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야기)

choyeung 2008. 12. 21. 13:53

아내의 일기 -박수근화가 부인 김복순여사의 절절한 스토리 

 


그이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이다.

양구군(楊口郡) 양구면(楊口面) 정림리(井林里)에 80노령의 할아버지, 아버지 박형지(朴亨智), 어머니 윤복주(尹福珠)와 딸(그이의 누님) 세 분 이렇게 모두 여섯 식구가 부농가로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3대를 독자로 내려오는 집에서 딸은 셋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어 할아버지께서는 다른 며느리를 얻어서라도 손자를 보셔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버님의 양심은 도저히 그것을 허락지 못하셨다. 모세의 10계명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어머님께서는 항상 마음에 염려가 가득하셨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아들을 주십사고 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어머님의 간곡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또 딸을 낳을까 봐 몹시 걱정하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기도로 애원하셨다.

1914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어머님은 해산을 하시고 바라고 바라던 아들을 낳으셨다. 이 때 낳은 아들이 바로 나의 남편 성남(成南) 아버지이시다.

오랜 바람끝에 얻은 아들을 할아버지는 물론 집안식구 모두가 금이야 옥이야 하며 소중이 키웠고, 할아버지께서는 아기가 백일동안은 자리 귀를 넘지 않아야 좋다며 누구도 안고 나가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

성남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퍽이나 순해서 젖만 먹으면 늘 잠을 잤다고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성남 아버지가 백일이 되기 며칠 전, 이웃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가 오셔서 아기가 귀엽다고 아기를 안고 밖으로 나가셨는데 그것을 안 할아버님이 크게 노하셔서 이웃집 아주머니를 마구 나무라셨다는 것이다. 백일 동안 공을 드리면서 자리귀퉁이를 넘기지 않으려고 정성을 드리고 있었는데 백일 며칠 전에 자리 귀를 넘겨서 집안식구들은 모두 그 아주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원망을 하셨다는 이야기다.

아기가 세 살이 되자 어머니는 또 아들을 낳으셨다.

그 때 낳은 아들이 나의 시동생인 박동근(朴東根)이다. (1941년 7월에 신병으로 사망) 어머니는 동근이가 세살되어 또 아들을 낳으셨다. 그 때 낳은 아들이 현재 용두동에 살고 있는 성남이 작은 아버지 박원근(朴元根)이다. 3대 독자로 내려 오던 집에서 위로 딸 셋, 아래로 아들 셋의 6남매를 두게 되어 집안은 늘 화기에 차 지냈다.

성남 아버지가 다섯 살 되던 해 마을에 있던 서당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한문책을 둘러 메고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으니 웃지 못할 일도 많이 있었다. 하루는 소변이 보고 싶은데 허리끈을 미처 못 끌러서 겨울 솜바지에 오줌을 싸고 선생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 그 오줌싼 바지를 그냥 입고 집에 오는 데 때가 한겨울이었으니 오는 도중에 꽁꽁 얼어붙어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한다.

그이는 일곱 살까지 서당에 다녔고 그 해에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곱 살 되던 해는 그이에게는 불운이 오기 시작한 해였다. 그 해에 아버님께서 광산사업을 하시다 실패하였고 여름에는 홍수로 인해 모든 전답이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가세는 기울게 되었고 가난에 허덕이는 날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에 큰 누님, 둘째 누님은 출가시키고 셋째 누님은 손포가 모자라서 당시에는 흔하게 있던 데릴사위를 들여 같이 살고 있었다. 성남 아버지는 일곱 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는 잘 못했으나 미술을 잘 그렸다고 한다.

내가 결혼했을 때 그이가 1학년에서부터 6학년까지의 성적표를 보여 주었는데, 다른 과목은 전부 乙, 丙, 丁이었으나 미술만은 甲上이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 총이 없어 丙丁으로 못 나갔구려"하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성남 아버지는 처음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도화(미술)시간에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을 보여 주시는데 얼마나 즐겁고 좋았는지 그 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림을 그려서 선생님께 제출하면 꼭 벽에 붙곤 하였다. 그래서 늘 도화시간만 기다려졌고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남 아버지는 12세 되던 해 밀레의 <만종>을 보고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 후부터는 늘 '하나님 저도 이담에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 때 학교 교장선생님이 일본 사람이었는데 성남 아버지의 그림 솜씨를 알고 항상 격려를 해 주시고 가끔 집에 찾아오셔서 그림 연필과 도화지도 사 주시며 그림을 열심히 그리라고 당부하시곤 하셨단다.

어머님께서는 광산사업에 실패를 하시고는 양잠(누에치기)원으로 계시면서 지방에 나가 양잠지도원으로 활동하셨다. 그 후 봉급 생활보다는 기술업이 나을 것 같아서 시계기술을 배워 시계점을 경영하셨다. 성남 아버지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은 하였으나 늘 도와주시던 교장선생님은 단념하지 않으시고 상급학교에는 진학을 못 하더라도 집에서 그림공부를 계속하라고 재료를 사 주며 후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성남 아버지는 산으로 들로 다니며 스케치를 하고, 농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나물 뜯는 소녀들의 모습을 그렸다.


18세 되던 해,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11회 [선전]에서 처녀 입선을 하였다. 집안 식구는 물론 교장선생님과 은사이신 현재 춘천 오약국의 오득영(吳得泳)선생님 등 모든 분들이 기뻐하셨다.

그 때부터 성남 아버지는 더욱 용기를 얻어 앞으로 계속 출품할 것을 마음으로 결심하고 더욱 열심히 그리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어머님께서는 아들의 소질을 인정하시고 정신적으로라도 후원을 하시는데 비하여 아버님께서는 그림을 그리면 배고파진다고 다른 것을 하기를 바라시며 꾸짖으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머님께서는 그만 유방암에 걸리셔서 춘천 도립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어머님께서 병환에 눕게 되시어 같이 살던 누님은 그 이전에 따로 살림을 나고 성남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에 살림을 맡아 하게 되었다.

남자가 우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와야 했고, 가난해서 늘 밀을 사다가 맷돌에 갈아서 수제비를 끓여 아버지와 동생들에게 주어야 했고, 빨래도 하여야 했다. 그런 중에도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에 성남 아버지가 수제비를 얼마나 끓였던지,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가끔 수제비를 하는 날에는 당신이 뜯어 넣겠다고 우기셔서 수제비를 맡기면 나는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얇게 기계처럼 뜯어 넣으셨다.

살림하랴, 그림 그리랴, 어머님 간호하랴, 말 할 수 없는 고생을 하던 그 때의 기억에 대해 나에게, "어머님 병이 유방암으로 판명되었을 때, 부엌에 나가 일하며 어머님의 손때 묻은 그릇을 만지노라니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고 '어머님 돌아가시는데 이 그릇들은...'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남몰래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울었다.

어머님 병환은 점점 악화되어 수술을 했으나 암 뿌리가 각 세포로 퍼져서 가망이 없게 되자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집에 나와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가 성남 아버지 스물 한 살 때였다.

일본에 건너가 고학이라도 해서 그림 공부를 하려던 그 꿈이 어머님의 세상을 떠나시면서 깨어지고 말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님께 허리끈을 매어 드리면서 좋은 부인을 얻으실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단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니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남아 있는 부채는 집을 팔아 청산해도 모자라게 되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아버님이 너무 고독해 하시어서 성남 아버지가 딸 하나를 데리고 수절하는 과부를 수소문하여 새 어머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어려운 살림을 해 줄리 만무였다. 얼마 후에 돌아가신 어머님의 의복을 모두 훔쳐 가지고 몰래 가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아버님을 생각하여 또 다른 여인(과부)을 어머니로 모셨으나 역시 가난한 살림을 해 줄리 없었다. 또 다시 가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성남 아버지가 살림을 하게 되었다.

다시 성남 아버지가 살림을 맡아 하게 되었으나 그 틈틈이에도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도화 연필을 살 돈이 없어 직접 뽕나무를 잘라다 태워서 목탄을 만들어 그렸다고 한다. 때때로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이 찾아오시고 담임선생님이셨던 춘천 오약국의 오득영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격려도 해 주시고 도와주셨다.

그러나 집안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남에게 진 부채를 갚을 길이 없게 되어 집 한 채 있는 것을 반 값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리하여 집안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아버님은 시계 도구만 싸 가지고 강원도 금강산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다.

당시에 동생 동근은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수상스키도 만들고 시계, 라디오 등 못 고치는 것이 없었다. 언어에도 뛰어나 영어를 무척 잘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집이 빚 값에 넘어가기 전 뒷방에서 비행기를 만들다 그만 왜놈 경찰에게 들켜서 사상범으로 몰리게 되었다. 당시의 가슴 아팠던 일을 성남 아버지는 결혼 후에 이렇게 말해주었다.

"동생이 경찰서에 잡혀가서 경찰서에 가 보니 동생을 유치장에 가두어 볼 수는 없고 종일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집에 와 보니 눈은 쑥 들어가고 몰골은 몇 시간 동안에 중병치레를 한 사람 같았어."하시면서 그것은 지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동근이는 언도를 받아 서울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막내동생 원근은 현재 용두동에 살고 있는 누님 댁으로 보내고 나서 성남 아버지는 춘천으로 가서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때에 <일 하는 여인>(15회), <봄>(18회)등의 작품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을 하셨다.

춘천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지금 이촌동교회 목사님이신 이연호 씨, 정태화 씨와 가장 가깝게 지내셨다. 현재 전국버스조합에 부장으로 계신 정태화 씨의 말에 의하면, 춘천 약사리에서 한 1년간을 그이하고 이웃해서 지냈는데, 하루는 그이가 하숙하고 있는 집에 놀러 갔더니 하숙비를 못 내서 방안의 물 대접이 꽁꽁 얼어있는 불기 없는 방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그림을 그리고 있어 호떡으로 시장기를 채운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교우로는 김병규 씨, 김수근 씨(강원도 교육감), 김수원 씨(사망), 고광돈 씨(평택 과수원 경영)등이라고 한다. 또한 사창 고개에 있는 화방주인 김선생님이 음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때 춘천 도청 사회과에서 삼길과장(三吉課長 일본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그이의 그림 솜씨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 늘 후원을 해 주셨다. 때때로 그이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고관들에게 찾아다니며 팔아 주기도 하고 춘천에서 한번 개인전도 열게 해 주셨다. 그 후에 그분이 평안남도청으로 전근을 가시면서 그 곳의 직원으로 그이를 채용하여 데리고 가 주시기도 했다.

그 즈음 금강산(內金剛)으로 가신 아버님께서 재혼을 하셨다. 아기를 수태도 못 해본(남편과 사별) 과부였다. 시계 도구만 싸 가지고 가셔서 길거리에서 시계 수리를 하시던 중 재혼을 하신 것이다. 그때가 1936년 여름이었다.

내금강에서 한여름과 가을을 지내시고 그 해 늦은 가을 양력 10월쯤 금성으로 이사를 하시고 금성우체국 앞에 초가집을 사셔서 명신당 시계점을 차리셨다. 두 분이 사시던 중 그 해 겨울 양구 누님댁에 있던 막내 아들 원근이를 데려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 집의 윗집이 바로 나의 집이었다.

아래 윗집에 살게 되어 두 집이 늘 왕래를 하며 지냈다. 그 분 댁 식구들은 금성감리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부잣집이어서 아버님께서는 무엇을 사시든 짝으로 들여오시곤 하셨다. 해마다 원산에 가셔서 생선을 부쳐오고, 조기 철이 되면 인천에 가셔서 조기를 짝으로 부쳐오고, 가을이면 강릉에 가셔서 감을 부쳐서 집에서는 소금물에 침을 담그어 먹던 때였다.  

우리집은 친정아버님이 서른 세 살 되던 해까지 아기가 없으니 모두들 걱정하고 기다렸다고 한다. 옛날 사람이 30세가 넘도록 아기가 없으니 모두들 걱정하고 기다렸다. 게다가 아버님은 3대 독자이셨다. 정성어린 불공 끝에 어머님이 수태를 하시자 동네 모든 분들도 기뻐해 주셨다고 한다. 아버님은 경기도 포천군에서 태어나 3대 독자로 자라던 중 일찍 조실부모하시고 유산도 지니시지 못한 채 맨 몸으로 금성에 와서 자수성가를 하신 분이었다.

막달이 차서 순산을 하고 내가 태어났다. 그 때가 1922년 양력 8월 29일이었다. 내가 태어나자 아버님이 들어와 보시더니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하셨다.(처음 갓난아기는 잘못 보면 딸도 아들로 볼 수 있다.) 갓난아기를 보지 못하던 아버님과 어머님은 딸을 아들로 잘못 보시고 당시 강원도 풍습대로 머슴을 시켜 산에 가서 송침이 크고 긴 잣나무를 베어(당시 풍습은 아들을 낳으면 잣나무 송침을 하고, 딸을 낳으면 소나무 송침을 하였다.) 대문 양 옆에 치렁치렁하게 송침을 하였다. 그것을 본 이웃에서는 아들을 낳았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던 중 삼일만에 아기 목욕을 시키는데 다시 보니 아들이 아니고 딸이었다. 어머님은 물론이거니와 아버님이 퍽이나 섭섭하셔서 여비를 마련하여 금화의 친구 댁으로 가시자 무척 섭섭해 하시고 계셨는데, 그 날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질 녘에 문 밖에 인기척이 나서 내다보니 친구분들과 함께 아버님이 오셨더라고 한다.

딸이었으나 힘겹게 얻은 자식이라 금이야 옥이야 하며 기르던 중 내가 백일이 조금 지나자 어머님이 또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젖이 떨어져 암죽으로 자라게 되었다.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는데 돌이 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 다음에 또 아들을 낳았는데 그 동생은 현재 중곡동에 살고 있는 김영규(金泳圭)이다.

집에서 무척이나 남매를 애지중지 키운 탓으로, 남동생은 어려서 삼(參)을 너무 많이 먹여 다리에 열이 심하게 나서 그만 순색으로 염증이 생겨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까지 받은 일이 있다.

그러나 귀둥이 둘이 갑자기 천둥이가 되는 일이 생겨났다. 나는 금성유치원에 들어가서 2년간을 다니고, 7세 때 금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다녔는데 그 해 겨울 음력 10월 30일 나의 어머님이 유산 후 덧침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만 것이다.

어머님의 상여차가 나가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미친 듯이 우셨다.

"여보, 여보 저 어린 것들을 두고 가면 나는 어찌하라고 남겨 두고 갔단 말이요."하시면서 뒤꼍에서 혼자 우시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무척 큰 살림에 가정주부가 없어지고 나니 살림은 엉망이 되고 아버님은 속상하시어 매일 술만 드셨다. 이러던 중 친척 고모님 한 분이 집안이 말이 아니라고 서둘러서 아버님을 한 동네에 사는 열 일곱 살짜리 처녀에게 장가를 들게 하였다. 그 때 친정아버님은 42세였다. 집이 부유한 탓으로 17세의 새 어머님을 맞이하게 되었고 외할머니(계모의 친정어머님)는 시집오는 날 우리집으로 따라오게 되었다.

계모가 오셔서 아들을 둘 낳으셨다. 첫 아들이 영일(泳一 포천에서 가축업), 둘째 아들이 춘근(春根 중화동에서 건축업)이다.

아버님은 술을 무척이나 많이 드셨고, 첩도 많이 거느리셨다. 서울에서 금성관에 내려오는 기생은 모두 도맡아 놓으셨다. 내가 17세 때에도 첩이 셋이나 되었다. 집안에 물질은 풍부했으나 날마다 노름판이어서 생활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러한 아버님의 생활에 환멸을 느껴 왔다.

어머님은 여의고 나는 달이 밝은 날이면 뒤꼍 툇마루에 앉아서 달을 쳐다보며 울곤 했다. 특히 낙엽 지는 가을날이 오면 날마다 어머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울었다.

금성공립보통학교를 6년간 우등생으로 졸업하는 날 도지사 상을 받게 되었다. 상을 타는 나를 친정아버님은 창문 밖에서 보시며 친정어머님을 생각하시고 우셨고 나 또한 친 어머님을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

나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춘천여고에 무시험으로 입학했다.

