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choyeung 2016. 2. 25. 21:42

이제 닷새만 지나면  3.1절 97주년이 된다.  이날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은 100년이 거의 다 되도록  자기들의 만행을 뉘우치지 않는다. 위안부를 보더라도 어떻게 하면 수상부터 공무원까지 모두 부인하기 급급하다,  가까운 일본에 대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를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된다.



불타버린 제암리 교회


불타버린 제암리 마을 현장


불타버린 제암리 마을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인


일제 군경영에 의해 학살된 한국인의 장례식 사진


제암리 현장


제암교회 학살장면 - 제암리에 도착한 검거반은 15세이상 성인남자들을

제암교회에 불러 모아 무차별 사격했다


[제암리의 참살]       박 목 월

    

무슨 소리를 해 보았자 / 그들이 지른 제암리의 불은

이제 와서 끌 수 없고 / 교회 안에 모였던

스물여덟 명의 형제를 / 살려낼 수 없다.

                  

왜병 중위가 이끄는 / 악마의 한 떼거리가 어진 백성을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 난사했다. 살해했다. / 이유도 간단했다.

우리나라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 제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형제가 제암리의 그분들뿐이랴 마는

나는 죽지만 이 어린 것만은 살려달라고 / 죽음의 창틈으로 내미는

천진한 어린 아기의 / 무심한 눈을 겨냥하며

방아쇠를 당기는 놈들의 손 / 모성애의 마지막 애원조차

귀에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의 / 미친 악마 귀머거리의 악마

무슨 소리를 해 보았자 / 죄과는 죄과 / 상처는 상처 / 씻을 수 없다.

                  

왜족이 어떻다는 것을 / 그들의 불거진 이마와

튀어나온 관골(顴骨)/ 미간[眉間]에다 붙은

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눈이 / 어떻다는 것을 / 우리는 안다.

                  

제암리를 태운 불이 / 제암리만 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지금 / 우리는 의젓한 / 자주국의 백성으로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 대할 수 있음은

협량하지 않기를 다짐하는 / 아량과 냉대와

내일의 찬란한 앞날이 / 우리를 밝게 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를 해보았자 / 그들이 지른 제암리에 불은

이제 와서 그들이 / 끌 수 없으며

죽음 당한 우리의 형제가 / 살아날 수 없다.

(뉘우치는 것은 그들의 덕,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 자주국의 백성으로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 대할 수 있음은

지난날보다 오는 날이 소중하고 / 어제보다 내일이 귀하고

과거를 되새기기보다 / 내일의 꿈에 부풀고

조국의 산하에 / 철철 넘쳐 흐르는 / 오늘의 햇빛이 밝기 때문이다

 

 

프랭크 W. 스코필드 (1889-1968)  건국훈장 1968년, Oil on canvas, 15호,  65.2x50.0cm,  2009년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독립운동가 42인의 초상화전 <대한독립전>에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8~1970의 약력 

 

3·1 운동의 숨은 공로자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958년, 이승만대통령 방문


스코필드는 카나다인으로 한국식 이름은 석호필 (石虎弼)이었다. 그는 영국태생의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로서 세계적인 수의학자(獸醫學者)이며 세균학자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독립이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를 “3·1 운동의 제34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916년에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연세대의 전신) 의학전문학교의 세균학교수로 일했다.


19193·1운동후에는 교수직을 포기하고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하면서 일제만행을 촬영하여 외국 각지에 알렸다. 특히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교회에서 1919. 4, 15일에 발생한 28명 학살사건의 참상 현장을 직접 찾아와 사진을 찍고 주민들에게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들은 후 기록한 <제암리 학살 보고서>를 캐나다 선교본부에 제출하고, 장로회 기관지인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에 기고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했다. 또한 미국으로 전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여론화시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자 일제강압으로 1920년에 조선에서 강제출국을 당했다. 한국을 떠날 때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여 옥고를 치르고 있는 이상재· 오세창 등 독립지사를 면회하고 격려했다. 그는 본국인 캐나다의 토날드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195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10주년 경축식에 초청되어 한국에 왔다. 그후 19692월 한국에 다시 돌아왔고 여생을 한국에서 마쳤다

그의 유언은 내가 죽거든 생전에 정든 한국 땅에 묻어주세요.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을 맡아 주세요.” 라는 말을 남겼다.



1919.3.1 서울시청 밖에 모인 군중을 스코필드가 직접 촬영



19193월 서울시내로 들어가는 군중을 막고자 파고다공원 밖에 모여있는 일본군인들 스코필드가 직접 촬영



스코필드 박사가 찍어 전세계에 알린 제암리 현장 및 3·1운동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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