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야기)

choyeung 2019. 4. 1. 09:07

김혁장군의 초상화 제작

 

지난 1월에 용인에 거주하는 분으로 독립운동가인 김혁장군의 증손이 되는 김성태씨와 부인 이정하님의 연락을 받았다. 대부분 100년 전의 대한독립 운동가들의 모습은 신분을 숨겨 활동하는 관례로 사진을 구하기가 드문 편이다. 김혁장군도 마찬가지로 53세이던 1928년에 중국에서 체포되었을 당시 동아일보 지상에 실린 흑백사진이 유일한 모습이었다. 부부는 우연히 본인이 2010년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개최한 [독립운동가 42인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특별기획전]을 개최한 사실을 알고 기념관에 전화로 물어 연락을 하였다. 그들의 주소인 용인과 안양에 있는 화실에서 서로 만나 작품제작의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건네받았다. 아래와 같이 김혁장군의 자료를 보니 이분은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장군임을 누구나 알게 된다.

 

 

 

[김혁장군의 초상화] 65.2x50.0cm (15호) 캔버스에 유화, 2019년

 

초상화 작품에는 조선시대부터 초상화의 지향점이 '전신사조(傳神寫照)'인 것처럼 내면에 지닌 고유한 정신과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을 함께 표현하여야 한다. 즉 이는 초상화란 정신(精神)을 그려내는() 것으로 형상을 통해 정신(精神)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혁장군의 사진에는 눈동자와 입가 등이 표정이 자세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느끼는 인상은 학문을 쌓은 선비로서 고아(古雅)함을 느끼게 되고, 또한 무인(武人)의 장군으로서 강직(剛直)한 모습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김혁(金赫 1875~1939)선생은 본명은 김학소(金學韶), 호는 오석(烏石, 또는 吾石)이다. 선생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이 대한제국의 법부 참사관(법무부 서기관) 직책으로 고위층의 양반 가정의 출신

부친은 법부 참서관(오늘날 법무부 서기관))을 지낸 김태식(金泰植), 모친은 윤현숙(尹顯淑)으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자는 순익(舜翼), 본관은 경주이다. 어린 시절 선생은 8세 때부터 10여 년 동안 향리에서 한문을 배웠다.

 

김혁의 스승은 기호학파의 큰 유학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1862-1933)

1894년부터 1896년 초까지는 용인향교에서 유학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동전은 또한 1905년에 을사늑약으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을 장례지낼 때 제문인 만사(輓詞)를 지었던 분이었다.

동전의 스승은 고종에게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두 차례나 올린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선생이었고 그로부터 수학했다.

18986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여 19001월 졸업

대한제국 시기인 18986월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여 19001월 졸업하여 육군참위로 경성시위보병대(京城侍衛保兵隊) 1연대에서 부관장교로 근무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5년 후인 1905년에 입학하였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쟁쟁한 졸업생들

이 학교의 주요 졸업생은 김좌진(청산리 대첩 지휘관), 신규식(임시정부 국무총리), 지청천(광복군 총사령관), 이장녕(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박승환(황실근위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 육군 참령), 이동휘(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 노백린(임시정부 국무총리 역임) 등이 있었고 무관학교 출신은 임시정부나 독립군의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다. 무관학교는 현재의 육군사관학교인 셈이었다.

김혁장군은 190781일 육군 정위(현재 대위급)일 때 군대가 해산되자 항일투쟁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 기흥으로 귀향했다.

 

1897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육군무관학교 교육은 자주 국방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근대식 군사교육이었고, 더구나 반일적 성향의 민족교육이었다. 이 시기 졸업생들은 반일 민족의식이 강했다. 선생이 뒤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 시기 무관학교 교육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다.

 

1919(44) 용인기흥의 독립만세운동 주도, 만주로 가서 흥업단(興業團) 부단장 활동

1919(44) 용인 기흥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5월 일경의 눈을 피해 만주 서간도 유하현으로 망명하였다. 무송현에 근거지를 두고 서간도 각지에 지단을 설치해 활동하던 흥업단(興業團)에 들어가 부단장으로 활동하였다.