내가 12세 되던 어느 겨울 밤이었다. 방에서 잠이 들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렇게 안 하고서는 잠을 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 이담에 커서 제가 시집을 갈 때에는 우리처럼 부잣집으로 시집보내지 마시고, 하루 세끼를 조죽을 끓여 먹어도 좋으니 예수님 믿고 깨끗하게 사는 집으로 시집가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 후 날마다 그 시간이 되면 일어나 하나님께 똑같은 기도를 드렸다. 14세 되던 때부터 나를 며느리로 달라는 청혼이 한 동리에 많았으며, 어느 새 나는 17세가 된 처녀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해의 김장철이었다. 계절이 과일로 감을 먹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 날 아침에 일어나 작은어머니를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나보다 불과 두 살 위인 작은어머니(첩)는 우리와 함께 살았는데 부엌에도 없었고 온 집안을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귀 기울였더니 건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틈으로 살그머니 들여다보았다. 강릉가신 아버지가 엊저녁 늦게 부쳐주신 감 궤짝에서 작은 어머니가 마악 감 하나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작은어머니는 이 일을 행여 누구에게 들킬까 봐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17세 처녀였던 나는 장난꾼이었다. 신을 신은 채 그 뒤로 다가가서 콱 하고 소리를 질렀다. 놀란 작은어머니가 나를 쫓고 안 잡히려는 나는 깔깔대면서 마루에서 땅으로 뛰어내리는 순간이었다. 아랫집 담 너머로 힐끗 눈길을 잡는 게 있었다. 그것은 키가 크고 눈이 둥글게 큰 한 청년이었다. 그는 시종 나의 이런 꼴을 담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무안했고 붉게 얼굴이 금방 달아옴을 느껴야 했다.  

그 청년이 바로 그이(성남 아버지)였다.

어제 저녁 춘천에서 금성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랫집과 우리집 사이의 담장은 아주 얕았다. 그래서 친정어머님은 우리 산에서 찍어온 풋나무를 가져다 울타리를 높이 쌓고 빈틈없이 막으셨다. 아랫집 총각이 윗집 처녀를 넘겨 본다고 철저히 담을 막으신 것이었다.

이 무렵 나에게 청혼이 두 군데서 들어왔다. 그 하나는 철원무진공사에 다니는 직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춘천 사람이었다. 신랑감이 아버지는 병원장이라는 거며 동경축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당사자는 금화군의 수의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랫집에서는 진즉부터 나를 며느릿감으로 작정하고 계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춘천의 큰 아들이 오면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이를 참이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결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더 성공해서 안정된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그이는 이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다음에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이의 부모는 윗집 처녀를 놓치면 그만한 색싯감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시며 재촉하시더라는 거다.

이러한 부모님의 성화와 또 그이 자신의 마음도 내키게 되어서 동리사람들에게 나에 관한 소문도 들어보고 또 그의 막내 동생인 원근이가 내 동생과 단짝이었던지라 매일처럼 우리집에 와서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함께 했기 때문에 동생을 통해서 내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이는 나와 결혼할 것을 결심했고 이 뜻을 부모님께 전했다.

며칠 후 그이 어머님이 직접 우리 어머니에게 이런 사연을 전했다. 예측했던 대로 우리 부모님은 펄쩍 뛰셨던 것이었다. 아니 딸을 가지고 있으니까 별꼴 다 보시겠다면서 도대체 자기네하고 우리하고 상대나 될 법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버님은 아랫집 부인이 집에 오지 못하게 하라고 야단야단 이시었다.

그래도 아랫집 아주머니(그이의 어머니)는 우리집에 자주 들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어머니와 내가 돌아가시는 아랫집 아주머니를 대문까지 배웅했을 때 아주머니는 허리춤에서 무엇을 꺼내어 나에게 넌지시 주시는 것이었다. 편지였다. 우리 아들이 복순이에게 주는 편지니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안돼요. 이런걸 받았다간 아버지한테서 매맞아 죽어요."하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건 편지라도 예사로운 연애편지가 아니니 한번 읽어보라는 것이다.

그러자 작은어머니가 그것을 가로채서 방으로 들어와 나한테 얼른 읽어보라고 했다. 편지를 펴 보니 한글이 아니라 일본어로 적혀 있었다. 옆의 작은어머니는 빨리 읽으라는 성화였고 나는 일본말을 모르는 작은어머니가 무얼 알아 듣겠냐고 했더니 그럼 번역을 해 가며 읽으라는 것이었다.

먼저 한번 주욱 읽은 나는 번역해서 작은어머니께 들려주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랫방에 할머니가 계신 것을 우리는 몰랐으며 할머니는 주무시는 척하시면서 우리들의 이러한 자초지종을 모두 귀담아 들으셨던 것이었다.

다음 날 아버님은 나를 안방으로 건너오라고 부르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버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도대체 네가 정신이 있니 없니" 하시면서 편지를 내 놓으라고 불호령이셨다. 엊저녁의 일을 할머니가 아버님께 일러주신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막 뛰면서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버님은 보통 무서운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오늘 나는 맞아 죽나보다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내방 책상 서랍에 넣어 둔 편지를 가져다 아버님 앞에 놓았다.

그것을 단숨에 읽으신 아버님은 "그래, 누가 이따위 편지를 받으라던. 응?" 하시면서 죽여 버려야 한다시며 고함을 지르심과 동시에 나를 막 때리시는 거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죽을 각오로 매를 맞고 있는데, 옆에서 보다 못한 작은 어머니가 아버님을 붙잡고 그만하시라고 말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 때문에 애 버리겠다시며 작은 어머니까지 마구 때리시는 거다.

이렇게 윗집에서 큰 소란이 벌어지자 아랫집 식구들이 모두 우리집 울타리 밑에 모여 두려움과 놀라움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성남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나오셨다는 거며, 그 때 마침 눈이 태산처럼 쌓였던지라 추위와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며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공연히 편지를 적어 보내 윗집 처녀 하나 죽인다고 후회가 컸다는 것이었다.

한참 나를 때리시던 아버님은 다시는 아랫집 여편네가 우리집 문턱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고 호령호령 하시면서, 아랫집에 대고 큰 소리로 막 욕을 하셨다.

그 후 아버님은 춘천 의사집으로 약혼을 결심하고 택일을 해서 춘천으로 보내셨다. 그러자 춘천에서는 나에 대한 예물을 바리로 싣고 오게 되고, 그 집에 지지 않으려는 우리 집에서도 갖가지 의장을 금화에 있는 가구점에 맞추고 약혼을 했다. 자연히 우리집은 결혼 준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나날의 한 저녁 나절이었다. 아버님이 계시는 사랑채와 내가 있는 안방하고는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 쪽에서 뭔가 큰 소리가 아까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귀 기울이면서 작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냐고 눈짓을 보냈다. "가만히 있어. 내가 보고 올께." 하시며 그 쪽으로 가셨는데 잠시 후 돌아오신 작은어머니가 "얘, 복순아, 큰일났다." 하신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나는 또 "무슨 일이에요." 하고 물으니 "글쎄, 얘, 원근형님(성남 아버지)이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워 있다지 뭐니." 하신다. 그래서 원근아버지가 지금 집에 오셔서 아버님하고 막 싸우고 계시더란다. "그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래 내 아들이 병신이요 뭐요. 우리를 가난하다고 업신여기지 마시오. 우리 아들이 죽으면 당신 딸은 좋을 게 뭐요.' 하시면서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은 저들의 분복(分福)에 달렸지 너무 사람을 멸시하지 마시오.' 글쎄 이렇게 막 대드시는 거지 뭐니." 작은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막 뛰었다.


한참 떠들썩하던 사랑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안채로 들어오시는 아버님의 발소리가 쿵쿵하고 울렸다.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안방 문을 여시면서 "복순아-"하고 부르시는 아버님의 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네"하고 내 방으로부터 안방으로 건너갔더니 거기 앉으라고 하신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참 담배만 피우시던 아버님이 "참 세상에 별일 다 많구나."하시면서 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셨다. "딸 하나 가지고 두 사람에게 허락을 하다니 이럴 수가 있담... 복순아, 너를 아랫집으로 시집보내기로 했단다." 하신다.

아랫집 큰아들이 병이 났다면서 "그 아버지가 오셔서 나에게 막 따지고 드니 어떡하랴. 가만히 생각하니 남의 집 장남인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니. 그래 또 승낙을 했단다. 그러니 아랫집으로 시집갈 생각을 가져라."

이러시는 아버님 눈망울은 뜻밖에도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무언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 오는 게 있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감회로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네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친 엄마 사랑을 못 받고 자란 네가 나는 늘 마음에 걸렸단다. 그래서 너를 시집보낼 땐 친 시어머님 사랑이라도 받게 하려고 친 어머님 계신 곳으로 시집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단다. 그런데 네가 시집갈 아랫집 시어머니는 서모이니 참 이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다."  

"네 신랑될 사람은 그림만 그리고 이렇다 할 직장도 없으니 앞으로 살아갈 일이 여간 걱정이 아니다. 화가는 돈이 많아서 뒷바라지를 잘 해야만 성공한다는데, 기왕 내 사위가 되었으니 앞으로 돈이 필요할 땐 서슴지 말고 내게 말해라. 될 수 있는 한 내가 뒷바라지를 해주마." "네가 시집가서 배를 곯을까 봐 걱정이 되는구나. 딸이 둘도 아니고 너 하나뿐인데, 그걸 서모 시어머니에다 가난한 집으로 시집보내게 되었으니 참 세상 일이란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하시면서 아버님은 그만 소리내어 우시고 마신다.

아버님께서는 딸을 생각하는 부성애로 우시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열두 살 때부터 조죽을 먹어도 좋으니 예수 믿고 깨끗이 사는 집으로 시집가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린 소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구나 싶어 마음 속으로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약혼 날짜를 받아 약혼식을 올렸다. 동리 여인들이 모여 와서 음식을 장만하고 약혼 준비로 우리집은 한창 바빴다. 그런데 동리 여인들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신랑이 병이 나서 좋지 않다는 것. 이것은 신랑이 죽을지도 모를 빌미일지도 모른다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설마 하나님께서 이 경사를 앞두고 죽이실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 다음날 병의 차도가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필이면 약혼식을 앞두고 병이 나셨을까. 사연인즉 이러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이는 아직 결혼할 생각을 굳히고 있지 않았었는데 부모님께서 하도 윗집 처녀와 결혼을 하라고 하시기에 담 너머로 나를 눈 여겨 본 다음 결혼할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내가 춘천으로 시집가게 되었다는 것과 그이의 집이 가난하다는 등으로 멸시를 받고 보니 여러 가지로 충격이 겹쳐서 그이는 그만 앓아 눕게 되었다. 삼일간이나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몸져누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이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찾아와 언쟁 끝에 허락을 받고서 돌아가신 다음 "얘, 수근아 됐다 됐어, 일어나 밥 먹어라. 기운을 내야 장가도 갈게 아니냐." 하셨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그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밥 좀 주세요." 해서 먹은 것이 여러 날 굶었던지라 그만 관격이 되어 이번에는 배가 아프다고 몸져눕게 되었다는 것이다. 음식이 급하게 체하였던 것이다.

시어머님 되시는 그이 어머니가 오셔서 반지와 구두를 서울 가서 해 와야 하니까 손가락과 발 크기를 재어서 달라고 하신다. 그래 재어 드렸더니 그이가 해 오실 거라고 일러주셨다.

그이가 서울 가서 약혼 반지와 구두를 맞추어 오고 저고리 한 감과 사주를 약혼식날 가져오셨다. 우리 집에서는 약혼 시계를 했다. 그날 친정아버지 친구들과 우리 가족 친척들이 모여 우리 집에서 약혼식을 하였다. 그런데 춘천의 먼저 약혼한 집에다 이런 사실을 전했더니 중매한 분이 약혼식 날 오셔서 친정아버지와 막 싸우려고 한다. "사람을 병신을 만들어도 분수가 있지 딸 하나 가지고 두 군데나 승낙을 하는 법이 어디 있소."하고 야단이다. 그래 아버지 친구분들이 그분을 잘 설득해서 진정을 시키고 결혼·약혼 준비한 손해배상을 물어주기로 하고 그 쪽과는 파혼을 하였다.

 

우리들의 결혼 날짜는 1940년 2월 10일이었다.

그이는 약혼 예물을 하러 며칠 동안 서울에 가 있으면서 불란서 자수실과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일본어로 쓴 그의 첫 번째 편지 내용은 이러하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편지를 보내오니 용서하시고 끝까지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는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 부농가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는 고운 옷에 갓신만 신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의 광산사업이 실패하고 물에 전답이 떠내려가서 우리집은 그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5세 때 서당에 다녔고 7세 때 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유방암으로 오래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어머니대신 돌보아야 했기에 고학이라도 해서 미술학교를 다니려던 꿈은 그만 깨어져 버렸습니다. 나는 춘천과 서울로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독학했습니다. 지금까지 네 번 선전에 입선했습니다. 선전에 처음 입선한 것은 내가 18세 때였습니다.

지금까지 춘천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오니 부모님께서 윗집 처녀에게 장가들라고 권하셨습니다. 나는 여러 번 거절했습니다. 내가 더 성공해서 결혼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께서 하도 권하셔서 나는 당신에 대해 내 동생 원근이와 동네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습니다. 일전에 당신이 우리 어머니와 빨래하러 같이 가셨을 때 어머니 점심을 가져간다는 핑계로 빨래터에 가서 당신을 자세히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마음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파레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과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나의 배필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 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나의 이 숨김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당신도 당신의 심정을 솔직히 적어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약혼 후 보내 온 편지 내용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당신은 모를 것입니다.

어머니 편에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답장이 오지 않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일전에 큰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여 보니 내가 보낸 편지 때문에 당신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소리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눈 속에 발을 파묻고 잠잠해지도록 울타리 밑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서 있었습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나로 인해 아버지의 매를 맞는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말로 사과를 드려야 할까요? 그러나 당신 못지않게 나의 마음도 몹시 아팠습니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 실연을 당하고 자살을 한다든가 병이 난다든가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못난 사람이라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러던 내가 당하고 보니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춘천으로 약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참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고 자부했었는데 이처럼 약한 줄이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는지요? 그 사람과 약혼을 한 당신이 내 아내가 되어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줄 알면서도 나는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를 했습니다. 당신을 내게 돌려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당신을 모델로 해서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서울 가서 당신에게 줄 불란서 자수 수실을 사 가지고 와서 보내니 고운 수를 놓아 가지고 오십시오. 지면에 다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이만 씁니다. 결혼하면 두고두고 옛이야기 삼아 하고 삽시다. 몸조심하십시오.

안녕히 

 

-세 번째 편지 내용

결혼 준비에 얼마나 바쁘시오.

조심해서 잘하지 어쩌다 손을 그렇게 많이 다쳤소. 나는 당신이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를 차리려고 고기를 썰다 손을 뭉청 베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소.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다 칼날이 당신 손을 스치는 것도 모르고... 아버지(장인영감)가 엄하시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어가 내 손으로 당신 손에 약을 발라드리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은 괴롭기만 합니다.

여기 약을 사서 보내니 잘 바르고 처매시오. 속히 낫기를 바라면서.

 

-네 번째 편지 내용

어제 저녁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왠지 저녁에 가고픈 생각이 나서 갔었더니 마침 장인도 안 계시고 큰 장모님도 안 계셔서 그냥 돌아오려고 했는데 작은 장모님께서 당신이 편도선이 부어 앓아 누워 있으니 안방에 들어가 보고 가라고 하시기는 하나 그러다 장인께서 들어오시면 또 당신을 괴롭힐 것 같아 망설였지만 그냥 발길이 안 돌아서서 당신이 누워 있는 안방에 작은 장모님 안내로 들어갔었습니다. 물론 예고 없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당신이 그토록 당황하고 불안에 떨 줄은 몰랐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한 가운데도 나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앉아 있었습니다. 큰 장모님이 들어오셔서 누가 이 안방에 들어오게 했느냐며 불쾌하게 말씀하셔서 나는 진작 일어서지 않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몹시 불안했습니다. 혹시나 또 당신이 부모님에게 꾸지람이나 받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괴로움을 받으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이제 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참 편도선 부은 건 어떤지요?

나는 아침에 당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 드렸습니다. 너무 무리를 하지 마시고 몸조심하십시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래 윗집에 살면서도 약혼시절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자유롭게 만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날도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신 틈에 작은어머니(첩)가 안방에 데리고 들어오셔서 나는 또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을까 봐 몹시 불안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가셨던 어머니(계모)가 들어오시더니 아니 누가 이 방안에 들어오라고 했느냐며 작은어머니(첩)에게 막 야단을 치신다. 모처럼 약혼 후 한 방에 둘이서 앉아 있었으나 나는 떨리기만 해서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1940년 2월 10일 금성감리교회에서 한사연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고 3일째 되던 날 우리는 금강산(내금강)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의 그 사흘 동안 그이는 하모니카로 반주를 하고 나는 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일이 꿈결같이만 느껴진다.

