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choyeung 2010. 3. 4. 00:36

2010년 3.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한지 100년이 되는 해와 날이다. 우리는 그의 태어난 날은 잘 기억하지 못하여도 의거일과 순국 날짜는 기억한다. 또한 1910년은 국치의 한일병탄이 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도마 (세례명 Thomas 多默) 안중근은 1909.10.26일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내면서  한국의 독립을 짓밟고 동양평화를 유린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처단한 결과, 일제의 선고공판에서 1910년 2월14일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안의사는 3.25일에 형을 집행해 줄 것을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측에 요청한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일에 형을 받고 주님 곁에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것마저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정해진 날이 3월 26일이었다. 26일은 달[月]은 달라도 이토가 죽은 날 1909.10.26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이 날을 택한 것은 이토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 였다.

  

 안중근 의사의 초상  Portrait Of Patriotic Martyr An, Jung-gun , 65.2 - 50.0cm, Oil on canvas, 2008

 

일본은 대 러시아 전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조선에게 제1차 세가지 약속을 강요한 것이 1904.8.22일이다. 그러나 이때 한일간에 서명한 것은 외교문서로 효력이 없는(無效) 한낱 각서(Memorandum)로서 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10. 8.29일에 일방적으로 조약(Agreement)으로 기만하면서 둔갑시켜 만들었고 이를 미국,영국에게 외교문서로 제공하였으며 이들 국가는 조선이 국권을 일본에게 내어준 것으로 오인하게 하여 그 영향으로 美.日간에 [가쓰라. 테프드 밀약]과 美.英간에 [제1차 英日 동맹]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된 것이다. 바로 1910년 8.29일은 수치스런 한일병탄이 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을사늑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고종밀서가  영국의 트리뷴지 당시 머리기사로 아래의 조선일보 2010.4.16 일 기사와 같이 보도된 것이다. 

 

순국일 1910년 3월 26일은 온종일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렸다

 

안의사가 사형언도를 받고 41일째가 되는 집행일 1910년 3월 26일은 온종일 흐린 날씨에 비가 내렸다. 그는 어머니 조 마리아여사와 아내 김아려가 지어 감옥으로 보내 온 한복으로 갈아입고 오전 9시 여순감옥의 2평 마루감방에서 나와 형장으로 나섰다.

 

 

 1910년 3월 26일 촬영된 순국 직전의 안중근 의사 사진

 

오전 10시, 형장의 교수대에 오른 안중근은 3분 동안 기도를 마치고 그의 나이 32세(1879~1910)에 순국한다. 이는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르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지 5개월 후이었다

 

 옥중에서 쓴 [안응칠 역사(자서전)]와 [동양평화론]의 원본을 조속히 일본은 돌려주어야 한다.

 

안의사는 일제에 억압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사명을 마친 뒤 이 감방에서 2.14일 언도 이후에 참으로 평안한 마음으로 80여점의 유묵을 남겼다. <안응칠(안중근의 아명-兒名) 자서전>과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은 이 감방에서 썻는데 원본은 아직도 일본이 숨겨놓고 있으며 단지 아래와 같이 일본 국회 도서관에 필사본으로 보관시켜 놓고 있다. 일본은 안의사의 유해를 돌려줄 경우 묘소가 독립운동의  횃불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하였는지 당시 여순감옥 인근에 몰래 숨겨놓았거나 또는 일본에 밀반출하였는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구하고 있다.

 

최근 한국이 한.중.일 세나라가 협의를 하여 안의사의 유해를 찾도록 국제적인 협력제안에는 의당히 최대의 성의를 보여야 하겠지만 특히 필사본으로만 보여주고 있는 <동양평화론>과 <안응칠 역사>도 그 원본을 한국에 조속히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참고>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본 발견

1969년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원장이 일역 필사본을 입수한 데 이어,1979년에는 재일동포인 김정명 아오모리대 명예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연구실 자료문서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본을 발견해 그 존재가 드러났다.

