘에 모신다는 말이 없고 다른 신주를 협실에 보관한다는 말도 없으니, 그렇다면 영녕전은 애당초 사조의 별묘가 아니고 바로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종 이하를 어찌 유독 협실에 내려 보관한단 말입니까.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똑같이 정전에 봉안하는 것은 결코 조종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에 대해 옛날의 제도를 상고해 볼 때에 고증할 수가 없어 사람들의 의심을 풀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모두 체천한 신주를 별도로 봉안하는 사당이 없으며, 송나라의 사조전(四祖殿)은 희조를 이미 체천한 뒤에 오직 사조만 봉안하였을 뿐이고 뒤이어 들인 체천한 신주가 없습니다. 오직 명나라의 종묘 제도만이 바로 우리나라의 제도와 유사하니, 명나라의 덕조(德祖)ㆍ의조(懿祖)ㆍ희조(熙祖)ㆍ인조(仁祖)는 바로 태조 때에 추존한 사조입니다. 그 후대에 이르러 차례로 체천하여 태묘의 침전(寢殿) 뒤에 별도로 조묘(祧廟)를 세워서 봉안하였으며, 선종(宣宗)과 인종(仁宗) 두 신주도 조묘에 들여 봉안하고 사조와 함께 정전에 나열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근거할 만한 제도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나라의 영녕전은 태묘의 서쪽에 있는데 명나라의 조묘는 태묘의 침전 뒤에 있고, 우리나라 신좌(神座)의 위차는 서쪽을 상석으로 하였는데 명나라 신좌의 위차는 중앙을 존위(尊位)로 삼았으니, 이것이 같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협실에 보관하지 않고 한 전(殿)에 함께 봉안하는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명백한 고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전혀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이 동춘(同春) 어른에게 보낸 편지에 ‘한ㆍ당ㆍ송ㆍ명에서는 또 태조 이하의 체천한 신주와 태조 이상의 체천한 신주를 정전에 함께 제향한 준례가 없다.’라고 말씀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종의 체천한 신주를 체천한 초기에 협실에 봉안하였고 그 후 열성조(列聖朝)가 끝내 이것을 고치지 못한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감히 끝까지 주장하여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 영녕전의 협실에 봉안된 체천한 신주가 바로 정종의 신주인데, 그때는 연산군(燕山君) 때입니다. 성종의 제도와 법이 이미 《오례의》의 내용과 같으니 연산군이 행한 것은 선조(先祖)의 일을 잘 계승하지 못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후대의 왕이 끝내 이것을 고치지 못한 것으로 말하면 드러난 사적이 없으니 지금 고증할 수가 없습니다만, 선조(宣祖) 때의 일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이 이전에도 고치지 못하였고 이 뒤에도 변경하지 못하였음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또 지금의 논의도 종묘를 개수(改修)하는 일로 인하여 나온 것이니, 만약 개수하는 일이 없었다면 결코 이러한 논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과거를 그대로 따르다가 지금에까지 이른 것에 불과한 듯한데, 이제 역대의 조정에서 변경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저로서는 그것이 과연 사정에 합당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100여 년 동안 열성조가 추모하고 우러러 받든 지극한 뜻에서도 그렇고 예를 지킨 수많은 유신(儒臣)들이 반드시 이미 모여서 의논하여 사당을 고쳐 세우는 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범연히 말하면 옳지만 세세히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종 이하를 협실에 봉안하는 것에 대해 자손의 체천한 신주를 시조(始祖)의 협실에 올려 봉안하는 고례(古禮)의 뜻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고례의 뜻은 그 시조가 바로 체천하지 않는 신주이고 훼철(毁撤)하지 않는 사당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지금 영녕전의 경우는 사당은 바로 체천한 사당이고 신주는 모두 체천한 신주입니다. 이미 체천한 사당에 이미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였으면서 또 이제 시조와 자손을 구분하여 각각 정전과 협실에 따로 제향하자고 하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또 익조ㆍ도조ㆍ환조의 삼조(三祖)를 또한 정전에 봉안하자고 하는데, 이른바 시조묘에 대한 내용은 더더욱 감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주나라의 불굴(不窟)을 시조인 후직(后稷)의 협실에 봉안한 것을 근거로 삼은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처음에 협실을 설치한 것은 별다른 뜻이 없고 단지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날 영녕전을 봉심(奉審)할 때에 협실의 제도를 보니, 앞과 뒤에 모두 툇기둥이 없고 단지 한 줄에 단칸뿐이었는데, 그 한 칸 안에 감실(龕室)을 둔 데다가 또 용상(龍牀)을 두고 탁상(卓牀)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앞에 여유 공간이 없어서 사람들이 몸을 돌릴 수가 없었으며, 심지어 술을 따라 올리는 준소(尊所)가 짧은 처마 밖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술잔을 올릴 때 비바람이 혹 몰아치면 빗발이 감실에까지 들이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처음에 협실을 설치한 것이 과연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려는 뜻에서 나왔다면 비록 혹 정전에 비해서 그 제도를 다소 줄일 수는 있다 해도 어찌 비바람이 몰아쳐 젖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겠습니까. 또 지금 영녕전 동쪽 협실의 동쪽에 이른바 ‘제기고(祭器庫)’라는 것이 있는데, 《오례의》의 도본(圖本)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처음에 협실을 설치한 것은 단지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을 보관하기 위한 것으로 필시 종묘 협실의 제도와 같았을 터인데, 체천한 신주를 봉안한 뒤에 제기와 제복을 보관할 곳이 없어서 비로소 고실(庫室)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애당초 도본에는 기재되지 않은 듯합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어찌 봉안할 곳이 없어서 우선 의물(儀物)을 보관하는 방에 임시로 봉안한 것이겠는가.’라고 말씀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도감 당상(都監堂上) 김수항(金壽恒)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이렇게 증축할 때에 차라리 정전의 칸 수를 좀 더 늘려서 여러 체천한 신주의 신위를 함께 봉안하는 것이 나으니, 어찌 굳이 다시 낮고 좁은 익실(翼室)의 공간에 구차하기 짝이 없는 제도를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 남 학사(南學士)의 말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은 농사철에 가뭄이 심하므로 우선 1, 2년을 기다렸다가 다시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4년 뒤에 마침내 두 이공(李公)의 말을 따랐다.


 

[주D-001]방기(方技) : 의술(醫術) 및 천문(天文), 복서(卜筮), 상명(相命), 둔갑(遁甲), 감여(堪輿) 등의 술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감여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이른다.
[주D-002]이백강(李白江) : 백강은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호이다. 이민적(李敏迪)과 이민서(李敏敍)의 아버지로 우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주D-003]이상(二上) : 시문(試文)을 평하는 등급의 하나로, 둘째 등급의 첫째를 이른다. 가장 절묘하게 지은 것을 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로 분류하고, 그다음을 이상ㆍ이중(二中)ㆍ이하(二下)로 분류하고, 그다음을 삼상(三上)ㆍ삼중(三中)ㆍ삼하(三下)로 분류하며, 품제(品第)에 들지 못한 것을 차상(次上)ㆍ차중(次中)ㆍ차하(次下)로 분류하며, 가장 졸렬한 것은 갱지갱(更之更)이라 하는바, 갱지갱은 등수에 들지 못한 꼴찌를 뜻한다.
[주D-004]친정(親政) : 임금이 직접 인사 행정을 보는 것을 이른다.
[주D-005]실록 세초연(實錄洗草宴) : 세초는 초고를 물에 씻어 버리는 것으로, 실록의 찬수(撰修)를 마치고 원고를 정리할 때에 여는 잔치를 이른다.
[주D-006]타위(打圍) : 임금이 직접 나가서 하는 사냥을 이르는바, 몰이꾼이 짐승을 몰면 임금이 직접 쏘아서 잡았다.
[주D-007]우(虞)나라 …… 훈계 : 우나라의 순 임금이 옻칠한 그릇을 사용하려 하자 이에 대해 간하는 자가 10여 명이었다 한다. 《資治通鑑 卷197 唐太宗 貞觀17年》 상(商)나라 고종(高宗)이 융제(肜祭)를 지내던 날에 꿩이 우는 이변(異變)이 있자 조기(祖己)라는 신하가 글을 지어 스스로 반성할 것을 촉구하였으니, 이 글이 바로 《서경》의 〈고종융일(高宗肜日)〉이다.
[주D-008]난간을 …… 신비(辛毗) : 전한(前漢) 때에 성제(成帝)의 신임을 받는 장우(張禹)가 외척인 왕씨(王氏)를 비호하자, 괴리 영(槐里令)을 지낸 주운(朱雲)이 상소하여 간신 장우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극간하였다. 이에 성제가 대로하여 어사(御史)에게 주운을 끌어내라고 하니, 주운이 난간을 부여잡고 버티자 그만 난간이 부러졌다. 뒤에 성제는 그의 충성심을 기려 난간을 새로 만들지 말고 그대로 보수하게 하여 그의 충성이 드러나게 하였다. 《漢書 卷67 朱雲傳》 삼국 시대 위(魏)나라 문제(文帝)인 조비(曹丕)가 일찍이 기주(冀州)의 백성 10만 호를 옮기려 하자, 신비(辛毗)가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문제가 화를 내고 내전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비는 쫓아가 문제의 소매를 붙잡고 끝까지 간쟁하여 결국 반만 옮기게 하였다. 《三國志 卷25 魏書 辛毗傳》
[주D-009]정북창(鄭北窓) : 북창은 정렴(鄭磏, 1505~1549)의 호로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1530년(중종25)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고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의 교수를 겸하였으며, 포천 현감(抱川縣監)이 되었으나 신병으로 그만두고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와 과천(果川)의 관악산(冠岳山) 등지에서 스스로 약을 구하여 정양(靜養)하다가 죽었다. 삼교(三敎)에 능통하고 천문ㆍ지리ㆍ의약에 밝았으며 거문고에도 고명하였다.
[주D-010]김동봉(金東峯) : 동봉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이 외에도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라는 호가 있었는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단종(端宗)이 죽은 뒤에 세상을 체념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광인(狂人)이 되어 방랑 생활을 하였다.
[주D-011]관향미(管餉米) : 국가의 비상시에 군량으로 쓰기 위하여 보관, 관리하던 곡식을 이른다. 1623년(인조1)에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군량을 비축하고, 관향사(管餉使)를 파견하여 이를 관리하게 하였다. 뒤에 이 관향곡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만 비축하게 되어, 1636년에는 평안 감사가 관향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관향곡을 환곡(還穀)으로 쓰기도 하였다.
[주D-012]환곡(還穀)을 거둬들인 것 : 대본에는 ‘捧䊮’으로 되어 있는데, 앞뒤의 문맥을 살펴 ‘䊮’을 ‘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천리 …… 막아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잘난 체하는 음성과 얼굴빛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는다.〔訑訑之聲音顔色 距人於千里之外〕”라고 하였다.
[주D-014]양송(兩宋) : 두 송씨(宋氏)로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주D-015]회천(懷川) : 회덕(懷德)의 별칭으로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주D-016]이백헌(李白軒) : 백헌은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호이다. 병자호란에 청나라가 삼전도(三田渡)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비문을 요구하자, 인조가 장유(張維)와 조희일(趙希逸) 등이 쓴 글을 보냈으나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다시 요구하였다. 인조가 직접 이경석에게 비문을 쓰게 하니, 할 수 없이 써서 바치고는 형에게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며 개탄하였다.
[주D-017]지사(知事)와 특진관(特進官) : 지사는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가리킨 것으로 정2품이 겸직하였으며, 특진관은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임금의 고문에 응하던 벼슬로, 성종(成宗) 때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2품 이상의 관원을 임명하였다.
[주D-018]반영(繁纓)을 …… 애석해하셨습니다 : 반영은 제후의 말에만 꾸밀 수 있는 뱃대끈과 굴레이다. 춘추 시대 위후(衛侯)가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신축(新築)에서 싸웠는데, 중숙(仲叔) 우해(于奚)가 손환자(孫桓子)를 구원하였으므로 위후가 상으로 고을을 내렸으나 우해는 이것을 사양하고 제후라야 쓸 수 있는 곡현(曲縣)과 반영을 갖추고 조회하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애석하구나!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기물과 명칭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이니, 임금만이 맡는 것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곡현은 삼면(三面)에 악기를 매단 수레이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019]내관(內官)과 서제(書題) : 내관은 환관을 이르며, 서제는 조선 시대에 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를 가리킨다.
[주D-020]대영고(大盈庫) : 황제가 사사로이 사용하기 위하여 국고(國庫)와 별도로 재물을 보관하던 창고이다.
[주D-021]좌장(左藏) : 국고를 이르는바, 왼쪽에 있기 때문에 좌장이라 칭한 것이다.
[주D-022]회외미(會外米) : 회계 장부에 회록(會錄)하고 남은 쌀을 이른다.
[주D-023]백급(白給) : 아무 조건 없이 공짜로 주는 것을 이른다.
[주D-024]적은 …… 것입니다 : 《논어》 〈계씨(季氏)〉에 “나라를 소유하고 집을 소유한 자는 백성이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하며, 가난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고 한다.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백성이 적지 않고 편안하면 나라가 기울지 않는다.〔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라고 하였다.
[주D-025]무학군(武學軍) : 병법과 무예를 익힌 사람들로 편성된 군대를 이른다.
[주D-026]요군(料軍)과 지군(紙軍) : 요군은 부료군관(付料軍官)의 약칭으로 급료를 받는 군관을 이른다. 지군은 종이를 만들어서 국가나 관아에 납부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 보이는바, 이 일은 주로 사찰의 승려들이 담당하였으므로 지군승(紙軍僧) 또는 지승(紙僧)이라고도 하였다.
[주D-027]저화(楮貨) …… 강창가(江倉價) : 저화는 노비의 원래 신공(身貢) 외에 별도로 더 거두는 것이고, 작지가(作紙價), 역가(役價), 강창가는 신공을 바칠 때 들어가는 일종의 수수료인바, 작지가는 신공을 관리하는 관사에서 거두는 사무 처리 비용이고, 역가는 신공을 지방에서 강창(江倉)까지 운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고, 강창가는 신공을 강창에 입고(入庫)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다. 강창은 강변에 설치하여 각 지방에서 거둔 세곡(稅穀)을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할 때까지 보관하여 두던 창고이다.
[주D-028]후목(後木) : 원래 법적으로 바치도록 되어 있는 무명〔木〕 이외에 수수료 명목으로 더 바치는 무명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주D-029]위를 …… 정사 : 국가에 바칠 세금이나 공물을 줄여 주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정사를 이른다. 《주역(周易)》의 〈손괘(損卦)〉는 위는 간(艮 )이고 아래는 태(兌 )인데, 간은 산이어서 높고 태는 못이어서 깊으니, 아래가 깊어지면 위가 더욱 높아지므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는 상(象)이 된다. 이와 반대로 〈익괘(益卦)〉는 위는 손(巽 )이고 아래는 진(震 )인데, 양()이 변하여 음()이 된 것은 손(損)이고 음()이 변하여 양()이 된 것은 익(益)이므로 〈익괘〉는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는 상이 된다.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는 것은 백성들의 재물을 덜어 윗사람을 받들어서 결국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반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는 상이 되므로 나라에 손해가 되고,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은 윗사람에게 바칠 세금이나 공물을 줄여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상이 되므로 결국 나라에 유익함이 되는 것이다.
[주D-030]토졸(土卒) :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으로 조직된 그 지방의 군사를 이른다.
[주D-031]윤격(閏格) : 보조 격군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주D-032]염분(鹽盆) : 바닷물을 졸여서 소금을 만들 때에 쓰는 큰 가마를 이른다.
[주D-033]어살 : 싸리, 참대, 장목 따위를 개울, 강, 바다 등에 날개 모양으로 둘러 꽂아 나무 울타리를 친 다음 그 가운데에 그물을 달아 두거나 길발, 깃발, 통발과 같은 장치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주D-034]삭시사(朔試射) : 매월 실시하던 활쏘기 시험이다. 문관은 50세 이하의 당하관에게 무관은 나이와 품계에 관계없이 모두 응시하게 하였으며 연말에 성적을 통계하여 상벌을 가하였다.
[주D-035]감석(甘石)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인 감공(甘公)과 위(魏)나라 사람인 석공(石公)을 이르는바, 둘 다 천문학(天文學)에 밝았다.
[주D-036]생기(省記) : 관아에서 숙직하는 사람의 성명 따위를 적어 임금에게 올리던 숙직 일지를 이른다. 병조에 입직(入直)하는 낭관(郞官)이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軍號), 궁궐의 각처에 입직하는 관원, 하례(下隸), 각 영과 각 문에 입직하는 장사의 이름을 열기(列記)하여 승정원을 거쳐 임금에게 올렸다.
[주D-037]의망(擬望) : 이조에서 적임자를 세 명 뽑아 후보자로 올림을 이른다. 이때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자를 수망(首望), 두 번째를 중망(中望) 또는 부의(副擬), 맨 끝을 말망(末望)이라 하였다.
[주D-038]통청(通淸) : 이조와 삼사 등을 청환(淸宦)이라 하는데, 벼슬하는 사람이 청환에 들어가는 것을 통청이라 한다.
[주D-039]계곡(谿谷)의 아들인 정지(靜之) : 계곡은 장유(張維, 1587~1638)의 호이며, 정지는 장선징(張善澂, 1614~1678)의 자이다. 장유는 효종의 비(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대제학과 우의정 등을 지냈으며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주D-040]감회(勘會) : 자세히 조사하여 의정(議定)함을 이른다.
[주D-041]삼 년 …… 마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약쑥을 구한다.” 하였는바, 이는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약쑥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그 말을 듣는 즉시 약쑥을 뜯어 두면 다행히 죽지 않고 10년을 살 경우 그 약쑥이 3년이 되어 병을 고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때가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됨을 비유한 것이다.
[주D-042]모곡(耗穀) : 백성에게 양곡을 대여하였다가 받아들일 때 창고에서 생길 손실에 대비하여 미리 10분의 1을 더 받아 놓는 곡식을 이른다.
[주D-043]회부곡(會付穀) : 호조의 장부에 기록된 환곡을 뜻하는 말로, 원회(元會), 원회곡(元會穀), 창원회(倉元會), 호조곡(戶曹穀), 군자곡(軍資穀), 원회부(元會付)라고도 한다. 지방에서는 이것을 받아 반은 유치해 두고 반은 백성에게 대여하여 그 이자를 사직(社稷)이나 산천(山川)에 지내는 제사 비용으로 사용하고, 상을 주거나 진휼하는 비용, 늠료(廩料)의 재원으로도 사용하였다.
[주D-044]도회관(都會官) : 서울에서 각 도(道)에 이르는 큰길에 인접한 고을이나 그 고을의 수령을 말한다. 임시로 설치하는 갖가지 도회소(都會所)를 으레 도계(道界)의 머리가 되는 고을에 설치하였으므로 계수관(界首官)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經國大典 卷3 禮典 奬勸》
[주D-045]회감(會減) : 회록(會錄)된 재화를 회안(會案) 상에서 공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회계 처리하여 삭감하는 것이다.
[주D-046]조(租) : 조곡(租穀)으로, 찧지 않은 벼를 이른다.
[주D-047]별회곡(別會穀) : 지방 관아에서 관장하는 환곡을 이르는바, 서울에서 관장하는 세곡인 원회(元會)와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주D-048]생활 …… 있으니 : 대본에는 ‘餘無根着者有異’로 되어 있는데, 앞뒤의 문맥이 통하지 않아 《약천연보(藥泉年譜)》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餘’를 ‘與’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도장(道掌) : 궁방(宮房)의 토지를 관리하고 도조(賭租)나 결미(結米) 따위를 징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중에는 관둔전(官屯田)이나 개인의 토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도장이라 불렀다.
[주D-050]경주(涇州)의 …… 그치겠습니까 : 백성의 곤궁함을 생각하지 않고 세금을 거두어들임을 이른다.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경주대장(涇州大將)으로 있던 초영심(焦令諶)은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점유하고는 이 땅을 백성에게 소작으로 주어 가을철에 곡식이 익으면 수확의 절반을 받기로 약속하였는데, 이해에 크게 가뭄이 들어 곡식을 전혀 수확하지 못하였다. 백성이 이러한 사실을 고하자, 초영심은 “나는 수확의 절반을 바치기로 한 숫자만을 알 뿐이요, 가뭄은 내 알 바가 아니다.〔我知入數而已 不知旱也〕” 하고 빨리 약속한 곡식을 바치라고 독촉하니, 그 백성은 영전관(營田官)으로 있던 단수실(段秀實)을 찾아가서 하소연하였다. 이에 단수실은 면제해 주는 첩(帖)을 써서 농부에게 주고 사람을 시켜 초영심을 공손히 타일렀으나 앙심을 품은 초영심이 그 농부를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다. 이에 단수실은 농민을 데려다가 치료해 주는 한편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팔아 농민의 곡식을 상환해 주었다. 뒤에 회서장군(淮西將軍) 윤소영(尹少榮)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초영심을 꾸짖자 초영심은 매우 부끄러워한 나머지 죽고 말았다. 《新唐書 卷153 段秀實列傳》 《資治通鑑 卷223 唐紀》
[주D-051]김제 군수(金堤郡守) : 대본에는 ‘金山堤郡守’로 되어 있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아 ‘山’을 연문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주D-052]사서의(四書疑) : 문과 초장(初場)과 생원시(生員試)의 종장(終場)에서 보이던 시험의 한 가지로, 사서의 의의(疑義)를 논술하게 하는 것이다. 의(疑)는 사서 가운데에서 의심이 들 만한 대목의 글 뜻을 설명하게 하는 것이고, 의(義)는 경서의 글 뜻을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주D-053]사도시 정(司䆃寺正) : 대본에는 ‘司導寺正’으로 되어 있는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거하여 ‘導’를 ‘䆃’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4]사조묘(四祖廟) :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의 사당을 이른다.
[주D-055]도궁(都宮) : 여러 사당이 모여 있는 궁궐을 칭한 것으로, 옛날에는 여기에 여러 개의 사당을 따로따로 모셨으나 후세에는 한 사당에 여러 위패(位牌)를 함께 모셨다.
[주D-056]희조(僖祖) :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趙光胤)의 고조(高祖)로 이름은 조(朓)이다. 뒤에 희조로 추존(追尊)되었다.
[주D-057]별묘(別廟) : 사당을 따로따로 만들어 봉안함을 이른다.
[주D-058]사람들의 …… 말한다면 : 대본에는 ‘無以釋人之疑乎爾’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乎’와 ‘爾’ 사이에 ‘云’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59]단지 …… 말한다면 : 대본에는 ‘只爲奉安遷主之地乎爾’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乎’와 ‘爾’ 사이에 ‘云’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0]감실(龕室) : 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欌)을 이른다.
[주D-061]준소(尊所) : 제사 때에 술동이를 놓아두는 곳을 이른다.
[주D-062]두 이공(李公) : 이경석(李景奭)과 이단상(李端相)을 가리킨다.


 

 

 

 약천연보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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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36세 갑진년(1664, 현종5)
1월에 응교에 제수되었다.
2월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겸하였고 집의에 제수되었다.
3월에 병에 걸렸다.
4월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으며, 이달에 사간에 제수되었다.
5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승진 발탁되었고 이달에 복명하였다.
6월에 청대(請對)하였는데, 이날 말미를 받아 금성(金城)의 임소에 근친하러 갔다.
윤6월에 예조 참의에 제수되고, 헌릉정자각중건청 당상(獻陵丁字閣重建廳堂上)에 차임되었다.
9월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겼다.
10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인견할 때에 상의원(尙衣院)에서 연경(燕京)에 사신 갈 때 금령을 범한 물건을 사오는 일이 많은데 그렇게 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하고, 감사와 수령으로서 집을 지은 자를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적발하도록 한 명령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며, 전사한 군사들에 대한 징포(徵布)를 탕감하고 군안(軍案)에서 이름을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11월에 공이 청대하여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체직되었다.

○ 지난해 겨울에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남한산성과 강도(江都)의 번고 어사(反庫御史)를 이미 차출하였으나 모두 출신(出身)한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관리의 공무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니, 적합한 임무가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바꾸어 차임하라.”
하였다. 좌상은 공과 민유중(閔維重)을 천거하였고, 영상 정태화(鄭太和)는 공을 남한산성의 번고 어사로 차임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이해 2월에 공은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겸하여 마침내 길을 떠났다. 3월에 감기에 걸렸는데, 4월에 대신(大臣)들이 상에게 아뢰어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니, 장수와 정승이 아니면서 이러한 대우를 받은 것은 특별한 예우였다. 한 달 남짓 만에 비로소 병이 나았다.
○ 이보다 앞서 신축년(1661, 현종2)에 공이 부묘(祔廟)할 때의 독옥책관(讀玉冊官)으로 차임되었는데 부묘를 마치고 나서 규례대로 품계를 올려 주니, 공은 스스로 나이가 적은 신진(新進)이라 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고, 지난해에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부의(副擬)되었는데 이해 봄에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 5월에 동부승지에 승진 발탁되었다. 공이 이달에 복명할 적에 상계(上啓)하기를,
“호조(戶曹)와 수어영(守禦營)의 여러 창고에 각각 환자곡을 거둬들이지 못한 수량이 기해년(1659, 효종10) 이전에는 1년에 많아도 1000여 석에 지나지 않았는데, 경자년(1660, 현종1)에는 4600석이고, 신축년(1661)에는 1만 200석이며, 임인년(1662)에는 1만 1000석이고, 계묘년(1663)에는 1만 1300석이니, 이와 같이 끝없이 증가한다면 몇 년 뒤에는 장차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계산해 보건대 성첩(城堞)을 지키는 병졸을 1만 명은 써야 하니, 1년 동안 먹는 것이 4만 8800석입니다. 만약 창고에 비축해 두는 곡식을 항상 5만 석의 수량이 되게 확보하면 그 곡식으로 1년을 지탱할 수 있다고 이를 만한데, 지금 장부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수량은 8만 석을 넘지만 겨울 뒤에 입고(入庫)되는 것은 채 4만 석이 못 되며 여름에는 1만 석이 못 되니, 이는 비록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이렇게 되었다고는 하나 환자곡을 거두고 방출하기를 편의대로 할 수 없는 규정 때문입니다. 대략 듣건대 처음 거두어들일 때에 수어사(守禦使)가 종사관(從事官)을 보내는바 이를 일러 개창(開倉)이라고 하는데 불과 4, 5일 만에 서울로 돌아가며, 다 거두어들인 뒤에 또다시 종사관을 보내는바 이를 일러 봉고(封庫)라고 하는데 금방 왔다가 금방 가니 아무런 보탬이 없다고 합니다. 광주부에서는 종사관들이 왕래한다는 이유로 그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고자 하지 아니하니 일이 실효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환자곡의 출납을 오로지 본부에 위임하고, 수어사는 다만 환자곡을 나누어 주고 창고에 비축하는 곡식의 수량만 정해 주어 감히 임의대로 분산하지 못하게 하며, 간간이 종사관을 보내어 허실을 규찰하게 한다면 그런대로 성공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 인조 때에 수어청(守禦廳)을 설치하였는데, 숙종 신유년(1681, 숙종7) 가을에 이르러 지경연사 민유중(閔維重)이 수어청을 혁파하고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하여금 수어청을 총괄하게 할 것을 청하였고, 계해년(1683) 봄에 영경연사 송시열이 수어청을 혁파하는 것의 편리함에 대해 아뢰기를,
“광주 백성들이 호소하기를, ‘광주 부윤과 수어사가 각각 군병과 재정을 관장하여 서로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합니다.”
하였는데, 공이 동지경연사로서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준례에 따라 반드시 지위와 명망이 수어사가 되기에 걸맞은 사람을 광주 유수로 삼는다면 일과 권한이 한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마침내 경청(京廳)을 혁파하고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경오년(1690, 숙종16) 봄에 당시 재신(宰臣)이 건의하여 유수를 파하고 다시 예전처럼 부윤과 수어사를 두었다.
○ 처음에 조종조(祖宗朝)의 옛 제도에 대개 각 고을의 환자곡은 오직 호조의 원회부(元會付)만 있고 그 모곡(耗穀)은 모두 본 고을로 귀결시켰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여러 해 동안 포흠이 생긴 것과 유망(流亡)하거나 자손이 끊어진 가호(家戶)의 결손을 보충하고, 또한 관청의 수요 경비와 민역(民役)에 보충하니, 원곡(元穀)의 수량이 해마다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병폐가 없었다. 그런데 효종조에 이르러 영남의 문신인 김응조(金應祖)의 건의로 인해 모곡을 상평청(常平廳)에 귀속시키고 또 모곡의 모곡까지 계산하게 되자, 비록 흉년으로 인하여 환자곡을 거두지 않더라도 상평청의 모곡의 수량은 민간에서 저절로 불어나서 작은 고을은 환자곡이 수천 석이고 큰 고을은 몇만 석이며, 1만 석의 모곡이 1년에 1000석이어서 회록(會錄)하는 것이 한이 없으므로 장부에 허위로 기재한 수량이 절반을 넘었다. 그리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통영(統營)과 수영(水營) 등도 이러한 행위를 본받아 각기 환자곡을 마련하고 모두 모곡까지 아울러 징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이 호남 지방을 염찰(廉察)할 때에 장계를 올리기를,
“무릇 환자곡은 군대가 출동하면 군사상 필요한 물자가 되고 흉년이 들면 구휼하는 곡식이 되니, 진실로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곡을 출납하는 폐단이 적지 않으니, 만약 석수(石數)가 점점 늘어나서 나누어 주는 것이 더욱 많아지면 형세상 백성들의 곤궁함과 괴로움이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근래에 각 아문(衙門)에서 해마다 모곡을 내게 하여 백성들의 식량을 은밀히 빼앗고 점점 백성들의 재력을 고갈시키니, 지금 비록 세금을 감면하고 부역을 면제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특별히 명령을 내려서 모두 모곡을 거두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에게 면제해 주는 수량이 작은 고을은 수백 석이 되고 큰 고을은 수천 석이 될 것입니다. 백성들이 입는 혜택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또 회부곡(會付穀)은 오히려 국가에서 알고 있고 상평창의 모곡은 오히려 여러 경비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각 영(營)의 경우에는 회외곡(會外穀)을 자기들 영에서 사사로운 재물과 다름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 혹 공공연히 자기 수입으로 넣어서 모곡을 취하는 것이 도리어 원곡(元穀)보다 더 심하니, 이 어찌 사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고 헤아려서 백성을 좀먹는 일을 제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이때에 이르러 남한산성에 있는 환자곡의 모곡을 일체 광주부로 귀속시킬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유망하였거나 자손이 끊어진 가호와 구걸하는 자들의 누적된 포흠은 모곡으로 대신 충당하도록 허락하고, 4년이나 5년을 기한으로 하여 현재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8만 석의 수량을 채우게 하되 100석 이상을 거두지 못한 자는 해유(解由)를 받는 데에 구애가 되게 한다면 본부에서 거두어 바칠 때에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8만 석을 채운 뒤에는 해마다 2만 석을 내어서 환자곡으로 나누어 주고 항상 6만 석을 창고에 남겨 두게 하면 설령 사변이 있더라도 군량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4년 안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개색(改色)할 수가 있고 민간에서도 한꺼번에 가혹하게 거두는 데에 따른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대사간으로서 입대하여 백성의 재물을 은밀히 빼앗는 폐단에 대해 거듭 아뢰기를,
“원회곡의 수량이 많아지고 나서는 형편상 이것을 다 징수하였을 리가 만무한데, 각 고을에서는 각 아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매번 기준대로 다 거두어들였다고 기록하니, 만약 지금 변통하여 잘못된 규례를 깨끗하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라가 제대로 나라꼴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각 고을의 환자곡은 상평청과 감영, 병영, 통영, 수영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국곡(國穀)을 거두어들이는 규례에 따라 그 모곡을 가록(加錄)하는 일을 모두 금지하고, 원회곡의 모곡을 상평청으로 이관하는 일도 혁파하소서.”
하였으나 일이 시행되지 못하였다.
○ 처음에 조정의 신하들 중에는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로 청나라를 부모의 원수로 여기는 이가 많았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이 와서 접대하는 일이 생기면 번번이 관직을 사임할 것을 청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수찬(修撰) 김만균(金萬均)이 청나라는 조모(祖母)의 원수라 하여 대가(大駕)를 수행하는 일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고 두 번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이에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본원(本院)에서는 달리 청할 만한 벌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응교로서 차자를 올리기를,
“부자간(父子間)과 조손간(祖孫間)은 정리(情理)에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아비의 말을 감히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본래 통렬히 미워하고 깊이 질시할 만한 일이 아니며 감옥에 가두어 욕보일 만한 죄도 아닙니다. 합당한 형벌을 헤아려 시행해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대우하는 예를 보전하소서.”
하니, 상이 김만균을 파직하고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해 봄에 이상(貳相) 송시열은 주자(朱子)의 “복수(復讎)의 의리는 오세(五世)에 이르러 다한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서필원은 “조손간은 삼강(三綱)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면서 상소를 올려 서로 다투니, 이상에게 영합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이를 확대하여 고조, 증조, 종형제(從兄弟), 붕우(朋友)의 원수에까지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상은 이상 송시열을 소중히 여겨 그의 잘잘못을 드러내어 말씀하지 않았으나 이상을 추종하는 세력들의 편벽됨을 미워하여 4월에 간관(諫官) 두 사람을 멀리 외직에 보임하였고, 이조에서 사사로이 비호하고 권력을 독단했다 하여 이조 참의 민정중(閔鼎重)을 파직하고, 피혐하지 않고 간관을 구원했다 하여 집의 민유중(閔維重)을 체직하였다. 이때 진언(進言)하는 자가 선왕조에서 이정기(李廷夔)가 조부의 원수라는 이유로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하는 데 차임되지 않았음을 인용하자, 상이 이르기를,
“교린(交隣)과 사대(事大)를 똑같이 할 수는 없다.”
하였다. 6월에 공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온 조정이 동요하여 반년이 지나도 아직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처음에는 매우 작은 일이었는데 지금은 큰 관건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옳고 그름을 통촉하고 계시면서도 모든 하교(下敎)에 일찍이 한 번도 분명히 따지지 않으시고 다만 신하들이 거조(擧措)를 내는 데에서 생긴 작은 일을 거론하여 꺾으시니, 신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인조(仁祖)께서 겪으신 성하(城下)의 수치와 선대왕(先大王 효종)께서 품으신 평소의 뜻을 전하께서 반드시 잘 알고 계실 터인데, 이제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말에 대하여 일찍이 받아들이지 않으신 채 ‘교린과 사대를 똑같이 할 수 없다.’라는 하교를 내리시니, 의리로 볼 때 더욱 온당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개연(慨然)히 안색을 바꾸고 이르기를,
“나의 본의가 어찌 저 청나라를 섬기는 것을 천조(天朝 명나라)와 같이 생각하여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원수를 갚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지금 왜국은 우리나라를 진실로 핍박함이 없으나 청나라와 우리나라의 관계로 말하면 모든 일을 다 저 청나라에게 견제당하고 있어서이다. 내 비록 나이가 젊고 덕이 부족하나 조종조(祖宗朝)의 영원한 치욕을 어찌 감히 잊겠는가.”
하자, 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사세에 몰려서 신하들이 사사로운 정을 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다만 허락하지 않고 말았어야 하는데 지엄하신 하교가 계속 잇따르다 보니 대관(臺官)들이 공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신(大臣)들이 이 점을 아뢰어야 하는데도 모두 서필원의 공격을 받을까 우려해서 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 아뢰기를,
“지금 위와 아래가 마음이 서로 통하지 못하여 그 옳고 그름을 분명히 말하지 않다 보니 한갓 엄한 전지(傳旨)만 내리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한 뒤에야 소요를 진정시킬 수 있는데, 지금 신하들은 성상의 뜻이 있는 곳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진달하였는데, 내 이미 그 뜻을 잘 알고 있다.”
하였다. 이에 처분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자, 당시 사람들이 “공이 한마디 말로 군주를 깨우쳤다.”라고 칭송하였다.
○ 10월에 혜성이 나타나고 6일이 지나서 매서운 바람과 심한 우레가 일어나자, 다음 날 상이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관원을 인견하여 각각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게 하니, 모두들 사치를 금할 것을 아뢰었다. 공이 대사간으로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연경으로 가는 사신 행차 가운데 상의원(尙衣院)에서 무역하는 물건 중에 금령을 범한 물건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얻기 어려운 재화를 반드시 구하고자 하여 궁중에서 먼저 스스로 금령을 범한다면 사대부와 서민 중에 제도를 어기는 자를 어떻게 금지하며, 상인들이 금지하는 물건을 사사로이 사 오는 것을 어떻게 처벌하겠습니까. 금년 사행(使行)부터는 일절 사 오지 못하게 영구히 법식으로 삼는다면 또한 사단을 야기하여 모욕을 당할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 8일 후 인견할 때에 공은 공안(貢案)을 급히 고칠 것을 청하였다. 지난 연산군 신유년(1501, 연산군7)에 국가의 용도는 많은데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너무 적다 하여 조종조에서 마침내 공안을 늘렸다. 선조 갑술년(1574, 선조7)에 이르러 승지 이이(李珥)가 공안을 고쳐서 가혹하게 징수하는 폐단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고, 신사년(1581)에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 성혼(成渾)과 전라 도사(全羅都事) 조헌(趙憲)이 또 이것을 아뢰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진년(1604)에 국(局)을 설치하고 공안을 개정해서 고을 형편의 부유하고 가난함과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을 상고해서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되 참작하여 줄여 주어 공평하게 하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100년 된 폐단을 고쳤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 다시 폐단이 많아져서 효종 말년에 이것을 개정하도록 명하였으나 시일만 지체하고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재앙을 만나 경계하시고는 크게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십니다만, 삼가 근일의 조처를 보건대 또한 폐단이 많은 정사를 크게 개혁하여 생민(生民)들이 장구히 누릴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없습니다. 현재 폐단이 많은 정사 중에 제일 먼저 정비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은 공안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영원히 감면하도록 허락해 주고, 제철에 나지 않는 물건은 제철에 생산되는 물건으로 대신하는 등, 형편에 따라 재량하여 반드시 합당하게 하면 위로는 국가의 재용(財用)에 손해가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재력을 피폐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어찌 다만 한 가지 부세를 면제해 주고 한 가지 부역을 줄여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는 곳이라 해도 만약 이와 같이 잘 변통한다면 공물(貢物)의 값이 저절로 내릴 것이요, 값이 내리면 세금을 헤아려 줄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민생에 이익이 미치지 않겠습니까.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회의하여 모두 의견을 내게 하소서.”
하였다. 이 일을 비변사에 내려 품처(稟處)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사치를 금할 것을 아뢰었는데,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시임 수령은 감히 가옥을 건축할 수가 없는데 지금은 감사 중에도 가옥을 건축하는 자가 있으니 지극히 해괴합니다.”
하니, 마침내 대간에게 가옥을 건축한 지방관들을 적발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대간은 간언을 직임으로 삼으니, 만일 외직에 있으면서 재물을 실어다가 집을 짓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듣는 대로 논열(論列)해야 할 것인데, 어찌 굳이 적발하라는 하교가 내리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논하겠습니까. 상신(相臣)의 말에 그 감사의 이름을 밝혀 거론하지 않았으니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으며, 일찍이 감사와 수령을 지내면서 집을 건축한 자를 이루 다 손꼽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이름을 열거하여 올려서 함께 죄를 청해야 할 터인데, 이는 사체에 있어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또 대간으로 하여금 각기 들은 대로 논계(論啓)하게 하지 않고, 해당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신의 말로 인하여 적발하게 하는 것은 또한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감사와 수령으로서 가옥을 건축한 자들을 대간으로 하여금 적발하게 한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행조건(擧行條件)에 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은 또 아뢰기를,
“황해도 각 고을의 무오년(1618, 광해군10)ㆍ정묘년(1627, 인조5)ㆍ병자년(1636)에 전사한 여러 명색(名色)의 군사들에 대해 병조에서 지금까지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무릇 국가를 위하여 죽은 자들은 의당 정표(旌表)하고 그 고아들을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내려야 할 터인데, 이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백사장의 썩은 뼈다귀에 역포(役布)를 징수해 온 것이 47년이나 되었는데도 면제하지 않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담당 신하는 본 고을의 수령이 대정(代定)하지 못한 것에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대정하지 못한 것은 비록 고을 수령의 죄라 하더라도 어찌하여 수령이 지은 죄를 가지고 죽은 자에게 해독을 입히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또 지금 역포를 마련하여 바치는 자들은 전사한 자의 친척이 아니면 반드시 그 이웃 사람입니다. 이들이 부당하게 징수당한 지가 이제 40여 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대신할 자를 얻어 관청에 알리지 못했다면 대정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더러 군포를 감면해 준 때가 있었으나 단지 1, 2년 동안의 군포만 면제해 주고 끝내 그 이름을 도안(都案)에서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독촉하여 거두어들이는 폐해가 지금까지 근절되지 않는 것입니다. 청컨대 황해도 여러 고을의 무오년ㆍ정묘년ㆍ병자년에 전사한 군사들에 대한 징포를 모두 탕감하고, 원래의 군안 가운데에서 그 이름을 영영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로 하여금 전사한 군사 중 대정하지 못한 숫자를 조사하여 입계(入啓)하게 한 뒤에 감면을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이때 집의 이단상(李端相)이, 송시열(宋時烈)이 서울로 오지 않는 까닭을 아뢰기를,
“지난해에 수도(隧道)를 참람하게 사용한 일로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묘소를 이장하고 그 자손을 죄주자는 의논이 민유중(閔維重)에게서 나왔는데,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은 이것이 송시열에게서 나왔다고 하였으며, 또 일찍이 송시열의 복제(服制)에 관한 의논을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김좌명의 뜻이 이와 같다면 국구(國舅)의 뜻도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11월에 병조 판서 김좌명과 아우인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이 연이어 상소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진술하였는데, 이때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국구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저들은 또 장차 어떤 방향으로 일을 확대해 나가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동료와 함께 청대하여 아뢰기를,
“김좌명이 송시열과 서로 뜻이 부합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지만 만약 유신(儒臣)이 오지 않는 것이 오로지 김좌명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실로 옳지 않습니다.
또 이른바 ‘국구의 뜻도 반드시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억측인 듯하니, 표현이 온당치 못합니다. 다만 김좌명의 처지에서는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자책하면서 공론을 기다렸어야 할 터인데, 스스로 논열해서 잘잘못을 따지고 심지어는 ‘어떤 방향으로 확대해 나가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하였으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만일 이러한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더구나 김좌명이 어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근일에 이 일로 인하여 논의가 분분하니, 만약 이러한 때에 자세히 곡절을 지적하여 말씀하지 않는다면 끝내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킬 날이 없을 것이니, 조정의 시비를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병조 판서 김좌명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굳이 이런 일로 청대할 필요는 없다.”
하니, 헌납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반드시 이 일 때문에 청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오랫동안 성상의 용안을 뵙지 못하였고 현재 혜성의 변고 때문에 상하가 근심하고 경황이 없기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대략 아뢰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단상의 상소는 내가 바른말을 구했기 때문에 그르다고 하지 않았으나 송시열을 논한 일은 잘못되고 두서가 없는 말이 많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들도 합당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였다. 다음 날 좌상 홍명하(洪命夏)가 입대하여 김좌명을 파직한 것이 부당함을 아뢰고, 영상 정태화(鄭太和)와 우상 허적(許積)이 또 이 일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나 또한 파직하는 것이 온당한지 모르겠으나 대간(臺諫)들이 청대하기에 이르렀고 말한 뜻을 살펴보건대 또 심각한 쪽으로 귀결되니, 윤허하지 않으면 거북할 듯하기에 즉시 허락한 것이다.”
하였다. 좌상이 이어 아뢰기를,
“대간이 청대한 것은 신도 몰랐습니다. 이 일로 비록 체차할 수는 있으나 굳이 파직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대간을 체차하고 추고(推考)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이 이민서 등과 함께 인혐(引嫌)하고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대간들의 의논을 듣지 못했다 하여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일을 논할 적에 반드시 재상에게 명령을 받는다면 이는 바로 재상이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일 것이니, 대간이 군주의 눈과 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일이 재상에게 관계되는 것이라면 또한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옛날에 어사(御史)가 일을 논할 적에는 각각 자기 뜻대로 말하고 대부(大夫)에게 아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사대(御史臺) 안에는 장관(長官)이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더구나 재상의 경우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모두 체차하고 이르기를,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어서 청대했다고 한 것은 주운(朱雲)과 같은 의논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며, 재해를 입어서 황급하여 청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재해를 입은 지 오래된 상황에서 어제서야 청대하였으니,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였다. 이에 승정원과 사헌부, 옥당이 다투어 간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 이때 조공 복양(趙公復陽)이 금성(金城) 부군(府君)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영윤(令胤)이 풍채(風采)를 크게 떨치고 있고 소견이 모두 조리에 맞고 본말이 있으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크게 축하합니다.”
하였다. 십수 년 뒤에 신공 정(申公晸)이 《현종실록(顯宗實錄)》을 편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가 돌아가 그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모공(某公 남구만)이 건의한 것은 모두 국조(國朝) 중고(中古)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37세 을사년(1665, 현종6)
4월 12일에 금성(金城) 부군(府君)의 상을 당하였다.
8월에 금성 부군을 용인(龍仁)의 화곡(花谷)에 있는 평강(平康) 부군의 묘소 왼쪽 날등에 장례하였다.

38세 병오년(1666, 현종7)
5월에 누님인 박서계(朴西溪)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39세 정미년(1667, 현종8)
이해에 윤4월이 있으므로 5월에 복을 마치고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6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7월에 딸이 조태상(趙泰相)에게 시집갔으며, 순릉정자각중건청 당상(順陵丁字閣重建廳堂上)에 차임되었다.
8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평양 영위사(平壤迎慰使)에 차임되었다.
9월에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다.
11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 12월에 경기 감사가 수원(水原)의 요승(妖僧)에 대해 장계로 아뢰었다. 고사(故事)에 보면 아무리 급한 일을 알리는 글이라도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반드시 다 본 뒤에 임금께 올리도록 되어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체했다 하여 공을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조회할 때마다 남들보다 먼저 공문(公門)에 이르렀는데, 이날 마부와 말이 미처 도착하지 못했으므로 승정원에서부터 도보로 걸어 의금부에 나아갔다. 혹자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죄인으로서 수레에 멍에를 매기를 기다려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40세 무신년(1668, 현종9)
1월에 전경 문신 전강(專經文臣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2월에 상소하여 배를 파손한 죄인을 곧바로 사형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음을 논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4월에 승문원 부제조에 차임되고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6월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되었다.
7월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8월에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9월에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노모 곁을 떠나기 어렵다 하여 상소를 올려 해임해 주기를 청하니, 대사간으로 옮겨 제수하였다.
10월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아들이 관례(冠禮)할 때에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빈(賓)이 되었다. 이달에 우승지로 옮겼으며 아들의 혼인으로 인해 휴가를 받아 나주(羅州)에 갔다. 공이 상소하여 한오상(韓五相)을 전시(殿試)에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12월에 아들 남학명(南鶴鳴)이 목사(牧使) 이공 민서(李公敏敍)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 2월에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의 말로 인하여 세선(稅船)을 고의로 파손한 권시담(權時淡)을 효시(梟示)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라고 명하였다. 형조에서는 “권시담을 오랫동안 심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는데 지레 먼저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부당하다.”라고 복주(覆奏)하니,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배를 파손한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을 강가에서 효시하라는 명령을 이미 내렸으니, 형벌을 시행할지 말지는 논할 바가 아니다.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공이 형조 참의로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조운사목(漕運事目)을 가져다 보니 ‘쌀을 도둑질하여 죄상이 드러난 자는 효시하고 용서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미 죄상이 드러났다.’라는 말은 오히려 자복하여 진실을 밝혔다는 의미이니, 죄를 따지지 않고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지금 권시담은 도둑질한 곡물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감옥에 함께 갇힌 죄수 일곱 명 중에 한 사람도 자백한 자가 없으니, 그렇다면 율문(律文)의 이른바 여러 사람의 자복이나 증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아직 형사상 판결이 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가지고 죄상이 드러났다고 하여 조운사목을 끌어다가 처형해서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키는 밑거름으로 삼으신다면, 비록 일시적으로는 상쾌하겠으나 실로 법령에는 위배됩니다. 정위(廷尉)의 저울대가 한번 기울면 형벌의 경중에 기준이 없게 될 것이니, 백성들이 어떻게 손과 발을 마음대로 펼 수 있겠습니까. 장석지(張釋之)의 말에, ‘만일 그 당시에 상께서 당장 죽이셨다면 모르겠지만 이제 이미 정위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법이 이와 같은데도 더 무겁게 처벌하신다면 법이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권시담의 죄가 본래 묻지도 않고 효시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를 체포한 초기에 즉시 죽였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법을 맡은 형조에 보내서 조사하고 신문하여 해를 넘겼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형벌을 시행한다면 어찌 심히 명분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백성들은 곤궁하고 하늘은 노여워하여 온갖 재변(災變)과 괴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비록 백성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하문하시고 여러 옥사(獄事)들을 신중히 처리하시더라도 행여 천명(天命)을 잇고 하늘의 아름다운 복을 받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죄인을 곧바로 죽이는 형벌을 시행하여 백성들이 놀라고 의혹을 품게 한단 말입니까.
신이 형조에서 봉직하고 있으므로 직책을 가지고 간하는 의리에 삼가 기대어 아뢰는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 밝게 살펴 주소서.”
하였다. 이날 형조에서 아뢰기를,
“죄인을 효시하는 일은 마땅히 시행해야 하나 본조(本曹) 참의의 상소문에 대한 비답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시행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은 상소의 내용대로 거행하되 우선 사형을 집행하지 말고 속히 엄히 신문(訊問)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거듭 조사하여 그 죄를 경감하여 살려 주는 의논에 부쳤다.
○ 6월에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되었다. 7월에 대사간 장선징(張善澂)이 아뢰기를,
“근래 당상관(堂上官)으로 청망(淸望)에 오른 자는 그 숫자가 더욱 적은데도 이들이 새로 제수되면서 외직에 보임되었습니다. 이는 이조가 내외의 경중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정사의 체통이 마땅함을 잃은 것이니,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이조의 해당 당상관과 낭청을 체차하고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체직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 처음에 선조(宣祖) 때 여러 왕자(王子)와 옹주(翁主)에게 별도로 사패 노비(賜牌奴婢) 8구(口)만을 하사하였고, 8구 중에 혹 탈이 있으면 대정(代定)하게 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장례원(掌隷院)에서 법례(法例)를 아뢰기를,
“무릇 사패 노비를 한 번 받아 나가면 비록 여러 가지 탈이 있더라도 다시 받을 수가 없는데, 임진왜란 뒤에 여러 공신 집에서 다시 받은 경우가 많아 매우 의의(意義)가 없으며 궁가에서도 이런 잘못된 전례를 본받으니, 지금 이후로 일절 추후에 다시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사패 노비 100구를 특별히 하사하고 또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450구를 하사하였으나 탈이 있다 하여 대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효종(孝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인조(仁祖)가 영창대군의 전례(前例)는 너무 많다 해서 330구를 하사하였고 공주에게도 이와 같이 하였으며, 왕자와 옹주는 마침내 150구로 숫자를 정하였다. 그 뒤에 대군방(大君房)의 사무를 관장한 자가 사패 노비 중에 탈이 있다 하여 대정할 것을 청하자 장례원에서 상의 재가를 청하였는데, 대정을 금지하는 교지를 내리지 않았으면 개정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판하(判下)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여러 궁가의 사패 노비에 대해 10여 년이 흐르도록 교지를 내리지 않았다 하여 잇따라 대정해 주다 보니, 더욱 한도가 없어서 원래의 숫자가 있으나 계속 대정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해 8월에 공이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었는데, 숙명공주(淑明公主)와 숙휘공주(淑徽公主), 숭선군(崇善君) 등 각 방(房)의 노비가 모두 탈이 있어 대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은 본원(本院)의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고 상계하기를,
“왕자와 옹주의 노비 150구는 선조조(宣祖朝)에서 8구를 하사한 것에 비하면 이미 수십 배가 넘습니다. 여러 궁가에서 전후로 대정하면서 한 방(房)에서 아뢰는 단자가 거의 40여 장에 이르니, 공사 간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양조(兩朝)에서 수교(受敎)한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진실로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사패하라는 명령이 내린 뒤에 오랫동안 교지를 내리지 않았는데, 이는 사체(事體)에 있어서 지극히 온당하지 못합니다. 지금 사환(使喚)과 수공 노비(收貢奴婢)의 명단을 한결같이 법에 따라 만들어 주고, 이후로 탈이 있어 대정을 청할 경우 일절 허락하지 말도록 영원히 정식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10월에 공이 좌부승지로 양심합(養心閤)에 입시하였을 때에 상이 《심경(心經)》의 “욕심을 막고 선으로 옮겨 간다.〔窒慾遷善〕”라는 내용을 강하였다. 영경연사 송시열이 일도양단(一刀兩段)으로 욕심을 끊어야 한다는 말을 아뢰었는데, 공이 그 계제에 사패 노비를 대정하는 폐단을 거듭 아뢰니, 상은 마침내 사패 노비 중에 탈이 있어 대정을 청할 경우 일절 허락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상은 정식(定式)을 환수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이 일은 본래 할 수가 없는데 승지가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을사년(1665, 현종6) 이후로 상은 공을 중임에 낙점(落點)하지 않고 여러 번 승지를 제수하되 반드시 형방(刑房)에 한정하였으니, 이는 공이 형벌을 자세히 살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처음에 참봉 한오상(韓五相)이 젊어서부터 이름이 알려져 임진년(1652, 효종3) 문과(文科) 회시(會試)에 급제하였는데, 전시(殿試)를 보기 전에 부친상을 당하고 복을 끝마치기도 전에 모친상을 당하여 마침내 너무 슬퍼한 나머지 생명을 잃었으며 또 자식도 없었다. 공은 젊어서 한오상과 함께 학업을 익혔는데, 이때에 상소하여 전시에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니, 마침내 주서(注書)를 추증하였다.

41세 기유년(1669, 현종10)
1월에 우승지에 제수되고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2월에 종실 및 유생의 친림 전강(親臨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이정청 부제조(釐正廳副提調)에 차임되었다.
4월에 시관(試官)으로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파직되었다.
8월에 서용(敍用)되어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며, 세자의 입학례(入學禮)와 작헌례(酌獻禮)에 참여하고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10월에 정시(庭試) 대독관(對讀官)에 차임되고 승문원 부제조에 차임되었다.

○ 1월에 공은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십고 십상(十考十上)이면 주의(注擬)하는 법을 한결같이 따라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천리 밖에 있는 자가 감찰(監察)을 얻은 경우가 있고, 대간(臺諫)의 풍채가 부족한 자를 외직으로 바꾸며, 아무 까닭 없이 배척당하여 등용되지 못한 자를 소통시켜 청환(淸宦)에 오르게 하니, 근거 없는 의논이 분분하여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3월에 공이 사직을 원하는 상소를 올리자, 상은 해임을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소장(疏章)을 여러 번 올리면서 세 번이나 패초에 나오지 않으니, 승정원에서 공의 병이 위중하다고 아뢰었다. 4월에 공을 시관으로 패초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파직되었다.
○ 이보다 앞서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정리할 것을 청하고, 좌상 허적(許積)이 《대전속록(大典續錄)》과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수교(受敎)를 일찍이 개정(改正)하라는 명이 있었다 하여, 전장(典章)을 잘 아는 사람을 선발해서 회의하여 개정할 것을 청하니, 상은 개정하기를 기다려 《대전》을 정리하도록 명하였다. 마침내 국(局)을 설치하고 공을 당상관에 차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파직되었다. 8월에 대신이 상에게 공을 서용하도록 아뢰었는데, 이는 다시 의논하여 개정할 것을 생각한 것이나 끝내 결행하지 못하였다.
○ 공은 상복을 벗은 뒤로 병이 많아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봉직할 수 없고 세상일이 뜻과 같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마침내 교외에 거주할 생각으로 말 한 필을 타고 동쪽으로 망우현(忘憂峴)을 나가 광진(廣津) 북쪽의 아차산(峩嵯山) 아래에 이르렀다. 그러나 산을 살 만한 재력이 없으므로 주인 없는 땅을 찾았다. 한강 언덕에서 1마장 쯤 떨어진 곳에 낙락장송이 늘어서 있고 폭포수가 아래로 쏟아져 흐르고 있었는데, 부근 사람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머리를 감으며 약수암(藥水巖)이라고 불렀다. 공은 마침내 그 동북쪽 절벽 아래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으나 공사가 원만하지 못하고 재력이 미치지 못해서 왕래한 지 수년 만에 겨우 벽에 흙을 바르고 이해 여름에 이곳에 머물렀다. 김공 만기(金公萬基)가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매번 본댁으로 문후하러 가도 뵙지 못하니, 강물을 구경하는 흥치가 아직 다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하였다. 공은 서울에 있는 집을 미재(美齋)라고 자호(自號)하고는 스스로 이르기를,
“《주역》의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다.〔美在其中〕’라는 내용과 《맹자》의 ‘충실한 것을 미인(美人)이라 이른다.〔充實之謂美〕’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약천(藥泉)이라 호하였다. 신미년(1691, 숙종17)에 양대(兩代)의 석물(石物)을 장만할 때에 마침내 이 정자를 팔았다.
○ 공은 가을과 겨울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매번 과시(課試)할 때마다 종일토록 청사(廳事)에 앉아 있었고 방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남공 용익(南公龍翼)이 저녁 무렵에 교외에서 돌아오다가 집으로 찾아와 공에게 문안하고 말하기를,
“공이 인재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문장을 급히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였다. 당론이 서로 분열된 뒤로부터 유생들이 성균관에 거처하려 하지 않고, 심지어는 석전(釋奠)을 피할 방법을 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석전을 올릴 때에 재임(齋任)이 유생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고 기한을 정한 다음 성균관의 하인들을 매질하였는데, 이것을 별독(別督)이라 칭하였는바, 그래도 오는 유생이 적었다. 공은 별독을 파하고 《청금록(靑衿錄)》을 만들어 한 식년(式年)에 한 번 석전에 참여하고 혹 세 번 분향(焚香)에 참여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마침 대과(大科)가 있어서 제생들이 하루도 못 되어 몰려오니 반촌(泮村)이 이 때문에 꽉 찼다. 그리고 공은 명망 있는 관원으로 사성(司成)을 겸직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하련대(下輦臺)에 큰 집을 짓고자 그 설계도를 그리고 목공을 불러 경비를 물었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강행(講行)하였는데, 마침 직책을 떠나게 되어 결행하지 못하였다. 뒤에 북번(北藩 함경도)에 부임했을 때에 과거 큰 집을 짓고자 그린 설계도대로 운전서원(雲田書院)의 강당(講堂)을 지었다.