그 후부터 그이는 [선전]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몇 시간씩 그이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곤 했다. 그 때 내가 모델을 한 건 주로 망질하는 여인이었다. 처음 모델을 하는 거라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나는 하나님께 '이 작품이 잘 그려져서 선전에 낙선하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하곤 했다.

결혼하고 1개월 남짓 지났을 때 하루는 부모님께서 저녁에 식구들이 다 모인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옛 말에 땅 한 고랑 더 붙이지 말고 식구 한 사람을 줄이라고, 시계점에서 나는 수입 가지고는 우리 여러 식구 생계가 곤란하니 여기 있는 시계점은 둘째 아들(동근)에게 맡기고 아버님은 어머님과 내금강에 가셔서 따로 시계점을 하셔야 되겠다고 하신다. 그래 부모님께서는 내금강으로 이사가시고 금성 우리집에는 우리 둘하고 시동생(동근, 원근) 두사람,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다.

그러던 중 결혼해서 한 3개월 될 무렵 친정아버님께서 위암으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계모고 친정아버지 한 분마저 돌아가시고 보니 슬픔은 금할 길이 없고 나와 동복인 내 남동생이 제일 걸린다. 나를 가난한 화가에게 할 수 없이 시집을 보내시면서 우시던 아버님, 그림 그리는 사람은 뒷바침을 잘 해야 한다는데 곤란한 일이 있거든 와서 말하면 내가 네 남편 뒤를 밀어주마고 하시던 아버님, 나는 내 사위가 면서기라도 좋으니 직업을 갖는 것을 보았으면 하시던 아버님, 화가는 배가 고프다던데 고명딸인 너를 화가에게 보내어 배곯을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힌다고 우시던 아버님이 지금도 내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친정집은 계모가 낳은 동생 명근, 춘근 두 형제, 나와 동복 동생인 영근, 계모의 친어머니(할머니), 작은 어머니(첩), 머슴 세 사람과 식모 이렇게 살게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일도 못 되어서 평남도청 사회과 과장에게서 전보가 왔다. 평남도청 사회과 서기로 성남 아버지를 채용하게 되었으니 속히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이가 춘천 있을 때 도와주시고 평양으로 전근이 되어 가면서 평양으로 데려갈 터이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약속을 한 삼길(三吉) 사회과 과장님이었다.(일본인) 그래서 다음 날 전보를 띄우고 내금강에 계시는 보모님께 전보를 띄우고 3일만에 평양으로 그이 혼자 떠났다. 떠나던 날 시어머님께서 오셔서 나를 보고 너는 2년동안 시집살이를 하고 2년 후에 평양으로 가라고 하신다. 시어머님께서는 내금강으로 가셨다가 장남이 집을 비우니 당신이라도 있어야겠다며 1개월 남짓 지나 도로 금성으로 오셨다.

그이는 평양으로 가는 도중 기차 안에서 엽서를 띄운 후에 매일이다시피 편지가 왔다. 나도 매일 답장을 쓰느라 바빴다. 평양에서는 금성으로 그이의 편지가 날아오고 금성에서는 평양으로 내 편지가 날아가 편지 두 통이 교체하는 열렬한 우리들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결혼한지 반년도 못 되어 헤어져 있었지만 매일같이 대화는 그치지 않았으니 별로 쓸쓸함을 느끼지 못했다. 일기처럼 보내오는 그이의 편지 받는 것이 내겐 유일한 기쁨이요 낙이었다.



그이가 평양으로 가시고 1개월이 지난 후 부모님이 금성으로 돌아오셨다. 양구서 사시던 시누님이 생활고로 남편이 만주로 이민 가고 아들 둘을 데리고 친정인 우리집에 와 계셨으나 얼마 안 있다가 시누님은 신의주 침모로 가시고 조카 두 아이를 나에게 맡기고 가셨다.

그해 가을이었다. 집에 그려놓고 간 그림 <맷돌질하는 여인>을 금성에서 출품했는데 [선전](19회)에 입선되었다. 그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이는 평양에서 신문을 보고 금성 집으로 전보를 치고 나는 평양으로 축전을 쳤다. 그이는 그 작품의 모델이 바로 사랑하는 아내라는 점을 뜻깊게 느낀다는 내용과 모델하느라 힘들었지만 결과가 좋아서 말할 수 없이 기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도 하나님께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과 축하한다는 편지를 띄웠다.

그해 겨울, 그이는 보통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평양 추위에서 오버도 없이 동저고리 바람으로 견디기 어렵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를 받고 털실로 짠 굵은 털실 목도리를 풀었다. 빨강색이라 남색으로 염색하니 붉은 남색이 되었다. 쉐타를 뜨려고 했으나 실이 모자라 조끼를 떠서 평양으로 소포로 보냈다. 소포 속에 엿과 덧버선도 함께 넣었다. 조끼를 떠보낸 후 나는 안질이 나서 한동안 혼이 났다. 낮에는 들에 나가 일하고 밤에 뜨는 동안 나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 며칠 후 그이에게서 편지와 함께 사진이 동봉되어 왔다. 내가 떠서 보낸 털조끼를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면 조끼가 내 몸에 얼마나 맞는지 알 거라고 고맙다고 적어 보냈다.

그 해도 다 지나고 새해를 맞는 신년 초(1941년 1월)에 그이는 모처럼 닷새간의 휴가를 맡아 집에 돌아왔다. 휴가 기간이 끝나고 다시 평양으로 떠나는 전철선에 오를 때 나는 마침 친정아버님이 돌아가신 상중이어서 흰 옷을 입고 역에 나가야 했다.

전차가 머무는 앞쪽 5미터쯤 떨어지는 곳에 서서 나는 마악 경적을 울리며 떠나는 차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정성껏 전송 인사를 올렸다. 차는 벌써 한 2백미터쯤 철교 근처를 지나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상상하면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다.

 

일곱 살 때 모친을 여의고 계모와 엄하기만 부친 밑에서 자란 나는 늘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달 밝은 겨울 밤이면 뒤꼍 툇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결혼을 하고서야 잃었던 정을 되찾은 셈이다.

그이는 나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 주셨는지 마치 잃었던 보물이라도 얻은 양 애지중지 보살펴 주신 것이다. 또 너무나 진중하시고 점잖은 분이어서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머니 같고 오빠와도 같은 분으로 한없이 존경의 념(念)을 갖게 하는 분이었다.

다음날 그이에게 엽서가 날아왔다. 전차 안에서 적은 글이었다. 그 내용을 대충 간추리면 차는 벌써 당신 곁을 멀리 떠나고 있는데 당신은 그 때까지도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있더라는 것, 당신의 그 정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차 안의 손님들이 당신이 그치지 않고 절을 하는 것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고 웃더라는 것, 그러니 앞으로는 너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등이었다.

그 무렵, 나의 친정집은 큰 기둥이시던 부친의 별세로 풍지박산이 되다시피 하였다. 25세의 젊은 계모는 그녀의 친구 남편과 눈이 맞아 동거생활에 들어가야 할 판국이었는데 내 친동생 영근이가 눈의 가시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재산을 갈라 동생을 내쫓을 심산으로 우리 내외까지 비방하고 다녔던 것이다.

이러한 저간의 친정집 사정과 답답한 심정을 자세히 적어 그이에게 편지를 띄웠다. 곧 답장이 왔다. 터무니없는 말을 듣고 분할 터이지만 맞서지 말고 믿음으로 참으라, 우리의 분함이나 억울함도 모두 하나님이 아시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의 재판을 해주실 것이니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위로의 사연이었다.

결국 법정 문제로까지 번져 친정집의 재산분배 싸움은 미성년자인 동생에게 얼마간 배당된 재산과 함께 동생 영근이마저 누나인 내게 떠맡겨졌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시부모님과 시동생을 모시고 넉넉지 못한 생활을 꾸려가

며 시집살이를 하던 나의 심적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편히 잘 수 있는 방 한 칸 제대로 못 갖춘 시집살이에 동생까지 떠맡은 나는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이러한 괴로운 심정을 호소할 데라고는 그이밖에 없었다.

그이가 몸담고 있던 직장 과장님의 배려로 동생 영근이와 시동생까지 한꺼번에 평양에 취직이 되어 떠나보내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그러나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하숙비 충당하는 것만으로 남을 것이 없는 그들 생활의 고충을 듣고 시어머님은 아무래도 내가 가서 뒷바라지를 해야겠다고 하시며 평양에 갈 것을 종용하셨다. 그이에게 그런 사연을 편지로 전해드렸더니 방을 준비하고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답장이 왔다.

그이와 나 사이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 왕래가 계속되었다. 우체부까지 "참들 너무해요. 편지란 가끔씩 하는 거지 이렇게 매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우스갯소리를 건넬 만큼, 또 시어머니 조차도 "도청에서 타는 봉급가지고 우표값도 당하지 못 할 테니 매일하는 편지 끊으라고 전해라"고 하셨을 만큼, 그 사실을 들은 그이는 편지봉투 속에 우표 30매를 함께 넣어 부치시면서 시어머님께 이런 전갈을 띄워왔다.

'어머니, 제가 매일 편지를 해서 걱정하시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표는 도청 것을 쓰고 제 돈으로는 사서 쓰지 않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드는 우표값이 염려가 되신다면 제가 늘 계속해서 우표를 보내겠어요.'

우표값 걱정은 말고 계속 편지하라는 그이의 부탁과 함께 남편이 매일 편지를 하더라도 너는 가끔씩 하라는 시어머님의 당부 때문에 나는 어찌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시어머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니 그이가 편지를 기다릴 것이고 그이의 뜻을 따르려니 시어머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겠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다 못해 새벽에 전등불을 얕게 내려놓고 몰래 편지를 써서 이웃 아이들을 시켜 몰래 우체통에 넣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바로 우리집은 금성우체국 앞인 데다가 시계포 가게라 유리문으로 우체국을 드나드는 것이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에 시어머님께는 죄송한 일이었으나 그런 속임수를 쓸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것도 모르시는 시어머님은 자신의 당부를 그대로 이행하는 걸로만 아시고 흡족해 하셨는데 마음 속으로 나는 늘 죄송스러운 생각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매일 편지를 써 보내곤 했다.

방이 마련되었으니 올라오라는 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가 신접 살림살이를 꾸민 것은 무더위가 물러가던 9월이었다. 시어머님이 주시는 20원으로 밥통, 물통 등 간단한 식기와 간장, 된장 등 속을 꾸려 가지고 사글세 월 12원짜리, 사방 6자되는 좁은 방을 얻어 우리 내외와 시동생 등 4식구의 살림을 차렸다. 우리가 살던 집은 평양 기림기 창동교회 남자 집사님댁 문간방이었다.

그이가 타오는 봉급 32원으로 방세를 떼고 나면 항상 적자였다. 두 동생의 봉급에서 얼마간 쪼개고 나머지는 내가 도울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쓰던 비행모(털실로 짰음)의 일감을 맡아 낮부터 시작해서 밤까지 해 20원을 모아 그 해 겨울 김장을 무난히 해댈 수 있었다.

겨울을 채 나기도 전에 시댁에 있던 시누님의 아들 둘, 그리고 시어머님의 조카까지 얹혀 갑자기 식구가 7명으로 불었다. 그나마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좁은 단칸 방에 살림 기구와 그림 도구, 게다가 7명의 인원이 북적대니 밤의 잠자리는 몸을 뒤척일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 일하러 나가는 식구들으 점심을 싸느라고 부산했지만 나 하나만은 항상 점심을 못 먹고 배를 곯았다.

그 좁은 방에서 그이는 직장이 쉬는 일요일마다 [선전]에 낼 그림 그리기에 골몰했다. 우리 모두의 유일한 소망은 그이가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로 대성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되도록 전력을 기울여 내조하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토요일이면 본정화방(本町畵坊)에 가서 모아 두었던 뜨개질한 돈을 털어 화구도 사 오고 정물 그림에 필요한 꽃도 사오는 등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돈이 떨어지면 시집갈 때 가지고 온 옷감까지 팔아 그이의 그림 그리는데 지장이 없도록 보살폈다.

나는 첫아기를 가지게 되었다. 다음해 8월에 첫아들을 낳았다. 임신 중에도 나는 그이를 위해 모델이 되곤 했는데 관리 생활을 하는 그인지라 일요일을 빼면 그림 그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삭이 된 몸으로 나는 맷돌질하는 여인 역(役)의 모델로 온종일 앉았다가 저녁 때 일어서려면 다리가 온통 마비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몹시 미안한 표정으로 그이는 "이제 이 작품이 [선전]에 당선만 되면 당신도 보람을 느낄 거요."하며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 작품이 정작 [선전]에 입선이 되자 일본인 신문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 기사가 신문에 났다. 그이의 직장 상사인 일본인 과장님 내외분도 너무너무 기뻐하시며 우리 내외를 자기집으로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어 주시기까지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인이 [선전]의 등용문을 뚫기란 좀체로 쉬운 일이 아니던 때였다. 일본인 화가들의 그림이 우선적으로 걸리는 것이 원칙이다시피 했는데 그 난관을 극복하고 그이는 [선전]에 입선한 것이다.

그 해 8월에 첫아들 성소(成沼)를 낳았으니 경사가 겹친 거나 다름없었다.(그 아이는 7살때 뇌염으로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3대 독자인 집안에서 세 해가 지나도록 산기가 보이지 않아 시아버님께서 새 며느리를 구해야겠다고 그이에게 말씀하셔서 내가 걱정이 되어 울기까지 했고, 그이는 아이가 없어도 당신 하나로 만족한다고 위로를 하던 처지였으니 그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출산 전보를 받고 시댁 양친께서 아기 옷과 포대기를 사가지고 허겁지겁 손자를 보러 오셨다.

그나마 식구가 하나 더 는 셈이었다. 여덟 식구가 좁은 방에서 지내는 걸보다 못해 주인집 아주머니가 다락을 빌려주어 동생 둘, 시어머님 조카까지 세사람의 잠자리를 그것으로 해결되었다. 과장님 부인이 산모를 위해 꿀을 사다 주셨다. 또 이웃집 아주머니가 우리의 궁색한 생활이 딱했던지 자기집 방 한 칸을 내 주었다. 새로 이사간 방은 역시 단칸이기는 하지만 꽤 널찍해서 그런대로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방세도 싼 편이었고 여러 가지 친절히 보살펴주시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신세를 갚을 도리가 없어 생각다 못해 그 집 빨래며 여러 가지 힘들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여자의 속셈은 딴 데 있었던 것이다. 우리 그이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친절을 다 베풀었던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은인으로만 떠받들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남편이 첩살림을 따로 차려 나가고 남매만 데리고 혼자 살던 그녀는 여름철 저녁마다 화투 놀이를 하자며 우리 가족들을 안방으로 꾀어내곤 하였다.

하루는 내 친동생이 주인 아주머니와 대판 싸우고 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저 여자가 매형을 유혹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화투놀이를 하며 거는 수작이 차마 말하기 거북할 정도라는 것이다. 성남아버지께 자초지정을 물었더니 사실이 그렇다고 시인하면서 이사가실 것을 서둘러 종내 그 집을 나오고 말았다.

기림시 시장 옆으로 셋방을 옮기고 첫 애가 3살 되던 해에 둘째 아이 인숙(仁叔)(현재 고등학교 미술교사)을 낳았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대동아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여서 콩깻묵과 약간의 쌀을 배급받아 사는 월급쟁이 살림 형편으로 항상 점심을 거르면서 살았다. 아기는 자꾸 젖을 빨아대고 내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김치를 제대로 담글 형편이 못되어 중국 사람들이 심어서 파는 야채를 사다가 시장에서 되팔기는 차마 못하고(아기 아버지 체면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 싼 값으로 넘기고 남은 몫으로 우거짓국을 끓여 배를 채웠다. 때로는 배급 물건을 타다가 몰래 파는 일까지 했다.

모진 생활고에 양산 하나 장만할 겨를이 어디 있었을까. 뙤약볕 밑에서 갓난 아기를 그냥 업고 다니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가 양산을 하나 들고 들어왔는데 웬지 돈이 없는 그이의 형편을 아는 나는 캐물을 수 밖에 없었고 그이는 아무 소리 말고 어서 쓰고 다니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데 그이의 표정에서 몹시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엿보여 석연치 않은 느낌과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대로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한사코 사양하겠다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지 비로소 그이는 사실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단신이 성소를 업고 뜨거운 햇볕 속에서 그냥 양산 없이 다니는데 너무도 가슴 아팠으나 양산을 살 돈은 없고 해서..." 이렇게 머뭇거리면서 그이는 말 끝을 흐렸다. "이 양산은 어느 상점에서 훔쳐 온 것이라오."

