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choyeung 2009. 12. 17. 16:20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학고재)> 이 책은 혜곡 최순우 선생님(1916~1984)의 인품이 담겨있는 수필집이다. 그는 아름다움에 살다 아름다움에 간 사람이다. 평생 아름다움을 찾았고, 아름다움을 키웠고, 아름다움을 퍼뜨렸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움이 되었다.혜곡이 찾고 키우고, 퍼뜨린 아름다움은 우리 것이었다.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었다. 우리 것이라서 저절로 알고, 다 아는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냥 오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아름’은 알음이자, 앓음이다. 앓지 않고 아는 아름다움은 없다. 혜곡이 그러했다. 알음을 아름답게 하려고 그는 앓았다.

 

 

 

 혜곡 최순우 사진

 

혜곡 최순우 -운보 김기창 1976년

 

○ 아름다움을 가려 내는 눈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 반려없이 보는 아름다움은 때로는 아픔이며,때로는 외로움과 호젓함이며, 때로는 그 의미를 잃는다. 사랑을 잃는 사람의 눈에 세상이 빛을 잃어 보이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 아름다움을 보는 눈

추한 것도 아울러 새김질해야하는 괴로움도 감내. 따라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그 대상과 일체되는 공감을 의미한다. ‘보다 깊고 높게 느끼고 바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의 소유자’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안목이라는 것도 따져보면 사랑이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대상에 대한 지식차원 뿐만 아니라 스킨쉽 같은 아우름이 필수요소 중의 하나가 아닐까?

 

○ 아름다움을 아는 눈과 느끼는 마음

진정한 아름다움은 태어난 핏줄과 자라난 자리에서 찾을 수 있고,뻐기지도 아첨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미술

한국의 미술은 언제나 담담하다. 그리고 욕심이 없어서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가 별로 꾸밈없이 드러난 것,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플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한국 미술의 마음씨이다.

 

○ 한국의 회화                                                      

기교를 넘어선 방심의 아름다움, 때로는 조야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러한 소산한 감각은 한국 회화의 좋은 작품 위에 항상 소탈한 아름다움으로 곁들어져 정취를 돋우어 준다.

 

○ 한국의 조각

근시안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앞에 다가가서 바라보면 잔손질도 잔꾀도 없는 그리고 별것도 아닌 것이 물러서서 바라보면 눈앞이 환해지는 우리의 즐거움은 그림과 공예, 조각과 건축에 이르기까지 마치 예삿일처럼 어디에나 스며 있는 것이다.

 

○ 돌의 세 가지 아름다움

때로는 함께, 때로는 홀로 자연스럽게 그 자연스럽게 그 아름다움을 가눌 때 돌은 그 주인의 사색 속에서 숨쉬는 아름다움으로 나날이 자라고, 돌의 주인은 침묵하는 돌의 의지에 마음을 지긋이 의지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 도자기의 마음

그릇에 나타난 아름다운 의지를 말한다. 이러한 의지는 바라보고 또 만져보고 조용히 대좌하고 있으면 자기들 스스로가 그 아름다움의 비밀의 문을 조금씩 열어준다.

 

○ 조선 자기

조선시대 도자기중에는 이러한 항아리의 종류가 많고 또 크기나 생김새도 가지각색이지만 잘생겼다는 표현에서 벗어나는 물건이 없다는 것은 조선적인 아름다움의 덩치가 그러한 기틀 위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뜻한다. 말하자면 중국의 항아리처럼 거만스럽거나 일본 항아리처럼 신경질적인 데가 없는 것이 우리 조선 항아리들이 지닌 특색이라고 할것이다.

 

코앞에 다가서서 들여다보기보다는 예사처럼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볼 때 나타나는 정말 필요한 아름다움이 좋은 것이다. 재주가 모자란 것도 아니요 시간에 쫓긴 것도 아니면서 참 아름다움을 우리는 그렇게 길러 온 것이다. 조선자기의 아름다움은 건강하고 착실한 아름다움이다. 민중이 실용하는 그릇이요, 기교나 허식을 멀리 벗어난 숫배기의 아름다움이다. 욕심 없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잔재주 안부리는 손길, 흥겨웁도록 운치가 얼룩져 내배인, 그리고 땅에서 돋아난 버섯처럼 자연스러운 손길...그릇을 빗어내는 즐거움이 바로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마음.

 

 

  

 

용담꽃  -최순우

 

해마다 9월이 오면 시들기 시작하는 큰 산기슭의 풀밭속에 드문드문 숨어 피어 그 결곡한 생명을 파아란 불꽃처럼 남몰래 불태우며 끝내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스러져가는 호젓한 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꽃에서 슬픔의 의미와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배워왔다.  

 

   

이 꽃들이 푸른촛불처럼 골짜기들의 가을초원을 밝혀주면 이름모를 산새처럼 산에서 살아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모진 겨울바람이 불어 닥쳐오면 이 고운 용담꽃들은 그만 기진해서 눈쌓인 산기슭에 갈색의 유해를 남기고 죽어가지만 져버린 삶이 아니라 불태워버린 삶처럼 이꽃의 마른 꽃가지 마져 나는 좋아한다.

