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choyeung 2009. 9. 21. 22:05

겸재 정선(鄭歚, 1676~1759)은 조선 중기의 영조시대 사람으로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묘사하여 표현하되 동양화의 양대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필법(筆法)과 묵법(墨法)에 정통하고 필.묵을 한 화면에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우리 산천의 중요한 요체를 뽑아 그림으로 완성한 우리 고유의 산수화 양식인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法)을 창안한 화가이다.

 

 

 겸재 정선의 금간내산도

 

아래는 최근에 국보급 문화재가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원인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원 선지훈(라파엘) 신부의 노력으로 84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내용의 기사가 여러 언론에 실렸다. 2009.9.20일부터 10.11일까지 수도원에서 일반에게 공개되나 참으로 훌륭한 일이 아닐수 없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원장 신부가 1911년의 한국방문에 이어 두번째로 1925년 한국가톨릭교구를 시찰한 후 서울 명동의 일본인 골동품가게에서 구입한 겸재의 21점 작품을 귀국후 독일 수도원에 기증한 것이었다.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 -1956) 신부

 

베버 신부는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총아빠스로서, 1908년, 성 베네딕도회 한국진출을 결정하고 독일 신부 2명을 파견했다. 1911년에는 4개월 간 한국을 방문한 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Im Land der Morgenstille )라는 책을 썼다.

 

1925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라는 그의 책에 따라서 무성영화를 찍었다. 그는 영화촬영기를 가져와 필름 약 15000미터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영상기록을 남겼다. 그는 100년 넘게 박해를 견뎌낸 한국교회,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기적의 역사에 깊은 존경을 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아름다운 한국의 문화를 존경했고, 특히 효도 전통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한국인들의 이런 내면화된 겸손이야말로 가톨릭이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토양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말년을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조용히 보내다 1956년 세상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 1925년 베버 신부가 한국에 왔을 때 구해 독일에 간직했던 겸제 정선의 화첩은 2006년 한국에 반환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사진-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 본가 안방.

이 사진 역시 1911년 안중근 의사 본가를 찾아 빌렘신부와 함께 청계동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촬영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독일 오틸리엔 성 베네딕토회 총원장(Erzabt), 1895년 서품, 1902년 수도원 총원으로 선출

 

독일로 가져간 겸재 정선의 화첩 21점은 크리스티 경매사에서 약 50억원의 경매가를 매기기도 하였으나 독일 수도원은 경매에 내어놓지 않고 한국에 되돌려 주었으며 이는 여태까지 가장 훌륭한 문화재 환수 사건이 되고 있다. 2005.10.22일 국보급 문화재를 아무 조건 없이 영구 임대로 돌려 준 것은 오로지 선지훈 신부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귀중한 일이다.

 

겸재 정선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노베르트 베버(성 오틸리엔 초대 총아빠스) 신부는 1911년 조선 땅을 떠나면서 다음의 글을 남겼다.
"우리는 사라져 가는 이 나라를 향해 애써 '대한 만세'라고 작별 인사를 보낸다. 그래, 한 국가로서 이 민족은 몰락하고 있다. 어쩌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말없이 마음이 따뜻한 이 민족에게 파도 너머로 작별인사를 보낸다. 지금 나의 심정은 한 민족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는 장례행렬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착잡하기만 하다." (1911.6.24.)

 

이에 비하여 대한제국 말기에 프랑스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콜랭 드 플랑시(재임 1890년~1903년)가 직지를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1372년 간)이며 2001,9.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 直指心體要節> 등을 포함한 191종 279권이나 되는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 문서를 수차례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채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과 크게 비교되는 일이다.

 

 

 ‘한국인 영혼의 한 부분’, 80년 만에 귀향하다

 

겸재가 누구던가. 아주 오랫동안 복사해 온 중국풍의 그림 전통에 의문 부호를 찍고, 우리 주변의 산천으로 시선을 돌려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크나큰 예술 성취를 이루어낸 ‘화성畵聖’이 아니던가. <겸재화첩>은 겸재가 그린, 그것도 21점이나 되는 그림이 한꺼번에 실린 국보급 문화재로, 여느 작품과 달리 위작 시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뚜렷한 행로를 지닌 진품으로서도 인정받고 있다.

