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규-eBook]

choyeung 2013. 8. 3. 21:05

 

056. 가이 올랜드 로즈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 제2권, 34쪽~45쪽

지베르니~1891,1894,1899,1904~12, 13년간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 제2권 -056. 가이 올랜드 로즈 -조영규 지음,교보문고 2013.9.10 신간발간.pdf

 

 

 

그림 34

가이 로즈 『 온화한 오후 』 1910, 캔버스에 유채, 73.66x60.96cm

이 작품을 제작할 기간은 그가 지베르니에 있을 때였다. 줄기가 굵은 오래된 수양버들이 늘어선 개울가에서 모자를 지니고 산책하던 여인이 꺾어진 나무줄기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나뭇잎에 내려쪼이는 햇빛은 여인의 머리 위에 현란하게 부서진다. 능숙한 인상주의 스타일의 전형적인 붓터치로 탄복할 만큼 훌륭한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림 31

가이 로즈의 야외 스케치하는 사진

가이 올랜드 로즈 Guy Orland Rose (1867~1925)는 로스앤젤스의 교외에 위치한 산 가브리엘에서 대지주(大地主)의 아들로 태어나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이름난 인상주의 화가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는 부친은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으로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부모는 당시 한창 성장하는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의 목장과 포도밭을 하면서 대가족을 이루었다. 1876년 어린 로즈는 우연히 그의 형제와 사냥여행을 떠나 얼굴에 총상을 입었다. 그의 건강이 회복되자 스케치를 시작하면서 수채화와 유화물감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림을 그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풍경 및 정물 화가였던 에밀 칼센 (1853~1932)과 버질 윌리암즈로 부터 그림 지도를 받았으며 샌프란시스코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 38

가이 로즈 『 지베르니 엡트 강』 1910, 캔버스에 유채,

그가 지베르니의 휘어진 엡트 강 가에서 햇빛이 비치는 버드나무와 잔잔히 흐르는 물을 인상적으로 그렸다. 화면전체와 나무에 비치는 연한 핑크 색조는 오후의 늦은 시간을 말해 준다. 활기찬 붓터치로 여러 방향으로 나누어 칠했다. 원근(遠近)을 나타내기 위해 강위로 보이는 버드나무의 반사는 희미하게 그려 놓았으며 시선을 그쪽으로 모으게 한다. 나무잎의 줄기에 비치는 빛의 반사와 왼쪽 강물의 반사를 단 한번의 붓자국으로 표현했다.

 

■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모든 미술상을 휩쓸다

 

19세가 되던 1888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건너가서 당시 다른 미국 화가들의 포부처럼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3년간 미술공부를 했다. 그는 그 곳에서 수여한 모든 미술상(美術賞)을 받았던 특출하게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이곳에서는 뱅자맹 콩스탕과 쥘 르페브르 밑에서 공부했다. 1888년부터 1889년까지 그는 들라클루스 아카데미the Academie Delacluse에서 우수학생으로 장학금(獎學金)을 받았다. 그 학교에서는 작가이며 배우인 프랭크 빈센트와 친하게 되고 평생 친구가 되었다. 다음 해부터 파리의 정기적 미술전시회인 살롱(Le Salon)에 출품하여 영예로운 찬사(讚辭)를 받았다. 프랑스 내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은 것은 당시 미국 출신의 캘리포니아 화가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지베르니에서 13년간 인연

 

그림 39

가이 로즈 『 화로 옆에서 』 1910, 캔버스에 유채, 60.96x50.8cm

 

그는 모네가 노르망디의 지베르니 시골마을에 정착한지 7년 후인 1890년부터 1891년까지 그곳에서 그림 작업을 했다. 당시는 대부분이 미국 화가들이 이주하여 사는 화가마을로서 인상파의 거장 모네의 그늘에서 영향을 받는 곳이다. 당시 화가들은 화실보다 야외(野外)에서 시골 풍경을 그리는 풍조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는 수년 후에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와 번득이는 빛의 효과 및 자유스러운 붓질에 있어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890년 한때는 로즈는 뉴욕으로 귀국하여 살면서 하퍼 지와 스크리버너즈 지 및 센튜리 지의 삽화가로 일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시어도어 로빈슨은 로즈에게 파리와 지베르니로 돌아가도록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결정적으로 지베르니에 다시 돌아가게 되었고 지베르니 화가마을의 멤버가 되었다.

