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choyeung 2010. 7. 10. 08:18


호머 헐버트 (1863-1949 태극장 1950년), 캔버스에 유채, 15호 P, 65.2x50.0cm, 2009년작


○ 1886 고종이 미국쪽에 요청시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교사로 자원입국

○ 1995 고종을 보필, 측근 자문역할

○ 1907 만국평화회의의 헤이그 밀사로서 제4의 특사역할

○ 1949 이승만박사의 초청으로 방문하였으나 일주일후 청량리 병원에서 타계, 사회장으로 영결식, 양화진에 묘소

○ 1950.3.1 정부가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 추서

 

 

 호머 헐버트의 사진모습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 1949년 )는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공원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자주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까지 하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

헐버트는 1862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 주에서 태어났다. 1884년,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 1886년( 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했을때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 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 한국독립운동 지원

그러나 1893년에 헐버트는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한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그러던 중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늑약되었는데,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알리려 했으며,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제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자주독립성을 호소하였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면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자주독립에 관한 글을 썼으며, 1919년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말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제국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해방되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이승만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으로 초대를 받고 42년 만에 내한하였다. 내한 이후 1주일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는 죽기전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다.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저서 :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 대동기년,  한국견문록

 

 

  

 

조선 '인정'이 산업화 막는다

지도층 부패와 미국의 '배신'이 망국 불러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대한제국 멸망사(1906)

-한 민족이 멸망해 가는 이면에는 많은 애련(pathos)과 곡절이 따른다.

 

조선을 병합하려는 일본의 야욕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1905년 10월, 사태 의 심각성을 인지한 고종은 근신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하지만, 경륜과 용기의 면에서 앞장서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망연자실하던 중에 그의 머 리에는평소 믿고 자문을 구하던 헐버트 목사가 떠오른다. 왕은 헐버트를 불러 밀지를 내리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 에게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호소해 줄 것을 부탁한다.

 

▲ 장죽을 물고 장기를 두는 마을 노인들을 젊은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흥미있는 체스 문제'라는 제목을 단 헐버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사진을 썼을까.

 

 

헐버트는 즉시 워싱턴으로 출발하여 당대 최고의 논객이며 정치적 영 향력이 막강하던 케넌(George Kennan)을 만나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호 소해 보기도 하고 지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 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매정하리만큼 냉담했다. 당시 미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에 익숙해 있었고 국익 관계도 미미한 조선을 도움으로써 일본과의 밀월이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음을 분명히 했다.안 쓰러운 노력도 보람없이 헐버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운명은 일본의 속방으로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제 헐버트는 글을 통해서 조선에 대한 온갖 그릇된 비방을 변호하고 조선의 독립을 세계의 여론에 호소해 보리라고 결심하고 그 동안 미뤄왔 던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둘러 탈고하여 1906년에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책이 바로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6)이다. 역사로 보면 서양의 구약시대에 이미 개국했으며, 비 록 중국처럼 장사에 능숙하지도 못하고 일본처럼 전쟁을 잘하지도 못하 지만 선량하고문화적 유산이 그 어느 나라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동방 의 이 아일랜드가 왜 역사로부터 사라져야(passing) 하는가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화두이다.

 

20년 가까이 한국에 살아온 헐버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서구 인들이 흔히 갖고 있던 백색우월주의나 비기독교도에 대한 비난이나 야 만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선악을 떠나서 자신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심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우선 한국인은 인정스럽고 친근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한 예로서 그는 한국의 여러 곳을 여행해 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쓸 만한 여관이나 호텔이 없는 불편함을 적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한국을 여행한 서구인들의 공통된 불평이었다. 왜 한국에는 여관이 없을까? 그 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한국인의 인정 때문이라고 한다. 길 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과 잠자리를 요구할 때 이 를 거절하는 법이 없는데 숙박업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산업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고 헐버트는 지적한다. 즉 이 인정이 결국은 금 전적 낭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허세일 수도 있 고 낭비일 수도 있으며 노동의 신성함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외출할 때의 여인 모습. 헐버트는 주자학적 가치관이 가정에서 여인의 존재를 매몰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 식객의 파렴치함과 그 수효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양 반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 의 기생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용서하는 심정적 요소 때문이며 이러한 사조는 멀리 볼 때 결코 인정만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고 그는 지 적하고 있다.

