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choyeung 2010. 9. 4. 23:40

올해는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의사의 어머니는 본명이 조성녀(趙姓女 1862~1927)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마리아 (瑪利亞)였다. 위대한 사람뒤에는 늘 위대한 어머니가 계시듯 안의사 님의 뒤에도 이와 같이 큰 사람이 계셨다.

 

 

 조마리아 여사의 사진모습

 

◯ 是母是子(시모시자)...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안 의사의 어머니가 변호사 선임문제로 평양의 천주교당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조 마리아 여사를 괴롭히곤 했는데 하루는 경찰 책임자가

“당신의 아들이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을 살해하여, 두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났는데, 그처럼 태연할 수가 있느냐? 당신의 자식교육이 잘못된 탓인데 그래도 죄가 없다고 발뺌하겠느냐?”하고 윽박지르자

“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살다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장한 아들을 둔 어미로서 조상에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의연히 항변했다.

 

이런 안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여순 감옥에 수감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응칠(안의사님의 아명)아!

네가 이번에 한 일은 우리 동포 모두의 분노늘 세계만방에 보여 준 것이다. 이 분노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려면 억울하더라도 상고(上告)를 하지 말고 우리 민족의 대의를 위해 거룩한 죽음을 택해야 될 줄로 안다. 옳은 일을 한 사람이 그른 사람들에게 재판을 다시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의 영웅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너를 일본 놈들이 살려 줄 리가 있겠느냐. 혹시 자식으로서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해서 상고하겠다면 그건 결코 효도가 아니다. 기왕에 큰 뜻을 품고 죽으려면 구차히 상고를 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남기지 않기 바란다.

 

이 글을 본 일본인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시모시자(是母是子 :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라며 신문에 대서 특필 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님께서 옥중에 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생겨난 말씀이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백천 조씨이다.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조마리아는 1885년 1월 17일에 둘째 아들 정근(定根)을 낳았고 그 4년 뒤인 1889년 7월 11일에는 셋째 아들 공근(恭根)을 낳았다. 그리고 몇 년 뒤 딸 성녀(姓女)를 낳아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조마리아의 시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슬하에 태진泰鎭·태현泰鉉·태훈泰勳·태건泰健·태민泰敏·태순泰純의 6남과 세 딸을 두었다. 고려조의 명현인 안향安珦의 25대손으로 해주에서 12~13대를 세거世居하다가 진해현감을 역임한 뒤에는 많은 자산을 지친들에게 분배해 주고 자기는 300여석 추수의 자본만 가지고 산수 수려하고 족히 피난지가 될 만한 청계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때가 안중근 두 살 때라 했으니 1880년에 해당한다.

 

조마리아의 남편 안태훈은 여러 형제 중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8~9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 13~4세 때는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를 익히고 과거 공부에 힘써 신동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입신공명심도 컸다. 그는 어린 아들과 집안을 아내에게 맡긴 채 서울로 가서 김종한의 문객이 되어 과거 준비를 하여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였기에 남편은 흔히 안진사로 불렸다. 뒷날 안태훈은 3남에까지 대문장·대영웅으로서 풍성風聲이 자자했다.

 

안태훈은 자산이 넉넉했으나 해주 향반鄕班 생활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강하였고 새로운 시대 사조인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안태훈은 1884년 갑신년에 개화인사 박영효의 추천을 받아 국비 일본 유학생 70여 명 중에 선발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되자 유학 대상자들까지도 개화파로 지목되어 정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안태훈은 고향으로 내려와 70~80명의 일가권속을 이끌고 이미 아버지가 이거한 신천군 두라면斗羅面 천봉산天峯山 아래 청계동淸溪洞산골로 이주 은거하였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 수려한 것이 실로 별천지였다. 마을에는 40~50호의 인가가 여기저기 있고 마을 앞에는 청계가 흐르고 있었다.

 

안태훈과 6형제는 모두 문한文翰이 뛰어나며 한 사람도 유약해 보이는 이가 없는데 그중 안태훈은 안채眼彩가 명투하여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안태훈을 악평하던 사람도 그를 한번 대면하기만 하면 경건한 마음이 울어난다고 했다. 또한 성품이 소탈하여 무식한 하류들에게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여 위아래의 모든 사람을 적소에 유용하게 썼다. 다만 주량이 과도하여 청수한 얼굴에 코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청계동에 이거한 후 문전에 소규모의 연당蓮塘을 파고 당塘가운데에 한칸 초정을 짓고 안태훈의 6형제가 평일에는 음주영시飮酒詠詩로서 우의를 다졌으며, 자질子姪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재를 짓고 고능선高能善 등 명망 있는 학자들을 모시어 배움을 받게 하였다.

