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야기)

choyeung 2008. 12. 21. 13:14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와 숨겨진 관능으로 가득 차 있다.

직업 :  서양화가
국적 :  미국

출생지 :  미국 위스콘신 주 선프레리 근처
활동년도 : 1887년 11월 15일 (미국) - 1986년 3월 6일

 

미국의 여류화가. 미국 현대 화단에서 최고의 모더니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이다. 그녀를 생존시에 벌써 고전적인 화가로 포드와 레이건 두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와 예술의 훈장을 받았고, 하버드 대학을 위시한 수많은 대학에서는 그녀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주었다. 그녀는 20세기 현대화에 미국적인 특색으로 유럽화단에 다리를 놓은 세계적인 화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한국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작품의 주제는 주로 두개골, 짐승의 뼈, 꽃, 식물의 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의 자연을 확대시킨 것이다. 윤곽선이 율동적이며 자연에 대한 탐미적 경향을 보인다. 선명한 색으로 그리되 엷은 톤의 물감으로 원근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대상에 강약을 부여했다. 그녀의 그림은 생물형태적 형상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여 신비스럽고 때로는 상징적이기도 하다.

 

오키프는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후기 작품은 주로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그렸고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대표작으로 《검은 붓꽃 Black Iris》(1926), 《암소의 두개골, 적, 백, 청 Cow's Skull, Red, White and Blue》(1931) 등이 있다. 자서전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가 1976년 발간되었다.


자연의 언어

예쁜 꽃을 보면 꺾어 오고, 마음에 드는 조개 껍질이나, 돌멩이, 나무 조각이 있으면 주어 온다. 만일 사막에서 아름다운 상아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 역시 집으로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드넓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얘기하기 위해 모든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세상의 광활함과 경이로움을 가장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 조지아 오키프 -

1887년
11월 15일 미국 위스콘신주 선프레리 (Sun Prairie) 근처의 한 농장에서 둘째로 태어났는데 여러 자매들을 제치고 혼자 독방을 차지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를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집은 꽤 부자였는데 아버지가 돈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가산을 탕진하여 예술가로서의 꿈을 키우는데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1904년(17세)
시카고와 뉴욕에서 미술학교를 다녔다.

1907년(20세)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으며 잠시 동안 상업미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2년(25세)
학교를 졸업한 후인 1912~1916년에 텍사스 등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어쩌면 이때까지 그녀의 인생은 미술을 공부한 대개의 평범한 여성들이 밟아가는 그런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1914년(27세)
뉴욕의 컬럼비아 사범대학에서 공부하던 오키프는 그녀의 운명을 바꾼 애니타 폴리처를 만났다. 대학에서 미술 강사로 생계를 잇던 그녀는 스티글리츠의 제안으로 그의 스튜디오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16년(29세)
친구였던 아니타 폴리처(Anita Pollitzer)가 그녀 몰래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을 스티글리츠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오키프의 작품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스티글리츠가 이름도 낯선 이 여인의 작품들을 '291화랑'의 가장 좋은 장소에 전시한 것은 어쩌면 모험이었지만 이 모험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진작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미국의 사진작가, 1864~1946)를 만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불과 30세 무렵이었고, 스티글리츠는 52세였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은 예술을 모방할게 아니라 당당히 예술을 파먹고 살아야한다' 며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graphy)와 사진분리파 운동을 주장하며 당대 사진계의 거장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사진 작가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소묘를 보고 작품성을 인정하여 화랑 <291>에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17년(30세)
기차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그녀는 이 곳의 풍경에 단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1946년(59세)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였던 스티글리츠가 사망하자 그녀는 뉴멕시코의 사막으로 떠나 산타페 애비퀴에 완전히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1970년(83세)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1973년(86세)
당시 28세이던 존 해밀턴이 우연하게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그에게 자기를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해밀턴은 근처에 집을 짓고, 눈이 멀고 잔소리가 많은 그녀를 그림자처럼 돌보았다.

1978년(91세)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전시회와 함께 퍄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찍은 <조지아 오키프>의 사진집은 조지아 오키프가 직접 고른 51장의 사진과 직접 쓴 아름다운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그녀의 나이 90세였다. 스티글리츠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후였다. 이 책은 사진 책 출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진집으로 꼽힐 정도로 인쇄와 내용문에서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86년(99세)
인생의 반세기를 보냈던 뉴멕시코의 한적한 마을인 산타페에서 3월 6일 9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98세로 이 세상을 떠났던 오키프틑 미국사회에서 또 한번 그녀에 관한 법정투쟁으로 신문-가십란을 가득채우는 화제의 인물이 된다. 오키프가 평생 그려 모았던 자신의 모든 작품들과 재산을 한 무명의 청년 해밀턴(Juan Hamilton)에게 유산으로 다 주고 갔기 때문이다.