 

 

  -안중근 전기 및 논설

 

 -동양평화론 -필사본중 1페이지

 

 

 -안응칠 역사(자서전) -필사본중 일부

 

안의사는 형장에서 “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 것이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이라면 국권회복의 날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대한이 독립하여야만 동양의 평화가 보장될 수 있고 따라서 日本도 역시 장래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 6통의 유언

 

안 의사는 순국을 앞두고 동포에게 쓴 최후의 유언과, 뮈텔 주교와 빌렘신부, 어머니, 부인, 사촌 동생에게 6통의 유언을 남겼다. 그는 홍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은 이후 평소 시종일관 깊은 신앙심으로 생활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옥중에서도 최후를 기다리면서 신성하고 돈독한 신앙으로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2천만 동포에게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어머님 전 상서

 

조 마리아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 저녁 문안 인사 못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ㅡ 아들 중근 올림

 

 

어머니와 아내에게 남긴 유언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매우 종교적인 색채를 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기를 당부”한다. 그러면서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줄 것을 청”한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장남 베네딕토를 앞으로 사제가 되도록 키워서 천주께 바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그러나 큰아들 베네딕토는 12세 때 일본군이 보낸 한국인 스파이에 의하여 독살당한 것으로 증언된다.

뮈텔 주교(Mutel 민덕효)

 

민 주교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인자하신 주교께옵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죄인의 일에 관해서는 주교께 허다한 배려를 번거롭게 하여 황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를 입고 고백, 영성체의 비적 등 모든 성사를 받은 결과 심신이 모두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성모의 홍은, 주교의 은혜는 감사할 말씀이 없아오며,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 속히 승천의 은혜를 얻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동시에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께옵서는 다같이 일체가 되어 천주교를 위해 진력하시어 그 덕화가 날로 융성하여 머지 않아 우리 한국의 허다한 외국인과 기독교인들이 일제히 천주교로 귀의하여 우리 주 예수의 자애로우신 아들이 되게 할 것을 믿고 또 축원할 따름입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죄인 안도마 올림

 

 -뮈텔Mutel 민덕효 주교

 

1890~1938년까지 조선교구장으로 재임 그는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용납하지 않고 빌렘신부의 여순행도 반대하였다. 안의사는 빌렘 신부의 성사로 평안을 얻었다고 썼다. 한국의 복음화를 통하여 한국인들이 “우리 주 예수의 자애로우신 아들이 되게 할 것을 믿고 또 축원한다”고 하였다. .

죠셉 빌렘 신부(Joseph Wilhelm 홍석구)

홍 신부 전상서

 

예수를 찬미하옵니다. 자애로우신 신부님이시여. 저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고 또 최후의 그러한 장소에 수많은 노고를 불구하고 특히 와 주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 주신 그 은혜야말로 어찌 다 사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감히 다시 바라옵건대 죄인을 잊지 마시고 주님 앞에 기도를 바쳐 주시옵고, 또 죄인이 욕되게 하는 여러 신부님과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주시어 모쪼록 우리가 속히 천당 영복의 땅에서 흔연히 만날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교께도 상서하였사오니 그리 아시기를 바랍니다.끝으로 자애로우신 신부님이 저를 잊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저 또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죄인 안도마 올림

 

-조셉 빌렘(Joseph Wilhelm 한국명 洪錫九신부) 

 

1897년 1.11과 12일에 안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를 위시한 가족 33명에게 세례를 저었다. 안의사는 여러 신부와 교우들에게 염려를 끼쳤음을 마음아파 하면서, 그들에게도 문안 인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더군다나 그는 이 짧은 편지의 말미에서 자기가 뮈텔 주교에게 서신을 썼다는 것을 알리는데, 이것은 그가 주교와 빌렘 사이의 긴장 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한 단적인 예이다.

홍신부는 1910.3.9일과 10일에 여순감옥에서 처음으로 두 동생 정근 공근과 함께 안의사를 만났다.

