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choyeung 2009. 6. 10. 10:14

-정조의 일성록(日省錄 국보153호로 지정)

 

정조는 부왕 영조의 세자시절부터 일기를 쓰던 습관을 즉위 후에도 계속 이어 갔다. 정조가 즉위하여 5년까지는 국왕 개인의 일기였으나 그 이후부터 규장각 신하들에게 자신이 써 온 일기를 편찬하도록 지시하고 일기의 이름을 일성록이라고 명하여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이 되었다.

 

일성록에는 그날그날 왕의 행동과 하루 동안 처리한 일들이 쓰여져 있다. 그런데 하루에 기록한 양이 20페이지가 넘는 날이 많았다. 정조 때만 해도 일성록은 673권으로 엄청난 분량이었다. 일성록은 정조에서 순종에 이르는 150년 동안 그 기록이 무려 2,327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 되었다.

 

정조 5년(1781년)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성록]이란 제목을 붙이게 하고 “하루에 세 번을 반성한다는 논어의 글귀와 같이 자기 성찰(省察) 및 마음에 미치는 힘 즉 심력(心力)을 살펴보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또한 후세에 전하되 후세인들이 일성록을 보고 과거는 어떻게 했어야 하며 또한 신하들도 어떻게 (언행을) 했어야 하였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그 목적을 뚜렷이 한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정조는 국왕중에 모범을 보인 왕으로 참으로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만인들이 존경과 흠모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밀레의 명작인 [만종:The Angelus]에서도 저녁나절 농부 부부가 멀리 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리면 일일삼성을 하는 기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조선왕조 실록- 정조 5년(1781년)

 

○己丑/召見閣臣。 敎曰: “予於日記, 嘗有癖焉。 雖値蔥擾之中, 必於就寢前錄出, 以寓日三省之義。 非但省察, 欲觀心力, 至今不廢。 莫曰載之空言, 將以傳後, 則凡例甚難。 若不善成, 則無異《政院日記》, 何如則可?”

 

정조가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정조가 하교하기를,  “나(정조)는 일기(日記)에 대해 일찍이 버릇된 것이 있다. 그리하여 아무리 바쁘고 번거로운 일이 있을 때라도 반드시 취침(就寢)하기 전에 기록하여 내어 이를 하루에 세 번 반성(反省)한다는 의의에 붙여 왔다.

 

성찰(省察)하기 위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심력(心力)을 살펴보기 위해 지금까지 폐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니, 공언(空言)을 기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차 이를 후세에 전하려면, 범례(凡例)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 만일 이를 잘 만들지 않는다면 《정원일기(政院日記)》와 다를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庚午/敎曰: “《日省錄》, 方次第彙編。 大抵此錄之作, 意豈徒然? 蓋以近來所謂記注, 多有爽誤, 皆失本旨。 至如經義問難、時政酬酢, 近臣之所領會, 勝於新進, 向因故直提學箚陳, 特命許施, 不但遠倣有宋故事。 予意竊欲以此爲觀省之資, 且其記錄之際, 亦可見諸閣僚文辭、言議。 今若務從溢美, 但欲鋪張, 則直一狀德之文, 豈特違予編錄之本意? 後之觀此錄者, 謂今時當如何, 謂閣僚又當如何, 此意閣臣不可不知

 

하교하기를, “《일성록(日省錄)》을 바야흐로 차례로 편집(編輯)하고 있다. 대저 이 《일성록》을 제작하는 뜻이 어찌 부질없는 것이겠는가? ....이제 만약 지나치게 칭찬하는 데 힘쓰고, 과장만 하려 한다면 단지 하나의 덕행(德行)만을 서술한 글일 뿐이니 어찌 내가 《일성록(日省錄)》을 편집하는 본뜻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겠는가? 뒤에 이 《일성록》을 보는 자는 오늘날 어떻게 했어야 했다고 말할 것이며 각료들이 또한 어떻게 했어야 말할 것이니, 이러한 뜻을 각신(閣臣)들은 알지 않으면 안 된다.”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국보 제76호 )

 

이순신(1545∼1598)의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약 7년간 진중에서 직접 일기를 기록한 것이다. 장군의 일기는 처음에 그 자신의 일기에 따로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이순신이 전사후, 무려 198년이 경과된 정조19년 (1798년)에 대왕의 명에 의해 규장각 윤행임과 예문관 유득공에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게 하면서 이 일기를 권5~ 권8에 수록하였는데 그로부터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진 것이다. 정조는 "우리 열조(여러 임금들)로 하여금 중흥의 공을 이룰 수 있게 뒤받침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이다." 라고 친히 말하고 있다.