 

조마리아는 6살 된 아들 중근을 데리고 청계동 산골 살림을 새로 시작한 이듬해1885 정월에 둘째 아들 정근을 생산하였고, 대소 가족의 일들을 보듬으면서 주부의 능숙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아들 중근은 총명하고 건장하게 자라면서 서재에서 글을 배워 유교 경전과 통감류는 물론 조선사와 만국역사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의 유묵 중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刺”가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가 하루도 빼지 아니하고 독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문약한 선비이기보다는 말타고·활쏘기를 즐기는 호연지기의 상무적 기질이 있었다.

 

청계동 산골은 이 나라의 영웅 안중근을 품어 키우기에 알맞은 환경이었다. 아들은 자라면서 숙부泰健와 포수꾼을 따라 단총을 메고 수렵하러 다녔다. 그의 사격술은 가히 발군의 명사수라 할 만하였다. 소년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은 마침내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실수 없이 사살할 수 있었다.

 

서각을 달아 메고 마을 입구의 작은 동산 꼭대기에는 포대砲臺를 설치하여 포수들로 방수防守케 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들이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들고 무서운 기세로 전국에서 일어났을 때 원용일元容日이 이끄는 2만 명의 동학군들이 엄동설한 12월에 해주 일대를 휩쓸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풍이 불고 큰 비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키 어렵게 되자, 동학군들은 비에 갑옷이 흠뻑 젖어들고 한기가 들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안태훈은 이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대청에 의려소義旅所를 차리고 70명의 의병으로 동학군을 격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16세의 소년 안중근은 밤을 타 6명의 동지를 데리고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동학군 대장소가 있는 지척까지 다가가서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동틀 무렵 동학군들이 총격대가 소수임을 알고 포위하여 와 위기에 처했다. 그날 조마리아는 여인네들을 데리고 출정할 의려義旅들을 위하여 새벽밥을 지어 먹였다. 12월 추운 겨울 든든하게 식사를 한 의려 정병精兵 40명이 동학군 집결처로 달려가 동학군을 향하여 집중 사격을 함으로써 안중근 선봉의 위기를 구하고 마침내 대승을 거두어 많은 전리품을 얻게 되었다.

 

◯ 소년 김구金九, 金昌洙

당시 동학군 접주 중에 19세의 소년 김구金九, 金昌洙가 있었다. 안태훈은 김구의 출중함을 알고 그가 청계동을 침범하다가 패멸 당하게 되면 아까운 인재를 잃게 된다는 생각에 그에게 밀사를 보냈다. 동학군이 크게 패퇴한 후인 1895년 2월, 김구는 청계동으로 안태훈을 찾았다. 안태훈은 김구가 맏아들 중근보다 불과 세살 위인데도 깍듯이 영접하여 예우를 하였다. 또한 기동其洞에 김구의 부모가 거하시는 것을 알고 사람을 보내 그 길로 모셔오게 하고 인근에 가옥 한 채를 매입하여 당일로 청계동 거주를 시작하게 하였다. 그때 김구는 20세의 청년이었다. 김구는 매일 안태훈의 사랑을 찾아 안중근 형제들과 그들의 친구들과 교의를 나누고 서적도 읽으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만남은 실로 하늘이 맺어준 특별한 인연이 되었다. 이들은 장차 나라 구하는 대업에 바쳐질 아들의 어머니들로서 뛰어난 모성지도력을 지닌 분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서로 자별한 우애를 나누며 지냈다. 조마리아는 곽낙원보다 다소 나이가 적어 서로 형님 아우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아들 키우는 교육방법이 아주 달랐다. 곽낙원은 아들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매를 치는 엄격성이 있었다. 그러나 조마리아는 아들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고 지원하는 분이었다.

