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choyeung 2009. 8. 21. 18:54

   

日本은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시대부터 조선(朝鮮)과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대하여 줄기차게 침략정책을 놓아 본 적이 없다. 오늘날 독도문제도 이런 시각에서 다시 생각하여야 하고 보다 지혜로운 지도층과 국민들이 되어 나가야 한다는데 이런 책은 좋은 지침이 된다. 올해 초에 간행된 아래의 책은 한·중·일 3국의 현재를 형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 분기점이 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근대 이행기를 총체적으로 살피는 데 필요한 역사교양 서적이다 .

 

당시 동아시아의  제국주의로 상승한 日本, 반식민지로 바뀐 中國, 식민지로 전락한 韓國이라는 일국적 인식에서 벗어나 각국의 근대화 과정을 서로 엇갈리면서도 동시에 얽힌 하나의 지역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이를 통해 당시 각국이 직면한 위기와 해법을 오늘날과 견주어 평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동아시아의 미래를 가늠한다.1~3권이 한·중·일 각국의 개항에서 1910년 무렵까지를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제4권은 이를 비교하고 총괄하는 형식이다.

1권은 韓國의 식민화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당시 나타난 여러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것임을 보여준다.

2권은 中國이 걸어온 지난 100년을 5000년이란 긴 역사 속에 위치시켜 파악하면서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시각을 모색한다.

3권은 日本이 이룩한 근대의 성공과 그 뒷면인 억압과 팽창을 함께 제시하여 복합적 관점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4권은 한·중·일의 근대이행기를 비교하여 하나의 지역사라는 관점을 이끌어내고 그를 통해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다시 볼 것을 제안한다.

 

 

 저자: 강진아 ,   창작과 비평사    

 

1권- 근대의 식민의 서곡 (한국)

 

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500여년간 독립된 정치체제를 굳건히 유지해온 나라가 전쟁도 거치지 않고서 당시까지 변방의 국가로 여겨지던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아스럽다. 이처럼 조선의 식민화는 구조적으로 결정된 필연도 아니고 통제할 수 없던 우연도 아니다. 조선의 여러 행위자들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식민화를 피하기 위한 다양한 근대의 기획을 시도했지만 이들이 실패하여 대안적 가능성이 소진되면서 식민화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정치적 지배계급인 보수 관료와 개화파, 경제적 지배계급인 지주, 그리고 유학자와 민중의 대다수를 구성한 농민은 제각기 어떤 근대적 변화를 꿈꾸었고, 이들의 시도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살펴본다.

 

그들 각각의 시도는 조선이 식민의 길이 아닌 다른 경로로 갈 수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비록 식민화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추구한 근대성이 어떻게 지속 혹은 단절되었는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이 책은 한편으로 조선인의 내재적 근대화가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왜 좌절되었는가를 밝히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들이 추구한 근대성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가를 찾는다.

 

이 시도에 있어 특히 중요한 점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이전 역사와 단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성의 측면에서 볼 때 식민 이전과 이후에 일정한 정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은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역사로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을 되돌아보기 위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2권-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중국)

 

왜 중국은 서구와 일본에 뒤처졌을까? 중국의 근대 경험은 한족 민족주의의 형성과 국민국가의 탄생으로 집약된다. 서구의 근대문명과 국제질서에 노출되기 전 중국은 중화문명론 아래 통합된 다민족 문명제국이었다. 개항과 외부 충격에 의해 내부 모순이 강화되면서 이 제국은 민족주의적 분열을 겪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한족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다.

 

청조 붕괴와 중화민국의 탄생은 강렬한 한족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이민족 정권인 청조를 타도하고 서구식의 "국민국가"로 재탄생을 꾀하는 것이었다.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서구와 일본과의 전쟁을 겪으며 조공질서체제가 붕괴하면서 문명론적 관념도 허물어졌으며, 생존을 위해서는 서구적 국민국가로 개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상대적으로 서구화가 빨랐던 일본과 달리, 중국은 근대 이전 문명적 세계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각성과 자기변신에는 더 많은 희생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성패는 보다 장기적 시각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중국의 사회경제적 근대화는 비록 속도는 느리더라도 대륙 크기의 대국을 확실히 변모시켰다.엘리트 관료층의 근대화 노력, 전통산업의 경쟁력, 화교로 대표되는 민간의 자본역량, 샹하이 등 개항 지역의 선진적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견인할 정부 주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개항의 충격 당시 중국은 이민족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모호한 문명론을 깨고 한족 민족주의가 색깔을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이민족 왕조의 정당성은 갈수록 약화되었고, 정부는 반란의 진압에 역량을 소모해야 했으며, 내부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외부 열강에 타협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3권-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일본)

 

일본은 과연 근대화에 성공한 모범사례인가? 이런 식의 이야기는 상투적으로 들릴 만큼 반복되어 왔다. ‘서구적 근대화’의 신화가 종언을 고해가고 있는 최근의 세계사적 상황은 일본의 근대화, 나아가 근대화 전반에 대해 그 의미를 되짚어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서양의 사례와 비교해도 유례가 없는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성취했다. 페리 내항으로 시작된 급격한 국내외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메이지유신을 거쳐 1889년 메이지헌법을 제정하여 근대국가 체제를 완성했다. 더 나아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어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했다.그렇지만 일본의 ‘성공적’ 근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볼까라는 점에 이르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로서 식민지화되었던 우리는 일본의 근대화가 억압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절실히 경험했다. 그러한 억압적 성격은 일본 국내 지배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났다. 곧 일본의 근대화는 ‘발전과 성장’의 이면에 ‘억압과 팽창’의 역사를 담은 양면성을 특징으로 한다.이 책은 이러한 일본 근대화의 양면성을 막번제에서 천황제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관점은 동아시아 3국이 근대화의 길목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좋은 잣대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을 통해 비교적 일찍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천황제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이 근대국가가 근대화의 과정을 주도했던 데 비해 한국과 중국에서는 왕조체제가 상당 기간 지속된 채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4권- 동아시아 근대이행의 세 갈래 (동아시아)

 

동아시아 근대이행기의 실체적 면모는 한·중·일 각각의 일국사적 이해로는 드러날 수 없으며 3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합하는 비교사가 불가피하다. 아울러 20세기로의 전환기를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1세기와 비교하는 관점이 요구된다.