 

나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가슴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양산을 훔칠 만큼 처자를 생각하는 그이의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저렇게 마음 약한 분이 그런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다니...

"안돼요. 나는 그 양산을 쓸 수가 없어요. 단신의 마음은 백 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그것은 안돼요. 당장 내일이라도 도로 가져다 주세요." 나는 단호하게 잘라 말하면서 애원했다. 그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당신이 아기를 업고 뜨거운 데를 다니는 것 차마 볼 수가 없었어. 이건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상점에서 훔친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 상점에서 훔친 것이라오. 그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 우리나라에 와서 마구 떼돈을 버는데 그까짓 것쯤 어때요." 하시며 그이는 그냥 쓰라는 것이다. 일본사람의 것이건 어떤 것이건 훔친 물건이라는 그 사실이 문제며 훔쳤다는 사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결국 그이는 다음 날 훔쳐 온 물건을 상점에 도로 돌려주고 돌아왔다. 그렇게 정직하시고 착한 분이 도둑질을 하시면서까지 내게 배푼 그 뜨거운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한없이 뜨거운 사랑...

그 해 겨울, 하루는 적기(敵機-일본인의 표현을 빌면)가 와서 평양역 앞에 폭격을 가했다. 그래서 당국의 명령으로 어린애 달린 부녀자와 노인은 시골로 '소개'(피난)시키라는 지시가 내려 성남아버지와 동생만 평양에 두고 나는 애들만 데리고 시부모님이 계시는 금성으로 피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그이는 손수 밥을 지어 드시면서 직장에 다니셨고 나는 시댁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날을 보냈다. 그러는 가운데 8.15 해방을 맞은 것이다.

해방 3개월 되던 11월에 그이가 직장인 평양도청을 그만두고 덩그러니 혼자 금성으로 돌아오셨다. 그이의 동생 원근이는 평양에 남아 있었고 내 친동생 영규는 그 곳에서 군인으로 징집되어 만주로 훈련받으러 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주위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소련군의 진주와 김일성 공산정권의 수립, 그리고 이북 단독으로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그 때문에 내 친정집은 그 많은 토지를 전부 몰수당하고 집 한 칸만 남아 계모가 낳은 동생 둘을 데리고 사시는 친정 할머님의 생활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그 충격으로 자리에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던 할머님은 끝내 세상을 하직하고 마셨고 동생 둘은 또 우리 시가에 얹혀 지내게 되었다.

그이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취직이 되어 궁색한대로 얼마간 여유가 생겼다. 금성에는 '십리장림(十里長林)'이라 불린 긴 숲의 고속 터널이 있었는데 그림 그릴 소재가 많아 그이는 퇴근길이나 짬이 나는 대로 그 숲에서 노상 스케치를 하곤 하였다.(그 그림들은 전쟁 중 폭격에 모두 타버려 서운하기 이를 데 없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금성 우리집 앞 큰 길로는 수없이 대열을 지어 지나가는 탱크 행렬이 보였다. 그것이 끔직한 6.25전쟁을 일으킬 조짐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해 봄 금화군 대의원 선거와 금성면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우리 내외의 결혼주례를 서 주셨고 우리 내외를 항상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신 한사연 목사님은 당시 민주당(이북에는 공산당과 민주당의 두 당이 있었음)의 지역구 당수로 계셨는데 우리 내외도 그 당에 몸을 담고 있었다. 민주당 추천으로 그이는 군 대의원 후보로, 나는 면 대의원 후보로 입후보하여 똑같이 당선이 된 것은 행운이면 행운이라 할까. 그러나 목사님이 주동이 되어 교인들로 뭉친 우리들은 항상 감시의 눈을 피해 남쪽 방송을 몰래 듣고 있었다. 사상적으로도 대한민국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교인들은 정치보위부의 요시찰 명단에 올라있어 유사시에는 제일 먼저 학살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 자신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하루는 우리집에 편지가 한 장 날라왔다. 내용을 뜯어보니 내일 저녁 막차로 원산에 있는 동지 한 사람이 금성으로 갈 터이니 그곳 동지들을 모두 소집하여 만나자는 요지였다. 무언가 직감적으로 집히는 데가 있어 그이에게 이 편지의 내용은 아무래도 빨갱이들이 조작한 것 같으니 내무서에 가지고 가서 신고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네들이 파 놓은 함정에 걸릴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이는 편지 내용을 액면 그대로 고지식하게 믿으려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한목사님께 들고 가서 상의할 수 밖에 없었다. 한목사님도 내 의견에 동조하셔서 그이는 편지를 가지고 정치보위부에 출두하여 신고하였는데, 그네들은 우리들의 모임의 단서를 얻으려고 그런 공작을 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내색은 않은 채 '동무 참 잘했소'라는 말만 반복하더라는 것이다. 나의 기지로 저들의 흉계에 말려들지 않고 죽음을 모면한 일. 이러한 판단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믿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후에도 항상 감시의 눈은 우리집 방문 곁은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리집 방문 곁에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와서 잠복하며 대화를 엿듣는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툭하면 그이를 연행하여 하루 저녁을 지새며 취조하고 다음 날 아침 내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면서도 그이를 함부로 구속하지 못했던 것은 군 대의원이라는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은 치열해져서 유엔군이 동원된 후로는 매일 폭격에 시달려야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시골로 피난 가는 행렬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교인이며 요시찰 인물 명단에 오른 우리는 필경 저네들이 불리하게 될 때 우리들의 운명이 어떠한 지경에 놓이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의논 끝에 우리도 이 기회를 틈타 '피난'이라는 명목으로 저네들의 마수를 피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몇 십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저녁 빨갱이들이 우리가 피신해 있는 집에 들이닥쳤다. 그이는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내려와 주무셨는데 용케도 그이가 있는 시각에 찾아온 것이다. 문을 열라는 그들의 고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경황 속에서도 먼저 남편을 빼돌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끌려고 "누구세요. 누구세요. 옷을 입고 문을 열께요"하면서 뒤쪽 방문으로 그이를 내보낸 후 침착하게 문을 열었다. 따발총을 멘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남편을 내놓으라고 야단이다.

 

"남편은 원산으로 가고 나만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 있어요."라고 둘러대니까 그들이 막무가내로 남편을 내놓으라는 요구만 되풀이한다. 모든 정보를 다 입수하고 왔으니 명령을 거역할 경우 너를 대신 죽이겠노라고 하면서 총부리를 내 가슴에 들이댄다. 그이 대신 내무서로 연행되어 간 나는 이틀 동안이나 그들의 온갖 고문을 받으며 수모를 견뎌야 했다. 2살짜리 아기(남편이 월남 후 이북에서 죽은 성인(成仁))를 품에 안은 채. 그이는 산에 왜정 때 징용을 피하려고 누가 만들어 놓은 무덤같이 생긴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며칠을 버티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매일매일 밥을 날라다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금성에 다녀온 동리 아주머니 한 분이 숨가쁘게 뛰어오면서 읍에 남쪽 국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분간 못할 몽롱한 기분으로 산으로 달려가 그이에게도 들은 소식을 전했다.

"이제 살았다!" 그이의 신음소리에 가까운 탄성, 그리고 내 손을 잡은 그이와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러운, 너무나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피신한 집으로 내려온 우리 내외는 천장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떠내 들고 동네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금성읍으로 들어가 국군병사를 얼싸안고 대한민국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모두들 "이젠 살았다! 이젠 살았다!"를 연발하며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비워 두었던 금성 우리집은 용케 폭격을 면했으나 아버님 같으신 한목사님과 두 아드님,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저네들에게 붙들려 총살을 당한 후였다.

그렇게 고대하던 국군의 북진을 못 보시고 억울하게 학살을 당한 후였다. 그렇게 고대하던 국군의 북진을 못 보시고 억울하게 학살을 당하신 그분들을 생각하고 목이 메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이는 '국군환영'이라 쓴 포스터와 클랭카드를 그리고 만들어 온 거리에 붙이고 달며 다녔다. 여러 곳으로 피난했던 우리 동지들도 모두 금성으로 모여와서 각 행정기관을 복구하고 자발적으로 국군의 일을 도왔다. 나는 새로 조직된 '애국부인회'의 회장직을 맡았고 그이는 그이의 그림솜씨를 발휘하여 선무공작에 필요한 선전포스터 등을 모두 맡아 처리했다. 내 친정집 큰 동생은 남한으로 간다며 떠났고, 둘째 동생은 그가 다니던 축산전문학교에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열심히 뛰어다니며 이렇게 일하는 가운데 생각지도 않던 일들이 우리들을 다시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정보란 남쪽으로 밀려 간 인민군 패잔병들이 다시 몰려와 금성읍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모두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 날 밤 산발적으로 총소리가 들리더니 그 이튿날 안개가 자욱히 낀 새벽녘에 놈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또 다시 소를 끌고 보따리를 인 피난민의 물결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밖에서 밤을 새고 온 그이는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우리도 피난 준비를 서두르라고 말씀하신다.

세 아이 중 4살짜리 막내만 업고 두 아이는 걸어서 피난길에 나섰다. 그이는 나와 같이 동행하려 했으나 나는 남편의 신상을 생각하고 그이만 따로 행동할 것을 제의했다. 애들 때문에 걸음이 늦춰지면 잡히게 될 것이고 잡히면 부녀자인 나는 몰라도 남편은 담밖에 처형되리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냥 두고 어서 혼자 뛰세요"했더니 그이도 수긍하고 저만치 저만치 논둑 길로 총총히 사라지신다.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얼마쯤 걸으니까 "손들어"하는 소리가 들린다. 패잔병 두 사람이 나타나서 총을 겨누며 다가서더니 처음과는 다른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이렇게 말한다.

"아주머니, 왜 도망을 가십니까. 우리는 인민군이에요. 국방군 놈들은 다 도망가고 없어요. 이제 우리가 여기 있으면 참 좋은 세상이 될 텐데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가지 말고 도루 들어갑시다."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끌려 금성읍으로 들어왔다. 와 보니 우리집은 벌써 놈들의 수색을 받아 책가지며, 옷 등은 흩어져 있었고, 국군에 협력한 모든 증거물은 차입해 가 버린 후였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남편과 동생들의 안전이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다. '다만 잠깐이라도 그이와 동생들과 만나 그들의 생사만 알고 죽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다음 날, 금성국민학교 교정에서 인민재판이 있다며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국군이 들어왔을 때, 빨갱이 체포위원장을 붙잡아 총살시킨 사람을 되잡아 총살을 시켰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도 총살을 당한 것이었다. 이런 소름 끼치는 일을 목격하는 가운데 동네 아이들을 앞세우고 '빨지산'이라 불려진 빨갱이 대원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당신 남편이 국군의 앞잡이로 포스터를 그려 붙였지요?"하는 그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니까 남편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다. 남편의 행방을 모른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닦아세우며 내무서로 끌고 가서 또 한차례 고문을 당해야 했다. 저네들의 회유, 협박, 고문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으나 나의 태도가 시종일관이자 그들도 어쩔 수 없었던지 석방시키고 만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에는 또 인민군 병사와 정치보위부원이 다녀가고 큰 트럭이 와서 우리집 재산을 몽땅 몰수해 갔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빨지산' 한 사람을 집 주변에 잠복시켜 놓고 계속 감시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뵙는 노인 한 분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온 노인이 내게 전달하는 말은 이러했다. 남한으로 간다며 떠난 시동생 원근이가 자기집에 숨어있는데 그 문제로 의논하러 왔다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서 살기를 바랬던 시동생이 월남에 실패했다는 소식에 실망하면서도 한편 살아 있다는 데 기뻐하며 노인의 인정에 감사했다. 그 무렵 인민군이 주둔하면서 붙은 포고문에는 김일성 특명으로 숨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국군 치하에서 무슨 일을 했건 자수하면 너그러이 용서해 준다는 내용이 있어 우선 시동생을 자수시킬 것을 결심했다.

동서와 함께 시동생이 숨어 있는 집에 가서 몰골이 말이 아닌 그를 데리고서 즉시 자수시켰다. 막상 자수시키고 나서의 나의 불안은 말이 아니었다. 요행히도 내무서로 갔던 시동생은 몇 시간이 안 지나 돌아왔는데 그의 말인즉 별다른 죄목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저네들의 술수와 책략을 너무나도 잘 아는 우리는 그것으로 안심할 수가 없어 시동생 등은 일단 다시 피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시동생 가족이 피신한 곳은 금강산 쪽이었다. 후에 들은 소문으로는 그 다음에 자수한 사람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하니 얼마나 얼마나 현명한 처사였던가. 나와 애들만 금성에 남아 있었으나 도무지 살 길이 막연하였다.

가짜 빨갱이 노릇을 하는 분이 노동당원의 눈을 피해 밤이면 식량과 소금을 가져다 주며 박선생님 만날 때까지 아이들과 꿋꿋하게 살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 후 인민군이 주둔하여 몇 개월이 지났는데 매일 남쪽 비행기가 폭격을 가해 도저히 더 머물 수가 없어 주민들에게 피난령이 내렸다. 그 때 금강산 쪽으로 피신했던 시동생(원근)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금성으로 돌아와 우리는 함께 8Km 떨어진 시골로 피난했다.

 

그 곳에 전부터 아는 집이 있어 그 집 방 한 칸을 얻어 기거하였으나 돈으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생각다 못해 성남 아버지가 염색을 연구한다고 물감을 많이 사 놓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시골로 가지고 다니며 식량과 교환하여 겨우 연명을 하였다.

그런데 날로 폭격이 심해져 금성은 집이라고는 한 채도 남지 않고 다 타 버린 폐허가 되었고 금성 가까운 시골도 폭격이 시작되어 우리는 견디다 못해 그 곳에서 북쪽으로 한 50리 떨어진 곳으로 피난했는데 모든 행정기관들이 이 곳으로 피난해 오자 집중적으로 폭격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더 북쪽으로 들어가면 남쪽으로 도망갈 기회가 영영 없게 되니까 죽으나 사나 중공군이 있는 금성으로 가서 방공호에 숨어 있다 월남할 기회를 보자고 의논하여 금성 뒷산인 성산 밑에 군인들이 파 놓은 방공호로 피신했다. 그 곳에 오니까 민간인이라곤 세포위원장과 도반장 뿐이었다.

우리는 방공호에 몰래 숨어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는 나가라고 독촉하였다. 그러던 중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그 마을 도반장만 잘 구어 삶으면 될 것 같아 시동생에게 이렇게 시켰다. "우리 형수님이 혼자 되었는데 도반장님 첩으로 들어가 자식이라도 낳아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좋아했다. 그 도반장은 아직 자녀를 두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약점을 이용하였다.

시동생이 "형수님이 말을 잘 안 듣는데 서서히 내가 설득하여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다."했더니 도리어 갈까 봐 안달하여 폭격에 죽은 쇠고기를 날마다 갖다 주며 친절히 해주었다.

 

그 때 내 생각은 내가 직접 피해를 입지 않는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편을 찾아 월남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제트기가 번갈아 날아와 폭격을 가해 피해가 말이 아니고 중공군들도 놀라 50리 밖으로 후퇴하였으나 우리가 있는 방공호는 무사했다. 그리고 먼저 피난했던 그 동네 피난민들은 열병(장질부사)을 앓아 온 식구가 다 죽은 집도 있었으나 우리집은 무사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보호하심이다.

그 날 저녁 나는 시동생 내외에게 이 기회를 놓치면 월남할 수 없으니 지금 떠나자 하였더니 주저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소. 남편 찾아다가 죽으면 죽고 다행히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 떠납시다."라고 간곡히 설득하여 어둑한 무렵에 떠났다. 그 때 인숙이는 8살이고 성남은 4살이라 인숙이는 걸었지만 성남이는 업고서 어두운 밤길을 남쪽을 향해 간신히 걸었다.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5리쯤 남쪽을 향해 갔는데 비행기가 조명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쏘아댔다. 우리는 땅바닥에 납작 업드려 폭격이 중지되기를 기다렸다 다시 나아가는데 유엔군이 북쪽을 향해 환하게 불빛을 비추어 놓았다. 불빛을 향해 걸어가다 나는 깊이 파 놓은 방공호에 빠졌는데 언제 기어 나왔는지 나도 모르게 발길을 떼어놓고 있었다. 금성에 남대천이라는 강이 있는데 저 강쪽에는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고 강 이쪽에는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다. 우리는 남대천만 건너면 살 수 있었다.