 

■ 모네와 생활하면서 친구와 조언자

 

그림 41

가이 로즈 『 카멜 소나무 』1918, 캔버스에 유채, 53.34x60.96cm

1899년에 그는 삽화가이며 여류화가인 부인 에델 보드멘 로즈 Ethel Boardman Rose (1871~1946)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다시 돌아가서도 하퍼 지와 다른 미국잡지의 삽화가로 계속 생활했다. 로즈의 가족은 모네와 이웃한 곳에 석조주택(石造住宅)을 사서 모네와 더불어 오래토록 인근에서 생활했다. 1900년 겨울에는 파리에서 거주하면서 생활했고 또한 알제리아로 여행하면서 작품을 그렸다. 부부는 다시 1904년부터 1912년까지 9년간을 함께 지베르니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은 친구이자 멘토가 된 거장 모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두 화가의 친밀함은 서로의 그림을 대비할 때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스타일의 유사성(類似性)이 익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림 42

가이 로즈 『 7월의 오후 』 1897, 캔버스에 유채, 40.01x75.57cm

 

로즈와 모네 두 사람은 나중까지 서로 친구이면서 조언자(助言者)가 되었다. 로즈도 대상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다르게 그리는 연작(連作)의 기법을 배웠다. 모네의 『 건초더미 』나 『 루앙성당 』 및 『 수련 』처럼 한 가지 주제를 두고 시간적으로 빛의 변화가 약간씩 달라지는 이러한 기법이 그의 그림에도 잘 나타났다. 그는 당시 납 중독(中毒)으로 인하여 한동안 지베르니에서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가 점차 회복되자 풍경화와 인물화 페인팅 작업에 진동(振動)하는 색채(色彩)와 강력한 붓질로서 다시 시작했다. 1913년 여름에 그리스로 여행하다가 치명적인 병에 들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밝혀졌지만 납중독이었다. 당시 흰색 안료는 레드 화이트(Lead White)로서 납 성분을 섞었기 때문이었다. 근래에는 납을 섞지 않은 티타늄 화이트나 징크 화이트가 개발되어 독성을 없애고 개선되었다. 그는 수년간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삽화로 돌아섰다.

 

■ 지베르니 그룹(Giverny Group)의 뉴욕전시

 

그림 43

가이 로즈 『 마거리트 데이지 』 1918, 캔버스에 유채, 45.72x38.1cm

모네와 같이 생활하기 이전에 로즈는 1890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을 프랑스 파리와 지베르니에서 장식적 인상파 화가들인 프레드릭 프리세크, 리처드 밀러, 그리고 에드먼드 그리슨과 함께 작품 활동을 했다. 이들은 그 이후 지베르니에서도 같이 생활했다. 특히 프랑스 내에서 이러한 미국 화가들은 스스로 ‘지베르니 그룹(Giverny Group)’이라 칭했다.

 

그는 이태리와 알제리아를 여행하고 지베르니는 매년 수개월을 보내면서 생활했다. 당시 로즈뿐 아니라 다른 미국 화가들도 지베르니라는 마을에 합류하여 모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들은 리처드 밀러, 로턴 파커, 알슨 클라크 및 프레드릭 프리세크로서 서로 친구가 되었다.

 

그림 44

가이 로즈 『 양귀비 꽃밭 』1910, 캔버스에 유채, 60.01x73.03cm

 

1910년에 프리세크, 밀러, 파커, 클라크, 리트먼, 로즈는 [지베르니 그룹]이라는 명칭으로 뉴욕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1911년에 미국의 미술 작가(作家)인 크리스쳔 브린턴 Christian Brinton은 이들을 ‘장식적 인상주의(Decorative Impressionism)’ 화가들로 명명(命名)했다.