42세 경술년(1670, 현종11)
3월에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4월에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결성(結城)으로 돌아갔다.
5월에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7월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이해에 큰 기근이 들었다.
12월에 공이 상소하여 폐단을 아뢰었다.

○ 공은 지난해 11월 15일에 상소하여 과거를 시행하는 마땅한 도리를 아뢰고, 또 군사의 징발과 군포의 징수를 늦추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해 2월 18일에 상이 비답을 내릴 때에 자신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4월에 공이 대부인을 모시고 결성으로 돌아왔다. 공은 뒤에 북쪽 변방에 있을 적에 아들에게 부친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경술년(1670, 현종11)에 물러간 것은 진실로 견지한 뜻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뒤로 나가 쭉 관리가 되었고 계속해서 직임을 받게 되었다.”
하였다.
○ 이번에 길을 떠나갈 때에 홍주성(洪州城)에서 10리를 지나 전려로 돌아갔는데,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공 세화(李公世華)와는 예부터 친하였으나 공은 통문(通問)하지 않았다. 이공이 공의 서울 집에 음식을 전하게 하였는데, 음식을 가지고 간 사람이 돌아와 말하기를,
“남 영감(南令監)이 결성으로 돌아간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공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옛날에 비록 관청에는 드나들지 말라는 말이 있으나 어찌 나를 박대함이 이와 같은가?”
하고 자주 와서 만나 보았으나 공은 한 번도 답방하지 않았다. 이웃 노인이 일찍이 공에게 작은 회화나무를 옮겨 심도록 허락하였는데, 공은 얼마 후에 다른 사람이 또 달라고 청했다는 말을 듣고는 사양하고 심지 않았다. 노래하는 기생이 시중드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고 비록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돌이라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한 번도 벽에 서화(書畵)를 붙여 두지 않았으며, “남을 해치지도 않고 재물을 탐하지도 않으면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不忮不求 何用不臧〕”라는 말을 항상 외워서 자손들을 경계시켰다.
○ 공은 7월에 청주 목사에 제수되고 다음 날 관청에 부임했는데, 고을 백성과 사족(士族)들이 간혹 골육 간에 송사하는 것을 서글퍼하였다. 그리하여 방문(榜文)을 써 붙여 타이르기를,
“동성(同姓) 8촌 이내와 이성(異姓) 4촌 이내의 친족 간에 서로 송사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 죄부터 먼저 다스리겠다.”
하였다. 이해에 큰 흉년이 드니, 12월에 공이 상소하여 폐단을 아뢰고, 또 본주(本州)의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그대로 남겨 두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본주는 뱃길이 아득히 멀어서 물건을 사고팔 길이 없고, 또 해마다 기근이 들어 민간에 물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장에는 곡식을 파는 행상이 없고 마을에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라고 권유할 만한 부자가 없습니다. 팔도(八道)가 모두 흉년이 들어서 쌀을 팔아 올 곳이 없으니, 구휼을 위해 백성을 이주시키고 곡식을 실어 오는 일이 모두 불가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본주의 전세와 남은 대동미 가운데 지난번 상납(上納)할 적에 육지로 운송하고 배로 실어 가느라 허비하는 것이 수없이 많아서, 백성들이 셋을 내면 서울에 수송한 것은 겨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만약 수납한 것을 본주에 보관하여 백성들을 구휼하는 곡물로 충당한다면, 혹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성 중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굶어 죽어서 시신이 도랑이나 골짜기에 버려지게 될 자들은 미음이나 죽으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만,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다소 여유가 있어 농사짓고 누에치기를 힘쓰며 국가의 부세에 응하는 자들에게 만일 세금을 경감하고 부역을 줄여 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모두 일어나서 굶주린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군(州郡)에서는 의뢰할 기반이 없어질 것이고, 미처 다 구휼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려되는 것은 단지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의 곤궁함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만약 전세를 본 고을에 남겨 두게 하면 전세를 낸 백성들이 이것을 운반하느라 소모하는 비용에 대한 걱정을 면할 수 있고, 구휼해 먹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먹고살 밑천을 그런대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휼이 끝난 뒤에 만약 가을 농사가 풍년이 들면 또 장차 다시 거두어 국고(國庫)의 소유가 될 것이니, 관청에는 조금도 줄어드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혜택을 받는 것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여 살펴 주소서.”
하였다.

43세 신해년(1671, 현종12)
1월에 상은 공의 상소를 비변사에 내려서 전세와 대동미를 그대로 남겨 두도록 허락하였다. 이해 봄에 공은 죽을 쑤어 백성을 구휼하는 곳을 10여 곳에 마련하고 백성들에게 모내기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5월에 고모(姑母)인 오 학사(吳學士)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7월에 함경도 관찰사로 옮겨 발탁되었다.
10월에 공이 하직하고 길을 떠날 적에 상이 인견하였다.
11월에 대부인을 모시고 감영에 이르렀으며, 이달에 마침내 북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12월에 장계를 올려 각 고을 백성들의 부역을 등급을 논하지 말고 일체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 봄에 기근으로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였는데, 본 고을은 지역이 광활하므로 공은 죽을 쑤어 백성을 구휼하는 곳을 10여 곳에 마련하고 몸소 순찰하여 살폈다. 선비를 뽑아 유사를 맡기고 국가에 유익한 충성스러운 의논을 널리 들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지극한 정성을 보고 차마 속이지 못하였으며 서리(胥吏)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은혜가 골고루 미치고 재물을 허비하지 않았다. 공은 굶주린 토착민들에게 양식을 지급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장차 가물 것이라 하여 백성들에게 모내기하는 것을 금지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불편하게 여겼으나 나중에는 그 은택을 알았다. 공은 전세와 대동미를 그대로 남겨 둘 것을 청하고, 마침내 다른 고을에도 모두 똑같이 하였으며, 다른 고을의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또 많이 모여들어서 길거리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똑같이 보살피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름에 또다시 보리농사가 크게 흉년이 드니, 공은 월름(月廩)을 절약하였다. 6월에 관청에 남아 있는 쌀 700여 석을 모두 꺼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백급(白給)하되 굶주린 백성을 선별할 수 없다 하여 식구가 많은 가호에는 1두를 주고 식구가 적은 가호에는 7승을 주었으며, 심지어 관청에 비축한 밀가루와 장(漿)을 방출하여 죽을 쑤어 계속 대게 하였다. 이에 온전히 살아남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죽어 가는 자도 말하기를,
“이는 내가 복이 없어서이고 우리 사또가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 노략질하는 자가 많았으나 오직 청주의 경내에는 없었다. 공이 관찰사로 옮겨 발탁되자, 청주의 백성들은 조정에서 금지한다 하여 감히 금석(金石)에 공덕을 새기지 못하고 유애각(遺愛閣)을 북문 안에 세웠는데, 송상 시열(宋相時烈)이 경내에 머물 적에 이 일을 기록하여 판각하였다. 7년 뒤 겨울에 공의 내제(內弟)인 권공 준(權公儁)이 충주(忠州)에서 결성(結城)에 은거하고 있는 공을 찾아갈 적에 청주를 경유하여 지나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서 마을의 노인에게 유숙할 것을 청하니, 그곳 풍속이 외지인이 묵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하던 차에 “어디를 가느냐?”라고 묻기에 남공(南公)의 내제라고 대답하였다. 노인은 그 말을 듣자 놀라서 별안간 내려와 절을 하고, 아내를 불러 이르기를, “남 영감의 아우이다.” 하고는 빨리 음식을 장만해 올리라고 재촉하였으며, 심지어 종과 말먹이도 다 그렇게 대접받았으니, 공이 남긴 사랑의 가피가 이와 같았다.
○ 조정에서는 이보다 3년 전에 공을 서북 지방 감사에 연달아 의망하였는데, 이해 여름에 예조 참판에 의망하였다가 7월에 마침내 함경 감사로 옮겨 발탁하였다. 그다음 달에 공이 서울에 이르렀는데, 9월에 상이 공의 사직소에 대해 “이번에 발탁한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라고 답하였다. 이때 의졸공(宜拙公) 또한 충청 감사에 제수되니, 10월에 함께 가서 성묘하였다. 11월에 공은 함경도 감영에 이르러 6일을 머물다가 마침내 북쪽으로 순행하였다. 이때 비변사에서는 전 감사가 재실(災實)을 판별할 때에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해서 정밀하게 조사할 것을 계청(啓請)하여 마침내 이문(移文)을 보내왔다. 이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신은 감영에 도착하자마자 남관(南關)의 각 고을을 순행하였는데, 밭과 들의 곡식은 이미 수확한 상태여서 백성들의 호소와 수령들의 보고를 채집하는 데에 불과하였습니다. 비록 허실을 자세히 참고하여 살폈으나 끝내 십분 정밀하고 합당한 것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겨울철이 반이 지났으니, 만약 신이 북쪽 지방을 모두 순행한 다음 장계로 보고한 뒤에 백성들의 부역을 감면할 것을 의논한다면 설을 쇤 뒤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그사이에 각 관사에서 연달아 빚을 독촉하여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헐벗은 자들이 만약 침해를 당한다면 끝내 곡식을 마련하여 나라에 바치지 못할 것이요, 겨우 목숨만 보전한 자도 반드시 모두 재력이 고갈되고 가산을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조정에서 베푸는 은혜는 건어물 가게의 말라빠진 물고기에게 물을 끌어다 대 주는 것과 같아서 끝내 유익한 바가 없을 것입니다. 결코 쉽게 징수할 수 없는 백성들의 중대한 부역은 우선 경중을 구별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곡물을 옮겨다가 주는 것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으니,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미리 요량하게 하면 명년 3, 4월 사이에 거의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12월 경흥(慶興)에 이르러 장계를 올리기를,
“갑산(甲山)과 삼수(三水) 두 고을은 북쪽을 순행하는 일보다 형편이 더 급합니다. 돌아가는 길에 순행하여 살핀다 해도 아직도 10여 일의 노정이 남아 있으니, 순행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되면 반드시 너무 늦어서 제때에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미리 장계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번에 각 고을을 등급에 따라 나눈 것은 재해의 경중에 따라 부역을 감면해 주기 위해서인데, 이 가운데 가장 넉넉한 두세 고을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관청의 곡식과 백성들의 저축이 혹 3월이나 4월까지 지탱할 수 있으나 본도(本道)의 보리 수확은 으레 6, 7월 사이에나 있게 됩니다. 3, 4월까지 지탱할 수 있는 자를 만약 1, 2월에 양식이 떨어지는 자에 비한다면 진실로 다소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굶어 죽는 사정을 논한다면 다만 이르고 늦는 차이가 있을 뿐이니, 어찌 차등이 있겠습니까.
마포(麻布)의 경우는 바로 본도에서 생산되는 것이니, 전역(田役)과 신역(身役)으로 바치는 것과 몸을 가릴 물품을 오로지 이에 의지하고 있는데, 금년 흉년의 재난 중에 마포가 더욱 심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헐벗은 자들의 가엾은 정상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바입니다. 만약 등급을 나누어서 재해의 경중을 차별한다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의 위급한 처지를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니, 지난해 재해를 입은 고을의 예(例)에 따라서 전역과 공물(貢物), 신공(身貢) 등으로 내는 미(米)와 포(布)를 등급을 따지지 말고 일체 모두 감면하거나 면제한다면, 비록 한 지방을 다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죽어도 여한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이에 황공한 마음으로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다.

44세 임자년(1672, 현종13)
1월에 상은 공의 장계를 진휼청에 내려 각 고을의 부역을 감면해 주도록 허락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공은 이달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2월에 공이 장계로 아뢰니,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역을 절반으로 감면하고 원양도(原襄道)와 평안도의 곡식을 수송해서 백성을 구제하도록 허락하였다.
3월에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이달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4월에 북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길주(吉州)에 이르러 병에 걸려서 5월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공은 이달에 수령들로 하여금 황폐한 전지를 뽑아 기록해 올리고 종자를 지급하게 하였다.
6월에 장계를 올려 서로(西路)에서 군포를 얻어다가 순행하는 고을에서 시재(試才)하여 시상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평안도 병영의 군포를 옮겨 주었다.
8월에 장계를 올려 영남 지방의 쌀을 얻어 이듬해 봄에 굶주릴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10월에 남쪽 고을을 순행하여 순방한 여러 고을과 진보(鎭堡)에서 군사들을 모아 놓고 활쏘기를 시험하여 시상하였으며, 길주에 이르러 장차 북쪽 고을을 순행하려 하였는데, 함흥(咸興)에 있는 정릉(定陵)과 화릉(和陵)의 정자각(丁字閣)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그대로 돌아왔다.
12월에 동춘(同春) 송공(宋公)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신위를 설치하고 스승을 위해 시마복(緦麻服)을 입었다.

○ 1월에 진휼청에서 공의 장계에 대해 복주(覆奏)하여 경흥(慶興), 온성(穩城), 이성(利城), 홍원(洪原) 네 고을은 공물의 본색(本色) 이외에 가포(價布)로 대납하는 것과 주(州)에서 진상하는 공물에 대한 작미(作米)와 내노비(內奴婢), 시노비(寺奴婢), 궁노비(宮奴婢), 각 아문의 노비에 대한 공포(貢布)와 공미(貢米)를 모두 감면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전세(田稅)로 바치는 쌀과 콩을 모두 감면하였다. 부령(富寧), 경원(慶源), 종성(鍾城), 회령(會寧) 네 고을은 전세로 바치는 쌀과 콩을 절반으로 감면하고, 부령 등 네 고을 및 단천(端川), 북청(北靑), 함흥(咸興), 정평(定平), 문천(文川), 덕원(德源), 안변(安邊)의 일곱 고을은 공물의 본색 이외에 가포로 대납하는 것을 절반으로 감면하였으며, 주에서 진상하는 공물에 대한 작미와 내노비, 시노비, 궁노비와 각 아문의 노비, 사노비(私奴婢)의 공포와 공미를 모두 감면하였으며, 공물의 본색을 상납할 때에 역가(役價)와 작지가(作紙價)를 다 감면하였다.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단천 이하 일곱 고을은 똑같이 지차읍(之次邑)인데 경원과 종성에 비하면 재해를 입은 것이 매우 심하니, 세금으로 바치는 쌀과 콩의 감면 여부를 따져 일체 시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경성(鏡城), 명천(明川), 길주(吉州), 영흥(永興), 고원(高原)의 경우는 이른바 작황이 조금 넉넉하다는 곳인데도 바로 평년에 비해 아주 심한 흉년이 들었으니, 어찌 크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원래 세금을 감면하거나 면제함이 없으니, 거두어들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것도 혹 균등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근래 들어 해마다 감면해 주었는데 지금 만약 이들 고을을 또다시 줄여 준다면 경중(京中)의 재정이 곤궁해질 것임을 또한 상상하여 알 수 있습니다. 본영(本營)에서 비축하고 있는 은자(銀子) 중에 이번에 진휼청에 올려 보내야 할 것이 600냥이고 남아 있는 것이 600냥인데 본영에서 달리 쓸 곳이 없으니, 차라리 이것을 다 보내지 말고 경성 등 다섯 고을 백성들의 신역으로 추이(推移)하여 감면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2월에 공이 또 각 고을의 기병과 보병의 보인(保人)과 정로위(定虜衛)ㆍ갑사(甲士)ㆍ금군(禁軍)의 보인과 여정(餘丁)에 대한 신역을 일체 감면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 일을 진휼청과 비변사에 내려 일곱 고을의 전세와 다섯 고을의 노비 신공을 모두 절반으로 줄이도록 허락하고, 각 고을의 군병의 신역도 이와 같이 하니, 이에 곤궁한 백성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진휼청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원양도(原襄道)에 비축되어 있는 곡식 1천여 석과 평안도에 있는 1만여 석을 획급(劃給)해 주니,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이는 비록 곤궁한 백성들을 다 구제할 수는 없으나 또한 1만여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으니, 차후에 균등하게 구휼하지 못한 죄는 다만 관리들을 꾸짖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달에 공은 굶주려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자가 많으므로 각 고을에 분부하여 친족이 없는 곤궁한 자에게 쌀과 소금을 지급하게 하고, 또 장계로 아뢰어서 해사(該司)로 하여금 약품을 넉넉히 보낼 것을 청하였다.
○ 공이 처음 하직하고 길을 떠나올 때에 상이 이르기를,
“육진(六鎭)은 더욱 유념해야 할 곳이니, 백성들이 유리(流離)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매우 합당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육진뿐만 아니라 여러 고을이 모두 그러한데 본도의 곡식으로는 형편상 두루 구제하기가 어려우니, 백성들을 고을에 남아 있게 하여 다 죽이는 것보다는 유리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금하지 말아서 모쪼록 생존을 도모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상이 다른 도(道)에 있는 자는 호구(戶口)를 조사하고 나서 머물게 하여 음식을 먹이도록 명하였다. 이때 북쪽 지방 백성들은 삼수와 갑산이 매우 심한 재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여 다른 고을에서 기어서 들어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다른 고을도 각각 외지로부터 들어온 유민(流民)들이 있어서 토착민과 유민 모두가 서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수와 갑산의 수령들이 이들을 본토로 쇄환(刷還)하고자 하여 외지에서 들어온 장정 4, 5십 명을 가두자, 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을 몰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짓은 결코 차마 할 수가 없으니, 우선 보증을 하고 석방해 주어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타일러서 보내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는 남게 하여 음식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백성은 많고 곡식은 부족하자, 1월에 공이 장계로 아뢰어서 진휼청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지휘하게 할 것을 청하니, 진휼청에서 공문을 보내기를,
“각 고을로 하여금 토착민을 각각 먹이게 하되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에 올리지 않은 자는 환자곡을 주지 말고 죽을 먹이지 말며, 유리하며 걸식하는 무리들은 같은 도와 다른 도를 막론하고 노정을 계산하여 양식을 지급해서 본적지로 보내고, 구휼을 마친 뒤에 성책(成冊)을 가져다 살펴보아 경내의 백성이 다른 고을로 가장 많이 유리한 고을의 수령을 엄중하게 문책하라.”
하였다. 공은 이것을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 부근의 수령에게 자문하니, 모두 의견이 같았다. 2월에 공이 사사로운 편지를 보내 진휼청 당상 민정중(閔鼎重) 등 제공(諸公)을 책망하고, 다시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흉년에 백성들이 유리하고 흩어지는 것은 예로부터 늘상 있는 일이니, 사람이 먹을 것이 없으면 마침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각 고을로 하여금 다만 자기 고을 백성들만 먹이게 하고자 한다면 이미 고향을 떠난 자들은 뿌리가 잘린 풀과 같으니, 비록 이러한 명령을 듣는다 해도 결코 고향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각 고을 수령들의 마음은 본래 유민(流民)들을 미워하니, 진정으로 측은히 여겨서 기어이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자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무리들을 물리쳐 내쫓고자 합니다. 그러나 감히 공공연하게 이들이 구렁텅이에 구르며 죽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이 나고 상사(上司)의 책망을 받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각 고을에 자기 고을의 토착민만을 구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이 유민들은 반드시 죽어서 시신이 시궁창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 가운데 토착민이 굶어 죽은 경우가 있더라도 각 고을에서는 반드시 모두 이들을 가리켜 유민이라 할 것이니, 실로 허실을 분별하여 죄를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해 구휼할 때에 한갓 곡물만 허비하고 혹 백성들이 죽음을 면치 못하기도 하였으니, 이 일을 마땅히 징계해야 합니다. 만일 지난해에 유민들을 먹이지 않았다면 죽은 자가 이 수효보다 더 많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현재 호적에 있는 사람과 창고에 있는 곡식의 많고 적음을 대략 계산해 보건대 종자를 계산해 지급하고 굶주린 자들을 다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분명하니, 오직 함께 구제하여 모두 살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재정이 바닥나고 형편이 어쩔 수 없게 된 뒤에는 비록 계속해서 대 주지 못하더라도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실정을 다 알게 되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곡물을 절약하고 비축하고자 하여 다만 토착민만 먹인다면 보탬이 되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많을까 크게 염려됩니다.”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신이 본도에 와서 보니, 호구(戶口)를 내보이는 자는 몇 명이 안 됩니다. 호구를 내보이지 않는 자들이 모두 호적에 올라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생각건대 호적에서 누락된 자가 또한 반드시 많을 것이니, 이제 이들을 모두 조사하고자 하면 소요가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굶주린 백성들 가운데 길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모두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평소에 유리하며 옮겨 다니고 근거지가 없어서 신역(身役)을 바치지 않은 정상은 진실로 크게 미워할 만하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호구가 없다는 이유로 죽는 것을 보고 구원하지 않는다면 인정을 베푸는 도리에 있어서 또한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또 한 가호 안에 혹은 10여 명이 한 호구에 함께 실려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2, 3십 명이 한 호구에 함께 실려 있는 경우도 있는데, 유리하며 옮겨 다니는 자들은 모두 호주(戶主) 아래의 솔정(率丁)과 노약자들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각각 호구를 내보이게 해서 허실을 징험한다면 형편상 참으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호구의 장적(帳籍)을 조사하고자 한다면 또한 몸은 이 고을에 사나 이름은 다른 고을의 호적에 올린 자도 있고, 혹은 늙거나 나이가 어리고 또는 굶주려서 자기가 사는 곳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인데, 이들을 조사하여 밝히는 사이에 반드시 지레 먼저 죽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이제 호구를 징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환자곡으로 죽을 쑤어 먹이는 길을 끊어 버린다면 형편상 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 각각 토착민만 구휼한다는 이유를 들어 다른 고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면 이 유민들이 어느 곳으로 돌아갈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들이 마침내 구걸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사람을 죽이고 도적질하는 일마저 전혀 거리낌 없이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방금 한성부에서 또다시 본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편으로 단자(單子)를 받아 호구를 만들어 주고 한편으로는 죽을 쑤어 먹이고 환자곡을 지급하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더더욱 시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호적을 수정(修正)하는 것은 비록 1년 내내 조사하여 십분 상세히 살피더라도 착오가 생기고 잘못되는 폐단을 면할 수가 없는데, 마침내 진휼을 베풀어 사람들이 북적대는 때와 유민과 토착민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사이에 그들로 하여금 호적을 써서 올리게 하면 이들은 모두 한때에 얻어먹는 것을 급하게 여겨서 한 사람이 각각 천 장, 백 장씩 써서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호적을 만들어 주면 죽을 먹고 환자곡을 받은 뒤에는 바로 도망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입니다. 구휼하여 줄 때의 허위와 혼잡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며, 호적을 수정할 때에 또한 무엇에 근거하여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또 그중에 더욱 심하게 굶주리고 곤궁한 자는 반드시 종이와 먹을 얻지 못하여 단자를 써서 올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의 얕은 생각에는 환자곡을 제급(題給)하는 것은 설령 호적을 상고하고 징험한다 하더라도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은 유민과 토착민, 호구의 유무를 따지지 말고 모두 지난해의 준례대로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호구를 만들어 주기 어려운 사정은 앞에 아뢴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신이 굶주린 백성들의 사정과 실태를 익히 살펴보건대 비록 가까운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먼 길을 왔다고 말하니, 그들이 말한 바에 의거하여 노정을 계산해서 식량을 주는 것은 매우 허술한 일입니다. 굶주린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서 제대로 식별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반드시 아침에 와서 양식을 받아 가고 저녁에 다시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들을 일일이 압송(押送)하고자 한다면 진휼하는 일 외에 또다시 한 가지 일이 생겨나 반드시 도로에서 일을 처리하느라 끝이 없을 것이니, 형편상 끝내 시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향을 떠난 백성이 많고 적음은 수령들이 진휼을 잘하고 못함에 달려 있으나 또한 재해의 경중과 관곡(官穀)의 다소에 달려 있으니, 오로지 이것을 가지고 수령의 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또 이른바 성책(成冊)이라는 것도 만약 본 고을로 하여금 유망(流亡)하는 백성들을 계산하게 한다면 그 실상을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요, 만약 다른 고을의 성책을 가지고 어떤 고을의 유민이 가장 많은지를 고찰하게 하더라도 형편상 또한 두루 상고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마침내 우선 현재 있는 곳에서 입록(入錄)하도록 명하였다.
○ 5월에 공은 도내 백성들의 전지(田地) 중에 충분히 파종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는 거의 다 파종했으나 종자가 없어 아직 파종하지 못한 자가 오히려 많고 기근이 점점 심해져서 이미 파종한 자도 혹 황폐해질까 염려된다 하여, 마침내 수령으로 하여금 파종할 능력이 안 되는 자를 가려 종자를 지급하고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도와서 경작하게 하였다.
○ 6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본도는 10여 년 이후로 한 번도 풍년이 든 해가 없고 경술년(1670, 현종11) 이후로는 연달아 흉년을 만나 굶주려 죽고 병들어 죽고 유망(流亡)한 나머지 인심이 삭막하여 백성들이 살려는 의욕이 없습니다. 목면(木綿)으로 말하면 원래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행상(行商)들이 전파한 것이 혹 열에 한둘 정도였는데 지난해부터는 행상들이 완전히 끊겼으며, 목화(木花)는 근래 남쪽 지방도 해마다 흉작이어서 더욱이 조금도 구경할 수가 없으니, 노소(老少)가 입을 옷이 없어서 벌거벗고 있는 정상이 보기에 참혹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조정에서는 그동안 해마다 연말에 가난한 백성들의 옷감을 보내 주는 일이 있었으나 그중에 한 치, 한 자라도 나누어 얻는 자들은 겨우 천 명이나 백 명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합니다.
도신(道臣)이 순행할 때에는 으레 조정에 면포(綿布)를 청하여 시재(試才)할 때에 무예를 진작하고 백성들이 추위를 면하게 하였는데, 5, 6년 이후로는 순행하는 일이 이미 드물고 또 상으로 줄 만한 물건이 없어서 설혹 순행하더라도 그저 왔다 가기만 할 뿐이니, 변방의 백성들이 모두 고사(古事)를 언급하면서 면포를 보내 줄 것을 희망하고 또 개탄하고 있습니다. 추수한 뒤에 만약 도신이 지방을 순행한다면 시재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의 각 영(營)에 혹 남은 군포가 있을 경우 이것을 옮겨 본도로 실어 보내 주어서 시재할 때에 쓰게 한다면 한때에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의미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속히 품지(稟旨)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정에서 마침내 평안도 병영에 보관되어 있는 군포(軍布) 30동(同)을 옮겨 주니, 공은 감영에 보관한 것을 더 보태어서 삼수와 갑산 및 북도의 아홉 고을에 시상하였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남도와 북도의 군병(軍兵)과 군기(軍器)를 대략 살펴보니, 조련(操鍊)을 정지한 지가 이미 8, 9년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사수(射手)들은 활을 잡을 줄 모르고 포수(砲手)들은 총을 잡을 줄 모릅니다. 변장(邊將) 자신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진실로 이들에게 군기를 보수하는 일을 책임 지우기 어렵습니다. 등급을 나누어 상벌을 내리는 것은 우선 보류하고, 문제가 있는 군기를 아울러 일신하고 군병의 궐액(闕額)을 점차 모두 충원하여 ‘추수한 뒤 현장 점검을 할 때 처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뜻으로 수령과 변장들에게 엄중하고 분명하게 신칙하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하게 잔폐한 변보(邊堡)에 대해서는 활에 사용하는 아교와 깃털, 쇠 힘줄과 벚나무 껍질 등의 물품을 신의 감영에서 마련하여 활과 화살을 수리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 지방의 궁각(弓角)과 어교(魚膠 부레풀)는 더욱 얻기가 어렵습니다. 갑진년(1664, 현종5)에 조정에서 남병영(南兵營)과 북병영(北兵營)으로 하여금 육량궁(六兩弓) 수백 장(張)을 만들어 도내의 무사(武士)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비로소 사람들이 육량궁을 쏘게 되었는데, 지금 10년이 되자 활이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시재할 때에 수백 명의 무사들이 다만 육량궁 3, 4장을 가지고 서로 교대로 활쏘기를 하며, 육량전(六兩箭)의 경우는 민간에 없을 뿐만 아니라 각 고을에 원래 한 개도 없고 병영에 다만 10여 개가 있으나 또한 모두 파손되어 얽어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독하는 책은 사목(事目)에는 무경칠서(武經七書) 가운데 한 책을 취하도록 되어 있으나 본도에서 명색이 유학(儒學)을 한다는 자들도 책 한 권을 얻기가 어렵고, 무사들의 경우 글자를 아는 자도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무경칠서 등의 서적은 책 표지를 구경한 자도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 시재할 때에 무재(武才)가 이미 합격권에 들지 못하였으니, 무경(武經)의 책은 진실로 논할 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육량궁 수백 장에 들어가는 궁각과 어교를 만약 해조(該曹)에서 별도로 내려 보낸다면 남병영과 북병영으로 하여금 종전에 쓰던 활을 모아 궁각을 고쳐서 나누어 주게 하겠으며, 육량전을 만들 대나무를 또한 해조로 하여금 수량을 넉넉히 보내게 해 주시면 시재할 때에 나누어 주는 용도로 쓰겠습니다. 그리고 《손자(孫子)》, 《오자(吳子)》, 《삼략(三略)》 등의 책을 만약 병조에서 판본이 있는 곳에 분부하여 수십 건(件)을 인쇄하여 내려 보낸다면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장관(將官)들이 돌려가면서 외우고 익히게 할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북쪽 지방을 순행하려 하면서 다시 군포를 청하여 또다시 20동을 지급받았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신의 감영에 소속되어 있는 아병(衙兵)으로 전부터 있던 자와 신이 부임한 뒤에 단속하여 얻은 자를 아울러 계산하면 6천여 명에 이르는데, 자주 사열하고 시재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상을 주어 분발시키고 권면할 밑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무신년(1668, 현종9)에 호조에서 써야 할 인삼(人蔘)이 부족하다 하여 본도에 10근(斤)을 요구하여 바쳤는데, 그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어 해마다 10근씩 올려 보내고 있습니다. 호조는 써야 할 곳이 매우 많으니 형편상 보내지 않을 수 없으나, 이제 만약 군수용(軍需用) 포목 7, 8동을 옮겨 주어 인삼과 바꾸게 한다면 호조는 인삼이 부족할 염려가 없고 신의 감영에서도 보충하여 쓸 밑천을 얻을 것이니, 호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영구히 규례로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 공이 자부(子婦)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편비(偏裨)가 준례에 따라 서울 집에 부의(賻儀)를 보낼 것을 청하자, 공은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지금 관청을 집으로 삼고 있으니, 집의 양식이 어찌 죽은 사람을 장송(葬送)하기에 부족하겠는가.”
하였다. 공은 비록 친구의 혼례와 초상에 부족한 비용을 보태 주더라도 오직 어포(魚脯)를 보낼 뿐이고 삼베 한 끝도 사용하지 않았다. 공이 별세한 지 4년째 되는 해에 함경 감사 이광좌(李光佐)가 숙종에게 장계를 올리기를,
고(故) 상신(相臣)이 감사로 있었을 때에 군목(軍木)을 지급한 것이 매우 많아서 군사들의 무예가 예전에 비해 열 배나 향상되었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고무되어 분발하고 있습니다. 사기를 진작하는 유익함과 군세(軍勢)를 유지하는 효험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삼수와 갑산의 성내(城內) 조련은 고 상신이 한 번 시행한 뒤에 폐지된 지가 거의 40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 처음에 청나라 사람들이 영고탑(寧古塔)에서 회령(會寧)에 이르러 물건을 교역하고, 또 후춘(厚春)에서 경원(慶源)에 이르러 물건을 교역하였으므로 두 곳에 나누어 시장을 만들어서 해마다 상례로 무역을 하게 된 지 거의 20년이 되었다. 경자년(1660, 현종1) 12월에는 청나라 상인으로 회령에 온 자가 594명이고 말과 소, 낙타가 1144필이었는데, 체류하는 기간이 한정이 없어서 이들에게 공급하는 꼴과 양식을 우리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으며, 청나라 상인들이 공갈하고 협박하여 못하는 짓이 없고 이들이 전전하며 남쪽에 가까운 안변(安邊) 등 여러 고을에까지 와서 제멋대로 물건을 요구하였다. 공이 이때 비변사의 낭관이었는데, 혜성(彗星)이 동북방에 나타난 일로 인해 상소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당초 개시(開市)를 한 것은 오직 육진(六鎭)의 여러 고을들로 하여금 저들의 요구에 부응하게 한 것이었는데, 수요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그 형세가 반드시 온 나라의 재력을 고갈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또 개시의 폐단은 우리 백성들을 곤궁하게 할 뿐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저들을 끌어들여 국경에 들어오게 해서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하고, 한편으로는 저들에게 양식을 갖다 주고 병기를 대 주어 저들을 더 부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더구나 북방은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탐관오리가 전후로 계속 설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군역을 피하거나 자식을 버리고 기르지 않는 자까지 있습니다. 만약 변경에서 중국과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 저들은 아침에 말을 먹여 출발하면 저녁에 우리의 성 아래에 도착할 수 있는데, 조정을 밉게 보는 우리의 백성들이 결코 윗사람을 위해 희생하면서까지 굳게 지키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력이 적고 약한 점과 군비가 소홀한 것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북관(北關)의 병사(兵使)를 파견하되 일반적인 인사로 여겨서 평범한 사람의 손에 맡기지 마시고, 조정의 중신(重臣) 중에 평소 인망이 있는 자를 빨리 선발하여 그로 하여금 병폐를 보완하고 폐지된 것을 일으켜서 개시의 사무를 처리하고 저들을 회유함으로써 정신을 쏟아 저들의 획책을 막을 계책을 세우게 하소서. 또 본도(本道)의 궁핍한 상황을 북경(北京)에 사신을 보내어 알려서 완곡한 말로 잘 개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발매(發賣)하는 물건을 줄여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영구적인 규정으로 정하고, 다시 변방의 신하에게 명하여 엄격히 규약을 마련해서 후일 끝없는 병폐가 일어날 조짐을 막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청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마침내 발매하는 것을 반으로 줄이고 청나라 상인이 350명을 넘지 못하게 하였으며, 체류하는 기간도 20일을 넘지 않게 하였다. 공이 북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경원(慶源)에 이르러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등록(謄錄)을 보니, 정식(定式) 외에 한도를 넘은 것이 많았다. 그때 청나라 사신이 막 와서 또다시 등록 이외의 염석(鹽石)을 요구하자, 공은 경원 부사로 하여금 정식에 의거하여 일절 거절하게 하고 이어 장계로 아뢰었다. 다음 해에 공이 다시 부령(富寧)에 이르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젊었을 때에 북방을 걱정하여 / 少時憂北方
옥당에서 상소를 올렸는데 / 陳疏自玉堂
지금 부임해 와서 흉년을 만나 / 今來値饑歲
백성들 죽는 것 참혹하게 보노라 / 慘見赤子殤
죽음 구제하기에도 넉넉지 못하니 / 救死且不贍
어느 겨를에 국경을 튼튼히 할까 / 遑恤申封疆
봄철에 멀리 순행하여 임금님 뜻 전하고 / 乘春遠于宣
풍속을 묻느라 황폐한 고을 모두 찾아다니네 / 問俗窮荒鄕
구휼을 의논하니 위험에 빠진 자들 우선하고 / 議貸先阽危
농사를 권장함은 봄철에 미리 해야 한다오 / 勸耕及載陽
다만 옛 마음을 저버릴까 두려우니 / 但恐負宿心
어찌 감히 먼 길 다니는 것을 꺼릴까 / 詎敢憚路長
하였다.
○ 8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명년 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할 계책을 지금 요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흥(慶興) 등지는 바로 지금이 가을 곡식이 새로 나올 때인데도 굶주려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으며,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등지도 재해로 입은 손실이 매우 심하고, 함흥(咸興)과 정평(定平)에는 묵은 밭이 더욱 많습니다. 금년 봄에 조정에서 곡식을 획급(劃給)해 준 은혜를 입어 살아남은 백성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만, 첩첩의 고개를 넘어 관서(關西) 지방에서 곡식을 받아 올 때에 도로에서 죽은 인민과 소와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노고하는 근심이 굶어 죽는 것에 비하여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설령 다시 곡식을 획급해 주는 은혜를 입는다 해도 받아 오기 어려운 점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듣자 하니 경상도는 올해 근래에 없는 풍년이 들었다 합니다. 지난 임인년(1662, 현종3) 영남 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에 신이 진휼하라는 명령을 받고 갔었는데, 이때 조정에서 함경도의 조미(造米) 710석과 전미(田米) 1만 4290석을 획급해 주었으니, 경상 좌도 인민들이 굶어 죽어 시신이 구렁을 메우는 형편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이 은택 때문입니다. 금년에 영남 지방은 저와 같이 풍년이 들었는데 본도는 이와 같이 흉년이 들었으니, 임인년(1662)에 내보내었던 곡식을 본도로 다시 수송해 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본도의 배는 큰 것이 겨우 곡식 30여 석을 싣는 데에 불과합니다. 금년 봄에 원양도(原襄道)의 곡식을 홍원(洪原), 북청(北靑), 이성(利城), 단천(端川)의 네 고을로 수송하고 함흥(咸興) 이남과 경성(鏡城), 명천(明川), 길주(吉州) 등의 곡식 8000여 석을 온성(穏城)과 경흥(慶興) 등지로 운반하여 보낼 때에 도내의 배를 통틀어 동원하니, 어민들이 봄부터 여름까지 고기잡이하는 이익을 전혀 보지 못하여 포구(浦口)에 사는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금년 여름에 영남의 동래(東萊) 등지에 있는 사상(私商)의 미선(米船)이 함흥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배의 크기를 물어보니 100여 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도의 배에 비하면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완급을 잘 헤아려서 영남 연해에 있는 각 고을의 쌀 1만 5000석을 내년 2월 안에 본도의 초면관(初面官)으로 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조정에서 1만 석을 지급하도록 허락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북평사(北評事) 이훤(李藼)으로 하여금 종성(鍾城), 회령(會寧), 경성, 명천, 길주 등 여섯 고을의 곡식을 옮겨서 온성, 경원(慶源), 경흥의 세 고을을 구휼하였으며, 다음 해 3월에 영남 지방의 곡식을 실은 배가 이르러서 이해 여름에 마침내 각 고을 중 재해가 더욱 심한 곳으로서 곡식이 뚝 떨어진 지방을 구제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은 장계를 올리기를,
“운반해 온 곡식 1만 석 중에 대미(大米)가 9000여 석입니다. 만약 본색(本色)으로 이것을 회록(會錄)하여 환자곡을 징수하게 한다면 명천과 길주 이남은 간혹 논이 있지만 겨우 10분의 1, 2에 불과하고 경성 이북으로부터 육진(六鎭), 삼수, 갑산 등지까지는 원래 논이 없으니, 대미로 다시 바칠 도리가 만무합니다. 육진과 삼수, 갑산은 모두 전미(田米)로 회록하고 길주 이남은 그 지급되는 수량과 답결(畓結)의 정도를 보아 3, 4분의 1이나 5, 6분의 1을 대미로 회록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전미로 회록해야 거의 다시 거두어들일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 일을 진휼청(賑恤廳)에 내려 시행하였다.
○ 12월에 공은 동춘(同春)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시마복(緦麻服)을 입었으며, 다음 해 12월에 이공 민적(李公敏迪)의 부음을 듣고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공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지금 세상에 장자(長者)로는 동춘이, 동류(同流)로는 이민적이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 모두 돌아가셨다.”
하였다. 처음에 평강(平康) 부군(府君)이 정동명(鄭東溟)과 서로 친하게 지내어 친척처럼 교유한 것이 3대에 이르렀으므로 공은 항상 예부터 내려온 세의(世誼)를 닦아 술을 가지고 가서 방문하곤 하였다. 지난해에 북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길주(吉州)에 이르러 동명(東溟)의 시가 쓰인 병풍을 보고 공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하였다. 명년에 그의 부음을 듣고 그의 시집을 찾아 판각하여 세상에 유행하게 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 그 문집을 다시 정리해서 합하여 한 질을 만들었다. 배천 군수(白川郡守) 이준(李懏)은 공과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였는데, 중년에 사람들에게 말할 때마다 “친구 중에 높은 지위에 오른 자는 대부분 나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데 오직 남모(南某)만은 전과 다름없이 대하니, 나는 이 때문에 탄복한다.” 하였다.

45세 계축년(1673, 현종14)

