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규-개인전]

choyeung 2010. 11. 22. 22:03

일요일 전시 3일째에 국내에서 거의 모르는 분이 없는 부산의 자비사 박삼중 스님(70세)이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두터운 회색 승복차림으로 염주를 드신채 혼자 찾아오셨다.

 

약 40여분 동안 좋은 말씀을 해 주셨고 이번 독립운동가 42명의 특별전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무척 좋은 일을 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당신도 안중근의사의 서예작품을 모아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주관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작품제작과 전시의 어려운 점을 여러가지 물으셨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대한독립전> 전시의 안중근의사 초상화 앞에서, 자비사 박삼중 주지스님

 

아래와 같은 사항은 이미 언론에 잘 보도되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보니 인생의 가장 가치있는 일을 가장 많이 하시는 분이라고 느끼게 된다.

 

삼중스님은 현재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한국에 돌아오도록 수년전부터 민간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특히 22년전인 1988년 일본의 대림사를 우연히 방문하여보니 안중근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안의사의 글씨를 비석에 새겨둔 것을 보고 놀랐고, 

 

알고보니 당시 여순감옥의 일본인 헌병으로 간수를 한 적이 있는 당시 27살의 젊은 <찌바도오시찌>가 세운 대림사라는 절에서 그후 후손들과 유대를 다지면서 안의사의 유언인 유해를 고국에 모시는데  여러가지 소수문을 하고 있었다. 일본 간수는 안의사의 사상과 태도에 감찬하여 당시 목숨을 걸고 안의사에게 종이와 봇과 먹을 제공하여 글씨를 쓰도록 한 장본이었다.  

 

삼중 스님은 일본의 여러곳을 자주 왕래하면서 특히 귀중한 안중근의 친필(敬天)을 거액을 주고 구입하여 입본으로부터 회수한 적이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한장뿐인  희귀한 그림엽서 즉 안중근의사가 체포되어 찍은 당시 잠간 통용되었던 사진엽서를 구하여 국내에 사본을 널리 전파하였고 중국의 뤼순감옥에도 수차 방문하면서 중국쪽의 유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박삼중스님의 초상화 Oil on canvas, 20호F, 2011년

 

 

    박삼중(朴三中·70·자비사 주지)스님과 안중근의사 -언론보도 일부

 

 

 

안중근의사 유해 고국에 모셔야일선 각급 부대에 무궁화 그림 등을 기증하며 애국심 고취를 위해 순회 강연을 해 온 박삼중(朴三中·70·자비사 주지)스님이 광복절을 맞아 국방일보를 방문,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1879~1910)의사의 참군인정신을 장병들에게 전했다. 전국 교도소 재소자 교화후원회와 한·일불교복지협회 회장이기도 한 삼중 스님이 광복절을 나흘 앞둔 지난 11일 본지와의 인터뷰를 자청한 것은 안의사의 숭고한 뜻을 우리 장병들과 국민들이 잊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 때문.“안의사가 사형장에 가기 전 유언이 광복된 조국 땅에 시신을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로부터 광복된 지 올해로 58년이 됐지만 우리는 아직도 안의사의 유해를 고국 땅에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20세 때 불가에 입문, 이후 수십 년간 교도소 등지를 돌며 교화활동을 해 온 삼중 스님이 안의사를 재발견하게 된 것은 15년 전인 1988년. 우연히 교화사업을 위해 일본 미야기(宮城)현의 대림사(大林寺)에 들른 삼중 스님은 그곳에서 안의사의 마지막 친필 휘호로 알려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의 ‘爲國獻身 軍人本分’이 음각된 대형 추모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조국 광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안의사의 친필 추모비를 일본 한복판에서, 그것도 일본인에 의해 수십 년간 추모되고 있었지만 정작 우리 후손들은 안의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삼중 스님은 개인적으로 안의사 추모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사형장이었던 중국의 뤼순(旅順) 감옥을 다섯 차례나 갔다오는 등 다양한 고증작업을 벌이면서 안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많은 사람에게 설파해왔다. “오늘날 한·일 양국이 외형적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내면에는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는 현실에서 일제에 항거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의사와 악명 높은 총독부 헌병이었지만 국가의 적인 안의사를 흠모했던 일본 간수와의 관계는 광복 58주년을 맞은 오늘날에도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습니다.”군인으로서 본분에 맞게 최선을 다할 때 개인과 사회, 나아가 국가와 세계의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광복절에 삼중 스님이 우리 장병들에게 전하는 간곡한 메시지였다.

박삼중 스님, "독립된 조국에 安의사 유해 안장해야죠"

"안 의사님의 숭고한 뜻을 잊지 말고 후손 대대로 전해야 합니다."

40여년 간 사형수 교화에 힘써 '사형수들의 대부'로 불리는 박삼중(69·부산 자비사 주지) 스님은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전도사다.

 

이달 20일 국립대구박물관 해솔관에서 스님은 '순국 100년 안중근 국채보상운동, 동양평화로 피어나다' 특별전 프로그램인 '동양평화학교'의 강사로 나서 '안중근의 생사관(生死觀)-안심입명(安心立命), 안중근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주제로 2시간여 동안 이야기를 풀었다.