 

정조는 200년이 되도록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 때에 조선왕조가 꺼져가는 운명을 구한 은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가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정조는 이순신 어머니의 고향이고 어릴때부터 자란 곳인 아산에 이순신의 [신도비]를 세우되 비문을 직접 지어서 세워준 왕이었다. 이순신이 끼친 공적에 비하면 영의정이란 직책은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정조는 비로소 그를 의정부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그나마 이미 죽은 자에게는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을 추증받았다는 명예와 불과한 것이지만, 진작에 행해졌어야 할 이러한 조치마저도 정조와 같은 임금이 등극하고 나서야 후일에 시행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이순신장군이 세상을 떠난지 거의 200년이 지난 후에 그에 대한 공덕이 비로소 빛을 본 것이다.

 

이충무공전서에는 1793년부터 이순신의 행적을 모아 기록한 것인데 시(詩)ㆍ장계(狀啓)ㆍ난중일기(亂中日記)ㆍ잡저(雜著)ㆍ기타 자료 등이 총 14권이 망라된다. 국보 제76호인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해전상황을 아뢰는 장계초안인 [임진장초]와 더불어 유성룡의 [징비록] 및 [선조실록]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고전]이 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정신이야 말로 정의(正義)정신, 창의(創意)정신, 기록(記錄)정신 및 투철한 애국(愛國) 정신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전략전술(戰略戰術)을 겸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에는 뜨거운 군신과 부모형제의 충효(忠孝)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난중일기>에 대하여 “전편을 읽으니 장군이 어머니에 대해 애통하고, 정성으로 슬퍼했던 것을 후세에 크게 본받을 만하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군신관계에서 두번의 백의종군으로 마음속에 갈등이 심하였지만 선조임금에 대한 그의 충(忠)을 가능하게 했던 뿌리는 역시 효(孝)가 아니었나 싶다.난중일기에는 여러번 죽음의 고비를 넘겨도 임금에 대한 어떠한 불충의 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일평생 정의를 실천하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참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다. 또한 16세기에 장군은 세계 유례가 없는 거북선과 여러가지 무기들을 창작하였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해군 전술과 군사경영을 위한 세밀한 고안을 이룬 뛰어난 창의력을 지닌 장수였다.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게 한 1592년 한산도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한 해전이며 또한 명량해전에서는 13척의 전선으로 왜선 133척의 적선을 괘멸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처음 옥포해전에서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임진왜란 7년동안 23전 23승이라는 불패의 장수였는데 이는 세계 해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정조가 세운 이순신의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

 

정조(1752~1800) 19년(1795년)에 임금이 직접 지은 비문인 고(故) 충신 이순신(李舜臣)의 상충정무비(尙忠旌武碑) 인본(印本)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앞서 상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탁월한 공적과 충절을 생각하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친히 지었다. 그리고 송(宋)나라 부필(富弼)의 묘비(墓碑) 제목을 전자(篆字)로 썼던 예를 본따 그 비의 제목을 전자로 써서 ‘상충 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하고, 내각에 명하여 안진경(顔眞卿)의 가묘(家廟)의 비(碑)에서 글자를 모아 쓰게 하였다. 

 

그리고는 호남의 도백(道伯) 이형원(李亨元)에게 명하여 돌을 캐내어 그 묘에 세우게 하였는데, 갑인년에 그 일이 마무리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내각이 탑본(榻本)을 바치자 다섯 군데의 사고(史庫) 및 관각(館閣)과 태학(太學)에 나누어 보관토록 명하였다.

 

비문속에 정조는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의 비명을 짓는다 하랴" 라는 글귀도 있다.

 

 

--이순신 신도비(李舜臣神道碑)

 

尙忠旌武之碑」御製有明水軍都督朝鮮國 贈効忠仗義廸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德豐府院君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諡忠武公李舜臣神道碑銘幷序」

 