1월에 북쪽 고을을 순행하고 돌아올 때에 시사(試射)하고 시상하였다.
3월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8월에 임기가 찼는데 9월에 상이 특명으로 맥추(麥秋)까지 연임하게 하였다. 이해 가을 공은 문회당(文會堂)과 무양정(武揚亭)의 고사(故事)를 살펴 학제를 정비하고 남도의 문사와 무사들을 선발하여 학업과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11월에 자부(子婦)의 상을 당하였다.
12월에 북쪽 고을을 순행할 적에 상소하여 변방의 일을 아뢰고 지도(地圖)를 올리니, 상이 먼저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에 새로운 길을 내고 요해처(要害處)에 진보(鎭堡)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 8월에 공의 임기가 차자, 상은 “북관(北關)의 흉년이 금년에 더욱 심하여 명년 봄에 진휼할 것을 미리 요량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가 고을을 순행할 시기가 이미 임박하였는데, 새로 부임한 감사가 교대할 때에는 일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다.” 하여 특명으로 맥추까지 연임하게 하였다. 다음 달에 상은 “연임하라는 명령은 뜻이 있어서이다.”라는 내용으로 공의 사직소에 답하였다.
○ 공이 석담창(石潭倉), 고마청(雇馬廳), 문회당, 무양정의 절목(節目)을 정하였다. 처음에 함흥부(咸興府)의 치소(治所)는 성천강(城川江) 가에 있었는데, 물이 얕아 배가 다니지 못해서 해운(海運)이 통할 수가 없었다. 강을 따라 아래로 30리를 내려가면 작은 산이 해문(海門)을 막고 있는데, 들 가운데 세 못의 물이 산 아래에 이르러 합류하는바, 이름을 석담(石潭)이라 하였다. 이곳은 배가 다녀 바다와 통할 수 있으므로 남쪽과 북쪽에서 오는 모든 해양의 선박들이 다 이곳에 정박하였다. 석담으로부터 바다로 30리를 들어가면 화도(花島), 죽도(竹島), 초도(草島)라는 세 섬이 있는데, 화도는 1000여 가호를 수용할 수 있다. 일찍이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에 부(府)의 백성들이 왜적을 피하여 이 섬으로 들어가서 목숨을 보전한 자가 많으며, 또 정축년(1637, 인조15) 청나라 사람들이 철군하고 돌아갈 때에 본부(本府)를 경유해서 가니, 함흥부에서는 급히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 수백 석을 운반하여 이 섬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 때문에 이 섬에 들어온 관리와 인민 수천 명이 오랑캐가 떠나간 뒤에 함흥부의 창고 곡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섬에 있는 곡식 덕분에 도움을 받았다. 공이 부임하여 이르기를,
“이처럼 한가할 때에 마땅히 후일을 대비하는 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본도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이니, 만약 중간의 한 곳이 막혀 길이 끊기는 우려가 생긴다면 조정의 명령이 통할 수가 없다. 그러니 더욱 해로(海路)에 군사를 모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석담 위에 창고를 짓고 4, 5천 석의 곡식을 쌓아서 위급할 때에 섬으로 운반해 들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 처음에 함경도 감영에는 토관(土官)이 있었는데 ‘육방지인(六房知印)’이라 칭하며, 그 아래에 또 주사(主事), 의생(醫生), 율생(律生), 영사(令史), 취수(吹手), 나장(羅將), 궁인(弓人), 시인(矢人), 야장(冶匠), 목수(木手) 등 여러 가지의 명목이 있는데, 각기 고공(雇工)과 솔정(率丁)을 지급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토관 이하가 모두 군대의 대오(隊伍)에 편입되어 아병(牙兵)이 되었으며, 이들이 돌아가며 차례로 감영 안에 입역(立役)하여 활 쏘고 말 타는 무예를 익혀 용맹한 무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로는 인민이 모두 죽고 징발이 잦아서 모든 진상의 배지(陪持)와 영송(迎送)에 쓸 쇄마(刷馬)와 관청을 수리하는 등의 부역을 모두 영속(營屬)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 중에 1년에 여섯 번 돌아오는 입번과 각종 잡역(雜役)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한 자가 태반이나 되었고 비록 남아 있는 경우라도 군오에 편입되어 무예를 익히는 등의 일은 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무예는 원래 1000명을 정원으로 하였으나 인조 병인년(1626, 인조4)에는 600명으로 줄어들었고 고공과 솔정까지 합하면 거의 2000명이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본영은 먼 변방에 있으므로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군정(軍政)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는데, 수천 명의 민정(民丁)을 아침저녁으로 사령하는 임무에 종사하도록 하고 항오의 병졸은 태반이 늙고 나약한 자이며 또 결원이 많으니, 옛 제도가 한 번 변하면 폐단이 이렇게 심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계속하여 민결(民結)을 잡역으로 돌리려고 하면 백성들이 혹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 안의 남는 곡식과 재물을 한 창고에 따로 모아 두고는 이름을 고마청(雇馬廳)이라 하였다. 그곳의 재물을 가지고 영송하거나 수리에 드는 비용을 대고 영속의 부역은 면제하여 다시 옛 규정을 복구해 군대의 대오에 편입하였다.
○ 처음에 함흥부(咸興府)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있었으니, 관찰사 유강(兪絳)이 창건하였다. 그 후 이후백(李後白)이 임금에게 계청(啓請)하여 경서를 반사(頒賜)하였고, 또 각 고을에 학전(學田)을 마련하여 세금을 거두어 수송하게 하였으며, 또 매월 어물과 찬을 운반하여 날마다 30인분을 공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도 13개 고을의 유생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런데 중년에 일이 많아진 뒤로 이것을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으니, 나이 많은 노인과 자제들이 모두 이를 한하여 글로 읊어 탄식한 지가 오래였다. 공이 이것을 슬퍼하여 이해 가을에 다시 서원에서 고사(故事)를 살펴 정비하였다. 그러나 수년 동안 흉년이 든 나머지 갑자기 전성기의 규정을 회복하기가 어렵다 하여 간략히 예전의 준례를 따라 간단한 규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8월 말에 남도의 유생들을 모아 제술(製述)로 시험을 보인 다음 그중 20명을 선발하여 9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60일 동안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고 1월에 또다시 시험을 보여 선비를 뽑아서 2월 초부터 3월 말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공은 이르기를,
“1년 중 4개월 동안 20명이 먹는 양을 대략 계산해 보니, 30여 석의 쌀이 필요하다. 이는 양향고(糧餉庫)에 있는 영곡(營穀)의 1년 모곡(耗穀)만 가지고도 계속하여 대 줄 수 있으며, 어물과 찬은 감영에서 사용하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충분히 지급할 수 있다. 관리들이 친지와 과객들을 위하여 술과 밥을 장만하는 비용을 따져 보아도 이보다 더 쓰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하여 문교(文敎)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북도의 경원(慶源), 종성(鍾城), 온성(穩城), 회령(會寧)의 유생 각각 한 명씩을 감영에 데려다가 교육하였다. 전에 함흥부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군용관(軍容館)의 옛터가 있었는데, 전해 오기를 예전에 도내의 무사들을 모아 이곳에서 사열하였으므로 혹 무양정(武揚亭)이라 칭했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느 해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폐지된 지 5, 6십 년 만에 무예의 서툰 정도가 내지(內地)보다도 더욱 심하니, 공이 이를 위태롭게 여겼다. 그리하여 이해 가을에 남도 지방의 과거에 응시할 무사들을 모아서 말 타고 활 쏘는 것으로 시험 보여 20명을 뽑고는 무예를 익히는 일수(日數)와 음식을 공급하는 분량을 한결같이 문회당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계속 대기가 어려워 행하지 못할 우려가 없게 하였다.
○ 11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온성, 경원, 경흥 세 고을은 본도의 땅끝에 위치해 있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추위 때문에 겪는 고통이 다른 곳보다 가장 심합니다. 게다가 경술년(1670, 현종11)부터 연이어 4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실어다 주고 옮겨 온 것이 전후에 걸쳐 수만 석이 넘고, 본 고을에서 종전에 거두지 못한 환자곡이 또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유년(1669)에는 환자곡을 다 거두었다고 등재되어 있었으므로 이번 병오년(1666) 이전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환자곡을 탕감할 때에도 한 말과 한 되도 감면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우선 환자곡을 탕감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은 바로 신해년(1671)과 임자년(1672) 두 해에 기근이 들고 염병이 돌 때에 전 가족이 사망한 자와 도망쳐서 한 명의 일가붙이도 없는 자들입니다. 봄철에 신이 순행할 때 세 고을에 이르러 명백하게 조사하여 골라내서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모두 도착하였으나 또한 크게 많지는 않습니다.”
하고, 마침내 6465석을 탕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 공은 평소에 몸가짐을 조심하고 삼가며 양생(養生)을 잘하였다. 이해 11월에 이르러 주자(朱子)가 해석한 《참동계(參同契)》를 판각하였는데, 그다음 달 숙부에게 올린 편지에 이르기를,
“이것을 배워서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허황된 짓이지만 만약 항상 태양 유주(太陽流珠)가 늘 사람을 떠나고자 하는 것을 경계한다면 어찌 천수(天壽)를 다하는 데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김공 만중(金公萬重)이 일찍이 공에게 양생술(養生術)에 대해 묻자, 공은 대답하기를,
“다른 것은 알지 못하겠고 오직 천도는 날마다 내면에 마음을 쓰는데 오직 사람은 날마다 외면에 마음을 쓰니, 이것이 장수하고 단명하는 구분점일 것이다.”
하였다.
○ 12월에 공은 북쪽 고을을 순행하였다. 3년을 연이어 추운 겨울에 불모지에 깊이 들어갔는데, 출발에 임박하여 상소를 올려 주진(州鎭)을 부령(富寧)의 차유령(車踰嶺) 밖에 설치할 것을 청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본도(本道)는 비록 고구려의 옛 땅이라고 하나 신라가 삼국을 통합할 때에 세력이 동북쪽에 미치지 못하여 모두 여진족(女眞族)에 유입되었고, 고려가 융성했을 때에도 단지 철령(鐵嶺)을 경계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윤관(尹瓘)이 나온 이후에 처음으로 이 지방을 개척하였으나, 곧바로 얻었다가 곧바로 잃어서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무(聖武)로 본도에서 일어나 곧 대동(大東)을 소유하시니, 국토의 넓이가 서북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렀는바, 이는 실로 위엄과 덕으로 나라를 개척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종(太宗) 때에 이곳을 지키던 신하가 잘못 방어하여 부령 이북을 포기함으로써 바로 지금의 수성역(輸城驛)과 석막보(石幕堡)의 지역을 경계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종서(金宗瑞)가 세종대왕의 특별한 인정을 받고 다시 육진(六鎭)을 개척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또한 이의(異議)가 많았으나 세종대왕께서 여러 사람의 말을 물리치고 김종서에게 맡기시어 마침내 성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때 두만강 이내에 거주하는 번호(藩胡)들이 살던 고장을 떠나 옮겨 가는 것을 걱정하여 그대로 두만강 이내에 살면서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딴마음을 먹지 않는 신하가 되기를 간청하니, 조정에서는 형편상 일시에 모두 쫓아내어 그들의 원한을 사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으므로 부득이 강변에 장성(長城)을 쌓고 장성의 밖에 있는 강 이내의 땅을 떼어 번호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였습니다. 또 부령의 북쪽 차유령 밖은 바로 두만강 이내 수백 리의 땅이니 우리의 소유가 되어야 함이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그 당시 미처 주진(州鎭)을 설치하지 못한 까닭에 이 사실이 기록에 실려 있지 않아 지금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반드시 사세와 재력이 미치지 못해서 그랬거나 혹은 그 지역에 사는 오랑캐들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淸)나라 사람들이 건주(建州)에서 일어난 이후로 강 이내에 거주하던 번호와 노토(老土)와 마을우(亇乙于) 등의 부락에 살던 오랑캐들을 모두 데려갔고, 강 밖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들도 모두 옮겨 갔으므로 이 땅에서 오랑캐의 흔적이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차유령 밖에 무산(茂山)에서 북쪽으로 120여 리를 가서 정승(政丞), 파오달(破吾達), 죽돈(竹頓), 모로(毛老), 동량동(東良洞), 노토 부락 등지를 지나 강변에 이르면 비로소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라는 곳이 있는데, 마을우는 오랑캐 우두머리의 이름이고, 시배는 오랑캐 말로 보성(堡城)입니다. 이곳에는 지금 옛날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수십 리의 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큰 강을 베고 남쪽으로는 긴 내가 띠처럼 둘러 있으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울처럼 평평하여 토지가 비옥하니, 또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 뛰어난 형세를 살펴보건대 여기에는 마땅히 큰 진영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우시배에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면 헐연평(歇然坪), 서가선(西加先), 이시(利施), 도곤(都昆) 등 1백 수십여 리의 땅을 지나 비로소 회령(會寧)의 농산보(農山堡)로 나오는데, 이른바 헐연평 등지는 모두 옛날 오랑캐들의 취락지입니다. 들의 광활함은 마을우시배에 미치지 못하나 토지의 비옥함은 그곳과 다름이 없어 곳곳마다 모두 수천, 수백 명이 경작할 수 있을 만한 땅입니다. 신이 금년 봄 순행할 때에 형세를 살펴보니, 과연 하늘이 만든 오지(奧地)로 결코 지키지 않고 버려두어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또 무산(茂山)의 진영을 설치한 곳은 본래 자갈만 있는 불모지로 토졸들이 농사를 지어 먹고 살 토지가 없어서 보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조조(仁祖朝) 기묘년(1639, 인조17)부터 첨사(僉使) 박심(朴深)이 비로소 차유령 밖으로 나가서 경작하였는데, 효종조(孝宗朝) 경인년(1650, 효종1)에 첨사 이만천(李晩天)이 감사와 병사에게 요청하여 다시 토졸들을 인솔하여 들어가 경작하였습니다. 이때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이 지역에 진영을 옮겨 설치할 만한 상황에 대해 낱낱이 아뢰자, 조정에서는 그대로 경작할 것을 허락하되, 첨사로 하여금 5일마다 한 번씩 가서 적간(摘奸)하게 하고 경작하는 토졸들을 추수한 뒤에는 다시 본진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인년(1650) 이후로는 왕래하면서 경작하였는데, 토졸 이외에 그들 사이에 섞여 살고 있는 유민(流民)들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00여 리 사이에 인가가 거의 즐비하고 마을우시배에는 촌락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추수한 뒤에 다시 본진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늙고 약한 백성들이 그대로 이 지역에 머물러 사는 자가 반을 넘습니다. 지금에는 사세가 이미 굳어져서 다시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곤(都昆)에서 이시(利施)까지 60여 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인민들의 민가 또한 연이어 늘어서 있으며, 아직까지도 빈 땅으로 버려져 있는 것은 단지 서가선(西加先)과 헐연평(歇然坪) 20여 리의 땅뿐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이 지역이 두만강 이내의 땅이라면 원래 우리의 땅입니다. 오랑캐들이 몰래 점거했을 때에는 비록 그들을 몰아내고 개척하기가 어려웠지만, 오랑캐들이 스스로 이주해 떠난 지가 5, 6십 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오랑캐들이 옛날 살던 곳이라 하여 감히 수습하지 못해서 마치 저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듯하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만일 후일에 갑자기 오랑캐 부락들이 다시 들어와 점거한다면 조정에서 비록 다시 취하고자 한들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이는 오랑캐들이 예전에 살던 지역이니, 우리나라가 진영을 옮긴 뒤에 오랑캐들이 만일 옛 땅을 되찾으려고 하여 다투고 따지는 일이 있게 되면 약소국의 도리에 있어 형편상 항거하기가 어려워서 반드시 철수하여 돌아오는 병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경이 이미 두만강을 경계로 삼고 있음은 오랑캐들도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런 이유로 번호들이 옛날에 살던 장성 밖의 땅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모두 경작하고 있으나 강 건너에 사는 오랑캐들과 개시(開市)에 왕래하는 오랑캐들이 모두 한마디도 시비하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이 지역만 저들이 되찾을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저들이 되찾고자 하였다면 지금껏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로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자들이 이미 저와 같이 많은데도 수십 년 사이에 아직 한 번도 와서 따지는 일이 없었으니, 진영을 옮긴 뒤에 저들이 되찾아 갈 것을 우려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친 걱정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또 말하기를, ‘강가에 있는 땅은 저들의 국경과 가까이 있으니, 진영을 옮겨 백성이 모여 살게 된 뒤에 우리 백성들이 몰래 저들의 국경을 넘어가는 병폐를 막을 수 없어서 반드시 잇따라 사단이 생길 염려가 있다.’라고 하는데, 이는 또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회령에서 경흥(慶興)에 이르기까지 다섯 고을의 읍내와 각 진보가 모두 강변에 있으니, 만약 우리 백성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갈 것을 우려한다면 모두 내지로 옮겨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유독 이 지역에 진영을 설치하는 것만 불가하겠습니까. 가령 이 지역에 백성들이 들어와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원래 인적이 없더라도 간사한 백성들은 또한 반드시 빈틈을 타고 몰래 국경을 넘어갈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미 가득하고 이들을 주관하거나 통솔할 사람이 없는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방비하고 금지하는 방도에서도 더욱 속히 진장(鎭將)을 두어 중요한 지역을 나누어 지켜야 할 것인바, 이에 대한 이해(利害)가 어찌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부령(富寧)의 차유령(車踰嶺) 밖에 있는 회령(會寧), 도곤(都昆) 이상은 바로 200여 리가 되는 지역이니,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의 옛터에 한 부(府)를 설치하고 서가선(西加先), 이시(利施), 도곤 등지에 두세 개의 진보(鎭堡)를 죽 설치하여 강 연안의 방어하는 곳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차유령 밖에 장백산(長白山) 뒤로 통할 수 있는 길은 단지 박하천(朴下遷) 한 길이 있을 뿐이니, 또한 이 지역에도 한 보(堡)를 설치하여 대비해야 할 것이며, 이 밖에 회령의 풍산보(豐山堡)와 부령의 양영보(梁永堡), 무산(茂山)의 옥련보(玉連堡)와 경성(鏡城)의 어유간(魚游澗) 등지에 있는 진보는 모두 내지(內地)가 되므로 전부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만일 진보를 한꺼번에 새로 설치하고 한꺼번에 혁파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우선 무산진(茂山鎭)을 마을우시배에 옮겨 설치하고 양영보를 박하천에 옮겨 설치하고 풍산보를 이시에 옮겨 설치하였다가, 인민이 더욱 모이고 형세가 더욱 무르익기를 기다린 다음 부(府)를 설치하는 것을 서서히 의논하더라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마을우시배는 부령과의 거리가 160여 리이고 회령과도 1백 6, 7십 리여서 형세가 외로이 떨어져 있으며, 첨사가 이 지역을 맡고 있어서 지위와 명망이 중하지 못하니, 새로 설치하는 지역을 맡기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하니 반드시 부를 설치하고 수령을 두는 것이 변경을 진정시키는 도리에 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묘당(廟堂)에 물어 조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다시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에 새로운 길을 낼 것을 청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갑산과 삼수 두 고을은 첩첩의 고개와 큰 산줄기 밖에 있어서 들어가는 길이 단지 함흥(咸興), 북청(北靑), 단천(端川) 세 곳만이 있을 뿐입니다. 함흥의 길은 삼수군(三水郡)에서 9일 노정(路程)이고, 북청의 길은 갑산부(甲山府)에서 4일 노정이며, 단천의 길은 갑산부에서 5일 노정인데, 가파른 고개와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에 위태로운 잔도(棧道)와 돌길이 있어서 온 나라 안에 다시없는 험한 곳입니다. 또 삼수군의 서쪽은 후주(厚州)와 폐사군(廢四郡)인데, 모두 텅 비어 있는 곳이므로 강계(江界)와 길이 통하지 않고, 갑산부 동쪽은 또 백두산 남쪽 지맥(支脈)에 막혀 있으므로 길주(吉州)와 길이 통하지 않습니다. 또 이 갑산과 삼수 두 고을은 기후가 육진보다 훨씬 춥습니다. 그리하여 오곡이 자라지 못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우 적고 외로이 떨어져 있는 형세가 또 이와 같으니, 만일 위급한 상황이 닥칠 경우 결코 응원 세력이 미칠 수가 없습니다. 또 평상시에 어물과 소금, 피복 등도 다른 고을에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으니, 진실로 안타깝습니다.
신이 들으니, 길주의 서북보(西北堡)에 담비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이 있어 갑산부와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에 서북보의 만호(萬戶) 오상제(吳尙悌)와 길주의 장관(將官) 허휼(許潏)로 하여금 사냥로를 찾아가게 하였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하여 사람과 말이 뚫고 나가지 못하다가 5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갑산의 동인보(同仁堡)로 나왔고, 또다시 동인보에서 오는 길을 찾아서 2일 반 만에 서북보로 돌아왔습니다. 중간에 두 고개가 있으나 모두 그리 높고 험준하지는 않으니, 지금 만약 나무를 베어 길을 내어서 사람과 말이 다소간 통행할 수 있게 할 경우 가까우면 200여 리쯤 되고 멀어도 300리가 채 되지 못하며 또 지형이 자못 평탄하니, 단천(端川) 등지의 길이 험악하고 위태로워 발 디딜 곳이 없는 것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는 본래 우리의 국경이어서 저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이 길을 개통한다면 삼수와 갑산의 사람들이 평소에는 어물과 소금을 이용할 수 있고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응원 세력이 미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또한 큰 이해가 달려 있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들으니, 서북보로부터 30리 지점에 옛 서북보의 폐성(廢城)이 있고 또 40리 지점에 이양춘(李陽春)의 옛터가 있는데, 이곳은 모두 인민들이 거주할 만한 지역이라 합니다. 그리고 고갯마루 서쪽 가에 또 감평(甘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다소 들판이 트여 있어서 경작할 수 있다 하니, 이 사이에 또한 한두 개의 진보를 설치하여 방어하고 기찰(譏察)하는 곳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길주의 사하북(斜下北)ㆍ덕만동(德萬洞)과 단천의 숭의(崇義)ㆍ오을족(吾乙足)ㆍ쌍청(雙靑)ㆍ황토기(黃土岐)와 갑산의 진동(鎭東) 등의 보(堡)는 다 내지가 되므로 모두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만일 일시에 여러 진보를 모두 바꾸는 것을 어렵게 여기신다면, 우선 길을 내어서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 지형의 험하고 평탄함을 익숙히 안 뒤에 진보를 설치할 만한 곳을 결정하더라도 혹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묘당에 하문하시어 조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 후주(厚州)를 수복할 것을 청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갑산과 삼수의 지형이 외로이 떨어져 있는 것이 위에서 아뢴 바와 같으니, 이제 비록 길주의 길을 개통한다 하더라도 단지 단천 등의 세 길보다 조금 가깝고 쉬울 뿐이며, 또한 고개에서 수백 리 밖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즉시 서로 구원할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습니다. 삼수군에서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70리를 내려가면 후주의 옛 땅이 있는데, 이른바 후주라는 곳은 어느 해에 설치하였으며 어느 때에 폐지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지역은 강의 남쪽에 있으니 본래 우리 땅입니다. 또 들이 광활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험하고 척박한 삼수와 갑산과는 크게 다르며, 또 지형이 점차 낮아져 기후가 자못 따뜻하므로 삼수와 갑산처럼 심하게는 춥지 않습니다. 서리가 아주 늦게 내려서 오곡이 모두 잘 되니 진실로 사람들이 살 만한 좋은 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곳을 내버린 이후로 일찍이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었는데, 이 지역은 갈파지(坡知)와 인접한 데다가 별해(別害)와도 채 200리가 못 되어 중간에 다만 오만령(烏蔓嶺) 하나가 가로막고 있을 뿐입니다. 오랑캐들이 화살 쏘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들려서 어느 때고 침략을 당하지 않은 달이 없었는데, 다행히 그 당시 오랑캐들이 약탈한 것은 소와 말을 빼앗아 가는 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성지(城地)는 겨우 빼앗김을 면했을 뿐입니다.
또 당초 조정에서 이미 사군(四郡)과 후주를 폐지하여 오랑캐에게 주고 장진강(長津江)을 국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오직 별해와 갈파지 두 진(鎭)을 장진강 서안(西岸)에 설치하고, 그 나머지 묘파(廟坡), 신방(神方), 강구(江口), 어면(魚面), 감파(甘坡), 자작(自作) 등의 보(堡)는 모두 강물의 동쪽에 설치해서 오랑캐들과 더불어 강을 끼고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를 설치한 곳이 모두 물살이 급하고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에 있어 도로가 매우 험해서 사람들이 통행할 수가 없으며 또 경작할 만한 토지가 없으니, 수비하는 형세의 편부는 말할 것이 없고 결코 인민이 살 만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 진보에 비록 변장(邊將)이 있으나 토졸들이 혹 5, 6호(戶)가 못 되니, 만약 적들이 영원히 침입해 오는 일이 없다면 괜찮겠지만 혹시라도 수십 명의 오랑캐 병사들이 별안간에 쳐들어온다면 반드시 잠시도 버텨 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비록 인민들을 많이 거주하게 하려 해도 지역이 저렇게 험악하니, 결코 백성들을 많이 살게 하여 편안히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오랑캐들이 강성하여 천하를 차지한 뒤로는 후주의 오랑캐들이 모두 쫓겨 가는 바람에 이 지역은 50년 동안 위급한 경보(警報)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혹 조만간에 다시 와서 점거하는 자가 있어 오만령을 넘어 곧바로 별해로 들어온다면, 묘파 이북에 설치한 10여 개의 보(堡)와 삼수와 갑산이 모두 적의 배후에 놓이게 됩니다. 별해에서 함흥까지는 비록 300여 리의 거리이나 이 사이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우 적어서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으니, 실로 믿을 만한 방어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적들이 별해에서 곧바로 함흥으로 진출한다면 홍원(洪原) 이북에서 육진까지는 장차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니, 관방(關防)의 방어가 이보다 더 허술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가지고 말한다면 후주에 관련한 이해(利害)는 또 차유령의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후주를 폐지하여 버리는 잘못이 어찌 다만 살기 좋은 땅을 거저 버리는 애석함 정도에서 그칠 뿐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후주의 옛 땅에 다시 군읍을 설치한다면 삼수와 갑산에도 서로 의지가 되고 응원 세력이 될 것이므로 외로이 떨어져 있는 걱정이 없을 것이며, 함흥에도 진실로 울타리가 되어서 방비가 허술해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진강(長津江) 일대에 있는 자작(自作), 어면(魚面), 강구(江口), 신방(神方), 묘파(廟坡), 별해(別害) 등의 진보가 다 내지(內地)가 될 것이므로 모두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함흥에서 별해와 삼수의 경계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400여 리가 되고 삼수에서 별해까지는 또 400여 리가 되니, 관청의 정사와 명령이 400리 밖에까지 미치기 어렵습니다. 이 사이에는 인민들이 산골짜기에 숨어 살아서 야생하는 새와 짐승을 길들이기 어려운 것과 같은 상황인 데다 또 중간에 적들이 침략할 우려가 없지 않은데도 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때에 달려가 하소연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다시 후주를 설치하여 변경을 방어하게 한다면 장진강 위아래에 설치한 여러 진보를 모두 혁파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하고 함흥의 황초령(黃草嶺) 이서와 삼수의 이송령(李松嶺) 이남의 땅을 떼어서 합하여 따로 한 군(郡)을 만들어 별해에 읍(邑)을 설치한다면 경계를 나누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 볼 때도 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利害)는 신이 여러 해 동안 잘 생각하고 반복하여 물어본 뒤에 비로소 아뢰는 것이니, 실로 우연히 시험 삼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경자년(1660, 현종1)에 조계원(趙啓遠)이 본도의 감사로 있을 때에 후주에 가서 형편을 관찰하고 다시 주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계문하였는데, 들으니 그 당시 조정의 의논이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강변 지역에 진영을 설치한다면 반드시 백성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가 금령(禁令)을 범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여 이 때문에 시행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말대로라면 혜산진(惠山鎭)에서 갈파지(坡知)에 이르기까지 모두 강가에 설치한 진보들이니, 또 어찌 다만 후주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관한 이해(利害)는 이미 차유령에 관한 일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였다. 처음에 태종 병신년(1416, 태종16)에 함길도(咸吉道) 갑산군의 여연촌(閭延村)이 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소훈두(小薰頭) 이서 지방을 떼어 여연군(閭延郡)을 만들어 평안도에 소속시켰고, 세종 을묘년(1435, 세종17)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이보다 앞서 계축년(1433)에 여연군 시번강(時番江)의 자작리(慈作里)에 성을 쌓고 시번의 장항(獐項)을 방수(防戍)하게 하였는데, 이곳이 여연, 강계(江界)와 서로 떨어져 있어서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노략질당하는 것을 미처 구원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두 고을의 중간에 있는 자작리에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하였다. 병진년(1436)에 여연 위에 무로보 만호(無路堡萬戶)를 두었는데, 경신년(1440)에 이 보(堡)가 여연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땅을 떼어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고, 임술년(1442)에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계해년(1443)에 여연의 우예보(虞芮堡)가 본부에서 너무 멀다 하여 본부의 땅과 자성군 일부의 땅을 떼어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하였다. 단종 을해년(1455, 단종3)에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 박종우(朴從愚)가 아뢰기를,
“우예, 여연, 무창은 본 고을의 군사가 매우 적기 때문에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남도의 군사를 임시로 초정(抄定)하여 가서 수자리 살게 하다 보니 폐해만 있고 유익함은 없습니다. 소속된 여러 보를 모두 혁파해서 우예의 백성을 강계로 옮기고 여연과 무창의 백성을 귀주(龜州)로 옮기소서.”
하였는데, 조정에서 그의 말을 따랐다. 세조 기묘년(1459, 세조5)에 병조에서 도체찰사의 계문(啓聞)에 근거하여, 자성에는 사람과 물자가 아주 적으므로 세 곳에 나누어 수자리 살게 하였는데, 전염병의 유행으로 인해 매번 보에 들어가면 서로 전염이 되어 죽는 자가 많다 해서 자성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백성들을 강계와 이산(理山) 등 사군(四郡)으로 옮기고 창고의 곡식을 강계로 옮겨 놓은 지가 1백 수십 년이 되었으나 그래도 수만 석의 곡식이 남아 있어서 묵고 썩어 먹을 수가 없었다. 사군이 폐지된 뒤로 야인들이 이 지역이 비어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겨 강을 넘어와서 제멋대로 사냥하고 인삼을 채취하였는데, 중종 때에 이르러 야인들이 점점 여연과 무창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조정에서는 군대를 일으켜 쫒아내도록 명하였으며, 또 평안 병사에게 명하여 매년 곡식을 베게 하여 야인들이 침입하여 점유하는 폐해를 근절하였다. 오랜 뒤에 오랑캐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어 날마다 국경 근처로 다가왔는데, 광해군 말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후주(厚州)에 사는 오랑캐들과 약속하여 모두 그 지역을 비우게 하였다. 현종 초년에 조정의 의논이 후주를 다시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또 이르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후주보(厚州堡)와 사군(四郡)이 모두 강계에 속한다.’ 하였으니, 본래 함경도 땅이 아니며 조종조에서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땅을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은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고 이어 사군을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기를,
“지금 후주의 경내인 송전파(松田坡)의 파수(把守)와 후주의 강어귀 동쪽의 파수는 모두 삼수군의 사람을 보내어 지키고 있고, 후주의 강어귀 서쪽의 파수만 강계 사람이 올라와 지키고 있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지금의 분계선도 오히려 후주를 삼수군에 속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지승람》에 이곳이 강계에 속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여연군도 본래는 갑산의 땅이고 더구나 후주는 또 여연군의 동쪽에 있는바, 본도의 지역임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고을을 설치한 내력이 자주 바뀌어서 강역(疆域)이 한 번은 저쪽 지역이 되고 한 번은 이쪽 지역이 되어서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니, 지금은 그 형세의 편부만을 논하면 되는 것이지, 이 도에 속하였는가 저 도에 속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따지고 논쟁하는 단서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또 듣건대 여연 등의 폐사군(廢四郡)은 또한 넓은 들에 토지가 비옥하여 살 만한 곳이라 하니, 국가가 지금까지 버려 둔 것은 실로 매우 애석합니다. 국초(國初)에 본도의 함흥 이북과 평안도의 압록강 연안 고을들은 모두 야인(野人)들을 쫓아내고 새로 차지한 지역이어서 남쪽 백성들 중에 데려다가 변방에 살게 할 만한 자가 적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을 지켜 낼 수가 없었고, 강 북쪽에 넘어와 있는 야인들은 그 숫자가 실로 많았으며, 사군의 건너편에 있는 올량합(兀良哈)과 홀자온(忽刺溫) 등의 부락이 더욱 강성하게 날뛰어서 아침저녁으로 몰래 나타나서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므로, 그 당시 조정에서는 토지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살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버리고 소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강 북쪽의 1000여 리 밖에 오랑캐들의 침략이 전무한 지가 이제 이미 4, 5십 년이 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이러한 때에 다시 우리의 옛 강토를 회복하여 점차 백성을 데려다가 살게 해서 우리 형세가 이미 굳건하게 다져지면, 비록 후일에 저들이 다시 와서 소요를 일으키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변경에 있는 땅을 만약 적과 가깝다 하여 버린다면 적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일은 끝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니, 이 어찌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밖으로는 밤중에 적들이 몰래 출현하는 걱정이 없고 안으로는 떠돌아다니는 자들 중에 이곳에 들어가 살기를 원하는 백성이 있어서,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고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강토를 수복하는 좋은 점이 있고 지키기 어려울까 염려할 일이 없는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조정에서 만일 한꺼번에 여러 고을을 모두 수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우선 별해(別害)에 군(郡)을 설치하고 후주에 진(鎭)을 설치하여 인민들이 점점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차례로 다시 설치하더라도 혹 늦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묘당에 하문하여 조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지도를 올리고 기문(記文)을 써서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천하의 지도를 맡아 천하의 땅을 관장함으로 인해 유리한 곳과 불리한 곳을 두루 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형의 유리함과 불리함은 지도가 없이는 두루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국가가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개척해서 이를 나누어 팔로(八路)를 만들었는데 이 관북(關北) 지방이 가장 멀고 궁벽하며, 또 지세가 우리의 백두산이 남쪽으로 뻗어 오고 중국의 장백산(長白山)이 북쪽으로 꺾여 나가 오랑캐 땅과 맞닿은 국경이 거의 2천 리나 됩니다. 그 사이에 중첩된 고개와 관문이 높이 솟아 있고 드넓어서 나무 사다리와 돌다리를 연결하여 이으니, 무릇 산천이 흘러가고 뻗어 내려와서 이리저리 감아 도는 형세와 국경이 길어졌는지 짧아졌는지, 늘어났는지 줄어들었는지 그 실상을 두루 보아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에 기록된 것이 실로 오류가 많은데, 이것을 아무도 바로잡는 이가 없으니, 말하는 자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불초한 신이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부임한 지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변경의 요새와 보루를 거의 다 출입하여 산해(山海)의 험하고 평탄한 지세와 곧게 뻗은 길과 우회하는 도로의 사정에 대하여 대략 10에 7, 8할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하되 길 가는 데 익숙하고 지리에 밝은 자에게 또다시 물어서 참고하고 수정하고 분별하여 도본(圖本)을 만들었는데, 중국의 여지도(輿地圖) 제도를 따라서 먼저 정(井) 자 모양으로 구획하여 한 구역마다 10리에 해당시켰습니다. 이로써 노정을 계산하여 산천과 군읍을 나열하고 배치하였으며 진보(鎭堡)와 봉수대(烽燧臺), 관령(關嶺)과 역참도 모두 일일이 헤아리고 가늠하는 등, 각각 이수(里數)에 따라 원근을 나누고 넓이를 정하여 경(經)과 위(緯)가 제자리를 잡고 굽은 모양이 원래 모습대로 그려짐으로써 수해(豎亥)를 수고롭게 걷게 하지 않고 기리고거(記里鼓車)로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아도 한번 보면 일목요연하여 손바닥에 물건을 올려놓고 보는 듯하니, 비록 발과 눈이 미치지 못하여 한두 곳의 차이가 없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우나 사방 너비의 총수(總數)와 관방(關防)의 대세는 거의 그 요체를 잡았다 할 것입니다. 지형의 이해(利害)를 두루 아는 데에 다소 보탬이 될 것이니, 직방씨가 관장하던 일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신은 또 여기에 한 가지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령(富寧)의 북쪽과 삼수(三水)의 서쪽은 의당 그 버려진 땅을 거두어 지켜서 국경을 튼튼히 해야 할 것이고, 길주(吉州)의 서쪽과 갑산(甲山)의 동쪽은 의당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왕래에 편리하게 해야 할 것이니, 생각건대 이 몇 가지 일은 정사에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한번 이 지도를 펴 보면 그 형세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변경을 개척하여 국경 문제로 시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또 영토를 확장하기를 좋아하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도 아니며, 우리의 토지를 거두고 우리의 울타리를 세우며 우리의 막힌 곳을 통하게 하고 우리의 응원 세력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니, 어찌 지나친 계책이 되겠습니까. 신은 유리하고 불리한 내용을 별도로 적어서 그림과 함께 올리니, 금성(金城)의 방략(方略)이 반드시 도면을 그려 올림으로써 드러났고 농우(隴右)의 산천이 쌀을 모아 지형을 만듦으로써 드러난 것처럼 그렇게 쓰이기를 바라는 것이 오늘날 신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하였다. 공은 정세규(鄭世規)와 조계원(趙啓遠)이 아뢴 장계를 함께 기록하고 모두 묘당에 내려서 이해(利害)를 자세히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달 빈청 인견 때에 상이 공의 상소와 지도를 꺼내어 우상 김수흥(金壽興)에게 보이니, 김수흥이 다 보고 대답하기를,
“편리하고 타당한 대책을 마련하여 아뢴 것이 또한 매우 자세하고 치밀하나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이어 차유령 밖에 진을 설치한 뒤에 생길 난처한 상황에 대해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본래 우리 땅이니, 적이 떠난 뒤에 우리가 사는 것은 당연하다. 저들이 당초에 와서 살았던 것도 저희 땅이라고 여겨서가 아니니, 지금 다시 군(郡)을 설치하더라도 저들이 어찌 와서 따지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채삼(採蔘)을 금지하는 약속에 대해 저들도 반드시 강을 넘어가는 것을 한계로 삼고 있으니, 장성 밖이라도 두만강 이내는 저들 또한 자기 땅이 아닌 줄을 알 것이다.”
하였다. 이때 지중추부사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지난번 저들이 와서 살았던 곳은 이 지역뿐만이 아닙니다. 회령 등지에도 많이 와서 살았으나 우리나라가 다시 군을 설치할 적에 저들이 와서 따져 물은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저 진(鎭)과 보(堡)를 강변으로 옮기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참으로 성상의 하교대로 우선 무산(茂山) 등의 보로 하여금 진을 옮기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산과 양영(梁永)의 첨사(僉使)와 만호(萬戶)로 하여금 채삼을 금지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봄가을로 인삼을 캘 시기에 항상 강변에 머물게 하고 몇 년 동안 이렇게 한 뒤에 그대로 이 지역에 진을 설치한다면 저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요 군을 다시 설치하는 일도 점차 서서히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길을 내는 일은 그 청을 들어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험한 지역에 길을 내는 일은 병가(兵家)에서 크게 꺼리는 바이나 형편상 해야 한다면 또한 이 때문에 길을 내지 않을 수 없으니, 요해처에 큰 진과 보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후주(厚州)를 설립하는 일은 그 청을 허락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유혁연이 아뢰기를,
“이는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후주는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신이 서관(西關 평안도)에 있을 때에 백성들이 모두 살기를 원한다고 들었으니,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강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하는 것이 많지 않은 까닭은 이 지역에서도 인삼을 채취할 수 있기 때문인데, 고을을 설치한 뒤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인삼을 많이 채취하여 전혀 생산되지 않으면 반드시 강을 넘어가는 일이 잦아질 것이니, 이것이 매우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곡절을 함경도 감영에 회문(回問)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무산(茂山)에 진(鎭)을 옮기는 것은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우나 우선 첨사로 하여금 매년 봄가을로 인삼을 채취할 시기에 토졸들을 경작하는 곳에 들여보내어 수삼 개월 머물면서 단속하게 하고, 길주(吉州)와 갑산(甲山) 사이의 길이 통하는 곳에는 한두 개의 진보를 설치하되 굳이 별도로 설치할 것이 없습니다. 사하북(斜下北)의 여러 진보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곳을 옮겨 설치하면 될 것이요, 후주와 사군(四郡) 등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가볍게 거론할 수 없으나 먼저 후주에 진을 설치하되 또한 장진강(長津江) 일대의 여러 진보 중에 긴요하지 않은 곳을 옮겨 설치하면 됩니다. 인삼과 화피(樺皮)는 모두 폐읍(廢邑)에서 생산되는데, 진을 설치한 뒤에는 이것들을 채취하여 씨가 마르게 될 것입니다. 화피로 말하면 군기(軍器)에 소용되는 것이니, 점차 씨가 말라 전혀 나오지 않게 되면 관계되는 바가 작은 문제가 아니니, 이에 관련한 이해(利害)에 대해 도신(道臣)이 자세히 살펴서 계문하라고 이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에서 도곤(都昆)까지는 바로 강 연안의 100여 리 지역이니 무산 첨사(茂山僉使)가 들어가 지키는 것은 형세상 매우 고단한 반면, 양영보(梁永堡)와 풍산보(豐山堡)는 유독 내지(內地)에 있어 또한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양영보의 권관(權管)이 서가선(西加先)에 들어가고 풍산보의 만호(萬戶)가 도곤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세와 이해 관계로 볼 때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비록 즉시 진보(鎭堡)를 옮길 수는 없으나 우선 이들을 무산 첨사가 감농(監農)하는 예에 따라 모두 강변으로 들여보내어 기찰하고 파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길주(吉州)와 갑산(甲山) 사이의 길이 통하는 곳은 신이 북로(北路)에서 올 때에 자세히 살펴보니, 길주목(吉州牧)에서 서북보(西北堡)까지가 50리이고 서북보에서 고서북보(古西北堡)까지가 20리이고 고서북보에서 이양춘(李陽春)의 옛터까지가 30리이고 이양춘의 옛터에서 양파(陽坡)까지가 40리이고 양파에서 설령(雪嶺) 위까지가 10리인데, 이곳은 길주의 경계이고 설령 서쪽부터는 바로 갑산의 경계입니다. 설령에서 운파(雲坡)까지가 15리이고 운파에서 감평(甘坪)까지가 40리이고 감평에서 동인보(同仁堡)까지가 50리이고 동인보에서 갑산부(甲山府)까지가 30리이니, 길주목에서 갑산부까지 통틀어 계산하면 280여 리이고 서북보에서 동인보까지는 겨우 200여 리입니다. 설령은 그리 높거나 험준하지 않으며 감평에서 동인보 사이까지는 종개주(終介州)라는 고개 하나가 있으나 또한 지형이 그리 험악하지 않습니다. 종전에 갑산에서 길주에 이르는 길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중간에 황토령(黃土嶺), 검의령(檢義嶺), 덕숭령(德崇嶺), 의덕령(義德嶺), 구운령(驅雲嶺), 마천령(磨天嶺) 등의 험한 곳이 있고 또 7일이 걸리는 노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낸 길은 가깝고 또 지형이 평탄하니, 관방(關防)의 측면에서 논하건대 이 200여 리의 요해처를 지키지 않고 7, 8일이나 걸리며 여러 봉우리와 골짝이 험하고 멀리 돌아가는 곳으로 후퇴해 지키는 것은 사리에 있어 실로 온당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고서북보는 바로 예전에 진보를 설치했던 곳인데 지형이 평탄해서 경작할 수 있으며, 이양춘의 옛터는 더욱 넓고 토지의 비옥함이 또한 길주보다 갑절이나 낫습니다. 사하북(斜下北)과 덕만동(德萬洞) 두 보는 이 길의 남쪽에 있으니, 실로 긴요하지 않습니다. 사하북을 이양춘의 옛터로 옮기고 덕만동을 고서북보로 옮기는 것이 지극히 합당합니다. 이양춘의 옛터 위로부터 고개 아래까지는 지형이 매우 높고 기후가 추워서 반드시 서리가 일찍 내릴 우려가 있으니, 경작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그 중간의 50리 지역은 방호(防護)하고 수직(守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양파(陽坡)라는 곳에 관사(館舍)를 짓고 사람을 모집하여 지키게 해서 나그네들이 잠시 의탁하는 곳으로 삼으며, 이양춘의 옛터로 진보를 설치한 곳에는 다른 진보의 수호하는 규정에 따라 군사를 윤번으로 보내고, 갑산(甲山) 경계의 고개 아래 15리 지점인 운파(雲坡) 지역에도 양파의 예에 따라 관사를 지어 수직하게 해야 합니다. 감평(甘坪)은 확 트여 있어 큰 동네를 이룰 만큼 땅이 지극히 펀펀하고 넓으니, 실로 진보를 설치하기에 합당합니다. 감평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가서 운총보(雲寵堡)와 갑산의 동인보(同仁堡)와 진동보(鎭東堡)까지는 모두 내지(內地)인데, 새로 설치한 진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형편상 다 혁파하기가 어려우나 진동보는 갑산부의 동남쪽에 있어서 더더욱 긴요치 않으니, 감평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후주(厚州)의 일은 신이 갑산에 있을 때에 다시 직접 살펴보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국상(國喪)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진영으로 돌아오느라 살피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그 이해(利害)와 편부(便否)에 대해서는 또한 이미 익숙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화피(樺皮)는 본래 지극히 추운 곳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본도에서 진상하는 것은 삼수와 갑산 두 고을, 혜산진(惠山鎭)과 운총보(雲寵堡) 두 진보에서 올리고 있습니다. 삼수는 갑산에 비하여 지형이 다소 낮으므로 사람들이 갑산에 들어가서 함께 화피를 채취하는바, 지금 새로 낸 길 북쪽의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등 여러 산 사이에 있습니다. 이 밖의 여러 곳에는 비록 혹 화피가 있더라도 다만 지붕을 덮고 사람을 매장하는 데에 사용할 뿐이요, 군기(軍器)에는 원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후주 등 사군(四郡)의 경우는 삼수에 비하면 또 더 하류여서 점점 낮아지는 지역이니, 사군에서 어찌 쓸 만한 화피가 있을 리 있겠습니까. 삼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강계(江界) 사람들이 매번 와서 화피를 사 간다고 하였습니다. 사군 지역을 신이 두루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생각건대 삼수와 갑산보다 반드시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삼수와 갑산은 인삼을 채취하는 곳이 지극히 적지만 사군에서 인삼이 어찌 무한정 생산되며 온 나라에 통행되는 인삼이 또 어찌 모두 사군에서만 나오겠습니까.
조정에서 만약 국경을 넘어가서 인삼을 채취하는 것을 우려한다면 금령(禁令)을 범한 모든 자들을 일절 용서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만약 방비하고 단속하는 일이 차츰 해이해져서 사군을 영원히 버리고 인삼을 채취하는 밭이 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반드시 이것을 만족스럽게 여겨 저들의 땅을 침범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또 4, 5십 년 전 호인(胡人)들이 후주에 가득하였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인삼과 화피가 부족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우리 땅이 된 뒤에 도리어 인삼과 화피가 부족할까 우려하여 진보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가령 인삼과 화피가 사군에서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얻기 어렵다 해도 마침내 이 두 가지 물건의 이로움을 위해 변방의 수백 리나 되는 요해처를 내버려서 후일에 적들이 몰래 점거하는 빌미가 되게 하는 것은 실로 국가를 지키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참작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후주의 진영을 설치하는 것은 반드시 금년 봄에 조처해야 하는데, 이제 때가 지나려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만일 시행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새로 설치하는 곳에 백성들을 안주시키고 자립시킬 수 있는 인물을 각별히 선발하여 보내십시오. 그리하면 거의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진강(長津江) 일대의 긴요치 않은 진보를 옮겨 설치하는 일은, 그 형세를 살펴보면 길주와 갑산 등 도로가 개통된 곳과는 다릅니다. 장진강 일대는 매 1식(息)마다 1보(堡)를 설치하여 역참(驛站)의 관사와 같으니, 이제 만약 한 곳을 철거하면 지나가는 역참의 중간이 끊어지게 됩니다. 신이 전에 올린 상소에 따라 장진강 일대의 진보를 모두 혁파하고 한 군(郡)을 별해(別害)에 별도로 설치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만약 다 혁파하지 못하고 한두 곳만 철거한다면 실로 처음에는 잘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이루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해 가을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강을 따라 붙어 있는 100여 리의 땅을 단지 무산(茂山)의 첨사로 하여금 지키게 할 경우 허술해지는 것은 진실로 감사가 아뢴 바와 같습니다. 양영(梁永)과 풍산(豐山)에도 인삼을 채취할 때에 관리가 들어가 머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길주와 갑산에 길을 내는 일과 보(堡)를 옮기고 관사를 짓는 일은 본도에서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니, 이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후주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화피와 인삼의 채취 때문에 막을 수 없다면 종전에 분부한 대로 진을 설치하되 장진강의 진보는 형편상 옮겨 설치할 수 없을 듯합니다. 별도로 한 군을 설치하는 문제는 또한 매우 중대하고 어려우니, 남북도와 도로의 원근을 막론하고 긴요하지 않은 진보 한 곳을 이곳에 옮겨 설치하고 첨사를 차출해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이대로 이문(移文)을 보내니, 공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진동보(鎭東堡)의 변장(邊將)은 본래 권관(權管)이었습니다. 새로 보를 설치하는 형세가 옛날 보와는 같지 않을 듯한데, 권관이라는 명칭은 지위가 너무 가볍습니다. 또 이곳은 적이 침입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외롭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권관이 이미 인신(印信)이 없고 보면 변방의 상황을 문건으로 보고하는 사이에 또한 허술한 일이 있을 듯합니다. 현재 권관을 맡고 있는 정희선(鄭希善)은 일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임기가 찹니다. 새로 보를 옮겨 설치하는 곳을 만약 생소한 사람에게 맡기면 성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권관 정희선을 만호(萬戶)로 바꾸어 계하(啓下)하여 효과를 거두게 하소서.
감평보(甘坪堡)와 운총보(雲寵堡) 사이에 옛 운총보의 터가 있는바 바로 적이 침입하는 요충지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인데, 감평보와 운총보의 형세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새로 설치하는 곳과 달리 보(堡)와 성(城)의 형태가 있고 또 인가와 농지가 있으니, 동인보(同仁堡)를 이곳에 옮겨 설치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후주는 이미 외롭게 떨어져 있고 삼수와 갑산은 모두 첩첩산중에 큰 고개가 있어서 가까운 곳이라고 하는 다른 고을까지도 모두 5, 6일 또는 8, 9일이 걸리니, 먼 지역에 있는 진(鎭)과 보의 백성은 방어의 중요성을 막론하고 결코 이전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지금 후주의 파수를 어면보(魚面堡)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후주와의 거리가 채 하룻길이 못 되니, 이 보의 백성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편리하고 쉬울 듯합니다. 또 어면보는 장진강(長津江) 일대의 여러 보 중에서 토지가 다소 넓어 토졸(土卒) 이외에 하릴없이 거주하는 백성들이 또한 많으니, 보를 옮긴 뒤에 역참의 관사를 수직하게 하면 염려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 듣건대 어면보의 만호 이상식(李尙植)은 사람됨이 근면하고 재간(才幹)이 있어서 금년에 보의 백성들을 권면하여 농사를 지은 것이 자못 많다고 합니다. 새로 보를 설치한 곳에 생소한 사람을 들여보내면 본보(本堡)의 만호를 그대로 유임시켜 보내는 것보다 착실하게 수행하지 못할 듯하니, 만호 이상식을 첨사(僉使)로 승진하여 들여보내어 효과를 거두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장계를 미처 아뢰기 전에 국상을 당하였는데, 이윽고 숙종이 즉위하여 모두 그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5년 뒤에 조정에서 새로 낸 길의 불편함을 의논하여 사하북(斜下北)과 덕만동(德萬洞), 장군파(將軍坡) 세 보(堡)를 서북보(西北堡)에 합하여 설치하고 첨사로 승격시킨 다음 마침내 새로 낸 길을 폐하였다. 그다음 해 여름에 평안 감사 유상운(柳尙運)이 하직하고 떠날 때에 사군을 폐지하는 것이 애석하다고 말하였고, 3년 후 봄에 연신(筵臣)이 다시 말하였으며, 공이 병조 판서로서 종전에 했던 말을 다시 아뢰자 상이 옳게 여겼고 영상 김수항(金壽恒)도 편리하다 하여 네 진(鎭)의 변장을 차임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여름에 유상운이 대사간으로 입대하여 그 불편함에 대해 아뢰기를,
“이 지역은 수백 리에 걸쳐 널리 뻗쳐 있습니다. 수목이 울창하고 도로가 막혀 끊어졌으니, 지금 만약 진을 설치하려면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토지를 개간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로 설치한 잔약한 진영이 이미 적을 막을 수가 없으니, 그렇게 되면 도리어 적이 쳐들어오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또 토지가 개간되면 초피(貂皮)와 인삼을 채취하는 이익이 끊겨 반드시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는 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북도의 초피와 인삼은 삼수와 갑산에서 나오는데, 고을을 설치한 지 수백 년이 되도록 그 이익이 끊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사군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어찌 하루아침에 이익이 완전히 끊기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리고 강변을 왕래하는 길이 한둘이 아니니, 적이 어찌 반드시 사군을 경유하여 쳐들어오겠습니까. 수목도 적을 막을 수는 있으나 어찌 사람을 모집하여 들어가 살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수항이 공에게 명하여 대신(大臣)들에게 다시 묻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우상 김석주(金錫胄)는,
“마땅히 먼저 두 진에 첨사를 둔 다음 형편을 보아 추가로 설치하소서.”
하였고, 좌상 민정중(閔鼎重)은,
“그대로 네 진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수항은 김석주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겨 마침내 무창(茂倉)과 자성(慈城) 두 진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평안 감사 신익상(申翼相)이 그 불편함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는 비록 새로운 말이 아니었으나 김석주는 신익상의 말에 따라 별안간 진을 파하고 백성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채 수십 일도 못 되어 백성들이 집을 새로 짓고 전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파종했는데 또다시 옮겨 가게 하니, 처음 옮길 때보다 원성(怨聲)이 더 심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하였다. 다음 해에 북백(北伯) 이세화(李世華)의 장계로 인하여 무산진(茂山鎭)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다. 공이 우상으로 있으면서 법식을 정하여 당상관의 부사(府使)로 삼아 육진(六鎭)과 일체로 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따랐다. 이에 무산부(茂山府)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생사당〔生祠〕을 세웠다. 1년 뒤 봄에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간 일로 인하여 후주보를 혁파할 것을 의논하였다. 병조 판서 이숙(李䎘)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은 ‘이미 설치하였다가 다시 혁파하는 것은 매우 애석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좌상으로서 아뢰기를,
“신이 선왕조 때에 보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지금 문제가 생겨서 대죄하고 있으니, 거듭 아뢰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충국(趙充國)이 이르기를, ‘국사의 이해(利害)는 마땅히 후일의 법이 되어야 한다. 어찌 한때의 공을 자랑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현명한 군주를 속이겠는가.하였으니,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신이 또한 대죄하고 있다 하여 어찌 감히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삼수와 갑산의 진보는 모두 강변이고 이번에 국경을 넘어간 여러 지역도 모두 그러하니, 그렇다면 후주만이 반드시 유독 인삼을 채취하는 통로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후주에는 곡식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타 지역 사람들이 모두 몰래 국경을 넘어 인삼을 채취할 때 먹는 양식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혁파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변진(邊鎭)을 설치하는 것은 인삼을 채취하는 일을 금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저 청나라 사람들은 텅 비어 있는 지역인 애양(靉陽), 관전(寬奠), 노성(老城) 등지에 현재 군대를 더 증원하여 축성(築城)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옛사람처럼 변방에 곡식을 옮겨다 놓기는커녕 도리어 곡식이 자랄까 염려하여 이미 만들어 놓은 진보를 혁파하려고 하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비록 진(鎭)을 혁파하더라도 땅은 본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변장(邊將)을 믿을 수 없어 혁파한다면 삼수와 강계의 파수하는 군사만은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파수하는 군사들도 반드시 스스로 국경을 넘는 것을 면하기 어렵고 그 결과 우려할 만한 단서가 진을 설치했을 때보다 도리어 더 많아질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금령을 엄격히 세워서 변장으로 하여금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금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광주 유수(廣州留守) 윤지완(尹趾完)이 아뢰기를,
“후주를 설치하기 전에도 해마다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하는 폐단이 있었으니, 후주를 혁파하고 혁파하지 않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경을 넘어 인삼을 채취하러 갈 때 오로지 후주를 통과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 판부사(閔判府事 민정중)가 일찍이 이곳의 감사를 지냈는데 혁파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니, 혁파를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감사 윤지완과 어사 이징명(李徵明)의 말에 따라 다시 후주를 혁파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여 무산(茂山)까지 혁파하려 하였다. 공이 이때 막 정사(呈辭)를 올렸으므로 비변사의 유사 당상에게 명하여 공에게 찾아가 묻게 하니, 공이 아뢰기를,
“무산은 전에 이미 진을 설치하였으니, 지금 고을을 혁파하더라도 다시 첨사를 두어야 하는데, 수령과 첨사 사이에 큰 이해 관계는 없을 듯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이곳이 또한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하는 중요한 길목이라고 하나 삼수와 갑산 등지에도 모두 얕은 여울이 있으니 굳이 무산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비변사에서 아뢰자, 상은 무산을 혁파하지 말고 다만 후주만을 혁파하라고 명하였으며, 어면보 첨사(魚面堡僉使)를 만호로 강등하고 옛 보를 그대로 두게 하였다.


 

[주D-001]시재 어사(試才御史) : 시재(試才)는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시취(試取)하는 것을 이르는바, 시재하기 위하여 특별히 보내는 어사이다.
[주D-002]부의(副擬) : 관직의 후보에 두 번째로 추천됨을 이른다. 옛날 이조(吏曹)에서 적임자를 세 사람 뽑아 올려 임금의 비점(批點)을 받았는데, 첫 번째로 주의(注擬)된 사람을 수망(首望)이라 하고 그다음으로 주의된 사람을 부의라 하였다.
[주D-003]개창(開倉) : 창고를 열고 공곡(公穀)을 출납함을 이른다.
[주D-004]원회부(元會付) : 환자곡을 분급하여 10분의 1의 이자를 받아 그중 10분의 1은 원곡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 10분의 9는 고을에 모아 두는데, 이것을 장부에 회록하여 계상(計上)한 것을 원회부라 이른다.
[주D-005]회외곡(會外穀) : 회계 장부에 회록(會錄)하고 남은 곡식을 이른다.
[주D-006]이미 …… 뒤에는 : 대본에는 ‘旣滿八道之後’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道’를 ‘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개색(改色) : 올해 햇곡식이 나오면 창고에 저장했던 묵은 곡식을 팔고 햇곡식을 사들여서 바꾸는 것으로, ‘색갈이’라고도 한다.
[주D-008]성하(城下)의 수치 : 성하는 성하지맹(城下之盟)으로, 성 밑까지 쳐들어온 적군과 맺는 맹약이라는 뜻인바, 항복한 나라가 적국과 맺는 굴욕적인 맹약을 이른다. 여기서는 병자호란 때에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게 항복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9]공안(貢案) :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예산표(豫算表)를 이른다.
[주D-010]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 : 대본에는 ‘內瞻寺僉正’으로 되어 있는데, 《대전회통》에 의거하여 ‘瞻’을 ‘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재물을 실어다가 : 대본에는 ‘輦革’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革’을 ‘財’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무오년ㆍ정묘년ㆍ병자년 : 무오년(1618, 광해군10)은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해 오자 강홍립(姜弘立) 등이 원병을 이끌고 출정한 해이며,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은 호란(胡亂)이 있던 해이다.
[주D-013]도안(都案) : 병조의 도안청(都案廳)에서 군적(軍籍)의 변동 사항을 등록하여 두던 대장을 이른다.
[주D-014]수도(隧道) : 무덤으로 통하는 길을 이르는바, 제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도라 한다.
[주D-015]국구(國舅) : 현종(顯宗)의 장인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을 가리킨다. 김좌명(金佐明)은 김우명의 형으로 영의정 김육(金堉)의 아들이었는데, 이들은 같은 서인(西人)이면서 한당(漢黨)으로 분류되어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주D-016]유신(儒臣) : 학자 출신의 신하란 뜻으로 송시열을 가리킨 것이다.
[주D-017]주운(朱雲)과 같은 의논 : 주운은 전한 성제(前漢成帝) 때의 직신(直臣)으로 일찍이 괴리(槐里)의 현령을 지냈는데, 성제 앞에서 상방(尙方)의 참마검(斬馬劍)을 청하며 간신의 머리를 베겠다고 하니, 성제가 누구냐고 물었다.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고 대답하자, 성제가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면전에서 나의 스승을 욕하니 죽어 마땅하다.” 하고는 어사(御史)에게 끌어내리도록 하였는데, 주운이 난간을 붙잡으며 간쟁하다가 난간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漢書 卷67 朱雲傳》
[주D-018]영윤(令胤)이 …… 있고 : 영윤은 상대방의 아들을 이르는 말로 바로 남구만을 가리킨 것이며, 풍채(風采)는 위엄과 명성을 이르는바, 남구만이 대사간이 되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간관(諫官)으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9]박서계(朴西溪) : 서계는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호이다. 증광 문과에 장원하고 이조와 형조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으나 곧 취소되었다. 사후인 1706년(숙종45)에 복관(復官)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주D-020]정위(廷尉)의 저울대 : 정위는 옛날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므로 저울대란 그가 법을 적용하는 기준을 말한다.
[주D-021]장석지(張釋之)의 …… 있습니다 : 장석지는 전한 문제(前漢文帝) 때의 명신인바, 그가 정위로 있을 때의 일이다. 황제가 출행하는데, 어떤 사람이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도망하자, 황제의 수레를 끌던 말이 놀라 큰 사고가 일어날 뻔하였다. 그 사람을 포박하여 정위에게 치죄(治罪)하게 하였는데, 장석지가 황제에게 “이 사람은 벽제(辟除)의 법을 범하였으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하고 아뢰자, 황제는 크게 노하며 형벌이 너무 가볍다고 말하였다. 이에 장석지는 “법이란 천하에 공공(公共)의 것입니다. 지금 법조문이 이와 같은데 다시 법을 무겁게 내린다면, 이는 백성들이 법을 믿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또 그 당시 폐하께서 사람을 시켜 죽이셨다면 모르지만 이미 정위에게 맡기셨습니다. 정위는 천하의 저울대입니다. 저울대가 한번 기울면 천하에 법을 적용하는 것이 모두 기준이 없게 될 것이니, 백성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그의 말이 옳다.” 하고 칭찬하였다. 《漢書 卷50 張釋之傳》
[주D-022]사패 노비(賜牌奴婢) : 종친이나 공신에게 내려 준 노비를 이른다.
[주D-023]수교(受敎) : 황제(皇帝)의 명령을 조칙(詔勅)이라고 하는 데에 반하여 제후(諸侯)의 명령을 교(敎)라 하며, 교령(敎令)을 받은 관사(官司)에서는 이를 수교라고 한다.
[주D-024]수공 노비(收貢奴婢) : 국가에서 신공(身貢)을 거두어들이는 노비를 이른다.
[주D-025]십고 십상(十考十上) : 매년 2회에 걸쳐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것을 고(考)라 하고, 그 성적을 상ㆍ중ㆍ하로 표시하였는데, 10회 평가에 모두 상의 성적을 얻는 것을 십고 십상이라 하였다.
[주D-026]양대(兩代)의 석물(石物) : 양대는 약천의 조고인 금성 현령(金城縣令) 남식(南栻)과 부친인 평강 현령(平康縣令) 남일성(南一星)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에 두 대의 묘표(墓表)를 세웠다.
[주D-027]재임(齋任) : 성균관이나 향교 따위에서 숙식하는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이른다.
[주D-028]청금록(靑衿錄) : 성균관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장부이다.
[주D-029]한 식년(式年) : 식년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의 연(年)을 가리킨 것으로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온다.
[주D-030]반촌(泮村) :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근처의 동네를 이르는 말이다.
[주D-031]하련대(下輦臺) : 임금이 문묘(文廟)에 들어갈 때, 문묘 앞에서 타고 간 연(輦)에서 내리는 장소를 이른다.
[주D-032]남을 …… 않겠는가 : 《시경》 〈웅치(雄雉)〉에 보이는데, 《논어》 〈자한(子罕)〉에도 인용되어 있다.
[주D-033]백성들에게 …… 금지하였다 : 모내기는 날씨가 가물면 할 수가 없으므로 봄에 일찍 직파(直播)하여 한해(旱害)를 피하게 한 것이다.
[주D-034]오 학사(吳學士) :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吳達濟)를 가리킨다. 자는 계휘(季輝)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36년(인조14) 부교리로 있었는데, 후금(後金)의 위협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에 적극 반대하고 상소하여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였으며,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나라 군대에게 항복한 다음 적진에 송치되었으나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에 굽히지 않아 다시 심양(瀋陽)으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에서도 갖은 협박과 유혹에 굽히지 않다가 결국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니, 이들을 ‘삼학사’라 칭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주D-035]내제(內弟) : 외종(外從) 아우를 이른다. 일반적으로 고모의 아들을 내종(內從), 외숙의 아들을 외종(外從)이라 하나 예전에는 자기 집에서 밖으로 나간 것을 외(外)라 하여 고모의 아들을 외 또는 표(表)라 하고, 자기 집으로 시집온 어머니의 친정을 내(內)라 하였다.
[주D-036]남관(南關) : 마천령(摩天嶺) 남쪽 지방으로 함경남도를 이르는데 관남(關南)이라고도 한다.
[주D-037]지차읍(之次邑) : 그다음이 되는 고을, 즉 재해(災害)가 그리 심하지 않은 고을을 이른다.
[주D-038]호구(戶口) : 호적 등본을 이른다. 《대전회통(大典會通)》 〈호조(戶曹) 호적(戶籍)〉에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 등 식년(式年)에 호적을 작성하는데, 이때 호적에 오른 자에게 호구를 작성해서 지급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주D-039]솔정(率丁) : 호주가 한 가족으로 데리고 사는 성인 남정(男丁)을 이른다.
[주D-040]무경칠서(武經七書) : 일곱 종류의 병서(兵書)로 유가(儒家)의 사서(四書)ㆍ삼경(三經)인 칠서에 대칭하여 붙인 이름인바, 《손자(孫子)》, 《오자(吳子)》, 《육도(六鞱)》, 《삼략(三略)》, 《사마법(司馬法)》, 《울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등이다.
[주D-041]편비(偏裨) : 감사를 보좌하는 도사(都事)나 부장(副將) 등을 이른다.
[주D-042]고(故) 상신(相臣) : 상신은 정승을 이르는바, 곧 남구만을 가리킨 것이다.
[주D-043]염석(鹽石) : 소금을 가리킨다. 석(石)은 소금의 수량을 나타내는 단위인데, 소금을 말할 때 염(鹽) 자 뒤에 붙여서 말한 것이다.
[주D-044]조미(造米) :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아니한 매조미쌀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주D-045]전미(田米) : 밭에서 나오는 쌀이란 뜻으로 육도미(陸稻米)를 이른다. 육도는 산도(山稻)라고도 한다.
[주D-046]초면관(初面官) : 지역의 분계(分界)에 있는 고을을 이른다.
[주D-047]정동명(鄭東溟) : 동명은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호이다. 별시 문과에 장원하여 홍문관 제학과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주D-048]멀리서도 …… 걸 : 양웅(揚雄)은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이며 문장가이다. 여기서는 정두경을 양웅에 비유하여, 그의 집에 술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쓸쓸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주D-049]토관(土官) : 토관직(土官職)을 가리킨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베푼 벼슬로, 지방 토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관찰사나 절도사가 그 지방에서 유력한 사람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주D-050]아병(牙兵) : 본진에서 대장(大將)의 휘하(麾下)에 있는 병사를 이른다.
[주D-051]배지(陪持) : 지방 관아의 진상(進上), 장계(狀啓)를 가지고 서울에 가는 사람을 이른다.
[주D-052]참동계(參同契) : 양생술(養生術)에 관한 도가(道家)의 서적으로 한(漢)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주역(周易)》과 황로(黃老) 사상 및 노화(爐火) 즉 연단술(煉丹術)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다.
[주D-053]태양 유주(太陽流珠)가 …… 것 : 태양 유주는 태양이 비추는 것으로 온갖 생물의 근원이라 한다. 《참동계》의 주석에 “사람의 생명은 동방(東方)에 있으니, 해가 묘방에서 떠오르는데 만물이 이것을 우러러 살아간다. 이는 만물이 모두 태양의 정기를 빌려 생명으로 삼는 것이다. 태양 유주는 생명의 보배로운 근원이니, 이 생명의 근원이 신(神)에 붙어 있으면 여러 가지를 궁리하여 생각을 어지럽히고 생각을 어지럽히면 물건을 따라 옮겨 가며, 정(精)에 붙어 있으면 가득 차서 보전하기 어렵고, 보전하기 어려우면 생각을 어지럽혀 정기가 누설되기 쉽다. 그러므로 늘 사람을 떠나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주D-054]무산(茂山)의 옥련보(玉連堡) : 대본에는 ‘茂山之連’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之’와 ‘連’ 사이에 ‘玉’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55]폐사군(廢四郡) : 지금의 함경남북도 압록강 주변에 위치한 여연(閭延), 우예(虞芮), 무창(茂昌), 자성(慈城)을 말한다. 이 4군은 태종과 세종 때 개척하였는데 세조 때 야인(野人)들의 침탈을 이유로 백성들을 내지로 이주시키고 폐지하여 이후 폐사군이라고 불렸다. 《국역 성호사설 제2권》
[주D-056]매번 보에 들어가면 : 대본에는 ‘每當入保’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保’를 ‘堡’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7]직방씨(職方氏) : 천하의 지도(地圖)를 맡아서 땅을 관장한 관리로, 《주례(周禮)》의 하관(夏官)에 속한다. 또 사방으로부터 들어오는 공물(貢物)을 관장하였다.
[주D-058]수해(豎亥)를 …… 않아도 : 수해는 우(禹) 임금의 신하로, 걸음을 잘 걸었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 “수해에게 북극에서부터 남극까지 걸어가게 하였더니, 모두 2억 3만 3500리 75보(步)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기리고거(記里鼓車)는 거리를 재는 수레로, 후송 인종(後宋仁宗) 천성(天聖) 5년(1027)에 내시(內侍) 노도륭(盧道隆)이 처음 만들었다. 멍에는 하나이고 바퀴는 쌍으로 되어 있으며, 상(廂) 위에 두 층이 있고 각각 목인(木人)을 만들어 여기에 앉혔는데, 수레가 1리쯤 가면 아래층의 목인이 나와 북을 치고, 10리쯤 가면 위층의 목인이 나와 징을 치게 되어 있다.
[주D-059]금성(金城)의 …… 드러났고 : 금성은 감숙성(甘肅省) 동부에 있던 지명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 오랑캐 선령(先零)이 여러 강족(羌族)과 함께 작은 종족 등을 겁략(劫掠)하여 모두 배반하자, 조충국(趙充國)이 금성에 가서 방략(方略)을 도면으로 그려 올리고, 둔전법(屯田法)의 유익함을 아뢰어 이를 시행해서 큰 공을 세웠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주D-060]농우(隴右)의 …… 것처럼 : 농우는 농서(隴西)를 가리키는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가 농서의 외효(隗囂)를 치기 위하여 친정(親征)했을 때에 장수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불러 물으니, 마원이 광무제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짝 모양을 만들고 지형을 만들어 가면서 여러 군대가 오가며 중도에 경유하는 곳을 보여 줌으로써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오랑캐가 일목요연하게 내 눈 안에 들어 있다.” 하고는 다음 날 마침내 진군하여 농서를 평정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61]화피(樺皮) : 벚나무의 껍질로 활을 만드는 데 쓴다.
[주D-062]진동보(鎭東堡) : 송참(松站)의 옛 이름이다. 당(唐)나라 때 설인귀(薛仁貴), 유인궤(劉仁軌)가 요동(遼東)을 친 뒤,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설유참(薛劉站)이라 한 것인데, 와전되어 송참이라고 하였다. 일명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주D-063]1식(息) : 30리를 1식이라 한다. 식은 한 번 쉬어 간다는 뜻으로 곧 역참이다. 《萬機要覽 財用編3》
[주D-064]백성들이 …… 짓고 : 대본에는 ‘草創家’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家’ 다음에 ‘舍’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5]옛 책에 …… 것 : 이 내용은 《국어(國語)》 〈오어(吳語)〉에 보인다.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越)나라와 싸워 승리하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항복을 받아 주었으나 또다시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공격하자, 월나라 사신 제계영(諸稽郢)이 오왕에게 아뢰기를, “속담에 ‘여우가 묻고 여우가 다시 파내니, 이 때문에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미 월나라를 봉해 주시어 현명하다는 명성이 온 천하에 알려졌는데, 또다시 공격하여 멸망시킨다면 이는 대왕께서 공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오왕 부차는 월나라 공격을 중지하였다.
[주D-066]북백(北伯) : 관북 지방의 도백(道伯)이란 뜻으로 함경 감사를 이른다.
[주D-067]공이 우상으로 있으면서 : 대본에는 ‘以右相’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以’ 앞에 ‘公’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8]현명한 군주를 속이겠는가 : 대본에는 ‘期明主’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期’를 ‘欺’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9]조충국(趙充國)이 …… 하였으니 : 조충국은 한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장이다. 당시 여러 장군들은 강족(羌族)을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충국은 둔전을 설치하여 강족을 장기적으로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강족들이 쇠약해지자 둔전을 파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는데, 이때 친구인 호성사(浩星賜)가 그를 맞이하며 주전론자(主戰論者)인 다른 장군에게 공을 돌리라고 권고했으나, 조충국은 “내가 이미 나이가 늙었고 지위가 높으니, 어찌 한때의 공을 자랑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현명한 군주를 속이겠는가. 군대의 일은 국가의 중대사이니, 마땅히 후일의 법이 되어야 한다.” 하고, 선제에게 모든 상황을 아뢰었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약천연보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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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46세 갑인년(1674, 현종15)
2월 24일에 인선왕대비(仁宣王大妃)가 승하하였다.
3월에 감영으로 돌아갔는데, 이달에 상이 애책문 서사관(哀冊文書寫官)에 차임하고, 이어서 가을 수확 때까지 연임하도록 명하였다.
7월에 함흥성(咸興城)을 개축하였으며, 이달에 신병으로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해임하도록 윤허하였다.
8월 18일에 현종대왕(顯宗大王)이 승하하였다.
9월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0월에 겸 동지경연사(兼同知經筵事)가 되고 비변사 유사 당상에 차임되었으며, 형조 참판에 제수되고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상소하여 변방을 대비하는 일로 청나라에 자문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이 일을 비변사에 내려 마침내 정지하였다. 이달에 행 대사성(行大司成)으로 옮겼다.