1912년 로즈는 미국에 귀국하여 뉴욕에 정착하고 1914년 말에는 패서디나로 가서 지방에서 미술서클 활동을 시작했다. 1913~14년 동안 로즈부부는 미국 뉴잉글랜드의 로데 아일랜드에서 야외 스케칭 학교를 열었다. 그는 다시 납중독의 영향을 받다가 1914년 부부는 로스앤젤스로 영구히 이주했다.

 

그는 패서디나의 스틱니 기념관의 미술학교 이사로 봉사했다. 2년 후 부부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뉴욕의 중요한 맥베스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으로 성공적인 전시를 했다. 그는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파나마 태평양 만국박람회에서 『 고향의 풍경 』 으로 금상을 받는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 인상주의 미술의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캘리포니아에 화가마을을 조성하는 화가가 되었다. 즉 그는 캘리포니아 최고의 인상파 화가중의 한사람이었다.

 

■ 납에 민감한 체질로 인해 일생동안 고통을 받아 작품이 희소(稀少)

 

19세기 말에는 유화의 흰색물감인 레드 화이트에는 주로 납을 섞어 제작하였기 때문에 특히 그는 납에 민감한 체질로 인하여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다. 때문에 화가의 일생에 가장 중요하고도 화려한 경력의 시기에 그는 안타깝게도 그림활동을 잘 할 수가 없었다. 수년간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삽화로 돌아섰다. 그가 캘리포니아에 대중적인 간행물에 삽화를 그리면서 뉴욕에서 다시 일하기 전에 수개월간 삽화를 그렸다. 따라서 그는 당시 미국의 가장 훌륭한 인상주의 화가의 한사람으로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았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그가 제작한 그림 숫자는 적어서 작품은 희귀한 편이었다.

 

■ 1909년에 미국 인상주의의 『 캘리포니아 아트클럽 』 창시

 

그림 37

가이 로즈 『 녹색 파라솔 』 1909, 캔버스에 유채, 78.74x48.26cm

로즈가 1914년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영구 귀국하여 패서디나의 스틱니 미술학교의 이사로 재직할 때는 드로잉과 초상화 그림 및 미술사를 주로 가르치면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부터 6년 후 납중독이 심하여 마비증세로 고생을 했다.

그는 로스앤젤스 역사박물관에 평의원으로 수년간 봉사했다. 그리고 1916년에 밀러에게도 그가 이곳 미술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설득했다. 로즈는 카르멜과 몬트레이에서 여름을 보내며 1917년까지 그림작업을 이어 갔다. 그는 하루의 다른 시간에 같은 장면의 주제를 묘사하는 연작으로 모네와 같이 일련의 페인팅 스타일을 개발했다. 이를 두고 비평가들은 로즈는 미국 화가보다는 거의 프랑스 화가라고 표현했다. 로즈는 캘리포니아 미술클럽과 라구나 해안 미술협회의 회원이었다. 세 번의 개인전이 로스앤젤레스 미술관에서 1916년, 1918년, 1919년에 개최되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스텐달 갤러리와 뉴욕의 윌리엄 맥베스를 대표하는 화가였고 여러 곳에서 미술상을 받았다.

그는 진정으로 미국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1909년에 ‘캘리포니아 아트 클럽’의 창시자였다. 이 클럽은 1995년에야 비로소 해산될 때까지 86년의 긴 세월을 두고 이어져 왔다. 그 당시 멤버로는 유명한 프란츠 비솝, 에드가 페인, 엘머 워첼, 메이블 알바레즈, 모리스 브라운, 돈나 N. 슈스테, 그리고 핸슨 푸스프 등의 쟁쟁한 화가들이 있었다. 그가 부분적으로 마비가 올 때인 1921년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4년 후 1925년에 58세로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6년에는 스텐달 갤러리에서 그의 사후 회고전(回顧展)이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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