生而車服以寵之讌饗以勞之管絃以被之沒也祀之五鼎養以世祿銘乎旂常俾其耿光姱節昭于上下配于山川以主其陰職而庇休福」於民昔先王之敉功臣也成周以還其法浸泯焉然碑率之有銘猶傳旂常之遺義抑其特者君之銘之也王朝之篆首曰至德元老徐達之」篆首曰忠志無疵歷千載幾人哉嗚呼若我朝之忠武公李舜臣功惟應銘法予之銘之尙亦無媿辭哉忠武字汝諧世爲德水人其生母卞」夢其舅言兒生必貴其命名舜臣父貞聞而異之占之曰吉年五十當仗鉞爲名將忠武旣負此異幼倜儻且有大志及長射藝絶倫中萬曆」丙子武科初仕邊屢立奇功國人以將才稱文忠公柳成龍力薦于朝遂擢爲全羅左道水軍節度使時倭人聲言寇我敵釁已成忠武深憂」之日夜訓卒利兵治戰守備別創船制爲伏龜形名曰龜船習水戰者比之蒙衝壬辰倭大擧入拔釜山東萊分道西上忠武卽引兵赴玉浦」攻焚賊船二十餘艘會慶尙水軍節度使元均于露梁夾擊賊轉至泗川焚十餘艘進軍唐浦遇賊二十餘艘殪其酋殲其衆與全羅右水軍」節度使李億祺合軍于唐項浦破賊酋三層樓船誘至閑山島又破大小七十餘艘逐北至安骨浦又燒破四十餘艘軍聲大振賊讋恐捷聞」輙加階至正憲癸巳朝廷剏置三道水軍統制使命以本職兼之移鎭閑山島於是元均耻受節制數蜚語風言官而忠武竟以逗遛劾下吏」均則代之居數月我師敗績元均走死朝廷復以忠武爲統制使忠武將數十騎馳入順天府得兵船十餘行收亡卒破賊于蘭島已又迎賊」于碧波亭下破三十餘艘斬其將馬多時賊不能支擧軍而遁戊戌 天將陳璘以廣兵劉綎以川兵鄧子龍以浙直兵先後至忠武進據古」今島與陳璘合陣璘心折其才策器幹凡軍中機密無不咨決之言于我 宣廟曰李舜臣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又具奏于 顯」皇帝賜忠武都督印綬旣而關白死行長欲撤兵約昆陽泗川屯剋日竝進于露梁忠武與 天將整舟 謀協勦卽船上祝曰今日固決死」天其許我殲此賊乎祝己河魁隕一軍惡之夜四鼓邀賊鏖戰焚二百餘艘尾擊不舍至南海賊圍 天兵數重忠武親冐矢石直前突圍戰」方酣中流丸死之距其生乙巳年五十四明年子薈等返葬于牙山甲辰策勳 賜號贈議政府左議政德豐府院君諡忠武立祠于戰伐遺」墟至今爼豆不輟斯足以敉厥功乎悲夫我國家人才之輩出最稱 穆陵盛際 皇朝命帥之簡勁赴援者亦皆一時之雋然當其魚跳鰕」擲海水羣飛未有不退三舍持兩端而八年之間戰必勝守必保國勢視以强弱賊鋒爲之挫頓使環土營窟之狡奴狼顧不得逞而以基我」烈祖中興之功者維忠武一人之力是賴不於忠武特銘之而誰銘且予聞之烝民之詩所以述樊侯之績而宣王之美於是乎在臣之能有」成功君之明也夫受君之命克終其事以有功而以其功載君之美於無窮古之道也今之銘詩之義存焉予烏可已於銘乃加贈議政府領」議政因其諡篆其首曰尙忠旌武之碑又序而銘之以詔諸史氏銘曰」稽古司勳氏之銘于策也曰勳曰功曰多曰庸曰勞曰力 若忠武者孰不曰功于戰于王于國 一戰而閑山盪再戰而碧波晏三戰而露」梁無倭斯不亦多乎 謀士掉其舌虎臣蹙其頸而用 天子命惟汝屬國之孤軍斯不亦勳乎 翠華反於土中赤子奠於席上重恢我萬」億年大東斯不亦功乎 於虖噫嚱鳥頭在閭牲石在隧 以卒受寵于篆首之章江漢濯其靈而日月齊其光」皇明崇禎紀元後三甲寅月 日立

 

 

 

<조선왕조실록> 정조 35권, 16년(1792년) 7월 25일(임술) 1번째기사

 

충무공 이순신과 충민공 임경업의 자손을 황단 망배례에 참례하게 하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자손을 황단(皇壇) 망배례(望拜禮)에 배참(陪參)하게 하고, 고(故) 목사(牧使) 제말(諸沫)에게 시호(諡號)를 내리고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錄)에게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비석을 세워 그곳을 정표(旌表)하라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제 황단에 공손히 절한 것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충신의 후예를 소견하고 유생은 시제(試製)하고 무사(武士)는 시사(試射)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다시 세워준 황제의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우리 나라 충신에게 미치게 하여 전수(篆首)로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렬(功烈)을 표창하고자 하였다.

