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choyeung 2019. 5. 31. 20:10

  

어록비 제막후 사진



어록비 공원



조병세 선열 초상화 (대광보국숭록대부 정일품 조병세 77세상 채석지 도사)


2019. 5.3011시에 충남 목천의 독립기념관내 제일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어록비공원>에서 조병세 선생의 서거 114주년을 기하여 어록비 제막식에 거행되었다.

본인은 선생의 5대손이며 산제기념사업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조범식씨의 초청을 받고 참석하였다. 이날 어록비 공원의 앞쪽에 직육면체로 된 검은 오석(烏石)에 높이 2.7미터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이날은 산재기념사업회와 양주조씨대종회, 독립기념관, 대전국립현충원 및 경기도박물관이 관여하여 주최하였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축사


권율정 국립대전현충원장 축사


 조범식 어록비 건립위원장 기념사



내빈들과 참석자들


내빈 헌화


특히 2019.4월에 관계자들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조병세 선생의 초상화(석지 채용신1848-1941 그림)을 찾았고 어록비 제막식에 같이 공개되었다. 순국하시기 2년전인 1903년에 그린 작품이었다.

어록비의 글은 선생이 순국하시기 전에 남긴 [광무황제][각국 공사관] [전국민]에 남긴 세통의 유서중에 국민에게 남기는 부탁의 글(告國民遺囑)을 인용하였는데,

독립을 이루어 일제의 치욕을 풀도록 분발하기를 남기고 있는데 이는 세월을 뛰어넘어 자기목숨을 건 희생정신(犠牲情神)과 나라사랑의 애국정신(愛國精神) 및 나라가 위기에 솔선수범하는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명문(名文)이며 훌륭한 각성(覺性)의 글이 되고 있다.

 

순국열사 조병세 선생의 어록비

 

우리 전국 동포는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각자 분발하여

더욱더 충의를 다하여

국가를 보전하며

우리 독립의 기초를 굳게하여

잊지 못할 치욕을

씻어 줄 수만 있다면

내 비록 구천 지하에서라도

춤추고 기뻐할 터이니

각각 힘쓰고 또

힘써주기 바라오

 

전국인민에게 고하는

유촉(遺囑) 중에서

 

가평 삼충단(加平 三忠壇)

가평 하판리 삼충단(일제에 항거한 최익현,조병세 민영환)

  

조선제국의 말기에 세분의 충신이 가평 삼충단(加平 三忠壇)에 모셔져 있다. 한말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한 조병세(趙秉世1827-1905), 최익현(崔益鉉1834-1907)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제단이다.

1905년에 일제가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당시 조병세선생은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 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으나 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최익현선생은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항거중 순국하였으며, 민영환선생은 시종무관(侍從武官)이었는데 대한문앞에 나가 석고대죄(席藁待罪)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이다. 이 삼충단은 일제치하이던 1910년에 설단되었으며 1989년에 복원되었으며 매년 11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산재(山齋) 조병세 선생의 일생과 교훈

 

충정공(忠正公) 산재(山齋) 조병세 선생은 자결로 세상을 하직한지 올해가 114년이 된다. 산재기념사업회와 양주조씨 대종회 및 독립기념관이 주관,주최하여 2019.5.30.11시에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위치한 어록비공원에서 제막식이 개최되었다.

 

조병세 선생은 문신, 국 열사로 본관은 양주(楊州). 호는 산재(山齋). 현감 조유순(趙有淳)의 아들이다. 양주 조씨였으므로 음서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32살의 조금 늦은 나이에 1859(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864(고종 1) 실록청 도청 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조씨가 본격적으로 기용될 때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판서, 1889년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지내고 그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정계를 떠나 경기도 가평에 은거하였다.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대신(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때 독립협회의 주된 표적이었다. 그래서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개혁을 건의하였다. 결과적으로 의정대신이 공석이 된 고로, 내각의 회의는 부총리, 좌의정 급인 한규설이 맡게 되었다. 일종의 국무총리 대행인 셈이다.

 

190510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상소를 올리고 고종을 알현하려 했으나 저지당한다. 이후 민영환 등의 관리들과 함께 백관을 이끌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를 했으나 강제 해산, 연금당했고 다시 풀려나자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했으며, 다시 쫓겨나자 민영환이 소두(상소의 우두머리), 그렇게 여러차례 규탄 시위를 벌였다. 최후에 유서를 남기고 마지막 상경을 하여 일본군이 쫓아내자 가마에서 음독 자결했다.

광무황제는 유소를 보고 ()를 살펴서 모두 알았노라. () 특진관의 유서를 보니 더욱 찬영함을 깨닫노라, 어찌 마음에 두지 않으리오비통해 하며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내렸다.

을사늑약 이후 이완용이 참정대신과 총리를 맡았으나 개가 물어갈 직책이고 1907년 의정부 역시 폐지되어 결국 조선의 마지막 영상이었던 셈이다. 이용직(학부대신)이 그의 사위이며 1962년에는 최고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정공 조병세 선생 어록비 제막식, 독립기념관, 2019.5.30 -동영상 (유튜브)


 조범식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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