 

헐버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또다른 특징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족 또는 씨족 중심의 소집단 이기주의였다. 가족이 살갑게 사는 모습 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한국에는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없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600∼700년에 걸친 주자학적 가치관이 가 정에서 여인의 존재를 매몰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 헐버트의 지적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 살면서 한국의 여인들은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커다란 놀라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인은 어렸을 적에 는 아무렇게나 속된 아명으로 부르다가 남동생이 태어나면 아무개 누이 로 불리고, 시집을 가면 고향을 따서 파주댁이니 광주댁으로 불리고, 자 식을 낳으면 아무개 엄마로 불리면서 일생을 사는 동안에 여성의 존엄성 이나 정체성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여인이 울며 살아야 하는 사회가 얼마나 처절한가를 그는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끝으로 그는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문명의 이입이 오직 중국을 통해서만 일방통행적으로 들어왔 기 때문인데, 그것이 중화사상으로 결정화되면서 창의성이 억압되었음을 개탄하고 있다. 이러한 소중화 사상이 가장 절실하게 나타난 것이 한자 중심의 문화였다. 과거를 한자로 보아야 하고 비실용적 고전이 관리등용 의 첩경이 됨으로써 문명의 진보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을 하는 가운데 그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한글이 지식인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언문이라는 이 름으로 하천한 계급이나 정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여인들의 문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민족성을 가진 한국이 왜 끝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언젠가는 합병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비극을 극 복하기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그는 대한제국 멸망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점은 지배 계급의 부패였다. 헐버트는 한국의 멸 망이 일차적으로는 내재적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관찰사가 5만달러에 매관되고 현감이 5백달러에 거래되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결국 패망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 나 정작 민생을 괴롭히는 것은 이러한 매관의 연쇄 현상으로 나타나는 아전의 횡포였다. 이것은 결국 민심의 이반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그의 전망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왕실과 그 주변의 지배 계급이 문명 진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명치유신 이후 미 완성된 자본주의의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정한론으로 무장한 일본대륙론 자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착검과 특권이 박 탈된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살길을 찾아 서구의 문물과 관료 제도를 받아 들이고 있을 때 조선의 지배 계급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주 자학적 중화사상에 안주하면서 세계의 대세를 읽지 못했다. 대원군의 쇄 국이 당시로서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좀더 유 연하게 서세동점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정책을 변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 고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 이러한 보수파에 대항한 개화파가 있었지만 그들은 일을 너무 조급하게 서둘렀다. 그들은 지금이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now or nothing)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는 분별없는 젊은이들(ill- advised youngmen)이었다. 그들의 진심이 아무리 순수한 것이었고 우국 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김홍집과 어윤중이 저자거리에서 돌멩이에 맞아 죽 는 것을 바라보면서 헐버트는 그들이 난세에 살아남는 지혜를 갖추지 못 했음을 안타까워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그들이 친일적 성향을 보인 것은 그들의 경륜이 익지 못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민중적 정서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헐버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내재적 모순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 이 멸망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외재적 요인 즉 미국의 무신을 결코 간 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헐버트의 입장이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미 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서방 국가이며 그 조약에서 미국은 한 국의 안전과 이익을 존중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한국은 자신의 독립이 유 린될 때에는 이를 막아 줄 수 있는 국가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 게 구원을 요청할 권리를 갖는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한 국민에게 환난이 닥쳐오고 그토록 되풀이하던 공언이 순수한 것이었음을 입증했어야 할 무렵에 미국은 그토록 약삭빠르게, 그토록 차갑게, 그토 록 심한 멸시의 눈초리로 한국민의 가슴을 할퀴어 놓음으로써 한국에 살 고 있는 점잖은 미국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기울어 가는 조국을 건질 길이 없게 되자 충성심이 강하고 지적이며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안에 한국 주재 미국 공사 몰간(E VMorgan)은 일본공사관에서 이 흉행의 장본인들에게 샴페인을 따 르면서 축배를 들고 있었다. 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망국의 낙조가 비치는 대한제국의 지도자와 국민은 어 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자신의 민족이 자신을 정복한 민족과 대등하게 될때까지 자기 민족의 교육에 전념해야 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하 여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느끼고 있는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 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충고로 글을 끝맺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 나 교육이 국가흥망의 열쇠이며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라는 것은 변함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주간 조선- 1999.05.13 /1552호

 


 

이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 (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

 

 

 

헐버트 박사의『한국사, 드라마가 되다』완역본 출간

 

역사학계의 획기적 사건’

 

천재적 역사학자이자 고종의 밀사였던 헐버트, 그가 당대의 귀중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현대적, 객관적 시각의 한국사 원전을 최초로 쓰다!