 

김구는 안태훈 사랑을 드나들면서 안중근 부모의 자녀 교육을 눈여겨보았다. 8~9세 된 정근과 공근 두 아들에게는 머리를 길게 땋고 빨간 두루마기를 입혀 서재에 정좌하여 공부하게 하였는데 이 두 아들에게는 글을 읽어라 써라 하면서 독려를 했다. 그러나 말타고 사냥하기를 즐기는 장자 중근에게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16세에 재령의 김홍섭金鴻燮의 딸 아려亞麗와 혼인을 한 안중근은 상투 튼 머리에 자색 명주띠를 질끈 동이고 어깨에는 방총을 메고 매일 사냥을 나가 짐승을 포획하여 가지고 집에 가져오곤 했다. 조마리아는 이것으로 맛나게 음식을 만들어 가족들은 물론 의려의병들을 공궤하였다.

 

그런데 신천 동학군을 진정시킨 뒤 안태훈 일가에게 억울한 일이 생겼다. 동학군으로부터 노획한 1천여 포대의 곡식을 군량미로 삼아 모두 소비한 터인데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과 전 선혜청 당상 민영준閔泳駿이 그 곡식이 탁지부 소관이니 상환하라고 갖은 압력을 가하였다. 이 일은 옛 동지인 김종한의 중재로 일단 무사하게 되었던 것이 아관파천 후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세도가 민영준이 다시 문제제기를 하여 안태훈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안태훈은 성당으로 피신하여 몇 달을 지내게 되었는데 여기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조마리아는 안태훈의 일로 혼자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가정사를 돌보았다.

 

◯ 니콜라스 조세프 마레 빌렘 (Nicolas Joseph Mare Wilhelm, 1860~1938) 홍석구  (洪錫九)신부

 

 

 

안태훈은 신부들의 도움으로 군량미 상환문제가 해결되자 1896년 10월에 청계동으로 귀향하였다. 안태훈의 성당 피신 생활은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집안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안태훈은 귀향하면서 천주교 교리 서적들과 천주교 교리사 이종래바오로를 대동하여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였다. 불과 2개월 만에 청계동과 이웃 7개 마을에서 큰 신앙운동이 일어나 안태훈은 동생 태건을 매화동 본당의 빌렘 Joseph Wilhelm, 洪錫九신부에게 보내어 신앙운동 사실을 알리고 공소 설치를 요청하였다. 빌렘 신부는 청계동의 신앙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897년 1월 8일에 청계동을 찾아 1월 11일과 12일에 33인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때 안중근도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빌렘 신부는 이해 부활 판공 시기에 다시 66명에게 영세를 주었고 그 이듬해의 부활 판공 시기에 다시 25명의 신자들에게 영세를 주었다. 안태훈 가족으로는 안씨 집안의 장손인 태진은 조상 제사를 지내야 하므로 영세를 받지 않았을 뿐 가족 모두가 영세를 받았다. 빌렘 신부는 1898년 4월 22일 본당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청계동으로 옮겨와 정착하므로써 청계동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안중근은 열렬한 신심을 가져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로 수행하여 해주·옹진 등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전교를 하였다. 빌렘 신부는 이처럼 청계동 안중근 가문, 특히 안중근과는 깊고 깊은 신앙적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 안태훈은 일제의 침략 마수가 뻗쳐오는 1906년 1월 2일 청계동에서 사망하였다. 안중근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어머니 조마리아 등 가족과 함께 삼화항진남포으로 이사하였다.

  

 

 

조성녀 마리아 여사(1862-1927) 수연(회갑) 기념사진,

러시아 니콜리스크 Nikolsk(지금의 우수리스크Ussurysk)에서, 1922.4.8

-둘째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조마리아 여사

※ 2010년 당시까지 조성녀 마리아 여사의 생년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는데 회갑사진을 보고

1862년임을 추산하여 위키백과에 수정을 한적이 있음

 

 

◯ 일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 있을 때 어머니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안중근 어머니께서 안중근에게 보낸 편지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 국채보상운동

안중근과 조마리아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안중근이 대구에서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학교 경영이 어려워 평양에 가서 석탄광을 캐는 사업을 하였는데, 일본인의 방해로 수천원의 손해를 보았던 때였다. 그는 평양 명륜당에 국채보상을 위하여 1,000여 명 군중이 모인데서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때 일본 별순사 (別巡査) 한 명이 와서 조사하면서 “회원이 얼마며 재정은 얼마나 거두었는가” 라고 질문하자 안중근이 대답하기를 “회원은 이천만 명이오 재정은 일천삼백만원을 거둔 다음에 보상하려 한다.”고 하자 일본인이 욕을 하면서 “한국인은 하등 사람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며 조롱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는 것이오, 빚을 준 사람은 빚을 받는 것인데 무슨 불미한 일이 있어서 그같이 질투하고 욕질을 하는가.” 라고 항변하자 일본순사가 성을 내고 안중근을 치며 달려들었다. 이에 안중근은 이같이 까닭 없이 욕을 본다면 대한 이천만 민족이 장차 큰 압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을 것이냐.