○ 처음에 선조(宣祖) 정미년(1607, 선조40)에 감사 장만(張晩)이 함흥성을 쌓았는데, 광해군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감사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장만이 축성한 것은 모두 작은 돌이어서 견고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후로 점점 무너지는데도 수리하지 않은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공은 변방에 부임하자 즉시 이를 우려하였으나 시기가 어려울 때여서 미처 손쓰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해 4월에 이르러 함흥의 백성을 동원하여 나무와 돌, 벽돌을 장만하고 마침내 장계로 아뢰자, 남도(南道)의 11개 고을의 부북군(赴北軍) 441명에게 입방(立防)과 습조(習操)를 면제해 주어 축성하도록 허락하였다. 공은 또다시 각 고을에 축성할 인원을 나누어 배정하되, 전지(田地) 8결마다 역도(役徒) 1명을 징발하여 도합 2260명을 얻었다. 7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9월까지 모두 43일 만에 공사가 끝났는데, 새로 쌓은 것과 같아서 지금까지 70년이 되도록 허물어지는 일이 없었다.
○ 7월에 공이 상소하였는데 이를 비변사에 내리자, 비변사에서 복주하기를,
“임기가 찬 뒤에 두 차례 연임하게 한 것은 실로 성상께서 본도의 일을 지극히 염려하시는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 상소문을 살펴보건대 병의 증상을 자세히 아뢰었으니, 지금 비록 추수가 끝난 뒤 교대할 때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연임 기한 내에 소원에 따라 체직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처음 세조 정해년(1467, 세조13)에 영흥(永興)의 백성들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호응하였는데, 참봉 김영로(金榮老)가 영흥 부사의 죽음을 면하게 하니, 고원(高原) 이남의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는 감히 읍장(邑長)을 해치지 못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김영로를 거산 찰방(居山察訪)에 제수하고 복호(復戶)를 주어 대대로 혜택을 입게 하였다. 향인(鄕人) 이팽수(李彭壽)도 함흥에서 판관(判官)의 죽음을 면하게 하니,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에 특별히 제수하고 똑같이 복호를 주었다.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김영로의 증손인 김경복(金慶福)이 무과에 급제하고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을 따라 힘을 다해 싸워서 북쪽 오랑캐를 격파하였다. 신립이 이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니, 상이 김경복을 불러서 만나 보고 《정충록(精忠錄)》을 하사하였으며, 현감을 제수하였다. 그 뒤 김경복은 임진년(1592, 선조25)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선봉이 되어 왜구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그에게 특별히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제수하였다. 이팽수의 손자 이몽서(李夢瑞)도 무과에 올라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을 따라 오랑캐 추장을 사살(射殺)하고는 마침내 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북로(北路)에 침입하였을 때에 특별히 소모 별장(召募別將)에 제수되었다. 이몽서는 요해처에 매복을 숨겨 두고 유격하는 왜군들을 다 사로잡거나 죽여서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남게 되었는데 미처 승진하기 전에 죽으니, 고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엾게 여기고 애석해하였다. 이해 9월에 공이 그 실상을 적어 장계를 올리기를,
“을사년(1665, 현종6)에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함흥 사람 유응수(柳應秀) 등이 임진년(1592)에 왜적을 토벌한 일을 조정에 보고하여 관직을 추증하고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이 네 사람의 의로운 공렬(功烈)도 진실로 이와 차이가 없고 대를 이어 아름다운 명성을 이루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후의 격례(格例)를 상고하여 모두 포증(褒贈)을 가하고 또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함으로써 풍교(風敎)를 세워 후인들을 권장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였다. 처음 선조(宣祖) 때에 함흥 사람 문덕교(文德敎)가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되었는데 어질고 학문이 있었다. 감사 한준겸(韓俊謙)이 그를 불러 학직(學職)에 임명하였는데, 그가 죽자 사당에 제사하였다. 이때에 공이 그 유문(遺文)을 얻어 판각해서 세상에 유포하였다.
○ 공이 조정으로 돌아가자 북쪽 사람들은 쇠를 주조하여 송덕비를 세우고 명(銘)하기를, “청렴하고 소탈하며 세밀하고 자상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일으켰다.〔廉簡精詳 愛民興學〕” 하였다. 공은 정사를 베풀 적에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는 데에 힘썼으며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 공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가슴은 있으나 올바른 마음이 없어 헛되이 교만하고 거친 행위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주자(朱子)의 “크게 공명을 세웠던 옛날 장수들은 매우 신중하고 두루 치밀하였는데 그래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세밀하여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일에 있어 반드시 유사(有司)로 하여금 그 일의 유리한 점과 문제점을 사람들에게 묻게 하여 좋은 것을 택한 다음 가능성을 보고서 시행하였고 그 결과 시행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그리고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여러 고을을 두루 순행하고 나서 진휼(賑恤)하는 유사 중에 사리를 아는 자 한두 사람과 일을 잘 아는 색리(色吏) 한 사람을 성주(星州)로 불러 문서 작성을 상의함은 물론이고 이어 본읍의 폐단을 널리 묻고 겸하여 그 인물을 관찰하였다. 또 북쪽 감영에 부임했을 때에는 궁벽한 성과 보루를 일일이 찾아가서 직접 묻곤 하였고, 경흥(慶興)에는 세 번이나 들어가 모든 일의 폐단을 묻고는 변통하여 처리하였으며, 전후로 담당한 여러 관사(官司)에 모두 조목과 법식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그것을 대부분 준용(遵用)하고 있으니, 노련한 관리들이 아직도 공을 칭찬해 마지않는다.
○ 10월에 비변사 유사 당상에 차임되고, 승문원 제조에 차임되었다. 당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장계로 아뢰기를,
“관왜(館倭)들이 말하기를, ‘오삼계(吳三桂)가 해적과 연합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1월에 영상 허적(許積)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청나라가 아군(我軍)에게 병기를 청하려는 뜻이 있으니 앞으로 군대를 청하는 일이 있을까 우려되고, 또 우리나라가 저들의 금령 때문에 양서(兩西)의 군무(軍務)를 포기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청컨대 군대를 다스려 해적을 방비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북경(北京)에 자문(咨文)을 보내소서. 이렇게 하면 한편으로는 후일에 가령 저들이 군대의 파견을 청하는 일이 있을 경우 우리나라를 방비하기에도 겨를이 없다는 뜻으로 답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서도(西道)의 산성과 군비 등에 관한 일을 마음대로 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이에 대하여 공이 아뢰기를,
“반드시 기휘(忌諱)를 범하여 문제가 생길 염려가 있습니다.”
하고 반대하였다. 조회를 파하고 나온 뒤에 중론은 “혹 후일의 장본(張本)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승문원에 명하여 자문(咨文)을 지었는데, 공이 이와 관련하여 상소하기를,
“지금 우리가 이 일을 가지고 저들에게 청하면 저들이 우리에게 대응하는 것은 요컨대 세 가지 가설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저들이 우리를 믿지 않는 것이 또한 우리가 저들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오경(吳耿)의 군대가 일어난 뒤로는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습격해 온다는 헛소문이 돌아서 밤낮으로 두려워하다가 고부사(告訃使)가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만일 갑자기 우리나라로부터 군대를 다스리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또 왜관(倭館)에서 얻은 오삼계의 격문(檄文)과 해선(海船)이 왕래한다는 등의 말을 듣게 되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가 그들과 내통하는가 의심할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남쪽 지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군대를 일으켜 우리나라에 쳐들어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명의 사신을 급파하여 조사하고 힐책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니, 만약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요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마저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효종조(孝宗朝) 경인년(1650, 효종1)에는 청나라 사람들의 기세가 크게 성하였으니, 우리를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왜구(倭寇)를 방비하겠다고 청하자 조사하는 사신이 뒤이어 나왔고, 이로 인해 공경(公卿)들이 금고(禁錮)를 당했으니, 그 당시 나라가 치욕을 당하여 위태롭고 두려웠던 상황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금 저들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 반드시 경인년보다 심하여 난처한 일이 혹 뜻밖에 생길까 두려우니, 이렇게 된다면 어찌 심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저들이 현재 우리나라에 군기(軍器)를 요청하려 한다고 합니다. 군기를 요청하고 나면 반드시 장차 또 군대를 파견해 주기를 요청할 것이니, 조정에서 깊이 우려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만간 저들이 이러한 요청을 해 올 경우 우리가 저들에게 답할 것은, 정축년(1637, 인조15)에 약조(約條)를 맺은 뒤로는 우리나라가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군대를 훈련시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구실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군대를 다스린다는 말을 한번 꺼내면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먼저 저들이 파병을 요청할 수 있는 단서를 열어 놓는 것이니, 이것을 우려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세 번째는 저들이 이미 우리를 의심하지 않아 따지지 않고, 또 이로 인하여 파병을 요청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요청을 허락해 주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삼남 지방과 경기, 강원도, 함경도 등은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병사를 조련하는 모든 일에 있어 본래 저들로 인해 혐의하거나 구애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황해도와 평안도 두 곳은 옛날부터 저들을 두려워하고 꺼려서 포기하였으나 병사들을 점검하고 병기를 보수하는 등의 일은 간혹 시행했던 경우가 있는데, 이 때문에 사단이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단지 이러한 일들을 하려는 것일 뿐이라면 굳이 저들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은 뒤에 조처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직로(直路)에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일은 중국에 청하여 허락을 받아야 하나, 지금 황해도와 평안도의 형편이 세 차례 칙사(勅使)의 행차와 다섯 차례 사신의 행차가 금년 한 해에 있었으며, 또 앞으로 조제(弔祭)와 책봉(冊封) 칙사가 또 뒤이어 올 터인데, 두 도는 다른 곳보다 흉년의 참혹함이 심합니다. 그리하여 추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굶어 죽고 목을 매어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가령 저들이 우리의 요청을 순순히 허락한다 해도 명년 봄과 여름 사이에는 결코 백성들을 동원하여 성을 수축할 형편이 못 되니, 저들의 허락을 받은 뒤에 또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어찌 굳이 미리 요청해서 일을 크게 벌이는 듯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는 큰 폐해가 있고 하나는 작은 이익도 없습니다. 반복하여 심사숙고하건대 이 이치가 매우 분명하니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또 모든 일은 반드시 실제는 있고 소문은 없게 해야지 실제는 없으면서 소문만 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방에 관한 일은 먼저 누설하는 것을 더욱 꺼리니, 지금 우리나라가 가령 군대를 잘 다스려서 약한 군대를 바꾸어 강하게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은폐하고 감추어서 적들로 하여금 엿보거나 헤아리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애당초 한 가지 일도 조처한 것이 없으면서 먼저 군대를 다스린다는 헛소문을 낸단 말입니까.
만약 신의 말이 불행히도 적중된다면 국가의 이해 관계에 매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니, 감히 다시 성상 앞에서 다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다시 재량하고 조처하시어 뒷날 후회가 없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일을 비변사에 내리자, 다른 재상들이 말하기를,
“주상께서 현재 임시로 국사를 맡고 계시고 이 일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자문을 보내는 것을 중지하였다.

47세 을묘년(1675, 숙종1)
숙종대왕 원년 1월에 시책문 서사관(諡冊文書寫官)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이달에 공이 상소하여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이 권력을 농단하는 것을 비난하자, 상이 크게 책망하였다. 이에 공이 첫 번째 정사(呈辭)를 올리니, 상은 모든 관직을 해임하였다.
2월에 사간원에서 공을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였는데, 일곱 번 아뢰고 정지하였다.
3월에 대부인을 모시고 결성(結城)으로 돌아왔다.
5월에 상이 지방에 있는 재신(宰臣)들을 책망하였으므로 공은 강교(江郊)에 나아가 대죄하였다.
7월에 공의 고신첩(告身帖)을 빼앗았다.
8월에 결성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아들이 성주 목사(星州牧使)인 이공 시현(李公時顯)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 처음에 현종(顯宗)이 새로 즉위하니,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탑전에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장로(長老)에게 들으니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광평대군(廣平大君)이 일찍 요절한 것을 슬프게 생각하셔서 그 아들을 궁중에 남겨 두어 양육하게 하셨는데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즉시 밖으로 내보내도록 명하셨으며, 선조대왕(宣祖大王)은 왕자와 왕손들이 계자인(啓字印)을 만지거나 가지고 노는 것을 일절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그 깊은 계책과 원대한 생각은 실로 후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두 아들이 선왕조(先王朝)부터 궁중에 남아 양육되었습니다. 그 형 복창군 이정(李楨)은 현재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인데도 궁중을 무상출입하니, 외부의 말이 들어오고 내부의 말이 나가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전하의 대에 이르러서는 선왕조에 비하면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궁중에 남겨져 양육된 사람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전하께서는 궁중에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을 두어서 화의 기틀을 조성함으로써 충신과 의사(義士)들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고 근심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말세에 사고가 많음을 염려하시고 세종(世宗)과 선조(宣朝)의 깊은 생각을 본받으셔서 방편과 선처를 생각하여 시종 친애할 방도를 도모하소서.”
하였으나 현종(顯宗)은 그 말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숙종(肅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인평대군의 아들 이정과 이남(李柟) 등이 누조(累朝)에 걸쳐 받은 은혜를 믿고는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서 궁중에서 정탐을 하며 외당(外黨)을 끼고서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공이 이에 상소하기를,
“신이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한 것을 보니, 고(故) 판서 송준길의 관작을 추탈(追奪)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송준길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신은 그를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臺臣)이 송준길이 이미 죽은 뒤에 그의 죄를 이와 같이 논하고 있으니, 만약 송준길이 어진 사람인데 죽은 뒤에 망극한 비방을 억울하게 입은 것이라면 신은 의리상 현자(賢者)를 해치고 바른 사람을 질시하는 무리들에게 수치스럽게 영합하면서 이들과 함께 조정에 서서는 안 되며, 만약 송준길이 과연 말하는 자들의 말처럼 나쁜 사람이라면 신은 죄인의 문생(門生)으로서 또한 유배 가는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즉시 명하시어 신의 직명(職名)을 삭제하고, 다시 유사(有司)로 하여금 죄인을 스승으로 섬긴 신의 죄를 의논하게 하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또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조정의 상황은 둑이 터져 넘쳐흘러 그 형세가 이미 하늘에까지 이르러서 모두 이 가운데 빠진 것과 같으니, 진실로 한 사람의 한 손으로는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은 한미한 집안에서 발탁되어 여러 조정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몸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이르고 영화가 부모에게 미쳤으니, 신이 분골쇄신한다 해도 만분의 일이나마 우러러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온 조정이 물결에 휩쓸린 듯이 소란하여 국가의 안위가 정해지지 않은 지금, 신이 가슴속에 답답하게 맺혀 있는 생각을 한번 드러내지 않는다면, 신이 비록 죽어서 뼈가 썩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오히려 장차 불충한 귀신이 되어 지하에 계신 선대왕(先大王 현종)과 효종대왕(孝宗大王)을 뵐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만 번 죽을죄를 무릅쓰고 충심(衷心)을 아뢰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의 심정을 가엾게 여기고 저의 어리석은 마음을 용서하시어 조금이나마 살펴 주소서.
지금 조정이 서로 대치하여 피차가 서로 다투는 것은 송시열(宋時烈)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공격하는 말과 그를 변호하는 의논이 뒤섞여 나오고 번갈아 일어나는데, 왼쪽을 편드느냐 오른쪽을 편드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화와 복이 뒤따라 배척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계속 이어져 반열이 거의 텅 비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아뢰는가 하면,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송시열이 국상(國喪)에 달려와서 곡하러 도성에 들어왔다는 말씀을 들으시자, 즉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위로하고 기뻐하는 뜻을 전하셨고, 또 그로 하여금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돈유(敦諭)하는 명령이 7, 8번에 이르러서 끝내 불러온 뒤에야 그치셨으니, 이때 전하께서는 송시열을 간절히 기다리는 정성과 융숭하게 예우하는 뜻이 지극하였다고 이를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한두 달이 지나자 성상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시어 준엄한 분부와 꾸짖는 말씀이 앞뒤로 잇따라 신하로서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본래 송시열을 이와 같이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셨다면 당초 즉위하셨을 때에 송시열을 우대하신 것이 어찌 저와 같이 간곡하고 돈독하셨습니까. 이 때문에 궁중(宮中)과 궁외(宮外)의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피부에 와 닿는 듯한 통절한 하소연과 물처럼 점점 스며드는 비방〔膚受浸潤〕에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앞뒤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비록 소인의 심보로 성상의 뜻을 함부로 헤아린 것이나, 행적을 가지고 관찰해 본다면 만에 하나 이와 가까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으로 홀로 재계하는 여막(廬幕)에 거처하시니, 안으로는 비록 두 자전(慈殿)께 아침마다 문안을 올리지만 평소에 항상 선왕을 모시던 때만은 못하고, 밖으로는 비록 비변사(備邊司)의 대신들을 접견하시지만 평소에 날마다 강관(講官)들을 접견하시던 것만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침과 낮, 새벽과 저녁 사이에 전하께서 함께 거처하는 자들을 알 만합니다.
통곡하고 발을 구르며 슬퍼하는 정이 이미 마음속에 간절하시고, 여러 가지 정무(政務)를 다스리는 번거로운 일이 또 앞에 가득하시니, 이때에 평소 친숙한 좌우의 측근들에게 때때로 의견을 묻고 심부름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로부터 성스러운 군주와 현명한 제왕들도 혹 면치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전하께서 비록 좌우의 측근들을 엄히 단속하시어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으시며 또 정사와 명령을 내리시는 사이에 홀로 용단을 내리시어 좌우의 측근들로 하여금 털끝만큼도 감히 참여하지 못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부앙(俯仰)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이들이 이미 전하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전대(前代)의 역사를 일일이 관찰해 보건대 이와 같은 경우에 군주가 처음에는 측근들을 친숙히 여겨 통제하기 쉽다고 생각하고 중간에는 친근하여 신임할 만하다고 여기다가 끝에는 화(禍)가 발생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자기 몸을 해치고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먼 옛날부터 도도(滔滔)히 이어져 마치 동일한 바큇자국이 난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지사(志士)와 충신들이 울분을 터뜨리고 팔뚝을 걷어붙이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한번 이런 말씀을 군주에게 올려서 혹시라도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송시열이 죄를 입은 것이 비록 관련된 사안이 중대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번에 국가의 존망이 판가름 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신이 위에서 아뢴 것 중에 혹 조금이라도 유사한 점이 있다면 억조(億兆)의 신민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고 한심하게 여길 것이며 국가의 일이 끝내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으며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군주가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는 시간이 적으면 곁에서 모시는 사사로이 친한 자들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많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끝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일 선비들을 가까이하시어 경서의 가르침을 강론하시고, 날마다 조정의 신하들을 접견하여 정치하는 도리에 대해 자문을 구하신다면, 고금의 치란(治亂)이 반복되는 데에 반드시 마음에 느끼시는 바가 있을 것이며, 정사와 명령의 잘잘못을 살펴보시면서 반드시 마음에 크게 부합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많은 부정한 문이 자연 닫히지 않을 수가 없고 여러 바른길이 자연 열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어둡고 음흉한 자들이 나오는 것을 물리칠 수가 있고 궁내와 궁외의 말이 함부로 나가고 들어오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길거리에서 말하고 골목에서 비판하며 속으로 애통해하고 길이 근심하는 자들이 모두 전하께서 한번 마음을 돌리시는 사이에 구름이 사라지고 얼음이 녹듯 의혹이 풀릴 것이니, 이 어찌 종묘사직과 신민(臣民)의 무궁한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옛날 주자(朱子)는 영종(寧宗)이 즉위한 초기에 대면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채 열흘이 못 되었는데, 재상들을 승진시키고 물리치시며 대간(臺諫)들을 옮기고 바꾸시는 것이 모두 폐하의 독단에서 나오고 대신들과 상의하거나 급사(給舍)들과 미처 의논하지 않으시니, 만일 실제로 폐하의 독단에서 나와 그 일이 모두 도리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정치하는 체통이 아니므로 장래에 무궁한 병폐를 열어 놓을 터인데, 하물며 중외(中外)에 전하는 소문에 의혹이 없지 않아 모두들 좌우의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말을 하니, 이 병폐를 고치지 못하면 명색은 독단이라고 하나 군주의 위엄이 아래로 옮겨 감을 면치 못해서 훌륭한 정치를 하시려고 해도 도리어 혼란을 초래함을 면치 못할까 신은 염려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주자의 이 말씀을 반복하여 그 뜻을 깊이 음미해 보니, 비록 신이 충성을 다하고 깊이 생각하여 다시 논열(論列)하는 바가 있더라도 결코 이 말씀처럼 통렬하고 간곡하여 오늘날의 병폐에 딱 들어맞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번거롭게 해 드리는 무례를 무릅쓰고 또 인용해 올리는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상소한 지 4일 만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피부에 와 닿는 듯한 통절한 하소연과 물처럼 점점 스며드는 비방에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등의 말로 제멋대로 헤아리고 동요시켰다.”
하여 심하게 책망하였다. 하루가 지나 공이 첫 번째 정사(呈辭)를 올리자, 여러 관직을 모두 해임하였다. 이때 김공 석주(金公錫胄)가 공의 상소문을 보고는 감탄하기를,
“약석(藥石)과 같은 훈계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을 공격한 상소가 또한 이 뒤에 나왔다.
○ 2월에 대사간 정석(鄭晳) 등이 공을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충년(冲年)에 즉위하신 이러한 때에는 인심이 미혹되기가 쉽습니다.”
하고, 정언 이수경(李壽慶)이 아뢰기를,
“경(卿)과 재신(宰臣)의 반열에 떠도는 소문이 과연 이와 같다면 은밀히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아뢰어서 외부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게 해야 하는데, 어찌 반드시 문자로 써 보내어 원근에 돌려 보여서 사람들의 의심을 야기한단 말입니까.”
하여, 나문할 것을 일곱 번 아뢰고 정지하였다. 그리고 승지 남천한(南天漢)이 상소를 올렸는데, 《춘추(春秋)》의 무장(無將)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공을 도성 밖으로 축출하고 도성에 그대로 머물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신(搢紳)들을 위협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는 병폐를 근절할 것을 청하였다.
○ 공은 약천정사(藥泉精舍)에 머물다가 3월에 대부인을 모시고 결성(結城)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독서하였다. 5월에 부수찬(副修撰) 박태상(朴泰尙)이 상소하여 “공이 일에 앞서 경계의 말씀을 올린 것은 숨김없이 진언하는 데에 뜻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가 상의 뜻을 거슬렀다. 이달에 상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근일에 이상진(李尙眞), 민유중(閔維重), 민정중(閔鼎重), 남구만(南九萬) 등 이 몇 사람은 시골에 내려가 올라올 뜻이 없으니, 진실로 지극히 한심스럽다. 우선 모두 먼저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공이 강교(江郊)에 나아가 대죄하였는데, 7월에 공의 고신첩(告身帖)을 빼앗았다.

48세 병진년(1676, 숙종2)
6월에 서용되었다.

49세 정사년(1677, 숙종3)
9월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50세 무오년(1678, 숙종4)
10월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이달에 형조 판서에 특별히 발탁되었는데, 사간원에서 개정(改正)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상이 공의 해임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성부 좌윤을 제수하였다.

○ 이보다 앞서 갑인년(1674, 현종15) 겨울에 공은 공조와 형조의 판서에 의망되었는데, 이해 10월에 특별히 형조 판서에 발탁되었다. 다음 날 사간원에서 개정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즉위하신 초기에 간사한 상소를 올려 성상을 무함하는 등 그 내용이 음험하였는데, 이 사람에게 어떤 취할 만한 점이 있기에 이처럼 높이 발탁하십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남구만은 바로 선왕조에서 발탁하여 등용한 신하이다. 이번에 제수한 것은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해서이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으나 사간원에서 날마다 연이어 아뢰었다.
○ 11월에 열 번째 아뢰어도 상이 받아들이지 않자, 영상 허적(許積)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남구만을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대신(臺臣)의 의논이 거듭 되고 계복(啓覆)이 또 가까이 다가왔으니, 그를 체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간신(諫臣)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좌상 권대운(權大運)은 규례대로 등용했다가 괜찮은 점을 발견하면 승진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계복을 이유로 우선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다시 대사간 목창명(睦昌明)이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하도록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8일 동안 여섯 번 아뢰었고, 정언 이한명(李漢命)이 입대하여 일곱 번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남모의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그 내용이 음험한 것 같지 않다.”
하였다. 허적이 가자하지 말고 해당 품계를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 경우는 한 자급을 가자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남모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분명하니 일찍이 경연에 출입할 때에 내 그러한 것을 알았다. 이미 직임을 체차하였는데 또다시 자급까지 환수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조에서 의망(擬望)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내가 등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공을 체차할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계(臺啓)는 그대로 윤허하나 이조에서 이것을 알아 의망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5일 뒤에 마침내 말의(末擬)로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다. 12월에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소를 올리니, 부른 이유가 특별한 뜻이 있어서라고 상이 답하였다.

51세 기미년(1679, 숙종5)
2월에 공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이달에 공은 말미를 받아 병든 어버이를 문안하였다. 상소문을 올려 허견(許堅)과 윤휴(尹鑴)를 조사하여 국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3월에 허적(許積) 등이 입대하여 무함하는 말을 지어냄으로 말미암아 공은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갔으며, 4월에 남해(南海)로 옮겼다.
10월에 겨울에 우레가 치는 변고로 인하여 특별히 방면되었다. 사간원에서 공을 방면하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했다가, 12월에 정계(停啓)하였다.

○ 2월에 공이 말미를 받고 시골로 돌아가려 할 적에 상소하기를,
“신이 맡고 있는 한성부 좌윤의 직임은 지금 비록 관리들이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서 국가의 큰 계책에 별다른 도움이 없으나, 만약 관직을 설치하고 직임을 분담한 뜻을 논한다면 바로 전한(前漢) 때 좌내사(左內史), 우내사(右內史), 경조윤(京兆尹)의 직책입니다.
이는 비록 오늘날 모두 그대로 본받기는 어려우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살펴보면 ‘한성부(漢城府)는 경도(京都)의 사산(四山)과 싸움과 살인 등의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러한 일에 있어서 금법(禁法)을 범하거나 월법(越法)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법령대로 다스려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승복시키고 도성을 맑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기준 없이 손을 올리고 내림에 따라 죄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하여 권력이 있는 자들은 법망을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들만 수족을 둘 곳이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서울에 들어올 때에 길거리와 골목에서 수군거리며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고(故)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첩의 아우가 바로 전(前)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허견(許堅)의 아내인데, 부원군의 첩이 허견과 서로 따질 일이 있어 허견의 집에 갔다가 허견에게 구타를 당하여 이가 부러지고 몸에 상처를 입자 울부짖으며 귀가하였다.’라고 합니다. 첩이 길에서 악다구니 치는 소리가 저잣거리를 크게 울렸으니 누군들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한성부는 여염집의 천한 부인과 저잣거리의 품 파는 노비들이 사사로이 서로 치고받거나 소소하게 다투는 일에 대해서도 모두 송사(訟事)를 심리하여 처결해서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능멸하는 억울함이 없게 하는데,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은 법으로 추고하여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원군의 첩은 비록 천인이라고 하나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자전(慈殿)의 서모(庶母)입니다. 그녀가 무슨 일 때문에 허견의 집에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허견이 감히 그를 구타하고 욕보임이 이와 같았는데도 조정의 신하들 중에 전하에게 이것을 아뢴 자가 없으며, 그 당시에 한성부는 법을 관장하는 곳으로서 또한 감히 누가 그랬는지 따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천하와 고금에 위태롭고 어지러웠던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점을 신은 삼가 애통하게 여깁니다.
신이 또 들으니, 대사헌(大司憲) 윤휴(尹鑴)가 한강 가에 있을 때에 공공연히 황해도와 평안도의 금송(禁松) 수천 주(株)를 베어다가 새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무릇 생소나무를 10주만 베어도 죄가 전가(全家)에 이르니, 국가의 금령이 지극히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상과 권문세가들이 온 산의 나무를 베어다가 자기 집을 짓는데도 이것은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고, 나무꾼과 목동들은 말라 죽은 소나무와 떨어진 잎만 채취해도 법을 따져 엄하게 다스려서 이로써 금령을 펴는 계책으로 삼는다면 어찌 크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또 들으니, 근자에 세력가들이 남의 처첩을 빼앗아 간통하고 속이는 등의 온갖 추악한 행태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도성 사람들이 원망하는 독기와 분노하며 비웃는 소리가 들끓어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그 사람의 성명을 알 수는 없으나 이 또한 고금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서울은 사방의 으뜸이 되는 곳인데, 풍속을 어지럽히고 기강을 파괴하는 것이 극에 달하여 국가의 멸망이 목전에 닥치게 되었으니, 신은 몸이 떨리고 가슴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서울에 머문 지 겨우 며칠이 안 되어서 보고 들은 것이 넓지 못하므로 다시 어떠한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으며, 또 신이 맡고 있는 직임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또한 감히 함부로 말하여 직책을 벗어나는 죄를 얻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 아뢴 이 몇 가지 일은 전하께서 만약 본부(本府)에 분명히 명하시어 끝까지 조사하여 국법을 시행하게 하신다면, 모든 방부(坊部)의 백성들이 조정의 기강이 지엄함과 국가의 금령을 함부로 범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두 알아서 비록 채찍과 매로 때리지 않더라도 저절로 기강이 확립되어 부월(斧鉞)과 같은 위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천 명에게 형벌을 가하여 죽은 시신이 저잣거리에 쌓인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더욱 복종하지 아니하여 금령을 범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엄히 명을 내리시어 신하와 백성들을 경계하게 하시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는 기회로 삼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은혜를 받고 조정에 들어왔다가 곧바로 시골로 돌아가니 이미 힘을 다해 봉직하는 의리를 잃었는데 거기에다 또 규간(規諫)하는 말 한마디 올리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께서는 신을 알아주셨으나 신은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일은 내 심히 놀라우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각기 엄중히 조사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상소의 끝에 언급한 일은 더욱 지극히 한심스러우니, 또한 담당 관사로 하여금 속히 분명하게 조사하여 품처(稟處)하게 해서 풍교(風敎)를 바로잡도록 하겠다.”
하였다. 다음 날 상이 해조에 거듭 명령하기를,
“남구만(南九萬)이 상소의 끝에 언급한 한 가지 조목은 풍교에 관계되는 것이니, 속히 개좌(開座)하여 조사해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영상 허적(許積)이 정사(呈辭)를 올리니, 직강(直講) 김태정(金台鼎)이 허견(許堅)을 위하여 상소문을 올렸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문(拿問)하여 조사한 뒤에 저절로 분명해질 것이다.”
하였다. 좌상 권대운(權大運)과 호조 판서 이원정(李元禎)이 윤휴(尹鑴)를 위해 입대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공의 말이 진실하지 않다 하여 조사하지 말도록 해부(該府)에 분부하였으나 판윤 김우형(金宇亨)과 우윤 신정(申晸)은 이미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냈다 하여 항소(抗疏)를 올려 아뢰었는바, 증거를 밝힌 것이 매우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형조에 명하여 산(山)의 주인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대사간 유하익(兪夏益)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이미 조사를 중지하도록 명이 내려간 뒤에 과장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김우형과 신정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형조의 사계(査啓)를 살펴본 뒤에 처리하겠다.”
하였다. 형조에서 산의 주인인 김세보(金世寶)가 함부로 벌목(伐木)한 것이라 하며 이리저리 둘러대어 윤휴를 빠져 나가게 하였고, 또 남의 아내를 빼앗은 사건을 조사하였으나 명백한 단서를 얻지 못했다 하여 상의 재가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허견이 역관(譯官)인 서효남(徐孝男)의 자부(子婦)를 빼앗았으니, 그녀는 바로 무인(武人)인 이동귀(李東龜)의 딸이다. 허견은 자기 처가 질투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처형까지 함께 구타했던 것이다. 상은 이동귀의 종인 득민(得民)이 공초(供招)한 내용이 매우 의심스럽다 하여 형조에 명해서 엄하게 형벌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胄)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이 일이 아직도 의심스러운 사안으로 계류되어 있는 것은 조사를 결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포도청으로 하여금 허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마침내 포도청으로 이 사건을 이송하여 여러 노비들을 조사해서 죄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모두 허견을 지목하였다. 그러자 권대운이 우상 민희(閔熙)와 함께 차자를 올리기를,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고 이를 만하니 허견을 차례로 조사하여 신문해야 합니다만, 듣자 하니 포도청에서 심문하고 조사한다고 하는데, 한갓 잔혹하게 고문하는 데에만 힘쓸 뿐입니다. 담당 관사에 다시 맡겨 법을 살펴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며, 연신(筵臣)이 또 병조 판서 김석주를 심하게 비방하였다.
○ 3월 19일에 영상 허적이 좌상 권대운과 우상 민희 및 대사헌 오정위(吳挺緯), 대사간 권대재(權大載)와 함께 입대하여 남을 모함했다는 죄로 공을 얽어 넣어 거제도(巨濟島)로 멀리 귀양 보내고, 없는 죄를 꾸며 내어 죄안(罪案)을 만들었다 하여 포도대장 구일(具鎰)을 귀양 보냈다. 25일에 공이 대부인(大夫人)께 하직 인사를 하고 4월 4일 밤 바다를 건너 준령을 넘어갈 적에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소낙비가 물동이로 쏟아 붓듯이 내렸다. 2경(更)에 거제도에 이르렀는데 9일에 들으니 유배지가 바뀌었다고 하였다. 이는 회천(懷川 송시열)이 막 장기(長鬐)로부터 거제도로 옮겨 왔으므로 한 곳에 거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은 다시 바다를 건너 남해에 이르렀다. 6월에 판중추부사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허적(許積)을 공격하기를,
“허적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고 그 서자 허견(許堅)은 형편없는 짓을 많이 자행하였으니, 이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도 나라의 법을 관장하는 자가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남구만의 상소로 인하여 이 일이 처음 발각되었는데, 오로지 엄폐하고 숨기기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남구만은 귀양 갔는데 허견은 무사하니, 인심이 더욱 불쾌해하여 눈을 흘기며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 7월에 상은 가뭄이 들었다는 이유로 소결(疏決)하여 공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민희(閔熙) 등이 굳이 간쟁하여 중지되었다. 공은 절도(絶島)에 있을 적에 날마다 독서하여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
○ 9월에 공은 금산(錦山)을 유람하고 10월에 망운산(望雲山)을 유람하였으며, 그 틈에 〈영유시(咏柚詩)〉 20수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이 지역은 바다로 둘러싸여 염분이 많은 땅이라서 풀은 난초(蘭草)와 혜초(蕙草) 같은 향초가 없고 나무는 천초(川椒)와 계수나무 같은 향기로운 것이 없으니, 향기로운 것을 마시고 먹으며 향기로운 물건을 차고 입고자 한다면 이 유자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아, 유자는 비록 하나의 하찮은 물건이나 비흥(比興)의 체(體)와 멀고 가까운 도리를 또한 여기에 부칠 수 있으니, 마음이 계속 이끌리는 까닭과 말이 중복되는데도 삭제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 10월 초하루에 천둥이 치고 다음 날에도 이와 같았다. 3일에 상이 비망기를 내려 특별히 공을 석방하였는데, 사간원에서 환수할 것을 청하다가 12월 20일에야 비로소 정계(停啓)하였다.

52세 경신년(1680, 숙종6)
1월에 진주(晉州)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2월에 결성(結城)으로 돌아왔다.
4월에 서용되어 행 도승지(行都承旨)에 제수되고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사도시 제조(司䆃寺提調)에 차임되고 비변사 유사 당상에 차임되었으며, 공조참판 겸 수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고 동지의금부사와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으며,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에 차임되었다.
5월에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어 올리고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동지경연사를 겸하고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에 차임되었다. 대부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사(呈辭)를 올리고 달려갔다. 상이 특별히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23일에 대부인이 결성에서 별세하였다. 다음 날 부고가 아산(牙山)에 이르자 공이 달려가 대렴(大斂)할 때에 도착하였는데, 상이 장례 물품과 상여꾼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대부인을 금성(金城) 부군(府君)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10월 26일에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였다.

○ 지난해 겨울에 공이 숙부에게 올린 편지에,
“이 섬은 추위가 북도에서 순행할 때보다 더 심한 듯하며, 눈꽃의 크기가 거의 방석만 하니, 참으로 괴이하고 괴이합니다.”
하였으니, 이는 두시(杜詩)의 “살기가 남으로 와 지축을 흔들었나. 그렇지 않으면 모진 추위가 어찌 이리 혹독한가.〔殺氣南行動坤軸 不爾苦寒何太酷〕”라는 말에 깊은 동감을 나타낸 것이다. 1월에 아들의 질병 때문에 진주(晉州)에 잠시 머물다가 2월 초하루에 결성으로 돌아왔다.
○ 4월에 허견(許堅)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등이 반역을 도모한 일로 죽음을 당하니, 첫 번째로 공을 불렀다.
○ 공은 갑진년(1664, 현종5) 봄에 전한(典翰)에 두 번째로 의망되었고 갑인년(1674) 겨울에 대제학에 의망되었는데, 이때 수망(首望)으로 대제학에 천거되었다.
○ 5월 22일 밤에 공은 대부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에 정사를 올리고 결성으로 달려갔다. 상이 특별히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3일 뒤에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공조 참판 남구만은 문학과 재주와 기국(器局)이 실로 중임을 맡을 만하며 겸직하고 있는 여러 사무도 긴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지금 노모가 질병이 있어서 황급히 시골로 내려갔으니, 국사에 전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식 된 정리(情理)로 보아 어떠하겠는가.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은혜를 베푸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노모의 병환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노모와 함께 바로 올라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禮)를 펴도록 하라.”
하였다. 4일 뒤에 연신(筵臣)이, 공이 결성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초상에 달려갔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놀랍고 슬프다. 해조에 분부해서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하고 상여꾼을 지급하도록 본도의 감사에게 각별히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53세 신유년(1681, 숙종7)
9월에 집상(執喪)하던 중에 병이 났다.

○ 숙부 의졸공(宜拙公)이 ‘50세가 되면 부모의 상에 극도로 슬퍼하여 몸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예’를 가지고 공에게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돈독히 권하자, 공은 울면서 말하기를,
“다만 스스로 제 힘을 헤아려 하겠습니다.”
하고, 소상(小祥)을 지날 때까지 첫날과 똑같이 하였다. 9월에 공은 팔의 통증이 매우 심해져서 마침내 종신의 고질병이 되었다. 공은 비로소 육즙(肉汁)을 올리게 하고 이르기를,
“이제 지탱하기 어려움을 스스로 헤아렸으니, 어찌 스스로 양심을 속이고 거듭 권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54세 임술년(1682, 숙종8)
7월에 삼년상을 마쳐 복을 벗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행 대사간 겸 동지경연사로 옮겼다.
8월에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에 차임되었는데, 태풍과 혜성(彗星), 함흥(咸興)의 수재(水災)로 인하여 상소를 올려 함경도의 사정을 논하였다. 공은 이달에 발탁되어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9월에 충의위사정청 당상(忠義衛査正廳堂上)에 차임되었다.
10월에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증광 문과(增廣文科)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에 차임되었고 북교(北郊)의 기설제 헌관(祈雪祭獻官)에 차임되었다.

○ 공이 혜성 측후관(彗星測候官)이 되었을 때에 상소하기를,
“후세에 인물을 등용하는 데에 관련한 병폐는 문벌을 소중히 여기고 화려한 문장을 우선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오직 경성(京城)과 삼남(三南) 지방의 사람들뿐이요, 양서(兩西)와 동북(東北) 지방은 한 사람도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인재가 제대로 등용되지 못함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장연 부사(長淵府使) 염우혁(廉友赫)은 평소 경학(經學)에 통달하였고 또 지식과 사려가 깊으며,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지온(李之馧)은 관직을 맡아 직무를 잘 수행하고 청렴과 근신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함경도 안변(安邊) 사람입니다. 이들은 먼 시골에서 발신하여 스스로 명성을 드러냈으니, 지금 만약 이들을 특별히 승진시키신다면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요, 또 서북 지방 사람들에게도 분발하여 힘쓰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신해년(1671, 현종12) 봄에 조정에서 여러 도의 방백(方伯)에게 명하여 인재를 널리 찾아 천거하게 하자, 공은 함경도 관찰사로서 장계를 올리기를,
“종전에 조정에서 본도의 인재를 물색한 것이 또한 여러 번이었으나 일찍이 한 사람도 이로 인해 녹용(錄用)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비록 인재를 물색하라는 성상의 하교가 계셨으나 관리와 사민(士民)들이 모두 권면을 받고 분발하려는 뜻이 없으니, 한두 명을 등용해서 먼 지방 사람들에게 실제에 힘쓰는 것을 보이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이렇게 염치를 무릅쓰고 번거롭게 올립니다.”
하고는 마침내 참봉 주남로(朱南老)와 진사 정역(鄭湙) 등 17명을 아뢰었다. 이해 7월에 이르러 태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혜성이 나타났으며, 함흥에 큰 홍수가 졌다. 8월에 상이 직언을 널리 구하고 묘당에 명하여 북로를 구제할 방책을 묻자,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함경도는 바로 성조(聖祖)께서 왕업(王業)을 일으킨 지역이니, 주(周)나라의 빈기(豳岐)와 한(漢)나라의 풍패(豐沛)라 할 것입니다. 우리 국가에서는 이 지역에 대해 선조를 추념하고 근본을 생각하는 도리에 있어 특별히 우대하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이 지역의 인민들은 성품이 우직하고 후중하며 강하고 용감하여 다른 도의 사람들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근년에는 또 여러 대 조정의 교화를 입어 유학(儒學)을 익히고 예복(禮服)을 착용하는 자가 또한 상당수 있으니, 남쪽 지방의 외진 고을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이 지역은 먼 곳에 위치하여 인재가 세상에 등용될 가망이 없어서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알려지는 경우가 없으니, 진실로 애석합니다.
또 조정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 문벌을 먼저 따지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북관(北關)의 사람들은 가문이 침체하여 명성을 떨치지 못한 지가 이미 한두 대가 아니니, 선조 중에 드러나고 현달하여 칭찬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혹 이름이 사적(仕籍)에 올라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있더라도 문신으로는 삼조(三曹)의 낭관(郞官)에 불과하고 무신으로는 장관(將官)과 수문장(守門將)에 불과할 뿐입니다.
옛 성왕(聖王)들은 어진 이를 등용할 때에 출신을 따지지 않으시어 먼 곳과 가까운 곳에 차이를 둔 적이 없으며, 또 혹은 북쪽 오랑캐와 남쪽 월(越)나라를 한집안으로 여긴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관령(關嶺) 일대의 한계 때문에 내외의 구분을 명확히 그어서 일월(日月)을 배태(胚胎)한 곳을 마치 먼 변방 지역처럼 보고 있으니, 이는 인물을 등용하는 방법에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성조(聖朝)께서 어렵게 왕업(王業)을 창건하신 뜻을 추념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은 외람되이 본도의 관찰사가 되어 본도의 인재가 쓸 만하고 사람들이 실망하는 현실에 대해 자세히 알고는 항상 서글퍼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이때 마침 연달아 인재를 찾아내어 보고하라는 특별한 전교(傳敎)가 있었으므로, 곧 도내의 공론을 모아 문신과 무신 4, 5명으로 천거에 응하여 계문(啓聞)한 것이 두서너 차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번 아뢴 뒤로는 일이 묘연하여 마치 깊은 우물에 돌을 던진 것처럼 끝내 한 사람도 등용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는 도리어 애당초 이런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삼가 들으니, 지난번 북도(北道)의 어사가 함경도에 서적을 하사할 것을 청하자, 그 당시 국정을 담당한 신하가 마침내 말하기를, ‘본도는 바로 변방으로서 무력을 사용하는 곳이니, 문교(文敎)를 베풀어서 무비(武備)가 점점 해이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이어 서적을 하사하지 말 것을 청했다 합니다.
아,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어찌 이처럼 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양(豫讓)은 절개를 지킨 선비일 뿐인데도 반드시 그를 국사(國士)로 대우한 뒤에야 마침내 국사로서 보답함이 있었습니다. 지금 북도 사람들에 대해서 무사(武士)의 경우에는 비록 문벌과 재주와 무예가 칭찬할 만하더라도 반드시 선전관(宣傳官)에 천거되는 것을 막고, 유생(儒生)의 경우에는 문교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서적을 하사하지 않으니, 이 지역 사람들을 천시하고 그 풍속을 어리석게 만듦이 자못 국경이 다른 이민족의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심합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들을 위협하고 채찍질하여 마음대로 부려서 이들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애하고 상관(上官)을 위해 몸을 바치며 무비를 튼튼히 하고 변방을 호위하게 하고자 한다면 또한 실정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말을 오활(迂闊)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묘당(廟堂)에 하문하시어 사세를 자세히 헤아리소서. 그리하여 본도의 도백(道伯)과 병사(兵使)가 전후로 천거한 글을 가져다가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먼저 인물을 선발하여 등용하되 문관과 무관의 높은 관직에 그 인품이 합당한지의 여부만 논하고, 북도에서 생장했다 하여 등용을 막는 폐단을 없애어 사람들을 감동시켜 분발하고 진작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또 육진(六鎭)과 삼수(三水), 갑산(甲山)의 사람 가운데에 서울에 올라온 자들을 유생은 사학(四學)에 적을 두고 무사는 병조에 이름을 올려서, 각각 인원수를 정하여 재주를 시험하고 급료를 주어서 먼 지방 사람들을 회유하여 오게 하는 방법으로 삼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또 생각건대 본도는 이미 아득히 먼 곳에 위치해 있고 땅이 또 척박하여 백성들이 생활하는 형편이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의복은 오직 삼베와 개가죽뿐이요 음식은 오직 귀리와 잡곡뿐이니, 만약 남쪽 지방 백성들을 이곳에 살게 한다면 진실로 하루도 견뎌 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국가에 비록 국경을 넘는 것을 금하고 쇄환(刷還)하는 법이 있으나 끝내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정(男丁)들의 군역의 경우는 침탈이 다른 곳보다 더욱 심합니다. 이 때문에 유리하여 도망하는 자가 잇따라 장부에 허위로 이름만 올라 있는 자가 많으니, 어찌 이들에게 군장(軍裝)을 정돈하고 무예를 익히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남영(南營)과 북영(北營)에 소속된 본도의 군병에게 모든 군영의 수요(需要)로 혹은 쌀이나 삼베, 혹은 나무와 숯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용도에 따라 나누어 모두 징수하다 보니, 군사들이 하소연하는 원통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종전에 본도의 백성 중에 스스로 거세(去勢)를 하고 자식을 버리고 기르지 않은 자가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이 본도에 있을 때에 변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개선 방법을 찾지 못하여 4년간 차일피일 날짜만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비로소 고칠 방도가 있음을 알아내었으나, 체직되어 돌아갈 시기가 임박하여 미처 주선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돌아가 조정에 여쭙고자 하였으나 조정에 들어간 지 오래지 않아 죄를 얻고 물러나게 되었으므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 어리석은 자가 궁리 끝에 우연히 얻은 한 가지 계책을 올리겠습니다.
북관의 각 고을에서 거두는 조세는 본래 서울로 실어다가 바치지 않고 매년 환자곡(還上穀)으로 가록(加錄)하는데, 그 본의를 살펴보면 수송을 어렵게 여기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실로 변방의 군량을 충분히 하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고을을 설치한 이래로 매년 그 수량이 늘어나서 그 많은 양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고을 백성의 힘으로는 환자곡을 꾸어 주거나 거두어들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수량이 적체되어 점점 많아진 뒤에는 반드시 포흠(逋欠)이 많아지고 포흠이 많아진 뒤에는 반드시 탕감해 주는 지경에 이르니,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탕감한 수량이 끝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곡식을 남겨 둔다고 하나 실제는 곡식을 버리는 것이며, 비록 군량을 충분하게 한다고 하나 실제는 군량을 잃는 것이니, 국가의 일 중에 실제가 없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남영과 북영 두 병영의 씀씀이를 참작하여 각 고을의 조세를 덜어 주고 충분한 수량을 떼어 주어 부족할 염려가 없게 하며, 종전에 군사들에게 거두어들이던 모든 명목(名目)을 일체 혁파하게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군졸들에게는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이 없고 병영에는 쓰임이 부족할 염려가 없으며, 각 고을에는 세금을 더 징수하는 폐단이 없으면서도 변방의 군량은 지금 회부(會付)한 원래의 곡식 이외에 또 두 병영에 떼어 준 여분이 있게 될 것이며, 사노비(私奴婢)의 신공(身貢)을 남겨 둔 것도 그 수량이 또한 적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무용한 것을 바꾸어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편리하게 하는 방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한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묘당에 하문하시어 만일 신의 계책이 옳다고 한다면 본도의 도백으로 하여금 두 병영과 서로 의논해서 이대로 거행하도록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만일 전례(前例)를 그대로 따라 군사와 백성들을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장률(贓律)로 논죄하여 결단코 용서하지 말아서 변방의 군사들이 소생하여 국방의 일에 전념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여 조목조목 진달한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고 이 일을 비변사에 내려 복주(覆奏)하게 하였다. 상이 서북 지방 사람들을 다시 수교(受敎)에 따라 청환(淸宦)의 길에 통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무신 중에 재주와 무예가 있는 자를 특별히 선전관에 천거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육진(六鎭)과 삼수(三水), 갑산(甲山)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온 자를 유생일 경우에는 사학(四學)에 적을 올리되 4명으로 정하고 무사일 경우에는 병조에 이름을 올려 재주를 시험해서 급료를 주게 하였다.
○ 이보다 앞서 갑인년(1674, 현종15) 가을에 공을 수어사(守禦使)에 첫 번째로 의망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발탁하여 병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상은 공의 사직소에 답하기를,
“경은 재주와 명망이 일찍 드러났으니 이번 등용은 또한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내 뜻이 먼저 결정되었고 공론이 모두 같다.”
하였다.
○ 처음 인조 을축년(1625, 인조3)에 평강(平康) 부군(府君)이 서울의 정릉(貞陵) 소동(小洞)에 집을 샀는데, 숙종 경신년(1680, 숙종6)에 조정에서 이것을 사서 인빈(仁嬪)의 사당을 만들었다. 이해 9월에 이르러 공은 목멱산(木覓山) 아래 명례동(明禮洞)에 집을 샀다. 고사(故事)에 한성부(漢城府)에서는 산 아래에 사는 사대부의 가노(家奴)들에게 분담시켜서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어 가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대부분 법을 받들어 시행하지 않았고 감역(監役)이 적간(摘奸)할 때에도 대부분 종을 보내지 않았는데, 공은 엄중히 경계하여 태만히 하지 말도록 하였다. 하인이 일찍이 비변사의 접시꽃을 뜰에 옮겨 심자, 공은 하인을 꾸짖고 접시꽃을 돌려보냈다.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30년 동안 말을 기르지 않았는데, 혹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공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나는 말을 좋아하는 성벽(性癖)이 없어서 당상관이 된 뒤에도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쓰던 헌 안장을 바꾸지 않았는데 병조의 장관이 되어 교외에 나가 강무(講武)하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오래된 은청안(銀靑鞍)을 샀다.”
하였다. 다음 해 겨울에 혜산 첨사(惠山僉使)가 인삼과 표범 가죽을 보냈으나 공은 이를 물리쳤으며, 그 후 좌상으로 있을 때에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인삼을 선물했고 서추(西樞)로 있을 때에 충청 수사(忠淸水使)가 솥 두 개를 보냈으나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 이보다 앞서 병조에서 군포(軍布)를 징수할 때에 절반은 돈으로 섞어 징수하여 돈을 유통시키고자 하였는데, 이해 1월에 공은 돈을 유통시킨 뒤에 시장의 물건 값이 똑같지 않다 하여 귀천에 따라 경중을 구별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9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공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바로 삼베입니다. 색리(色吏)가 삼베를 가지고 서울에 와서 돈으로 바꾸어 납입하거나 혹은 서울에 있는 사람이 돈을 대납하고 본 고을에서 삼베를 징수하니, 이는 중간에서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이 될 뿐이고 돈을 유통시키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 돈의 가치가 일정치 않으니 한결같이 시장의 물건 값을 따라 점차 더 징수하면 또한 반드시 지방에서 원망을 받을 것입니다.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국가의 손실이 적지 않으니, 이후로는 일체 삼베를 가지고 와서 바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자, 상이 재가하였다.
○ 처음에 국조의 옛 제도에 병조에서 지방의 기병(騎兵)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상번(上番)하게 하였고 얼마 있다가 그중에 늙고 잔약한 자를 가려서 내려 보내게 하여, 1호(戶)마다 3명의 보인(保人)을 두었다. 호수(戶首)가 3명의 보인에게 베를 각각 2필씩 거두어 서울에 와서 병조에 바치면 병조에서 도성의 백성을 고립(雇立)하였다. 호수가 또 3명의 보인에게 인정포(人情布)를 거두어서 자신이 착복하기도 하고 병조의 아전에게 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지방의 백성들이 왕래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병조의 아전들이 이를 기화로 부정을 저질러서 문서를 고치고 바꾸어 돈과 삼베를 감추곤 하였다. 그리하여 혹은 서울에 와서 바치기 전에 아전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경우도 있고, 혹은 사주인(私主人)이 받아서 취하고 바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아전이 또 상번하는 군사들을 사사로이 풀어 주고 군포 6필을 거둔 다음 그중 2필로 사사로이 사람을 사서 세워도 관청에서 조사하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되어서 국가의 부고(府庫)가 텅 비었다. 이해 10월에 공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상번하는 군사의 군장(軍裝)을 보니 제대로 된 품새를 갖추지 못하여 지극히 한심하였습니다. 이는 갑자기 정돈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상번하러 올라온 뒤에 모두 원군(元軍)으로 파정(派定)하지 못하고 사람을 고립(雇立)한 곳이 많아 부득이 다시 내려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원군 중에 응당 포함될 숫자를 헤아려서 상번하게 하고 그 밖에는 모두 가포(價布)를 상납하게 하여 하리(下吏)들이 중간에서 농간하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자문을 구해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은 또 아뢰기를,
“군인 중에 부자간에 함께 상번한 자가 있으니, 그 고을의 수령은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마침내 해당 수령을 추고하였다. 11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거듭 청하기를,
“상번하는 군사 중에 늙어 군역이 면제되는 자들에게 올라와서 점검을 받은 뒤에 받은 군포를 환송(還送)하기보다는 차라리 원군의 숫자를 먼저 정한 다음 본 고을로 하여금 건장한 장정을 뽑아서 숫자대로 올려 보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보병의 준례에 따라 군포를 거두어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나으니, 이렇게 하면 병조와 군졸이 모두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모두 편리하다고 말하여 이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공은 또다시 호수(戶首)가 삼베를 거두어 곧바로 바치는 방법을 없애고 호보(戶保) 4명이 각각 2필씩 자기 고을에서 상납하게 하니, 이에 호수와 서리(胥吏)가 모두 이익을 빼앗기게 되었다. 공이 마침내 종전에 돈과 삼베를 출납한 숫자를 회계하여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게 해서 서리들이 지위를 사칭하고 수결(手決)을 날조하여 삼베 40동(同)과 돈 500냥을 도둑질한 사실을 적발하니, 깊이 캐내면 이보다 두 배 내지 다섯 배도 넘을 것이었다. 간사한 아전 몇 명이 스스로 반드시 죽게 되리라 여겨 도주하여 숨어서 나타나지 않자, 공은 그 처자식을 가두었다. 공은 법을 적용하는 것이 엄격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아서 죄상이 드러난 자는 추징하게 하였다. 종전에는 관리들 중에 값을 받고 대신 입군(立軍)시킨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하고 군인은 도(徒) 3년의 형률을 적용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은 아전을 변방으로 옮기고 군인은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다음 해 봄에는 소결(疏決)로 인해 추징당한 자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모두 재가하자, 간사한 관리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해 안에 병조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넘쳐서 청사(廳事)에 노적을 쌓기까지 하였고 다른 아문의 빈집을 빌려 곡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 공은 일찍이 문장을 논하여 이르기를,
“문장은 기예이니 비록 정교하더라도 기예일 뿐이다. 경학(經學)에 근본하고 국가의 체통에 밝으며 사정을 다 아뢰고 가슴속에 있는 것을 개진할 때에는 문장의 법칙으로 논할 수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공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두루 통달하였는데, 오직 실제로 쓸 수 있는 것이라야 마음을 다하였다. 문장을 지을 적에는 내용이 통창하고 넉넉하며 간절하고 성실하였으며, 주소(奏疏)와 의논은 반드시 경학에 근거하여 전아(典雅)하고 후중해서 매우 볼만하였고, 서찰도 어록체(語錄體)를 사용하여 외면을 꾸미지 않았다. 11월에 공은 증광 문과(增廣文科)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에 차임되어 채정린(蔡廷麟) 등을 뽑았다. 공은 이달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는데, 이때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시관이 되어 거자(擧子)들의 글을 보니, 문체(文體)가 크게 변하였습니다. 으레 사용하는 문자를 기어이 신기하게 쓰는 데 힘써서 천연(天淵)이라고 쓸 말이면 바꾸어 성연(星淵)이라 하였으니 이는 별이 하늘에 있다고 해서이고, 말세(末世)를 바꾸어 해세(亥世)라 하였으니 해(亥)가 12지(支)의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차이후(繼此以後)라고 쓸 말이면 윤자이예(胤玆以裔)라 하고, 공유(恭惟)라고 쓸 말이면 장유(莊惟)라고 바꿨습니다. 또 어려운 글자와 궁벽한 말로 문장을 엮어서 반드시 남들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또 중국의 어록체를 섞어 쓰니, 상규(常規)를 뒤집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풍습이 진실로 매우 해괴합니다.
모든 중국의 어록체는 바로 우리나라의 이두(吏讀) 따위이니, 만약 선유(先儒)의 말씀이라면 문장을 바꾸기가 어려우므로 부득이 그대로 써야 하지만 자신이 지은 글에 어찌 이것을 뒤섞어 쓴단 말입니까. 또 기이한 말과 속담을 주워 모아 문장을 이루고 있으니, 더욱 괴이합니다.
문체의 변역(變易)은 진실로 세도(世道)의 성쇠(盛衰)와 관계되니, 이와 같은 문체를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과거를 고시(考試)할 때에 이러한 문체들을 일절 물리치소서. 문풍을 크게 변역하는 방도는 오직 조정에서 중외(中外)에 알리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예조로 하여금 과거 사목(科擧事目)에 이 조항을 첨가하여 중외에 반포해서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이달에 상이 대신(大臣)과 육경(六卿), 삼사(三司)의 장관에게 명하여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공은 전(前) 교관(敎官) 이세필(李世弼)과 현감 송병하(宋炳夏)를 천거하였고, 그 후 갑술년(1694, 숙종20)에 영상으로 있으면서 유학(幼學) 양득중(梁得中)과 전 교관 박심(朴鐔)을 천거하였다.
○ 이보다 앞서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조정에서는 만과(萬科)를 설치하고 무사를 뽑았는데, 그 후 선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잡해져서 두서가 없으니, 원성이 중외에 가득하였다. 이때에 공은 내삼청(內三廳)에서 선전관(宣傳官), 부장(部將), 수문장(守門將)으로 응당 천거하는 자들을 삼망(三望)의 숫자로 통계하여 12월에 내삼청에 모아 추천받은 자들에게 별도로 취재(取才)하여 활쏘기와 무예, 강서(講書)를 시험하고, 신(身)ㆍ언(言)ㆍ서(書)를 살펴서 가장 우수한 자를 기록하여 숫자를 채웠다. 다음 해 여름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으며, 그해 겨울에도 이와 같이 하여 차례에 따라 의망하니, 사람들이 감히 비판하지 못하였다. 선발된 사람들이 뒤에 유명한 무신이 되니, 중외에서 모두 공을 칭송하였다.

