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choyeung 2009. 1. 26. 21:00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신라시대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을 새긴 보물 제1411호인 32cm 크기의 비석이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등의 74자가 화강암에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제1411호인 임신서기석

 

임신서기석의 원문과 번역문


壬申誓記石 원문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七月二十二日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壬申誓記石 번역문

임신년 6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하노니, 지지금부터 3년 후에 충성의 길을 따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잃으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임을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이 먼저 신미년 722일에 크게 맹세하였으니, 시경(), 서경(尙書), 예기(), 춘추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로 맹세하며 3년 동안 하기로 했다.

 

 

壬申年六月十六日

임신년 616일에

二人幷誓記

두 사람이 나란히 맹세하여 기록한다.

天前誓

하늘 앞에 맹세하노니,

今自三年以後忠道執持

지금부터 3년 후에 충성의 길을 따라 지키고

過失无誓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若此事失天大罪得誓

만약 이 맹세를 잃으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임을 맹세한다.

若國不安大亂世可容 行誓之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又別先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또 따로이 먼저 신미년 722일에 크게 맹세하였으니,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시경(), 서경(尙書), 예기(), 춘추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로 맹세하며 3년 동안 하기로 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다. 굳게 다짐한 말이라도 삼일을 넘기지 못하는 세태를 꼬집어 하는 뜻이다. 보물 제1411호인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는 돌을 보면 신라의 두 화랑은 작심삼년에 걸쳐 돌에 글까지 새겨 맹세까지 하였다. 이런 사실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역경(易經 계사상전(繫辭上傳)이인동심기리단금(二人同心其利斷金)’이라는 구절에서 나온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라도 끊을 수 있다는 의미의 말이다. 우리들이 신라의 두 젊은이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1934년에 일본인이 임신서기석을 발견

 

해방되기 10년전인 일제강점기의 193454일에 경주 계림초등학교의 전신인 경주보통학교의 교장으로 경주 고적보존회 회장 및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을 지낸 일본인 오사까긴따로(大阪金太郞)가 금장대 부근에서 글씨가 음각된 이 귀한 돌을 주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대 유명한 양지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그의 발에 냇돌(川石) 하나가 걸렸다. 길이 32(높이 32cm, 너비 12.3cm, 두께 4.6cm, 두께 4.6cm)에 지나지 않은 냇돌에 새겨넣은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면밀히 살펴보니 5줄에 모두 74자나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351218.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둘러보다가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새겨진 글자 가운데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이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였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러다 광복되면서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임신년 시기에 대한 해석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임신년이 신라 어느 왕대 어느 시기는 스에마쓰는 이 임신년은 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이나 성덕왕 때인 732년 둘 중에 하나일 것이며, “내 생각으로는 성덕왕 때인 732년에 무게를 두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하나로 통일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나라가 안정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어쨌든 일제 강점기에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광복 후 역사학자인 이병도박사(1896-1989)가 다시 이 서기석을 관찰하고 종합적인 해석을 내렸다. 글이 쓰인 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였다. 스에마쓰 주장과는 무려 120년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운데 시경· 상서· 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

 

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541-630)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청년의 요청을 받아 알려준 다섯 가지 수신계(修身戒)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유신(交友有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이 덕목들은 후에 화랑(花郞)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비석의 내용은 신라시대의 두 친구가 유교 경전(儒敎 經典)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맹세한 글인데, 그 내용보다는 표기방식에 주목할 만하다. 이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자는 한자이되,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 식으로 어순을 재조정하여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고유의 문자가 없던 고대에 선조들이 어떻게 우리말을 표기했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자를 빌려 썼지만, 그 정신만은 우리말의 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신라가 한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의 영향권에 들어감을 의미하고 유교와 같은 중국인의 정신체계가 당시 화랑도의 의식구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광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이러한 목표의 실천 덕목으로 볼 수 있다. 오계는 사상배경이 불교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다고는 볼 수 없으며 당시의 사회적 지도이념으로 볼 때 유교의 충 효 신 용 인(, , , , ) 오덕목(五德目)이나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영향도 크다고 하겠다. 즉 이는 원광이 승려가 되기 이전에 이미 유학이나 도교의 교리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신라사회에서의 유교는 종교로서 보다 학문적·사상적 입장에서 주로 영향을 끼쳤으므로 화랑도 역시 큰 영향을 입었음을 물론이다.

 

화랑도의 교육내용

 

첫째 화랑도의 수련은 종교교육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원시사회에서는 종교가 바로 생활이요, 교육이었던 만큼 초기 화랑단은 그들이 수행하는 종교의식을 통하여 그 사회의 윤리나 법속을 자연스럽게 익혀갔던 것이다.

신문왕 2년에 설립한 통일신라의 국학에서는 논어· 효경· 예기· 주역· 좌전· 모시· 춘추· 상서· 문선 등의 교재를 학습한 것으로 보아 화랑도들도 상기 종류의 경서를 중심으로 교육하였음이 분명하다.

 

둘째, 정서도야를 중시했다. 즉 가무· 음악· 시가 등을 즐김으로써 정서를 순화했다. 청년집회의 기능 중 주술적 가무는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청년집회의 가무는 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범제의 핵심을 이룬다.

 

셋째로는 "유오산수(遊娛山水)" 로 표현된 국토순례의 교육과정이다. 화랑도의 청소년 집단은 처음에는 향토인 경주를 중심으로 삼화령, 삼산, 오악 등으로 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으나, 후일 영토확장에 따라 강원도의 동해안 금강산, 경포대, 삼일포 등지의 먼 곳까지도 찾아 다녔다. 이렇듯 자연을 인격수양의 도장으로 삼아 실제로 큰 성가를 올렸던 신라인들의 발상은 선인들의 유풍을 본받아 유례없이 훌륭한 것이라 하겠다.

 

넷째로 군사적인 기능의 습득을 위한 무술훈련을 중시하였다. 이는 청소년 집회의 군사적 훈련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화랑집단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이다. 통일기의 화랑교육의 과정은 덕육과 지육, 체육과 정서교육, 그 위에다 강건한 군인정신과 무술훈련 등 다양한 내용을 통하여 국가 유위의 이상적인 인재를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경주 양남면 해안지역에서 탐석한 길이 23cm의 화강석(수석 한면)에 임신서기석의

"시 상서 예전 윤득 서삼년 詩 尙書 禮傳 倫得 誓三年일부를 졸필로 새김 



평원석으로 놓인 좌대 수석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