 

“나는 어느 한국인 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과거 25년간 조선왕조의 역사를 연구하며 개인이 소장한 필사본 여러 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학자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이 책에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 또한 나는 특별히 허락을 받아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자료를 많이 갖춘 사설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었다.” -호머 헐버트

 

이 책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들의 뒷면과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역사 사료로서도 독특하고 중요한 의미를 차지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잊고 있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건들을 사료를 바탕으로 소설처럼 서술하여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특히 병자호란 막바지에 인조가 남한산성 옹성을 끝내고 청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이른바 ‘항복 의식’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한 슬픈 역사 드라마의 대단원을 보는 것 같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러일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제물포 해전을 묘사한 대목에서는 한 편의 전쟁 영화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다.

 

1권에는 단군조선에서부터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 초기까지의 역사가, 2권에는 임진왜란 중기부터 청나라와의 두 차례의 전쟁(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영·정조의 정치·문화적 개혁기, 그리고 1904년의 러일전쟁까지의 역사가 왕조 순, 사건 순으로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1권에서 ‘대마도가 신라의 속국이었다’는 기록을 읽으면, 독도 논쟁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2권에서 이순신 장군의 비사를 접하면 ‘이런 사실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한국사, 드라마가 되다』는 후대의 평역이 아닌, 당대의 살아 있는 기록들의 총합이다. 일제의 분서갱유로 인해 많은 사료가 유실된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도 헐버트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대의 평역이 당대의 기록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이처럼 드라마틱하면서도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엮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헐버트 박사의『한국사, 드라마가 되다』출간을 축하하며 _ 김동진(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 회장)

 

헐버트 박사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국사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발표한 수많은 글들을 바탕으로 1905년 드디어 대작『한국사』가 탄생하게 되었다.『한국사』야말로 헐버트 박사의 한국 사랑의 결과물이자, 한국사 연구의 결정체이다. 또한 단군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구한말까지 다룬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책이다.

 

더구나 각 장을 떼어놓고 보면, 각각의 장이 한 편의 드라마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묘사가 너무나 생생해 사건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을미사변, 청일전쟁 등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이다. 이런 점과 더불어 당시에는 현존하는 임금의 왕조를 책에 담는 것은 금기된 사항이었으나 고종 황제의 윤허를 얻어 조선왕조를 책에 실었는데, 이는 우리 역사학계의 획기적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학계는 이 책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니, 모르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 이유에는『한국사』가 영문으로 되어 있고 1,000쪽이 넘는 대작이라서 한글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1차적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는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묻혀 있는 보석『한국사』의 번역본이 빨리 나오기를 고대하던 중에 이 번역본이 나왔다. 이 책을 통해 헐버트 박사의『한국사』가 한국 사학자들에 의해 올바르게 평가되어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역사가 있었던가!  최도영(mbc PD)

 

역사학자이자 한글학자인 헐버트는 한국사를 마치 소설처럼 눈에 보이듯이 상세하고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다양한 사료를 근거로 고대사를 충실히 복원해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근대사에 관한 상세하고 정확한 서술은 독보적이다. 그는 조선 후기에 조선에서 생활한 장본인이다.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는 후대의 평역이 아닌, 당대의 살아 있는 기록들의 총합이다. 일제의 분서갱유로 인해 많은 사료가 유실된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도 헐버트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대의 평역이 당대의 기록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이처럼 드라마틱하면서도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엮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당대 지성들의 지적 성과가 녹아 있는 대작! _ 강태욱(중앙일보 기자, 동시통역사)

 