55세 계해년(1683, 숙종9)
1월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는데 본직의 임무가 많다 하여 해직을 청해 윤허를 받았으며, 이달에 강화(江華)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였다.
2월에 현종대왕(顯宗大王)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렸다.
3월에 전 대제학으로 인조(仁祖)와 효종(孝宗)의 사당에 예고부조반교문(預告不祧頒敎文)을 지어 올리고 사역원제조 겸 지춘추관사에 차임되었다.
4월에 대제학을 겸하였다.
5월에 《현종실록(顯宗實錄)》을 강화도에 봉안하였고, 태조대왕 가상시책문(太祖大王加上諡冊文)을 지어 올린 다음 말〔馬〕을 하사받았으며,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에 차임되었다.
6월에 태조와 태종의 가상시호반교문(加上諡號頒敎文)을 지어 올렸고, 병으로 사직하자 상이 내의원의 어의를 보냈다.
윤6월에 다시 병이 나자, 상이 내의원의 어의를 보냈다.
8월에 침을 맞고 뜸을 뜨기 위하여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이 침의(鍼醫)를 보냈다.
9월에 유생들에게 구일제(九日製)를 과시(課試)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날 밤에 빈청(賓廳)에서 선온(宣醞)하였다.
10월에 증광 문과(增廣文科) 회시(會試)의 시관에 차임되었다.
11월에 대전(大殿)의 두환평복반교문(痘患平復頒敎文)을 지어 올리고 문과(文科) 전시(殿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12월 5일에 명성왕대비(明聖王大妃)가 승하하였다. 이달에 숙부 의졸공(宜拙公)이 별세하였다.

○ 이에 앞서 윤휴(尹鑴)가 현종대왕(顯宗大王)의 행장을 지어 올렸는데, 6년 뒤에 윤휴를 사사(賜死)하고는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여 다시 짓게 하였다. 김석주가 지난해 가을에 이미 묘지문(墓誌文)을 지었다고 사양하자 상이 마침내 공에게 명하니, 이해 2월에 지어 올렸다.
○ 4월에 공은 대제학을 겸하였다. 이에 앞서 이공 민서(李公敏敍)가 공을 대신하여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벼루를 전한 내용의 시(詩)를 짓고 화답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족하(足下)와 함께 유학(游學)하며 성장하였는데 지금 마침내 이 벼루를 전후로 서로 주고받았으니, 한마디 말씀을 하여 문원(文苑)의 고사(故事)에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영광을 과시하고 떠벌이는 일에 관계된다 하여 글을 지으려고 하지 않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화답하였다.
○ 5월에 무겸(武兼) 권용의(權勇義)가 의성(義城) 사람으로서 객사하자, 공은 서리(書吏)를 정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관(棺)을 사서 주었다.
○ 10월에 증광 문과 회시의 시관에 차임되어 이동표(李東標)와 송정규(宋廷奎) 등을 뽑았다. 공이 기유년(1669, 현종10) 정시(庭試)에 장소를 나누어 고시할 때에 한태동(韓泰東)이 지은 부(賦)를 보고는 명관(命官)인 정공 치화(鄭公致和)에게 청하여 그 부를 여러 시관들에게 보이자, 김공 석주(金公錫胄)가 칭찬하여 마침내 장원(壯元)으로 정하였다. 정공은 돌아가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남 영감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는 태도가 이와 같으니, 그 심덕(心德)이 더욱 공경할 만하다.”
하였다. 이때에 공이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이선(李瑄)의 변려문(騈儷文)에 이르자 주필(朱筆)로 어지럽게 그어져 있어 거의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공이 대독관(對讀官) 김창협(金昌協)으로 하여금 삼중(三中)이라고 쓰게 하자, 김창협이 매우 의아해하고 거듭 난색을 표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의 문장을 보니 반드시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하는 자이다. 변려문에는 서툴지만 응당 대책문(對策文)에는 뛰어날 것이다. 반드시 종장(終場)까지 응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우선 높은 등급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창협은 부득이 삼중이라고 썼으나 그래도 공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이윽고 그 대책문을 보니 과연 좋은 작품이었다. 김창협이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문감(文鑑)이 남공과 같은 이가 시관이 되고 나서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할 만하다.”
하였다. 전시(殿試)의 장원을 정할 때에 홍공 만용(洪公萬容)은 송주석(宋疇錫)을 의중(意中)에 두었는데, 송주석은 바로 회천(懷川) 정승의 손자였다. 홍공은 이것을 기색에 나타내었으나 공은 거들떠보지 않고 순서에 따라 등급을 매겨 선발하였는데, 이때 선발된 자 중에는 문감이 있어 뒤에 시험을 주관한 자가 많았다. 박공 신규(朴公信圭)가 시원(試院)에 함께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친한 이에게 말하기를,
“남공의 밝은 식감(識鑑)과 공정함은 지금 세상에 일찍이 보지 못한 바이다.”
하였다.

56세 갑자년(1684, 숙종10)

1월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2월에 명을 받들어 태릉(泰陵)을 봉심(奉審)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공이 변방의 일로 인하여 함경도의 기병을 선발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명하여 절목(節目)을 정하게 하였다.
4월에 명성왕대비(明聖王大妃)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어 올리고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5월에 창빈(昌嬪)의 묘지명을 지어 올리고 말을 하사받았다. 말미를 받아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하였는데 하직하는 날에 상이 선온(宣醞)하였다.
7월에 차자를 올려 군정(軍政)을 일관되게 시행할 것을 논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사은사 겸 동지사(謝恩使兼冬至使)에 차임되었다.
8월에 함경도 친기위(親騎衛)의 절목을 정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공은 명을 받들어 영릉(寧陵)을 봉심하였다.
9월에 국경을 나간다 하여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다. 정시(庭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10월에 명을 받들어 현릉(顯陵)을 봉심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김환(金煥)의 죄명을 정할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다시 전지(傳旨)를 봉입(奉入)하라고 명하였다. 이달에 공이 하직하고 사행(使行)을 떠났다.
11월에 안주(安州)에 이르러 병에 걸리니,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고 마침내 어의에게 배행(陪行)하도록 명하였다. 이달 공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12월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였다.

○ 1월에 공은 우상(右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조야에서 공이 크게 등용되기를 기대하여 정승에 발탁된 것이 너무 늦었다고 여겼으나 오랫동안 병조 판서를 맡기고자 하여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었는데, 상의 총애가 더욱 중해서 공이 매번 일을 거론하여 아뢸 때마다 윤허를 받았다. 도목대정(都目大政)을 두 번 치렀는데, 공은 그때마다 병조 판서의 직임을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린 것이 수십 줄에 이르렀으며, 공이 전후로 질병이 있다고 아뢸 때마다 상은 어의를 보내고, 경연에 임하여 병의 차도를 대신들에게 특별히 물으셨으며, 공을 지칭할 때에 관직명을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때 상은 특명으로 가복(加卜)하고 사직소에 답하기를,
“경은 뛰어난 재주와 덕망이 있어서 진실로 보필하는 정승의 임무에 합당하다.”
하였다. 공이 사직소를 다섯 번째 올리면서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 “군자는 그 몸을 편안히 한 뒤에 움직이니, 위태로우면서 움직이면 백성들이 돕지 않고, 두려워하면서 말하면 백성들이 호응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인용하였으니, 이는 공이 항상 말하고 항상 지키던 바였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은 비록 군주를 대면하더라도 반드시 자세히 살핀 뒤에 말을 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군주에게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등용되었으나 다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사대부에게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위인(偉人)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여겼으며, 명신(名臣)으로서 군주에게 공경받는 이는 공만 한 이가 없다.”
하였다.
○ 지난해 겨울에 왜국(倭國)의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가 예조 참의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르기를,
“삼가 들으니 동녕(東寧)의 정금사(鄭錦舍)가 크게 기병(奇兵)을 모집하고 만리에 배를 띄워 귀국(貴國) 지방을 침범하려 하고, 올량합(兀良哈)은 곧장 북경(北京)으로 들어가 이제 공격을 결행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해 2월에 상이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여러 신하들에게 변방의 일을 하문하자, 공은 생각하기를, ‘이 편지는 거짓이어서 비록 믿을 것이 못 되나 만약 이로 인하여 대비하고자 한다면 배를 타고 와서 상륙하는 적을 마병(馬兵)으로 공격해야 할 터인데, 마병 중에 쓸 만한 자는 도감(都監)의 마병 외에 지방에는 원래 선발하여 훈련시킨 군대가 없다. 함경도는 호인(胡人)들과 접경한 지역이어서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가 많고 말이 또 험한 길을 치달릴 수 있으며, 또 사람과 말이 모두 여러 날 동안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으니, 실로 내지(內地)의 기병(騎兵)이 견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병을 선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명하여 절목을 정하게 하고 마침내 본도의 감사(監司), 병사(兵使)와 함께 왕복하면서 상의하게 하였다. 8월에 비변사(備邊司)에서 공이 아뢰어 새로 선발한 기병 부대를 친기위(親騎衛)라 호칭하고 마침내 절목을 만들어 올려서, 단속이 이미 이루어지고 무예가 이미 익숙해진 뒤에는 차례로 돌아가면서 상경하게 하고, 병조에서 사열하여 상벌을 내리되 금군(禁軍)의 예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녹을 줄 것을 청하니, 이에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2년 뒤에 공은 다시 사목(事目)에 따라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의 금삼 어사(禁蔘御史)로 하여금 친기위를 시재(試才)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어사 홍수헌(洪受瀗)과 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이들을 제재하기 어려울까 우려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 당상관이 찾아와서 묻자 공은 그만둘 수 없음을 아뢰면서,
“다만 감사와 병사를 거듭 신칙하여 교만함과 횡포를 부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여서 끝내 용맹한 기병 부대를 이루었다.
○ 공이 정승이 되자 김류(金瑬) 등의 구례(舊例)를 적용해서 대제학(大提學)을 그대로 겸직하게 하니, 공이 세 번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대제학을 해임해 줄 것을 거듭 청하자, 상이 해임을 허락하였다.
○ 공이 호남(湖南) 지방을 염찰(廉察)할 때에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흉년이 들었다 하여 오랫동안 세초(歲抄)를 정지하고 있는바, 세초는 민간에 부역을 내는 일이 아닌 경우에는 흉년이 들었다 하여 정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하거나 늙어서 군역이 면제된 자를 대정(代定)하기 전에는 으레 원래의 본인에게 징수하는데, 세초를 하지 않으면 한정(閑丁)이 있더라도 대정할 수가 없으며, 사망하거나 늙어서 군역을 면제받아야 할 자가 도리어 그 부역에 응하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누적된 결원을 한꺼번에 충정(充定)하면 분분히 소요가 생길까 우려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으며, 또한 다 충정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 수령에게 분부하여 궐액(闕額)은 흉년과 풍년을 따지지 말고 결원이 생길 때마다 충정하여 사망하거나 늙어서 군역을 면제받아야 할 자가 다시 징발당하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공은 5년 뒤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입대하여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세초할 때에 한정을 얻지 못하여 매번 나이 어린 자로 충정하며, 사망하거나 늙어서 면제받아야 할 자까지도 대정할 길이 없으니, 이는 한정 중에 원래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양민들이 투속(投屬)하는 경로가 매우 많습니다. 서울의 각 관사로 말하면 삼의사(三醫司)의 생도와 교서관(校書館)의 창준(唱準), 각 아문의 군관 등의 사역이 이것입니다. 지방으로 말하면, 신이 일찍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 들으니, 감사의 아병(牙兵)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가 성주(星州) 한 고을에만 거의 8, 9백 명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다른 고을의 사정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기타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영장(營將)과 방어사(防禦使)의 군관 등 명색을 다 열거하기가 어려운데, 이것은 모두 양민들을 내몰아 역을 피할 수 있는 소굴로 내모는 것이니, 만약 크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이 어린 자로 충정하는 것과 늙은 자와 죽은 자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일이 형편상 반드시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울과 지방의 양민이 소속된 곳 중 원래 정해진 숫자가 있는 곳은 정원 이외의 사람을 도태시키고, 원래 정해진 숫자가 없는 곳은 정원을 헤아려 정해서 모속(冒屬)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현종(顯宗)이 이를 따랐다. 숙종 경신년(1680, 숙종6) 교화를 다시 펴던 때아약(兒弱)과 도고(逃故)에게 군포를 물리는 폐단을 제거할 것을 의논하고 성책(成冊)을 거두어 팔도에 조사했는데,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고 허실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일시에 대정(代定)할 수가 없으며 또 그대로 군포를 물릴 수도 없었다. 이에 서울의 관아에 저축한 것을 모두 꺼내어 병조에 소속된 기병과 보병에게 징수하는 군포의 숫자를 충당하니, 비록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군포를 감면해 주라는 명령이 있지는 않았으나 지방의 군사와 백성들은 스스로 오랫동안 감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면해 준 지 1년 만에 국가의 경비가 거의 탕진되었다 하여 마침내 도로 징수하니,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여 모두 조정에서 백성을 속였다고 원망하였다. 공이 처음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입대하여 아뢰기를,
“아약과 도고에게 물리는 군포를 조정에서 매번 충정하여 상환하고자 하니 결코 계속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며, 이미 감면했다가 다시 징수하는 것도 신용을 크게 잃는 것이니, 각 고을에 엄하게 신칙해서 즉시 충원하여 대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흉년이 들었다 하여 세초(歲抄)를 정지하는 것은 비록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라고 말하나 군포를 징수하는 것은 줄이거나 면제해 준 적이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백성이 곤궁할 때에 더욱 대정해야 합니다.
신이 들으니 나주(羅州) 한 고을은 장인(匠人)이라고 일컫는 자가 2천 명에 이른다 하는데, 지금 병조의 군안(軍案)에 아약과 도고로서 대정해야 할 자가 팔도를 통틀어 겨우 1만 수천 명에 불과하니, 서울에 있는 아문과 지방의 영문(營門)과 주현(州縣)에 사사로이 소속되어 있는 부류를 찾아내어 모두 충정한다면 어찌 대정할 사람을 얻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찾아내어 대정하게 한 뒤에 또다시 서울에 있는 아문에서 계속하여 자기 관아에 소속된 자들을 침해하지 말 것을 청한다면 비록 지방에서 얻을 수 있는 양정(良丁)이 있더라도 이로 인해 해이해져서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는 다시 묘당(廟堂)과 사목을 강정(講定)하여 반드시 충정하고 계속 부정하게 고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 우상 김석주(金錫胄)의 말을 받아들여 경군(京軍)을 나누어서 금위영(禁衛營)의 군사 9060명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 4200명, 수어청(守御廳)의 아병(牙兵) 200여 명, 총융청(摠戎廳)의 아병 900여 명을 얻어서 결원을 대략 충정하였다. 상은 마침내 명하여 병조의 기병과 보병 중 아약과 도고에게 물리는 군포를 탕감해 주게 하였으며, 병조가 새로 정한 서울의 장적(帳籍)을 여러 도에 보내어 각 도로 하여금 새것과 옛것을 합해서 하나의 장적을 만들어 병조에 올려 보내게 하였다.
지난해 공이 낭관인 허지(許墀) 등에게 오래 일을 맡겨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인하여 인물을 천거하라는 명령에 따라 허지를 천거하였다.
이해 7월에 공은 차자를 올려 군정을 일관되게 시행할 것을 논하고, 마침내 절목을 정하여 올려 시행해서 일정한 법식이 되게 하였다. 얼마 후 남쪽 지방 백성들이 공을 위하여 아약제군영사불망비(兒弱除軍永思不忘碑)를 산음현(山陰縣)에 세웠다.
○ 이때 조정에서 해마다 사면령을 반포하니, 감옥 안에는 다만 중죄수 약간 명이 남아 있었다. 7월에 상은 가뭄이 심하다는 이유로 현재 형조에 갇혀 있는 죄수를, 이미 조사가 완결되었거나 아직 진행 중인 사건을 막론하고 일체 사면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정치하는 방도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일 뿐입니다. 가령 죄 있는 자가 요행으로 형벌을 면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또 형벌을 만든 것은 악한 자를 징계할 뿐만 아니라 악행을 없앨 것을 기약하는 것이니, 인애(仁愛)의 뜻이 실로 그 가운데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한해(旱害)를 만나 소결(疏決)하는 것은 본래의 뜻이 억울한 자가 있을 때 그 억울함을 풀어 줄 것을 의논하는 것인데, 죄수의 정상과 범죄의 허실을 따지지 않고 함께 뒤섞어서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그 속에서 아무리 합당한 도리를 찾으려 해도 진실로 부합되지 않으니, 어찌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사형수 중에 억울한 자를 다시 심리하여 품처(稟處)하고 다른 죄수들도 속히 판결할 것을 형관(刑官)에게 분부하고, 또 각 도에도 전지를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 이보다 앞서 임술년(1682, 숙종8) 겨울에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이 전(前) 병사(兵使)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허새(許璽) 등의 역모를 고변하게 하여 며칠 동안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김익훈은 무신(武臣)인 전익대(全翊戴)가 유명견(柳命堅)의 역모를 알고 있다고 은밀히 아뢰었고, 또 김중하(金重夏)를 사주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익대와 유명견을 국문하여 대질 심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었다. 그러다가 전익대가 허위임을 자백하기를, “이는 실로 김환이 고변하던 전날 밤에 어영청의 군뢰(軍牢)를 데리고 와서 달래고 위협하여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라고 하였으며, 김중하가 고발한 것도 증거가 없었다. 다만 낙서령(洛西令) 이수윤(李秀胤)도 이미 김환에게 고발당하여 다시 국문을 받다가 곤장을 맞아 죽었고 허새는 죄를 자백하여 법대로 처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김환의 품계를 올려 주고 김중하와 전익대를 유배 보냈다. 사헌부에서 전익대와 김중하, 김환을 엄하게 국문하고 김익훈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지난해 봄에 다시 전익대를 국문하여 무고(誣告)한 사실을 모두 자백받고 사형을 집행하였으며, 김환을 도배형(徒配刑)에 처하였다. 사헌부에서 김환을 국문하고 김익훈을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가 상의 엄한 전교를 받았으며, 상이 얼마 후 김익훈을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김익훈의 삭출을 청하여 조정(調停)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이해 여름에 소결로 인하여 김익훈이 방면되었다. 사헌부에서 김익훈의 방면 조치를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 파직당하였으며, 옥당에서 한재(旱災)는 김익훈을 방면하였기 때문이라고 아뢰자, 상이 특별히 옥당의 관원을 체차하였다.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병조 판서로 주강(晝講)에 입시하였을 때에 아뢰기를,
“이 일은 맡은 부서가 별도로 있으니 신이 감히 지위를 벗어나 아뢸 수가 없으나 마침 경연관으로서 감히 소견을 아룁니다. 오늘날 두 신하를 꺾으심은 조정을 진정시키는 도리가 절대로 아니니, 마땅히 그 청원을 윤허해 주셔야 할 것이며 억지로 구차히 동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김중하와 김환의 일을 신이 일찍이 속으로 헤아려 보니, 어찌 전익대는 죽었는데 김중하는 살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중하는 다만 이수윤이 임금을 원망한다는 말로 고발하였으니, 무고라고 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전익대 또한 참으로 고변한 일이 없었으나 오히려 죄에 걸려 죽었습니다. 더구나 김중하가 고발한 내용에 ‘큰일을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은 역모가 아니고 무엇이며 무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김중하의 무고는 실로 한 곳에서 분부를 받은 것이므로 지금 만약 조사하면 반드시 죄가 귀결될 곳이 있기에 상께서 이를 특히 어려워하신다고 하니, 이는 바로 여항에 떠도는 말로서 여러 사람들이 이 때문에 의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대론(臺論)이 격해져서 험악한 지경에 차차 이른다면 끝내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으니, 신의 깊은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조 참판 박세채(朴世采)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말에 ‘공론이 위에 있으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아래에 있으면 어지럽다.’ 하였으니, 지금 여항의 인심이 진실로 남구만이 대답한 바와 같습니다. 지금 상께서 민심을 진정시키는 조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남구만이 아뢴 대로 하여야 비로소 합당하게 처리될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 대신이 국론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명하여 우선 김익훈의 방면 조처를 환수하게 하였는데, 이해 겨울에 상의 두환(痘患)이 평상으로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사면으로 인해 다시 김익훈을 방면하였으며, 옥문을 크게 열어 김중하와 김환이 모두 석방되었다. 이해 1월에 집의(執義) 이굉(李宏) 등이 김환을 국문해야 한다는 논계(論啓)를 정지하였다. 2월에 빈청 인견 때에 지평(持平) 조상우(趙相愚)가 이굉 등을 체직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 특별히 체차되었다. 공이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조상우를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는 김환을 국문할 것을 거듭 청하였다. 3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김환의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할 것을 청하자, 상은 국상(國喪)의 우제(虞祭)가 지나기를 기다려 삼사를 불러 의논해서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윽고 오랫동안 처분이 없었다. 6월에 인견할 적에 대사헌 윤지선(尹趾善)이 입시한 대신들에게 하문할 것을 청하였다. 좌상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김환이 비록 죄줄 만한 점이 없으나 대론(臺論)이 더욱 격해져서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성상께서 만약 자신의 의견을 굽혀 따르지 않으시면 끝내 수습될 기약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은 좌상과 다릅니다. 전익대의 결안(結案)에 김환이 달래고 위협하여 무고하는 말을 더 보탰다고 말하였는데, 김환이 이것에 대해 명백히 해명한 일이 없습니다. 똑같은 죄목인데 전익대는 사형에 처하고 김환은 당초에 유배를 보낸 것은 적당하지 못한 듯하니, 사람들의 여론이 이 때문에 지금까지 가라앉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 일은 일찍이 우상이 아뢴 바를 따라 신도 참작하여 진정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오랫동안 처분이 없으시니, 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답답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김환이 죄가 없다고 말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죄를 가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미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서 참작하여 조처하신다면 죄의 경중을 정함에 있어 어찌 크게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예전 그대로 유배 보낸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먼 곳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공론(公論)은 “영상과 좌상 두 정승이 이미 ‘김환이 죄가 없다.’라고 말하고 억지로 진정시키기 위한 계책을 썼다.” 하여 양사에서 날마다 격론이 벌어졌다. 7월에 한해(旱害) 때문에 대신(大臣)과 삼사와 2품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고 빈청에서 인견하였는데, 이때 판중추부사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일부 사람들이 실직하여 원망하고 억울해해서 한해를 부르는 한 단서가 된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원한을 품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으니, 지난번 김환과 김중하 등에게 무고당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무릇 사람이 실직한 것도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데, 하물며 저들에게 무고당하여 대역죄에 빠진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일이 이미 사실무근인데도 악명(惡名)이 몸에 남아 있으니, 원통하여 죽고 싶은 마음이 어찌 실직했기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김중하의 죄는 김환에 비하여 더 무겁습니다. 만약 이수윤의 일을 김환의 공로라고 한다면 김중하를 살려 줄 수 있는 단서가 아닙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세상일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만약 밀고(密告)하는 문을 막는다면 국가를 위한 심원한 생각이 아니다.’ 하고, 혹자는 이르기를, ‘무고당한 사람의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으면 무고한 자 또한 죄에 걸려 죽지 않는다.’ 하니, 이 두 가지 말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그 죄에 따라 처벌하고 공이 있으면 그 공에 따라 상 주어서 확연히 공정하게 하면 화평한 복이 절로 그 가운데 있겠지만 만약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서 처분이 분명하지 못하면 어떤 화(禍)와 근심이 그 사이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벌을 분명하게 내리고 법을 신칙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효종(孝宗) 정유년(1657, 효종8)에 무고한 당진(唐津) 사람을 즉시 처형하여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고, 신이 청주(淸州)를 다스릴 때에 고을 사람이 양송(兩宋 송시열과 송준길)과 병사(兵使), 감사(監司)를 무고하자 불문곡직하고 즉시 죽였습니다. 그리고 전익대도 그가 무고한 자 중에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으나 자신은 또한 죄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제 조정의 의논이 괴리되어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것은 모두 김중하와 김환의 일 때문이니, 반드시 이 일을 먼저 바로잡은 뒤에야 나랏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환은 지적할 만한 죄명이 없고, 이수윤의 일은 비록 김중하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선왕조에도 무고한 사람을 석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에 무고한 사람은 3000리에 유배하도록 되어 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난언(亂言)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할 중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비견하여 사형을 논하는 것이니, 남을 대역죄로 무고하는 것은 정상이 증오할 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조(仁祖) 때에 무고한 사람 중에 죽지 않은 자가 또한 많으니, 이는 진실로 밀고의 문을 막았다가 발생할 화를 염려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인조가 반정(反正)한 초기의 일시적인 처분은 그와 같은 화를 염려한 것이지만 현재는 성군(聖君)이 서로 계승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안정되었으니, 무고하는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뭄을 걱정하여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할 대책을 논하는 이때에 김중하를 처벌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니, 오늘날에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나랏일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당초의 소견을 바꾼 것이 아니요, 법조문으로 인하여 김중하의 일을 겸하여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이 이때에야 김중하를 사형으로 논죄하는 형전(刑典)을 비로소 거론하였으나 끝까지 양단(兩端)을 유지하였다. 사관(史官) 원성유(元聖兪)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김 정승은 탑전(榻前)에서 말씀을 꺼내어 아뢸 때마다 성상께서 편치 않게 생각하시면 그때마다 중지하였으며, 남 정승은 말씀을 꺼내지 않을지언정 꺼냈다 하면 끝까지 다 말씀하지 않고는 중지하지 않았다.”
하였다. 10월에 인견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전익대의 결안(結案)에 있어 먼저 김환이 범한 죄를 결정한 뒤에 전익대를 처단했으면 실로 옥사(獄事)의 사체에 부합하는데, 전익대가 먼저 죽었는바, 그 결안을 저보(邸報)에 분명히 게재하고 팔방에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외에서 모두 이르기를, ‘전익대는 김환에게 유인당하고 사주받았는데도 형벌을 받아 죽었고, 유인하고 사주한 김환은 홀로 형벌을 면했다.’라고 합니다. 조정에서 이미 김환을 유배하도록 명령했으면서 그의 죄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면 대론(臺論)이 다시 격해질 뿐만 아니라 국법에 있어서도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김환이 말을 더 보태고 첨가한 것은 전익대의 결안에서 나왔는데, 전익대가 살아 있을 때에 분명하게 분변하지 않았으니, 지금 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죄명을 정하되 허새(許璽)를 고변한 공으로 한 등급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러한 죄명으로 다시 전지를 봉입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양사에서 비로소 정계(停啓)하였다.
○ 이보다 앞서 중종(中宗) 때에 경연관(經筵官)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을 때에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강하고 있으나 공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다만 책의 일부를 뽑아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시강(試講)하는 계책으로 삼으니, 학자들의 학식이 이 때문에 천박하고 고루해지는 것입니다. 신이 주자(朱子)가 논한 ‘과거의 규칙’을 보니, ‘식년시(式年試)마다 미리 어떤 경서(經書)를 시험 보이면 거자(擧子)들이 모두 그 경서를 공부할 것이다. 시험에 이미 급제한 자는 한 가지 경서에 정통하게 되고 낙방한 자도 한 가지 경서를 전공하게 된다. 다음번의 시험에 또다시 어떤 경서를 시험 보이면 급제한 자는 두 가지 경서에 정통하게 되고, 뒤에 또다시 이와 같이 하면 유생들이 모두 오경(五經)을 공부하여 공력이 또한 넉넉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방식을 따라서 오로지 경서를 공부하게 하소서.”
하니, 중종이 이를 깊이 옳게 여겼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공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 인재를 물색하라는 명령에 따라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조정에서 만약 지방의 인재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유사에게 명하여 명경과(明經科)의 제도를 조금 바꾸어서 용렬한 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조적(朝籍)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7년 뒤에 공은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강독 절목(講讀節目)을 초안하였는데, 여기에 “매월 초하루에 경서 한 권을 읽게 하고 맹월(孟月)마다 대사성에게 나와 강(講)하고 질문하게 하면 3년 뒤에는 사서와 삼경을 거의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절목이 이미 갖추어졌으나 해임되어 이 절목을 반포하지 못하였다. 이해 9월 공이 주강(晝講)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별시(別試)의 강경(講經)은 병신년(1656, 효종7)의 별시에서 강경한 이후로 별시에 강경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옛날 규례에는 알성시(謁聖試)에도 강경이 있었으니, 지금부터는 삼백관시(三百館試)와 육백관시(六百館試)를 막론하고 모두 강경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명하여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심경부주(心經附注)》를 강하였는데, 여기에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다만 문장의 뜻을 깨달아 알려고만 한다면 비록 여러 경서를 모두 통달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이로 인해 느낀 바가 있어 또다시 아뢰기를,
“경서를 공부하는 자가 비록 글 뜻을 통달하여 알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자기 몸에 돌이켜 실행하는 공부가 없다면 또한 유익함이 없습니다. 더구나 글 뜻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오직 한 글자도 틀리지 않기를 구한다면 폐단이 장차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어찌 매우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식년의 문과는 3년마다 33명을 뽑으니 혹 쓸 만한 한두 명의 인재가 없지 않으나 대부분 입으로 외는 것만을 일삼아 원래 글 뜻을 알지 못합니다. 먼 지방의 무식한 사람들은 혹 어려서부터 언문(諺文)으로 경서를 외우고 익히기도 하니, 과거에 급제하기에 이르러서는 서찰(書札)을 써서 주고받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오히려 이보다 더 진전되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이르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다만 명경과(明經科)만 있었으나 문장을 잘하는 훌륭한 분이 여기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제 만약 글 뜻을 많이 묻고 또 제술(製述)로 생획(生畫)의 과정을 거쳐 뽑는다면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다.’라고 하니, 이 말이 그럴 듯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강(講)하는 규정이 어떠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경우를 가지고 말한다면 주(注) 가운데 한 글자를 가감하고 언해(諺解)의 해석 하나와 토(吐) 하나가 틀리는 데에서 합격과 낙방이 모두 결정되니, 만일 사서와 삼경을 다 외우면서 글 뜻을 통달하고 제술을 잘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실로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지금 주자의 ‘학교사의(學校私議)’를 모방하여 사서 이외에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경(春秋經)》을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의 네 식년(式年)에 나누어 배정해서 사서와 한 가지 경서를 돌려가면서 강하게 한다면 익히고 외는 공부가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 것이니,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도 모두 기꺼이 하려 할 것이고, 네 가지 경서 중에 한 가지에만 치우칠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서와 경서 한 가지로 연획(連畫)한 자를 뽑는다면 문장을 잘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많이 선발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글의 뜻을 물을 수 있고 생획이 나올 수 있습니다.
지금 명경과의 폐단만 문제가 아닙니다. 제술과(製述科)로 급제한 신과 같은 무리들도 과거 공부할 때에 식년시의 강경에 응시하는 것은 애당초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였으니, 명경과 제술이 서로 방해가 됩니다. 만약 사서와 한 가지 경서를 강하는 규정을 시행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익히고 외워서 네 차례 식년을 거친 뒤에는 반드시 네 가지 경서를 다 읽은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릇 제술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 중에도 경학(經學)을 한 선비가 많아질 것이니, 어찌 둘 다 모두 합리적으로 되고 또 인재를 육성하는 효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선왕조에 신이 대사성이 되어 지관사(知館事)인 조복양(趙復陽)과 동지관사(同知館事)인 박장원(朴長遠)과 함께 이 일을 의논할 때에 모두 신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나 그때 묘당(廟堂)의 신하 중에 혹자가 말하기를, ‘옛 법을 갑자기 바꾸기 어려우니, 이렇게 하면 먼 지방 사람 중에 급제하는 자가 반드시 적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것을 어렵게 여기는 자가 많으나 과거를 설행한 뜻은 본래 인재를 얻는 데 있으니, 그 경중을 비교해 보면 어찌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식년과가 명경과라고는 하지만 전후의 방목(榜目)을 살펴보면 끝내 크게 쓸 만한 인물이 없으니, 우상이 말한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크게 변통하는 것이니, 다른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품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이 대부분 고식적이어서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2년 뒤 겨울에 우상 이단하(李端夏)가 공의 의견을 따라 금년 식년시부터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막혀 시행되지 못하였다.
○ 9월에 공은 정시(庭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어 신필청(申必淸) 등을 뽑았다.


 

[주D-001]부북군(赴北軍) : 북쪽 지방으로 방수(防戍)하러 나가는 군사를 이른다.
[주D-002]입방(立防)과 습조(習操) : 입방은 번을 서서 방어함을 이르고, 습조는 습진(習陣)과 군사 조련(操鍊)을 이른다.
[주D-003]복호(復戶) : 조선조 때 군인과 양반의 일부 및 궁중의 노비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租稅)나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는 것을 이른다.
[주D-004]학직(學職) : 성균관이나 향교 등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벼슬을 이른다.
[주D-005]오삼계(吳三桂) : 요동(遼東) 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산해관(山海關)을 지켰다. 이자성(李自成)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함락하고 그의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빼앗아 가자, 마침내 청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와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청나라가 제국을 세운 뒤에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雲南)에 진주하여,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청나라 초기 사번(四藩)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청나라가 번진(藩鎭)을 철폐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남부 지방을 모두 점령하였으나 곧 병사(病死)하였고 손자인 오세번(吳世璠)의 대에 이르러서 청나라에 멸망당하였다. 《淸史稿 卷480》
[주D-006]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주D-007]오경(吳耿)의 …… 뒤 : 오삼계(吳三桂)와 경중명(耿仲明)이 반란하여 군대를 일으킨 사건을 이른다. 오삼계는 요동(遼東) 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산해관(山海關)을 지켰다. 이자성(李自成)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함락하고 그의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빼앗아 가자, 마침내 청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와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청나라가 제국을 세운 뒤에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雲南)에 진주하여,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청나라 초기 사번(四藩)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청나라가 번진(藩鎭)을 철폐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남부 지방을 모두 점령하였으나 곧 병사(病死)하였고 손자인 오세번(吳世璠)의 대에 이르러서 청나라에 멸망당하였다. 《淸史稿 卷480》 경중명은 원래 산동(山東) 사람이었는데 뒤에 개주위(蓋州衛)로 옮겼는바, 명나라 말기 등주(登州)의 참장(參將)으로 있다가 청나라에 항복하고 조선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이자성을 토벌하고 정남왕(靖南王)에 봉해졌으나 번진이 철폐되자, 반기를 들었다. 《淸史稿 卷335》
[주D-008]고부사(告訃使) : 고부단사(告訃單使)를 이르는바, 국상이 났을 때 이를 알리기 위하여 중국에 보내는 사신이다. 국상을 알리고 새 임금의 즉위에 대한 중국 측의 승인을 얻는 것이 소임이었으며,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의 구별이 없으므로 단사(單使)라고 하였다.
[주D-009]복창군(福昌君) …… 이남(李柟) : 둘 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고 인조(仁祖)의 손자인데, 이들은 현종(顯宗)의 총애를 믿고 궁중에 무상출입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1680년(숙종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당시에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許堅)과 함께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 해서 모두 사사(賜死)되었다.
[주D-010]피부에 …… 비방 : 《논어》 〈안연(顔淵)〉에 자장(子張)이 공자(孔子)께 밝음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씀하기를, “물처럼 점점 스며드는 비방과 피부에 와 닿는 듯한 통절한 하소연이 먹히지 않는다면 밝다고 이를 만하다.〔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라고 하였다.
[주D-011]급사(給舍) : 왕명의 출납을 맡는 자리로, 우리나라의 승정원과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宋史 卷161 職官1》
[주D-012]무장(無將) : 임금이나 부모를 위해(危害)하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됨을 이른다. 춘추 시대 노 장공(魯莊公)의 아우인 숙아(叔牙)가 장공을 시해할 생각을 굳히자, 숙아의 아우인 계우(季友)가 숙아에게 독약을 먹고 자살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장공(莊公) 32년 조에 “공자 아가 지금 시해하려는 생각만을 가졌을 뿐인데, 글이 어찌하여 직접 시해한 자와 동일하게 다루었는가? 군친에게는 시해할 생각조차도 가져서는 안 된다. 가지기만 하여도 베어 죽이는 것이다.〔公子牙今將爾 辭曷爲與親弑者同 君親無將 將而誅焉〕” 하였다.
[주D-013]계복(啓覆) :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사형할 죄인을 재심하는 것을 이른다. 승정원에서 추분(秋分) 후에 계품하여 9월, 10월 중에 날짜를 정해서 시행하였다.
[주D-014]대계(臺啓)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이른다.
[주D-015]말의(末擬) : 말망(末望)으로 주의(注擬)함을 이른다. 관리를 임명할 때 전형(銓衡)을 맡은 아문에서 합당하다고 여기는 세 사람의 후보자로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는데, 삼망의 끝자리에 추천된 사람을 말망이라 한다.
[주D-016]현도(縣道) : 직접 상소를 올리지 아니하고 지방 관서(官署)를 통하여 올린 것이다.
[주D-017]정계(停啓) : 양사(兩司)의 전계(傳啓)에서 해당 사안을 빼 버리는 것을 이른다.
[주D-018]한나라 …… 하였고 : 급암(汲黯)은 당시 근엄하고 올곧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한 무제(漢武帝)가 그에게 우내사(右內史)를 맡겨 조정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는 귀족과 외척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漢書 卷50 汲黯傳》
[주D-019]선제(宣帝) …… 따졌으니 : 조광한(趙廣漢)은 청렴하고 강직하여 고을을 잘 다스렸으나, 사사로운 원한으로 영축(榮畜)이라는 사람을 죽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고발하였다. 이 사건을 승상부(丞相府)에 내려 어사(御史)가 조사하려 하자, 조광한은 승상의 부인이 몸종을 죽인 것을 문제 삼아 이것을 가지고 승상을 위협하였다. 조광한은 결국 이 일로 황제의 미움을 받아 요참형(腰斬刑)을 당하였다. 《漢書 卷76 趙廣漢傳》
[주D-020]경도(京都)의 사산(四山) : 서울의 사면에 둘러 있는 백악산(白岳山), 목멱산(木覓山), 인왕산(仁王山), 타락산(駝酪山)의 네 산을 이른다.
[주D-021]손을 올리고 내림 : 법을 농간함을 이른다. 춘추 시대에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천봉술(穿封戌)이 정나라 장수 황힐(皇頡)을 사로잡았다. 공자(公子) 위(圍)가 그의 공을 가로채려 하여 서로 다투다가 백주리(伯州犁)에게 처리해 줄 것을 청하니, 백주리는 “황힐에게 물어보자.” 하였다. 갇혀 있던 황힐이 나와 증인이 되자, 백주리는 공자 위를 편들려는 마음이 있어 고의로 그의 손을 들어 올리면서 “이분은 왕자 위(圍)이시니 우리나라 군주의 귀한 아우이시다.” 하였고, 천봉술의 손을 내리면서 “이 사람은 천봉술이니 방성(方城) 밖의 현령이다. 누가 그대를 사로잡았는가?” 하고 물으니, 황힐은 백주리가 왕자의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는 “나는 왕자를 만나 사로잡혔다.”라고 거짓으로 대답하였다. 이후로 손을 올리고 내리는 행위는 사정을 보아 법을 농간함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春秋左氏傳 襄公26年》
[주D-022]금송(禁松) : 법으로 벌목이 금지된 소나무를 이른다.
[주D-023]전가(全家) : 전가죄인(全家罪人)의 줄임말로, 죄인의 전 가족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바, 첫 번째는 역모(逆謀)와 같은 대죄를 범했을 경우 가족은 전부 중죄인으로 처리되어 장유(長幼), 남녀 및 관계의 구별에 따라 사형 또는 노비로 입역(入役)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비교적 경질(輕質)의 죄인으로서 북변(北邊) 국경 지방의 개척 정책에 의거하여 가족 전부를 북쪽 국경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주D-024]소결(疏決) : 국가에서 특별한 경우에 전국의 죄수를 다시 심리(審理)하여 너그럽게 처결하는 것을 이른다.
[주D-025]비흥(比興)의 …… 도리 : 비(比)와 흥(興)은 각각 시체(詩體)의 하나로, 비는 비유법이고 흥은 어떠한 사물을 먼저 말하여 실제 읊으려는 내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멀고 가까운 도리란 시를 배우면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다.〔邇之父母 遠之事君〕”라는 말을 이른 것이다. 《論語 陽貨》
[주D-026]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 : 역적을 토벌한 사실을 알리는 반교문을 이르는바, 반교문은 임금이 반포하는 교서이다. 이때 영상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는바,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주D-027]납약(臘藥) : 해마다 납일(臘日)에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약으로, 청심원(淸心元), 안신원(安神元), 소합원(蘇合元) 등인데, 내의원(內醫院)에서 조제하였다.
[주D-028]양서(兩西)와 동북(東北) : 양서는 해서(海西)인 황해도와 관서(關西)인 평안도를 가리키며, 동북은 함경도를 가리킨다.
[주D-029]주(周)나라의 …… 풍패(豐沛) : 제왕의 발상지(發祥地)를 이른다. 빈(豳)은 빈(邠)으로도 쓰는바, 주나라는 원래 빈에 도읍하였다가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고 기산(岐山) 아래 주(周) 땅으로 천도하였는데, 뒤에 천하를 소유하였다. 패(沛)는 사수군(泗水郡)의 속현(屬縣)이고 풍(豐)은 패현(沛縣)의 작은 고을인바, 한(漢)나라를 개국한 유방(劉邦)은 원래 패현 풍읍의 양리(陽里) 사람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관향이 전주(全州)이고 그 선조가 함경도의 함흥(咸興) 등지에 살았으므로 함흥과 그 일대 및 전주 지방을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 칭하였다.
[주D-030]삼조(三曹)의 낭관(郞官) : 삼조는 호조, 형조, 공조의 합칭이고, 낭관은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가리킨다. 삼조는 이조, 예조, 병조에 비하여 격이 떨어졌다.
[주D-031]일월(日月)을 배태(胚胎)한 곳 : 일월은 제왕을 의미하는바, 곧 함경도가 조선의 태조를 탄생시킨 곳임을 말한 것이다.
[주D-032]예양(豫讓) : 춘추 시대 말기 진(晉)나라의 자객(刺客)이다. 지백(智伯)이 조양자(趙襄子)의 공격을 받아 죽고 지씨(智氏) 일족이 멸망당하자, 자신을 국사(國士)로 대우한 지백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조양자를 살해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 후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숯불을 삼켜 벙어리가 되고 전신에 옻을 칠하여 문둥병을 앓는 사람처럼 꾸며 다리 밑에 숨어 조양자를 죽이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양자에게 잡혀 죽었다. 《通鑑節要 卷1 周紀》
[주D-033]서추(西樞) : 중추부(中樞府)를 이른다. 중추부는 서반(西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34]호수(戶首) : 정군호수(正軍戶首)를 말한다. 출역하는 군사인 정군을 호수라 하고, 그 호수가 거느린 보인(保人)을 솔호(率戶)라고 일컫는다.
[주D-035]고립(雇立) :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어 부역(賦役)이나 병역(兵役) 따위의 공역(公役)을 치르게 함을 이른다.
[주D-036]인정포(人情布) : 공물을 바칠 때 잘 봐 달라는 뜻으로 벼슬아치들에게 뇌물로 주는 베를 이른다.
[주D-037]어록체(語錄體) : 송나라 때 학자들이 후진의 교도(敎導) 및 편지에 필요한 당시의 속어(俗語)를 수집하여 구어체(口語體)로 기록한 것을 이른다.
[주D-038]천연(天淵) : 매우 큰 차이가 남을 비유하는 말이다.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못 속에서 뛰어 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말에서 기인하여,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詩經 大雅 旱麓》
[주D-039]계차이후(繼此以後) : ‘이 뒤로는’이란 뜻이다.
[주D-040]공유(恭惟) : ‘공손히 생각건대’라는 뜻이다.
[주D-041]만과(萬科) : 1616년(광해군8)에 변경의 사정이 날로 급박하고 또 응시자를 모두 서울에 모으기가 어렵다 하여 승지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널리 무사를 뽑았는바, 모두 합하여 1만여 명에 이르니, 당시에 이를 만과라 일컬었다.
[주D-042]내삼청(內三廳) :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주D-043]신(身)ㆍ언(言)ㆍ서(書) : 사람을 선별할 때에 기준으로 삼는 조건으로, 신은 신체를 이르고 언은 말솜씨이고 서는 문필을 이른다. 여기에 판(判) 즉 판단력을 더 보태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였다.
[주D-044]예고부조반교문(預告不祧頒敎文) : 부조(不祧)는 사당에서 체천(遞遷)하지 않는 것이다. 미리 사당에 체천하지 않는다고 고유(告由)하면서 반포한 교서(敎書)이다.
[주D-045]구일제(九日製) :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로, 해마다 9월 9일에 보이는 과거(科擧)를 이르는바, 국제(菊製)라 별칭하기도 한다. 오순절제는 철따라 보이는 다섯 가지 과거로 인일제(人日製), 삼일제(三日製), 칠석제(七夕製), 구일제(九日製), 황감제(黃柑製) 등이다.
[주D-046]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궁중의 사온서(司醞署)에서 빚은 술을 내림을 이른다.
[주D-047]무겸(武兼) :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의 약칭으로, 무관이 선전관을 겸직한 것이다.
[주D-048]명관(命官) : 임금이 과장(科場)에 친림(親臨)하는 시험을 대신 주재하도록 임명한 시관(試官)을 이른다.
[주D-049]변려문(騈儷文) : 변문(騈文), 변체(騈體)라고도 칭하는바, 4자(字)와 6자를 기본으로 대우(對偶)를 이루어 짓는 것으로 선진(先秦)의 이사(李斯)가 지은 〈간축객서(諫逐客書)〉와 전한(前漢) 시대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및 사부(詞賦)에서 비롯하였는데,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하다가 당나라 때 한유(韓愈)의 고문복구(古文復舊) 운동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주D-050]삼중(三中) : 시문(試文)을 평정하는 아홉 등급 중 여덟째 등급을 이른다.
[주D-051]종장(終場) : 사흘에 나누어 보이는 과거의 마지막 날 시험장을 이른다. 첫날의 시험장을 초장(初場), 둘째 날의 시험장을 중장(中場)이라 이른다.
[주D-052]문감(文鑑) :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을 이른다.
[주D-053]회천(懷川) 정승 : 송시열을 말한다.
[주D-054]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경우, 사령장(辭令狀)과 황색 종이에 쓴 사령장의 부본(副本)을 받아 그 자손이 추증된 선조의 묘소 앞에서 이를 고하고 황색 종이의 부본을 불태우는 의식을 이른다.
[주D-055]도목대정(都目大政) : 도목 정사(都目政事)와 같은 말로, 매년 6월과 12월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考課)하여 인사(人事)를 결정함을 이른다.
[주D-056]가복(加卜) : 정승을 임용하는 절차 가운데 하나로, 정승 후보자를 천거하는 데 임금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 다른 후보자를 추가하여 다시 천거하게 함을 이른다.
[주D-057]정금사(鄭錦舍) : 명나라 말기의 군벌(軍閥)이다. 일본 사람들이 정금(鄭錦)을 일컬어 금사(錦舍)라고 하여 사(舍) 자를 붙였는바, 이는 《맹자(孟子)》에 맹사(孟舍)를 맹시사(孟施舍)라고 칭한 것과 같다.
[주D-058]세초(歲抄) : 사망 또는 도망하거나 병에 걸린 군병을 조사하여 결원을 보충하는 것으로 6월과 12월에 두 차례 실시하였다.
[주D-059]한정(閑丁) : 국역(國役)에 나가지 않는 장정을 이른다.
[주D-060]투속(投屬) : 자기 몸을 남에게 종속시킴을 이르는바, 공사천(公私賤) 또는 양민이 신공(身貢)ㆍ조세(租稅)ㆍ공물(貢物)ㆍ군역(軍役) 등의 무거운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왕실(王室) 직속의 내수사(內需司) 또는 대군(大君)ㆍ제군(諸君) 및 권력가 등에게 스스로 의탁함을 이른다.
[주D-061]삼의사(三醫司) : 의료를 맡은 세 관사로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를 통칭한다.
[주D-062]창준(唱準) : 소리를 내어 읽어 가면서 교정을 보는 것을 이르는바, 교서관에 소속되어 책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잡직이다.
[주D-063]아병(牙兵) : 본진에서 대장을 수행하던 병사를 이른다.
[주D-064]모속(冒屬) : 해당 사항이 없는 자가 허위로 들어가 소속되는 것을 이른다.
[주D-065]숙종 …… 때 : 경신년은 1680년(숙종6)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남인 일파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여 정국이 크게 바뀐 때를 이른다.
[주D-066]아약(兒弱)과 도고(逃故) : 아약은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이르고, 도고는 도망한 자와 물고(物故) 난 자를 이른다.
[주D-067]아약제군영사불망비(兒弱除軍永思不忘碑)를 산음현(山陰縣)에 세웠다 : 이 비는 아약에게 군포를 면제해 준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내용의 비이며, 산음현은 지금의 경남 산청군(山淸郡)이다.
[주D-068]소결(疏決) : 국가에서 특별한 경우에 전국의 죄수를 다시 심리(審理)하여 너그럽게 처결하는 것을 이른다.
[주D-069]김익훈(金益勳) : 1619~1689. 자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본관은 광산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고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6) 복창군(福昌君)ㆍ복선군(福善君)ㆍ복평군(福平君) 등이 허견(許堅)과 반역을 꾀한다는 고변으로 경신대출척에 적극 참여하여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남인들을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그 공으로 보사 공신(保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1682년 김석주와 함께 남인의 허새(許璽)ㆍ허영(許瑛)ㆍ유명견(柳命堅)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계략을 꾸며 남인을 뿌리 뽑으려 했으나 서인 내부의 소장파인 한태동(韓泰東)과 조지겸(趙持謙) 등이 이를 반대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이 분열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주D-070]군뢰(軍牢) :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을 이른다.
[주D-071]삭출(削黜) :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함을 이른다.
[주D-072]복역(覆逆) : 임금이 내린 명령을 부당하다고 하여 재고(再考)하라고 돌려보냄을 이른다.
[주D-073]두 신하 : 김익훈의 삭출을 청한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주D-074]한 곳 : 김익훈을 말한다.
[주D-075]조적(朝籍) : 관원의 명부를 이른다.
[주D-076]맹월(孟月) : 사맹삭(四孟朔)으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각 첫달인 음력 1월, 4월, 7월, 10월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주D-077]삼백관시(三百館試)와 육백관시(六百館試) : 관시(館試)는 성균관 유생이 보는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를 이른다. 대과(大科)의 초시는 한성부(漢城府)와 팔도(八道)에서 보았으나, 관시는 국가나 조정에 경사가 있을 경우 성균관의 생원과 진사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치른 별시(別試)의 일종으로, 합격자의 정수가 300명일 경우에는 삼백관시 또는 삼백별시(三百別試)라 하고 600명일 경우에는 육백관시 또는 육백별시(六百別試)라 하였다.
[주D-078]생획(生畫) : 식년(式年) 문과(文科) 복시(覆試)에서는 33인을 취하게 되어 있는데, 초장(初場)인 강서(講書) 시험에서 14분(分) 이상을 받은 사람으로 정원 중 32인을 뽑고 나머지 1인은 조(粗)나 약(略)을 받아 입격하지 못한 사람에게 다시 제술 시험을 보여 뽑는다. 그러나 강서 시험 결과 입격자 수가 32인에 차지 않을 경우에는 나머지 인원을 모두 다시 제술 시험을 보여 뽑는다. 또 입격자 수가 32인을 넘을 경우에는 14분을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강서의 비교(比較)를 보여 32인을 채우고 탈락된 사람은 다시 제술 시험에 응시하도록 한다. 이렇게 다시 제술 시험을 보여 입격자를 뽑는 것을 생획이라고 하는데, 입격자를 뽑을 때 강서 시험의 점수를 살려 제술 시험 점수와 합산하기 때문에 생획이라 부른 것이다. 이들 입격자는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된다.
[주D-079]연획(連畫) : 시험 성적의 점수를 획(畫)이라 하는바, 연달아 일정한 점수를 얻는 것을 이른다.