아내 김아려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靈福)의 땅에서 영원(靈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안도마 드림  

 

 김아려 여사와 장남 분도, 차남 준생

 

그것은 바로 그의 장남 베네딕토를 앞으로 사제가 되도록 키워서 천주께 바치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촌 동생 명근,

명근 아우에게 보내는 글

 

예수를 찬미한다.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니 꿈속의 꿈이라 할까. 다시 깊은 꿈속의 날을 끝내고 영원히 복된 땅에서 기쁘게 만나고, 더불어 영원히 태평한 안락을 받을 것을 바랄 뿐이다.’

도마 보냄

 

정근,·공근에게

‘형이 씀

동봉하는 편지 여섯 통은 각기 보낼 곳에 전하여라. 훗날 영원한 복지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제 마지막 말을 남길 뿐이다

숙부,

 

작은 아버님 전에 답하는 글

 

아멘!

보내주신 글을 받아보고 기쁘기 끝이 없었습니다. 불초 조카의 신상에 대해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세상에서 화와 복을 불문하고 무슨 일이나 모두 주님의 뜻이오라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바이므로 다만 성모의 바다와 같은 은혜만 을 믿고 또 축원하면서 기도할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번 은혜로 모든 성사를 받을 수 있었음은 구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분의 품 속으로 구해 올려주셨음이라고 믿으며 자연 심신의 평안을 느꼈습니다. 숙부님을 비롯하여 일가 친척께서는 어느 분이시고 마음 쓰지 마시고 성모의 은혜에 대해 저를 대신하여 사례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바라옵건대 가내가 서로 일생을 화목하게 평안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큰아버지께옵서는 아직 입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듣고 참으로 유감된 마음을 견디기 어려운 바, 그러한 마음씨로는 성모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신 것일까요. 마음과 몸을 다하여 속히 귀화하시기를 권유하여 마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 일생의 권고임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교우에게는 일일이 서신을 내지 못하오니 그 분들에게 다음의 취지로 문안을 전해 주시기 바라는 바, 반드시 여러 교우가 다 신앙하고 열심히 전에 종사하시어 우리나라를 천주교의 나라가 되도록 권면 진력하시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머지 않아 우리들의 고향인 영복의 천당, 우리 주 예수의 앞에서 기쁘게 만날 것을 바라오니 여러 교우께서도 저를 대신하여 주께 감사 기도하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바라마지 않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이만 마치옵니다.

1910년 경술 2월 15일 오후 4시 30분’조카 도마 올림

 

 

숙부에게는 큰아버지, 안태진이 그때까지 입교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면서 드리는 일생의 권고라고 전해 달라며 “마음과 몸을 다하여 속히 귀화하시기를 권유”합니다. 끝으로 그는 여기서도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해 줄 것을 교우들에게 청한다는 인사를 잊지 않습니다.

 

 

 

면회 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하여 동포에게 전한 글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들 2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學問)에 힘쓰고, 실업(實業)을 진흥(振興)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는자로서 유한이 없을 것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평양의 천주교 성당에 경찰이 찾아와 당신 아들이 이토를 살해하여 큰 사변이 났으니 이는 당신이 잘못 가르치지 못한 탓으로 당신도 죄가 없다고 할 수없다고 을렀다. 그러자 “아들이 밖에서 한일은 알 리 없지만 나라위해 죽는 것은 국민의 사명이다. 내 아들이 나라 위해 죽는다면 나도 아들을 따라 죽을 것이고 또 죽음을 달갑게 여기겠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사형선고 전에도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에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 고 하였다. 안중근이 항소를 포기한 데는 어머니의 간절한 전언(傳言)도 크게 작용했다. 사형선고가 내린 날 안중근의 두 동생은 사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어머니가 계신 진남포로 돌아왔다. 전후 사정을 보고드리자 어머니는 여순으로 가서 자신의 뜻을 전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중근은 큰 일을 했다. 만인을 죽인 원수를 갚고 정의를 세웠으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큰 일을 하였으니 목숨을 아끼지 말라. 일본 사람이 너를 살려 줄 까닭이 없으니 비겁하게 항소 같은 것은 하지 말라. 깨끗이 죽음을 택한 것이 이 어미의 희망이다. 사형언도의 소식을 듣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너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네가 사랑하는 교우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살려달라고 구걸을 하면 양반집 체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제는 평화스러운 천당에서 만나자.” 라고 선고 이후에 면회가는 두 동생에게 “상고를 거부하고 깨끗이 교수대에 오르라”고 전한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몸바치며 맹서한 끊었던 손가락을 평생 간직한채 하늘에서 아들을 다시 만날 것을 기리다가 48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즉 시모시자(是母是子)라고 일컷기에 주저함이 없다.

