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choyeung 2009. 3. 9. 20:21

아래는 조선왕조 실록(헌종12년, 1846년)의 나와있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1821-1846)의 기록이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고향인 충남 당진에 조부와 부모가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 났으며 박해가 심하자 부모와 같이 6살때부터 서울과 경기도 용인으로 피난생활을 하였다. 조부와 아버지는 조정의 박해로 체포되어 순교한 성인이었다. 김대건은 15세 때에 밀입국한 프랑스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신부가 용인(골배마실)을 방문하였을때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사제교육을 받도록 중국의 마카오에 신학생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프랑스 외방선교회에서 21세가 되도록 6년간을 철학, 신학등을 공부하고 라틴어와 프랑스어,중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사제는 만 2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하여 1845년에야 다시 마카오에 건너갔을때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가 국내 전교와 더불어 중국에서 들어오는 외국신부들의 항로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결국 황해도에서 체포되었으며 그가 옥중에 갇혀서도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영국의 세계지도 한 장을 번역하였고, 두 장의 세계지도를 만들었으며,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서양 문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재능은 임금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온갖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굽히지 않자 40여 차례의 심한 문초와 형벌 끝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용산나루터인 새남터에서 일생을 마쳤다.

 

특히 김대건이 1846년에 프랑스어로 작성한 조선전도(Carte de la Corёe)는 현재 그 원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8년 사본이 국내에 입수되어 현재 국회도서관과 독도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조선전도에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명기되어 있고 프랑스는 이를 근거로 1855년에 제작한 <조선전도>에는 프랑스 리용의 지리학회보『地理學會報』에 축소 수록되었고, 6개국어로 번역되어 서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이 허무맹랑하게 주장하는 독도문제는 김대건의 지도로 인하여 더한층 빛을 잃게 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쇄국정치로 일체 외국과의 교류를 금하면서 외국인의 출입을 금지한 실정이었다. 이미 중국은 1400년전부터 서방 종교가 들어와서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450년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오고 외국과 교류를 하였으나 한국은 약 200년전인 1800년대에 비로소 중국을 왕래하는 이승훈과 같은 선비를 통하여 천주교(서학)가 몰래 소개되고 차츰 전래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놀랍게도 전세계적으로도 한 국가에서 한 분의 사제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천주교를 따르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전파된 것은 사례가 없었던 사실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유로 외국에 대한 경계와 외국인의 출입금지를 크게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천주교는 서구의 사상 혹은 종교라는 점으로 서구라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당시의 조정이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두번째 기독교의 이론 자체가 유일신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음을 알고 천주교가 들어왔을때 조상에 대한 제사나 일반적인 의례등이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세번째 소외된 지배층, 이른바 서인(西人)에게 밀려난 남인(南人)들 중에 일반적 인식이 별로 좋지 못한 천주교 신도가 많았다는 것은 서인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몰아 간 것이다. 네번째 천주교가 갖고 있는 평등사상, 즉 신(神)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이 신분제 사회인 조선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위기감등을 가진 것이 원인이었다.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하였고 정쟁의 수단으로 금지와 배척된 점이 많았다. 그러나 헌종시대가 끝나고 다음의 철종대에는 비로소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풀리기 시작하였지만 고종시대에 대원군의 쇄국정치로 다시 탄압이 시작되었다. 

   

 

1. 憲宗 13卷, 12年(1846 丙午 / 청 도광(道光) 26年) 5月 20日(甲戌) 1번째기사 -김정집이 이양인(異樣人-외국인) 김대건을 가둔 일을 핵사하게 하다

 

황해 감사 김정집(金鼎集) 이 이양인(異樣人) 김대건(金大建) 을 잡아 가둔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엄히 핵사(覈査)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6장 A면 【영인본】 48책 513면

 

2. 憲宗 13卷, 12年(1846 丙午 / 청 도광(道光) 26年) 7月 15日(戊戌) 1번째기사 -약원의 입진을 행하고, 불랑국(프랑스)의 글과 김대건 문제를 의논하다

 

 

<해석> 임금이 중희당(重熙堂) 에 나아가 약원(藥院 -궁중의 의약(醫藥)을 맡아보던 관아를 이른다)의 입진(入診)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불랑국(佛朗國 불란스 : 프랑스) 의 글을 보았는가?” 하자,

 

▶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이 말하기를, “과연 보았는데, 그 서사(書辭)에는 자못 공동(恐動)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또한 외양(外洋)에 출몰하며 그 사술(邪術)을 빌어 인심을 선동하며 어지럽히는데, 이것은 이른바 영길리(英?唎) 와 함께 모두 서양의 무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 김대건(金大建) 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자,

 

▶ 권돈인 이 말하기를, “ 김대건 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해야 마땅하다. 이재용(李在容) 의 일로 말하더라도 추후에 들으니, 이재용 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없고 바로 현석문(玄錫文) 이 이름을 바꾼 것이라 하는데, 이제 현석문 이 이미 잡혔으니, 이른바 이재용 을 어느 곳에서 다시 잡겠는가?” 하자,

 