 

남대천 근방까지는 무사히 왔으나 남대천을 건너는 것이 큰 일이었다. 물 속에 있는 돌에 이끼가 끼어 발만 잘못 디디면 미끄러져 넘어진다. 물소리를 듣고 금성에 있는 중공군이 총을 내려 쏠까 봐 몹시 두려워하며 물을 건넜다. 남대천을 다 건넌 후 잔디밭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조금 안도의 숨을 쉬며 불빛을 따라 다시 걷고 있노라니 동서가 "아이구 따가워"하며 "형님 여기 전기 철망이 있나 봐, 철망에 찔렸어요"라는 바람에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동서의 발을 보았더니 전기 철망이 아니라 가시나무였었다. 마음을 놓고 3백 미터쯤 왔을 때 시동생(원근)이 "아주머니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휘발유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가만히 동정을 살피고 가십시다."하고 얼마쯤 걸어가는데 난데 없이 옆구리에 "얏"하고 총부리를 들이대며 나는 기절을 해 뒤로 나자빠져서 보니 키가 크고 둥근 바가지 모자를 쓴 유엔군이다.

너무도 반갑고 기쁘지만 영어를 할 줄 몰라 생각나는 대로 유엔군 만세를 부르니까 오케이 한다. 그래도 죽인 것만 같아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니까 또 오케이 하더니 한국 군인 통역장교를 불렀다. 통역장교는 우리를 보더니 어디 있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느냐며 놀라하였다. 나는 중공군이 있는 성산 방공호에 잇다 왔다고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며 지뢰를 그렇게 많이 파묻어 놓았는데 이 식구들이 어떻게 지뢰도 안 밟고 왔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남대천 건너서부터는 탱크 지나간 자리를 밟고 왔다고 하니 참 지혜롭게 빠져 나왔다며 여기는 최전방이니 조용히 하라고 하며 큰 구덩이(방공호)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였다. 방공호에 있으니 미군들이 어떻게 연락되었는지 담요를 갖다 주고 어린애들은 데리고 용케도 왔다며 위로해 주었다. 방공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 무서운 사선을 무사히 넘어와 유엔군 품에 안기니 참으로 꿈만 같고 감개무량한 데 앞으로 성남 아버지와 동생들을 어떻게 만나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방공호 안에서 뜬 눈으로 새우고 먼동이 틀 때 미군들이 레이션 박스를 갖다 주면서 먹으라고 했는데 이북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아침 8시쯤 되어서 한국 통역장교가 나를 지프에 타라고 하여 가니까 미군장교들이 있는 천막으로 데리고 갔다. 그 장교들은 지도를 펴 놓더니 어디에 중공군이 숨어 있으며 어디에 무기를 은폐시켜 놓았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그 지도를 들여다보며 자세히 본대로 다 가르쳐 주었더니 도움이 많이 되겠다며 고마워했다. 그러더니 나를 또 차에 태우고 미군, 국군 장성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 지도를 펴 놓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나는 자세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설명을 해 주었더니 한 미군이 지도 보는 법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나는 간첩인가 의심이 나서 물어보는 것 같아 여학교 다닐 때 배웠다고 하며 나는 예수 믿는 크리스천입니다 하니까 미군이 오케이 하면서 대단히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피난민 수용소까지 잘 인도해주고 배급도 타게 해주고 피난민증도 해주라고 지시하여 식구들 있는 곳으로 오니까 트럭에 태워서 양구까지 오니까 계란 가루로 반찬을 만들고 흰 쌀밥을 지어 주었다. 그 곳에서 잘 쉬게 하고 또 트럭에 태워 춘천 피난민 임시 대피소에 데려다 주었다. 그곳에 오니 주먹밥을 주어서 잘 먹고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서 "누님!"하는 남자 목소리가 나서 무심코 돌아보니 내 친정 남동생 영일이 동창생이었다. "누님, 어떻게 살아오셨어요"하며 지금 서울 창신동 국제 택시 뒤에 영근이 형님이 사는데(영근이는 내 큰 남동생이다. 지주의 아들이라 6.25전에 남하해 결혼해 살고 있었다.) 영근이 형네 집에 영일, 춘근, 매형(성남 아버지를 말함)이 와 있으며 누님의 소식을 몰라 매형은 매일 신문만 사서 보면서 울고 있다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남쪽으로 오기는 했으나 남편과 동생의 소식을 몰라 걱정했는데 이 소식을 들으니 얼마나 기쁘고 그저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고 싶었다. 동생의 동창생인 군인은 춘천에서 한 경찰관을 시켜 우리를 안양 피난민 수용소에 데려다주고 배급과 피난민증을 해드리라고 당부해 주었다. 우리는 그 경관을 따라서 기차를 타고 춘천역을 떠나 서울 청량리역에서 도착하게 되었을 때, 내가 창신동에 나의 동생들과 남편이 계시는데 여기서 우리를 내려달라고 부탁하니 그 경관은 "아주머니는 이북에서 와서 피난민증 없이 다니다 걸리면 간첩으로 오해받고 또 식량배급표도 안양수용소에 가야만 발급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한강을 자유로이 도강하는 줄 알았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안타깝고 초조하였지만 도리 없이 안양 피난민 수용소에 가서 피난증과 배급표를 받았다.

우리들은 폭격에 파괴가 된 학교 건물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단벌 옷으로 물에 빠지고 산을 넘고 하여 가시에 치마는 찢어지고 머리에는 이가 말할 수 없이 많아 거지라도 그런 거지는 없었다. 양력 10월 하순께라 날씨는 추운데 이불이 있나 담요가 있나 정말 남쪽에 와서 얼어 죽게 생겼다. 피난민들에게 사정을 해서 배급 쌀과 솥을 얻어다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해 소금으로 반찬을 삼았다. 여기에 와서도 도강을 못한다니 아이들을 얼려 죽일 것만 같고 하도 답답해서 동서와 같이 피난민들 중에 우리 아는 사람이 있나 살펴보기로 하였다. 피난민들 사는 데를 돌아다니는데 누가 "김선생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무심코 돌아보니 금성보통학교 동창생인 조성진(趙成鎭) -그 때는 남녀 공학이었다- 이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아니 이게 웬일이냐고 한다. 그분은 거지같은 모습을 보고 더욱 놀라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 어디 사느냐고 물었더니 국군이 후퇴할 때 철원에 있다가 트럭에 실려 남하아여 지금 피난민 수용소에 조그만 움막을 짓고 산다며 어디 사느냐고 하였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지금 저 부서진 학교 콘크리트 바닥에서 애들을 데리고 있는데 여기 와서 다 얼어죽겠다고 하였더니 성진이 하는 말이 어른들보다 아기들 때문에 안되겠다며 자신의 움막은 세 사람밖에 못 자는데 아기들은 자기네 부부 자는 데서 끼어 자게 하고 어른들은 부엌에 깔개를 깔고 앉아서라도 자라고 하였다. 나는 너무나 고맙고 염치 불구하지만 아이들을 얼려 죽일 수 없어 그 움막으로 가 인숙이와 성남이는 그 집 부부와 딸아이 자는 틈에 끼어 자게 하고 우리는 부엌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서 잤다.

그 집에서 편지지와 봉투를 얻어 지금 국제택시 뒤 창신동 김영근 앞으로 우리가 지금 사선을 넘어와 안양수용소에 와 있으니 데려가라고 편지를 내고 열흘이 지나도록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초조하게 지내던 차에 그 집 아내가 남편을 들볶는다. "왜 이 사람들을 보내지 않고 그대로 두느냐."고 하고 남편보고 "수상하다 학교 다닐 때 둘이 좋아한 게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잠자리도 불편한데 왜 그냥 두느냐"고 하니 남편은 밥상을 받았던지 밥상을 뒤엎으며 부인에게 "너도 자식을 기르면서 그 애들을 다 얼려 죽이려느냐"며 부부싸움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발길을 산으로 옮겨 동산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다시는 그 집에 들어갈 용기가 없습니다. 오해까지 받고 있으니, 하나님 저의 갈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마치고 할 수 없이 가고 싶지 않은 움막에서 하루저녁 지내며 생각하니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때 영등포 모래사장에 가면 안양 피난민 수용소에 있는 피난민들을 데려다 자갈을 추려내는 일을 시키고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끼어 일을 하다가 안양으로 오지 않고 죽으나 사나 기차 다니는 철교를 따라 무사히 건너가면 창신동에 가서 남편과 동생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서에게 이야기 했더니 동서가 그렇게 해 보자고 하였다.

이른 아침 동서와 함께 사무실로 찾아가 책임자에게 자갈을 추리러 가겠다고 했더니 허락해 주었다. 동서와 나는 보리밥을 좀 싸가지고 트럭에 실려 영등포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한강변 모래사장에서 자갈을 추려내면서도 내 눈에는 한강철교만 보였다. '어떻게 저 철교를 건너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었다. 점심시간에 동서와 보리밥을 먹고 한강 물결에 가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강 가에 김장철이라 배추 씻는 여인들이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저기를 어떻게 건너가야하나'라고 생각하며 서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서 돌아다보니 웬 중년남자가 "왜 그렇게 서 있는가"고 묻는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저 철교를 건너려고 한다니까 그 남자는 이렇게 하자고 하였다. 자기가 서울서 여기로 오는 트럭 운전사를 아는데 아주머니를 그 차에 태워 서울로 데려다 주라고 교섭해보겠다고 하였다. 나는 귀가 번쩍 뜨여 나 좀 살려주는 셈치고 그렇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자갈을 다 추리고 저녁에 사무실로 오라고 하였다. 일을 끝내고 사무실에 갔더니 그 사람이 같은 트럭 운전사에게 가자고 하였다. 운전사를 만나 나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더니 그 운전사는 참 잘 됐다며 오늘 마침 자갈 추리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안 와서 패스포드가 한 장 남았다며 도강하는데 그 때 돈 2만원을 내라고 하였다. 나는 돈이 한 푼도 없고 낙심이 되어 눈물이 콱 쏟아졌다. 내가 울고 있으니까 나를 운전사에게 소개해 준 분이 안양수용소에 누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시동생(원근)과 두 아이가 있다고 했더니 "그러면 서울에 가서 남편을 만나고 수용소에 있는 애들을 데리러 올 거죠"하고 물었다. 물론 데리러 온다고 하였더니 자기가 2만원을 꾸어 주겠다며 애들을 데리러 올 때 갚으라고 하였다. 나는 너무도 감사하여 갚아 드리기만 하겠느냐고 하며 동서와 시동생에게 시계를 맡기고 왔으니 그 시계를 내가 돌아오는 날 드리라고 하고 패스포드를 가지고 트럭에 탔다.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저녁이었다. 트럭에 실려 서울로 향하면서 창신동에 가서 동생들과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속히 데려와야 할텐데 하는 걱정에 저녁을 굶었어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남대문까지 오니 내리라고 하였다.

그 때 내 옆에 앉았던 부인이 나를 보고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었다. 나는 창신동까지 간다고 하니까 지금 창신동에 어떻게 가냐고 놀랜다. 나는 왜 못 가느냐고 반문하였더니 통행금지가 다 되었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하였다. 나는 통행금지가 있는 것도 몰랐다니까, "아니 이 사람이 어디서 왔기에 통행금지도 모를까?"하고 이상히 여겼다. 나는 이북에서 남편을 찾아왔다고 설명하고 갈 데도 잘데도 없다고 했다. 그 부인은 그럼 자기 집에 가서 자자고 했다.

나는 너무나 고마워 그 부인을 따라갔다. 얼마쯤 가다가 보니 우동가게에 있었는데, 그 부인은 우리 우동 먹고 들어갑시다 하기에 우동까지 사주려는 줄 알고 참 고마운 사람도 다 있구나 생각했다. 우동가게가 막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부인은 "아저씨 우동 두 그릇만 주세요"하며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가 마주 앉으니 그 부인이 "우리집에 가면 올케가 있는데 보나마나 내 밥 밖에 안 해 놓았을 텐데 어떻게 나만 먹을 수 있느냐며 아주머니가 우동 두 그릇만 사면 가서 잠만 자면 되지 않느냐"고 하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간신히 이북에서 넘어와 돈이라곤 한 푼도 없다고 했더니 "아유 돈이 그렇게 없어요"하며 그럼 우리집에 가서 같이 잘 수 없다며 자기네 집은 야미로 하루에 400원씩 받는다는 거다. 자기가 혼자 있으면 안 받아도 괜찮은데 올케가 돈 업슨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야단을 친다는 거다. 그 말을 들으니 기가 막히고 눈물이 났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이 났다. 외상으로 가서 자고 내일 창신동에 가는 차비도 저 아주머니에게 꾸어 같이 창신동에 가서 동생이나 남편을 만나면 외상으로 잔 것과 차비를 갚겠다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해 보았더니 그 부인은 한참 생각하다 그러자고 했다. 그 부인은 우동을 처음에는 두 그릇 달라더니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자 한 그릇만 시켜서 자기 혼자 먹고 나서 가자고 하였다. 그 부인을 따라갔더니 조그만 방 한 칸에 올케되는 중년 부인과 그 여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의 올케되는 분은 듣던 바와 같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나를 보더니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며 위로의 말을 하며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라고 하였다. 나는 춥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하여 자리에 눕기는 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를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새벽에 일어나 그 여인에게 창신동에 가자고 했더니 너무 일러서 못 간다고 했다. 나는 한시가 급했는데 그 집 올케되는 분은 엊저녁도 굶어서 시장할 텐데 보리밥이나 먹고 가라고 하며 아침밥을 짓는다. 하도 간절히 먹고 가라고 해서 나는 기다려서 보리밥을 한 그릇 먹고 아침 7시쯤 그 부인과 창신동으로 전차를 타고 와서 동대문 국제택시에 당도하였다.

어떤 남자가 타이어 손질을 하고 있기에 1사단 군인 김영근 중사가 살고 있다는데 혹시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김영규 중사는 있지만 영근이라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미심쩍어 영규라는 군인의 가족상을 물어보았더니 부인과 장모, 동생이 두 사람, 매형이라는 분과 요즈음 생남(生男)해서 일곱 식구라 하기에 나는 매형이 있고 남동생이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그 집을 물어 찾아갔다. 그 집은 아담한 한식집인데 대문 앞에 숯과 고추를 엮어서 달아 매 놓았다. 나는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할머니 한 분이 기저귀를 가지고 나오시기에 "강원도 금성에서"하니까 그 할머니는 큰 소리로 "아유 강원도 누님이 살아오셨네"하시며 대문안으로 들어가 "매형 금성누님이 살아오셨어요"하며 "시고모님 어서 들어오세요."하신다.

나는 대문을 들어서고 중문을 들어서니 건넌방 문을 열고 나오던 성남 아버지가 그 자리에 서고 나도 그이를 보니 그 자리에 선 채로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정말 남편을 만난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다 정신을 가다듬고 방에 들어가니 그이가 동생과 인숙이 성남이는 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성인이는 죽고 다 살아서 이남으로 넘어와 안양 피난민 수용소에 있다 하니 그이는 막 흐느껴 우시며 내가 가족이 살아올 줄 알았으면 돈을 벌어 모아 놓을걸 돈이 있어야 동생과 아이들을 데리러 가지하며 큰 처남인 내 큰동생은 2사단에 가 있는데 언제나 집에 오겠는지 하며 자꾸 우시기만 한다. 그러자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올케(큰 동생의 처)와 셋째 남동생이 왔다. 춘근이가 나를 보더니 누님이 살아오시다니 꿈만 같다며 막 운다. 올케에게 어제 외상으로 자고전 차비 꾸어 온 것을 이야기했더니 돈을 후하게 주어 저녁을 대접하여 그 부인을 보냈다.

그 동안 성남 아버지는 내 남동생 춘근이와 건넌방에서 기거하였는데 밤이면 흐느껴 울곤 해서 춘근이가 매형 엊저녁에 왜 울었우 하고 물으면 '꿈에 너의 누나를 보았단다'하며 늘 우울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신문만 보시며 멍하니 서 있곤 하여 집안식구들이 누님이 살아오시면 몰라도 죽으면 매형은 미치든지 돌아가시든지 할거라고 걱정을 했다 한다. 또 나의 둘째 남동생은 피난민 수용소마다 나를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큰 남동생이 나간 지 하루 이틀이 지나도 오지 않아 나는 물론이고 그이도 매일같이 눈물이 베개를 흠뻑흠뻑 적시곤 하였다. 그이는 내가 왜 돈을 안벌었든고 하시며 한탄한다.