 

산타페에서 숨질 때까지 '애비큐(Abiquiu)'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조지아 오키프는 이 곳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수집한 많은 물건들을 자기 작품에 즐겨 묘사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뉴 멕시코의 특이한 바위들과 햇빛에 말끔히 육탈(肉脫)된 동물의 뼈·해골·뿔 등은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애비큐와 고스트 랜치 목장의 저택을 이런 ‘예술품’들로 장식했고, 계속해서 이들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다.

 

이런 수집품들은 오키프의 정신세계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키프는 무엇이건 간에 버리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항상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었는데, 오키프는 이들은 각기 모양과 색깔 등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했다고 한다.

1997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소장하고 있던 30장의 사진이 부록에 추가되어 다시 발간되면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조지아 오키프 컬렉션의 전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오키프 미술관이 산타페에서 문을 열었고 신화가 되다시피 한 예술가를 잘 알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오키프의 사진화된 이미지는 인간의 형태(Human Form)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뚜렷이 구별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예술혼을 불태우는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고,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때때로 작품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가 특히, <꽃>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함, 예리함과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했다. 사진비평가 자네트 말콤은 오키프의 포트레이트 작품들에 대해서 '엄숙하고 섬뜩하며 수수께끼 같은, 젊지도 늙지도 않았지만 신비스러운 아름다움과 이상하고 음침하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미지'라고 말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예술가로서의 조지아 오키프와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예술성에 대해 때로는 남편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진작가로서 기록하였다.

 

 

스티글리츠 사후의 조지아 오키프와 뉴멕시코 사막

 

  두 사람의 관계는 마리아 칼라스와 메네기니 부부나,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부부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조지아 오키프의 관계는 화가로서의 명성과 존경,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의 상호존중과 사랑 속에서 서로 대등하게 지속되었다. 그런 두 사람의 단단한 결속을 잘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90세가 넘어선 조지아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포트레이트 작업들을 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프레드가 날 찍기 시작한 것은 내가 스물 세살 정도였을 때부터였다. 내 사진을 그의 사진전에 처음으로 전시한 것은 앤더슨 갤러리에서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전시된 사진들을  돌아보고 나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그가 날 찍은 것처럼 자신들의 아내나 여자 친구를 찍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하도 우스워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알프레드가 그들의 아내나 여자 친구들 사진을 날 찍듯이 찍으려면 얼마나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실들을 알았더라면 아무도 그에게 그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46년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였던 스티글리츠가 죽자 조지아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사막으로 떠나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은 그녀가 1917년 기차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그녀는 이 곳의 풍경에 단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후 1929년부터 여름을 뉴멕시코에서 나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하여 1986년 산타페에서 숨질 때까지 '애비큐(Abiquiu)'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조지아 오키프는 이 곳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수집한 많은 물건들을 자기 작품에 즐겨 묘사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뉴 멕시코의 특이한 바위들과 햇빛에 말끔히 육탈(肉脫)된 동물의 뼈·해골·뿔 등은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애비큐와 고스트 랜치 목장의 저택을 이런 ‘예술품’들로 장식했고, 계속해서 이들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다. 이런 수집품들은 오키프의 정신세계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키프는 무엇이건 간에 버리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항상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었는데, 오키프는 이들은 각기 모양과 색깔 등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했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꿈의 땅으로 상징되던 미국이란 신세계를 등지고, 사막과 하늘이 맞닿은 오지와 평원과 하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전화는 물론 전기와 수도 시설조차 없는 문명의 변경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조지아 오키프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몸짓이나 페미니즘적인 행동을 두드러지게 한 적은 없다. 또한 그녀에 대한 평가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스티글리츠와의 관계에 묻혀 뒷전이 되거나 그녀의 그림에 대한 성적인 선입견들로 인해 왜곡되곤 했다. 그런 이유로 조지아 오키프는 화가로서보다는 여성으로 더 많은 관심을 끌었고, 간혹 그녀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가십처럼 이야기되고는 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도 사인을 하느냐고 반문하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서도(1986년) 다시 한 번 세간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작업한 모든 작품들과 재산을 자신의 조수이자 친구였던 후앙 해밀턴(Juan Hamilton)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후일 해밀턴의 부인인 안나 마리는 그녀의 수집품과 책, 옷 등 유품을 박물관에 기증한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세계와 여성이 표현하는 여성성의 문제