 

◯ 일본은 그를 흉악범에서 살인자로 단정하다가, 100년이 지나서 칸트에 버금가는 사상가로  여기다

 

안중근의사의 고결한 삶과 순결한 인성(人性)은 눈물겹게 우리들의 가슴을 저며오게 된다. 안의사의 고매한 죽음의 정신 즉 신성(神性)에 모두들 숙연해 진다. 그의 삶과 죽음은 감히 남이 따르지 못할 품성과 정신의 복합적인 가치라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은 100년이 지나 차츰 세계적인 학술회의로 진행되어 독일 사상가 칸트(1724~ 1804)의 <영구평화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활발히 비교연구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의 유럽연합(EU)보다 진일보한 선구적인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이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을 앞두고 지은 옥중 한시

 

 

북녘 기러기 소리에 잠을 깨니

홀로 달 밝은 누대위에 있었다.

언제고 고국을 생각지 않으랴

삼천리가 또 아름답다

형제의 백골이 그 삼천리 땅 속에 의의하고

부조는 청산에 역력하다

우리 집에는 무궁화가 만발해서 기다리고 있고

압록강의 봄 강물은 돌아가는 배를 가게 해준다.

 

남자가 뜻을 육대주에 세웠으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죽어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뻐를 어째서 선영에 묻기를 바랄 소냐.

인간이 가는 곳이 이 청산인 것을

 

나막신과 대 지팡이로 동네를 나오니

강둑의 푸른 버드나무가 빗속에 즐비하다.

모든 벌이 어찌 금곡 주와 같겠는가.

무릉도원을 배 타고 찾는 것이로다.

 

여름의 풍류는 인간이 다 취하고

가을은 세상일이 손님이 먼저 들기를 기다린다.

주인의 풍치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흥이 푸른 나무들의 연기에 충분하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나가 서자

푸른 산과 흰들 사이에 꽃이 간간이 피어 있다.

만약 화가로 하여금 이 경치를 묘사하게 한다면

그 나무안의 새소리를 어떻게 그릴까

갈대꽃 위에 누구의 이름을 새길까

헤아러 눈 속에 들어간 뒤에 글자마다 분명할 것이다.

남자가 처음 한 명세를 배반 못 하겠다.

 

해동에 밝은 달은 선생님의 얼굴이요

북풍 밝은 곳은 처사가 있는 곳

붉은 꽃 푸른 버들은 작년 봄과 같고

여름이 지나고 서늘함이 생기니 가을이 왔구나.

 

일어나서 머리와 얼굴을 가다듬으니

누가 나와 함께 여기에 있는가.

누런 나뭇잎 덮인 사양길에

조금 전엔 작은 어느 가계에 있었는데

백운명월은 다시 공산에 떠 있다.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은 전생의 꿈과 같은데

고요한 혼백은 죽지 않고 돌아 올수가 있었다.

 

나의 혼백만이 짧은 지팡이를 짚고 나의 살던 집을 찾아가니

부엌의 한 등불만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일보 일보 삼보 다가가서 서니

푸른 산과 흰들 사이에서 꽃들이 피어 있다.

불그래한 안방에 향기가 그치질 않았고

여인은 반은 교태를 반은 부끄러움을 머금었다.

내 죽은 뒤에 가만히 나를 생각 하겠는가고 물으니

두 손을 모으고 금비녀 머리를 끄덕인다.