 

◯ 안중근을 있게 한 조마리아의 모성지도력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온 나라로 불길처럼 번져가자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졌다. 또 이 해에 고종황제가 이준 등을 헤이그평화회의에 밀파하였다. 일제는 그 책임을 물어 황위를 빼앗고 순종을 새로이 옹립하면서 곧장 한국군대해산령을 내리게 했다.

『근세역사』에서 이같은 상황을 “광무 11년 1907 졸지에 대변이 일어나 한국 나라 안 전체가 수라장이 되어 삼천리 강산이 없어질 듯 혼란에 빠졌다”고 표현했다. 이때 안중근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새로운 뜻을 가지고 가족들을 뒤로 한 채 국외로 망명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떠나야 하는 것이 불효라 생각되어 부복하여 사죄를 올렸다. 자식에 대한 모성지도력이 강한 조마리아는 떠나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의 말을 주었다.

 

집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스럽게 싸우라.

안중근에게 어머니의 이 간단한 한 마디 훈계는 백만 원병을 얻은 것과 같았고 출국 후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 안중근은 원산항에서 북간도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 곳 교포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때가 오면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연추烟秋에 있는 다지치프에서는 동지 11명과 단지동맹을 맺고 흐르는 피로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쓰고 취지문을 써서 의병을 모집하여 참모중장이 되었으며 일본군과 수차례의 교전을 하였다. 용병술이 뛰어나고 사격술이 백발백중인 안중근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피로와 중과부족으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망명생활 만 2년여가 지난 1909년 10월 어느 날 그는 『대동공보大東公報』를 통해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등박문은 한국의 원수이며 동양평화를 무너트리는 원흉이었다. 안중근은 대한독립의군부의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등을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10월 26일 아침 9시 반경에 이등이 기차에서 내려 환영 인파 속을 인사하면서 지나갈 때 안중근은 삼엄하게 도열한 경비 군대 사이를 나는 듯 빠져나가 7연발 권총으로 이등을 향하여 세발을 쏘았다. 세발 모두 이등을 명중시켰다. 다시 세발을 더 쏘아 수행 관원 세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등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안중근은 “코리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부르고 러시아 헌병장교에게 체포되어 역 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고 저녁 9시 반경에 러시아 마차로 하얼빈총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27일에는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 15명이 관련인으로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었다.

 

28일 일본 관동도독부 여순지방법원 검찰관인 구연효웅溝淵孝雄이 하얼빈 총영사관에 출두하여 안중근 외 15인의 신병과 서류 및 물건 일체를 인수하고 구연효웅 주도로 첫 취조가 실시되었다. 왜 이등을 적대시했는가를 질문하자 안중근은 거침없이 이등의 ‘죄상 15개조’를 열거 하였다. 그의 진술을 들은 구연효웅은 안중근에게 “진정한 동양의 의사”라고 말하고 “의사가 사형받는 법은 없다” 고 말했다.

 

검찰관 구연효웅(溝淵孝雄)은 11월 1일 안중근 외 8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이들을 장춘長春을 경과하여 여순형무소로 호송하였다. 이후 안중근의 2차 심문은 11월 14일부터 시작되어 14일에 3차, 16일에 4차, 18일에 5차로 이어졌다. 이 사이 국내에서는 안중근과 그 가족 그리고 연루자로 생각되는 애국지사들에 관한 세밀한 조사를 하여 증미曾彌 통감이 일본 소촌小村 외무대신에게 보고서 를 보냈다.

 

일주일만인 11월 24일 6차 심문에서는 국내외에서 자료 보완이 이루어져서인지 안중근의 이등 사살에 대한 동기와 이유에 대한 본격적인 심문을 하였다. 11월 26일 7차 심문 후, 8차 심문은 3주여가 지난 12월 20일에야 행하여졌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홀어머니의 격려를 받으며 처자식, 그리고 동생들을 두고 홀연히 객지로 떠난 후 두 동생에게 보낸 한두 번의 문안 편지 외에는 가족들에게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던 아들이 온 나라 온 세계를 놀라게 하는 대 거사를 행하고 이국에서 적의 감옥에 갇혀 생활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어머니 조마리아는 아들이 이제는 나 개인의 아들이 아님을 마음 깊이 새기고 천주에게 아들을 부탁하는 기도를 하여야 했다. 조마리아는 어머니로서 아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의 그 떳떳한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마리아는 아들을 격려하고 위무하기 위하여 정근·공근 두 아들을 여순형무소로 면회차 보냈다.

