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choyeung 2016. 1. 18. 09:40

 

 

산 높지 않으나 신선(神仙)이 있으면 유명하고,

물 깊지 않으나 용이 있으면 신령하도다.

이 집이 좁다 해도 내 덕이 향내를 날리리.

 

돌계단에 이끼 푸르고, 초록빛은 발을 넘어 마구 들어온다네.

큰 유학자들의 담소가 즐거우니 보통사람들은 왕래가 없네.

소박한 거문고 고루고, 성인의 책 보기에 좋도다.

 

관현악기 어지러운 소리 없고, 사무 볼 수고도 없다네.

남양(南陽)에는 제갈량(諸葛亮)의 초가집이 있고,

서촉(西蜀)에는 자운정(子雲亭)이 있네. 공자는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山不在高有仙則名

水不在深有龍則靈

斯是陋室惟吾德馨苔痕

 

上階綠草色入簾靑

談笑有鴻儒往來無

白丁可以調素琴閱金經

 

無絲竹之亂耳無案

牘之勞形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孔子云何陋之有

 

좋은 집에 잘먹고 잘사는 부귀(富貴)를 모든 이는 꿈꾼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한 주발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고상한 품격의 인생을 노래했다. 좁고 누추한 집에서도 드높은 인품의 소유자들이 있었다. 그 주인의 만족과 영혼의 기쁨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이랄 수는 없다.

 

산만 높다고 명산인가?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다. 나라도 그렇고 집안도 그렇다. 나라가 크다고 대국(大國)이 아니라, 대인이 살아야 대국이다. 절간이 크다고 명찰 대찰이 아니라, 큰 스님이 있어야 명찰 대찰이다. 정당이 크다고 큰 정당이 아니라, 큰 리더가 버티고 있어야 큰 당이다. 누추한 곳, 작은 곳에 있을지언정 뜻을 크게 하고 스스로 귀한 뜻을 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임을 천년 전의 사람도 알고 있었다.

 

 

유우석의 '누실명(陋室銘)' 습작

 

 

요즈음 [화집과 미술도서]라는 책을 발간하기 위하여 원고를 정리하고 있다. 과거 서예작품중에서 한 점을 찾기 위해 두루마리 묶음을 풀어 보았다. 30년전의 서예습작집에는 오십여점의 작품이 있었다. 다리미로 다리고 담요에 올려 사진을 찍고 처음으로 올려보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은 타계하신 서예스승인 조득규(趙得奎) 선생의 모습이 그립다. 이분은 강암 송성용 선생과 동향으로 국전에 진출치 않고 지방에서 문하생을 가르쳤다.

 

 

 

 

 

■ 정인지鄭麟趾 (호 학역제 學易齋) 소개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성리학자이며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태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등급을 정했다.

 

1452년부터 1454년까지 세종실록의 편찬과 감수를 맡았으며, 세조를 지지하여 계유정난, 세조반정 등에 적극 동조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에 협력한 공로로 특별승진하여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55(세조 1) 영의정부사에 승진하고 세조 반정을 지지한 공로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55년부터 1458년까지 영의정부사를 지냈으며, 역사와 고전에도 능하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용비어천가의 편찬과 감수, 태조실록의 수정에도 참여하였다. 1468, 예종 때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남이·강순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翊戴功臣) 3등관이 되고, 예종 사후 원상으로 서정을 주관하다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을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안평대군(호 비해당)의 소상팔경시 (瀟湘八景詩) 에 하동 정인지가 쓴  화운시 (1442)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 1453)은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서예가, 서화가, 시인이었다.

이름은 이용(李瑢),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문종 ·세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었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서예와 시문, 그림, 가야금에 능하였다.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아버지인 세종임금은 안평(安平)’이 편안하고 태평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안이하고 게으른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려준 호가 비해(匪懈: 게을리 하지 않는다)’였던 것이다.

 

그는 1431년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친형 수양대군과 갈등하다가 1453년 김종서, 황보 인 등과 함께 정변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으로 36세에 사사(賜死)당했고 후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전(傳) 안견, 소상팔경도, 비단에 먹, 35.4 X 31.1, 국립중앙박물관]

안견(安堅, 생물 미상)은 조선 초기의 화가로서, 호는 현동자(玄洞子), 본관은 지곡(池谷)이다.

1400년을 전후로 태어나 조선 세종과 문종 전후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정4품 호군(護軍)을 지냈다. 1447(세종 29) 안평대군을 위하여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이듬해 의장도(儀丈圖)를 그렸다.

총명·정박(精博)하여 고화(古畵)를 보고 깊은 경지를 체득했으며, 여러 화가의 장점을 절충하여 웅혼한 필치로 많은 명작을 남겼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초상화, 사군자, 의장도 등에도 능했다.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화단에 영향을 미쳐서 신사임당도 어린시절 안견의 작품을 보고 그림공부를 했다고 한다. 현재 안견이 그렸다고 추정되는 작품은 다수 있는 편이나, 그가 그렸다고 확인된 작품으로는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

 

玉軸生綃八景新  可憐詩畫聚精神  珠璣奎璧堪爲翫  煙月江山更逼眞

옥축생초팔경신  가련시화취정신  주기규벽감위완  연월강산경핍진

俯仰情懷追造物  逍遙性氣等閒人  箇中此樂誰能識  莫道公候手上珍

부앙정회추조물  소요성기등한인  개중차락수능식  막도공후수상진

 

 

옥축. 생초에 팔경도이 새로운데

정신을 모아 담은 시와 그림 사랑스럽다 .

구슬의 규벽들은 완상함직 하고

안개. 달.강.산은 실물에 가깝구나.

솟구치는 감정의 회포 조물주를 쫓아가며

자연속에 노는 성정과 기운, 한가로운 사람일세.

이 속에 이런 즐거움 누가 아리오?

공경.제후 연화상의 진기함은 말하지를 마시오.

-지충추원사 정인지

 

 

왼쪽 : 河東 鄭麟趾의 [() 안견, 소상팔경도 瀟湘八景圖, 비단에 먹, 35.4 X 31.1,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 河東 鄭麟趾의 [() 안견, 소상팔경도, 비단에 먹, 35.4 X 31.1, 국립중앙박물관] -湖亭 趙永奎 臨書

 

 

안양미술협회주최 포도미술제 출품작 2018년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
약을 싫어하는 터라 감기로 며칠 쉬다 모처럼 좋은 글과 글씨를 만나니 반갑고 ..맑은 정신이 듭니다. 물흐르듯 경쾌하고 유유한 서체가 그림 잘 그리는 바탕이었음을 알겠습니다.
누구나 매일같이 일기를 쓰던 때가 있습니다. 수없이 고향을 떠나 생활하던 노릇에 가장 소중한 것을 나도 모르게 잃고 있었습니다. 라면박스에 들어갈 정도분량의 일기책이고 중학교시절부터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였으니 십수년 동안의 흔적입니다. 매일같이 쓰지는 않았지만 누렇게 변해버린 공책에 주로 썼던 일기는 글씨체도 몇번이 바뀌었지만 한번씩 볼 때는 나 자신도 여러가지 이유로 놀랄 때가 있었답니다. 청춘의 고뇌와 환희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니 현재가 있기 위한 과거의 장이기 때문이겠지요. 약 35년 전의 서예 글씨 일부는 잃어버린 일기와 다르게 건재해 있어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