 

  조지아 오키프는 살아 생전에 이미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화가로서 평가받았고, 포드와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유와 예술 훈장을 받았으며 수많은 명문 대학에서 그녀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남성이 말하는 모든 여성성에는 이미 성적인 편견이 녹아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혐의가 드리워진다.(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도 남성이므로 그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하면서) 자기를 표현하려는 여성이 입을 열어 자신의 삶과 경험을 말하는 것, 말 해버리는 것, 표현해버리는 것은 그러한 말하기에 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통념과 거부감과 부자연스러움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일이고, 일종의 반역에 비견되는 일이기조차 하다. 안니 르끌렉은 여성이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가지고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자기 고유의 말을 하려는 모든 여자는 우선 여성을 창조해야 하는 이 엄청난 긴급성을 피할 수 없다. 억압적이지 않은 말을 창조하는 것. 말을 끊이지 않고 말문을 트이게 하는 그런 말을 만들어 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여성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것은 성을 도덕적 판단의 영역으로 생각했던 전통에서나, 그 이후 과학의 대상으로 설정했던 경우에 공통적으로 여성에 대한 논의가 도덕적·윤리적 강령의 차원에 머물렀던 경우에 그 판단의 근거를 제시한 종교 지도자나 철학자들은 남성들이고, 이들은 철저히 남성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여성들을 객체화하고 이를 또한 ‘진리’의 이름으로 선포했고, 공정해야 할 과학도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종속된 존재로 표현하길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키프가 화가로서 입문하고 명성을 얻는 과정에서 291화랑의 작품들을 거두어 주길 바랬던 까닭은 어쩌면 이렇게 여성으로서 자기의 말을 갖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 이전의 많은 여성 화가들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던 점을 고려해볼 때 조지아 오키프가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에 대한 반항은 아니었을까? 오키프는 꽃을 즐겨 그렸는데 많은 비평가들이 이들 사이에서 여성과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찾으려고 했다. 오키프 자신은 그러한 연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강조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러면서 이 여성화가는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사람들은 왜 풍경화에서 사물들을 실제보다 작게 그리느냐고 묻지는 않으면서, 나에게는 꽃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가?

Were I to paint the same flower so small, no one would look at them... So I thought I'll make them big like the huge buildings going up. People will be startled; they'll have to look at them and they did." 사람들은 여성에 의해 표현되는 모든 사물에 의문을 품는지도 모른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도 모른다.

 

 

 

 

 

                                                                             The Lawrence Tree, 1929

 

 

                                                          Fragment of the Ranchos de Taos Church, 1929

 

 

                                                                  Bell/Cross, Ranchos Church, 1930

 

  

 그녀의 그림들은 주로 짐승의 두개골, 짐승의 뼈, 꽃, 식물의 기관, 조개 껍데기, 산 등의 자연을 그린 것과 도시에 거대하게 솟아오른 마천루 빌딩들을 그린 것들이 있다. 꽃과 식물의 기관, 산과 같이 자연을 묘사한 작품들은 율동적인 윤곽선과 탐미적인 시선들이 느껴지고 색채도 화려한 반면에 짐승의 두개골, 뼈, 도시의 빌딩을 묘사하는 그림들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색조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일반적인 해석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도심의 하늘을 찢고 높이 솟아오른 빌딩이 거대한 남근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녀의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알아보기 어렵고 추상적인 작품들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일상에 늘 마주치는 사물들이지만 가까이 접근하여  표현함으로써 생물학적인 형태에 추상미를 선사하고 때로는 신비스럽고 몽환적이고 상징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오키프는 자연의 원만한 선과 윤곽, 화려한 색채를 통해 자연으로 치환되는 여성성을, 황량한 뼈와 도심의 마천루들을 통해 황폐한 남성성의 사회를 표현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1953

 

 

 

  조지아 오키프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뒤에도 남편의 성(性)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결혼전 성을 그대로 사용했고,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후기 작품은 주로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그렸고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대표작으로 《검은 붓꽃 Black Iris》(1926), 《암소의 두개골, 적, 백, 청 Cow's Skull, Red, White and Blue》(1931) 등이 있다. 자서전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가 1976년 발간되었다.‘조지아 오키프 미술관’도 한 독지가 부부의 주도로 1997년 7월 문을 열었다.