 

 

약천연보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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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57세 을축년(1685, 숙종11)
2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4월에 복명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이달에 공이 차자를 올려 서로(西路)의 옥사에 대해 아뢰자, 상은 이홍술(李弘述)에게 죄를 더하도록 명하였다.
5월에 좌의정으로 전직하였다.
6월에 인견할 때에 공은 영소전(永昭殿)에서 희생을 사용하는 것이 온당치 못함을 아뢰고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희생을 사용하지 않게 하였다. 이달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렸는데 상이 승지와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재차 정사를 올리자, 도승지와 함께 오도록 명하고, 이날 승지와 함께 오도록 거듭 명하니, 공이 이달에 출사하였다.
7월에 사직단(社稷壇)에 직접 제사 지내는 기우제의 아헌관(亞獻官)으로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공은 남교(南郊)에서 지내는 기우제의 헌관에 차임되었는데 비가 내리자 말을 하사받았으며, 이달에 제주(濟州)에서 바친 말을 하사받았다.
8월에 명을 받들어 후릉(厚陵)을 봉심하였다. 청나라의 질책하는 말로 인해 책임을 지고 정사를 올렸다.
9월에 다섯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여덟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열일곱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10월에 서른한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해임을 허락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11월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12월에 청나라 사신이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조사하여 묻는 일로 인해 공은 의금부 당상관과 함께 길을 떠나 중화(中和)에 갔다가 돌아왔다.

○ 2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4월에 복명하였는데, 서로(西路)에서 들은 것을 가지고 차자를 올려 세 가지 옥사에 대해 아뢰었다. 이보다 앞서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홍술(李弘述)이 청강 만호(淸江萬戶)와 함께 모문룡(毛文龍)이 땅에 묻어 놓은 은(銀)을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자, 은을 얻어 도망친 토졸을 놓친 것에 분노하여 진영(鎭營)의 군관에게 주뢰(周牢)의 형벌을 시행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또 죽은 자의 아비가 거슬리는 말을 했다 하여 엄한 형장(刑杖)을 가해서 죽게 만들었는데, 의금부에서는 사람의 죄를 판결할 때에 법대로 하지 않은 죄를 적용하여 이홍술의 고신첩(告身帖)을 빼앗았다. 이에 이르러 공은 다시 이홍술을 무거운 법으로 처리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이홍술의 죄를 감하고 또 감하여 형벌을 남용한 죄보다도 가볍게 하였으니, 형벌의 경중에 기준이 없습니다. 관리 된 자가 국법을 두려워하며 조심하는 바가 없으니, 초가삼간에 살면서 울부짖고 원통해하며 애통한 마음을 품고 있는 저 군관의 아내와 고아들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앞서 계해년(1683, 숙종9)에 동지 서장관(冬至書狀官) 정제선(鄭濟先)이 관서(關西) 지방을 지나다가 외가의 배반한 노복 3명과 계집종의 남편 2명 및 양인(良人) 1명을 형추(刑推)하여 모두 죽게 만들었는데, 지난해 가을에 사간원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정제선을 나문(拿問)하고 본도에서 조사하였다. 이해 겨울에 의금부에서 상의 재가를 청하여 아뢰기를,
봉명(奉命)한 신하는 일반인들이 싸우다가 때려 사람을 죽인 것과는 구별이 있어서 일찍이 상명(償命)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별도로 판부(判付)할 적에 효종조(孝宗朝)에서 장령(掌令) 이증(李曾)이 사람을 죽인 일로 곤장을 맞아 죽은 일을 인용하며 복주(覆奏)한 것을 되돌려 주니, 판의금부사 여성제(呂聖齊)와 지의금부사 조사석(趙師錫)이 아울러 체차되었으며, 의금부에서는 대신들에게 상의할 것을 청하였다. 이해 1월에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양민을 함부로 죽인 죄는 다시 핑계 댈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고 사람은 관청의 사람이 아닌데, 똑같은 예(例)로 취급하여 가볍게 처벌한다면 신은 옛날 법을 제정한 뜻이 진실로 이와 같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과연 근거할 만한 법과 전례가 있다면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도일 듯합니다.”
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인조(仁祖)와 현종(顯宗) 때에 봉명한 두 사람이 사사로운 일로 사람을 죽였는데 모두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하였습니다.”
하며 추후의 법령을 반포할 것을 청하니, 김수항이 그 말에 동조하여 마침내 정제선을 유배 보냈다. 2월에 상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대간(臺諫)들이 정제선의 사형을 용서해 준 일을 간쟁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사헌부에서 형률대로 적용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공은 속히 윤허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옥사를 의논하여 형벌을 완화하는 것은 비록 왕자(王者)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살인자에 대한 형률은 용서해 준다는 법조문이 있지 않고, 노쇠한 자에게 형벌을 면제해 주는 것은 비록 주(周)나라의 아름다운 제도이나 사람을 죽인 자는 나이가 70세가 되고 80세가 되었다 해도 노쇠하다 하여 죄를 면제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 본심을 따져 보는 것이 죄를 결정하는 통상적인 규례이나 사람을 죽인 자는 비록 잘못하여 죽이고 장난하다 죽여서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용서해 주기를 허락하지 않으니, 이는 어찌 죽음을 당한 자가 가엾어서 상명(償命)이 아니고는 그 원통함을 풀어 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의금부의 의계(議啓)에 이른 바 ‘봉명한 신하는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라는 것은 또 고금의 경전과 법률에 들어 보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봉명한 신하는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고 하여 사람을 죽였더라도 상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일반인과 분명하게 다른 천자(天子)의 아버지를 고요(皐陶)가 감히 붙잡는단 말입니까.
약법삼장(約法三章)에 다만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고만 말했을 뿐이고 신분의 귀천과 존비의 구별이 없는데, 역대에 이것을 공통으로 시행하여 대경 대법(大經大法)으로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봉명한 사신이라고 핑계 대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을 과연 천하의 공평한 법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이른바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고 사람은 관청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또한 이 옥사를 잘 판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인조와 현종 두 조정의 전례대로 사형을 감하여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나라의 법령이 너그러워 죄인을 함부로 풀어 준 지가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죽이고서 의금부에 들어간 자들이 이증(李曾) 한 사람 외에는 용서를 받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어찌 봉명하였는가 봉명하지 않았는가를 따진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종전에 사람을 죽인 자에게는 비록 정법(正法)을 적용하지 못했더라도 또한 반드시 여러 해를 형추(刑推)한 뒤에야 비로소 사형을 감면하는 논의를 하라는 명령이 내렸는데, 정제선의 경우는 의금부에서 애당초 의계(議啓)할 적에 본래의 형률을 버리고 곧바로 성상의 재가를 청하였습니다. 비록 성상의 하교가 엄하시어 상주한 신하를 견책하셨으나 뒤이어 아뢴 자가 오히려 감히 법을 집행하지 못하고 또다시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여 살려 주자는 의논에 붙였습니다. 이에 전하께서도 법을 굽혀 따르지 않으실 수가 없었으니, 저 대간(臺諫)들이 고집하여 간쟁하지 못함을 또 어찌 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이미 성상의 재가를 청한 것을 가지고 의금부를 견책하셨고, 또 논쟁하여 고집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대관(臺官)들을 허물하셨으니, 그렇다면 정제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함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위엄을 펴고 복을 내리는 권세가 본래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형벌하고 죽이는 것을 한결같이 성상의 마음에서 결정하셔야 할 터인데, 또 어찌 대관들의 말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나의 처지에서는 비록 법을 굽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대관의 처지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신 것이라면, 인조 때 김경징(金慶徵)의 일과 자못 유사합니다. 김경징이 강도(江都)를 지키다가 실패한 뒤에 대간들이 형률대로 처리할 것을 청원하다 오래지 않아 정지하자, 인조께서 사사로운 일 때문에 정계(停啓)하였다고 준엄한 하교를 내리시니, 대관(臺官)들이 부득이 다시 그 의논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때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임금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을 쥐고 있는데, 신하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법을 시행하지 못하고 양사(兩司)의 손을 빌리고자 하십니까. 전하께서도 오히려 두려워하신다면 양사의 신하들이 유독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인조께서는 크게 노하시고 명을 내리시어 김경징의 죄를 바로잡으셨습니다. 오늘날 어리석은 신이 전하께 기대하는 것이 실로 유백증의 뜻과 같으며, 또한 전하께서는 인조께서 어기지 않으신 것을 법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또 듣건대 전하께서 정제선을 용서해 주신 뒤에 또다시 새로운 법령을 세우시어 ‘지금 이후로는 봉명한 사신이 사사로운 일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상명(償命)하게 하라.’ 하셨다 하니, 신은 이에 더욱 개탄스럽고 애석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즉위한 지 9년이 되어도 정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아읍(阿邑)의 대부(大夫)를 삶아 죽이자, 제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잘못을 속여 꾸미지 못하고 그 실제에 힘써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만일 혹 위왕이 아읍 대부의 죄를 법이 정해지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 하여 우선 놓아주고서 다시 법을 세우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 만약 전야(田野)를 제대로 개척하지 않으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뇌물을 써서 자신을 왕에게 칭찬해 주기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내 반드시 삶아 죽이겠다.’라고 하였다면, 어찌 그 아랫사람들에게 더욱 경시(輕視)당하는 데 이르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봉명한 사신으로서 사람을 죽인 자를 만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여기신다면 정제선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으며, 정제선의 죽음을 만약 감면해도 된다고 여기신다면 후일에 봉명한 자가 어찌 반드시 죽는 데 이르겠습니까.
이와 같이 법을 세운다면 백성들이 전하의 마음의 깊이를 엿보아 더욱 경시하고 함부로 대하려는 마음을 열어 놓게 할 것이니, 새로 정한 법령이 반드시 후일에 행해지지 못하리란 것을 또 누구인들 미리 헤아려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개성부(開城府) 대흥산성(大興山城)의 별장(別將)이 창고에 있던 수백 냥의 은(銀)을 잃고는 고지기가 훔쳐 갔다고 의심하고 그의 어린 아들을 신문하여 입증(立證)하였다. 이에 비로소 차례로 조사하여 고지기에게 자백을 받고 포도청으로 이송하니, 포도대장 신여철(申汝哲)이 아뢰기를,
“그 아들의 공초(供招)는 명백한 증거의 단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성상께서 ‘자식으로서 아비의 죄를 입증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하교를 이제 막 내리셨으니, 비록 이러한 명령이 내리기 전에 받은 공초라 하더라도 자식의 공초를 신빙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차례로 자복한 내용을 형조에 내려 은을 훔쳐 간 자를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때에 공은 별장과 포도대장, 형조의 당상관을 질책하여 파면할 것을 청하고 아뢰기를,
“형벌을 가하여 악을 징계하는 것은 본래 정치를 보완하는 방책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도의(道義)로 향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자식으로 하여금 아비의 죄를 입증하게 하여 처단하는 죄가 성립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이치를 끊어 버리고 윤리강상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 어떻게 나라가 올바른 나라가 되고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 대흥산성의 별장은 진실로 꾸짖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포도대장과 형조의 당상관으로 말하면 국가의 중신(重臣)이 되어서 도둑을 다스리고 법률을 담당하고 있는데, 또한 이 일을 놀랍게 여기지 않고 규례대로 판결하는 등 태연스레 일상적인 것으로 여겼으니, 아, 이것을 백성들에게 보인다면 어찌 추악한 소문이 일지 않겠습니까.
이 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이미 그 자식에게 물어서 그 아비의 죄가 성립되었는데, 옥사를 결단할 즈음에 이것을 신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부자간에 서로 숨겨 주는 것은 본래 성인(聖人)의 교훈이니, 자식으로서 아비의 죄를 입증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구인들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침내 지난날 성상의 하교로 신칙하신 것을 마치 새로 나온 명령인 것처럼 여겨서 이러한 명령이 내려지기 전이라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성상의 하교가 내리기 전에는 본래 부자간에 서로 입증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단 말입니까. 자식이 아비를 고발하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형률의 조문이 있고, 대공(大功) 이상의 친척은 반역죄(叛逆罪)를 제외하고는 또한 감싸 주고 숨겨 주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법조문의 뜻이 이미 이와 같이 명백합니다.
또 인조조(仁祖朝) 병인년(1626, 인조4)의 수교(受敎)에 이르기를,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노비가 주인에 대해서, 아우가 형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는 설령 따질 만한 잘못이 있더라도 입증하지 말아서 풍속을 돈독히 하여 교화를 밝히라.’ 하였습니다. 지난번 성상의 하교는 바로 이 법조문을 거듭 밝히신 것으로 인조조 수교의 뜻과 바로 부합합니다. 그러하니 이것을 명이 내리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에 진술한 세 가지 일은 내용이 지극히 준엄하고 바르니,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게 한다. 이홍술(李弘述)은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아뢰어 죄를 더하도록 하겠다. 자식으로 아비의 죄를 입증하게 한 것은 실로 심히 놀랄 만한 일이나 그 사이에 또한 선후와 경중의 구별이 없지 않으니, 산성 별장은 파직시키고 포도대장과 형조의 당상관은 모두 엄하게 추고(推考)하도록 하겠다. 정제선의 일은 죄목이 매우 중대하고 국법에 용서해 주기 어렵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별히 사형을 용서해 준 것은 이전에 이러한 무리들이 모두 용서를 받았는데 유독 정제선에게만 상명(償命)의 형률을 대번에 시행하는 것은 법을 적용함에 있어 불공평함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율령(律令)이 정해졌으니, 어찌 후일에 시행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13년 뒤에 회양 부사(淮陽府使) 유신일(兪信一)이 북도(北道 함경도)의 선비에게 형장을 가하여 죽게 하자, 상이 율령을 따라 참형에 처하도록 명하고, 복역(覆逆)한 승지에게 답하기를,
“과거에 정제선을 구명(救命)하여 해명하는 말이 지극히 분분하므로 내 마음속으로 서글퍼하여 하교한 바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오늘날 구습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처럼 방자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정제선에게 법을 잘못 적용하여 실착(失着)을 면치 못했는데, 어찌 이제 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후에 상이 광주(廣州)의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로 인하여 비망기를 내리기를,
“우리나라는 양반의 권세가 중하여 정제선이 사람을 죽였는데도 그 당시 대신들이 사형을 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지금껏 24년 동안 양반 중에 사람을 죽인 자가 없으니, 법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권세가 중해서 그런 것인지를 모르겠다.”
하였으니, 이는 김수항(金壽恒)을 두고 한탄한 것이었다.
○ 이때 국상 1년 만에 풍악을 울렸다 하여 대간(臺諫)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監司)를 추고할 것을 청하자, 평안 감사 유상운(柳尙運)이 상소하여 《예경(禮經)》을 증거로 대었다. 5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예는 진실로 알기 어려우나 예경의 본뜻을 상고해 보면 《예기》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복(服)이 있으면 한집안에 있는 자식은 음악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만약 집이 다르면 이와 같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복이 가벼운 경우를 이른 것이니, 만약 중한 복이라면 자식 또한 복이 있으니, 자식이 음악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3년상이 있으면 그 자식은 비록 1년이 지났더라도 오히려 호관(縞冠)에 현무(玄武)를 둘러 순길(純吉)의 복(服)을 입지 못하니, 자식도 복이 있다는 것은 호관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이른바 ‘집이 다르면 이와 같지 않다.’라는 것은 아버지가 중한 복이 있을 때에는 논할 수가 없는데, 유상운이 인용하여 비유하면서 본의를 잃었습니다. 또 《오례의(五禮儀)》의 국휼계령조(國恤戒令條)에 이미 3년 동안 음악을 정지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예조에서 행회(行會)할 때에 이 절목(節目)을 누락시켜서 지방의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대상(大祥) 날짜가 아직 멀었음을 자세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국상이 나던 때의 예조 당상관을 추고하고 다시 예조로 하여금 지방에 통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신위(神位)를 영소전(永昭殿)에 봉안하고 3년 뒤 오향 대제(五享大祭)와 속절(俗節)과 삭망(朔望)에 올리는 제수를 혼전(魂殿)에 올리는 상선(常膳)을 그대로 사용하고 또 시속의 음악을 사용했는데, 이해 봄에 예조에서 한결같이 종묘의 예를 따라 희생을 사용할 것을 청하니, 상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6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영소전에서 하향 대제(夏享大祭)부터 비로소 희생을 사용한다면 또 종묘의 헌가(軒架)와 일무(佾舞)의 음악을 사용해야 하지만 방해되는 점이 있어 불편한 일이 많습니다. 전대(前代)의 전례(典禮)에서 찾아보면 위(魏)나라의 견후(甄后)당(唐)나라의 장손후(長孫后)는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기 전에 모두 별도로 사당을 세우고 금석(金石)의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명(明)나라에 이르러서는 먼저 내상(內喪)이 있으면 봉선전(奉先殿)에 부묘하였으니, 봉선전은 우리나라 문소전(文昭殿)의 제도인데, 제사에 올리는 음식과 제사에 연주하는 음악을 모두 살아 있을 때의 속례(俗禮)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인조조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위를 숙녕전(肅寧殿)에 봉안하였는데, 3년 뒤에 예조에서 비록 한결같이 종묘의 예를 따라 제향하자는 청이 있었으나 부묘하기 전에는 원래 희생과 음악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살펴보면 성종(成宗)의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신위를 소경전(昭敬殿)에 봉안하고 제수와 제사에 연주하는 음악은 한결같이 문소전의 제도를 따랐으니, 이는 바로 영소전에서 희생을 사용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위나라와 당나라의 예는 자세한 것을 상고할 수 없지만 명나라와 우리나라의 전례(典禮)가 이와 같으니, 만약 희생을 사용하기 전에 의논했다면 다만 예전에 사용하던 전례를 그대로 받들어 행해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희생을 사용하고 이로 인하여 음악을 사용한다면 고례(古禮)에는 반드시 별도로 사당을 세운 뒤에야 사당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소전은 궁중의 별전(別殿)이니, 사당의 제도와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터서 사당의 제도로 만들고자 한다면 궁중에 사당을 세워야 하는데, 이는 또한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음악은 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 후비(后妃)에게는 무무(武舞)를 쓰지 않고 오직 문무(文舞)를 사용하여 종묘의 제도와 차이가 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제도를 만드는 것은 또한 매우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을 세조(世祖) 이후로는 새로 만들 겨를이 없었는데, 영소전의 악장을 먼저 만드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이러한 곡절을 충분히 강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예조로 하여금 여러 대신 및 지방의 유신(儒臣)들과 다시 의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당초 의논하여 정할 때에 미처 구례(舊例)를 널리 상고하지 못해서 이처럼 난처한 일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명나라와 우리나라에서 행해 오던 제도를 알았고, 또 부묘하기 전에 희생을 사용하는 예가 명백히 없다면 이미 거행했다가 곧바로 폐지하는 것이 비록 미안하기는 하나 시일이 오래되기 전에 고쳐서 옛 법을 따르는 것이 불가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고, 박세채(朴世采)도 그렇게 말하여 마침내 희생을 사용하지 않았다.
○ 7월에 가뭄이 심해지자, 상이 사직단에 친히 기도할 적에 공이 아헌관(亞獻官)으로 참여하여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고 이어 남교(南郊)의 기우제에 헌관으로 차임되었다. 비가 내리자, 상이 말을 하사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 경계하는 말씀을 아뢰기를,
“옛날 명나라 고황제(高皇帝)는 대장군 서달(徐達)에게 명하여 10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그가 연(燕)과 계(薊) 지방을 평정하고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지방을 소탕하고 개선할 적에 그에게 준 상은 백금(白金) 500냥과 비단 옷감 50표리(表裏)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명나라 말엽 숭정(崇禎) 연간에 이르러 조대수(祖大壽)는 가만히 앉아서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 작은 공로도 없었는데 매월 만 금(金)을 하사하여 국고가 텅 비었으며, 심지어는 그 자신과 그의 아내에게도 각기 날마다 백 금을 하사하였지만 결국 국가가 멸망할 때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군주가 신하들로 하여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충성하게 하는 것이 과연 상을 얼마나 주느냐에 달려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에는 천하가 크게 편안하고 백성과 물건이 지극히 풍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때 정승으로 있던 왕조(王朝)는 하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눈을 감고 한탄하기를, ‘백성들의 피와 땀을 어찌 이처럼 많이 허비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대관(大觀) 연간에 이르러서 채경(蔡京)의 무리가 국정을 담당하자, 지나친 하사와 멋대로 내린 상이 온 집에 가득하여 끝내는 집안과 나라가 모두 멸망한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이 어찌 신하가 지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사(有司)가 가지고 있는 재화를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에 사용하시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을 듯하나, 이것이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모두가 백성들의 심장의 살을 도려낸 것이니, 어찌 차마 가볍게 쓸 수 있겠습니까.
현재 조정의 혜택이 너무 지나친 것은 이와 같지 않은 일이 없어서 다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큰 문제만 가지고 말한다면 만과(萬科)를 설치한 것이 진실로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이 되었으니, 비록 훌륭한 계책을 내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재신(宰臣)들에게 상으로 가자(加資)하는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육경(六卿)의 반열에 있는 자가 죄를 지어 버림받거나 늙고 병들거나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를 제외하고도 23명이나 되는 많은 수이며, 이 가운데 1품에 오른 자가 또 11명이나 됩니다. 비록 이 사람들이 덕망과 재주가 모두 그 지위에 걸맞다 하더라도 관직을 임명할 때에 신중히 하는 도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오래된 일은 신이 자세히 모르지만, 신이 효종조에 출사한 이후로 선왕조(先王朝 현종) 말년에 이르기까지 매번 조정의 반열을 보면 상신 외에 1품의 반열에 있는 자가 한때에 한두 사람 혹은 두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번 공청(公廳)에 모여 반열을 정할 때에 1품이 혹 2품보다 많기도 하니, 신은 이것이 성조(聖朝)에서 관작을 소중히 여겨 아끼는 도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조정에 일이 많음으로 인해 무릇 궁중에서 시탕(侍湯)하거나 일을 맡고 부역을 감독한 공로가 있을 적에 전례에 의거하여 은혜로 가자한 자들입니다. 지금 그 숫자가 이와 같이 많게 되었으니, 일이 극에 달하면 변통하는 것은 이치와 형편상 당연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이후로 조정의 신하 중에 전례(前例)대로 가자해야 할 자가 있으면 비단이나 말을 하사하는 것으로 바꾸어 시인(詩人)으로 하여금 ‘적불(赤芾)이 삼백 명’이라는 비난이 있지 않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에 은상(恩賞)을 지나치게 내리는 폐단에 대해 극언한 것은 진실로 절실하고 지극한 말이니, 내 매우 가상히 여겨 받아들인다. 일이 극에 달하면 변통해야 한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또한 이치와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지만 상을 하사하는 옛 제도의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상을 논할 때에 승자(陞資)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살펴보아 참작해서 낮추고 높이는 것이 혹 무방할 듯하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부묘(祔廟)의 예가 이루어졌는바, 신하들 중에 으레 품계를 올려 주어야 할 자들에게 말을 하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 공이 연경(燕京)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통역관과 봉황성(鳳凰城) 사람들이 “모두 서북 지역에 우역(牛疫)이 번진다 하므로 개시(開市)를 정지할 것을 청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압록강을 건너갈 적에 장계로 보고하니, 조정에서 이를 따랐다. 청나라 사람들이 사신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그 뜻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자, 청나라 사람들은 마침내 규례가 되었다고 핑계 대면서 질책하는 말을 하였다. 8월에 공이 인혐(引嫌)하여 차자를 올리고 인하여 정사(呈辭)를 올리자, 9월에 상이 세 차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10월에 공이 스무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이 승정원에 명하여 전임 대신 중에 정사를 가장 많이 올린 자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쉰 번 올린 자가 있다고 아뢰었다. 이달에 공이 서른한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마침내 해임을 허락하였다가 11월에 다시 제수하였다.
○ 이해 가을에 청나라 군주가 은밀히 화공(畫工) 두 사람을 보내어 백두산(白頭山)을 그리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변경 고을에서 발각되니 두 사람이 도망쳤다. 얼마 후 후주(厚州)에서 인삼을 캐던 백성이 얕은 개울을 건너가다가 이들과 서로 마주치자, 총포(銃砲)를 쏘아 부상을 입혔다. 10월에 연경(燕京)에서 급한 통고문이 12일 만에 이르렀으며 칙사(勅使)가 잇따라 나왔다. 그리하여 11월에 조사하고 돌아갈 적에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봉초(捧招)하려 하면서 대신과 의금부 당상관 한 명을 데리고 함께 가려 하였다. 공은 마침내 이 일을 자임하여 12월에 지의금부사 오두인(吳斗寅)과 함께 중화(中和)에 갔다가 돌아왔다.

58세 병인년(1686, 숙종12)
1월에 차자를 올려 감옥에 죄수를 오랫동안 가두어 둔 법관(法官)을 경책(警責)할 것을 청하니, 상은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2월에 태묘(太廟)의 부묘(祔廟)에 친히 제사할 때에 종헌관(終獻官)이었다 하여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4월에 사은사(謝恩使)에 차임되었으며, 윤4월에 명을 받들어 현릉(顯陵)을 봉심하였다. 이달에 상은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더위 먹은 데에 치료하는 약제를 가지고 연경에 따라가게 하였으며, 침의(鍼醫)도 따라가게 하였다.
6월에 국경을 나간다 하여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는데, 하직하던 날에 선온(宣醞)하였다. 이달에 인견할 적에 공이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에게 더 추증할 것을 청하자, 상은 정2품의 관직을 추증하고 사시(賜諡)하라고 명하였다. 이달에 공이 하직하고 사행(使行)을 떠났다가 11월에 복명하였다.
12월에 아홉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열두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 공은 옛날 함경도 감영에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형옥(刑獄)에 관한 일은 더욱 늦출 수 없다 하여 즉시 장계를 올리기를,
“일찍이 경신년(1680, 숙종6) 가을에 비변사의 관문(關文)으로 인해 외방(外方)의 죄수 중에 여러 해 동안 미결 상태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추안(推案)을 소결청(疏決廳)으로 올려 보내서 탑전(榻前)에서 품정(稟定)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결청으로 올려 보낸 뒤에 회답 이문(移文)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느라 감히 죄수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두어 둔 지 3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회답이 없으며, 그중에는 또한 몸이 수척해져 죽은 죄수도 많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소결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려는 뜻이 도리어 옥사가 적체되고 막혀서 원망을 품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은 옥사의 실정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옥사를 다스리는 규정은 먼저 죄수의 얼굴빛을 관찰하고 또 그의 말을 들어 보며, 원고와 피고를 대질하고 증거를 참고해서 반복하여 조사하고 여러 가지로 고문(考問)해도 실정을 얻는 경우는 적고 실정을 잃는 경우는 많습니다. 지금 외방 관리가 작성한, 졸렬하고 소루(疏漏)하여 분명치 못한 추안(推案)을 가지고 멀리 수천 리 밖에서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고와 피고를 묻지 않고 정범(正犯)을 따지지 않으니,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아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또 정사를 다스리는 체통은 낮을수록 더욱 자세히 살피고 높을수록 더욱 소략하여, 마치 팔뚝과 손가락이 서로 부리고 그물의 벼리와 그물눈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온 나라의 두서없고 혼란한 문안(文案)을 모두 탑전에서 결정하고자 하니, 이는 사체(事體)에 있어서 마땅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사이에 비록 문서가 오가면서 평번(平反)하는 일이 있더라도 기다리고 오래 지체하는 폐단이 형편상 반드시 뒤따를 것입니다.
또 외방의 관리들은 언제나 옥사를 추국할 때에 혹은 의견이 분명하지 못할까 염려하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할까 우려하거나 혹은 세력에 구애되어 여러 가지 난처한 일을 모두 회피하여 모면할 것을 생각하는바, 이는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모두 서울로 올려 보내어서 여러 해 동안 죄수의 단죄를 지체하였으면서도 자신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훗날 억울함을 호소할 때에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진(秦)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서로 쳐다보듯이 하여 전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니, 국가에서 관리를 둔 것을 장차 어디다 쓴단 말입니까.
조정에서 반드시 여러 옥사를 가엾게 여기고 신중히 처리하고자 한다면 다만 이미 처결하고 편배(編配)한 무리 중에 오래된 죄안(罪案)을 취하여 날짜를 제한하지 말고 차분히 경중을 의논하도록 하고, 혹은 옥사에 밝은 관원을 특별히 파견하여 죄인이 있는 곳에 가서 죄를 캐물어 즉시 처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의 추안을 모두 본도로 돌려보내서 처결한 뒤에 계문(啓聞)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신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에 오래 갇혀 있는 죄인들을 보니, 형용은 마치 썩고 더러운 해골과 같고 목소리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의 울음소리와 같아서 벌거벗은 몸으로 벌벌 떨며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죽(粥)을 달라고 구걸하고 불을 달라고 애걸하면서 속히 죽기만을 원하고 죄의 허실을 다시 따져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 하더라도 이 참혹한 광경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몹시 서글퍼지고 놀랐던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해 1월에 공이 또다시 차자를 올리기를,
“형조에 현재 갇혀 있는 죄수는 매월 월말에 우상(右相)에게 기록하여 보이고, 만일 우상이 없을 경우에는 좌상(左相)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늘 옥관(獄官)이 가지고 온 수도안(囚徒案)을 보니, 국경을 넘어간 죄를 범한 죄인 43명 외에 기타 죄인이 또 100명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수가 많으니, 얼음이 풀려 봄이 되어서 만물이 소생하는 이때에 죄수들이 좁은 방에서 서로 베고 누워 신음하고 답답해하는 상황을 충분히 상상해 알 수 있습니다. 듣건대 그중에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을 하기도 하는 등 실로 죽고 싶어 하나 죽지 못하는 자가 있다 하니, 마음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
신이 생각건대 형옥(刑獄)은 천하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니, 나라를 소유한 군주가 소중히 여길 일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서경(書經)》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중죄수는 5, 6일을 두고 깊이 생각하며 열흘이나 한 철에 이르러 중죄수를 크게 처결한다.’ 하였으니, 이는 죄수를 처결하는 기한이 짧으면 5, 6일이고 늦어도 열흘이나 한 철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옥사를 처결하는 기한이 큰 일은 30일이고 보통 일은 20일이고 작은 일은 10일이며, 사건이 서로 연관되어서 부득이 이 기한을 넘길 경우에는 반드시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게 하였으니, 고금(古今)의 제도를 참작해 보건대 죄수를 감옥에 오랫동안 가두어 두지 않으려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갇혀 있는 죄수 중에 한 해가 넘도록 감옥에 있으면서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자가 매우 많으니, 비록 이 가운데 혹 서로 연관성이 있어서 부득이 기한을 넘긴 자도 있을 것이나 또한 속히 처결할 수 있는데 처결하지 않은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고사(古事)에 형벌이 공정하여 감옥이 비면 법관이 상을 받는 법전이 있었으니, 옥사를 지체하여 처결하지 못한 자로 말하면 또한 경책(警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세히 물어서 밝게 살피소서.
신이 임술년(1682, 숙종8) 겨울에 입시(入侍)하여 계복(啓覆)하였는데, 그 당시 대신이 아뢰기를, ‘율문(律文)에 추분(秋分)이 지난 뒤부터 형을 시행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계복은 굳이 연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근간에는 매번 섣달에야 비로소 계복을 청하므로, 혹 사고로 인해 며칠이 지나면 곧 입춘(立春)에 이르러서 또 한 해를 넘기게 되어 옥사가 지체됩니다. 지금 이후로는 초겨울에 계복을 정해 시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임술년(1682, 숙종8) 이후로는 겨울마다 국가에 사고가 있어서 계복을 시행하지 않은 지가 지금 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살 수 있는 방도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감옥에 갇힌 자들이 있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도 지금까지 요행으로 면한 자들이 있으니, 상형(祥刑)으로 논해 본다면 그 잘못이 똑같습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혀서 두세 번 겨울을 나면 육신이 멀쩡한 사람도 오히려 병이 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죄의 여부를 논할 것도 없이 틀림없이 화기(和氣)를 손상시켰을 것입니다. 금년에는 삼가 바라건대 미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추분이 지난 뒤에 즉시 계복할 시기를 정하여 예전처럼 차질을 빚어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 가운데 조목조목 진술한 것이 진실로 매우 마땅하니 모두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겠다. 지금 이후로 법관 중에 죄인을 속히 처결할 수 있는데도 처결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중하게 논죄(論罪)할 것이다.”
하였다.
○ 4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공이 언로를 열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뜻에 거슬린 사람이 의망(擬望)에 낙점을 받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신과 같이 지위만 보전하는 자는 진실로 편하고 좋지만 군주와 정승이 모두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을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면 나라가 반드시 패망하는 데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렸다. 우상 이단하(李端夏)가 입대하여 김익훈(金益勳)을 등용할 것을 청하자,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좌상이 일찍이 이르기를, ‘오도일(吳道一) 등을 불러 등용하기 전에는 이 일을 먼저 말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 이해 봄에 칙사(勅使)가 연경(燕京)으로 돌아갈 때에 벌금으로 은 2만 냥을 낼 것을 의논하여 아뢰니, 조정에서는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등을 사은사(謝恩使)에 차임하였다. 4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국경을 나갈 것을 자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에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하여 마침내 공을 차임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부연사(赴燕使) 정재숭(鄭載嵩)에게 이르기를,
“좌상이 연경에 갈 때에 내가 잊고 의원을 보내지 않았다가 그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보냈는데, 지금까지 나는 이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윤4월에 상이 전교하기를,
“이번 좌의정이 연경에 갈 때에 어의는 약물을 가지고 따라 가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에 전교하기를,
“좌상이 연경으로 가는 행차가 마침 무더운 삼복(三伏) 때를 만나니, 내 이 때문에 염려스럽다. 어의는 약물 중에 더위 먹은 데에 치료하는 약제를 다량 마련하여 가지고 가도록 하라.”
하고, 다음 날 전교하기를,
“침의(鍼醫)도 따라 가도록 하라.”
하였다.
○ 처음에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三學士)가 척화(斥和)하다가 심양(瀋陽)에서 죽었는데, 효종(孝宗) 병신년(1656, 효종7)에 이르러 이들에게 부제학(副提學)을 추증하였다. 이해 6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의정부에서 서경(署經)한 시장(諡狀)을 보니, 송시영(宋時榮)이 강화도(江華島)에서 죽었다 하여 우참찬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주었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한 것은 비록 차이가 없으나 수립한 공로를 논하면 삼학사가 송시영보다 월등한데도 이들에게 당상관을 추증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으니, 실로 흠이 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참으로 옳다.”
하고는 마침내 정2품의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주었다.
○ 처음에 청나라 사람들이 금주(錦州)를 침략할 적에 우리나라에게 파병(派兵)을 요청하였다. 어영군(御營軍) 이사룡(李士龍)이 성주(星州)의 포수로서 종군하였는데, 번번이 헛방을 쏘다가 청나라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이사룡이 이르기를,
“중국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내 어찌 차마 부모를 저버리고 그 나라 사람을 죽이겠는가.”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협박을 가하였으나 이사룡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었다. 시신이 본주로 돌아오자, 인조(仁祖)가 성주 목사(星州牧使)에게 유시(諭示)하여 그의 묘소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공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 현종(顯宗)에게 아뢰기를,
“지금까지도 성주 사람들이 이사룡의 일을 언급하게 되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찮은 병졸로서 애당초 명성이 알려지기를 구한 것이 아니지만 국가에서 포상하는 도리로 볼 때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에는 청나라가 두렵고 오해를 받을까 싶어 필시 드러난 은전을 가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심양(瀋陽)에서 죽은 신하들이 모두 추가로 녹훈(錄勳)되었는데, 오직 이 멀리 떨어진 벽촌의 백성은 잊혀 사라지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해조에 특별히 명하여 적절한 표창과 추증을 가하고 그 자손들을 구휼하여 풍교(風敎)를 세우소서.”
하니, 조정에서 마침내 그 아들에게 만호(萬戶) 벼슬을 내렸다.
○ 공은 전후로 사신 갔다가 돌아올 때에 다만 책을 넣어 두는 농짝 하나만을 가지고 왔다. 고양(高陽)에서 유숙할 때에 편비(偏裨)가 아뢰기를,
“책을 넣어 두는 농짝이 비록 작으나 사람들이 혹 다른 물건이 있을까 의심하니, 닭이 울 때 먼저 들여보낼 것을 청합니다.”
하였으니, 이는 시속의 준례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찌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으나 그대로 그의 말을 따랐다.
○ 처음에 김공 만중(金公萬重)이 공에게 회천(懷川 송시열)과 일을 함께할 것을 권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나는 참으로 그럴 겨를이 없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우암(尤菴)은 매번 일을 할 때에 혹 온당치 못한 면이 있어서 사람들 가운데 가부를 말하며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훌쩍 멀리 떠나가서, 자신이 주장하여 경영한 일을 모두 버리고 떠나가는 모양이 마치 젖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한다. 그리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밖으로는 시작하기만 한다는 비난을 받게 하고 안으로는 정국을 수습할 걱정이 있게 하여, 자신은 항상 쉬운 데 처하고 조정은 항상 어려운 데 처하게 하니, 불가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공이 이 말을 회천에게 전하자, 회천이 불쾌해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정의 객인데 주인의 뜻이 저와 같으니 떠나갈 만하다.”
하였다.
○ 공이 정승이 된 지 몇 달 만에 삼공(三公)이 입대하였는데,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함께 전(前) 대사헌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죄를 아뢰고 다시는 현자를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두 정승은 평소 회천에게 압박을 당하였으나 공은 평소에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공에게 상의하지 않았고, 상도 공을 알았으므로 공에게 묻지 않았다. 공은 이 일에 참여하여 듣지 않았으므로 그 일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은 이달 회천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상일이 어지러워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고 허다한 곡절이 자꾸 생겨나서 새롭고 괴이한 일이 더욱 심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지금에 대처하는 방도는 혼자 울고 혼자 그치도록 내버려 두어 마치 물결 속의 갈매기가 물결과 함께 오르내리는 것처럼 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시비를 돌아보지 말고 일의 성패를 따지지 말고서, 눈을 크게 뜨고 담력을 키우며 할 말을 다하고 극진히 논하여 비록 이 때문에 분란이 더 생긴다 하더라도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상하 간에 주선해서 간곡히 미봉하여 행여나 사람들이 나의 충심(衷心)을 헤아려 주어서 천분의 한둘, 백분의 한둘이라도 해결되기를 바라야 합니까?
반복하여 헤아려 보아도 결단하여 떠나가지도 못하고 또 제대로 일을 하지도 못하여 장차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 될 것이니, 근심스럽고 경황없는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참판 박세채(朴世采)가 글을 지어 이르기를,
“스승에는 차등이 없으니, 군신 간처럼 복(服)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공의 문인인 최공 석정(崔公錫鼎)이 공에게 이것을 묻자, 공은 이르기를,
“결코 이 말을 따를 수 없다.”
하였다. 공은 평소 힘써 성의(誠意)를 다하였는데,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 단정한 태도로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고 지위를 벗어나 말하거나 남의 관직을 침해하지 않았다. 공이 국경을 나갈 적에 우상 정재숭(鄭載嵩)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수항이 공에게 묻기를,
“나라에서 정승을 논하게 되면 누구로 정해야 합니까?”
하니, 공은 이공 민서(李公敏敍)를 천거하며 말하기를,
연양(延陽)과 포저(浦渚)가 일찍이 인척으로 함께 정승에 올랐으니, 지금처럼 인물이 부족한 때에 어찌 우리 두 집안더러 인척을 사사로이 봐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상 또한 이공과 인척간이 되므로 지난해에 일찍이 이것을 어렵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논이 정해져서 다른 것은 따지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회천이 편지로 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천거하니, 영상은 감히 다시 논란하지 못하였다.
9월에 상이 복상(卜相)할 것을 명하자, 영상 김수항은 가복(加卜)하라는 명을 기다리지 않고 오직 회천의 말대로 이단하를 재상에 임명하였으니, 이는 회천의 형편이 매우 급하고 또한 두 이씨를 함께 올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나 또 이러한 이유를 공에게 말하지 않았다. 공은 돌아오자 국사를 어찌 할 수 없음을 알고는 자신이 제대로 주선하지 못해서 청나라에 벌금을 바치게 되었다 하여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12월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렸다. 다음 해 봄에 공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망녕되이 큰 임무를 맡아 위로는 국사를 그르치고 아래로는 제 자신을 욕되게 한 것이 또한 이미 많습니다. 신이 이에 그 일을 다 아뢰어 성상을 번거롭게 하고자 한다면 국가의 체통을 훼손하여 죄가 더욱 심해질 것이며, 그대로 겸연쩍게 감추어 스스로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한다면 실로 평소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니, 마음에 차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높이 계시면서 아무리 깊숙한 곳이라도 비추는 해와 달 같은 성상이시니, 또한 모두 다 굽어 살피실 것입니다.”
하였다.
○ 이보다 앞서 신유년(1681, 숙종7) 겨울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어떤 선비의 상소문으로 인하여 복주(覆奏)하니, 상이 마침내 충의위(忠義衛)에 모속(冒屬)한 자들을 사정(査正)하도록 명하였으나 한 철이 넘도록 시행되지 못하였다. 공이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을 때에 입대(入對)하여 충의위에 대한 사정을 거행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사정청(査正廳)을 설치하였다.
공은 이미 당상관으로서 사목(事目)을 정하였고 모속한 자들에게 자수하여 죄를 면할 길을 열어 주었으며, 모속한 자 및 적장(嫡長)과 문장(門長), 향소(鄕所)에서 이름을 잘못 적어 넣었는데도 자수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같은 죄로 처벌하되, 관직이 있거나 나이 70 이상이 된 자, 공의(功議)가 있음을 막론하고 모두 전가사변(全家徙邊)의 형률을 적용하기로 정하였다. 여러 당상관과 낭청이 이의가 없어서 임금께 계문하고 이것을 선시(宣示)하였는데, 이윽고 공이 정승이 되어서는 사정하는 일이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다. 대간(臺諫)들이 속히 완결할 것을 청하자, 공은 완녕군(完寧君) 이사명(李師命)을 당상관으로 차임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맡길 것을 청해서 한 달이 못 되어 사정을 마치니, 모속한 자가 1만 5000여 명이었다. 이해 6월에 빈청 인견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모속한 자들은 전가속포(全家贖布)의 벌을 시행하여야 하나 사람마다 무명 12필씩을 거둔다면 너무 많으니, 신의 생각에는 사정청으로 하여금 주호(主戶)를 초록(抄錄)하여 속포를 징수하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동의하여 재가를 얻었다. 공은 또다시 아뢰기를,
“충의위에 소속된 자들을 입번(入番)하여 군대를 만드는 규정은 이제 복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국조 이래로 공신에 책록(策錄)된 자는 수백 명에 불과한데, 수백 명의 자손이 이제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수만 명의 자손이 뒤에 모두 충의위에 소속되어서 장차 온 나라 백성이 한가롭게 노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나라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원래의 숫자가 이와 같이 많기 때문에 모속(冒屬)한 자들을 더욱 구별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비록 사정(査正)을 하더라도 후일의 폐단이 예전과 같아질 것이니,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왕의 자손은 효종 때로부터 법식을 정하여 6대 이후에는 일곱 가지 천역(賤役) 외에 모두 부역을 배정하게 하고, 공신의 자손은 우대하는 쪽으로 한계를 정하더라도 5대를 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은 2품 이상 및 삼사(三司)의 관원에게 명하여 빈청에 모여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훈(正勳)의 봉사손(奉祀孫) 외에 여러 자손이 충의위에 소속되는 것은 5대까지만 한정하고, 그 나머지 모속한 자들은 모두 군역을 배정하되 미처 군역을 배정하지 않은 자는 여정(餘丁)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데에 따르고, 계파(系派)가 희미하지만 그래도 의심스러운 자는 충훈부(忠勳府)에 맡겨서 조용히 다스려 처리하게 하였다. 이때 사간(司諫)으로 있던 조종저(趙宗著)가 아뢰기를,
“근일 사정 낭청의 집에 불을 지른 자가 있으니, 사정을 그만두어 백성들의 원망을 그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조정에서 이 상소문으로 인하여 이 일을 그만둔다면 국가의 체통과 위엄을 손상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니, 이후로 조정에서 어떻게 한 가지 일인들 나라 안에 시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령 사정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하더라도 이 말이 나온 뒤에는 결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공이 국경을 나가게 되자 간사한 백성들이 이 틈을 타서 이사명(李師命)으로 하여금 영상을 동요하게 하였다. 8월에 큰바람이 불고 기후가 갑자기 추워지며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자, 영상 김수항이 이 때문에 입대하여 아뢰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은 모속한 자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백성들의 원망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어 화기(和氣)를 유도하려 한다면 이 일을 변통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은 징수하는 속포(贖布)를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영상은 특별히 상의 교지를 중외에 반포할 것을 청하고 얼마 후에는 여정(餘丁)에게 징수하는 군포를 면제해 주었다. 뒤이어 또 모속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많으므로 충훈부에서 이것을 접수하여 처리하기가 어렵다 해서 모두 본관(本官) 수령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낭청들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11월에 공이 막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경유하는 곳의 수령들이 모두 아뢰기를,
“조정에서 사정청을 설치한 지가 5년이나 되어 국내의 문적(文籍)들을 다 모아다가 충훈부에서 고증하고 각 고을에서 조사하였습니다. 각 고을에서 알고 있는 허실은 사정청에서 조사할 때에 이미 모두 답한 것이니, 지금 어찌 다시 조사할 만한 자료가 있겠습니까. 또 당초 사목에 적장(嫡長)과 향소(鄕所) 등에게 모두 전가(全家)의 형률을 적용하기로 정했는데도 거리낌이 없이 모속하였다가 발각된 자가 이처럼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모두 죄를 용서해 주어 하나도 죄를 묻는 바가 없이 본관에게 맡겨 다시 조사하게 하니, 설령 사람들이 모두 그가 모속한 줄을 안다 하더라도 그 누가 기꺼이 원망을 사면서 증거를 내세워 사실대로 관청에 말하겠습니까. 조정에서 법대로 시행하기를 꺼리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수령 된 자 중에 그 누가 기꺼이 직접 일을 담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사세가 이와 같으므로 그 잔약함이 더욱 심하여 감히 관청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억울하다고 말하면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다시 분간(分揀)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간사함과 교활함을 조장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는 곤궁한 자들에게 원망을 사서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해 가을에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어 종전에 당연히 바쳐야 할 부역도 견감(蠲減)해 줄 것을 의논하고 있으니, 충의위에 모속하였다 하여 그 벌로 속포를 내게 한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함께 징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사하는 일을 다시 본관 수령에게 맡긴 것으로 말하면 이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만약 사정한 일이 분명치 못해서 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라면 전후에 일을 담당한 당상관과 낭청이 모두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낭청들에게 논공행상을 한 것은 또 무슨 공이 있어서입니까? 모속한 자들을 적발한 뒤에 원망과 비방이 크게 일어날 것은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이 일을 시작하여 이미 조사를 마쳤는데 다시 감면(減免)해 주는 절차를 밟으니, 근래 조정의 조처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어서 중외에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비록 많으나 이 일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또 이 일이 오랫동안 지체되어 이루어지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독촉하고 감독하여 사정이 끝날 때가 되자, 이제는 모두 신의 몸에 원망을 돌리고 선친(先親)을 꾸짖고 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불초한 신이 외람되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편안히 어루만지지 못하고 또 간사한 무리들을 징계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마음으로 고개를 들고 남을 마주하여 직무를 거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국가의 체통을 생각하고 또 연경에 갈 날짜가 임박하였으므로 억지로 참으면서 날짜를 보내다가 일을 끝내고 복명한 뒤에 물러나와 엎드려 허물을 반성하려 하였으니, 신의 심정과 형편이 어찌 다시 이 세상에 대한 의욕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먼저 신의 관직을 삭탈하여 나라를 욕보인 죄를 바로잡아서 타인의 경계로 삼으소서. 그리고 또한 전하께서도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시어 모든 명을 내리고 조처하실 때에 처음에는 신중히 택하고 뒤에는 굳게 지켜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형세를 부지하신다면 천만다행입니다.”
하였다. 이에 김 영상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 일은 가볍게 바꾸거나 고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은 본래 이와 같았는데, 지난가을에 변통한 것은 실로 일의 형세가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본관 수령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하고 낭청들에게 논공행상한 것으로 말하면 좌상(左相)이 올린 차자의 의논이 지극히 엄격하니, 신이 이에 대해 감히 할 말을 다하여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이미 분명하게 알고 정확히 보지 못하였고 또 그것을 견지하고 고수하지 못하여 국가의 체통이 전도되고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게 만든 것이 어찌 다만 이 한 가지 일뿐이겠습니까. 오늘날 백성들의 의논이 신을 질책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또 어찌 좌상의 말만 그러하겠습니까.”
하고, 다시 차자를 올리기를,
“좌상이 이미 이를 인혐(引嫌)하여 체직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은 좌상이 체직되기를 청한 것은 오로지 이 한 가지 일 때문만이 아니라고 답하였다.

59세 정묘년(1687, 숙종13)

3월에 마흔여섯 번째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서 영남과 관서 지방에 은(銀)을 채굴(採掘)하는 별장(別將)을 두어서는 안 됨을 논하여, 이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이달에 공이 쉰한 번째로 정사를 올리자, 상이 해임하도록 허락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7월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달에 제주(濟州)에서 바친 공마(貢馬)를 하사받았다.
8월에 명을 받들어 정릉(貞陵)을 봉심하였다. 이달에 인견할 적에 공은 호남 지방에 갑자년(1684)의 세입(稅入)을 남겨 두어 진휼하는 데 쓰게 한 것을 일체 탕감해 주고 병인년(1686)의 대동미(大同米)를 물려 다음 해에 납부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진주(晉州) 유황점(硫黃店)의 감독관을 조사하여 치죄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공은 명을 받들어 목릉(穆陵)을 봉심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강릉(康陵 명종(明宗)의 능)까지 대가(大駕)를 수행한 군병들이 한나절 동안 조련하였다 하여 시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어서 계속 시행하기 어려움을 간하자, 상은 네 군영(軍營)에 명해서 시재(試才)하여 시상하게 하였다.
9월에 신하들과 함께 지관(地官)들을 거느리고 명을 받들어 장릉(長陵)을 봉심하였다. 이달에 공은 김만중(金萬重)을 나문(拿問)함으로 인하여 유언비어를 전달한 자에게 자수하도록 한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10월에 명을 받들어 정릉(貞陵)을 봉심하였다. 이달 공릉(恭陵)에 불이 나자, 공은 명을 받들어 공릉을 봉심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간사한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폐단을 아뢰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사석(趙師錫)을 불러오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이 받아들였다. 식년시(式年試) 전시(殿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주강(晝講)할 적에 한태동(韓泰東)에게 장례 물품을 지급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은 이달에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다.