헐버트는 한국어와 한자를 한국인보다 더 잘 구사했다. 그가 고종의 특사로서 많은 사료들을 조회할 수 있었고, 조야의 수많은 학자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의 방대한 한국사는 그 자신만의 작품이라기보다 수많은 당대 지성들의 지적 성과가 함께 녹아 있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헐버트가 제3자로서 이해관계나 정파에 구애받지 않고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더욱 의미가 있다.『한국사, 드라마가 되다』를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한국사라고 본다면, 이 책을 한국사의 원전으로 꼽아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미리보기 단군 조선, 하나라에 치수를 가르치다

 

기록에 따르면 하나라의 시조 우왕이 중국 땅에 범람한 물을 다스려줄 것을 단군조선에게 부탁하자, 단군은 아들 부루를 사신으로 보내 치수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기원전 2187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오자 부루가 북쪽으로 도망쳐 부여扶餘(북부여)라는 왕국을 세웠고, 훗날 이 부여는 가엽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가 되었다고 전한다.

 

두 이야기 사이에는 연대 차이가 심해서 둘 다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두 번째 기록은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하며 부여국 건국에 관한 유일한 사료가 된다. 훗날 단군조선에는 길을 닦고 수로 관리를 관장했다고 전해지는 팽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믿을 만한 문헌에 따르면 황제가 팽오에게 동쪽 부족인 예맥과 조선朝鮮을 잇는 길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로써 일부 문헌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기자가 출현하기 전에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속국이던 대마도

 

신라가 대마도(쓰시마 섬)를 정복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마도가 척박한 땅 때문에 매년 신라에 의존하여 지원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대마도를 차지하고 일본인을 섬에 이주시킨 때는 기원후 500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대마도는 한반도 왕국에 종속되지 않았지만 둘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다. 지속적으로 교역이 이루어졌고 상업이나 정치면에서 활발히 교류했다. 대마도의 다이묘(大名)가 한반도 인근 해안 지역을 지배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국 고대 문헌에는 매년 일식과 월식이 일어난 날짜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신빙성 있는 사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새로운 왕이 왕위에 오를 때마다 일식 날짜를 기록한 목록을 이들 문헌에 실었다. 예를 들어 혁거세 통치 기간의 기록을 보면, 혁거세 치세 4년, 24년, 30년, 32년, 43년, 45년, 56년, 59년에 일식이 일어났다.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53년, 33년, 27년, 25년, 14년, 12년, 1년과 기원후 2년에 해당하는 해다.

 

만약 이 문헌이 후대 사람들을 속이려고 훗날에 편찬된 것이라면 일식을 기록한 목록까지 실려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에는 믿을 수 없거나 신빙성이 없는 내용도 실려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기원전 48년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언급한 최초의 역사 기록이 나왔다. 이 해에 왜는 한반도에서 노략질하던 행위를 한동안 중단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일본은 동아시아의 바이킹으로 군림하면서 배를 띄울 만한 물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또 한반도 남단에 왜가 출몰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왜가 이 지역에 정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원전 37년에 아직 작은 왕국이었던 신라는 주변 지역과 변한의 읍락에도 손을 뻗쳐 복속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정복 과정에는 무력 충돌이 거의 없었다. 변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신라에 들어왔다. 같은 해에 금성이라고도 불리던 신라의 수도 주위에 35리(약 14킬로미터) 길이의 성벽을 쌓았다. 금성은 길이가 3,075보이고 너비가 3,018보였다.

 

신라가 팽창하고 군주제로 모든 권력을 중앙에 집권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자 진한을 마한의 속국으로 여기던 마한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신라 왕은 기원전 19년에 마한 왕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신에게 선물을 잔뜩 들려 보냈다. 신라로 흘러 들어오던 중국 유민의 행렬이 멈추지 않은 일도 마한 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문제를 그냥 내버려두면 마한이 아니라 신라가 삼한 지역의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신라에서 보낸 사신 호공瓠公은 원래 왜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마한 왕을 만나러간 호공은 몹시 화가 난 마한 왕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마한 신하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이듬해에 마한 왕이 죽자 신라는 장례식에 사절단을 보냈다. 이 사절단은 마한을 무너뜨려 신라에 복속시킬 틈을 노렸지만, 신라 왕이 그 전해의 모욕적인 사건에 대한 복수를 금했기 때문에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일본의 지배자, 연오랑과 세오녀

 