 

두 동생이 면회하러 왔다는 말을 전해들은 안중근은 아주 평범한 언사로 “졔가, 나를 보랴 하면, 뵈이기는, 하려니와, 나는 결코 보고 싶지 아니하다.”고 말하였는데 이 언어들 속에는 자신이 사적인 정으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결심을 보인 것이다.

 

3년만의 3형제의 만남이 이같이 적의 형무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사의 정으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조마리아는 두 아들을 보내면서 형의 마음을 아프게 또는 흔들리게 하는 그러한 눈물은 보이지 말라고 일러 일러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동생은 형을 보자마자 감정이 복받쳐 실성곡읍失聲哭泣을 했다. 당시 이 광경을 취재하던 『대한매일신보』 기자는 안중근 간장으로도 심사를 억제치 못하여 표연히 상기되며 조금 있다가 억지로 3인이 정온靜穩한 상태를 회복하고 막내 동생이 먼저 어머니가 보낸 십자가를 받들어 형의 머리 위에 놓고 어머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 너는 금후에 신묘하게 형에 나아가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 네가 형을 받을 때에는 신부세례받은 외국선교사가 너를 위하여 원로遠路에 발섭跋涉하여 너의 대신으로 참회를 받들 터이니 너는 그 때 신부의 수하에서 교식에 의하여 종용히 거하여라.

 

어머니의 전언을 다 들은 안중근은 “맹세코 교식에 의하여 신도의 자격과 신자臣子의 도리에 추태를 보이지 않고 최후를 이룰 터이니 나의 모주母主는 안심하소서” 라고 답사를 하였다. 안중근은 사적인 정의로 대의를 그르쳐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늘 행동하였다.

 

이등을 처단하는 거의를 행하기 전 동지 정대호鄭大鎬 등이 안중근에게 처자를 불러들여 살림을 꾸리도록 권유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더니 정대호가 자기 가족을 데리러 본국으로 들어간다고 하자 그 편에 자기의 처자식을 하얼빈으로 동행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정대호와 안중근의 처자식이 하얼빈에 도착하기 직전에 거사를 단행하여 처자와는 상면도 하지 못한 채 여순으로 연행되어갔다.

 

검찰관 구연효웅은 하얼빈에 남아 취조를 계속했다. 하얼빈 총영사관에 안중근 부인이 참고인으로 불려와서 안중근과의 관계를 확인하려는 구연효웅의 심문을 받았다. 그 부인은 동요의 기색이 조금도 없이 남편은 이미 3년 전에 배앓이로 사망했다면서 끝까지 관계를 부인하였다. 그 뒤 부인 김아려는 러시아와 청나라 국경의 수분하綏芬河로 피신하였다. 그러므로 두 동생은 형수 모자를 모셔올 것인가의 의견을 물었다. 안중근은 냉연한 태도로 “구구區區한 처자는 너희들이 편리한대로 처리하라”고 답했을 뿐이다. 안중근은 결코 가족에 연연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대한의 영웅이었다. 다만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만강소회滿腔所懷를 한번 자세히 말하려면 본국 변호사가 필요하며, 신부님의 성사도 필요하다고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생들과의 면회 3일 뒤, 8차 심문이 있었는데 이제까지 안중근에게 친절하였던 구연효웅 검찰관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해 있었다. 9차22일 10차23일 심문에서 구연효웅 검찰관은 안중근에게 “가족을 비탄에 빠뜨리고 나라에 손실을 끼친 것은 죄악이라 생각지 않는가”라고 질문을 했다. 일제측은 안중근 자신이 잘못 생각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으니 용서해달라는 말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이었다. 안중근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에서 이등박문의 살해를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다. 개인의 범죄가 아니다.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결행한 것이므로 포로로 취급해야 한다. 살인죄 피고인으로 취조 받는 것은 실로 유감이다. 이토오를 죽인 것은 인도에 어긋남이 아니다. 이토오 때문에 죽은 수만명을 대신해서 이토오 한사람이 죽은 것이다.