 

 
그녀는 1920년대 초부터 특유의 개성적 화풍을 보여주었는데, 두개골과 짐승의 뼈, 꽃, 식물의 기관, 조개껍데기, 산 등 자연의 형태를 확대한 것이 주제로 빈번히 등장한다. 오키프는 율동적인 곡선과 탐미적 색채를 통해 신비스럽고 상징적이며 관능적인 모티프를 표현했다. 특히 커다란 꽃 그림은 사실주의와 추상주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독특한 이미지로 평가된다.

 

 



okeefe | 1941 - Series near abiquiu, New Mexico


 


말년에는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오키프는 독자적인 화풍을 통해 20세기 미술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okeefe | 1927 - Lily, White with Black

 

 

 

 

미국이 낳은 위대한 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산타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조지 킹 관장은 “많은 예술가들이 뉴멕시코와 산타페에 이름을 남겼지만 이 곳은 당연히 오키프의 영지”라고 말했다. 그만큼 오키프는 산타페를 온세상에 보석처럼 알리는 가장 유력한 화가가 되었다.

 

오키프는 1917년 기차여행 중 뉴 멕시코를 지나다 사막 풍경에 사로잡혔다. 1929년부터 여름을 뉴멕시코에서 나기 시작했고 49년에는 아예 정착했다. 1986년 산타페에서 숨을 거둘 때 까지 애비큐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오키프는 특히 대형 꽃과 동물 뼈 그림으로 유명하다. 꽃 그림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고찰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동물 뼈는 ‘황폐한 남성성’으로 해석된다. 이름난 사진작가로, 그 자신 화가들을 후원했던 24세 연상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 한 뒤에도 오키프는 자기 성을 그대로 썼으며 독립적인 인생을 살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킹 관장은 “미국인들은 오키프의 작품 뿐 아니라 강인한 의지와 독립 정신을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okeefe | 1929 - Iris 1929 (Dark Iris 2)

 

 

 

 

남자들로만 점철된 화단에 등장한 미국적이고도 독창적 화풍의 미술계의 유일한 여성 거장 조지아 오키프.  그녀의 그림은 유럽사조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좀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그 어느 유럽의 화풍도 닮지 않은 고유함으로, 그녀로 인하여 시각이 형식에 앞 서게 되고 초기 미국 모더니즘에 붙어 있던 편협한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녀 역시 다른 위대한 여성들처럼 고상한 문화 생활을 지향하는 어머니의 배려로 열한살 때부터 마차를 타고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한 여인의 삶에 있어 같은 성(性)인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또 목도하게 된다.

 

그녀가 화가의 길로 나서는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 바로 다름아닌 훗날 그녀의 남편 스티글리츠인데 그의 영향으로 그녀는 형식보다 시각을 중시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스티글리츠는 근대 사진 예술을 개척한 사람으로 리얼리즘 묘사를 추구했고 핸드 카메라를 써 걸작 스냅을 많이 남긴 인물로 화랑을 통해 여러 명의 미국화가들을 길러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그녀였고.

 

 



okeefe | 1932 - White Trumpet Flower

 

 

 

 

그녀는 텍사스의 한 공립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취임했는데 거기서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사실 그곳에선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었고 몇 년이 지난 후 자연으로부터 받은 텍사스의 영감을 표현한 추상화가 완성되게 된다.  친구를 통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스티글리츠에게 보여주게 되고 그녀의 그림을 보자마자 첫 눈에 반한 그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전시를 하게 되었고 이에 오키프가 항의하며 그와 대면하게 되면서 둘은 사랑에 빠져 23살이란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한다.

 

또한 그녀에게 영향을 준 두번째 인물은 러시아 출신 화가 앨런 비먼트였는데 그녀에게 '자신의 본능에 따라'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해 주었고 그러므로 그녀는 추상에 눈을 뜨고 순수 회화를 향한 정열을 되 찾을 수 있었다.  간혹 그녀의 그림은 성적인 선입견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그녀는 일생을 남편이 있는 뉴욕과 자연의 보고인 뉴 멕시코를 왕래하며 지냈고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신만의 세계를 조화시킨 멋진 삶의 소유자였다.  이 부분에서 역시나 무척 감동 받으며 부러움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게 솔직한 고백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사랑을 이어 나가고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고독과 자유를 얻었다는....  
 