 

나는 나대로 도강할 때 꾼돈 2만원도 속히 가져다 갚아야 되겠고 엄마없이 작은 아버지와 같이 그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가하니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큰동생이 와야 돈을 얻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열 사흘이 되던 날 대문소리가 나기에 건넌방 문을 열고 나와 보니 피난민 수용소로 나를 찾으러 갔던 동생 영일이가 군복 차림에 배낭을 들고 들어온다. 나는 너무나 반가워 "영일아"하고 부르니 동생이 "아아."하면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느는 그가 놀라는 것을 보고 "영일아 나야 나. 누님이야"했더니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더니 막 뛰어와서 "정말 누님이 살아왔구나."하면서 껴안고 운다. 동해안까지 수용소라는 곳은 다 찾아보았는데 안양수용소는 몰라서 못 갔다고 했다. 그 다음날 2사단에서 큰 동생이 왔다. 큰 동생도 나를 보고 누님이 살아오시다니 꿈만 같다고 하였다.

그 다음 날 큰동생이 둘째에게 돈 7만원을 주며 2만원 빌려준 분이 너무 고마우니 만원 더해 3만원 드리고, 조성진 움막집 주인에게 2만원 드리고 2만원은 차비해 가지고 오라 하여 둘째 영일이가 안양수용소에 가서 시동생 내외와 인숙이 성남이를 배추 실어 오는 속에다 감추어 데리고 왔다.


동생과 아이들을 만나 그이는 너무나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내가 혼자 왔을 때는 반갑기는 했지만 아이들과 동생은 죽었구나 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별로 반가운 줄도 몰랐었다고 한다.

용기를 얻은 그이는 이제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하시며 그 때 고(故) 이상우(李相雨) 선생님이 혜화동에다 화방을 내고 계셨는데 거기 가서 그림을 팔아 돈을 조금씩 벌어오셨다. 그 해 겨울은 동생네 집에서 같이 살고 봄에 창신동 신탁은행 뒤 빈집을 얻어 따로 나왔다.

어느 날 CID에서 이상우 화방에 화가 한 분을 소개해 달라고 하여 이선생이 성남 아버지를 소개해 주셨다. 그래서 성남 아버지는 CID에 매일 출근을 하게 되어 환경정리 그림을 그리셨다. 돈이 조금 생겨 그림을 집에서 그리기 시작하셨다. CID에 다니다 누가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면 수입이 좋다는 말을 듣고 PX에 가서 초상화를 그렸는데 미군이 많아 일감이 얼마나 많은지 미처 그려내지를 못했다. 그 때 이대 도자기과의 황종구(黃鐘九) 선생님의 여동생 황종례(黃鐘禮) 선생님과 같이 그리었다. 우리는 피난민이라 식량배급이 있었는데 배급은 옥수수와 보리쌀을 탔다. 나는 먼저 집을 장만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배급 타는 옥수수와 미국 보리쌀은 우리들이 먹고 우리 쌀을 조금씩 사다 그이만 뚝배기에 쌀밥을 지어드리고 주인집에서 내버리는 양말 헌옷을 다 기워서 입고 벌어오시는 돈은 꼭 예금을 했다. 한 3개월 저축해서 창신동에 35만원을 주고 집을 마련했다. 집을 사니 이 세상에서 나만 집을 산 것 같아 기뻤다. 집을 사고 보니 시동생 내외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우리는 8월에 그 집으로 들어가 건너방에는 동생 내외가 있고 안방에는 우리가 있었다.

 

그 때부터 그이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셨다. 다음 해 1953년 가을 [국전]에 <집>과 <노상(路上)>을 출품하여 두 점이 입선이 되었는데 <집>은 특선이 되었다. 그 해 5월 지금 막내아들 성민(成民)이를 낳아 경사가 겹쳤다. 그리고 가끔 미국인들이 집으로 찾아와 그림도 감상하고 사가기도 했다. 그 때 한 미군이 그이를 돕겠다고 일본에 가서 회구와 붓과 캔버스를 많이 사다 주었다. 그때부터 PX를 그만두고 그림만 그리셨다.

미대사관 문정장관 부인이 그의 친구들을 데리고 우리집에 오셔서 그림을 상설전시 할 수 있는 화랑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그 부인들이 주선해서 반도호텔에 반도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일 집에서 작품을 그려 반도 화랑에 나가곤 했다. 그 때 한국에 왔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미국인들이 가끔 작품을 사 가지고 가곤 하여 그것으로 우리는 생계를 이어가는데 생활고가 말이 아니었다.

1954년에는 <풍경(風景)>과 <절구>를 출품했고 [대한미술전]에 <살과 길가에서>를 출품했다. 그 다음 해 1955년에는 [국전]에 <오후(午後)>를 출품했고 7회 [대한미협전]에 <두 여인>을 출품해서 국회문공 위원장상을 받았다.

그이의 하루 일과는 아침 10시 경에 붓을 들면 저녁 4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5시쯤 시내에 나가셔서 전시회를 보시고 친구들과 만나 저녁까지 대화를 나누다 들어오시곤 하였다.

하루는 좀 일찍 들어오시더니 "나는 외출해서 돌아올 때(그땐 우리집 있는 곳에 밭이 많고 집이 없어 먼 곳에서도 우리집이 잘 보였다.) 우리집 용마루만 보아도 내 집이 어떻게 사랑스러운지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뭐가 그리 사랑스러우냐고 물었더니 "먼 발치에서 우리집을 바라보면서 저 집안에 죽었다 살아온 나의 사랑하는 처자식과 동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도 기쁠 수가 없다."고 하신다. 그이는 자기가 밖에 나가서 잡수신 것은 조금이라도 호주머니에 넣어 가져다 주셨고 언제나 새해를 맞아 달력이 새로 나오면 나의 생일날을 찾아 빨강 연필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나의 생일 전날 저녁에는 과일과 고기를 사들고 들어오셔서 인숙이 보고 "내일은 너의 어머니 생일이니 네가 아침에 밥을 지어라."고 하신다.

결혼 후 한번도 나의 생일을 그저 넘긴 적은 없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면 돈이 호주머니에 넉넉히 있는 것도 아니고 버스 타실 차비를 걸어다니면서 아껴 미리 양복 윗저고리 안 호주머니에 모아 두었다. 그렇게 해주신 생각을 하면 너무나도 감사하며 지금도 내 생일날이 오면 그이가 전날 저녁에 먹을 것을 한아름 사들고 들어오시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라 나 혼자 울곤 한다.

 

어느 해인가 그날이 음력 7월 3일인데 저녁에 먹을 것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시기에 오늘 돈이 생겼느냐고 하니 "내일이 당신 생일이지 않아? 그래 사왔지."하신다. 그래서 "나는 오늘이 7월 3일인데 내 생일은 7월 6일이 아니에요."하니까 오늘이 7월 5일이라고 자꾸 우기신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달력을 앞에다 놓고 보시라고 했더니 "내가 잘못 알았군."하시며 "사온거니 너희들 먹어라."하며 애들에게 주었다. 그런데 7월 5일 저녁에 또 한아름 사 가지고 들어오신다. 나는 "뭘 또 사오시느냐고 전날 사다 먹었는데요."하니까 "몇 번이고 생일이니 사왔지."하신다. 참 감사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가 냉면을 좋아한다고 그 궁한 생활 속에서도 한 주일에 한 번은 종로 4가에 있는 우래옥에 데리고 가서 냉면을 사주시고 하시면서 "나는 시내 다니다 냉면이라고 써 붙인 간판만 보아도 당신 생각이 난다."하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씀이 없어 무뚝뚝해 보이나 집안에서는 얼마나 자상하시고 다정하신지 모른다.

금성에 있을 때다. 피난 때 죽은 성인을 낳았을 때 해산 구환해주시던 아주머니에게 부탁드려 그 아주머니가 해산 구환하셨는데 아기 낳고 즉시 피걸레를 모아 놓은 걸 그 아주머니가 집에 잠깐 가신 틈에 성남아버지가 그 피걸레를 다 빨으셨다고 하시기에 어련히 아주머니가 하지 않으려고, 남자가 그것을 빨으시냐고 했더니 "그 아주머니는 돈 때문에 오셔서 일을 하시지만 나는 내 사람이라 괜찮지만 남이라 그 피빨래가 얼마나 더럽겠소."하신다.

 

또 한 번은 지금 성남이를 가지면서 닭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금성에서는 5일에 한 번씩 장이 서는데 아무 말씀도 없이 시장에 나가서 닭을 사오셨는데 그 닭을 이웃집 아저씨에게 잡아달라고 하여 잡아 보니 병든 닭이라 간이 부어 있었다. 할 수 없이 내버리고 말았는데 그 다음 날 학교에 가시더니 산 닭을 한 마리 들고 오셨다. 어디서 구한 닭이냐고 물었더니 학교에 가서 음악선생님이신 안시영 선생님에게 집사람이 임신을 하여 닭이 먹고 싶다 한다고 했더니 시암탉을 주시더라는 거다. 그런데 이 닭을 잡을 일이 걱정이었다. 아랫집 아저씨에게 어제도 잡아 달라고 했는데 또 잡아 달라고 할 수가 없어 부엌문을 닫고 있으려니까 닭을 잡았다고 하신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까 그이 뒤에서 닭이 목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쫓아오고 있다. 뒤를 돌아보시더니 깜짝 놀라 다시 뒤꼍에 붙잡아 가서 잡으셨다. 닭 한 마리도 잡지 못하시는 마음이 모질지 못한 분이다.

금성서 30리 내금강쪽으로 가면 창도라는 곳이 있다. 창도에 사는 친구 아들의 돌날이어서 우리 클럽 친구들이 돌을 축하하러 갔다가 저녁에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금성역에 내리니까 성남(3살 때) 아버지가 성남이 손을 잡고 역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여러 친구들의 남편은 한 분도 안 나왔는데 그이만이 마중을 나오셔서 기분은 언짢지 않았다. 성남이를 데리고 집에 와 보니 저녁밥을 지어서 애들은 다 먹이고 내 밥을 아랫목에 파묻어 놓고 화로에는 찌개를 얹어 놓고 나오셨다. 세수를 하고 방에 들어오니 윗목에 있던 밥상을 가져다 놓으시면서 시장할 텐데 어서 저녁을 들라고 하시며 밥상을 내 앞에 놓으셨다. 나는 너무나도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저런 남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남편에게 더 잘해 드릴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언젠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내가 밥을 짓는 동안 이불을 개어주시고 방 소제를 다 해놓으시고 아기 기저귀까지 빨아 넣어 주셨으며 그림 그리고 나서 저녁에 시내 나가시려고 구두를 신고 나서더라도 빨랫줄에 널린 빨래라도 만져보고 마른 옷은 걷어주시고 나가실 때면 나는 마치 친정어머님이 딸을 생각하셔서 조금이라도 일을 덜어주시려는 것같이 생각되곤 하였다.

 

창신동에 살 때다. 여름날 비가 오기에 우산을 가지고 동대문 버스 정류장에 나가서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리시는 그이와 같이 오는데 노상에서 우산을 받고 앉아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 세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신다. 그 옆을 지나시다 아이들 과일을 사다주자고 하시면서 한 아주머니에게 몇 알, 다음 아주머니에게서 몇 알 사시기에 내가 비오는데 한 군데서 사시지 뭘 그렇게 여기 저기서 사시느냐고 했더니 "한 아주머니에게서만 사면 딴 아주머니들이 섭섭해하지 않아."하시면서 세 아주머니에게서 골고루 사셨다.

그이는 물건을 사실 때면 큰 상점에서보다는 노상이나 손수레나 광주리 장사에게서 사셨다. 광주리 장사하는 여인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고, 전후에 고생을 겪는 이웃들을 늘 애처롭게 여겨 그 분의 그림의 소재가 모두 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해인가 미국에 계신 마가렛 밀러 부인께서 그림을 주문하셔서 그려보냈더니 그림값으로 1개월 추심수표를 보내왔다. 그 때 생활이 곤란하여 아는 달러상 여인에게 부탁해서 그 수표를 일 할을 제하고 바꿔달라고 맡겼는데 그 여인이 그 수표를 바꿔 자기가 다 써 버리고 돈을 주지 않았다. 하도 생활이 곤란해서 그 여인에게 돈을 받으러 가겠다고 했더니 그냥 기다리라고 하며 "오죽하면 돈을 못 가져오겠소."하며 그냥 기다려보았으나 그 여인은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자신이 남을 도와준 것은 이야기 안 하셔도 남에게 버스표 한 장이라도 받은 것은 집에 오셔서 꼭 이야기를 하시면서 당신이 알아 두라고 하셨다.

내가 이북에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때 남편이 남쪽으로 갔다고 반동분자 가족이라고 숟가락까지 다 몰수해 가고 나중에는 나의 손에 낀 약혼 반지와 시계를 빼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다 주어도 이것만은 못 주겠다고 했더니 인민군이 그까짓 거 뭘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느냐고 내놓으라는 것이다. 나는 날 죽이고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도 내 손의 반지를 뺏으려고 한다. 나는 울면서 이것이 비싸서 그러는게 아니라 약혼 시계와 결혼 반지이기 때문에 이것만은 내가 죽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그냥 가자고 하니 가벼렸다. 그래서 내가 이북에서 올 때 몸에 지니고 온 것은 약혼 시계와 결혼 반지뿐이었다. 그런데 인숙이가 여학교 다닐 때 시계가 없고 사줄 돈이 없어 내 약혼 시계를 주었더니 그만 찻간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그 말을 듣고 그이는 "그 시계는 엄마가 목숨을 걸고 싸워서 빼앗기지 않고 가져온 건데 참 안됐다."하시며 섭섭해 하셨다.

 

몇 달 후의 어느 여름날인데 늦게 오셔서 식사를 끝내고 모기장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자리에 아기를 데리고 누우려던 나를 보고 "여보 팔을 좀 내놓아요."하신다. 나는 바른 팔을 좀 내놓았더니 "아니 왼팔 말이야."하신다. 나는 왼팔을 내놓으니 손목에다 여자 손목시계를 채워 주시면서 오늘 당신하고 또 약혼식을 한다고 하시면서 시계를 채워 주셨다.

그 때는 여인들이 털실로 속치마를 짜서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돈을 줄 테니 털 속치마를 짜서 입으라고 하셨으나 좀체 여유가 생기지 않아 끝내 속치마를 짜입지 못한 것을 늘 생각하시며 하루는 저녁에 들어오시더니 '내가 오늘 버스간에서 보니까 광주리 장사 아주머니들도 다 털 속치마를 입었던데 당신만 못 입었어'하시며 늘 그것을 마음에 걸려 하시더니 마지막 운명을 하시면서 '당신 털 속옷치마'하셨다.

1.4후퇴 때 군산에 가셔서 혼자 부두 노동을 하실 때 어떤 부인이 나하고 꼭 비슷하게 생겨서 그 여인을 따라 5리쯤 가시다 정신을 차려 내가 왜 이 여인을 따라가나 하고 오던 길을 돌아오시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나를 만나 이야기하셨다.

창신동에 살 때다. [국전]에 <세 여인>이라는 100호 짜리 유화를 출품했는데 그것이 그만 낙선이 되었다. 그이는 신문을 보시고 내 그림이 왜 낙선이 되었느냐며 우셔서 낙선이 될 때도 있지 뭘 우시느냐고 내년에 좋은 작품을 그려 출품하시면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한 적도 있다.

결혼한 후로 세 번 통행금지에 걸려 못 들어오신 적도 있다. 하루는 새벽 4시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시지 않는다. 그래서 6시쯤 파출소에 가서 각 경찰서의 엊저녁 통행금지 위반자의 명단을 알아보니 동대문 경찰서에 통행금지 위반자로 붙들려 계셨다. 동대문 경찰서로 갔다. 형사와 같이 나온 그이는 나를 보고 아니 내가 여기 있는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놀래신다. 서울에 살면서 세 번 통행금지 위반으로 한 번은 종로 경찰서에 걸리셨다. 나는 늘 전화로 알아보고 찾아가서 벌금을 물고 즉시 석방시켰다.

 

그이는 자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잠을 못 자고 애를 쓸까 봐 늦게라도 들어 오시려다 그렇게 세 번이나 걸리셨다고 하셨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그 날 오후에 시내로 나가셨는데 그 날 저녁 들어오시지 않으셨다. 그 날은 통행금지가 없기 때문에 안 들어오실 리가 없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밖에 누가 찾아와서 나가 보니 순경이 왔다. 깜짝 놀라 왜 오셨느냐고 했더니 박수근 씨가 어제 저녁 명동에서 넘어져 머리가 깨져 쓰러져 있는 걸 학생들이 인근 병원에 입원을 시켜 두었으니 병원에 가 보라는 거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급히 택시를 타고 명동에 있는 외과병원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유리창 안으로 그이가 보이는데 저고리에 온통 피가 묻고 머리에 붕대를 감고 앉아 계시는 것이 보였다.