 

1910년 1월 26일 11차의 마지막 심문을 받는 사이 정근·공근 형제는 안중근의 정의로운 뜻을 제대로 변호할 변호사를 구하고자 여순에서 본국 변호사회에 한국인 변호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안중근은 친형이온 바 1차 면회를 위하여 이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일전 영일 변호사들에게 위탁한 일도 있으나 가형이 말하기를 만강소회를 한번 상술하자면 본국 변호사가 없음이 유감이라 하였습니다. 법원으로부터 과다한 변호사의 허가 여부를 방금 협의 중인데 2주내에 결정이 있을 것입니다. 겸하여 공판 기한이 아직 멀었으니 변호사를 수의隨意 청구하여 청빙 여부를 무른 후에 전보로 청함이 가하다고 법원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금일 이 사건에 대하여 누구를 물론하고 간여하기 불긍함은 생 등도 아지 모하는 바 아니오나 가형의 청구를 인하여 우와 같은 법원의 명의가 있었고 또 귀회는 특히 변호를 목적함으로 인하여 혐의 입을 염려가 없을 듯 하옵기 감히 송구함을 무릅쓰고 상의하신 후 변호사의 선송選送 여부를 곧 회시하심을 앙고하옵니다 …

 

이 서한은 경시청에 압수되었다가 10여 일 후에야 변호사회에 당도하였다. 안중근의 의거사건에 대하여서는 철저한 감시와 사전 검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한에도 나타나듯이 안중근을 변호하다가 혹 혐의가 자신에게 떨어질까 두려워 변호를 자청하는 자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조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의 ‘만강소회滿腔所懷’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변호사 교섭을 위해 직접 평양으로가 변호사로서 명성과 애국심이 강한 안병찬을 만나 안중근의 변호를 부탁하였다. 당시 조마리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일제는 순사와 헌병을 파송하여 조마리아를 조사·힐문하였다. 그때 조마리아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 흐르듯 응대하였다.

 

중근이 금번 행한 바는 그 유래한 바가 오래 된다. 노일전쟁 이후로 밤이면 밤마다 낮이면 낮마다 언언사사言言事事가 단지 위국헌신적 사상에 있고 평일 거가시居家時에도 매사를 정당주의만 용用하고 조금도 사정私情을 용치 아니하므로 집안이 항상 숙연하였고 연전 국채보상금 모집시에도 그 처와 젊은 제수의 시집올 때의 패물 등을 모두 출연케 하고 말하기를 ‘나라가 이미 수망垂亡이라. 하물何物을 가석可惜이리오’ 함에 제수들도 모두 흔쾌히 즐거워하며 따라 그 뜻을 조금도 어기지 못하였다.

 

조마리아가 아들의 위국헌신적인 삶의 역사를 조금도 틀림이 없이 물 흐르듯 설명하자 순사·헌병들도 서로 바라보며 감탄하여 “안중근의 행사는 우리들이 이미 대경大驚을 흘吃한 바어니와 그 모씨의 위인도 한국에 드물게 있는 인물이라.”고 감탄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의 위국헌신적 정신과 태도는 바로 어머니 조마리아에게서 받아 배운 것이었다. 그의 손녀 안미생安美生은 안중근의 끓어오르는 애국심과 놀라운 희생정신은 할머니로부터 받은 것이라면서, “우리 할머니가 조마리아신데 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평을 듣던 분으로서 그 사상이 퍽 훌륭하셨답니다. 그 교육의 영향이 크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한 바가 있듯이 어머니의 크고 큰 모성 지도력이 안중근을 있게 한 것이다. 조마리아는 아들이 집안을 돌보지 않고 객지에서 나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오히려 격려하였고 이를 떳떳이 여겼던 것이다.