그녀의 작품은 광활함과 웅장함을 보여주며 또한 대상에 강렬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지나치게 확대되어 더욱 본질에 충실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주관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소재의 특이성에서도 그녀의 강한 개성이 돋보인다.

 

남편의 사후에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사생활을 지키며 은둔하고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고집스럽게 화려한 색채로 자신만의 세계를 견지해 나갔다.  그녀의 작품은 말 그대로 그녀만의 '오키프 세계'를 보여주는 한 여인의 의지의 산물이다.

 

지난 가을 불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단풍이 흐드러진 미국의 버몬트주를 방문했고 그곳의 유명 뮤지엄에서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곤 그녀에 대한 흠모가 더욱 깊어졌고 그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참으로 시대를 앞서간 한 여인의 웅장함과 개성이 살아 숨쉬는 현장에서 잠시 내 몸이 얼어붙은 듯, 내 입이 말을 잃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okeefe | 1917 - Nude Series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며 가장 '나다움'을 추구했던 한 여인의 고귀한 삶 앞에서 나는 거장이란 말 그대로 세상의 인식을 바꾸고 <자기의 본연에 깊이 침잠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 그녀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그녀의 말을 옮겨봤다.

 

 

 



okeefe | 1923 - Red Canna

 

 

 

"예쁜 꽃을 보면 꺾어 오고, 마음에 드는 조개 껍질이나, 돌멩이, 나무 조각이 있으면 주어 온다. 만일 사막에서 아름다운 상아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 역시 집으로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드넓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얘기하기 위해 모든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세상의 광활함과 경이로움을 가장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 조지아 오키프 -

 

 

[약력]
1887년 11월 15일 미국 위스콘신 선프레리 출생
1904년 미국 시카고미술학교에서 수학
1907년 미국 뉴욕아트스튜던츠리그에서 수학
1912년 대학에서 미술 강사
1916년 사진작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도움으로 전시회 개최
1924년 사진작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
1946년 남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 사망
1970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 개최
1976년 자서전「조지아 오키프」발간
1986년 3월 6일 뉴멕시코 산타페이에서 사망

[대표작품]
1926년 검은 붓꽃
1931년 암소의 두개골, 적, 백, 청

 

 

 

 



okeefe | 1955 - Patio with Black Door

 

 

 

 

위스콘신 주에 있던 농장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예술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시카고 미술학교(1904~05)와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1907~08)에서 공부했으며 그후 상업미술 일을 했다. 1912~16년에 텍사스 등 남부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16년에 그녀의 소묘가 사진작가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눈에 띄어 그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업을 칭찬하고 격려했다. 이들은 1924년에 결혼했다. 그녀를 모델로 스티글리츠가 찍은 수백 점의 사진은 주목할 만한 연작 인물사진으로 널리 알려졌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를 만난 후 뉴욕 시와 뉴멕시코에서 몇 년 간 생활하다가 1946년에 남편이 죽은 뒤 뉴멕시코로 옮겼다.

 

 

 



okeefe | 1931 - Horse?s skull with white rose

 

 

 

 

그녀의 초기 그림은 모방에 머물렀으나 1920년대초에 특유의 개성적 화풍이 나타났다. 그림에 빈번히 등장하는 주제는 두개골과 짐승의 뼈, 꽃과 식물의 기관, 조개껍질, 바위, 산 등 자연의 형태를 확대시킨 것들이다. 탐구적이고 미묘한 율동을 지닌 윤곽선으로 이러한 형태들을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한 색채의 엷은 물감으로 강약을 부여했다. 신비스러운 암시를 던져주는 뼈와 꽃의 형상은 원근법을 무시한 공간과 대비를 이루어 에로틱하면서도 심리적·상징적인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정밀함과 소박함은 찰스 실러와 찰스 디머스의 정밀주의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생물형태적 형상에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능력은 그녀 고유의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암소의 두개골, 적, 백, 청 Cow's Skull, Red, White and Blue〉(1931)과 〈검은 붓꽃 Black Iris〉(1926) 등이 있다. 1920~40년대에는 대표작을 많이 그렸으나 활동은 1980년대까지 계속했다. 후기 작품에서는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많이 그렸다.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함으로써 현대 미국 회화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비중있는 미술가의 한 사람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녀의 자서전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는 1976년에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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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3 Special, 1916/1917, Charcoal on paper

 

 

그녀의 30대에

스티클리츠를 만날 무렵,

뉴욕의 화랑 291에 처음으로 발표한 목탄화 그림이다.