○ 처음 선조(宣祖) 임인년(1602, 선조35)에 호조에서 은(銀)을 채굴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이익의 근원이 한 번 열리면 폐단이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개 한 가지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한 가지 폐해를 제거하는 것만 못하니,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오랜 뒤에 여러 군문(軍門)과 감영(監營)에서 여러 도에 각각 연점(鉛店)을 두고는 이어 은을 채굴하였다. 지난해 경상 감사(慶尙監司) 서문중(徐文重)이 아뢰기를,
“도내의 연점에 군역을 피해 들어온 무뢰배들이 산골짝에 득실거려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남의 아내를 약탈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니, 단속하는 바가 있어야겠습니다.”
하였다. 이해 2월에 호조에서 이 문제를 묘당과 의논하여 보고하자, 별장(別將) 두 사람을 경상도와 평안도에 나누어 보내어 여러 은점의 감독관을 모두 파하고 별장으로 하여금 모두 통솔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은과 납〔鉛〕을 거두어 모두 호조에 바치게 한 다음 은은 호조에 남겨 두고 납은 각 아문에 나누어 주었다. 또 별장의 지위가 높지 못하다 하여 인부(印符)를 주조해서 주고 군현(郡縣)에 관문(關文)을 보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이때 막 마흔 번째 정사를 올리고는 호조 판서 이민서(李敏敍)를 맞이하여 이 일의 잘못에 대해 말하였다. 3월에 호조 판서가 입대하여 말을 꺼내자,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만약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있을 경우 다시 혁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니, 공이 마침내 차자를 올리기를,
“서문중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만약 이것을 우려한다면 각 군문과 각 영(營)에서 여러 도에 설치한 연점을 모두 계산해서 그대로 남겨 둘 숫자를 참작하여 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해야 할 것이며, 또 그대로 남겨 둔 연점에는 채굴꾼을 모집하는 숫자를 참작하여 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되, 이것을 정하여 장부를 만들어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백(道伯)과 수령들이 엄하게 단속하고 살피게 하여 더 설치하거나 더 모집하는 병폐가 없게 하고 혹여라도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전과 같이 지나치게 하는 경우가 있을 때 그 감독관을 죄줄 뿐만 아니라 먼저 그 군문(軍門)과 영문(營門)을 문책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면 서문중이 우려하는 폐단이 한 번의 호령으로 모두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지 않고, 이미 설치한 모든 연점을 줄이거나 혁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나아가 호조에까지 은을 올렸으며, 새로 차출한 별장은 엄연한 한 별성(別星)이니 권한과 임무의 중요함과 접대하는 데 따르는 번거로움이 또 일반적인 규례에 따른 사행(使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한 도를 마음대로 통제하고 혹 큰 이익을 독점한 채 종횡으로 오고 가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둔다면 이 어찌 지난날 각 아문에서 사사로이 보낸 감독관의 병폐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또 서문중이 장계로 아뢴 것은 본래 무뢰배들을 단속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여러 곳의 감독관을 일체 혁파하고 이것을 별장 한 사람의 손에 모두 맡겨서 여러 곳을 오고 가면서 겸하여 관장하게 한다면, 무뢰배들을 단속하는 방법에 있어 지난날 감독관이 각각 하나의 연점을 관장할 때보다 과연 더 나은 점이 있겠습니까. 또 지난날 감독관들이 비록 폐단이 있었으나 오히려 크게 방종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조정의 명령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별장은 바로 조정에서 임명하여 보낸 자로 인부를 가지고 있는 관원이니, 이후로는 은점(銀店)이 반드시 장차 날로 더욱 많이 설치되고 백성을 모집하는 것이 반드시 날로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무덤과 집이 반드시 장차 날로 더욱 파헤쳐지고 산의 재목과 숲이 반드시 장차 날로 더욱 베어져서 민둥산이 될 터인데, 이렇게 되더라도 수령들이 감히 따지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도백(道伯)인들 또한 어떻게 이들을 막고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에서 중시하는 것은 농사를 힘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다만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데에 있고 백성을 위하는 데에 있지 않다면 황무지를 개간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해서 세금을 거두는 것도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얻는 것입니다. 또 주군(州郡)의 수령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고 별도로 사명(使命)을 맡은 자를 보내어 마치 당(唐)나라의 권농 판관(勸農判官)이나 송(宋)나라의 균세사(均稅使)와 같이 한다면 명목은 비록 백성을 위한 일이라고 하나 모두 천하 사람들에게 비방을 듣고 후세에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납을 채굴하는 일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국가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지금 이 별장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익을 취하는 연수(淵藪)로 삼으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도(道)의 복성(福星)으로 삼으려는 것입니까? 만약 이러한 폐단을 논한다면 설령 이로 말미암아 억만의 은을 얻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현재 국가에서 크게 걱정해야 할 것은 백성들이 굶주리는데도 먹을 것이 없는 데에 있지 은화(銀貨)가 부족하고 적은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는 이때에 새로운 관원을 두고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서 마침내 은을 채굴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앞으로의 폐단은 굳이 논할 필요도 없으며, 다만 이 소문이 퍼지면 어찌 중외(中外)의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그 희망을 잃게 하지 않겠습니까.
또 모든 일은 처음에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 상의해서 모두 십분 옳고 마땅하다고 하더라도 끝에 과연 처음 계산했던 것과 같이 될지 기필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애당초 의심하면서 한 번 시험 삼아 해보는 것이 끝내 어찌 성공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지금 조정의 명령이 사방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며 국가의 기강이 날로 무너지는 데 이른 까닭은 오로지 정령(政令)과 조처가 금방 시행되다가 금방 중지되어 한 번도 굳게 정하여 오래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속담은 비록 예전부터 있어 왔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병조에 있을 때에 의심스러운 일은 절대로 가볍게 시작하지 말고 이루어진 일은 절대로 가볍게 고치지 말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혹 이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 만약 이 일을 기필코 시행해야 하고 의심할 것이 없다고 확신하신다면 신의 어리석고 망녕된 말을 진실로 채택할 것이 없습니다만 만일 뒤에 폐단이 있을 경우 다시 혁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더더욱 이것을 가볍게 시행해서 초기에는 백성들의 원망을 부르고 뒤에는 백성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여 끝내 실제의 일에 유익함이 없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 태종(太宗) 때에 시어사(侍御史)인 권만기(權萬紀)가 상언(上言)하기를, ‘선주(宣州)와 요주(饒州) 두 주에서 은이 많이 나오니, 이것을 채굴하면 해마다 수백만 냥의 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태종은 당일로 권만기를 퇴출하였습니다. 태종의 뜻은 진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이익을 언급하는 길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태종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옛날 성왕(聖王)이겠습니까.
오랑캐인 원(元)나라 말기에 여러 곳의 도적 떼들이 대부분 금과 은을 주조하는 곳에서 나왔으니, 이는 실로 서문중(徐文重)이 우려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혁파하여 금지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더 증익하고 확대해서 마치 갈대를 묶고 기름을 부어서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명(明)나라 말기에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어 도적들이 떼 지어 일어나서 그칠 줄 몰랐던 것은 실로 은광(銀礦)의 세금에 연유한 것입니다. 만력황제(萬曆皇帝)가 환후(患候) 중일 때에 유조(遺詔)를 내리려 하였는데, 각신(閣臣)이 은광의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자,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환후가 낫자 그대로 전처럼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쓰러져서 국운이 뒤따라 기울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천하와 후세의 사람들이 탄식하고 통한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 은을 채굴하는 것을 명목으로 삼는 자들은 모두 오훼(烏喙)와 짐독(鴆毒)처럼 여기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더구나 잘못을 본받아서 다시 지난날의 전철(前轍)을 되풀이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일이 만일 시행된다면 후일의 폐단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제 그 대략을 이와 같이 간략히 아뢰는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여 살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묘당에 명하여 충분히 강론하게 하였다. 여러 날 뒤에 영상 김수항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신은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좌상의 차자가 엄정합니다.”
하여 마침내 별장을 두는 일을 혁파하였다. 4월에 호조 판서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대전》에 사사로이 은을 채굴한 자에 대한 죄가 교형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은을 채굴한 것을 알면서도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면 이는 은을 사사로이 채굴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니, 별장을 두는 일을 혁파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마땅히 본관으로 하여금 세금을 거두는 것을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그리하여 감독관을 혁파하고 호조에 모두 바치게 한 다음 은은 호조에 남겨 두고 납은 각 아문에 나누어 주는 것을 모두 예전의 의논대로 하였는데, 경상 감사 박태손(朴泰遜)이 그 불편함을 아뢰었다. 9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납을 채굴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사로이 은을 채굴하는 일만을 금하였는데, 조총(鳥銃)이 생긴 이후로는 납으로 만든 탄환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납과 은은 똑같이 한 곳에서 나오니, 어찌 납만 채굴하고 은을 채굴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조종조의 법문(法文)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서문중은 본래 군사들을 모집하여 널리 모으는 폐단을 금하려 하였는데, 이제 이미 납에 대한 세금을 거두고 또다시 은에 대한 세금을 거둔다면 모집하는 채굴꾼의 수가 반드시 지난날보다 곱절이나 다섯 곱절이 되고 나서야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당초의 뜻과 서로 크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대체(大體)를 가지고 논하건대 각 도에 은세(銀稅)를 거두는 법을 결코 오늘로부터 창시할 수 없으니, 신은 결단코 시행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시작하고 나서 만일 불편한 일이 생길 경우 애당초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니, 우선 정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7월에 공이 김수항(金壽恒)을 대신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8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아뢰기를,
“호남 지방은 연이어 흉년을 만나서 갑자년(1684, 숙종10)에 백성들이 납입할 세곡을 전량 남겨 두어 진휼하는 데 쓰게 하였고 병인년(1686)에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금년에 와서는 3년 치를 한꺼번에 모두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백성들이 수년 동안 거두지 못한 것을 한꺼번에 거두어들일까 미리 두려워하여 금년에 비록 흉년을 면하였으나 전혀 생업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니, 3년 치를 끝내 다 거둘 수 없고 백성으로 하여금 시름하고 원망하게 할 뿐입니다. 갑자년 치는 일체 탕감해 주고, 병인년 치는 전세(田稅) 이외에는 다음 해를 기다리며, 대동미도 뒤로 물려서 납입하게 한다면 다소나마 백성의 힘을 덜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 처음에 진주(晉州)의 지리산(智異山) 아래에서 유황(硫黃)이 나오니, 나라 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수어청(守禦廳)이 감독관을 차임하여 산 아래에 유황점(硫黃店)을 설치하고는 반드시 성공시키고자 해서 동해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세금을 절급(折給)해 주고 낙동강에서 곡식을 운반하는 배를 만들어 주었으며, 철물장점(鐵物匠店)과 병항장점(甁缸匠店)을 점유하도록 허락한 다음 철물을 무수히 바치게 하고 병 7000여 개와 항아리 8000여 개를 해마다 바치게 하였다. 온 산에 세금을 거두고 10개 사찰의 승려들을 전원 부역시키되 이익을 많이 취하고 품삯을 적게 주었으며, 여러 고을에서 군사들을 모집하되 또한 자기들 마음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백성을 소유해서 엄연히 하나의 군읍(郡邑)을 이루었으며, 해마다 유황 2000근을 나라에 바치게 한 것이 수십 년이었다. 비변사가 진주 목사(晉州牧使)의 상소로 인하여 본도에서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달에 인견할 적에 공이 전후의 감독관을 형조로 잡아다가 엄중히 조사하여 죄목을 정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해(南海)에 귀양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리산 아래를 지나오는데,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사이에 나무가 모두 없어져서 마치 소와 말의 가죽을 벗겨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놀라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이르기를, ‘유황 감독관이 온 산을 독점하여 유황을 구울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백성들을 침탈하여 한 치, 한 푼의 이익조차도 모두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민간의 벌통에도 전량 세금을 거두어서 황랍(黃蠟)을 별도로 구비한 것이 혹 천 근, 만 근이나 됩니다. 그리하여 전후의 감독관들이 당상관인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마를 찌푸리고 슬퍼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건대 이들을 독사와 사나운 호랑이보다 더 두려워하니, 이번에 감독관을 조사하여 다스릴 때에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황점을 비록 영원히 없앨 수는 없으나 절목을 헤아려 줄여서 수어청과 해도(該道)에 분부하여 번잡한 것을 엄금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수일이 지난 뒤에 공이 비변사에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은 국내에서 유황이 곳곳마다 생산되어 각 군문(軍門)에서 편리한 대로 채취하고 있으니, 굳이 수어청에서 이와 같이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산성을 수비함에 있어 유황이 가장 긴요하다고는 하나, 해마다 비축하여 재고(在庫)가 몇 만 근인지 알지 못할 정도이니, 또한 한없이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다른 군문의 예(例)에 따라 채굴하는 군사를 모집하되 100명으로 제한하여 능력대로 골라서 쓰고, 감독관도 굳이 장기간 체류하면서 채굴꾼을 모집하여 유황을 채취하는 것 이외에 음식을 제공하고 책응(責應)하는 폐단을 가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황을 구울 때에 철물(鐵物)과 병, 항아리가 없어서는 안 되나 지나치게 징수하는 정황이 더더욱 놀라우니, 철물장(鐵物匠) 1점(店)과 병항장(甁缸匠) 1점을 또한 떼어 주되 명수(名數)를 제한하여 본도에서 헤아려 지급하게 하고, 이 외에 동해에 정박하는 배의 세금과 낙동강의 배와 토지와 승려들을 동원하는 일을 일체 모두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이달에 상이 강릉(康陵)을 배알하고 돌아오다가 사한리(沙閑里)의 교장(敎場)에서 열무(閱武)하였는데, 여러 군문에 명하여 군병들에게 상을 내리게 하고, 또 이후로는 준례로 삼지 말 것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군병에 대한 시상은 넉넉하게 해야 하나 또한 명분과 절도가 없어 계속 시행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20리를 가는 사이에 대가(大駕)를 수행한 것과 한나절 동안 조련한 것은 본래 말할 만한 공로가 못 되니, 쇠고기와 술로 호궤(犒饋)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기거동작의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무예(武藝)의 능하고 서투름을 논하지도 않고서 여러 군영마다 써 올린 이름대로 은상(恩賞)을 뒤섞어 내리니, 이대로 미루어 나간다면 봄 사냥과 가을 사냥을 할 때에는 어떻게 계속해서 상을 내릴 수가 있겠으며, 적진을 함락하고 적군을 목 베었을 때에는 어떻게 상을 더 올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여러 청(廳)의 군수(軍需)는 비록 본래 저축된 것이 있으나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경비는 모두 호조에서 나옵니다. 무릇 창고에 있는 한 올의 실과 한 톨의 쌀이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설령 다소 여분이 있다 하더라도 더더욱 아껴 쓰고 절약해서 부역을 면제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여러 청과 호조가 모두 재정이 부족함을 걱정하고 있으며, 농사가 흉년이 들고 목화(木花)가 더욱 흉작이어서 앞으로의 일이 크게 우려할 만한 경우에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나치게 상을 내리는 폐단은 후일에 실로 계속 시행하기 어려우며, 만일 계속해서 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도리어 군사들의 실망을 불러올 것입니다. 옛날 훌륭한 제왕들이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을 아끼며 해진 바지라도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내려 주지 않고 아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다시 헤아리시고 여러 군문(軍門)에 명해서 넉넉히 호궤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뜻을 보이시고, 시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군주가 명령을 내는 것은 한때의 득실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곧 후일의 규례가 되는데, 전하께서 이 일이 만약 후일에 규례로 삼기 어려움을 아셨다면 지금에도 시행할 수 없는 것이며, 지금에 시행할 수 있다면 후일에 이어서 규례로 삼는 것을 또한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천반(川班)의 전직(殿直)이 전례를 끌어다 대며 소원을 청하자 40여 명을 참수하여 군정(軍政)을 엄하게 하였고, 당(唐)나라 장종(莊宗)은 가까운 교외에 나갈 때마다 금병(禁兵)과 호위하는 군졸들에게 상을 절도 없이 내려서 위엄과 명령이 행해지지 못하여 자신은 죽고 나라를 잃었으니, 이는 실로 제왕의 귀감(龜鑑)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깊이 살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네 군영에 시재(試才)하여 시상하도록 명하였다.
○ 이때에 상이 왕세자가 없었다. 지난해 겨울에 교생(校生) 방숙제(方叔齊)가 장릉(長陵)을 옮겨야 한다고 아뢰자, 상은 우선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이해 8월에 전(前)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허빈(許彬)이 다시 아뢰자, 상이 마침내 비망기를 내리기를,
“능침(陵寢)의 사체(事體)는 매우 중차대하니, 널리 묻고 널리 의논하여 세밀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임 대신이 육경(六卿),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삼사(三司)의 장관(長官), 도승지와 함께 경외(京外)의 술업(術業)에 정통한 지관(地官)을 많이 데리고 장릉에 나아가 봉심한 뒤에 품처하라.”
하였다. 공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육경이 모두 나아가는 것은 너무 번거롭고, 병조 판서 이사명(李師命)과 형조 판서 서문중(徐文重)은 또 대장의 임무를 겸임하였으니, 능을 살펴보는 일을 의당 정지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공이 또 지관들로 하여금 술서(術書)를 모두 가지고 가서 산론(山論)을 증명하게 하고 혹 제멋대로 근거 없이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9월에 공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장릉에 갔다가 다음 날 복명하였다. 공이 지관과 경주 부윤(慶州府尹) 신경윤(愼景尹) 등 13명의 산론을 아뢰고 이어 산도(山圖)를 올리자, 상이 이르기를,
“산론에 대부분 길지(吉地)라고 칭하였으며, 비록 혹 조금 미진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이 때문에 능을 옮기는 일을 가볍게 의논하겠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방숙제와 허빈은 이미 상소한 자이니, 그들의 말이 이와 같이 좋지 않다 함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사명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지관들이 영상 남구만의 뜻에 맞추느라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다.”
하였다. 혹자가 공에게 이르기를,
“다시 모여서 의논할 것을 청해야 합니다.”
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내 진실로 마음속으로 옳지 않다고 여기니, 능을 옮기자는 의견은 결코 찬성할 수가 없다. 더구나 성상의 분부가 매우 좋으시므로 내 이미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고자 하니, 어찌 다시 청하여 비방을 면하고자 하겠는가.”
하였다. 다음 날 신경윤이 뒤에 이것을 논하여 올린 상소가 있어 비변사에 내리자, 공이 마침내 재신들 및 신경윤 등과 함께 비변사에 모여서 의논하여 아뢰니, 상이 옮기지 말라고 거듭 명하였다. 공이 청대하여 판중추부사 이상진(李尙眞)과 뒤늦게 온 지관들과 함께 봉심할 것을 청하였다. 출발에 앞서 이상(李相 이상진)이 김수흥(金壽興), 정지화(鄭知和) 두 정승과 함께 갈 것을 청하였으며, 뒤늦게 온 지관 7명도 수행하였다. 복명하여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신은 풍수설에 대해 본래 어두워 잘 알지 못하나 국조 이래로 능을 옮긴 것이 다섯 번인데, 장릉(章陵) 이외에는 모두 재앙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반 여염집에서도 햇수가 오래된 묘를 이장하는 일은 가볍게 거행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나라의 능이겠는가. 대신이 아뢴 말이 실로 나의 뜻에 부합한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장릉(長陵)이 다소 문제가 있다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으며, 지금 왕세자가 오랫동안 없는 것을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장릉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니, 공이 아뢰기를,
“다시 의논하여 판하(判下)하신 것이 십분 명백하니 중론(衆論)을 진정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대신들과 함께 다시 나아가 봉심할 것을 청하였고 이상진도 흠이 있다고 이르니, 경외(京外)의 여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게 하고 2품 이상의 관원을 모아 의논하게 할 것을 청합니다.”
하자,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이윽고 또다시 삼사(三司)의 관원까지 일체 와서 모일 것을 청하여 마침내 빈청에서 회의할 적에 정지화 등 10명은 능을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이사명 등 11명은 옮겨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조 판서 여성제(呂聖齊) 등 6명은 양쪽을 다 지지하였다.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은 집에 있으면서 의논을 올리기를,
“혹 흠이 있을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고, 송시열(宋時烈) 등 지방에 있는 대신 3명은 양쪽을 다 지지하니, 집의 강현(姜鋧)이 상이 친히 봉심할 것을 청하였다. 10월에 공이 대가(大駕)를 따라갈 적에 지관 20명에게 명하여 각각 소견을 따라 동서로 나누어 서게 하였다. 이때 신경윤은 중간에 서서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재촉을 당한 뒤에야 능을 옮겨야 한다는 쪽에 섰다. 대가가 돌아온 지 3일 만에 상이 인견하여 이르기를,
“50년 된 능침(陵寢)을 사소한 흠 때문에 풍수(風水)의 말을 믿고 가볍게 옮길 수 없다.”
하였다. 당시 포의(布衣)로 있던 허정(許)이 “한양(漢陽)은 장차 300년의 운기(運氣)가 다하려 합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일이 있는데, 상이 그 상소를 꺼내 보이고 이르기를,
“죄가 국문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 사람의 일은 드러난 행적이 없고 망녕되이 도참설(圖讖說)을 일컬었으니, 만약 죄줄 만하다고 여긴다면 죄가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는 것이 조정의 대체에 합당하니, 어찌 굳이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지난해 봄에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생각건대 조종조에서 반드시 후궁(後宮)을 간택한 것은 왕자를 많이 두기 위해서이다. 지금 숙의(淑儀)가 미비하므로 내전(內殿)에서 일찍이 이러한 뜻으로 누누이 간청하였으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문의하게 하라.”
하였다. 공이 의논을 올리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화복(禍福)의 단서가 혹 빈어(嬪御)를 많이 두는 데에 달려 있었으나 상천(上天)과 조종(朝宗)이 묵묵히 도우시어 왕세자의 탄생을 행여 기대할 수 있으니, 깊이 생각하고 대처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상진(李尙眞)은 공의 의견과 같았고 다른 정승들은 모두 양쪽을 다 지지하였다.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은밀히 공에게 이르기를,
“상께서 총애하는 궁인(宮人)인 장씨(張氏)가 있다.”
하였다. 이해 여름에 숙의(淑儀) 김씨(金氏)가 입궁하였는데, 그해 가을에 교리 이징명(李徵明)이 아뢰기를,
“후궁 중에 또 군주가 가까이 총애하는 이가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은 전하는 말이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였다. 대사성 김창협(金昌協)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여항에 떠도는 소문이 파다하여 모두들 궁중에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니, 만약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가 있고 편애한다는 비난이 없다면 이 또한 성상의 덕에 무슨 누가 되기에 굳이 그 일을 숨기십니까.”
하였다. 이해 겨울에 상이 마침내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삼으니,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가 이를 아뢰자, 상이 노여워하여 이르기를,
“궁중의 말을 밖에 전하여 선동하니, 차후에 만약 전파하면 효시(梟示)하겠다.”
하였다. 이때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장씨 편을 들어 특별히 총애를 받았다. 병조 판서 이사명(李師命)이 근습(近習)으로 발신하고 권력을 탐하여 유언비어를 만들어냈으며, 여러 재신 중에 상이 의지하여 장수와 정승으로 삼고자 하는 자를 보면 그때마다 먼저 부정한 방법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어 저지하곤 하였다. 이해 5월에 영상 김수항이 우상 이단하(李端夏)와 함께 명령을 받아 복상(卜相)할 적에 상이 가복(加卜)할 것을 명하므로 이숙(李䎘)을 뽑았는데, 상이 또다시 가복할 것을 명하므로 이민서(李敏敍)를 뽑았고, 상이 또다시 가복할 것을 명하므로 신정(申晸)과 여성제(呂聖齊)를 뽑았다. 상이 또다시 가복할 것을 명하자, 김수항 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식견이 어둡고 미혹하여 가복이 네 번에 이르렀으니, 너무나도 황공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석(趙師錫)의 덕망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상의하여 의망해 들이라.”
하니, 김수항 등이 부득이 명령대로 따랐다. 부교리 민진주(閔鎭周)가 상소하기를,
“임금의 임무는 정승을 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대신의 직책은 오직 어진 이를 천거하는 데에 있습니다. 영상과 좌상 두 정승이 성상의 뜻이 촉망하는 바에 현혹되어 처음에는 반열을 따라 품계를 따지는 듯하다가 끝에는 품명(稟命)하여 재가를 받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금구(金甌)에 거명한 사람의 숫자가 양전(兩銓)의 장관을 의망하는 것보다 더 많아 경재(卿宰)를 손꼽아 보니 남는 자가 거의 없어서 길거리에서 근거 없이 떠드는 자들로 하여금 이러쿵저러쿵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지금 정승으로 세운 현자가 세상의 명망에 어긋나지 않으나 만일 후세에 간신을 등용하는 군주가 오늘날을 구실로 삼아서 자기 마음대로 정승을 임명하고 신하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의 폐해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경박함을 책망하였다. 6월에 대사헌 이수언(李秀彦)이 다시 이를 말하였다. 이달에 이조에서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에 첫 번째로 의망하자, 상이 특별히 동평군 이항(李杭)을 제수하였다. 이는 근고(近古) 이래로 종친으로서는 사례가 없었던 일이므로 이조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에서 환수할 것을 청하자, 의빈(儀賓)도 일찍이 내의원 제조를 겸한 일이 있다고 답하였다. 7월에 좌상 이단하가, 우상 조사석이 스무 번째 사직소를 올렸다 하여 해임을 허락하고 다시 임명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상이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은 전교하기를,
“민진주와 이수언 외에 필시 다시 경박한 의논이 있는 듯하니 모름지기 분명히 말하라.”
하고는 승지를 보내어 세 번 묻고 이어서 김수항과 조사석의 해임을 허락하였다. 8월에 사간원에서 동평군 이항의 일을 갑자기 정계(停啓)할 것을 아뢰고 즉시 공론에 따라 인혐하였는데, 상은 이날 이단하의 해임을 허락하고 마침내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상벌(賞罰)과 출척(黜陟)은 군주의 큰 권한인데, 한 번이라도 그 권위가 흔들리거나 권한을 빼앗긴다면 군주가 장차 수족을 어디에 두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정승을 신중히 선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지난해 가을의 일을 살펴보면 반드시 신중히 선발하려는 뜻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금년 여름에 과연 여러 차례 가복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또한 처음에 가복한 사람을 합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서가 아니고,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였다.”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온당치 못한 전교를 고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대체로 군주가 신하를 대할 적에 공과 죄를 따져서 등용하고 물리치되 모두 마음을 너그럽게 해서 자세히 연구하고 차분히 살펴야 하고 털끝만큼이라도 혹 편벽됨이 있어서는 안 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우로(雨露)와 같은 은혜와 상설(霜雪)과 같은 위엄이 모두 교화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은 선왕조의 유명(遺命)을 받은 신하로서 세상에 드문 전하의 대우를 받아 국정을 맡은 지가 지금 8년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세상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사실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판중추부사 이단하를 정승으로 임명하신 것은 단지 아래에서 추천해 의망(擬望)했을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이미 여러 해 동안 그에게 임무를 맡겨 그의 인품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사간원의 신하들이 정계(停啓)하고 피혐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두 신하의 일에까지 미치었는데 성상께서 헤아려 용서해 주지 않으시니, 실로 끝내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꽉 막힌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풀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가을의 일은 결코 신중히 선발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지척에서 면대할 때 했던 구차(久次)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잘못되었으니, 내 마음이 항상 평정되지 못하여 잠시도 느긋한 적이 없다. 또 지친(至親) 간에 만일 잘못이 있으면 마음속에 감춰 두고 참은 적이 없는바, 외면의 가식은 본래 내가 배운 것이 아니니, 실로 갑자기 바꾸기가 어렵다.”
하였다.
○ 9월에 지경연사(知經筵事) 김만중(金萬重)이 김수항을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할 적에 이르기를,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상소문 때문입니다.”
하고, 이어 여항(閭巷)에 떠도는 말을 아뢰기를,
“조사석이 장씨의 모친과 매우 친하기 때문에 특별히 정승에 제수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 말의 출처는 반드시 하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또한 향곡(鄕曲)에서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하고는 김만중을 나문(拿問)하라고 명하고, 또 말을 전한 자는 자수하라고 명하였다. 다음 날 공이 장릉(長陵)을 봉심하는 일로 청대할 적에 인하여 아뢰기를,
“터무니없는 말의 출처는 반드시 무도(無道)한 사람들일 것이니, 어찌 자수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평상시에는 작은 일이라도 매번 체통이 무너진다고 말했었는데, 이번 일은 대신 조사석이 불안해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청탁을 받고 정승을 세웠다는 말을 군상(君上)에게 가하는데도 경악할 줄을 모르니, 이것이 옳은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김만중이 ‘문왕(文王)의 〈관저(關雎)〉의 세상에는 이러한 말이 없었을 듯하다.’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순(舜) 임금은 참소하는 말이 횡행하여 훌륭한 행실을 해치고 끊는 것을 미워하셨으니, 성인의 포용하는 도량으로 볼 때 이러한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힘쓰셨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자수하는 일은 김만중의 일과는 더욱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말의 출처를 어떻게 조사하여 알아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설혹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내어 살육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그 후에 어찌 분분한 말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겠습니까. 상께서 반드시 황극을 세우시어〔建用皇極〕 모든 일을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끝내 자수하지 않을 리가 없을 듯하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상께서 일시적인 분노로 인하여 끝내 정도를 넘는 방향으로 가고 계시기에 염려되어 아뢰는 것이지, 신이 어찌 감히 그런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듣고도 경악하지 않고 굽혀서 비호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경이 경악하지 않는다 하여 그러는 것이겠는가. 진달한 바가 이에 이르니, 자수하라는 비망기를 환수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마침내 김만중을 멀리 유배 보냈다. 다음 날 빈청 인견할 때에 상이 이르기를,
“내 마땅히 처음부터 설명해야겠다. 내가 대왕대비전에 항상 문안하고 혹 거른 적이 없는데, 5월 초하루에 복상(卜相)하는 일로 문안이 약간 늦었다. 여러 공주들이 문안차 내전에 들어왔다가 영상과 우상이 청대한다는 말을 듣고 숙명공주(淑明公主)가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묻기에, 공주가 바깥 조정에 관한 일을 알고자 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나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또다시 ‘누가 정승이 되겠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나왔다. 낙점한 뒤에 대왕대비전에 나가자, 숙명공주가 또다시 ‘어떤 사람이 과연 정승이 되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내가 ‘조 아무개가 되었다.’ 하고 말했더니, 숙명공주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고, 숙안공주(淑安公主)도 말하기를, ‘조 아무개가 과연 좋은 명정(銘旌)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도리로 헤아려 보건대 공주들이 어찌 차마 이러한 말을 대왕대비전 앞에서 한단 말인가.
무릇 내전에 일이 있을 때에 공주가 들어와서 위로하는 것이 규례이므로, 지난번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의 상(喪)에 상궁(尙宮)이 아래에서 기별하자 숙휘공주(淑徽公主)가 즉시 내전에 들어왔는데, 숙명공주가 뒤늦게 와서 발끈하여 이르기를, ‘성상께서 들어오라는 하교가 없으시면 마땅히 들어오지 않아야 할 듯하나 상궁이 기별하였으므로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는 음성과 기색이 매우 사납고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비록 고모와 조카 사이라 해도 일반인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어찌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단 말인가. 예로부터 조신(朝臣)이 내관(內官)과 결탁하고 궁가(宮家)에서 나인(內人)과 내통하는 것을 모두 경계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날 내가 효시하겠다는 뜻으로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거듭 금령을 밝혔던 것인데, 이로 인해 공주들이 크게 유감스러워하여 스스로 의심을 살 만한 단서를 자초하였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규문(閨門) 안의 다스림은 은혜로써 의(義)를 덮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의 동기간은 오직 공주 몇 분만이 계신데 성상의 하교가 이러한 데에 이르시니,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공주를 예우하여 일찍이 조금도 소홀한 적이 없었는데, 공주들은 나에게 유감을 풀려고 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지금 경(卿)은 변고라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은혜로써 의를 덮는다는 말을 하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하고, 또 이르기를,
“안으로는 지친에게 모욕을 받고 밖으로는 신하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이 자리에 있겠는가?”
하였는데, 어조(語調)가 매우 엄하여 용상(龍牀)이 진동하였다. 호조 판서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신하가 임금에게 경계의 말씀을 올릴 때에 매번 궁금(宮禁)을 엄격히 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번에 공주의 일은 지극히 놀랍습니다만, 옛사람이 이르기를,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혜와 의리를 돈독히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붕당을 나누어 대치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한쪽에서는 또다시 셋으로 나뉘었다. 지금 김만중은 자기 당파를 비호하기에 급급하여 군부(君父)를 깔보았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상께서 단지 붕당을 미워하고 일의 옳고 그름을 규명하지 않으신다면 그 폐해가 더 클 것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의 유소(遺疏)에 조정 신하들의 사사로운 붕당의 폐해를 아뢰었는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이준경이 죽으려 할 적에 올린 말이 나빴다.’라고 하였으니, 이이의 말이 비록 지나친 듯하나 식자들이 그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격분한 바가 있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어찌 반드시 모든 사람을 다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판돈녕부사 조사석(趙師錫)이 교외로 나가 있었다. 10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조사석이 모함을 받고 교외로 나가 있는 것은 진실로 부득이해서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만약 끝내 불러오지 않으신다면 이후로 의지하고 신임하는 신하가 한 번 간사한 자에게 미움받기만 하면 모두 유언비어 때문에 쫓겨날 것이니, 후일의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게 여겨 다음 해 봄에 불러서 좌상으로 임명하였다.
○ 이달에 주강(晝講)에 입시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곤궁함을 굳게 지킨 전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의 청백한 절개는 실로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데, 견책을 받은 이후로 물러가 지방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거두어 등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또한 감히 벼슬하지 못하다가 청빈(淸貧)이 골수에 사무쳐 마침내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여 병들어 죽었으니, 진실로 매우 측은합니다. 청백한 사람을 표창하는 것은 본래 국가에 떳떳한 법전이 있으나 한태동은 죽은 뒤에 장례 물품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비록 일찍이 시종관(侍從官)을 지냈으므로 이미 법식에 따른 부의(賻儀)가 있기는 하지만 장례 물품을 특별히 지급하여 우대하는 뜻을 보이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공은 또다시 아뢰기를,
“국가가 훌륭한 국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오직 과거(科擧)뿐이어서 그 관문이 너무 좁고 또 과거 급제자 중에 오직 명문 귀족만을 등용하기 때문에 인재가 적다는 한탄이 날로 심해지는 것입니다. 더욱 한탄스러운 것은 지금 과거를 거친 명문으로서 당상관을 지낸 자는 이여(李畬), 임영(林泳), 오도일(吳道一), 서종태(徐宗泰), 김창협(金昌協) 등이 있는데, 이들은 문장의 재주와 명망이 한 시대의 최고로 뽑혔으나 혹은 외직으로 나가 있기도 하고 혹은 파직되거나 한산직에 있어서 모두 진강(進講)하는 대열과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외직에 있는 자는 모두 불러서 등용하도록 명하시고 파직되거나 한산직에 있는 자는 거두어 서용하며, 사직하고 오지 않는 자는 돈독히 권면하여 올라오게 하시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하고, 이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인재를 수습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정치하는 방도는 언로(言路)를 넓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아직 언로가 열리지 않고 있어 참으로 오늘날 조정의 큰 병폐가 되고 있습니다. 옛날 제왕(帝王)의 일은 시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갑자기 다 열거할 수가 없고, 다만 신이 섬겼던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두 조정의 일을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효종대왕이 장릉(章陵)을 배알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노량(露梁)에서 열무(閱武)하였는데, 정언 이상진(李尙眞)이 간하기를, ‘능을 배알하는 행차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재계해야 할 때에 말을 달려 무용(武勇)을 자랑하는 것은 선조를 추모하는 성상의 효심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자, 효종께서 그의 말이 간절하고 정직함을 장려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사간 유철(兪㯙)이 정사를 언급할 적에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관련되자, 성상께서 크게 진노하여 의금부에 하옥하여 형추(刑推)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대간(臺諫)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잠잠히 있었으나 사간 윤집(尹鏶)만이 홀로 예대(詣臺)하여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다음 날 효종께서 하교하시기를, ‘윤집이 홀로 아뢰었으니, 과감하게 말하는 기절이 숭상할 만하다.’ 하시고는 즉시 승지에 발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의관(醫官)의 품계를 높여 주고 녹봉을 주는 일을 병조에서 즉시 거행하지 않자, 병조의 아전을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잡아다가 엄하게 곤장을 쳐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유신(儒臣) 송준길(宋浚吉)이 온당치 못함을 지극히 아뢰자, 효종이 마침 병환이 있어 침상에 누워 계시다가 송준길의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앉으시며 말씀하기를, ‘경이 지방으로 나간 탓으로 나로 하여금 잘못하는 일이 있게 하였다.’ 하시고는 내시를 돌아보고 명하여 어공(御供)의 납약(臘藥)을 가지고 가서 병조의 아전을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남을 따르는 효종의 아름다운 위의는 애당초 잘못된 조처가 없었던 것보다도 더욱 빛이 났으니, 그 성대한 덕(德)과 지극한 선(善)을 돌아가신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것은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종대왕 때에 이단상(李端相)이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의 일을 아뢰다가 또한 성체(聖體)에 관련된, 지극히 과격한 말을 하였는데도 현종께서는 죄를 가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말과 안장을 주어 칭찬하셨습니다. 두 조정에서 간언하는 자들을 우대하고 용납하는 것이 이와 같았는데, 지금은 오직 말을 하다가 죄를 얻었다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언로가 점점 막히면 성덕(聖德)에 누가 되고 치도(治道)가 쇠퇴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신은 참으로 이를 민망히 여기고 참으로 서글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간곡한 진달을 내 매우 가상히 여기니, 마땅히 유념하여 체행하겠다.”
하였다.


 

[주D-001]4월 : 대본에는 ‘四日’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日’을 ‘月’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주뢰(周牢) : 주리의 원말로, 죄인을 신문할 때 두 발목을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서 비트는 형벌을 이른다.
[주D-003]본도에서 조사하였다 : 대본에는 ‘本道査聞’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聞’을 ‘問’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봉명(奉命)한 신하 : 군주의 명령을 받고 직무를 수행하는 신하로, 지방관과 사신(使臣), 기타 어떠한 지역을 조사하거나 어떠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하여 나간 관리를 이른다.
[주D-005]상명(償命) : 피살자의 죽음에 대하여 살인자의 목숨으로 갚는 것을 이르는바, 곧 살인죄로 상대방을 무고하여 그를 죽게 하였을 경우 무고한 자에게 사형을 적용하는 따위를 이른다.
[주D-006]일반인과 …… 말입니까 : 고요(皐陶)는 순(舜) 임금의 신하로, 법률을 담당하여 공평하게 형벌을 집행한 자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도응(桃應)이 “순 임금이 천자가 되고 고요가 법관이 되었는데, 순 임금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만약 사람을 죽였다면 고요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법을 집행하여 살인자인 고수를 붙잡을 뿐이다.” 하고 대답한 내용이 보인다.
[주D-007]약법삼장(約法三章) : 한 고조(漢高祖)가 관중(關中)에 들어가 종전에 있었던 진(秦)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지하고 세 조항으로 줄여서 새로 만든 법을 가리키는데, 세 조항의 법은 곧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와 도둑질한 자에 대해서는 그 범죄 정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한다.〔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라는 것이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08]김경징(金慶徵)의 일 : 김경징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김류(金瑬)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어(守禦)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으나 강화도의 지리적인 조건만 믿고 방어 계획을 세우지 않아 방어에 실패하였다. 이에 대간들이 김경징을 탄핵하여 법대로 처단해야 한다고 논계하여 강계(江界)에 귀양 보냈다가, 전 판서 김시양(金時讓)과 참판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로 인해 사헌부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 사사되었고, 이민구는 영변(寧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燃藜室記述 卷26 仁祖朝故事本末 江都敗沒》
[주D-009]제(齊)나라 …… 다스려졌습니다 : 전국 시대 초기 제나라 아읍(阿邑)의 대부(大夫)가 위왕(威王)의 좌우 신하들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자신을 왕에게 칭찬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위왕이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아읍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좌우 측근들의 칭찬하는 말과는 반대로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전답이 제대로 경작되지 못하였으며 국경의 수비가 허술하였다. 이에 위왕은 아읍의 대부와 그를 칭찬한 좌우 신하들을 모두 삶아 죽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감히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실제에 힘써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資治通鑑 卷1》
[주D-010]성인(聖人)의 교훈 : 성인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羊)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니, 공자가 말씀하기를, “우리 고을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여 숨겨 주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 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하였다. 《論語 子路》
[주D-011]대공(大功) 이상의 친척 : 대공은 오복(五服)의 하나로 9개월 복이다. 상복(喪服)은 친소(親疎) 관계에 따라 삼년(三年), 기년(期年), 대공 구월(大功九月), 소공 오월(小功五月), 시마 삼월(緦麻三月)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삼년은 참최 삼년(斬衰三年)과 자최 삼년(齊衰三年)으로 나누었다. 대공복은 비교적 올이 굵은 베로 상복을 만들어 9개월 동안 입으며, 중자(衆子)의 처(妻), 조카의 처, 사촌 형제 등이 대공복을 입는 친척이다.
[주D-012]호관(縞冠)에 현무(玄武) : 호관은 흰 깁으로 만든 관(冠)이고, 현무는 검은색으로 두른 관의 가선이다. 무(武)는 관의 가선〔冠卷〕이다. 《예기》 〈옥조(玉藻)〉에 “호관에 검은 무를 두르는 것은 아버지가 상중에 있을 때에 자손들이 쓰는 관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也〕” 하였다.
[주D-013]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원비(元妃)로 광주 김씨(光州金氏)이다. 1680년(숙종6)에 천연두를 앓다가 발병 8일 만에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익릉(翼陵)이다.
[주D-014]오향 대제(五享大祭) : 종묘(宗廟)에 지내는 다섯 번의 제향(祭享)을 이르는바, 4계절의 첫달과 12월의 납일(臘日)에 거행하는 춘향, 하향, 추향, 동향, 납향(臘享) 제사를 이른다.
[주D-015]혼전(魂殿) : 왕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부묘(祔廟)하기 전까지 신위(神位)를 모셔 두는 전각을 이른다.
[주D-016]헌가(軒架)와 일무(佾舞) : 헌가는 편종이나 편경 등과 같이 틀에 걸고서 연주하는 악기를 이르는바, 종묘(宗廟)와 문묘(文廟), 경모궁(景慕宮) 등의 제향 때 뜰아래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다. 일무는 종묘나 문묘 제향 때 여러 사람이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는 춤을 이른다.
[주D-017]위(魏)나라의 견후(甄后) : 견후는 위나라 문제(文帝)의 후비(后妃)이고 명제(明帝)의 모후이다. 본래 원소(袁紹)의 아들 원희(遠煕)의 아내였다가 조조(曹操)가 원소를 격파하자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그의 아름다움을 탐내어 아내로 삼아 명제 조예(曹叡)를 낳았는데, 뒤에 곽후(郭后)에게 총애를 빼앗기고 원망하다가 사사되었다. 명제가 제위에 오르자 문소황후(文昭皇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三國志 卷3 魏書 明帝叡》
[주D-018]당(唐)나라의 장손후(長孫后) : 장손후는 당 태종(唐太宗)의 후비로 시호는 문덕(文德), 성은 장손(長孫)인데, 고종(高宗)을 낳았다. 《新唐書 卷76 后妃列傳上》
[주D-019]금석(金石)의 음악 : 악기를 만드는 재료에 따라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의 여덟 가지로 나눈 것을 팔음(八音)이라 하는데, 팔음 중 금(金)은 종 따위이고, 석(石)은 석경(石磬)이다.
[주D-020]인열왕후(仁烈王后) : 인조의 비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효종,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 등 네 아들을 두었다. 능(陵)은 장릉(長陵)으로 처음에 파주(坡州) 운천리(雲川里)에 장사 지냈으나 영조 때 교하(交河)로 이장하였다.
[주D-021]무무(武舞)를 …… 사용하여 : 무무는 악생(樂生)들이 무(武)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열을 지어 추는 춤이며, 문무(文舞)는 악생들이 칼이나 창을 들지 않고 문관(文官)의 차림으로 열을 지어 추는 춤이다.
[주D-022]왕조(王朝) : 북송(北宋)의 명재상으로 원래의 이름은 단(旦)인데,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개명인 단(旦)을 휘(諱)하여 조(朝)로 쓴 것이다.
[주D-023]대관(大觀) : 북송 휘종(北宋徽宗)의 두 번째 연호이다.
[주D-024]만과(萬科) : 1616년(광해군8)에 변경의 사정이 날로 급박하고 또 응시자를 모두 서울에 모으기가 어렵다 하여 승지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널리 무사를 뽑았는바, 모두 합하여 1만여 명에 이르니, 당시에 이를 만과라 일컬었다.
[주D-025]적불(赤芾)이 삼백 명 : 적불은 붉은 슬갑으로 대부(大夫)의 관복이다. 《시경》 〈후인(候人)〉에 “저 소인이여, 붉은 슬갑을 찬 자가 삼백 명이나 된다.〔彼其之者 三百赤芾〕” 하였는데, 이는 춘추 시대 조(曹)나라 군주가 소인들을 많이 등용함을 비판한 내용이라 한다. 옛날 대부들은 붉은 슬갑을 차고 헌(軒)이라는 높은 수레를 탔는바, 당시 제후국에는 대부가 많았으며 특히 조나라는 약소국이었는데도 이처럼 관직을 남발하고 소인들을 중용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주D-026]봉초(捧招) : 죄인을 문초하여 구두로 진술을 받음을 이른다.
[주D-027]정범(正犯) : 주범(主犯)과 같은 말로 형법에서 자기 의사에 따라 범죄를 실제로 저지른 사람을 이르는바, 단독 정범과 공동 정범으로 크게 나뉜다.
[주D-028]평번(平反) : 옥사를 다시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함을 이르거나 또는 먼저보다 죄를 가볍게 함을 이른다.
[주D-029]편배(編配) : 유배 죄인을 배치하는 것으로, 곧 귀양 갈 사람의 이름을 도류안(徒流案)에 기록하는 것이다.
[주D-030]계복(啓覆) :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사형받을 죄인을 재심하는 것으로, 승정원에서 추분(秋分)이 지난 뒤에 계품(啓稟)하여 9월, 10월 중에 날짜를 정해서 시행하였다.
[주D-031]상형(祥刑) : 형벌을 잘 쓰는 것을 이른다. 《서경》 〈여형(呂刑)〉 채침(蔡沈)의 주(註)에 “형벌은 흉한 도구인데 상서라고 말하는 것은, 형벌은 죄인을 징계하여 형벌을 시행할 일이 없기를 기약해서 백성들이 중에 화합하면 그 상서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夫刑凶器也 而謂之祥者 刑期無刑 民協于中 其祥莫大焉〕”라고 하였다.
[주D-032]서경(署經)한 시장(諡狀) : 서경은 심사를 거쳐 동의한다는 뜻이며, 시장은 재상이나 유현(儒賢)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임금에게 건의할 때에, 그가 살아생전에 한 일들을 적어 올리던 글을 이른다.
[주D-033]당시에는 : 대본에는 ‘常時’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常’을 ‘當’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4]스승을 배반한 죄 : 윤증(尹拯)이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죄를 이른다. 윤증은 일찍이 송시열을 사사(師事)하였으나 그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비문 문제로 반목하여 결국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領袖), 윤증은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주D-035]연양(延陽)과 포저(浦渚) : 연양은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을 가리키는바, 인조반정 때 주도 세력이었던 이귀(李貴)의 아들로 1650년(효종1) 우의정이 되고 2년 후 연경을 다녀와 영의정에 올랐다. 포저는 조익(趙翼, 1579~1655)의 호로 효종 초년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D-036]향소(鄕所) : 유향소(留鄕所)를 가리킨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으로,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鄕吏)를 감찰하며 민의(民意)를 대변하였다.
[주D-037]공의(功議) : 공신이나 그 자손의 범죄에 대하여 형벌을 감하여 주는 규정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은 죽을죄가 아니면 목에 칼을 씌우지 않았고, 공신의 자손으로 인륜을 어기거나 도둑질을 하여 그 죄가 장(杖), 유(流) 이하에 해당할 때에는 속죄(贖罪)로 대신하였다.
[주D-038]전가속포(全家贖布) : 속포는 죄를 면하기 위해서 죗값으로 바치는 베로, 전가속포는 죄인과 그 전 가족에게 속포를 물리는 것이다.
[주D-039]일곱 가지 천역(賤役) : 조선 시대에 가장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종사하였던 일곱 가지 천역으로 곧 관아의 조례(皁隷), 의금부의 나장(羅將), 각 지방청의 일수(日守), 조운창(漕運倉)의 조군(漕軍), 수영(水營) 소속의 수군(水軍), 봉화대(烽火臺)의 봉군(烽軍), 역참(驛站)의 역졸(驛卒) 등을 이른다.
[주D-040]정훈(正勳) : 정공신(正功臣)으로, 종훈(從勳) 즉 원종공신(原從功臣)과 상대되는 말이다.
[주D-041]여정(餘丁) : 국가의 충원 계획에 따라 현역(現役)에 징집하고 남은 장정을 이르는 말로, 이들은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포목을 바쳤다.
[주D-042]네 군영(軍營) :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을 이른다.
[주D-043]연점(鉛店) : 수공업 방식으로 납을 캐는 광산을 가리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은을 캐는 광산을 은점(銀店)이라 한다.
[주D-044]별성(別星) : 임금의 명을 받드는 봉명 사신(奉命使臣)을 이른다.
[주D-045]황무지를 …… 것입니다 : 성인(聖人)의 가르침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이른다. 《논어》 〈선진(先進)〉에 제자인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의 가신이 되어 계씨의 마음씨와 행실을 고치지 못하고 세금을 거둔 것이 배가 되자, 공자는 “염구는 나의 무리가 아니니, 소자(小子)들아, 북을 울려 성토하라.” 하여 그의 죄를 꾸짖었다. 맹자는 공자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이르기를, “군주가 인정(仁政)을 행하지 않는데도 그 군주를 부유하게 하면 모두 공자에게 버림을 받을 자이다.……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극형을 받아야 하고, 외교를 잘하여 제후들을 연합하는 자는 그다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해서 세금을 거두는 자는 그다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D-046]연수(淵藪) : 못에 물고기가 모여들고 숲에 새와 짐승이 모여드는 것처럼 여러 물건이나 사람이 모이는 소굴을 비유한 것이다.
[주D-047]복성(福星) : 복을 내리는 별 또는 신(神)으로, 곧 사자(使者)를 가리키기 때문에 한 지방을 구제하여 잘 살게 할 수 있는 지방관이나 어사(御史) 등을 이른다. 북송(北宋) 때 선우신(鮮于侁)은 자(字)가 자준(子駿)이었는데, 그가 절동 전운사(浙東轉運使)로 나갈 적에 사마광(司馬光)이 “지금 동쪽 지방의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자준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니, 이 사람은 한 도(道)의 복성이다.” 하였다. 《山堂肆考》
[주D-048]오훼(烏喙)와 짐독(鴆毒) : 오훼는 독약으로 모양이 까마귀의 부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짐독은 짐새의 깃에 있는 맹렬한 독을 이른다.
[주D-049]유황 : 대본에는 ‘䟽黃’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䟽’를 ‘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책응(責應) : 수요에 따라 물품을 책임지고 내주는 것을 이른다.
[주D-051]훌륭한 …… 것 : 상(賞)을 함부로 주지 않음을 이른다. 전국 시대 한(韓)나라의 소후(昭侯)가 헌 바지를 잘 보관하라고 지시하자, 모시는 자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인자하지 못하십니다. 이 바지를 좌우 신하들에게 주지 않고 보관하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하였다. 이에 소후는 “내 들으니, 훌륭한 군주는 얼굴을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끼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바지야 어찌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뿐이겠는가. 나는 공이 있는 자를 기다려 주겠다.” 하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내렸는데, 끝내 나라를 잘 다스려 유명하였다. 《韓非子 內儲說上》
[주D-052]송(宋)나라 …… 하였고 : 천반(川班)은 사천(四川) 출신의 무반(武班)이며, 전직(殿直)은 내전(內殿)을 지키는 무사를 이른다. 《송사(宋史)》 〈병지(兵志)〉를 보면 내전직(內殿直)으로 좌반과 우반 넷이 있었다. 송나라 태조(太祖)는 건덕(乾德) 3년 촉(蜀) 지방을 평정한 다음 재주와 모습이 걸출하고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 128명을 뽑아 내전직에 임명하고 녹미를 넉넉히 내려 주어 어마직(御馬直)과 똑같이 대우하였다. 이때 교제(郊祭)를 마치고 상을 줄 때에 어마직이 호종하였으므로 이들에게 특별히 1인당 5000전을 더 주니, 천반 내전직이 준례와 같지 않다 하여 마침내 서로 몰려와서 등문고(登聞鼓)를 치고 자신들에게도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태조가 노하여 이르기를, “짐이 그들에게 준 것은 은택인데, 어찌 준례가 있겠는가.” 하고는 청원한 자 40여 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군으로 편입하였으며, 마침내 천반의 내전직을 폐지하였다. 《續資治通鑑長編 卷7 宋太祖》
[주D-053]당(唐)나라 장종(莊宗) : 후당(後唐)의 이존욱(李存勖)으로 용병술에 능하여 전투를 잘하였으나 뒤에 점점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재위 4년 만에 반란을 일으킨 곽종겸(郭從謙)을 토벌하다가 유시(流矢)를 맞고 죽었다.
[주D-054]장릉(長陵) :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으로 교하(交河)에 있다. 1649년(인조27)에 인조가 승하하자, 초상(初喪)의 의절(儀節)을 조익(趙翼)이 많이 결정하였는데, 장릉을 버리고 다른 길지(吉地)를 선택하려 하였으나 조론(朝論)이 엇갈려 저지되었다. 《燃藜室記述 卷27 仁祖朝故事本末 長陵》
[주D-055]술서(術書) : 풍수지리를 논한 방술서(方術書)를 이른다.
[주D-056]산론(山論) : 풍수지리 가운데 산세(山勢)를 논한 내용을 이른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세를 용(龍)이라 하여 어느 산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내려왔는가를 제일 중요시하며, 이것을 그린 것을 산도(山圖)라 한다.
[주D-057]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인조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으로 경기도 김포(金浦)에 있다. 추존하기 전에는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는데, 1632년(인조10) 추존하면서 장릉으로 고쳤다.
[주D-058]이사명 : 대본에는 ‘李師會’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과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거하여 ‘會’를 ‘命’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9]이 사람의 일 : 대본에는 ‘此人人事’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人’ 1자를 연문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주D-060]근습(近習) :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이른다.
[주D-061]조사석(趙師錫) : 1632~1693. 자는 공거(公擧)이고, 호는 만회(晩悔)ㆍ만휴(晩休)ㆍ향산(香山)ㆍ나계(蘿溪)이며 본관은 양주(楊州)로 형조 판서 조계원(趙啓遠)의 아들이다. 이때 김만중(金萬重)에 의해 희빈 장씨의 모친과 가까이 지낸 사실이 알려졌다.
[주D-062]금구(金甌) : 금으로 만든 사발 또는 잔을 이른다. 당 현종(唐玄宗)이 재상을 선임할 때마다 먼저 후보자의 성명을 쓴 종이를 금구로 덮어 놓고 중론(衆論)을 물어 임명하였는데, 한번은 마침 태자가 들어오므로 현종이 금구를 가리키며 “이 속에 재상의 이름이 들어 있다. 네 생각에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묻자, 태자가 “최림(崔琳)이 아니면 노종원(盧從愿)인가 합니다.” 하고 아뢰었는데, 과연 적중하였다. 이후로 금구는 재상을 임명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新唐書 卷109 崔義玄列傳》
[주D-063]양전(兩銓)의 장관 : 두 전조(銓曹)의 장관으로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이른다. 이조는 문관의 전형을 맡고 병조는 무관의 전형을 맡기 때문에 이조와 병조를 양전이라 칭한다.
[주D-064]의빈(儀賓) : 임금의 사위인 부마(駙馬)를 이르는 말이다.
[주D-065]구차(久次) : 오랫동안 같은 벼슬에 침체되어 있고 승진되지 못함을 이른다.
[주D-066]관저(關雎) : 《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번째 편명으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인 태사(太姒)의 덕을 노래한 시이다. 태사는 훌륭한 부덕(婦德)이 있었는바, 이는 문왕이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잘한 소치라 한다.
[주D-067]순(舜) 임금은 …… 미워하셨으니 : 《서경》 〈순전(舜典)〉에 “순 임금이 말씀하기를, ‘용아! 짐은 참소하는 말이 선행(善行)을 끊어 짐의 무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미워해서 너를 납언으로 임명한다.〔龍 朕堲讒說殄行 震驚朕師 命汝作納言〕’ 하였다.” 하였다. 대본에는 ‘朕堲殄行’으로 되어 있는데, 《서경》 〈순전〉에 의거하여 ‘堲’과 ‘殄’ 사이에 ‘讒說’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8]황극을 세우시어 : 《서경》 〈홍범(洪範)〉에 보이는 내용으로 황극(皇極)은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황제의 법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69]내 …… 것이겠는가 : 대본에는 ‘予豈以鄕不爲驚動然也’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動’과 ‘然’ 사이에 ‘而’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70]명정(銘旌) :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旗)로, 일정한 크기의 긴 천에 보통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다.
[주D-071]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봉호이다.
[주D-072]선정신(先正臣) : 돌아가신 유현(儒賢)을 이르는 말로, 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주D-073]예대(詣臺) :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원이 진계(陳啓)할 일이 있을 때 궁중의 대청(臺廳)에 나아가는 일을 말한다.
[주D-074]차비문(差備門) : 궁궐 편전(便殿)의 앞문을 가리킨다.
[주D-075]어공(御供)의 납약(臘藥) : 어공은 임금에게 바치는 물건이며, 납약은 해마다 납일(臘日)에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약으로, 청심원(淸心元), 안신원(安神元), 소합원(蘇合元) 등인데, 내의원(內醫院)에서 조제하였다.


 

 

 

약천연보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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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60세 무진년(1688, 숙종14)
1월에 비변사에 나아가 경기의 여덟 고을과 강양도(江襄道)의 네 고을에 봄철의 대동미(大同米)와 전세(田稅)를 모두 남겨 두어 구휼하는 데 쓸 것을 계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3월에 상이 김진규(金鎭圭)를 기복(起復)하여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모사(摹寫)하려 하였는데, 공이 예(禮)를 인용하여 의논을 올리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상이 온화한 유시를 내려 이상진(李尙眞)을 만류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4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선왕조(先王朝) 계묘년(1663, 현종4)에 내린 수교(受敎)를 거듭 밝혀 여러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제한하고, 새 궁가는 직전법(職田法)에 따라 유사(有司)에게 받으며 절수(折受)하는 것과 사전(私田)에 대한 면세를 혁파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6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금위영(禁衛營)에서 군기(軍器)를 제조한 공로에 보답하는 폐단을 논변하여 중지시키고 조가(朝家)에서 상을 시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며, 이단석(李端錫)의 장례 물품을 지급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7월에 청대할 때에 공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혜민서 제조에 제수한 것과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을 삭탈관직하라는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또 동평군 이항에게 사관(史官)을 보내는 것에 대해 간하면서 이정(李楨)과 이남(李柟)을 인용하여 경계하였다가 성상의 뜻에 거슬려 멀리 유배 갔다. 다음 날 상은 공을 경흥(慶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경흥에 이르렀다. 25일에 장렬왕대비(莊烈王大妃)가 승하하였다.
10월에 왕자가 처음 탄생하였다.
11월에 상이 공의 위리안치를 풀어 주도록 명하고, 다음 날 삭탈관작하여 풀어 주도록 명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삭탈관직하도록 명하였다.
12월에 상이 직첩을 다시 주도록 명하였다. 공은 이달에 돌아와 북청(北靑)에 이르렀다.

