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규-eBook]

choyeung 2018. 11. 17. 20:19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재79<순국선열의 날>에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6주년 추모회



[우당 이회영 선생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2x50cm, 2010년- [대한독립50인] 에서


매년 11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며 올해는 제79회 째입니다. 그러나 이날이 어떤 연유에서 순국선열의 날이 되었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날은 113년전인 19051117일에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불평등 조약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날입니다. 즉 대한제국의 국권이 실질적으로 침탈 당한 울분의 날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9년부터 이날을 기점으로 많은 분들이 순국하였으므로 또한 국권회복을 위해 항일투쟁으로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과 혼을 추모하는 날로서 법정기념일을 제정하였고 1997년에는 정부기념일로 제정되었습니다.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의 추모회 인사

  

그리고 오늘은 우당 이회영(右堂 李會英) 선생께서 19321117일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신지 8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상동교회에서는 오늘 11시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순국86주기를 추모하는 기념식이 개최되었습니다. 우당선생의 친손자인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과 상동교회 김성준 교육목사, 서영석 목사 및 광복회 박유철회장 등이 참석하였고 특히 독립유공자의 자녀들에게 장학사업을 1984년부터 계속하고 있어 올해는 24명에게 수여되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중창단의 추모가


독립운동가 자녀들 24명에 장학금 전달식

 

추모식장, 상동교회의 찬송



참석인사들의 모습

 

19051117<을사늑약>의 무효


을사늑약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토 히로부미(1841~1909.10.26)는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서 1905119일 서울에 왔고 1110일에 대한제국 고종에게 천황의 친서로 고종을 위협하였다. 19051115일 다시 고종에게 한일협약()을 제시하고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외부대신 박제순에 조약 체결을 강제로 협박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가했다.

 

마침내 11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면서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와 연필을 들고 8부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던 반면에,

을사 5적인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고종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 대신 가운데 5 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고종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양국통치권자의 위임절차가 없어 무효가 되었습니다.

 

1905.11.17일 을사늑약의 을사5적

 

1965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의 제2조를 통해 이 조약이 "이미 무효"임을 상호 확인하였습니다,

 

조약이 무효임을 증명된 중요한 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1) 1992년에 을사보호조약 원본이 서울대 규장각에서 발견되었는데 원본에 국제조약상 반드시 필요한 고종황제등의 성명이 없어 을사4조약이 대한제국과의 합의아래 체결됐다는 각본의 일본 측의 주장은 허위인 것이 증명되었다.


2) 고종황제는 수차례에 걸쳐 "나의 의지와는 달리 일본정부에 강요당하였다"고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음을 천명하였다. 오히려 황제는 신뢰하던 미국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ert, H, B)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양국 사이에서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통보하기 바란다."라고 비준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3) 일본은 국제적으로 공약한 '한국의 독립' 약속의 여러 건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1895417일 조인된 <청일강화조약> 1조에서는 "청국은 한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고 되어있다.

-1898425일 조인된 <니시·로젠 협정> 1조에도 "러일 양국 정부는 한국의 주권 및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또 상호 동국(同國)의 내정에 모든 직접적인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고 되어 있다.

-1902130일 조인된 <1차 영일동맹협약>의 전문에서는 일본과 영국 양국은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고, 또 제1조에는 "양 체결국은 서로 청국 및 한국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이들 두 나라 어느 쪽에도 전연 침략의 의사가 없음을 성명한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 187622일 체결한 <강화도조약> 1조는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하여 '자주국'으로 인정하였다.

-또 1904223일 조인된 <한일의정서> 3조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안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를 이유 없이 뒤엎는 '을사늑약'은 무효이다.


-UN에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인정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id=2772173


-을사조약직후 고종황제가 친서로 쓴 을사조약 무효선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8354 

 


●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약력 - [대한독립 50인]에서


○ 1907년 신민회(독립운동의 비밀결사체) 조직을 중구 남대문로의 상동교회에서 출발○ 1911년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 1912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924년 재(在) 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1932년 일경의 고문에 의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만주로 떠나기 직전의 중국인 복장을 한 우당 이회영 선생