 

마음속에서 이별의 말은 계속되고

이별의 술잔이 손에 닿는 것이 더디기만 하다

살아서는 오히려 생각하는 날이 있었는데

죽은 뒤에는 어찌 저 홀로 가는 때를 견디어 내겠는가.

만난 인연이 오래오래 막혔다고 말하지 말아라

평생에 오히려 근심 속에 기약하는 것이었을 것이나

편지 한 장 날려 천문에 도달하게 할 수 가 있어

나의 사정을 호소하면

그대로 혼미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바른 마음을 속일까보냐

판사 검사가 어찌 나의 속마음을 알까

원수는 갚았고 곧 외로운 혼은 땅에 떨어진다.

 

 

 

 

1909.10.26(화)  뉴욕타임즈  기사 

Prince Ito, Japanese Statesman, Is Assassinated

Tuesday, Oct. 26, 1909
(use this link to access today’s entire issue)

A news bulletin reports that Prince Ito, one of the most powerful leaders of Japan, was assassinated today by a Korean in Harbin, Manchuria. “Prince Ito was 72 years old, and for years was one of the most conspicuous of Japan’s statesmen. Several months ago he was relieved of his work as Governor-General of Korea, in which post he had done much to pacify the country. By his arbitrary suppression of the insurrection he incurred the enmity of many Koreans who were opposed to Japanese rule…. The achievement above all others with which Prince Ito’s name has been associated in the minds of Occidentals was the framing of the imperial constitution by virtue of which Japan took her place for the first time in the rank of modern civilized states…. In some quarters it was believed that the tour of Prince Ito in Manchuria was to have been of a political nature and that it had as a basis an attempt to forestall the protests of the Powers against Russia’s domination of the Manchurian Railroad zone, under her agreement with the Chinese, by effecting a complete understanding between Japan and China.”  

 

1909.10.27(수)  뉴욕타임즈  기사 

Korean Had Patriotic Reasons to Kill Ito, and Personal ones, Too

<Prince Hirobumi Ito>
 

“I came to Harbin for the sole purpose of assassinating Prince Ito to avenge my country,” the unidentified Korean assassin declared after firing six shots in a crowded Manchurian railway station, three of which found their target. Then he and his companions, also unidentified, submitted to arrest without a struggle. “None of the three attempted to escape and calmly confessed that they had conspired against the life of Prince Ito. They boasted that the object of the plot was to take his life in revenge for his tyranny while he was Resident General of Korea. The assassin, while asserting that he was inspired by a patriotic motive and believed that Japanese wrongs to Koreans justified his act, admitted under examination that he had a personal grudge against the Japanese statesman, who had caused the execution of several of his friends.” The three were turned over to Japanese authorities, because “Koreans are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Japanese courts.”

 

(조선일보 기사)_ -독일은 한일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참고) 1979년 재일교포 김정명 아오모리대학 명예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칠조청미(七條淸美 : 히치죠 기요미)」문서중《안중근 전기급 논설(安重根傳記及論說)》이란 표제를 붙인 책자에서《안응칠역사》의 등사본이 미완의《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등사본과 함께 합철 편책된 것을 발견하였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서울 남산소재

조선일보 -안중근의 사이트

 

◯ 조선일보 기사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62) 고종밀서를 특종 보도한 英國 기자

2010.04.16 일

 

 

런던의 일간 '트리뷴'(Tribune) 기자인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는 1906년 1월 초 서울에 왔다. 을사늑약 이듬해였고 통감부가 설치되기 직전이었다. 궁중에는 고종을 감시하는 정탐꾼들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스토리는 고종의 측근이 한복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온 밀서를 전달받았다. 붉은 옥새가 찍힌 밀서는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은 황제가 조인하거나 동의한 일이 없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내정을 통제하는 일도 부당하다. 한국황제는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 보호 통치하되,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는 요지였다. 일본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아주고 중립화를 보장해 달라는 외교방침을 밝힌 내용이었다.