 

이 씨리즈를 이끈 공동연구진 대표 백영서는 100년 전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21세기형 국익’이란 관점에서 한·중·일이 어떻게 전환기의 위기를 인식하고 극복하려 했는가를 비교한다.

 

특히 대국주의를 추구한 19세기형 국익이 충돌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동아시아 3국에 미친 영향을 중시하면서 대국주의와 역사 속에서 경쟁했던 소국주의 유산을 탐색한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 자원으로서 21세기형 국익에 적합한 국가의 정체성과 발전전략을 구상하는 데 신선한 자박훈은 헌정을 소재로 세 나라의 이행기를 비교한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헌정(憲政)을 수용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원인을 한국과 중국의 헌정 수용 과정과 대비한다. 그 결과 일본 천황과 다른 두 나라의 군주가 지닌 역사적 역할의 차이가 주요한 요인임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헌정의 실시에서 세 나라가 서로 편차를 보이고, 일본의 헌정 도입이 성공적인 듯하나 사실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헌정조차 ‘현인(賢人)지배’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한중일에서는 근대 초기뿐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의회·선거·정당 등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 그러니 “100여년의 고투와 굴절을 겪어온 동아시아의 헌정 도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일본과 중국의 19세기 구미 여행기를 소재로 세 나라의 이행기를 비교하고 있다. 두 나라 정부의 공식사절단이 작성한 보고서에 나타난 구미 문명에 대한 인식, 구미 문명에 비춰본 자신의 문명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기인식에 기초한 일본과 중국의 상호인식을 중점적으로 검토한다.

 

이 비교연구로부터 중국과 일본 및 한국이 구미 문명에 대응하는 기본자세의 차이가 도출된다. 즉 중체서용(中體西用)이나 화혼양재(和魂洋才)가 모두 일국적인 입장에서 구미 문명에 맞선 인식의 틀이라면,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중(中)이나 화(和)가 아닌 동(東)을 내세우면서 정체성을 찾으려 한 것이다.

 

여기서 그 동도(東道)는 한국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동양에 공통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 한국에서 일국적 정체성을 넘어설 수있는 ‘매개적’ 정체성을 발굴해내면서, 이것이야말로 21세기 동아시아를 위해 다시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출판사 서평에서>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입에서 韓國이 식민지, 中國은 반(半)식민지로 떨어진 데 비해, 日本이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는데 그 비결은 무엇일까? 日本이 ‘부국강병’이라는 목표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서 앞서 나간 데 비하여, 韓國이나 中國이 뒤 처진 이유가 있다. 즉 中國은 정보(情報)가 없어서라기보다는, 情報를 수집하고 분석하려는 태도가 사회지배층에게 없었다고 봐야 한다고 비판하는데 이러한 점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는 日本에 일시 점령 당했으며, 아편전쟁 이후로 강대국인 中國은 몰락일로인데 반하여 3국 중에 가장 뒤떨어졌던 日本이 메이지유신을 겪고 난 다음에 오늘날처럼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었는가.?

 

日本 막부 지도부는 1842년 아편전쟁에서 英國이 압도적 군사력으로 청나라를 눌렀고, 그 결과 영토 일부가 할양됐다는 情報를 정확하게 입수하면서 위기 의식이 고양됐다. 막부는 서양 선박에 대한 적대정책을 철회하고, 서양식 총 도입과 증기선 수입 등 개혁에 착수했다. 朝鮮 정부도 아편전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情報를 수집했으나, 英國의 압도적 우위와 淸의 패전사실을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情報의 자의적 해석과 낙관론으로 위기의식이 높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에는 情報를 입수한 통로가 달랐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朝鮮은 전쟁정보를 주로 연행사(燕行使)를 통해 얻었고, 연행사는 淸의 패배를 중화의식에 맞춰 왜곡해서 전달하는 中國 관보(官報)에 주로 의존했다. 반면 日本은 英國 식민지 싱가포르의 영자(英字) 신문을 인용한 네덜란드 서적과 전투 지역과 가까운 동남지역 中國 상인들의 보고서를 종합하여 사태를 파악했기 때문에, 전투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淸나라 조정이 아편전쟁으로 영토를 할양하고, 영사재판권과 관세자주권을 내주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전쟁의 패배를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도 거론된다. 中國이 情報가 없어서라기보다는, 情報를 수집하고 분석하려는 태도가 사회지배층에게 없었다고 봐야 한다고 썼다. 朝鮮의 이순신도 전투에 나서기 전에 판옥선의 수와 맞먹는 수의 탐색선을 운영했다고 한다. 情報는 이처럼 중요하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부국강병을 달성한 日本이 침략 전쟁으로 자멸하고, 열강의 침략으로 만신창이가 된 中國이 침략국이라는 역사적 부담 없이 제3세계는 물론 세계 지도자 자리를 넘보는 것을 감안하면, 보다 긴 호흡으로 근대 100년을 성찰해야 한다는 저자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大韓民國의 성취를 놓고 봐도 그렇다. <언론기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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