우당(友堂)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은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저동(苧洞 현 명동 YMCA자리)에서 이조(吏曹)판서 이유승(李裕承)과 이조판서 정순조(鄭順朝)의 따님 동래 정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세가(名門世家)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과 선각자적인 안목이 뛰어났다. 약관 20세부터 신지식을 받아들여 평민적 사고(思考)와 행동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선생을 독립운동가 또는 아나키스트로 평가하고 있다. 나아가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로 기록되는 것은 더욱 타당하다. 이는 선생이 정치. 외교. 군사. 교육. 신앙, 언론 등 모든 부문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 만주사변 1년 뒤인 1932년 11월 17일에 일경(日警)의 고문으로 65세로 순국
그러나 며칠 후 선생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선생이 유치장 안에서『빨랫줄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일경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여순(旅順)감옥에서 고문에 의해 순국해 일제에 의해서 서둘러 화장까지 해 버렸다. 일본 군국주의의 서곡인 소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지 1년만의 일이었다.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 독립운동가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형님

http://blog.daum.net/choyeungart/208 
이처럼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에서 우당의 7형제중 여섯 형제(형 健榮․ 石榮․ 哲榮, 아우 始榮․ 頀榮) 50여 가족은 1910년에 국치(國恥)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건너가서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운동을 전개한 것은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만주와 상해 등 광활한 대륙에서 그들이 인재양성과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매우 컸다. 석영․ 회영․ 호영 3형제는 만주와 중국에서 순국했다. 해방 후 아우 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우당 이회영 이시영 6형제의 망명 논의장면


■ 6천석(石) 재산을 쾌척
이들 형제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온몸 던져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형 석영도 만만찮은 인물인데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천석(石)이라는 거대한 재산인데 현 시세는 600억 상당으로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쾌척했기 때문이다. 우당의 가문은 한국의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즉 가진자의 도덕적인 의무를 실천한 가문이었다.


우당은 약관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 대해 존댓말을 씀은 물론 평민으로 풀어주기까지 했다. 새로운 제도와 사상을 배웠으면 이를 즉각 행동에 옮긴 우당의 한 단면이다.

선생의 혁명가적 기질은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들을 개가(改嫁)시킨 데서도 나타난다. 당시 정서로서 판서집 딸이 새 시집을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을 일이었다. 그러나 우당은 아무도 모르게 누이동생을 시집으로부터 끌고 온 뒤『이판서집 아무개가 급환(急患)으로 죽었다』고 거짓 부고(訃告)를 냈다. 간단하게 장사를 치른 뒤 개가를 시켰음은 물론이다. 선생의 이 같은 풍모와 대인(大人)다운 행동은 만주 망명 후는 물론 이승을 떠날 때 까지 일관되게 나타났다.


상해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민들,

백범 김구와 그 며느리 안미생 앞에 서있는 남자 아이가 손자 이종찬


■ 봉건적 인습․사상 타파한 선각자
선생의 혁명적 제창과 실천은 반상(班常)에 대한 차별적 언동을 시정, 적서(嫡庶)의 차별 폐지, 개가 재혼의 장려 등 오늘에서 되돌아볼 때 가위 선각자가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들이다.

선생은 31세 때인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 이상설(李相卨) 이범세(李範世) 서만순9徐晩淳) 조한평(趙漢平) 여규형(呂圭亨) 이강연(李康演)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의 계몽 ▲신진정치가의 결합 ▲내치(內治)외교정책의 수립등 기울어져 가는 나랏일을 수습하려 힘썼다.


선생은 이 같은 운동의 자금조달 위해 선산(先山)인 풍덕(豊德)에 인삼밭을 경작, 경영했다. 1901년 채삼기(採蔘期)에 이르러 일인(日人)들이 작당, 착취․ 노략질해 가는 것을 일경에 엄중히 항의하였다. 한편,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을 통해 이를 고종황제에게 진언케 했다. 이를 전해들은 고종은 선생을 『가위 백사(白沙)의 후예』라고 칭찬하고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를 제수했으나 강직한 선생은 벼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처럼 명예나 지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따라서 선생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혁명가의 길을 걸었음에도 어떤 단체․모임에서 장(長)을 맡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우당(友堂)은 아우 시영에 비하여 그늘에 가려져 후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시영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독주에 맞서 초대 부통령직을 스스로 헌신짝처럼 버림으로써 우당의 7형제들이 50여 가족들을 데리고 「솔가망명(率家亡命)」한 배경을 확실히 엿볼 수 있게 하기도 했다.


■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전념
우당이 명문(名門)을 팽개치고 형제․가족들과 함께 온몸을 바쳐 독립투쟁활동을 전개한 것은 크게 ▲ 3.1운동까지 국내외에서의 독립운동 시기 ▲ 대륙에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이념과 노선에 따라 일제에 대한 테러 등 격렬한 운동을 전개한 시기 등 두어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1898년) ▲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규탄(1905년) ▲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노백린(盧伯麟)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활동(1906년) ▲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瑞甸書塾)개설(1907년) ▲ 신민회 조직(1907년) ▲ 서울상동(尙洞)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개설(1908년) ▲ 농업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 조직(1911년) ▲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년) ▲ 재(在)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년) ▲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년)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했다.