영오(연오랑)와 세오(세오녀)에 관한 흥미로운 전설은 157년의 일이기는 하지만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신라 동쪽 바닷가에 영오라는 가난한 어부가 아내 세오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영오가 커다란 바위에 앉아 고기를 잡는데 바위가 흔들리다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영오는 깜짝 놀란 채로 바위에 실려 동쪽 바다를 건너 일본의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영오가 하늘에서 내려온 줄 알고 당장 왕으로 삼았다. 영오 부인 세오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직접 남편을 찾아나섰다. 영오를 일본으로 실어 나른 알돌에 올라섰는데 영오를 놀라게 한 것과 똑같은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영오가 왕이 된 것을 본 세오는 왕비가 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영오와 세오가 떠난 뒤에 신라에는 큰 재앙이 닥쳤다. 해와 달이 없어지고 온 나라가 어둠에 휩싸였던 것이다. 점쟁이는 누군가 일본에 가버려서 생긴 일이라고 알려주었다.

 

일본으로 간 사람들을 찾기 위해 급히 일본으로 떠난 사신은 신라 사람이 그곳 왕국의 왕과 왕비가 된 걸 알고는 몹시 실망했다. 사신은 자초지종을 들려주고 당장 신라로 돌아가자고 청했지만 부부는 새로운 삶에 만족한 듯 보였다. 하지만 세오는 비단 두루마리를 사신에게 건네며 신라 왕이 두루마리를 펼쳐서 제사를 지내면 해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결국 세오 말대로 되었는데, 신라 왕이 주문을 외우자 신라 땅에 다시 햇빛이 비췄고 온 나라가 태평해졌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학설은 대부분 영오와 세오 이야기만큼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사기古事記』라는 일본의 문헌은 신라의 역사를 상세하게 다룬다.

 

조선이 유약했다는 비난은 근거가 없다

 

그즈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정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기에 잠시 방향을 돌려 일본 국내 사정을 살펴보고 일본과 조선을 비교해보면서 일본이 처음에는 승리를 거뒀다가 곧이어 패배한 이유를 알아보자.

조선과 일본은 발전 방향이 전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조선은 줄곧 명나라와 화평 관계를 유지했다. 고려 시대의 몽골이나 후대의 만주 정권과 달리 명나라는 북방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서 조선과 북쪽 국경에서 충돌할 일이 없었다. 명나라는 중국 본토의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로 몽골이나 만주족과 같은 북방 민족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무력 도발을 일으키지 않는 한 명나라는 조선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선 시대 말기까지도 조선은 명나라를 진정한 후원자로 생각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멀리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 왕들의 막강한 권력으로 통일된 이래로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가끔씩 야인의 공격을 받거나 바다 건너 왜구의 노략질에 피해를 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외부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국방 문제로 불안해 하지도 않았다.

 

조선이 군대를 양성한 유일한 이유는 야인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평화 시대가 도래해 온 나라가 화평했기에 일각에서 주장하듯 조선이 유약한 나라였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강력한 국가였다고 볼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 일본의 침략을 받던 바로 그해까지 조선은 세종의 개혁 정책을 고수해왔고 그 후의 호전적이지 않은 임금들은 학문, 예술, 윤리를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역사를 통틀어보아도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며 나라의 중요한 자원을 향락과 사치에 써버린 군주가 도덕, 과학, 사회, 문학 연구에 힘쓴 예는 없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왕들은 온 나라가 일본의 침략으로 신음할 때까지도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이 왕으로서 자격이 없던 연산군을 끌어내리고 묘호를 부여하지 않은 일이 있은 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중종은 윤리와 도덕을 강화하여 청렴을 제일의 가치로 삼았고 누구보다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다. 중종의 가장 큰 업적은 백성들 학문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옥편』을 편찬한 일이었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은 학문 장려 정책을 유지해나갔으며 여러 가지 업적 중에서도 복잡한 천문 기구를 만든 것이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그 다음 시대에 외부의 침략을 받은 것이다. 편견 없는 눈으로 보면 일본 역사가나 한국의 사료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당시 조선이 최악으로 타락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없다.

 


  기념웹사이트 http://www.hulbert.or.kr

 

 ▸ 1905.12.13 뉴욕타임즈의 기사

Published: December 13, 1905 Copyright © The New York Times

 -조선 황제 고종은 <호머 헐버트> 고문에게 한.일 강제조약을 부인하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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