밀서〈왼쪽 사진〉는 1906년 1월 29일자로 작성되었다. 스토리는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나와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선적의 배를 타고 2월 7일 가까스로 중국 즈푸(芝��)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밀서의 내용과 자신이 취재한 한국의 실정을 기사로 작성하여 런던 본사에 송고했다. 또한 즈푸 주재 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O'Brien Butler)를 찾아가서 북경주재 영국대사에게 밀서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북경 주재 영국 공사 사토(Ernest Satow)는 영국 외무성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제2회 영일(英日) 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실질적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스토리가 타전한 첫 기사는 트리뷴지 2월 8일자 3면 머리〈오른쪽 사진〉(논란이 일자 같은 내용을 다시 보도한 12월 1일자 지면)에 게재됐다. '한국의 호소/ 트리뷴지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청'이란 제목의 기사는 글 첫머리에 "한국의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일본군은 궁중을 둘러싸고 있으며, 궁중에는 일본 스파이들이 가득 차 있다. 을사늑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고 썼다. 이어 을사늑약 체결의 경위와 한국의 정치 실정을 소개하고 고종의 밀서 6개항을 영문으로 번역 게재했다.

스토리의 기사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트리뷴지 기사는 로이터 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한국, 일본, 중국의 신문에 다시 실렸다. 대한매일신보와 헐버트의 '코리아 리뷰'도 한국 황제가 을사보호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밀서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1년 동안 계속되던 논란은 1907년 1월 16일자 신보가 밀서를 사진판으로 실으면서 다시 확산되었다.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했던 일본 외무성과 이토 히로부미 밀서의 실물이 신문에 실리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보에 실린 밀서 사진은 고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는 밀서의 존재를 부인했다. '고종은 밀서를 수교한 일이 없으며, 이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우의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만들어 한국 정부의 '관보'(1907.1.21.)에 게재했다. 이와 함께 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폐간하여 배설이 반일 활동을 못하도록 하고 그를 추방하려는 공작에 박차를 가했다.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  1872-1921)의 <동방의 내일(Tomorrow in the East, 1907)>

 

 

출처 : 한국일보-뉴욕판

 

고종황제 밀서 발견    입력시간 : 2002-11-05

고종황제가 자신이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영국에 알리는 밀서를 비롯, 당시 일본의 침략 만행을 기록하는 등 사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은 '동방의 내일(Tomorrow in the East)'이라는 제목의 고서가 발견됐다.

 

 



당시 한국에 체류하던 영국인 의사 스토리씨가 저서한 이 책은 '그레고리 밸 앤드 선' 출판사가 영국 '뉴 사우스 웨일스 도서관'을 위해 1907년에 발행한 것으로 고종황제가 1906년 1월29일 작성, 영국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며 스토리씨에게 전달한 밀서의 사본을 게재하고 있다.

이 밀서는 당시 일본의 감시가 두려워 모든 서신에 옥쇄를 찍지 않았던 고종이 '을사조약에는 황제(자신)가 서명하지 않았다'. '황제가 서명하지 않은 을사조약은 인정할 수 없다' 등 일본에 발각될 경우 목숨을 일을 수 있는 서신에 옥쇄를 찍어 영국인에게 전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 밀서 전달 사실을 알아챈 일본은 같은 날 저녁 스토리씨의 자택을 수색했으며 이를 눈치챈 스토리씨는 당시 주한미총영사와 함께 일본의 추적을 따돌리고 영국 인천을 통해 영국으로 도주했다.

이 책은 고종의 밀서 이외에도 당시 한·일관계, 한·영관계, 한인들의 감정, 이토 히로부미 등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한 것이다.

이책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고려한 영국 정부가 "인도와 영국영토에서만 배포가 허용된다"는 조건으로 이 책의 발행을 허용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한국에는 알려짖 않았다.

인터넷 사이트 이베이를 통해 경매에 부쳐진 이 책은 경매가 마감된 2일 영국 런던에서 '체스플레이어4'라는 인터넷 암호를 사용한 사람에게 미화 600달러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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