그런 보물 중의 보물을, 5억이나 된다 하여 화첩 운송에 대한 보험은 들지도 못했으니, 그가 얼마나 긴장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도 남을 만한 ‘국가적’ 사안이, 이렇듯 조용히 그것도 ‘개인적’으로 진행되다니,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한국전쟁 이후 뿔뿔이 흩어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모여 수도회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1909년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서울 혜화동에 수도원을 설립한 것이 한국 베네딕도회의 시초가 되었으니, 오틸리엔 수도원과 왜관수도원은 서로 이같은 인연을 소중히 기리며 수행자를 교환하는 등 우호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선지훈 신부도 1991년부터 1996년까지 6년 동안 뮌헨 근교에 있는 오틸리엔 수도원에 머물며 뮌헨대학에서 교회사를 전공하며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관련 필름 자료와 문화재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겸재화첩>도 그렇게 만났다.

 

그런데 <겸재화첩>은 어떤 연유로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된 것일까? 선교를 목적으로 1911년 방문한 바 있는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당시 오틸리엔 수도원장은 선교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와 풍습에 깊은 흥미를 느껴 팔도강산을 두루 방문하였고, 이를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1925년에도 베버는 금강산을 여행하였는데,

 

이때 지인들이 겸재 그림 21점을 구입하여 그에게 선물로 주었고, 이후 오틸리엔 수도원에 기증하였던 것이다. 이 금강산 여행(6월 2일~6월 12일) 경험을 기록한 것이 <금강산에서(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1927년)> [<수도사와 금강산(푸른숲, 1999)>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출판되었음]라는 책이다.

 



선지훈 신부는 오틸리엔 수도원측으로부터 베버가 서울 명동에서 골동품상으로부터 구입하였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금강산에서>에 언급되었듯 금강산 여행 중에 입수하였다는 쪽이 자료상으로 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21점의 그림이 베버의 손에 들어갈 당시에도 지금처럼 화첩의 형태로서 존재했던 것인지, 독일로 건너간 뒤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다시 화첩으로 묶인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명확지 않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들이다. 화첩의 앞쪽에 ‘합 21폭’이라는 붓글씨가 남아 있는 것이 단서의 하나가 될 터이다.

 

오틸리엔 수도원이 <겸재화첩>을 소장한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에 의해서이다. 유 교수는 1974년 독일 유학중 베버가 쓴 <금강산에서>를 읽던 중 겸재의 그림 3점을 발견하고, 그림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갔다가 뜻밖에 <겸재화첩>을 확인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유 교수는 <독일에 있는 겸재의 회화,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는 수장 화첩의 첫 공개. 1977년>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후, 적잖은 한국인이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와 그 진가를 드러내지 못한 채 낡아가고 있는 <겸재화첩>의 처지를 안타까워하자, 오틸리엔 수도원도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닫고 허술한 보안을 의식해 <겸재화첩>을 전시실에서 수장고로 옮겼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겸재화첩>이 더 나은 보존 환경을 갖게 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인과 한국의 역사와 영혼’에 대한 존경과 우호를 표시한 것

 