흥업단은 농민과 군인이 따로 없이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군사 훈련하는 병농겸행(兵農兼行)의 방책을 취하여 동포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확립하는데 공헌하던 단체이다. 이 조직은 모두가 대종교 교도였다. 만주 각 현에 지단·지부 조직을 두고 있던 흥업단의 부단장 직책을 맡았다면, 선생은 대종교 내에서 위치가 상당히 높았고, 동시에 이후의 행적과 연계하여 보면 실질적으로 단체를 이끌어갔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는 자리에서 "중앙집행위원장피선

김혁은 1920(45)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 제1회 졸업식에 참여해 축사를 하고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하고 러시아로 도망갔다가 22(47) 8월 통의부 결성에 가담해 군사부감을 맡았다.

신민부(新民府)1925310일 북만주 영안성(寧安城)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일제에 대한 효율적인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북만주의 여러 항일단체 즉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21개 단체들이 통합하여 결성된 것이다. 김혁은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하는 자리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피선된다. 군사부위원장에는 김좌진 장군이 피선되었다.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만들어 김혁은 교장으로 임명

신민부(新民府)군인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穆陵縣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교장에 임명되었고 500 여명의 졸업생 사관생도가 배출되었다. 부교장에는 김좌진, 교관 박두희(朴斗熙오상세(吳祥世백종열(白宗烈) 등과 함께 신민부 군인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8(53)에 신민부 본부에서 체포되고 10년형 언도

신민부(新民部)가 북만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일제는 이를 주시하다가 일제의 하얼빈 영사관 경찰은 1928(53) 2월 신민부 본부인 석두하자(石頭河子) 흥륭진(興隆鎭)을 습격하여 김혁과 유정근 등 12인을 체포하였다. 김혁은 10년 징역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 1928년 1월 28일자, 신민부 간부 체포사실을 보도한 기사 발췌분 

 

 

 

 

1928.10.29 김혁등의 공판 (金爀等의 公判 十一月末頃 開廷) 국경에 큰 재판이 열린다 

  

1939(64)에 고향에서 병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그 후 오랜 옥고로 병을 얻어 1935(60) 8월 서대문 교도소에서 가석방된 김혁은 고향에 돌아와 요양하다가 1939(64) 4월 병사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獨立章)이 추서되었고 후일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용인에는 김혁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비석도 안치되어 있어 매년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행사가 이어진다.

 

 

 

 

조영화실에서 기념촬영, 김혁장군의 증손 부부와 아들  

 

▶김혁장군의 휘호(서예글씨) -위국진충(爲國盡忠) :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이는 주자 (朱子)의 소학과 경전중에서 골라 쓴 사자소학(四字小學)에 나오는 말로서 

 

學優則仕 爲國盡忠 (학우즉사 위국진충)

학문이 넉넉하면 벼슬을 해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

 

敬信節用 愛民如子(경신절용 애민여자)

공경하고 미덥게 하며 재물을 아껴 써서 백성을 사랑함을 자식과 같게 하라.

 

▶김혁장군의 휘호(서예글씨) -천광운영(天光雲影) -경기도 박물관 소장

 

천광운영(天光雲影)은 주자(朱子 1130-1200)의 관서유감(觀書有感 : 책을 읽는 감흥)에서 나온 말이다.

 

반무방당일감개(半畝方塘一鑑開) / 그 맑은 네모난 연못에 거울 하나 열리니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 /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그 안에 떠있네

문거나득청여허(問渠那得淸如許) / 연못이 이리도 맑은 까닭이 무엇일까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 /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솟아 나기 때문

   

 

독서의 즐거움과 학문의 근원을 맑은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비유하였다.

 

이상과 같은 두 휘호를 본다면 김혁장군이 무인의 장군이지만 평소 독서를 통한 학문의 통달이 중요함을 말하였고, 배운후에야  벼슬을 하던지 나라에 충성을 다하면서 백성을 사랑함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2019.4.23. 김혁장군 순국80주기 추모제에 초청을 받다

 

김혁장군의 후손되시는 김성태님과 부인 이정하님이 마침 김혁장군 순국80주기의 추모제가 용산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개최한다고 초청장을 보내주었습니다. 뜻깊은 행사에 의당 나가보려고 합니다.

 

 

 

추모제 초청장

 

 

추모제 엽서

 

▶김혁장군의 제3회 오석문화제 '하늘 땅 울림' -광복회보 게재

김혁장군의 제3회 오석문화제 '하늘 땅 울림' -광복회보 게재
제4회 오석문화제 오석장군 기념사업회 2019.11.2 명지대학 용인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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