 

이를 인하여 생각하니,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은 대의(大義)를 창명(倡明)하였으므로 그의 자손을 망배례의 반열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여 이미 정식을 삼았는데, 더구나 충무공은 황조(皇朝)의 도독(都督)이란 고인(誥印)을 받았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충무공의 후예도 문정공 집안의 예에 의해서 반열에 참여하게 하라. 정유년 척화(斥和)한 사람의 자손도 오히려 반열에 참여하는데 충민공 임경업의 후손이 반열에 참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모두 반열에 참여하게 하라.

 

또 빠진 듯한 감상(感想)이 있어서 한번 전교하고자 한 지 오래이다. 절의[烈]가 충무공과 같고 공(功)이 충무공과 같으며 또 무후(武侯)5430) 의 후예로 지금까지 제씨(諸氏) 성을 답습해 왔고 그 이름이 말(沫)이란 자는 고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그이다. 그걸 이어받은 자가 바로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인데 재우는 갖추 숭보(崇報)하였으나, 제말이 고성(固城)을 보장(保障)하고 진양(晉陽)에서 부의(赴義)한 위대한 공훈은 고 감사 김성일(金誠一)의 천거에서 볼 수 있고 조정에서 격식을 넘어 탁용한 데서도 알 수가 있다.

 

그후 성주(星州)의 대첩(大捷)에서 죽었으니 참으로 충무공의 노량(露梁) 사적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후손이 영락하여 조정에 스스로 아뢰지 못하였고 끊어진 유사(遺事)가 대략만 고 정승 남구만(南九萬)의 문집에 보일 뿐이다. 증관(贈官)·시호(諡號)·정려(旌閭)·비석(碑石) 등 그 어느것 하나도 시행한 일이 없으니 흠전(欠典)·궐문(闕文)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고 충신 목사 제말을 특별히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인하여 홍문관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게 하되 시호를 내리는 날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라. 일찍이 듣건대 묘가 진해(鎭海)와 칠원(漆原) 사이에 있다고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고적(故跡)을 자세히 찾아서 장문(狀聞)하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정조 38권, 17년(1793년) 7월 21일(임자) 1번째기사

 

충무공 이순신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한다고 전교하다

 

....승지를 보내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에게는 의정부 영의정을 더 추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아, 신종(神宗) 황제가 우리 나라를 구원하여 다시 있게 해 준 은혜는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다. 비풍(匪風)의 감상(感傷)과 하천(下泉)의 쓰라림을 장차 어디에 그 만분의 일인들 표시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근신(近臣)을 보내어 위패를 봉안한 방을 대신 봉심하게 하였으며 거듭 무신(武臣) 이원(李源)을 시켜 선무사에 가서 두루 돌아보게 한 것은 주로 이 날을 기억하려 함에서이나 이것으로 어찌 기억이 되겠는가.

 

덕을 본받고 공을 갚는 데는 나라의 밝은 법규가 있는데, 더구나 작은 나라 배신(陪臣)으로서 명나라의 은총을 입어 천하의 명장이 된 사람은 바로 이 충무공(李 忠武公)이다. 옛적 무령왕(武寧王) 서달(徐達)의 비석을 황제가 직접 글씨를 쓰고 유사(有司)가 비 세우는 일을 맡아 하였었다.

 

우리도 삼가 이를 모방하여 일찍이 그 도로 하여금 비석을 깎아놓고서 비석 머리에 새길 전자(篆字) 글씨를 써서 내려보내고 명시(銘詩)를 지어 보일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었는데, 작년에는 민생에 관한 일로 바빠서 미처 하지 못하였다. 이에 오늘 충무공 후손을 불러 물어보고 그 공역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또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 부원군 행 정헌 대부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라.

 

비석을 세우는 날의 치제(致祭)에 대하여는 전에 명을 내려 알렸는데, 벼슬을 추증하고 선고(宣誥)하는 일도 그날 함께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춘추(春秋)》를 읽을 만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삼전(三傳) 을 묶어 높은 데 얹어놓지 말라. 이 의리(義理)는 우주간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어 해·별과 함께 광채를 빛낼 것이다. 어찌 이를 강명(講明)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날이 무슨 날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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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잘봤어요^^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