어떻게 하면 <겸재화첩>을 좀 더 잘 보존할 수 있을까? <겸재화첩>을 직접 목격하고 그  유전遺傳의 사연을 알고 나서부터 선지훈 신부는 <겸재화첩>의 환국에 대해 오랫동안 궁리하였다고 한다. 오틸리엔 수도원측에서도 <겸재화첩>의 진가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에 대한 최상의 보존 환경을 적극적으로 강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지훈 신부는 이와 같은 자신의 안타까운 심중을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예레미야스 슈뢰더 신부에게 토로하곤 하였는데, 마침 슈뢰더 신부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는 경사가 생기자, 더 적극적으로 <겸재화첩>의 반환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소중한 문화재 보존에 대해 생각하자면, 한국에 돌려주고 적절한 보존 대책을 강구토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으나, 슈뢰더 수도원장과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측에서도 이를 결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보관중인 문화재를 외부에 공개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나 외국에 반환한 전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겸재화첩>에 대한 세계 미술계의 유혹도 커졌다. 미국 덴버 미술관의 미술학자 케이 블랙이 ‘숨막힐 듯한 걸작’이라며 겸재의 그림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국제 미술상들에게 <겸재화첩>의 존재를 부각시켰고, 유명 경매회사인 뉴욕 크리스티에서는 ‘50억원 대’라는 말을 흘리며 경매에 부치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이 같은 세계 미술계의 ‘눈독’은 오히려 <겸재화첩>의 한국 반환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돈으로써 거래한다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긴 오틸리엔 수도원이 경매회사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2009년은 오틸리엔 수도원이 한국에 진출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니, 이를 기념하는 특별 행사로 <겸재화첩>의 반환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강력히 호소하는 왜관수도원과 선지훈 신부의 설득도 오틸리엔 수도원의 <겸재화첩> 반환 결정에 결정타가 되었다.

 

선지훈 신부는 “<겸재화첩> 반환이라는 쾌거의 일등 공신은 오틸리엔 수도원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 역시 “문화재는 원소유국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다는 소신을 가지고 반환을 결정한 수도원의 태도에 무척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오틸리엔 수도원 신부 12명으로 이루어진 협의회는 영구 임대 형식의 <겸재화첩> 반환을 만장일치로 추인하였다.





해외 반출 문화재의 반환, 이제 민간이 나서야

“이번 반환은 특별하다.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왜관수도원에 선물한 것이다. 이번 반환을 통해 우리가 한국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다. 세계 곳곳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귀한 문화재를 보관하는 보고 역할을 해왔다. 왜관도 그런 전통을 잘 이어가기 바란다.” 오틸리엔 수도원의 슈뢰더 수도원장은 <겸재화첩>을 반환하며 ‘한국과 우호 관계’와 ‘화첩의 안전한 보존’을 특별히 당부하였다.

 

그런데, 2007년 4월 왜관수도원에 큰일이 생겼다. 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다행히 불길 속에서 <겸재화첩>을 구해냈지만, 정말 가슴 철렁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2009년 왜관수도원은 화재를 복구하고 새 건물을 지어 ‘역사전시실’을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반환의 취지에 따라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며 <겸재화첩>을 일반에 공개한다(9월 20일부터 10월 11일까지). 화첩 형태인지라 그림 21점을 한꺼번에 공개할 수 없어 매일 한 장씩 넘기며 전시할 예정이다. 10월 13일부터 11월 22일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겸재 서거 250주년을 기념한 특별 전시에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그러나 <겸재화첩>의 ‘아비’가 된 셈인 선지훈 신부와 왜관수도원은 마음을 푹 놓을 수가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이후 <겸재화첩>의 보존 향방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칠곡군과 협의하여 <겸재화첩>을 전시할 공간을 군내에 마련하여 돌아온 <겸재화첩>의 의미를 깊게 하고 싶지만, 예산이나 행정 문제가 술술 풀리지 않고 있다. 선지훈 신부의 의견이자 소망대로, 이 부분에서야말로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겸재화첩>의 보존 문제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긴 하지만, 지난 세기 서구 열강이 다른 민족의 문화재를 강탈한 뒤 이를 반환하는 데 매우 인색한 태도를 보이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끼리의 협상이 쉽지 않은 여러 제반 상황,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 7만 5천여 점 등을 생각할 때, <겸재화첩>의 반환은 큰 의미로 다가온다.

 

오틸리엔 수도원이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 100년을 기념하여 영구 임대의 형식으로 <겸재화첩>을 반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민간의 힘으로 국가적 문화재를 의미 있게 돌려받은’ 아주 좋은 선례를 남긴 선지훈 신부의 활약에 박수를 보낸다.