 

스님이 안 의사와 인연을 맺은 지 20여년. 일본 센다이에서 열린 불교대회에 참석했다가 인근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절을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사찰에 안 의사의 영정이 모셔진 것을 보고 물어보니 뤼순 감옥 시절 안 의사의 담당 간수였던 헌병 지바 도시치씨 가족이 안 의사를 추모하고 있음을 알게됐다. 지바 도시치와 안 의사는 간수와 죄수 사이였지만 사형을 언도받고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안 의사의 모습에 존경심을 갖게 됐고 그 가족은 안 의사의 넋을 꾸준히 기려왔다.

 

스님은 "도시치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죽을 때까지 20여년 간 매일 향을 사르며 안 의사의 넋을 기렸고 이후엔 부인이 또 20여년 간 참배했고 그 뒤로 양녀(養女)가 그 뜻을 잇고 있다"며 "일본인도 안 의사를 모시는데 정작 우리에게서는 안 의사를 추모하는 열기를 느끼기 쉽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스님이 뤼순 감옥 자리를 찾은 것도 예닐곱 차례. 그곳에서 안 의사를 위한 추모제를 올리기도 했다.

 

스님은 안 의사의 생사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유묵으로 '天堂之福 永遠之樂(천당지복 영원지락·천당에서의 복이 영원한 즐거움이다)'을 꼽았다. 지상에서의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니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님은 "안 의사는 최선을 다해 뜻한 바를 이뤘고 동양평화를 주창한 사상가이자 독실한 천주교도답게 현세의 삶에 집착하지 않고 떳떳하게 생을 마감하셨다"며 "종교를 초월해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될 말씀"이라고 강조했다.

 

일흔 고개를 앞둔 스님은 몸이 예전처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의지만은 꼿꼿했다. 안 의사의 몸은 사라지고 없지만 혼과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데 국민들이 그 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바치겠다고 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안장하고 일본에 있는 '독립(獨立)'이란 유묵도 다시 찾아와야죠. 그 때까지는 저도 눈을 감을 수 없어요."

 

박삼중 큰스님 모시고 초빙강연 가져

 

 

♧ '爲國獻身軍人本分' 정신 강조

 

◇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의 의미만 알고 있어도 안중근 의사의 조국을 향한 애국정신은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학교는 5월 23일 오전 학교 강당 충성관에서 사관생도 및 학교 간부 등 1200여명을 대상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송환 운동 전개와 재소자 교화사업으로 잘 알려진 부산 자비사 박삼중(朴三中, 75세) 큰스님을 초청해 초빙강연을 가졌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인 '위국헌신군인본분'을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박스님은 장차 국토 안위를 책임질 생도들에게 "안중근 의사처럼 비록 육신은 죽었으되 정신만은 민족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군인, 조국이 누란지위에 닥쳐 내 생명을 필요로 할 때 내 한목숨 기꺼이 조국에 바치는 장교, 군인다운 군인, 참 군인이 되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또 이 날 "생도들에게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냈던 편지 그리고 어머니의 답장, 안중근 의사를 존경했던 간수장의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어 참 행복했다"고 말했다.

 

한편 생도들은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초월한 애국정신을 본받고 군인으로서의 사생관과 앞으로 생도생활을 하는데 있어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등 호국정신 함양을 위한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Korea Army Academy at Yeongcheon

안 의사 유해 기필코 찾아야

” [뉴스포스트]

박삼중 스님 ‘안중근 의거 1백주년’ 강연

 

27세 日헌병, 안 의사와 감동 사연 소개

안중근 母 “대한의 아들로 가라” 당부해

 

예술의전당에서는 안중근 의거·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안중근, 독립을 넘어 평화로>라는 주제로 전시가 진행중이다. 그 일환으로 안 의사의 의거 배경부터 인간적 면모와 ‘동양평화론’ 등을 주제로 한 강연이 열리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달 26일 40여년 간 사형수 교화에 힘써온 부산 자비사 주지 박삼중 스님의 강연이 있었다. 투철한 군인이었고 위대한 사상가였던 안중근 의사. 시와 서도를 잘하는 예술가이기도 했으며 준수한 외모와 논리 정연한 언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단지한 손, 적마저도 존경심을 자아내게 했던 인품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의 강연 주제는 ‘안심입명(安心立命), 안중근의 삶과 죽음의 경계’. 핵심은 ‘안 의사는 삶과 중음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주창한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중스님은 안 의사를 이야기할 때 동양평화 이론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 의사가 사형수의 신분으로 교도소에 있으면서 벼루와 먹을 이용해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 27살의 젊은 헌병 찌바도오시찌가 그를 존경한 이유와 관련이 있다는 것. 즉 삶이 죽음이고 죽임이 삶이라는 사생관이 바로 그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생명을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데, 안 의사가 죽음 없는 삶을 보여줬습니다. 육신은 사라지지만 마음과 혼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집이 불에 타면 뛰어나오는 것과 같은데, 안 의사는 ‘천당 가는 게 영원한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을 전쟁으로 몰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는 것이 수백 수천 명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믿었고, 천주님께 간다는 건 신앙인으로서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40여년 간 사형수 교화에 힘써온 삼중스님은 그러면서 찌바도오시찌가 안 의사를 보며 느꼈던 감정을, 자신이 존경하는 사형수를 소개하며 말했다. 그 사형수가 ‘살인마’이고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스님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 그것은 바로 형 집행을 의연하게 기다리는 모습 때문이라고. 사형이 확정된 후 교도소에서 집행시간을 대기하며 사는 모습과 참회하는 모습,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에 감동했다는 것이다.