 

용담이나 억새같은 마른 꽃가지를 길게 꺾어다가 백자항아리에 꽂아놓고 한겨우내 바라보면 싱싱하게 살아있는 꽃가지보다 더 속삭임이 절실해서 마음이 늘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는 까닭을 알듯도 싶어진다.

 

산이 깊을수록 산새의 모습이나 노래가 격이 높듯이 이 용담꽃도 산이 깊을 수록 파랑색깔이 더욱 영롱하고 곁눈질없이 꽃은 피어나서 야산에서 보는것 따위의 세파에 시달린 피곤한 너울이나 떼를 쓰지 않는 법이다.

 

벌써 몇해전 가을이 되어버렸지만 가까운 친구들과 하룻밤을 오대산 상원사에서 보낸 이른아침 나는 이 깊은 산골에서 용담을 찾아 헤매었다.

 

벗들은 머루,다래 넝쿨을 더듬는 사이 듬성듬성 갈대가 우거진 초원에서 드디어 용담꽃 언덕을 발견했다. 사뭇 신비롭고도 청정한 파아란꽃색과 순리대로 늣늣이 피어난 청초한 꽃모양들을 보면서 과연 山氣의 슬기로움을 역력히 보는 듯 싶었다.

 

몸과 마음을 불태워 사랑햇던 청순한 소년의 영상처럼 나는 꽃이 슬퍼보였다.

 

이 꽃들을 조심스레 한가지 한가지 꺾어안은 내 심중을 알아줄 사람은 아마 이세상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오대산의 높고 깊은 산기의 뜻과 면면하게 여운을 남기며 울려준 상원사의 신라 종소리에 정화되어 버린듯 싶은 내가슴에 못잊을 이 용담꽃을 한아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시달리는 버스여행 10여시간 동안 꽃은 부대끼고 시들어갔다.

 

그러나 꽃은 끊임없이 내 가슴에 삶의 뜻과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속삭여주었다. 서울에 돌아오자 나는 무엇보다 먼저 꽃다발을 석련지(石蓮池)의 찬 샘물에 송두리째 담가주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잠이 깨어나자 눈을 부비면서 석연지에 먼저 가보았다.

 

꽃은 고스란히 맑은 물위에 떠서 생기를 되찾았고 서울의 혼탁한 하늘아래임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을 반기며 바라보는 듯도 싶었다. 서울에서 볼수없는 영롱한 푸른 생명의 불꽃을 태우면서 이꽃과 나는 분명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슬픈것이냐? 나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생리가 차마 슬픈것인줄을 미처 모르고 살아왔다.용담꽃은 향기도 매무새도 뽐낼줄을 모르면서 이 구월에도 아마 그 언덕위에 숨어 피어있을 것이다.

 

가을이 오면 나는 못견디게 그 용담꽃 피는 언덕을 생각한다.

 

겨울이 오면 꽃언덕에 눈이 다시 덮히고 꽃의 촉루는 눈속에서 썪어가고 새봄이 오면 그 숙근에서는 싹이 돋아나고, 또 가을이 오면 그언덕 풀숲속에 숨어서 용담꽃은 피어날 것이다.

 

삶의 의미와 그리움의 뜻 그리고 기다림의 즐거움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자꾸만 스미고 쌓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용담의 촉루가 아름답게 썩어가고 또 그 밑그루에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사람의 삶과 죽음이 추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용담꽃에 부치는 절절한 소망이다.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4.27일 개성에서 출생. 순우는 필명이고 본명은 희순(熙淳). 1935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미술사학자 고유섭에게 감화를 받고 한국미술사 연구에 뜻을 세웠다. 조선고적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개성의 여러 고고 유적지를 답사했고, 특히 고려청자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고보졸업 후 잠시 교편을 잡다가 1943년 개성 부립박물관에 들어가 한국미술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기 시작했다. 1945년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연구관,미술과장,학예연구실장 등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취임하였다. 작고하던 해인 1984년까지 40년 가까이 박물관에 봉직하며 당시 일반인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박물관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애정을 기울였다.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화여대 등에서 미술사를 강의, 1960년 여름 고고미술동인회(한국미술사학회 전신)를 발족하여 전국의 유적지를 누비고 《고고미술》을 발간하여 한국미술사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한국평론인회의 대표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1945년부터 5년간 문학지 《순수》의 주간을 맡았으며, 우리 문화재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밝힌 주옥같은 글을 열정적으로 발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문화의 참,아름다움과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주요 저서는 《한국미술사 개설》 《한국 공예사》《한국미 한국의 마음》 등이 있으며, 유고집으로 《최순우 전집》《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를 구(舊) 중앙청 건물로 이전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중 1984년 12월 1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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