 

 이 역사적인 사진에는

암수의 구별이 상징화한

꽃속에 숨은 우주의 에너지가 꿈틀이고 있다.

 

아마 스티클리츠는 거친 목탄화 꽃속에 숨은 음밀함을 보았을 것이다.

이 그림을 뉴욕에 걸지 않았다면,

어쩌면 천재 여류작가 오키프는 평범한 미국의 가정주부로서

오트밀과 부활절 칠면조 구이에 세월을 보냈을지 모른다.

 

 



숫양의 접시꽃머리와 작은 언덕 Ram's Head White Hollyhock and Little Hills, 1935 Georgia O'Keeffe

 

 

그녀의 1935년,

숫양의 접시꽃 머리와 작은 언덕,

저 연약한 여자의 작품이라고 보기엔 믿기우지 않을 만큼의

남성적인 숫양의 힘과 에너지 여성적인 접시꽃의 조화가

놀라움을 준다.

 

꽃과 양의 두개골과 언덕과 구름.

조지아 오키프가 산타페에서 생활하기 시작할 무렵 부터이다.

그녀는 1929년 부터 우연히 들렸던 미국의 뉴멕시코의 산타페에서 너무나 깊은 영감을 얻어

매년 그곳에 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그림은 그 무렵의 작품이다.

그녀의 그림과 함께

산타페는 너무나 유명한 에술가들의 고향으로 다시 태어 나기 시작했다.

 

 



okeefe | 1928 - Two Calla Lillies on Pink

 

 

 



okeefe | 1923 - Grey Line with Black, Blue and Yellow

 

 

 



okeefe | 1926 - Yellow Calla

 

 

 



okeefe | 1918 - Series I, no 1

 

 

 

 

 

 



스스로 “꽃 자체를 그렸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꽃에서는 어렵지 않게 ‘신비하며 아름다움과 함께 이상하고 음침하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미지와 생식기의 에로틱한 모습이 연상된다. 빨간 칸나와 함께 이 검은 붓꽃도 꽃의 이미지에 충실하며 여성의 한 부분이 강렬하게 떠올려지는 작품이다.

 

 



okeefe | 1931 - Hernandez New Mexico


 


그녀는 종종 텍사스의 사막으로 갔지만 예술적 동반자이며 남편 스티클리츠는 한번도 그곳을 가지 않았다. 그들이 나눈 사랑의 편지는 무려 1만1천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그들의 사랑은 끈끈했다. 스티클리츠가 죽고 오키프가 85세일 때 놀랍게도 그녀는 50년 연하의 남자 해밀턴을 만나 13년을 함께 살았다. 오키프는 젊은 애인에게 재산의 3분의 2를 주었고, 그 둘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녀는 2,000여점의 작품과 65억달러의 유산을 남겼고, 그리하여 그녀는 산타페에 미술관을 가진 미국의 유일한 여류화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녀 나이 99세였다. 그녀는 햇살이 지글거리는 산타페에 뭍혔으나,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그녀의 추상화 그림은 온세상에 하나의 심볼로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꽃을 중심으로한 식물과 정물 그리고 풍경을 창조적 추상 디자인으로 작업하게 된다. 식물 모티브를 주제로 한 작품에 대한 에로티시즘 해석에 시달린 그녀는 뉴멕시코에 정착하여 그곳의 자연을 그리다 1986년에 99세로 세상을 떠난다.

 

 

 



okeefe | 1945 - Black Place I

 

 

 

그녀-미국 화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속에서 몽환적인 분위기로 살아있다. 가장 미국적이고 가장 덜 유럽적인 화가로 일컬어지는 조지아 오키프는 '꽃과 해골과 사막 ' 등 특정 주제를 꾸준히 그렸다.

꽃은 주로 이 그림에서처럼 특정 부분(암술,수술 부분)을 강조해 그렸고, 작가가 이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꽤 관능적이고 탐미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키프는 인생의 절반(1946년부터 숨질 때인 1986년 까지)을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 속에 은둔하며 살았는데, 그럼에도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미국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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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그림만큼이나 그녀의 인생 또한 드라마틱한 강한 인상을 남기네요 자서전을 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잘 모셔 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 가져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림이 정말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