선생이 중국인 동지들과 함께 구축한 항일구국연맹은 생애 막바지에 사른 혁명의 불꽃이었다. 상해 북역사건, 아모이 일본영사관 폭파사건, 천진항 일본군수물자 수송선 폭파사건, 천진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등 테러를 계속했다. 이 같은 독립투쟁은 이듬해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폭탄투척사건을 유발시켰다.


■ 을사늑약에 조국을 떠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늑약이 알려지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로 대한은 망하였다. 이 일을 어찌하는가.”


분노한 군중들이 종로를 메웠고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다. 어떤 이들은 도끼를 떠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을사오적을 죽이라 호소하기도 했다. 그때 실로 귀티가 나는 서른여덟의 남자가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회영.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그 가문에서 정승판서가 수두룩했던 ‘삼한갑족’의 후예였고 명동성당 아래 일대의 땅을 몽땅 보유했던 거부이기도 했던 그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살려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을사오적을 죽일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고종에게 밀사 파견을 제안하고 그 신임장을 몰래 빼돌려 간도의 이상설에게 전달했지만 밀사들은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하지도 못했다.

대한이 다시 ‘조선’으로 바뀌고 황제가 ‘이왕(李王)’이 되고 3천 리 강토가 일본의 치세에 들어갔던 1910년 12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얼굴을 베고 지나가는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면서 잰걸음을 하던 그들은 바로 이회영의 가족들이었다.



안중근의사 순국100주년기념 [대한독립전]에 격려차 방문한 이종찬(이회영의 손자) 부부와 필자


■ 전 재산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전념

이회영과 그 형 둘, 그리고 왕년의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요 과거에 급제하여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동생 이시영 등 6형제의 가족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들이 지닌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화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길이었다. 나라를 회복할 무장 항쟁의 군자금으로 재산을 쓸 요량이었다. 전답과 토지는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냐 하는 심사였으리라. 일행 중에는 가족 아닌 왕년의 이씨 가문의 노비들도 끼어 있었다. 노비 문서를 불태운 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옛 주인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노비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았다. 노비들은 주인들이 큰일을 한다는데 어찌 우리가 따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60여명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가게 된 이회영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사공에게 보통의 뱃삯의 두 배가 넘는 돈을 지불하면 건낸말이 "내게 고마워 하지 말고 이 후로 혹시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쫓겨 강을 헤엄쳐 건너는 투사가  있다면 나를 생각해 이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이었다고 한다. 나라 잃은 슬픔과 더불어 참으로 가슴 아픈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건너간 만주에서 그들은 가지고 나온 재산을 털어 ‘경학사’를 세운다. 밭 갈면서 공부한다는 그 뜻처럼 구국계몽운동 이념에 입각한 교육 기관이었다. 또한 그 부설기관으로서 ‘신흥강습소’를 건립하는데 경학사는 곧 문을 닫지만,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흥무관학교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했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들과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그 외 모든 독립운동 영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수업료는 무료였다. 그 밑 빠진 독에 퍼부어진 물은 모두 이씨 가문의 재산이었다


■ 고문 끝에 사망, 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
이회영은 예순 여섯의 나이에 다시 만주로 향한다. 만주의 군벌(軍閥) 장학량에게 무기를 구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한 누군가를 처단하기 위해 가려고도 하였다. 주위에서 고령을 이유로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늙은 사람이 텁수룩하고 궁색한 차림을 하고 가족을 찾아간다고 하면, 누가 나를 의심하겠는가? 내가 먼저 가서 준비 공작을 해 놓을 테니 그대들은 내가 연락을 하거든 2진, 3진으로 뒤따라 오라.”


그러나 그의 출발은 밀정에 의해 일제에 낱낱이 전달되고 있었다. 요동반도 끝 대련에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1932년 11월 17일 하필이면 을사늑약 체결 27년을 맞던 그날 세상을 떠났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중국 대련의 수상 경찰서에서 죽기 전에 입으셨던 옷


일본 경찰은 그가 ‘목을 매서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얼굴에 유혈이 낭자했다는 전언으로 비추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이 유력했다.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었던 전체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풍찬노숙의 망명길로 떠났던 이회영은 그렇게 평생을 바치면서 활동하다가 죽어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그가 독립된 나라의 상을 그렸던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가 80년 전에 꾼 독립국가의 꿈을 아직 우리는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또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을 치렀던 그의 기념관은 국고 아닌 사비로 조성되었다. 지금도 국고의 지원은 1년에 기백만 원에 그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우당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뭘 바랐다면 그런 선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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