내가 들어가니 내 손을 붙잡고 우시면서 "내가 한바터면 죽을 뻔했어. 당신이 제일이야. 여기 간호원들이 얼마나 불친절한지 이 피 묻은 손, 얼굴을 씻겨 달라고 해도 안 씻겨 주었어."하시며 우신다. 나는 간호원에게 세수대야에 더운 물 좀 달라고 하여 씻겨 드리고 의사선생님을 만나 뵈니까 약을 가져다 집에서 치료를 하라고 하셔서 집으로 모셔 와 치료를 하였고, 쓰러져 있을 때 병원에 데려다 준 학생네 집에 찾아가 인사를 하였다.



창신동에 살 때였다. 왼쪽 눈이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아 안과에 다니고 계셨는데도 점점 시력이 나빠져 결국은 백내장이 되어 눈동자에 희막이 점점 가로막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수술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수술비가 마련이 안 되어 그림이 팔릴 때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저녁이 되어도 안 들어 오셔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신예용(申禮容) 안과병원에서 전화가 왔다고 이웃 창신 한의원에서 전해 주어 그 안과에 가보니 눈 수술을 하고 누워 계셨다. 의사가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병원에서 간호를 했다. 집에 알리면 걱정을 할까 봐 혼자 와서 수술을 하셨다고 하신다. 일주일 입원했다 퇴원하여 집에서 매일 치료받으러 다니셨는데 수술결과가 좋지 않아 늘 고통이 심했다.

그래서 다시 최창수 안과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안압이 높아 고칠 수 없으니 아픈 눈의 신경을 끊어 통증이나 없이하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다시 눈 수술을 하여 신경을 끊어 통증은 없이하였으나 한쪽 눈은 아주 실명을 하여 한 눈으로 밖에 보실 수 없었다. 그 한 눈을 가지고 매일 그림을 그리셨다.

창신동 집이 도시계획에 걸려 집 앞으로 길이 나기 때문에 우리집이 한쪽으로 2m가량 뜯기게 되어 집을 뜯으면서 앞면에 점포 셋을 만들었다.

증축 허가를 낼 때는 점포 둘로 허가를 냈는데 지금 용두동에 있는 시동생이 시계점을 남의 가계를 빌어 하고 있어 시동생에게 점포를 하나 주려고 허가대로 하지 않고 점포 하나를 더 만들었다.

우리 식구들은 바로 근처로 이사를 하여 살고 있는데 밖에서 성남 아버지가 자꾸 인애(12살 때 죽은 막내딸)를 부르신다. 들창문을 열고 내려보니 순경 한 사람과 성남 아버지가 서 있다. 나를 보시더니 "여보 왔어. 왔어." 그러시기에 누가 왔냐고 물으니 순경을 곁눈으로 가리키며 "왔어."하시기에 눈치를 채고 빨리 뛰어 나가 순경에게 인사를 하니 순경이 왜 허가대로 증축하지 않고 구조를 마음대로 변경하여 점포를 더 만들었냐고 따진다. 그래 사실대로 시동생이 남의 점포에서 시계점을 하며 생활이 곤란해서 점포를 하나 만들어 주려고 했으니 좀 봐 달라고 담뱃값을 드렸더니 가고 말았다.

 

성남 아버지는 도무지 불의와 타협을 할 줄 모르시는 분이며 잘못을 변명할 줄도 모르시는 분이었다. 그분 같으면 대한민국 헌법이 필요 없을 것이다.

마루에서 그림을 그리셨는데 마루가 다 잘리고 보니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단칸방에서 그리셨다. 어느 한 여름밤 자는데 성남 아버지가 "여보 도도도둑놈이 왔어." 하시며 나보고 창문을 내다보라는 거다. 창문을 내다보니 두 사람이 돌을 가져다 창문 앞에 발돋움을 해 놓고 올라오려 하고 있다. 그래 큰 기침을 하고 인기척을 내어도 도둑들은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발돋움을 하고 들어오려 하니 성남 아버지는 벌벌 떨고 계셨다. 남편이 무서워 떠니까 나는 더 떨려 생각다 못해 건넌방 택시 운전사를 깨우라 했더니 그 집 문 앞에 가서 "형권이 매매부, 형권이 매매부, 도도도둑놈이 왔어요."하니 형권이 매부(택시 운전기사)가 큰소리로 "어디 왔어요, 어디."하며 뛰어나가니 도둑놈들이 도망갔다. 형권이 매부 뒤를 쫓아갔던 성남 아버지는 들어오시며 '참 대담한 도둑들이군, 사람의 소리가 나도 계속 발돋움을 하다니'하시며 돌아오신다. 체격은 커서 보기에 퍽 담대한 것 같은데 마음이 굉장히 약하시다. 그 때 간 경화증이 발병하고 있었다. 간 기능이 나빠지면서 눈에 고장이 온 것을 안질로만 알고 안질 치료를 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간 치료를 했어야 할 것을 모르고 그랬던 것이다.

하루는 시내 나갔다 들어오시더니 시내에서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했다고 하시며 약방이 없으면 죽었을 거라고 하신다. 소화가 잘 안되고 복통이 일어나고 소화가 안되고 고통스러워 세브란스 병원에 갔더니 진단결과가 신장염과 간염으로 나와 약을 타다 먹으며 치료를 했는데 그 약이 이뇨제였던지 약을 잡수시고 소변을 자주 보시더니 하루는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 나는 깜짝 놀라 안정을 하시도록 하고 약을 써 다시 소생하셨다. 간이 나쁜데 저녁마다 술을 들고 오셔서 술을 그만 드시라고 말렸더니 "나는 술까지 마시지 않으면 미치겠어. 그래서 마신다."고 하셨다.

 

그 분은 남처럼 약게도 못 살고 수단이 없으신 분이며 부정이나 불의 앞에서는 못 견디는 분이며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어지러운 세상에 술까지 마시지 않으면 달랠 길 없다는 뜻으로 나는 생각한다.

1961년 일본 [국제자유미술전]에 출품을 했는데 그 작품(인물)을 누가 훔쳐 가서 없어졌다고 통지가 왔다. 나는 누가 가져갔는지 일본 경찰에 신고해서 찾으라고 하니 그냥 두라고 하시며 "그 그림 가져간 사람이 돈은 없고 작품은 탐이 나고 해서 가져갔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작품이 도난을 당한 것은 영광"이라고 오히려 기뻐하셨다.

그이의 하루 일과는 아침부터 4시까지는 그림을 그리시고 5시쯤 시내 나가셔서 전시가 있으면 구경을 하시고 대폿집에서 늘 술을 잡수시고 오셨다. 어느 날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더니 "당신 큰 일났어."하시기에 영문을 몰라 하니 "당신 정신 차려야지 잘못하다가는 남편 빼앗길 거야."하시며 자기가 늘 가는 대폿집이 있는데 그 대폿집 마담이 자기를 좋아하는지 오늘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붙들고 사정을 하드라는 거다.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몰라주느냐고 애원을 해서 자기가 왜 모르겠느냐고 다 안다고 하시며 등을 쓰다듬어 주고 위로를 하셨다 한다. 나는 "걱정 없어요. 술집 마담과 상대가 되느냐고 남편 빼앗기면 할 수 없죠."하였다.

그이는 워낙 잘생긴 데다 인품이 멋이 있어 그런지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우리가 살던 전농동 이웃집 부인들이 모여서 그이를 가리키며 저런 남자와 한 달만 살아 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들 한다는 말도 들었다.

1959년 제8회 [국전]부터는 국전추천작가로 초대 받았고 1962년 제11회 [국전]때는 심사를 하고 들어오시던 날 "나는 심사위원이 되더라도 다시는 심사 안하겠어. 모르고 한 번 했지만 두 번 다시 할 것이 못돼. 내가 알았으면 안하는 건데."하셨다. 나는 아직도 그분의 말씀에 의혹이 많다.

 

 

 

 

 

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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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완 서 소설가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 것은 1951년이 저물어가는 겨울이었다. 그 때 나는 21세였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 이듬해였다. 그 때만 해도 서울대에 여학생 수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희귀했고, 특히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긍심이 대단할 때라 나도 내 위에 누가 있으랴 싶게 콧대가 높았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6.25가 나고 집안이 몰락해서 어린 조카들과 노모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학업을 계혹할 가망은커녕 입에 풀칠할 방도도 나에겐 난감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바닥나 이제 굶어 죽을 일밖에 남지 않은 날. 길에서 우연히 오빠의 친구를 만났다. 오빠는 전쟁통에 죽었는데 그는 살아남은 게 꼴보기 싫어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그가 반색을 했다. 그는 신수가 훤하고, 기름이 잘잘 흐르는 미군복 바지에 줄을 칼날같이 세우고, 당시 유엔 잠바라고 불리던, 지금의 파커 비슷한 군용 윗도리를 입고 폼을 재고 있었다. 어디 다니냐고 물었더니 PX다닌다고 했다. 나는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그가 부러웠다. 그 때 나는 혹시 어디 일자리가 있을까 해서 무턱대고 싸다니던 중이었으니까.

 

서울의 번화가는 거의 폐허가 되었고 한강 이남의 피난민의 도강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온전한 주택가도 텅텅 비어 있었다. 직장이 있을 리 없었다. 살아있는 경기라곤 오직 미군부대 주변의 양공주 경기가 무슨 도깨비불처럼 요괴롭게 명멸할 뿐이었다. 그런데 PX라니, 그 때 미 8군 PX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일대의 큰 건물들이 다 불타고 파괴된 가운데 오직 그 건물만이 온전했다. 그러나 비록 폐허가 됐을망정 PX에서 흘러나오는 미군 물자와 PX를 드나드는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로 그 일대는 딴 세상처럼 화려했고 시끌시끌한 활기에 넘치고 있었다. 장사꾼 뿐 아니라 오물을 한 깡통씩 들고 다니며 PX걸을 협박해서 돈을 구걸하기도 하고, 미군의 소지품을 슬쩍하기도 하고, 눈을 찡긋해가며 "넘버원 색시 해브 예스 오케이?"하기도 하는 거지와 소매치기와 뚜쟁이를 겸한 소년들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 때 전쟁의 불안과 가난에 찌든 우리가 밖에서 보기에 PX야 말로 별세계였다.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온갖 진기한 보물이 널려 있는 꿈의 보고였다. 나는 가망 없는 줄 알면서도 그에게 나의 곤경을 부끄럼없이 털어 놓고 취직을 부탁했다. 그는 허풍선이처럼 선선히 승낙을 한 뒤, 나를 당장 그 안에 데리고 들어가더니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몇 마디 해 준 걸로 내 취직은 쉽게 결정됐다. 거짓말처럼 쉬웠다.

그러나 알고보니 진짜 PX걸이 된 것이 아니라 한국물산 위탁매장의 점원이 된 것이었다. 그 때 PX는 아래층만 매점이었는데 그것도 삼분의 일 가량은 한국인 업자에게 위탁매장으로 내 주고 있었다. 처음 내가 일한 곳은 요란한 수를 놓은 가운이나 파자마를 파는 매장이었는데 한달도 안 돼 같은 업주가 경영하는 초상화부로 가게 되었다.

 

 초상화부엔 다섯 명 정도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업주는 그들을 훗두루 간판쟁이들이라고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전쟁 전엔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딴 간판쟁이와 다른 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은 매우 낡고 몸집에 비해 비좁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내가 초상화부에서 할 일은 물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었다. 화가를 뒷바라지하면서 미군으로부터 초상화 주문을 맡는 일이었다. 제 발로 걸어와서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주문하는 미군은 거의 없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초상화를 그리도록 꾀는 일이 나의 주된 업무였다. 그 일은 물건을 파는 일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영어도 짧은 데다가 꽁하고 교만한 성격도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식구가 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만 두어 버릴까 보다고 매일 아침 벼를 정도였다.

 

나에겐 전혀 맞지 않는 일이어서 그림 주문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업주가 무어라고 하기 전에 화가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제였지만 그들은 작업량에 따라 일주일에 한번씩 그림삯을 타가게 되어 있었다. 내 식구뿐 아니라 화가들 식구의 밥줄까지 달려 있다는 무서운 책임감이 조금씩 내 말문을 열게 했다. 화가들이 나에게 불평을 다 할 때도 그는 거기 동조하는 일이 없었다.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 착해 보여서 소 같은 인상이었다.


착하고 말 수가 적은 사람이 자칫하면 어리석어 보이기가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닥은 결코 착하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만한 고장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 만큼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돼먹지 않은 영어로 미군에게 수작을 걸 수 있게 되고, 차츰 그림 주문도 늘어날 무렵부터 화가들에게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그들을 한껏 무시하고 구박하게 했다.

 

그들은 거의 사십대로 나에겐 아버지뻘은 되는 어른인데도 나는 그들을 김씨, 이씨 하고, 마치 부리는 아랫사람 대하듯이 마구 불러댔다. 김 선생님, 이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싫었으면 하다 못해 김씨 아저씨, 이씨 아저씨라고 해도 좋으련만 꼬박꼬박 김씨, 이씨였다. 그도 물론 박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양가집 딸로, 또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간판쟁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대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 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 때 내가 더이상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매장은 물건이 한번 팔면 끝나는데 초상화부는 그림 주문을 맡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주문한 그림을 찾으러 올 때가 더 문제였다. 미군들도 제 얼굴을 그려 달라는 이는 거의 없고 애인이나 아내 혹은 딸의 사진을 맡기고 그려 달라는데, 찾으러 와서는 닮지 않았다느니 실물보다 밉다느니 트집을 잡기가 일쑤였다.

 

주문을 맡은 때보다 찾아갈 때에 더 능란한 수완을 요했다. 만약 내가 그들의 트집을 달래고 설득하기가 귀찮아서 다시 그려 주겠다고 반품을 받으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화가들에게 돌아갔다. 공짜로 또 한 장을 그려야 한다는 시간과 노력의 손해보다 재료값을 주급에서 공제하는 걸 그들은 몹시 억울해 했다. 당시 초상화부에서 쓴 화판은 캔버스가 아닌 스카프, 손수건, 사륙배 판 크기의 노방조각 등 세 종류였다.

그 중 인기품목이 스카프였다. 나는 실크 스카프라고 허풍을 떨었지만 아주 조잡하게 짠 네모난 인조견 보자기 한쪽 모서리에 용의 모양을 나염한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안감으로도 안 쓸 번들번들한 인조견 조각이 원가가 1달러 30센트였고 나염한 용과 대각선이 되는 모서리에다 초상화를 그리면 6달러를 받았다. 화가에게 그중 얼마가 공건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림 하나를 망치면 1달러 30센트를 고스란히 물어내야만 했다. 반품받는 것을 그들은 '빠꾸 받는다'고 했는데,

 

내가 기분이 언짢으면 함부로 빠꾸 받는다는 걸 알고 내 비위를 맞추려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무리가 아니였다. 그럴수록 나는 그들을 깔보고 한껏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하찮은 그들을 위해 나의 그 대단한 자존심을 팔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생색을 내도 모자라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싹수머리 없이 못되게 굴었나를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틈만 있으면 고개를 곧추세우고 뒷짐을 지고, 화가들이 작업하고 있는 책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그들의 그림 솜씨를 모욕적으로 평하기를 즐겼다.

"김씨 사진 좀 똑바로 보고 그려요. 원 눈을 감고 그리나, 발가락으로 그리나..., 이렇게 그려 놓고도 빠꾸 받으면 내 탓처럼 굴겠지." 이런 식이었다. 영낙없이 아무런 애정없이 지진아를 따로 지도하는 국민학생 선생님처럼 행세했다.

어느날 그가 그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을 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쟁이가 화가 될 줄 아남'하고 비웃었다.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 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띤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국민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촌부(村婦)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선전(宣戰)에 입선한 그림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일제시대의 관전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겼던 것 같진 않다. 그러나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 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왜 어느 날 느닷없이 그 화집을 나에게 보여 줬을까. 간판쟁이들과 다르게 보임으로써 내 구박을 조금이라도 덜 받아보려고 그랬을까? 그러나 나에게 그 화집을 잠깐 보여 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잘난 척이라곤 모르고 간판쟁이들 중에서 가장 존재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그가 신분을 밝힌 것은 내가 죽자꾸나 하고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헤어나게 하려는 그다운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내 불행에만 몰입했던 눈을 들어 남의 불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부터 PX생활이 한결 견디기가 쉬워졌다. 그에 대한 연민이 그 불우한 시대를 함께 어렵게 사는 간판쟁이들, 동료 점원들에게까지 번지면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균열을 일으킨 내 심정을 축여 오는 듯했다.