 

일제는 배일 민심이 고양되는 것을 염려하여 안중근의 재판을 가능한 축소하고 속결하려는 계략을 세웠다. 1910년 2월 1일 정오에 안병찬과 그의 사무원 그리고 안중근의 두 동생이 구연효웅 검찰관과 전옥 통역 입회 아래 안중근을 면회하였다. 그 자리에서 검찰관이 안병찬에게 “법원에서 외국변호사는 허가하지 않기로 했으며 일본 관선변호사만 쓸 수 있다”고 통고를 하였다. 참으로 예상외의 일로 일제의 계략이 얼마나 악의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이에 안병찬은 안중근에게 “모자가 현세에서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정리에 있어 마땅히 어떠하겠소.어머니 부탁으로 온 내가 변호하기 위해 지난 달 17일에 여순에 내도했소.” 라면서 탄식 반 위로 반의 말을 하였다. 안중근은 “나의 만강소회를 누가 설명하겠습니까. 실로 유감입니다. 생명을 구하자는 본의는 아닙니다.” 라고 답하고 동생들에게 “너희들은 모주母主를 잘 봉양하라”는 당부를 하고는 오후 3시에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다.

 

이날 안중근과 그외 3인의 기소장을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보내는 등 공판 준비를 서둘렀다. 제1차 공판이 동 지방법원에서 면회 1주일만인 2월 7일에 행하여지고, 동 8일·9일·10일에 2차·3차·4차 공판이 진행되었고 12일의 5회 공판에서 결심結審을 하고 14일 6회 공판에서 “안중근 사형,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 각각 징역 1년 6개월의 언도”를 내렸다.

 

재판관은 이 판결에 불복하면 5일 이내에 상고하라고 했다. 안중근은 사형 선고를 받고도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평상시의 마음가짐 그대로였다. 다만 “아직도 나의 의견을 진술하려면 공소치 아니하고는 할 수 없겠는가.”라고 말하였는데 아직도 피력할 소회所懷가 많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의 너무도 태연함에 대하여 당시 『조일朝日신문』명치 43.2.16은 안중근이 이미 사형을 각오한 모양이라고 했다. 안중근은 마침내 공소권을 포기하고 집필하던 자서전을 끝맺고는 『동양평화론』 집필이 끝날 때까지 사형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안중근이 여순형무소에 수감되고 사형당하기까지 5개월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일본헌병 지바도시치<천엽십칠 (千葉十七)> 간수은 안중근이 공소를 포기한 것은 그것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소권 포기의 진짜 이유에는 어머니 때문이라고 다음의 조마리아의 말을 전하였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은 즉 죽는 것이 영광이다.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 말할 수 있으리 …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지바도시치 간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고 무언가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이때부터 천엽은 안중근에게 평생 사죄하면서 살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천엽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술회했다.

 

어머니로서 자식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깨끗한 죽음을 요구한다는 것은 안중근의 이토 살해가 의거였고 역시 늙은 어머니에게도 참지 못할 공분公憤이었을 것이다. 유감이긴 하지만 그것은 또 이토로 대표되는 일본정치에 대하여 전체 한국인의 심중에서 우러나는 절규로 보아도 될 것이다.

지바도시치 간수는 안중근 어머니의 바르고도 강력한 모성지도력에 감탄하고 그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이다. 딸을 데리고 평양성당에서 연일 기도 생활을 하던 조마리아가 아들의 사형선고 판결 소식을 마침내 듣게 되었다. 조마리아는 노매절규怒罵絶叫하였다.

 

이등伊藤이는 다수 한인을 살殺하였거늘 안중근이가 이등 1인을 살한 것이 무슨 죄요. 일본재판소가 각국인 변호사를 불납不納한 것은 무지가 극함이다.

 

조마리아의 이 절규는 아들 안중근의 ‘만강소회’를 너무도 간결하게 잘 표현한 것이다. 이제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하는 것 뿐이다. 조마리아는 안중근 17세에 영세를 준 빌렘홍석구 신부에게 이 생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부탁하였다. 당시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 행위이므로 교리에 위배된 짓을 한 것이라면서 용납하려 하지 않고, 빌렘 신부의 여순행을 비판하고 말렸다. 빌렘 신부는 주교의 명을 거스르고 독단으로 여순으로 가서 안중근의 영세영락을 위한 고해성사와 미사성사 대례를 주재하였다.

 

조마리아는 형장에서 아들이 정결하고 품위 있게 수형되기를 원하여 하얀 명주로 사형당할 때 입을 옷을 손수 만들어 보냈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모친이 만들어 보낸 하얀 명주옷을 입고 몇 분간의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오전 10시 4분경 사형이 집행되어 15분경 절명하였다. 만고에 빛나는 대한의 영웅 안중근은 어머니 조마리아의 따뜻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온몸을 감싸고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

 

◯ 2008년 정부는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마리아 여사의 공훈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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