 

“젊은 사형수가 여자 형무소에 우유 값과 기저귀 값을 넣어주는 모습을 봤습니다. 감옥에서 해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에는 돈이 없어서 쩔쩔매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사형수가 자신의 영치금을 산모에게 준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지만요.”

 

찌바도오시찌는 뤼순 형무소와 여순감옥 간수로 있으면서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 의사를 감시했던 일본의 헌병이다. 그렇지만 처음 안 의사에게 총을 겨누던 그가 미동 없이 “쏘고 싶다면 쏴라.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안 의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후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안 의사를 지켜본 그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됐다. 형무소에서 안 의사가 붓글씨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집행장으로 안 의사를 데리고 가면서 돌벽에 머리를 찧고 통곡한 사람, 그 모습을 본 안 의사가 자신의 소매로 피를 닦아주며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마지막 붓글씨를 선물한 사람이 바로 찌바도오시찌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확정됐는데, 사실상 사형이 확정되면 그 순간부터 사형수로 취급된다. 오늘날까지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사형수에게 그런 특권을 준 사례는 없다고 말한 삼중스님은, 그 특권은 분명 누가 도와줘야 허락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주인공 이 찌바도오시찌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안 의사는 감옥에서 여러 편의 편지를 어머니께 쓸 수 있었다. 편지에서는 ‘이 불효막심한 아들을 용서하십시오. 어머님 앞서가는 저의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여러 차례 썼는데, 이에 대한 어머니의 답장을 본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당시 안중근 의사 모자를 두고 ‘시모시자(是母是子)’ 즉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 표현 했다고 한다.

 

내용인 즉 ‘그래. 부모보다 앞서가는 너는 참 불효막심하다. 하지만 네가 무엇 때문에 앞서가는 것이냐? 왜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너를 지켜보면서 너는 내 개인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너무 그릇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젠가 네가 역사에 한 몫을 할 줄 알았다. 그러니 너는 내 아들이 아니라 대한의 아들인 것이다. 나는 그런 아들을 두었다는 걸 기쁘게 생각한다. 웃으면서 가라. 그러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하며 왜놈에게 생명을 구걸하는 치사한 짓은 하지 마라. 이토 히로부미를 쏠 때의 마음으로 천주님께 가라.’는 내용이었다.

 

집행장으로 가는 도중 붓글씨를 선물 받은 그는 또한 그 붓글씨를 가지고 전역했다고 한다. ‘위국헌신 군인본문’이라는 글을 선물한 이유에 대해 삼중스님은 ‘나는 대한 제국의 참모중장이다. 나는 군인으로서 만주 땅에 뤼순감옥의 간수로서 너의 사명인 조국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각자 군인 신분으로 최선을 다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불교신자였던 그는 이후 자신의 고향 센다이에 돌아가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불단에 모시고, 붓글씨도 함께 모신 후 매일 향을 피우며 기도를 했다. 2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던 찌바도오시찌. 아직도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영정 앞에서 매일 추모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삼중스님은 한국사람인 게 너무 부끄러웠다고.

 

“통곡하는 찌바도오시찌에게 오히려 ‘나는 죽음의 준비가 다 끝났다. 내 얼굴을 봐라. 웃고 있지 않느냐? 네가 왜 통곡을 하느냐’는 말로 위로하며 ‘너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징표로 글을 써주고 싶다’고 명필을 선물했습니다. 우리는 기분 나쁜 전화를 받아도 손이 떨려 글씨 쓰기 힘든데, 집행장으로 가는 길에 쓰신 글에 힘이 철철 넘칩니다.”

 

 

한편, 삼중스님은 “안 의사 문제 중 우리가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며 안 의사의 유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널리 알려진 유언은 ‘조국광복을 빨리 당겨라. 천국에서 조국 광복 소식을 들으면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겠다’는 것이지만, 자기 시신에 대한 유언도 남겼다는 것. ‘사형집행 후 유해를 조국인 한국 땅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것인데 이유는 ‘한국은 왜놈이 지배하고 있다. 나는 죽어서도 왜놈 땅에 묻히고 싶지 않다. 광복된 후에 조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한 데 대해 “찾으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질책했다. 스님은 유해를 찾으려고 여순감옥에 간 적도 있고, 유해를 찾았다는 중국인 말에 속아 중국까지 갔다가 죽을뻔한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유언을 풀어주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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