▶ 권돈인 이 말하기를, “이른바 이재용 이 성명을 바꾸고 성안에 출몰한다 하는데, 추포(追捕)하는 일은 진위(眞僞)가 가려지지 않았으니, 포청(捕廳)의 일이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년 봄에 반드시 소요가 있을 것이다.” 하자,

 

▶ 권돈인 이 말하기를, “내년 봄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도 소요가 있습니다. 항간에 사설(邪說)이 자못 많은데, 이것은 오로지 그 글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의혹하여 현혹됨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빨리 그 글을 내려서 사람마다 보게 하소서. 그런 뒤에야 절로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으로는 주문(奏聞)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임진년(壬辰年)에 영길리(英吉利-잉글란드:영국) 의 일 때문에 주문한 일이 있는데, 이것과 다를 것이 없을 듯하다.” 하니,

 

▶ 권돈인 이 말하기를, “이것은 임진년과 차이가 있습니다. 영길리(英吉利-잉글란드:영국) 의 배가 홍주(洪州) 에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는 10여 일이나 머물렀고, 그들이 교역(交易) 따위의 말을 하였으나 사리에 의거하여 물리쳤으며, 또 곧 정상을 묻고 그 동정을 상세히 탐지하였으므로, 주문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번에 불랑선(佛朗船) 이 외양(外洋)에 출몰하였을 때에는 섬 백성을 위협하여 사사롭게 문답하고, 그 궤서(櫃書)를 반드시 바치게 하려고 말끝마다 반드시 황제를 칭탁한 것은 이를 빙자하여 공갈할 계책을 삼은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인데, 어찌 이처럼 허황된 말을 문득 주문할 수 있겠습니까? 연전에 양인(洋人)을 죽였을 때에 이미 주문하지 않았는데, 이제 갑자기 이 일을 주문하면 도리어 의심받을 염려가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혹 이런 의논이 있으나, 신의 생각에 주문하는 일은 실로 온당하지 못할 것으로 여깁니다. 다만 의논들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의심받을 염려가 없지 않다. 이는 반드시 조선 사람으로서 맥락이 서로 통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어떻게 살해된 연유를 알겠으며, 또 어떻게 그 연조(年條)를 알겠는가?” 하자,

 

▶ 권돈인 이 말하기를, “한 번 사술(邪術)이 유행하고부터 점점 물들어 가는 사람이 많고, 이번에 불랑선(佛朗船 _불란스 배 : 프랑스 배 ) 이 온 것도 반드시 부추기고 유인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모두 내부의 변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1장 B면 【영인본】 48책 516면

 

3. 憲宗 13卷, 12年(1846 丙午 / 청 도광(道光) 26年) 7月 25日(戊申) 1번째기사 김대건을 효수하라고 명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 김대건(金大建) 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 은 용인(龍仁) 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에 현석문(玄錫文) 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 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 에 있는 양한(洋漢)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柵中)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 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洋外)의 제번(諸蕃)의 말에 능통하므로, 신부(神父)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通事)한다.’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誅罰)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의 사도(邪徒)로 처형된 현계흠(玄啓欽) 의 아들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2장 A면 【영인본】 48책 516면

 

4. 行狀에서 : (헌조의 일생 행적을 적은 글)

 

<원문> ....有象譯 劉進吉 者, 淫溺邪敎, 與其醜類, 肆其?惑, 敢引西洋人東來, 稱爲敎主, 糾結詭秘, ?猾愈甚, 王, 卽命捕獲鞫之, 竝置之法, 誕敷綸音于中外。 後有 金大建 者, 逃入西洋, 傳習其術, 十年而乃返國, 又嚴?而梟之, 奸徒屛息, 民志始定。

<해석> ...역관(譯官) 유진길(劉進吉) 이라는 자가 사교(邪敎)에 빠져 그 추류(醜類)와 함께 속이고 현혹하는 짓을 방자히 하며 감히 서양 사람을 데려와서 교주(敎主)라 칭하고 비밀히 체결(締結)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짓이 갈수록 심해지므로, 왕이 곧 명하여 잡아서 국문(鞫問)하여 모두 법으로 처치하고 중외(中外)에 윤음(綸音)을 선포하셨다. 그 뒤에 김대건(金大建) 이라는 자가 도망하여 서양에 들어가 10년 동안 그 술법을 전습(傳習)하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므로 또 엄히 사핵(査覈)하여 효수(梟首)하니, 간사한 무리가 숨을 죽이고 백성의 뜻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5. 김대건의 작성 지도 -조선전도(Carte de la Corёe)

 

Below is a map of Korea called "Corée" (Tyo Syen 조선), which was produced by the French organization Mission Etrangères de Paris (MEP) in 1880. Supposedly, the map was based on Father Kim Degeon's Carte de la Corée of 1846. The map is said to be stored in the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 Church History.Notice below the full map that there is a cutout of Ulleungdo (Oul-neung-to) that shows Ulleungdo's neighboring island of Jukdo (竹島) labelled as "Ou-san," which was the French pronunciation for Usan (于山). This map is more evidence that Usando (于山島) was Ulleungdo's neighboring island of Jukdo (竹島), not Liancourt Rocks (Dokdo/Takeshima).

 

 

 

 -김대건 지도의 울릉도 및 독도(우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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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구경 잘하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