 

 

글·박종분 자유기고가   사진·선지훈, 눌와 출판사, 연합포토

 

<월간 문화재사랑>에서 2009-09-15

 

관련보도-  독일 베네딕토 수도원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유준영교수와 겸재정선

 

처음으로 밝혀낸 유준영교수 (1935~)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 수십 점이 독일 땅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유준영(전 이화여대 미대 교수)씨였다.1974년 독일에서 유학하던 유씨는 당시 성오틸리엔수도원장인 노베르트 베버의 저서인 '금강산 여행기'를 읽다 베버가 갖고 있다는 겸재 그림 사진 석 장을 접했다. 그는 무작정 오틸리엔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선교 문물을 전시해 놓은 수도원 내 박물관 한 켠에서 한국의 고무신.곰방대와 나란히 놓여 있는 겸재의 화첩을 발견했다

 

유씨는 "이국 땅에서 조선시대 최고 화가의 작품을 봤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박물관 측의 양해를 얻어 작품 사진을 찍는 등 기록으로 남겼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를 바탕으로 '독일에 있는 겸재의 회화, 오틸리엔수도원에 있는 수장 화첩의 첫 공개'(77년)라는 글로 화첩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유씨의 연구에 따르면 겸재의 그림은 베버 원장이 독일로 돌아갈 때 함께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25년 한국에 가톨릭 교구를 시찰하러 온 베버 원장은 금강산 여행 길에 지인들이 구입한 겸재 그림 21점을 선물로 받았고, 이후 오틸리엔수도원에 기증했다.그림은 수도원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됐다. 본래는 하나씩 분리돼 있었으나 독일에서 화첩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오틸리엔수도원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수도원 관계자에게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라며 "저렇게 둘 물건이 아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전해진다.수도원 측은 그 이후 허술한 보안을 우려해 겸재 화첩을 박물관 캐비닛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왜관 성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선지훈 신부는 그 무렵 7년간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수행 생활을 하게 된다. 왜관수도원과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은 본부와 지부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수행자를 교환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그는 오틸리엔이 소장한 방대한 한국 관련 필름 자료와 문화재 등을 접한 뒤 한국으로 가져갈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회가 왔다. 그가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수행할 당시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이던 예레미야스 슈뢰더가 오틸리엔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된 것이다.수도원 관계자는 "선 신부는 2009년이면 오틸리엔수도원이 한국에 진출한 지 100년이 되는 특별한 해임을 강조하며 특별 행사로 한국문화재의 반환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선 신부는 "설득 과정이 참으로 힘들어 때로는 압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며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를 의미 있게 반환한 선례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이와 관련, 오틸리엔수도원 관계자는 "반환을 결정한 직접적 계기는 미술품 경매업체인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화첩에 눈독을 들이고 팔 것을 여러 차례 집요하게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경매업체에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거부했다는 것. 이후 수도원에선 오히려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이 기회에 돌려 주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크리스티경매 측은 화첩에 50억원이란 가상 경매가를 매기기도 했다고 한다.◆ 오틸리엔수도원과 한국의 인연=한국에서 베네딕도회는 1909년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서울에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27년에는 당시 교회의 필요성 때문에 수도원을 원산 지역 덕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34년에는 중국 옌지에도 수도원을 세웠다.그러나 한국전쟁을 전후해 모두 폐쇄됐다. 52년 뿔뿔이 흩어진 수도자들이 다시 모여 베네딕도회 수도회 생활을 시작한 곳이 지금의 왜관수도원이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기도 하다.


참고 뉴스
80년 만에 돌아온 겸재 정선의 명작(YTN 동영상)
독일서 겸재 화첩 되찾아온 선지훈 신부 (한국경제)
80년만에 돌아온 ‘겸재’ 화첩 (KBS뉴스 동영상)
80년 만에 돌아온 겸재 정선의 명작 (YTN)
선지훈신부, 겸재 화첩 獨수도원서 반환 성사시켜 (경향신문)
겸재의 귀환…獨 수도원 소장 21점 영구임대 (한국일보)
겸재 정선 국보급 그림 21점 돌아왔다 (중앙일보)
<인터뷰> 겸재 화첩 반환 선지훈 신부   (연합뉴스)
겸재 정선 그림 소개된 여행기 (연합뉴스)
겸재 그림 가져온 선지훈 신부 (연합뉴스)

겸재의 귀환, 교회적 모범 실천 의미(문화일보)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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