○ 1월 원일(元日)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친히 임하여 신하들의 경하를 받으니, 이는 참으로 역대의 조정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 송나라의 기거랑(起居郞) 호인(胡寅)이 올린 글에 ‘실효를 거두기를 힘쓰고 헛된 문식을 제거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효제(孝悌)와 구현(求賢), 납간(納諫)과 임장(任將), 치군(治軍)과 애민(愛民) 등의 여섯 가지 일에 대해 각각 그 허실(虛實)을 아뢴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끝에 이르기를, ‘이 여섯 가지 헛된 문식을 행하면서 황옥(黃屋)을 타고 악전(幄殿)을 세우고서 날이 밝을 무렵 연(輦)을 타고 방을 나오면 치미선(雉尾扇)과 금향로를 든 자들이 양쪽 섬돌에서 모시고, 의장마(儀仗馬)와 호위병이 엄숙히 의식을 분담하여 집행하면 예를 돕는 자가 백관을 인솔하여 차례로 들어가 문안을 올리며, 물러 나온 뒤에는 재상과 대신(大臣)들이 몸을 숙이고 앞으로 나아가서 홀(笏)을 꽂고 나와 아뢰며, 사신(司晨)이 진정(辰正)이 되었음을 창(唱)하면 대가(大駕)가 들어가고 의장이 나오니, 이는 천자의 헛된 문식입니다.’ 하였으니, 그 경계하고 깨우친 말이 아주 적절하여 군주의 약석(藥石)으로 삼을 만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약 이러한 의식을 통해 실제 효험을 구하신다면 실로 종묘와 사직, 신하와 백성들의 무궁한 경사가 될 것이지만, 만약 헛된 문식을 우선으로 하고 실제 효험을 뒷전으로 여기신다면 또한 국가가 위태롭고 혼란한 데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유익함이 없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고 군주를 사랑하여 가르치고 경계하는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가상히 여기고 탄복하노라.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나 유념하여 가슴속에 새겨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3월에 낭원군(朗原君) 이품(李偘)이 태조의 모습을 그려서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할 것을 청하자, 상이 전(前) 지평(持平) 김진규(金鎭圭)를 기복(起復)하여 모사하게 하려 하면서 이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의논을 올리기를,
예(禮)에 ‘군자는 남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마음을 빼앗지 않고 또한 자신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효심을 빼앗기지 않으며, 오직 금혁(金革)의 일은 피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어용(御容)을 모사(摹寫)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요하나 금혁의 시급함과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성상께서 억지로 시키신다면 이는 남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마음을 빼앗는 것이 되고, 아랫사람이 군주의 명을 받든다면 이는 자신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효심을 빼앗기는 것이 되니, 결코 태평한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금혁의 일조차도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오히려 ‘군주가 시키는 것은 잘못이요, 신하가 행하는 것은 예이다.’ 하였으니, 더구나 금혁의 일이 아닌데 억지로 시킨단 말입니까.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예의를 엄격히 지키는 데에 달려 있으니, 경솔하게 변경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여,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 민정중(閔鼎重)이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있을 때에 마천령(磨天嶺)에 축성할 것을 의논하였고, 오랜 뒤에 감사 이세화(李世華)가 다시 이것을 청하였다. 지난해 봄에 감사 윤지완(尹趾完)이 또한 이와 같이 청하고, 인하여 성진(城津)과 철령(鐵嶺)에 축성하고 남병사(南兵使)의 병영을 제인관(濟人館)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이때 공이 좌상으로서 정사(呈辭)를 올린 상황이었는데, 비변사의 유사 당상이 명을 받들고 찾아와서 물으니, 공은 먼저 민심을 잃게 된다고 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인재를 수습하여 민심을 굳게 결속시키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윤지완이 강화 유수(江華留守)로서 입시하여 거듭 청하자, 공이 아뢰기를,
“마천령은 위아래 100여 리 사이에 통행할 수 있는 작은 지름길이 한두 곳일 뿐만이 아닙니다. 만일 적병(敵兵)이 마천령 아래에 이른다면 고갯길 한 길목은 성(城)에 올라가서 차단할 수 있으나 위아래의 여러 갈래 길을 어떻게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영주(英州)와 웅주(雄州) 등에 구성(九城)을 쌓았는데, 그때 조정의 의논이 병목〔甁項〕을 얻어 그 지름길을 막으면 오랑캐들이 침공하는 길이 단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논을 정하고 군대를 출동하였는데, 막상 이곳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보니, 수로와 육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예전에 들었던 것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적들이 여러 번 매복을 두어 약탈하므로 끝내 구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었으니, 이른바 웅주성(雄州城)은 바로 길주(吉州)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병목은 지금의 마천령으로서 방어에 유익함이 없는바 지난날의 일을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
또 육로는 방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길주 이북을 잃는다면 인민과 배가 모두 적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만약 적들이 배를 이용해서 야음(夜陰)을 틈타 성진강(城津江)의 한 모퉁이로 넘어온다면 방어선 상의 고갯길에 대한 방수(防守)가 형편상 반드시 와해되고 말 것이니, 어떻게 성을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군들이 만령(蔓嶺)을 점거하여 우리 군사들이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어유소(魚有沼)가 작은 배에 군사를 태우고 푸른색 옷을 입혀 초목의 색깔로 위장하게 한 다음 바다 모퉁이를 경유하여 벼랑을 타고 올라가 가장 높은 봉우리를 에워싸고 나아오며 적을 굽어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자 적병이 일시에 궤멸되었습니다. 해로(海路)를 방어하기가 어렵고 적들이 몰래 넘어오는 것이 이와 같으니, 신은 성을 쌓아도 무익할까 염려됩니다. 또 마천령에 성을 쌓으면 마천령 이북의 백성들은 반드시 버림받았다 하여 실망할 것이니,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적들이 철령 아래로 쳐들어온다면 철령의 수비가 설령 견고하더라도, 안변(安邊)으로부터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로 넘어올 경우 도처가 평탄한 길입니다. 적들이 철령에 막혀서 돌아가 함흥(咸興)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의 얕은 생각으로 볼 때 또한 반드시 옳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폐사군(廢四郡)입니다. 적들이 사군(四郡)의 강변을 통하여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따라 곧바로 함흥으로 나온다면 호마(胡馬)로 달릴 경우 하룻길에 불과합니다. 중간에 별해진(別害鎭)과 장진보(長津堡) 두 진보(鎭堡)가 있으나 모두 잔약한 병졸 수십 명이 지키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들이 만약 이 길을 경유한다면 하룻밤 사이에 함흥으로 들어와 점거할 것입니다. 마천령과 함관령(咸關嶺) 등은 설령 금성(金城)과 철벽(鐵壁)이 있더라도 이렇게 되면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이니, 어떻게 우리에게 쓸모가 있겠습니까. 북로(北路)에 대한 염려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사로 있을 때에 사군을 다시 회복할 것을 청하였고, 또 영(嶺) 밖에 남병사를 설치하되 우선 후주(厚州)에 설치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다시 변장(邊將)을 파했습니다. 듣자 하니 윤지완도 이 점을 염려하여 황초령(黃草嶺) 위에 일대의 횡성(橫城)을 쌓아서 방수할 곳으로 삼았다 하니, 실로 옳은 의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적병이 별해진과 장진보를 이미 지나서 황초령 아래에 이른다면 고갯길 한 길이 아니라도 반드시 달리 넘어올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공이 인하여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물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 이달에 폭풍이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멩이가 굴러다니니, 공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이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상진(李尙眞)이 입대(入對)하여 윤증(尹拯)이 배사(背師)했다고 하여 그를 죄준 잘못에 대해 말하고, 물러 나와서 또다시 차자를 올려 거듭 아뢰었다가 엄한 하교를 받고는 황공하여 향리(鄕里)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공은 인하여 아뢰기를,
“이상진이 일찍이 향리로 돌아갈 것을 청원하였으나 성상의 유시가 정성스럽고 간곡하시므로 감히 결연히 떠나가지 못하였으니, 그 사람이 충성스럽고 질박하여 딴마음이 없음을 성상께서 반드시 굽어 살피셨을 것입니다. 이상진이 지금 이 일로 떠나가서 다시는 조정에 나오지 않는다면 노신(老臣)을 예우하는 도리에 어찌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건대 옛날 효종대왕 때에 신이 사관(史官)으로 입시하였는데, 노신인 민응형(閔應亨)이 입대하여 쓸데없는 말을 지루하게 늘어놓아 종일토록 그칠 줄을 몰랐으며, 게다가 귀까지 먹어서 성상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 실로 잘못된 말이 많고 적절하지 못한 거조(擧措)가 많았으나 효종대왕께서는 오히려 유도하여 말하게 하시고 그가 소회를 다 털어놓은 뒤에야 그만두셨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효종대왕의 성덕(聖德)을 존경하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이와 같지 않으면 성인의 큰 도량을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오늘날 전하께서 본받으셔야 할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온화한 유시(諭示)를 내리셔서 노신의 떠나감을 만류하시어 성조의 관대하고 너그러이 포용하는 덕을 드러내시고, 조정의 신하들이 노대신이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여서 다시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여 만류하였다. 지난해 봄에 이공(李公 이상진)이 이이명(李頤命)의 비방으로 인하여 한강을 건너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공이 편지로 안부를 묻자 이공은 답하기를,
“편지로 안부를 물은 것은 이번 걸음에 처음 본다.”
하였다.
○ 처음 태조조(太祖朝)에 궁가(宮家)의 면세전을 100결(結)로 제한하였는데, 배극렴(裵克廉)과 정도전(鄭道傳) 등이 더 하사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이르기를,
“왕자와 제군(諸君)들은 본료(本料)가 100여 결이라도 굶주리고 추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다. 만약 또다시 더 하사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나더러 자기 자식을 편애한다고 이를 것이다. 더구나 토지는 한계가 있으니 어찌 지나치게 주겠는가?”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직전(職田)〉에 “대군(大君)은 225결이고 왕자군(王子君)은 180결이다.” 하였고, 공주(公主)와 옹주(翁主)의 경우는 부마도위(駙馬都尉)의 품계에 따라 계산하여 지급해 주되 혹 관청에 소속된 전지(田地)나 몰입(沒入)한 전지를 사여(賜與)하는 규정이 있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서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못하여 왕자와 옹주가 잇따라 출합(出閤)하였으나 사여한 토지가 규정된 결수(結數)에 차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선 공패(空牌)를 받기도 하였다. 호조 판서 한응인(韓應寅)이 예빈시(禮賓寺)에 소속된 여러 해수(海水) 지역에 대해 백관들에게 선반(宣飯)하던 비용의 지급을 정지하였다. 또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이 조빙(朝聘) 왔을 때에 접대할 것이 없으므로 어염(魚鹽)과 시탄(柴炭)이 나는 곳을 떼어 주고 전지 몇 결을 기준으로 삼아 세금을 거두어 접대하는 비용으로 쓸 것을 청하였던 것인데, 마침내 잘못된 규정이 되어 절수(折受)라고 부르게 되었다. 효종조(孝宗朝) 말년에 제도(諸道)의 감사에게 명하여 공사 간의 염분(鹽盆)과 어살을 조사하게 하고 사정(査正)하려고 하면서 어사(御史)들에게 염찰(廉察)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공이 이미 명령을 받고 호남에 간 뒤에 효종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현종에게 아뢰기를,
“국가의 세금이 날로 줄어들고 곤궁한 백성들만 신역(身役)으로 고생하는 폐단의 근원을 찾아보면 모두 각 아문의 둔전(屯田)과 여러 궁가의 농소(農所)가 그 근원입니다. 신이 듣건대 부안(扶安)에 있는 것이 1050여 결이고, 고부(古阜)에 있는 것이 770여 결이고, 만경(萬頃)에 있는 것이 670여 결이라 하며, 기타 각 고을에 없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전지에 대한 국가의 세금을 내지 않고 백성들은 관청에서 부역하지 않으며, 이외의 전지에서만 국가에 세금을 내고 이외의 백성들만 국가의 부역을 담당하니, 어떻게 국가가 가난하지 않고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들으니 조정에서 조사하라는 조처가 있었는데, 마침 국상을 만나 미처 개정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롭게 교화하는 때를 만났으니, 더욱 성명(成命)을 잘 준수하여 누적된 폐단을 통렬히 개혁해서 공평하고 분명한 정치를 밝히소서.”
하였다. 이때 다섯 공주가 출합(出閤)하자, 절수하여 면세한 전지가 점점 넓어지니 소재지의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소의 신하들이 한 해를 넘기도록 혁파할 것을 아뢰자, 상이 회의하여 한계를 정하라고 명하여 500결로 한계를 정하였다. 이때 장령(掌令) 박세견(朴世堅)이 줄여서 정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서 예전대로 시행하고 수량을 한정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여성제(呂聖齊)가 《경국대전》 〈제전(諸田)〉의 “직전(職田)과 사전(賜田)의 조세를 모두 경창(京倉)에 납부하면 군자감(軍資監)의 미두(米豆)로 바꾸어 준다.”라는 규정에 따라 궁가의 면세전 수량을 결정한 다음 그 세금을 모두 경창에 바치고, 직전(職田)의 제도대로 그 집에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해 임인년(1662, 현종3) 겨울에 공이 부응교로서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 당나라 중종(中宗)은 지극히 무도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안락공주(安樂公主)가 곤명지(昆明池)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은 말하기를, ‘곤명지는 백성들이 부들을 베어 쓰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곳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안으로는 작은 구거(溝渠)와 밖으로는 큰 강과 바다, 넓은 들과 높은 산악을 모두 궁가들이 떼어 받아 차지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지키고 계신 조종(祖宗)의 강토는 그 나머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두서너 궁가를 위하여 기필코 국가가 없어진 뒤에야 이 일을 그만두고자 하시니, 이미 국가가 없어지면 두서너 궁가도 반드시 그들만 그 부유함을 보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찌 지금 미리 대책을 세워서 궁가와 국가가 모두 무사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른바 면세전이라는 것은 더욱 법 밖의 무리한 일입니다. 신들은 면세전의 많고 적음이 박세견의 신상에 무슨 이익이나 해로움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 마침내 면세전을 예전과 같이 하라는 분부를 내려 박세견을 꺾어 버리셨으니, 신들은 이 일이 장차 조정에 크게 불리할까 삼가 염려됩니다. 아, 어찌 전하께서는 태조대왕의 성스러운 교훈을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시어 이렇게 다섯 곱절이나 되는 수량으로 정하신단 말입니까. 또 지금 기강이 엄숙하지 못하고 법령이 견고하지 못하니, 만약 풀을 벨 때에 뿌리까지 뽑듯이 한꺼번에 바로잡지 않고 단지 이 한도를 정하는 명령만 내리게 되면, 비록 그 400결을 줄여서 100결에 그치게 한다 하더라도 면세전이라는 명칭이 아직 외방에 잔존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년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더욱 불어날 것이니, 3자 되는 낮은 제방이 어떻게 산을 삼킬 만한 홍수의 세력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성제의 상소문은 진실로 발본색원을 주장한 훌륭한 의논으로 국가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실로 모두 편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윤허해 주셔서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덕을 드러내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다음 해 가을에 공이 집의(執義)로서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이제 지면의 문자로는 어리석은 충정을 다 아뢸 수가 없고, 성상께서 침묵하고 계시니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알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척에서 그 내용을 반복하여 말씀드려서 사리의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다 아뢰고자 합니다.”
하니, 상은 듣기가 매우 괴롭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이 인혐하여 아뢰기를,
“여러 궁가와 내시(內侍) 등에 관한 일은 매양 ‘윤허하지 않는다.〔不允〕’라는 두 글자만 얻고 돌아가니, 이미 성실하지 못하고 또한 매우 느슨하여 형식적입니다. 신하들의 계사(啓辭)가 여섯 번이면 그중 네 번은 바로 궁가와 내시에 관한 일인데 면대할 때에 한 번도 윤허해 주지 않으시니, 더구나 문자로 전계(傳啓)하여 윤허해 주시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일을 논하는 직임을 결코 헛되이 차지하고 있을 수 없으니, 신의 직임을 파직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대가 핍박한다 하여 내가 그것을 따르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출사(出仕)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남구만(南九萬)은 문자로 책임을 때우려 하지 않고 지척의 지엄하신 성상 앞에서 생각한 바를 다 말하고 꺼리지 않았으니, 대각(臺閣)의 풍채가 늠름하여 숭상할 만합니다.”
하였으나, 공은 끝내 직책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공 영(林公泳)이 공의 아들 회은공(晦隱公 남학명(南鶴鳴))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현종실록청(顯宗實錄廳)에서 기록한 것을 보니, 공이 여러 궁가의 일에 대해 아뢴 말이 대부분 통렬하고 간절하였다. 상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집의(執義)가 말한 것을 쓰지 말라.’ 하셨으니, 당시 공의 풍채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응교(應敎)로서 겨울철에 친 우레로 인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주역(周易)》의 〈진괘(震卦) 상(象)〉에 이르기를, ‘우레가 거듭된 것이 진괘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행실을 닦고 반성한다.〔洊雷震 君子以恐懼修省〕’ 하였습니다. ‘두려워하고 조심한다.’라는 것은 마음속으로 하늘의 위엄을 공경하는 것이요, ‘행실을 닦고 반성한다.’라는 것은 밖으로 인간의 일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것은 숨겨져서 알기 어렵고, 밖에 있는 것은 드러나서 보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임금들이 재앙을 당했을 때에 공구(恐懼)하는 실제를 다한 것은 반드시 수성(修省)하는 도리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 겨울 우레가 치는 변고가 또 여러 재앙이 겹친 때에 나타나니, 전하께서 놀라고 조심해서 마음속으로 공구하신 것을 반드시 신들이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성하는 일로 말하면, 마침내 어찌하여 이처럼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단 말입니까.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여 올린 합사(合辭)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요점은 실로 절수(折受)와 둔장(屯莊)에 있는데, 전하께서는 건성으로 듣고서 모두 윤허하지 않으시고, 요청을 따른 것은 다만 자질구레하고 중요하지 않은 두서너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신들은 오늘날 재앙을 부른 것이 과연 여기에서 연유했는지, 오늘날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밖으로 수성하시는 것이 이에 그칠 뿐이라면, 신들은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공구하신 것도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지 못했을까 삼가 염려됩니다. 삼가 듣건대 성지(聖旨)에 ‘오래전부터 내려온 사여(賜與)의 규정을 지금에 와서 모두 삭제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셨다 하는데, 신들은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겠습니다. 지금 국가가 지켜서 규정으로 삼아야 할 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 〈호전(戶典)〉에 이르기를, ‘여러 도의 염분(鹽盆)과 어살은 등급을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서 호조에 보관하고, 장부에서 누락시켜 사사로이 차지한 자는 곤장을 친 다음 관청에서 몰수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산과 바다에서 나오는 이익을 개인의 집에 돌아가지 않게 한 것은 국가의 제도가 본래 그러한 것이니, 이 어찌 오늘날 행할 만한 규정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것을 먼 시대의 일이라고 하시나, 우리 선왕(先王 효종)이 남기신 뜻을 생각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여러 도에서 조사한 문적이 누차 올려지고 개정되다가 금년에 와서는 끝내 그 조처가 예전 틀로 돌아가고 말았다 합니다. 그리하여 곤궁한 백성들에게 신용을 잃고 팔방에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국가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여기에서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조종의 제도를 따르지 않으시고 또 선왕의 뜻을 계승하지 않으시고는 오직 임진왜란을 치른 뒤에 구차하게 인습하는 규정을 굳게 지키고 고집하여, 이를 마치 금석(金石)과 같은 법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앉아서 국가의 전지의 태반을 잃고도 걱정할 줄을 모르시니, 이는 또한 어째서입니까.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원스레 결단을 내리시어, 모든 산전(山田)과 해택(海澤)을 입안(立案)하여 절수받는 곳과 둔장(屯莊)에 모집된 백성들에게 잡역(雜役)을 시키지 못하게 하는 따위를 한결같이 모두 혁파해서, 이로써 하늘의 마음을 받들고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 주소서.”
하니, 상이 경연에 임하여 답하기를,
“조종조에서 사여한 것은 그대로 두고, 지금 이후로는 다시 시행하지 않는다면 근원 없는 폐단이 저절로 끊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간관(諫官) 김석주(金錫胄) 등이 아뢰기를,
“오늘날 옛 궁방(宮房)의 세액은 이미 감면하였으나 해수(海水)를 절수하여 점유하는 것은 예전 그대로이고, 새 궁방에서 관례에 따라 받은 것이 이미 수량이 찼는데도 격외(格外)의 입안을 또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물 하나 던지고 낚싯대 하나 드리우는 곳까지 각각 소속된 곳이 있어서, 유유히 흘러가는 물까지도 모두 궁방이라는 그물 속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어찌 조종조께서 처음 궁방을 만드신 뜻이겠습니까. 시장(柴場)의 폐단으로 말하면 더욱 심합니다. 깊은 산골짝은 거리가 멀어서 원래 나무를 채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이런 곳까지도 시장이라는 허명(虛名)을 붙여 거주하는 백성들을 관리하고 삼베와 곡식을 세금으로 거두니, 조종조에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직전법에 따라 결수를 더해 주고 면세의 한계를 정하여, 대군과 공주는 400결, 왕자군과 옹주는 250결로 하고, 시장(柴場)은 각각 한 곳만 헤아려서 남겨 두게 하고, 어장(漁場)과 망장(網場)은 오직 선조조(宣祖朝)에서 사여한 것만 남겨 두되 본인에게만 국한하게 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폐단이 여전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충청 감사가 아뢴 장계로 인하여 공주방(公主房)에 절수한 전지 내에 주인이 있는 민전(民田)과 절수하기 전에 백성들이 개간한 곳은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함부로 차지하는 자는 처벌하였다.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에 팔도(八道)에 큰 기근이 드니, 조정이 크게 놀랐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임자년(1672)에 크게 사정(査正)할 것을 거듭 명하고 감사로 하여금 금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일일이 장계로 보고하게 하였으나, 이후에도 절수가 여전히 많았다. 숙종 경신년(1680, 숙종6)에 여러 대신이 임자년 이후에 절수한 것은 다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궁가는 대부분 특별히 전교했다 하여 그대로 남겨 두었고, 여러 군문(軍門)은 다시 예전대로 회복할 것을 청하여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해 4월에 경상 감사 이세화(李世華)가 아뢰기를,
“본도에는 현재 절수할 만한 공한지(空閑地)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장 숙원방(張淑媛房)에서 차인(差人)을 여러 번 내려 보내 점유하고자 하였으나 매번 저지당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감사에게 먼저 물어서 공한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궁가의 차인을 내려 보내소서.”
하였다. 이 장계를 비변사에 내리자, 공이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도신(道臣)이 궁가를 통렬히 미워하여 매번 저지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묘당 또한 그 뜻을 그대로 따르니, 오늘날 조정의 정사는 너무 까다롭고 자질구레하다고 이를 만하다.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며칠 있다가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판부하신 내용이 준엄하시므로 신이 차자를 올려 죄를 자인하였으나 아직도 직명을 띠고 있으니, 비록 다시 중한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구구한 정성을 감히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상의 뜻은 아마도 ‘임자년(1672, 현종13)의 사목(事目)은 오로지 옛 궁가의 면세전이 지나치게 많은 것 때문이지, 신설한 궁가에 절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교하신 듯하니, 이는 밝게 통촉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그때 개정한 것은 본래 군읍(郡邑)에서 전지를 잃고 백성을 잃어서 끝없이 침탈당하고 점유당하는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어찌 후일 신설한 궁가를 위하여 그들이 절수받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습니까. 문서가 아직 남아 있으니, 다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백성이 불어난 것이 임자년에 비하면 몇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니어서 산택(山澤) 사이의 한 치나 한 자 되는 작은 땅도 모두 이미 경작하고 있으니, 실로 한 묘(畝)의 공한지도 없습니다. 임자년의 사목에 설령 새 궁가가 절수받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분명한 조문이 있더라도 백성들의 전지를 그저 빼앗는 도리 이외에는 결코 얻을 만한 땅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근년에 여러 도(道)에서 절수한 것이 너무 많아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고을 백성들이 징을 쳐서 원통함을 하소연하고, 도신(道臣)들이 장계를 올리며 대간(臺諫)들이 논계하여 그 어지러운 형세를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밝으신 성상께서 백성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모두 도로 내주게 하시니, 궁가에도 이익 될 것이 없었습니다. 이후로 종묘사직에 경사가 있어서 종손(宗孫)과 지손(支孫)들이 번성하여 새 궁가가 한없이 많아진다면 장차 어느 곳에서 절수해서 백성들의 전지를 부당하게 빼앗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변통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은 대책을 강구하여 잘 조처하도록 명하였다. 열흘 뒤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조종(祖宗)의 법전을 진실로 받들어 따라야 하고, 선왕조의 정식(定式) 또한 수량을 줄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계묘년(1663, 현종4)의 수교(受敎)를 한도로 삼아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떼어 준다면 400결에서 바치는 것이 마땅히 4백 6, 7십 석이 될 것입니다. 궁가로 하여금 이것을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받게 하고, 이 밖에 계하(啓下)하여 절수한 것과 사전(私田)의 면세 등을 모두 혁파한다면, 유사(有司)의 경비는 혹 줄어들겠지만 백성들의 전지를 빼앗아 백성들의 원망을 크게 사는 데 비한다면 사안의 경중과 이해관계가 현격하게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닙니다. 《경국대전》 〈제전(諸田)〉에 ‘군자감의 미두(米豆)로 바꾸어 준다.’라는 것은 사전의 면세가 도에 지나치게 시행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니, 이른바 ‘공적인 부세(賦稅)로 상을 주면 매우 족하다.’라는 것입니다. 다만 궁가의 절수는 비록 선왕조에 정한 한계가 있으나 호조에서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는 전지를 자세히 조사하지 못하고, 또 절수받은 곳에서는 전답에서 생산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대나무와 시탄(柴炭), 어산물(魚産物) 등의 물건도 모두 거두지 않음이 없으며, 도장(道掌)과 궁노(宮奴)가 이를 빙자하고 사사로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직전법(職田法)을 결행한다면 이러한 불법 행위가 모두 숨을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확고하게 정하여 흔들리지 않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직 후일의 새 궁가를 위하여 논한 것일 뿐이요, 옛 궁가는 선왕조 때에 한계를 정하여 면세한 것 외에 더 늘린 것은 해조(該曹)에서 개정해야 합니다. 당저(當宁)의 후궁은 인조와 효종의 일을 살펴보면 모두 절수하는 규정이 없는데, 지금 후궁을 하나는 200결, 하나는 150결로 한계를 정해 떼어 주라는 명령이 있으시니,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듣자 하니 절수할 때에 정한 한계를 채우지 못했다 하니, 규정 외의 일은 수량을 채우기를 기약할 것이 못 됩니다. 이후로는 다시 절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수진궁(壽進宮), 용동궁(龍洞宮) 등은 듣자 하니 조종조의 후사(後嗣)가 없는 궁가의 재산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왔는데, 면세의 결수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로 절수를 더하여 한계가 없다 합니다. 옛날에 절수한 것은 다시 혁파할 수 없으나 이후로는 또한 영원히 혁파해야 합니다.
또 염분(鹽盆)과 어살, 시장(柴場)과 원당(願堂) 등의 절수를 혁파하는 일은 또한 이미 여러 번 혁파하였으나 받들어 시행한 효험이 없으니, 이는 그 폐단이 전답의 절수보다 더욱 심합니다. 이제 일체 거듭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각 아문과 각 군문도 일체 시행해야 합니다. 또 이미 혁파한 곳도 대신 다른 곳으로 절수받기를 청하여 매우 분분하니,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을 막론하고 또한 일절 막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모두 재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현종조에 공주의 면세는 400결이고 부마(駙馬) 양위(兩位)가 생존해 있지 않으면 4대까지 150결을 주어 봉사(奉祀)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는 실로 너무 많아서 계속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명선(明善)과 명혜(明惠) 두 공주는 출가하기 전에 별세하였는데, 듣자 하니 지금 절수한 수량이 적게는 600여 결이고 많게는 1000여 결이라고 합니다. 양위를 봉사하는 데에도 줄여서 150결을 주는데, 한 위(位)를 봉사하는 데 그보다 더 늘어난 1000여 결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예제(禮制)의 등차에 부합하겠습니까. 선왕조 때에 정한 것도 오히려 따라 봉행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이후에는 절수를 허락하지 말도록 새로 성명(成命)을 내린들 어찌 받들 가망이 있겠습니까. 결코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400결은 다시 감할 수가 없으며, 그 나머지 정한 수량 이외의 전지는 어떻게 조처해야겠는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근래에 계하한 절수의 문서에는 으레 갑술년(1634, 인조12) 양안(量案)에 ‘주인 없는 한전(閒田)을 궁가에 주도록 허락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술년으로부터 이미 5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록 주인이 없었다 해도 백성들이 경작하여 자기 것으로 삼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있지도 않은 양안을 핑계 대고 빼앗아서 궁가에 넣고 있습니다. 이 두 궁에서 얻은 면세전도 반드시 각각 본래 주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수량 이외의 것을 혁파한다면 주인을 찾아내어 돌려주어서 성상의 덕스러운 뜻을 분명히 보여 민심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공이 이미 엄한 하교를 받고도 거듭 청하며 그치지 않자, 상이 감동하여 허락하였다. 공이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군주가 이와 같이 어진데도 우리들이 일찍 정성을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하의 죄이다.”
하니, 조당(朝堂)에서 모두 감탄하였다. 이후로 후궁의 절수도 200결을 정식으로 삼았는데, 한도를 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을해년(1695, 숙종21) 가을에 유상운이 좌상으로서 입대하여 200결 외에는 다 혁파할 것을 청하고, 또 수진궁, 명례궁, 어의궁, 용동궁 등 네 궁과 명선(明善)과 명혜(明惠) 두 방(房)에 대해 무진년(1688) 이후에 절수한 것을 혁파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이, 사여(賜與)한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하자, 모두 혁파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이 영상으로서 입대하여 아뢰기를,
“궁가에서 대수(代受)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으니, 이른바 ‘대수’라는 것은 오래전에 절수받은 곳을 어떤 일로 인하여 잃은 뒤에 그 대신 절수받은 것이니,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말하면 원통하고 억울하기가 똑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수한 결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호조 판서 이세화(李世華)가 대답하기를,
“수진궁은 수백여 결이고 명례궁은 1000여 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뜻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하고, 마침내 무진년(1688, 숙종14) 이후에 대수한 것을 다 내주도록 명하였다.
○ 이때 소론(少論)이 차츰 등용되어 위세를 드날리니, 대각(臺閣)에 출입하는 자가 걸핏하면 박세채(朴世采)를 끌어다 대며 이르기를,
“아무개 어른께서 말씀하기를,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일어난 이상 도와서 이루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공은 노론(老論)이 스스로 초래한 것임을 알았으나 사류(士類)들이 서로 해칠까 우려하여 말하기를,
“재야의 인물이 걸핏하면 후배들에게 구실거리가 되니,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의 일을 거울로 삼을 만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학질과 비슷해서 오한이 들었다가 다시 열이 나고 열이 나다가 다시 오한이 든다.’ 하였습니다. 신은 오늘날 조정의 행태를 보면 오한과 열이 그침이 없는 것과 같으니, 끝내 강둑이 터져서 물고기가 죽어 나가는데도 구원하지 못하고 멸망하는 지경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신은 매번 재상들이 과감히 말하는 기개를 도와주지 못해서 정과 뜻이 막혀 진달되지 못하여 국가에 폐해가 미치는 것을 큰 병통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언로를 열어 기휘(忌諱)함이 없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아야 한다고 지척에서 자주 아뢴 것입니다. 이제 성상의 잘못과 묘당의 죄과(罪過), 민생의 고통에 관계되지 않는 일로 인해 이리저리 번복하는 형세가 무궁한 근심이 될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헤아려 살펴 주소서.”
하였다. 이에 서로 격돌하는 자들이 모두 불쾌해하였고, 오직 임공 영(林公泳)과 박공 태보(朴公泰輔)만이 그 정당함에 감탄하고 공이 속으로 근심하고 있음을 알았다.
○ 공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자주 아뢰기를,
“중외(中外)의 군기(軍器)를 감독하여 만드는 자들이 조정의 물력(物力)으로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무기를 제조하고는 모두 은상(恩賞)을 받으니, 매우 외람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만들어진 규례라서 갑자기 혁파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이해 6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병조 판서 이익(李翊)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금위영(禁衛營)에서 조총(鳥銃)과 창검(槍劍) 등의 물건을 만드는 데 드는 정철(正鐵)을 구입할 때 사람을 모집해서 그 정철을 구매할 비용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사서 바치게 하는데, 물건을 모두 산 뒤에 원금을 도로 바치니, 원금도 없이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 병조 판서 이사명(李師命)이 재임했을 때에 많은 수량을 사서 바친 자가 있었고, 근래에 또 관리청(管理廳)에 내준 원금보다 더 바친 자가 있는데 그 수량이 1만여 근(斤)에 이르며, 이 사람 또한 원금을 도로 바쳤으니, 공로에 보답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전례를 상고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값을 주고 물건을 산 뒤에 본전을 도로 징수하고 논공행상하는 것은 실로 근래 여러 군문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군문의 처지에서는 이롭다고 이를 만하지만, 물건을 구매한 소득은 반드시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저절로 솟을 리가 없으니, 모두가 관청의 위세를 빙자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일을 일절 통렬히 금해야 할 것이요, 결코 조장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미 거두어들인 이상 전 수량을 내버릴 수 없다면 본 군문에서 편의대로 논공하여 시상해야 할 것이니, 조정에서 어찌 그 이익 낸 것을 계산해서 경솔히 상전(賞典)을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진실로 옳으니, 본 군문에서 논공하여 시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날 공이 아뢰기를,
“고(故) 좌윤(左尹) 이단석(李端錫)은 주군(州郡)과 감사(監司), 곤수(閫帥 병사)를 여러 번 역임하였는바, 청백한 한 절개는 실로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병들었을 때에 의원과 약을 써서 치료하지 못하였고, 초상났을 때에 입관(入棺)하고 염습(斂襲)하는 것도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정의 권면하고 장려하는 도리로 볼 때 별도로 구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제급(題給)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 이달에 공이 승문원(承文院) 관원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여 임영(林泳)과 오도일(吳道一)을 부제조(副提調)로 삼았다. 7월에 정언 정호(鄭澔)가 헐뜯기를,
“오도일에게 이 직책을 제수하니, 듣는 자들이 놀라고 분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리니, 상이 차자에 답하기를,
“이는 각박하고 바르지 않은 의논으로 본래 개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 이달에 이조 판서 박세채(朴世采)가 부름을 받고 인견할 적에 수차(袖箚)를 올리기를,
“지난해 사간원에서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혜민서 제조로 임명한 일에 대해 자못 오랫동안 의논하였는데, 밝으신 성상께서는 즉시 따르지 않으시고 대간(臺諫)들은 확고하게 고집하지 않았으니, 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잘못한 것입니다. 세도(世道)가 더욱 나빠져 인심이 좋지 못합니다. 성상께서 우대하고 총애하여 직책을 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주 접견하여 혹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하지 않으시니, 이를 듣는 자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이유를 따지고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함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동평군을 제조에 임명한 은전을 특별히 파하시고, 그 밖에 자주 접견하고 물건을 하사해 주심을 반드시 다른 종친들과 균등하게 하신다면, 실로 오늘날 동평군을 친애하고 보전하는 지극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한결같이 유독 그만을 편애하신다면 말류의 폐해가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고 말 뿐만이 아닐 듯합니다. 다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소서. 뜻하지 않은 일에 깊이 노여워할 것이 없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말에 심하게 집착할 것이 없으니, 이는 한때의 위엄으로 안정시키기가 어렵고 필경에는 도리로써만 설득할 수 있습니다. 대신(大臣)의 의구심을 풀어 주고, 중신(重臣)을 용서하여 돌아오게 하며, 언사(言事)로 인해 처벌된 사람을 거두어 등용하고, 규정 외의 은전을 혁파하는 데에 조금도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상하가 서로 막히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달리 대하는 단서가 모두 장차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개듯 사라질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인심이 안정되고 나랏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노하여 비망기를 내리기를,
“동평군은 인조조(仁祖朝)의 친왕손으로 대왕대비전에 문안하는 예가 다른 종신(宗臣)들과는 더욱 구별이 있다. 설령 자주 접견하고 물건을 하사하여 우대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더구나 원래 그를 자주 접견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한 번 제조에 특별히 임명한 뒤로 동종(同宗)과 친척들 사이에 실로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가 많아서 심지어는 태도와 안색에 나타내기까지 하니,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이런 모함하는 말이 주어(奏御)하는 문자에 오르기까지 할 줄은 생각지 못했으니, 종친부로 하여금 모함하는 말을 지어낸 자들을 오늘 안으로 즉시 적발하게 하고, 모두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라.”
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같은 종친을 모해하고 국가를 비방한 종친들을 조사하여 찾아내기 전에는 결코 그들을 문안하는 반열에 진참(進參)시킬 수 없다.”
하고, 즉시 자수하라고 명하였으며, 사관을 동평군에게 보내어 안심하고 공무를 수행하라고 전유(傳諭)하였다. 또 이러한 사실을 한결같이 굳게 숨겼다 하여 종친부 유사 당상인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을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로 인해 다음 날 아침에 이조 판서 박세채(朴世采)가 도성 밖으로 나갔다. 공이 빈청에 나아가 들으니, 승정원과 옥당이 청대할 때에 상이 마침내 전평군을 삭탈관직하도록 명하였고 종반(宗班)들에게는 문안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이조 판서 박세채에게 별유(別諭)를 내렸다고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나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상께서 이미 처분하셨으니 굳이 다시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은 우상 여성제(呂聖齊)에게 이르기를,
“상의 뜻이 불쾌해하고 계십니다만 이항에게 특별히 제수하신 명을 만약 환수하지 않으시면 끝내 사람들의 의혹을 풀 수 없습니다. 성상 앞에서 이러한 뜻을 다 아뢰지 않고 묵묵히 물러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청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해와 달이 다시 밝아졌으나 신들은 아직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동평군 이항을 접견하시고 물건을 하사하시는 것이 평상시의 규례와 다름을 박세채가 수차에서 언급한 것은 반드시 떠돌아다니는 소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동평군을 혜민서 제조에 임명한 것으로 말하면 대신(臺臣)의 의논이 있었고 이제 박세채의 말이 또 저와 같으니, 이는 진실로 국가의 법도를 한때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볍게 훼손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이항에게 제수한 직임을 체차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해도 이항이 도리로 볼 때 또한 반드시 체차되려고 했어야 할 것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체차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무릇 군주가 신하를 대우할 때에 조금이라도 정해진 분수를 넘으면 폐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며, 종반(宗班)의 경우는 지위가 혐의를 받기가 매우 쉽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 효종대왕은 인평대군(麟坪大君)에 대한 돈독한 우애가 전고의 제왕들보다 훨씬 뛰어나셨으니 한결같이 국법으로 재단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효종께서는 현종대왕(顯宗大王)에게 명하시어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동기간처럼 대하라고 당부하셨는데, 이정(李楨)과 이남(李柟) 등은 은총을 믿고서 도리어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이 자라났습니다. 이 때문에 고(故)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은미할 때에 막고 잘 대처하는 방도를 지극히 아뢰었던 것입니다. 송준길의 문집을 성상께서 일찍이 어람(御覽)하셨으니, 밝으신 성상께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때 현종께서는 비록 송준길의 말을 우대하여 받아들였으나 역시 그 말을 다 채택하여 시행하지는 않으셨는데, 점점 누적된 화가 끝내는 경신년의 일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모두 전하께서 몸소 겪고 보신 것이니, 가슴 깊이 거울로 삼고 경계함이 옛날 역사책에 기재되어 있는 범범한 일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평군에게 또다시 과분한 은총을 더해 주시니, 신은 삼가 두렵습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가 이제 10여 년인데 아직 후사(後嗣)가 없으시니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하여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가까운 종친 가운데에 격외(格外)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남의 비난하는 말을 부르기 쉬우니, 더욱 성상께서 깊이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소원한 신하들은 비록 마음속에 품고 있더라도 반드시 감히 성상께 여쭙지 못할 것이니, 신과 같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또 감히 아뢰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어디에서 이러한 말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종친들 중에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낸 자를 적발해 내는 일은 본래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그 일을 직접 보셨다면 죄상이 명백한 자를 특별히 명하여 정죄(定罪)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일을 유사 당상이 어디에서 조사해 내겠습니까. 가령 종친들이 참으로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는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기꺼이 자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유사 당상의 죄이겠습니까. 만약 유사 당상이 성상의 위엄에 겁을 먹고서 허실을 따지지 않고 강제로 아무아무를 지정하여 책임을 면하려고만 한다면 그 죄가 도리어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즉시 조사하여 아뢰지 않은 것을 죄로 삼으시니, 비록 잡혀 가서 심문을 당하고 삭직되는 것은 면하였으나 또한 어찌 매우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동평군을 친애하고 우대하심은 실로 성상의 훌륭하신 덕이지만 다른 종친들 또한 똑같이 정의가 두터운 친족입니다. 그런데 종친들을 엄하게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모두 황송하고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동시에 대궐 문밖에서 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가 참담하고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으니, 윤리를 돈독히 펴는 도리를 손상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일찍이 직접 보신 것이 어떠한 사람이고 어떠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그것이 한 번 정해져서 바뀔 수 없는 언사(言辭)나 문자(文字)가 아니라면 단지 태도와 안색에 나타났다 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비방했다고 의심해서 죄로 단정하실 경우 한(漢)나라 때에 입을 다물고 그저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것을 처벌하던 법률과 같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백관과 서민들을 다스리더라도 법조문만 까다롭게 따지는 격이 되는데, 더구나 친족인 종친의 경우이겠습니까. 또 박세채는 전하께서 높이 발탁하여 불러와서 예우함이 어떠하셨습니까. 그런데 출사(出仕)한 지 한나절 만에 한마디 말이 부합하지 않는다 하여 마침내 말의 출처를 조사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고, 말의 출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종친부의 유사 당상에게 삭탈관직의 죄를 내렸으니, 박세채로 하여금 안심하고 조정에 있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찌 이러실 수가 있겠습니까. 또 박세채가 조정에 있으면 앞으로 국가의 일에 무슨 도움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일 때문에 갑작스럽게 물러간다면 언로(言路)에 해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현자를 좋아하시는 성상의 덕에도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예로부터 군주가 현자를 대우할 적에 정성과 예(禮)가 조금만 줄어들어도 오히려 초심(初心)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제 불러오고 오늘 배척하는 것이 잠깐 사이에 일어나고 있으니, 신들은 산림에서 자중(自重)하는 선비들이 이 때문에 전하의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원치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어찌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동평군에게 제수한 혜민서 제조의 직임을 해면하도록 허락하시고, 전평군을 삭탈관직하도록 한 명령을 환수하신다면, 조정의 처분이 십분 마땅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박세채를 만류하는 방도에도 마땅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사람을 속으로는 싫어하고 하찮게 여기시면서 겉으로만 예로 구속하시는 것이니, 성심으로 대하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또 어제 사관을 보내어 동평군에게 전유(傳諭)하게 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예로부터 왕손(王孫)에게 사관을 보낸 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무릇 사관은 대군(大君)과 왕자(王子), 대신(大臣)에게만 보내거나, 혹은 유현(儒賢)을 우대할 때에만 보냈습니다. 지난번 국구(國舅)에게 사관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이것도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으니, 더구나 동평군이겠습니까. 일이 정당하지 못함이 동평군을 혜민서 제조에 제수한 것보다도 더 심하니, 전하께서는 비록 편벽되게 후대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이 속으로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실상이 없으면 사람들의 말이 저절로 그치게 마련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위엄으로 제압하여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실로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이에 상은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박세채의 차자는 혹 일반적인 이야기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정과 이남의 일과 나라에 왕세자가 없다는 등의 말로써 동평군을 의심하기까지 하였으니, 남구만을 국문함이 마땅하다. 어찌 다만 제조를 체직할 뿐이겠는가.”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것은 바로 예전의 일을 인용하여 훗날의 경계로 삼으려는 뜻이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겨우 대궐 문을 나오자, 상은 즉시 멀리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고, 우상 여성제도 이와 같이 처벌하였으며, 이조 판서 박세채를 체차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두려워 떨었으며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고 삼사에서 야대(夜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대신이 청대하기에 장차 전평군(全坪君)을 삭탈관직하라는 명령을 환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사람을 악역(惡逆)의 죄과(罪科)에 몰아넣었으니, 그대들이 어찌 감히 저들을 구원하려고 도모한단 말인가?”
하니, 교리(校理) 유득일(兪得一)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남구만을 정승의 자리에 둔 지가 여러 해이니, 그의 심사를 반드시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구만은 평소에 강직하고 분명하며 정직하여 동요하거나 굽히지 않으므로 내가 또한 보상(輔相)의 책임을 맡긴 것인데, 그가 이와 같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양사(兩司)의 관원을 모두 해임하고 유득일을 파직하였다. 상이 전교하기를,
“죄인에 대한 배소 단자(配所單子)를 2경(更) 전에 입계(入啓)하고, 이들을 압송하는 의금부 도사는 성문을 유문(留門)했다가 출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공을 영암(靈巖)으로 유배 보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남구만 등이 마음 쓴 자취로 보아 결코 귀양 보내는 것만으로는 그칠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여상(呂相 여성제)은 경원(慶源)에 위리안치되었다. 헌납(獻納) 홍수헌(洪受瀗)이 명령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다가 원지(遠地)에 보임되었다. 사헌부에서 또다시 환수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승정원에서 복역한 것은 대충 책임만 면하려 하고 전지를 받들어 행하였으니, 해당 승지를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속히 정계(停啓)하고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며칠 있다가 좌상 조사석(趙師錫)이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아뢰기를,
“남구만은 박세채의 말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말한 것이 아니요, 개연(慨然)히 아뢰고자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남구만은 평소 강직함이 드러나서 성상께서 의지하고 소중하게 여기셨는데 하루아침에 위리안치되니, 어찌 성덕(聖德)에 큰 과오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구만의 품성이 강직하고 방정함은 나도 안다.”
하였다. 25일에 양사가 합계하여 환수할 것을 청하고 옥당에서 네 차례 차자를 올렸다. 좌상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망극한 무함을 당한 것은 실로 동평군에 대한 말과 동시에 일어났는데, 진실로 사체가 평상시의 격식과 다르다 하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남을 헐뜯는 말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남구만이 세도(世道)를 깊이 우려하여 이미 경연에서 심사를 밝혔고, 또한 일찍이 동평군의 일을 한 번 아뢰고자 한다는 말을 신이 전에 들었습니다.”
하였다.
○ 8월에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차자로 아뢰어 유배 보낸 신하를 거두어 돌아오게 해서 옛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청하였다. 공은 이미 북쪽 지방에 은혜로운 교화를 베풀었으므로 부로(父老)들이 모여서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경원, 종성(鍾城), 온성(穩城)의 유생 다섯 사람이 경흥까지 공을 따라와서 옛날 배웠던 것을 강하여 외웠다. 공이 이들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여러 학생들 날마다 내 앞으로 찾아오니 / 躚躚學子日來前
서로 대하니 변방으로 귀양 온 것 잊게 하네 / 相對還忘絶塞遷
북두로 취하고 키로 까부름 천명에 맡기고 / 挹斗揚箕元委命
글줄을 찾고 글자를 봄 또한 인연에 따른다오 / 尋行數墨且隨緣
평소에 하는 일 여기에 그칠 뿐이니 / 生平素業止斯耳
분수 밖의 황비는 일찍이 우연이었네 / 分外黃扉曾偶然
글 읽는 소리 누워서 들으며 세월을 보내노니 / 臥聽伊吾聊自遣
원망과 허물 끝내 사람과 하늘에 미치지 않노라 / 怨尤終不及人天
하였다. 이윽고 장렬왕대비(莊烈王大妃)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받들어 듣고 지은 만시(輓詩)의 서(序)에 이르기를,
“옛날 소식(蘇軾)이 유배 중에 태후(太后)의 부음(訃音)을 들었으나 곡하려 해도 곡할 수가 없고 울려 해도 울 수가 없어서 만사(輓詞) 두 장(章)을 지었는데, 그 한 구에 이르기를, ‘한 번 소리 내어 통곡하는 것도 오히려 할 곳이 없다.〔一聲痛哭猶無所〕’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죄지은 이 신하가 만난 처지이다. 슬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며 또 감히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차운하여 만사에 대신하는 바이다.”
하였다.
○ 10월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자신에게 제수한 혜민서 제조의 직임과 사관을 보내어 전유한 것을 사양하자, 상이 모두 따랐다. 이달 빈청 인견 때에 호조 판서 유상운(柳尙運)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경상 감사 이세화(李世華)가 궁장토(宮莊土)를 막는 것에 관해 올린 장계 때문에 엄한 하교를 내리셨는데, 남구만이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하여 들어와서 자기의 생각을 숨김없이 고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성상의 노여움을 초래할 것이라고 여겼고, 애당초 전하께서 채택하여 시행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가짐이 변함이 없어 일을 논할 적에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궁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지난번에 청대할 때에도 종친의 신하를 언급하면서 속마음을 다 펴서 아뢰었다가 성상의 격노를 초래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겨울철에 우레가 치는 변고로 인하여 옥당에서 어진 재상이 견책당한 일을 아뢰었다. 이날 온 조정이 다투어 간쟁하자, 상이 묵묵히 한동안 있다가 이르기를,
“나 또한 신하들이 사사로이 당색을 비호한다고 다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서 어진 재상을 위리안치하게 하여 천재지변을 초래하였으나, 천재지변을 남구만과 여성제 두 신하가 죄를 입은 소치로 돌리고자 하니 이는 내가 실로 승복할 수가 없다. 옛말에 이르기를, ‘총애하는 길을 열어 놓아 업신여김을 불러들이지 말라.’ 하였으니, 만약 은총과 예우가 편중됨을 가지고 말한다면 일이 발생하기 전에 경계한 것이라고 핑계 댈 수 있다.”
하였다. 6일이 지나 경종(景宗)이 탄생하였다.
○ 11월에 상이 인견할 적에 위리안치를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다음 날 영상 김수흥(金壽興)이 참작할 것을 청하자, 상이 공은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여 풀어 주고 여 정승은 죄를 감등하여 삭탈관직하도록 명하였다. 양사에서 합계(合啓)하여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는 것을 환수하도록 청하였는데, 며칠 있다가 좌상이 입대하여 완전히 석방할 것을 거듭 청하자, 상이 삭탈관직을 명하고 이르기를,
“남구만이 평소에 강직하고 방정함을 내 본래 알고 있으나 그가 아뢴 것이 지극히 괴이하므로 놀라움을 이길 수 없다. 이제 이미 대신(大臣)과 신하들이 전후로 아룀으로 인하여 그의 본심을 알았으니, 이후 점차적으로 하겠다.”
하였다. 이에 합계가 비로소 정지되었다.
○ 12월에 상이 공의 직첩(職帖)을 환급하도록 명하였다.

61세 기사년(1689, 숙종15)
1월에 서용되어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이달에 누원(樓院)에 있는 총사(冢舍)에 이르렀다.
2월에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윤3월에 동쪽 교외로 나아가 대명(待命)하였다.
4월에 상이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도록 명하였는데, 양사에서 마침내 중도부처(中道付處)할 것을 청하여 강릉(江陵)에 부처되었다. 이달에 중궁(中宮)이 폐위되었다. 겨울에 서자(庶子) 남학성(南鶴聲)이 출생하였다.

○ 1월에 공이 누원에 이르렀다. 2월에 상소문을 올리고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시장의 백성 2, 3백 명이 서로 잇따라 찾아와서 문후하였다.
○ 이달에 상이 남인(南人)을 기용하였고 김만중(金萬重) 등을 끝까지 조사하였다.
○ 윤3월에 숙안공주(淑安公主)의 아들 홍치상(洪致祥)이 자백하였다. 상은 공이 홍치상으로 하여금 3년 동안 버젓이 편안히 있게 하였다고 허물하고 다시 비망기를 내려 유배 보냈다.
○ 정묘년(1687, 숙종13) 9월 인견할 적에 승지가, 공이 동쪽 교외에 나아가 대명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4월에 연신이 다시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자신이 대신이면서 도리어 사실을 은폐하여 행여 소문의 출처가 혹 탄로 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내 이미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 뜻을 보였다. 그런데 대각(臺閣)에서는 아직까지 조용하기만 하니, 자못 이해할 수가 없다.”
하고, 공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라고 명하였다. 며칠 있다가 양사에서 각각 중도부처할 것을 청하여 공을 강릉에 부처하였다.
○ 5일 뒤에 중궁이 폐위되었다. 공이 도중에 대화역(大和驛)에 유숙하였는바, 꿈속에서 정승 정태화(鄭太和)와 홍명하(洪命夏)가 함께 입대하였는데 국가에 큰일이 있어 분위기가 몹시 참담하였다. 잠을 깨고는 놀라 이 일을 기록하였다. 다음 날 강릉에 이르니, 이달 27일이었다. 5월 3일에 들으니, 생질인 박태보(朴泰輔)가 중궁의 폐위에 대해 간하다가 국문(鞫問)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꿈을 꾼 날 밤이었다. 열흘 뒤에 꿈속에 박생(朴甥)이 얼룩말을 타고 와서 절을 하며 마치 먼 길을 떠나려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는데, 다음 날 아침에 박생의 부음(訃音)이 이르렀다. 공이 위로는 중궁을 위하여 애통해하고 아래로는 박생을 위하여 통곡하였다. 이때 영동(嶺東)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아침저녁의 끼닛거리도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혹 술상을 차려 가지고 와도 공은 받지 않고, 혹 때로 한송정(寒松亭)과 경포대(鏡浦臺)에 나가 놀 것을 청하여도 문밖에 나가지 않고 이르기를,
“내가 남해에 유배 갔을 때는 혹 나가 놀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감히 하지 못한다.”
하였다.

62세 경오년(1690, 숙종16)
4월에 소결(疏決)로 인하여 방면되어 돌아왔다.
5월에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11월에 누원(樓院)에 성묘하고 서계(西溪)를 방문하였다.

○ 지난해에 영동 지방이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공이 오던 날 큰비가 내리니, 백성들이 모두 ‘상공우(相公雨)’라고 말하였다. 다음 해 이날에 상이 가뭄 때문에 소결하여 공을 석방하였는데, 다음 날 큰비가 내리니, 도성 백성들도 모두 ‘상공우’라고 말하였다.

63세 신미년(1691, 숙종17)
3월에 홍주(洪州)에 성묘하였다.
7월에 학질을 앓았다.
윤7월에 강교(江郊)에 나아가 치료하였다.
8월에 화곡(花谷)의 총사(冢舍)에 머물렀다.
12월에 결성(結城)으로 돌아와서 피를 많이 토하였다.

○ 공은 평소에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을 담론하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책을 보고 침잠하여 한결같이 몸소 행하고 마음속에 자득(自得)하는 데에 힘썼다. 일찍이 동지경연사로서 《심경(心經)》을 시강(侍講)할 때에 아뢰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는 비록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말이라도 유도(儒道)와 서로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쏟은 뒤에야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방심(放心)하고 독서한다면 끝내 생각하여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평소 뜻을 세우고 몸을 검속한 것을 살펴보면 국사에 매진하고 간결함으로 자신을 지켜서 작은 덕(德)에서도 출입한 것이 드무니,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울 뿐만이 아니었다.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은 뒤에도 매년 생일날에 부모가 계시지 않다 하여 자손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과부가 된 누이가 공의 처소에서 염병에 걸리자 공이 직접 애쓰며 병을 간호하다가 병이 차도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내보냈다.
○ 이때 화곡(花谷)에 머물면서 묘표(墓表)를 장만하여 세웠으며, 10월에 비석이 있는 곳에 가서 작은 글자를 썼다.
○ 일찍이 선친의 대상(大祥) 뒤에 한 달이 넘도록 피를 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피를 많이 토하여 매우 위태로웠다. 4년 뒤 가을에 묘소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고, 종제(從弟)와 일찍 죽은 아들의 묘에도 모두 몸소 제사를 지냈다. 평강(平康) 부군(府君)의 묘소가 매우 높은 곳에 있었는데, 공은 7십 8, 9세에 이르렀으나 정월 초하루에 또한 몸소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64세 임신년(1692, 숙종18)
○ 이보다 앞서 을묘년(1675) 여름에 공은 해미(海美)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수원동(水源洞)의 빼어난 산수(山水)를 감상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려는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그 이름을 수산재(隨山齋)라고 정하였으니, 당시(唐詩)의 “산을 따라 수원이 있는 곳에 이른다.〔隨山到水源〕”라는 말을 취한 것인데, 서재(書齋)가 끝내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해 여름에 다시 수원동을 찾아가서 놀고 12년 뒤 여름에 또 그렇게 하였으니, 이는 늙을 때까지 싫어하지 않은 것이었다.
별세한 지 수년 만에 문인 강성복(姜聖復)이 당진 현감(唐津縣監)으로 있으면서 영당(影堂)을 경영하여 지었다. 공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갈 적에 화사(畫師)인 변량(卞亮)으로 하여금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