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야기)

choyeung 2019. 5. 3. 09:49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27세 사망)

 

5월이 시작되는 시절에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위치한 조선의 이름난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홍길동전>을 지은 소설가 허균(許筠)의 기념관을 찾아본다. 두 사람은 누나와 남동생으로 친혈육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작가 및 화가이었다. 본명은 초희(楚姬),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본관은 양천(陽川 현재 서울시 양천구)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초상 


▶허난설헌의 집안


그녀는 조선시대에 강원도 강릉부 초당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이며 승지와 관찰사를 한 선비였다. 홍길동(洪吉童)의 저자인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누나이었다. 허봉(許篈, 1551-1588)의 여동생이었는데 허봉은 동인으로 서인을 공격하였고  병조판서로 있던 이이(李珥, 1537-1584)의 근무 태도를 규탄했다가 역으로 유배당한 뒤, 벼슬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

또한 허성(許筬, 1548-1612)의 이복 여동생으로 허성은 조선조정이 1589년 조선통신사로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으로 차출되어 이듬해 1590년 3월6일에 대마도로 출발하였고 이듬해 귀국했다.

어의(御醫) 허준 (許浚)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난설헌의 자녀는 11녀를 두고나서 요절하였다,

 

기념관 내부의 모습과 허난설헌의 생가 한옥 -방 내부에 허난설헌의 초상이 있었다.


▶ 결혼생활

삿갓 김병연과 비교되는 문인으로 손곡 이달(李達 1539-1612)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선조 10년) 단원 김홍도(金弘道) 의 손자인 김성립(金誠立 1562-1592)과 결혼했으나 혼인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고부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고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김성립은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던 중 전사하였다, 시체를 찾지 못해 그의 의복만을 가지고서 장사지냈다 한다. 아들이 없어 양자 진(振)을 입양하였다.  시(詩)에 명성이 높았다. 사후에 남편 김성립은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 8세부터 천재 여류시인

그녀의 삶은 허균(1569-1618)이 편찬한 <난설헌시집(蘭雪軒詩集)>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허난설헌은 1563년 아버지 허엽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외가인 강릉 초당에서 태어났다.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抛梁東(포양동)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曉騎仙鳳入珠宮(효기선도입주궁)

새벽에 봉황 타고 진주 궁궐에 들어가

平明日出扶桑底(평명일출부상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萬縷丹霞射海紅(만루단하사해홍)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네

 

抛梁南(포양남)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玉龍無事飮珠池(옥룡무사음주지)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 연못의 물 마시는데

銀床睡起花陰午(은상수기화음우)

은 평상에 잠자다가 꽃 그늘 짙은 한 낯에 일어나

笑喚瑤姬脫壁衫(소환요희태벽삼)

웃으며 아름다운 미녀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抛梁西(포양서)

어영차, 대들보를 서 쪽으로 올리세

壁花零落彩鸞啼(벽화영락채난제)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春羅玉字邀王母(춘라옥자요왕모)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鶴馭催歸日已低(학어최귀일기저)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하네

 

抛梁北(포양북)

어영차, 대들보를 북 쪽으로 올리세

溟海茫洋浸斗極(명해망양침두극)

북해 아득하여 북극성에 젖어드는데

鳳翼擊天風力掀(봉익격천풍력흔)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 높이 치솟아

九霄雲垂雨氣黑(구소운수우기흑)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 어둑하네


 

허난설헌은 18세인 1580년 (선조 13년)에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은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곡자 哭子 ( 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애애광능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魄지전소여백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시에 녹이 있다.

그녀의 시는 맑고 아름답다. 그러나 단지 아름다운 데 그치지 않되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당시 사회에 대한 비탄이 녹아 있다. 애상적 시풍으로 특유한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고 시를 짓는 것은 불행한 삶의 도피처였다. 결혼후 힘든 시집살이와 남편과의 불화,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부모의 돌연한 죽음, 연이어 어린 아들과 딸이 병사하고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오빠와 동생 허균도 귀양을 가게 되어 결국 심리적 불안으로 27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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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꽃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허난설헌의 마지막 시에 나옵니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와 친필 22.5 x 22.5 cm 허난설헌 -남성의 글씨처럼 힘차고 대범하다.

 


허난설헌 작- 묵조도(墨鳥圖)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散文), 수필(隨筆)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書藝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선조 41) 남동생 허균(許筠)이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알려졌다. .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중국 명나라의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그의 작품은 1608년 동생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출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612년에는 취사원창(聚沙元倡)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저허난설헌의 저서와 시작품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현재 전한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5번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 하남시로 이장되었다.

 

남동생인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남동생인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이다. 서자를 차별 대우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녹훈되었다. 1594(선조 27)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선조 30)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되었다. 홍길동전(洪吉童傳)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허균의 추모시>

1589(선조 22) 319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기념관 내부에 새겨진 시비 -허난설헌의 시 <죽지사>와 허균의 시 <경포호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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