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choyeung 2009. 2. 16. 10:42

조지훈의 [돌의 미학] 중에서

 

  돌에도 피가 돈다. 나는 그것을 토함산 석굴암(石窟庵)에서 분명히 보았다. 양공(良工)의 솜씨로 다듬어 낸 그 우람한 석상의 위용은 살아 있는 법열(法悅)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인공이 아니라 숨결과 핏줄이 통하는 신라의 이상적 인간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 신라인의 꿈 속에 살아 있던 밝고 고요하고 위엄 있고 너그러운 모습에 숨결과 핏줄이 통하게 한 것은, 이 불상을 조성한 희대의 예술가의 드높은 호흡과 경주(傾注)된 심혈이었다. 그의 마음 위에 빛이 되어 떠오른 이상인의 모습을 모델로 삼아 거대한 화강석 괴(花崗石怪)를 붙안고 밤낮을 헤아림 없이 쪼아 내고 깎아 낸 끝에 탄생된 이 불상은 벌써 인도인의 사상도 모습도 아닌 신라의 꿈과 솜씨였다.  

 

 

석굴암의 중앙에 진좌(鎭座)한 석가상은 내가 발견한 두 번 째의 돌이다. 선사의 돌에서 나는 동양적 예지(叡智)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지혜의 돌이었다. 그러나, 석굴암의 돌은 나에게 한국적 정감의 계시를 주었다. 그것은 예술의 돌이었다. 선사(禪寺)의 돌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으나, 석굴암의 돌은 인공이 자연을 정련(精鍊)하여 깎고 다듬어서 오히려 자연을 연장 확대한 돌이었다.  

 

나는 거기서 예술미와 자연미의 혼융(混融)의 극치를 보았고, 인공으로 정련된 자연, 자연에 환원된 인공이 아니면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예술은 기술을 기초로 한다. 바탕에 있어서는 예술이나 기술이 다 ‘art’다. 그러나 기술이 예술로 승화(昇華)하려면 자연을 얻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공을 디디고서 인공을 뛰어넘어야 한다. 몸에 밴 기술을 망각하고 일거수 일투족이 무비법(無非法)이 될 때 예도(藝道)가 성립되고, 조화와 신공(神功)이 체득된다는 말이다.  

 

나는 석굴암에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다. 둘에도 피가 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 앞에서 찬탄과 황홀이 아니라 감읍(感泣)하였다. 그것이 불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 예술의 한 고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자비로운 입 모습과 수렷이 내민 젖가슴을 우러러보았고, 풍만한 볼기살과 넓적다리께를 얼마나 어루만졌는지 모른다.  

 

내가 석굴암을 처음 가던 날은 양력 4월 8일 , 이미 복사꽃이 피고 버들이 푸른 철에 봄눈이 흩뿌리는 희한한 날씨였다. 눈 내리는 도화불국(桃花佛國) ─ 그 길을 걸어가며, 나는 벽장운외사  홍로설변춘(碧藏雲外寺 紅露雪邊春)의 즉흥일구를 얻었다. 이 무렵은 내가 오대산에서 나와서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을 돕고 있을 때여서, 뿌리 뽑히려는 민족문화를 붙들고 늘어진 선배들을 모시고 있을 때라 슬프고 외로울 뿐 아니라, 그저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을 때였다.  

 

이 때에 나는 신앙인의 성지순례와도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찾았던 것이다.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신라는 서구의 희랍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피가 돌고 있는 석상에서 영원한 신라의 꿈과 힘을 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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