 

 비로소 내가 막 되어가는 모습을 그가 얼마나 연민에 찬 시선으로 지켜보아 주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 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거의 매일 같은 퇴근을 했는데 한번도 저녁을 같이 먹거나 그의 집에 따라가 본 적은 없다. 을지로 입구 전차 정류장까지 같이 걷다가 도중에서 명동으로 빠지는 게 고작이었다. 나의 처녀작 [나목(裸木)]에서도 몇 번 나오지만 그와 나는 명동 노점상에서 장난감을 구경하기를 즐겼다. 지금에야 별의별 신기한 장난감이 많지만,

 

그 때만 해도 태엽을 틀어 주면 한참 동안 저절로 움직이는 장난감은 PX를 통해 흘러나온 외제뿐이어서 행인들이 겹겹이 둘러서서 구경을 했었다. 태엽만 틀어 주면 침팬지가 술을 따라 마시기도 하고 시끄럽게 징을 치기도 하는 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나는 배창자가 땅기도록 깔깔대고 그도 빙그레 웃으면서 장사꾼한테 또 한번 해달라고 간청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길에서 군밤이나 호콩을 사서 한껏 느리게 까 먹으면서 전차 정류장까지 걷기도 했고 다방에 들리기도 했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다방은, 지금은 단자회사지만 전쟁 전까지는 시공관이던 건물에서 을지로 쪽으로 빠지는 골목 중간쯤에 있는 '세븐 투 세븐'이란 다방이었다. 간판은 '727'로 붙어 있었다. 비스듬히 건너에는 '모나리자'라는 큰 다방이 있었는데 우리는 주로 작고 호적한 '727'을 이용했다. 마담은 포도주색 빌로드 치마에 분홍 양단저고리가 잘 어울리는 살색이 희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중년 여인이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순금(純金)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허점을 드러내지 않고 처신을 당차게 하는 여인 같았다. 거기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포성이 유난히 가까이 들리는 날은 둘 다 말을 끊고 우울한 얼굴로 귀를 귀울였었다. 52년도의 서울은 짙은 전운(戰雲)이 감도는 최전방 도시였다. 포성을 들을 때마다 나는 온종일 브로큰 잉글리쉬로 꼬부라졌던 혀를 풀고, 그는 이국(異國)여자들의 싸구려 화상을 그리는 노역에서 놓여나 오붓하게 마주 앉아 있는 그 작은 행복과 평화마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가슴이 떨리곤 했다.

그는 워낙 말 수가 적어서 말은 주로 나 혼자 맡아서 했는데도 그의 가족에 대해서 물은 적은 한번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사시장철 변함없는 빛 바랜 작업복과, 간판쟁이들과 어울려서라도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처지로 미루어 그의 아내를 무식하고 거칠고 온종일 바가지나 긁고 아이들을 울릴 능력밖에 없는 끔찍한 여자로 상상하고 있었다.

 

 너무나 평범한 그에게 그 정도의 비극적인 장식을 해 주고 싶었던 게 그 때까지 남아 있던 나의 소녀 취미였다. 그러나 그를 모델로 한 소설 [나목]에선 그의 아내를 빼어난 이조백자에 비유할 만큼 미화시키고 있다. [나목]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 몇 년 뒤 그의 유작전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미모와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분이었다.

나는 그 때 어찌나 놀랐는지 인사도 못하고 먼 발치로 바라만 보다가 나오고 말았다. 놀랐을 뿐 아니라 배신감 비슷한 쓰디쓴 감정까지 솟구쳤다. 그가 나에게 한번도 그의 부인을 나쁘게 말한 적이 없으나 나는 순전히 나의 상상력에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의 부인의 미모와 부덕을 진작 알았던들 [나목]에서 절대로 그 분을 그렇게 미화시키지는 않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내 멋대로 상상한 추녀 악처에 대한 보상 심리가 소설 속에서나마 그녀를 미화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와 나의 일년 남짓한 사귐에 조금이라도 불순한 게 섞였다면 아마 그 정도가 아닌가 싶어 이 기회에 털어 놓는다.

그 일년 동안에는 봄도 가을도 여름도 있었으련만 웬지 그가 걸었던 길가엔 겨울풍경만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즐겨 그린 나목 때문일까.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마다 그해 겨울, 내 눈엔 마냥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에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가 가슴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

 

박수근의 그림을 가장 많이 구입했던 밀러 부인

(60여 점 정도 매입) -쌀 3가마니 (60만원)



죽어서는 최고 경매가 기록을 갈아치우는 비싼 그림, 하지만 살아 있을 때는 가난한 화가


2007년 3월,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로 낙찰을 기록한 그림 한 점이 화제가 됐다.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을 가장 한국적으로, 그리고 가장 현대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박수근(1914~1965)의 작품 '시장의 사람들'. 당시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25억 원에 낙찰됐다. 이전의 한국현대미술품의 최고 경매가는 2006년 12월, 10억4000만원에 팔린 작품도 역시 박수근의 1962년도 작품인 '노상'이었다.


'시장의 사람들'은 하드보드지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그다지 크지 않은 작품으로 시장에서 서있거나 앉아 있는 여인 12명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박수근의 작품 중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한 것으로 유명하며, 박수근 유화 특유의 화강암과 같은 화면 질감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 〈도판〉박수근,‘ 시장의 사람들’, 하드보드지에 유채, 24.9×62.4㎝, 1961, 개인 소장

하지만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2개월 후인 2007년 5월 경매에서 박수근의 또 다른 작품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에 낙찰되면서 기록을 갱신했다. 미술계에서는 이른바 '박수근 불패신화'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미술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박수근은 1950~1960년대 전형적인 한국의 서민 생활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 가장 사랑 받는 화가로 그의 그림 값은 앞으로 더 올라 50억 원은 훌쩍 뛰어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박수근은 살아서는 한국전쟁의 혼란기 속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다.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의 좁은 집은 팔리지 않은 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친애하는 밀러 부인. 보내드린 소품 두 점의 값은 '노인'이 40달러, '두 여인의 대화'가 50달러입니다."


이것은 박수근이 196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마거릿 밀러에게 보낸 편지다. 밀러 부인은 한국은행에서 근무한 남편을 따라 서울에 왔다가 박수근의 작품을 보고는 그의 단골 컬렉터가 되었다. 박수근은 한국전쟁 후 미군 첩보부대에서 몽타주를 그려주거나 미8군 피엑스(PX)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집이 가난해 중학교에도 진학을 못하고 미술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한국의 무명 화가 박수근을 후원해준 이는 미국 여성들이었다. 반도호텔에 생긴 첫 상설화랑인 반도화랑의 주인 실리아 짐머맨과 밀러 여사, 미대사관 직원 부인들이 그들이다. 이 후원자들을 거쳐 미국으로 팔려간 박수근의 그림은 약 200여 점을 가량이라고 한다.


그 중 가장 많이 구입했던 밀러 부인(60여 점 정도 매입)에게 보낸 박수근의 편지를 보면 당시 그가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박수근의 그림은 40~100달러 정도에 팔렸는데 40달러면 당시 쌀 세 가마니가 좀 안 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는 밀러 부인에게 돈보다는 오히려 물감으로 그림 값을 치러주길 간절히 원했는데 특히 그가 잘 사용한 흰색이나 초록색 물감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박수근의 작품 크기가 작은 것도 당시 크고 비싼 캔버스를 구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화가의 삶이 비참할수록 비싸지는 그림 값?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미술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과도 생이별을 했다. 병원에 갈 수 없어 아들 2명이 죽었고 그 자신도 돈이 없어 백내장 수술을 미루다 한쪽 눈을 실명한 후 간경화가 악화돼 죽었다. 만약 오늘날 자신의 그림들이 25억, 45억 원을 호가하는 것을 안다면 박수근은 뭐라고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의 삶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림 값은 더 비싸진다. 생전에 그림을 단 2점 밖에 팔지 못하고(그것도 동생이 사갔다),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역시 그랬다.


또 한 명의 대한민국 대표화가 이중섭(1916~1956)도 그림을 그릴 종이를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서 담배갑 속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어 일본인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갔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정신질환을 앓던 그는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진 뒤 무연고자로 처리돼 사흘이나 시체실에 방치됐다.

이들은 모두 살아서는 불행했다. 그림이 잘 팔리는 인기 작가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들의 불행에 예술적 낭만과 미화가 더해져 미술 경매에서 연일 최고가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십 억, 수백 억 원이라는 최고로 비싼 그림 값은 지금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많은 돈은 야속하게도 이들의 고통스러웠던 생애와는 무관하게 엉뚱한 사람들의 지갑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ㆍ건국대 강사

 


장녀 박인숙


나는 시골길을 가다 어느 마을 마당에 눈길을 모은다. 따뜻한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은 마당 한가운데 모이를 쪼아먹고 있는 닭과 병아리,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귀여운 강아지, 참으로 평화스런 풍경이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거짓이 없는 자연의 순수한 모습처럼 욕심이 없으신 편안한 표정은, 따뜻한 햇살처럼 우리 식구들을 훈훈하게 해주셨고 나를 그 안에서 티없이 맑게 자라게 해주셨다. 내가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원동력은 편안하고 포근한 아버지의 분위기와 선한 아버지의 눈빛 이였던 것 같다.


 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하루에 한 두 마디 하실 정도로 과묵하셨지만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께 꾸중을 들은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실수를 안해서가 아니라 내가 실수를 해도 아버지께서는 야단치시는 일이 없으셨고 다만 무언의 행동으로 나에게 교육을 시키셨던 것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붓 빠시는 일을 나에게 시키셨다.



나는 수돗가에 꾸부리고 앉아 붓에 일일이 빨래 비누를 칠한 뒤 손으로 비벼 빠는 작업을 몇 번씩 반복하는 일이 싫어 대충 빨


아서 아버지께 갖다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붓 속을 헤쳐 보시더니 유화 물감이 묻어있는 붓 속을 보여주시며 붓 속까지 깨끗이 비누칠해서 빨아야 한다고 일러 주셨다.나는 붓을 다시 들고 수돗가에 와서 아버지께서 일러주신대로 하지 않고 비누칠을 해서 한 번만 빨고 다시 갖다 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붓 속을 또 보시더니 화도 안 내시고 하기 싫으면 그냥두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얼른 안방으로 왔다. 잠시 후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안방에서 나와보니 아버지께서는 꾸부정하게 앉으셔서 내가 빨았던 붓을 일일이 빨고 계셨다. 나는 꾸부정하게 앉아 붓을 빠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에게 화를 내시며 회초리를 드시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느꼈다. 잠시 후 아버지께서는 나한테 오시더니 붓은 이렇게 빨아야 수명이 오래간다며 붓 속을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이 자율적으로 나를 반성하게 했고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요인이 되게 했다.

 리 식구가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곳은 창신동 집이다. 1950년대 6.25전쟁으로 아버지께서는 남으로 피난하시고 도중에 남은 식구들은 북쪽 방공호에 살았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이남으로 죽으나 사나 아버지를 찾아가자고 말씀하셨었다. 어느 날 작은 아버지와 의논하신 끝에 결심을 하시고 식구들을 데리고 칠흙같은 밤 중에 남으로 걸어 오다가, 중간에 미군을 만나 소원하시던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남으로 오셨다.


그 후 안양수용소에서 고생하고 노력한 끝에 아버지를 만나게 됐다.


우리를 처음보는 순간, 죽었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와 자식을 보시고 그렇게 좋아하시던 아버지.


생전 먹어보지도 못했던 바둑껌을 주시며 "너희들 만나면 주려고 모아두었지."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정이 담뿍 담긴 바둑껌을 씹으며 신기하게 느꼈던 나와 동생.

그날 밤 아버지께서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우리를 꼭 끌어안고 주무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식구가 오붓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하셨는데 주인이 살지 않는 빈 집을 지켜주는 대가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얻어 그 곳에서 우리 식구의 보금자리가 시작되었다.

그 때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직업을 갖게 되어 수입이 생겼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벌어다 주시는 돈을 알뜰하게 모으셔서 창신동 집을 사게 됐다.

모양은 단조로운 집이지만 우리 식구의 얼굴에 웃음과 꿈과 안식처가 되어 주었고, 건넌방은 세를 주고 우리 식구는 안방에 모여살고 안방과 마루가 아버지의 화실이 되었다. 어떤 때는 웃목이 나의 차지라 추워서 이불을 푹 써야 코가 시리지 않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께서는 외출 나가셨다 돌아오시면서 먼 곳에서 우리집 용마루만 바라보아도 자랑스럽고, 식구들이 있는 집에서 그림까지 그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어머니께 가끔 말씀하셨다. 마루 처마 끝에는 제비가 집을 지어 제비똥이 어머니의 일거리를 더해 주었지만 매년 제비가 찾아오는 것을 우리 식구는 좋아했고 기다렸다.

아버지의 화폭에는 벌써 제비가 그려져 있었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하모니카를 불면 어머니께서는 노래 부르고 나와 동생은 그 분위기에 푹 파묻혀 흐뭇해 했었고, 지금도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뻐꾹 왈츠를 들으면서 그 때를 회상하곤 한다.

한번은 밤 중에 도둑이 건너방을 기웃거리는 걸 어머니께서 보시고 놀라서 도둑이야 하는 발음을 돌돌돌둑이야...하시며 아버지를 깨우셨다. 그 때 아버지는 남자답게 문을 박차고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이 겁을 내시고 이상한 소리를 외치니깐 건넌방에 사시던 아저씨가 잠이 깨셔가지고 왜 그러냐고 물으셔서 도둑이 들어왔다고 하니깐 몽둥이를 들고 대문 밖으로 잡으러 나가셨다. 한동안 아버지께서는 어머니한테 놀림을 당하셨다. 여자처럼 마음이 여리고 순진하고 쑥맥이라고...

이렇게 창신동 집에서는 재미있는 추억과 동시에 아버지의 작품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마루에 앉아있으면 아버지 그림이 벽면에 가득 붙여져 있어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물건 팔러 오셨다가 아버지께서 도마 위에 감 그린 것을 보고는 웬 감이 벽에 붙어있냐고 물어봐 한바탕 웃은 일도 있었다.

그 때에 우리집 사정은 궁핍했다. 어쩌다 미국 사람들이 그림보러 집에 온다고 하면 우리집은 대청소에다 음식을 준비하는 어머니, 손님이 오시면 나와 동생을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부엌 널판지 사이로 내다보며 그림이 많이 팔려 맛있는 것 좀 많이 먹었으면 하며 마음을 설랬다.

그림이 팔리면 어머니께서는 쌀을 사셨다. 그 날은 흰밥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식구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표정도 흐뭇하셨다. 며칠 지나 쌀을 아껴야 한다고 하시며 콩나물 죽, 수제비가 시작되면 나는 싫었지만 어머니께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라고 하셨다. 특히 수제비는 더 싫었다. 밀가루 음식은 그 당시에 너무 먹어서 그런지 지금도 싫어한다.

아버지께서는 시간이 나시면 신문에 난 기사나 연재소설, 그림 등을 오려 스크랩북을 만드셨다.

우리들 크면 보라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주몽 이야기, 호동왕자와 낙랑 공주 등을 수채화로 종이에 그리시고 글의 이야기 내용도 적어놓으신 것을 심심하면 꺼내 읽고 상상의 날개를 펴곤 했다.

책을 직접 만들어주신 이유로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책을 못 사주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식구 한사람 한사람을 공들여 아끼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뭉클해지는 순간이 가끔 있었다.

아버지께서 외출하시는 동안 나는 아버지 그림 도구를 호기심이 나서 들쳐보고 열어 보았다. 종이 상자에 몽당연필이 가득 차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내가 버린 몽당연필들이었다. 그것을 모아 깍지를 끼어 아버지께서는 스케치를 하셨던 것이다.

얼마나 알뜰하신지 모른다. 외출하실 때에도 밖에 걸려있는 빨래를 새댁보다 더 얌전히 개어 놓으시고 요강도 깨끗이 부셔주시는 것이 매일 되풀이 되셨다. 어머니께서 힘들어 하신다고 자상한 친정어머니처럼 돌봐주셨던 따뜻한 우리 아버지.

중고등학교에서 공납금이 밀려 어머니께서 인숙이 공과금 걱정을 하시면 걱정말아 하시며 아끼시던 화집을 들고 나가셔서 팔아 공납금을 마련해 주신 아버지.


외출했다 돌아오실 때는 우리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시려고 엿 두 가락, 군고구마 등이 들어 있는 6절 정도로 교과서를 뜯어서 만든 봉지를 들고 들어오시면 아버지 손만 바라보던 우리들은 눈이 반짝이며 깨엿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시던 아버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지금에야 철이든 나로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


창신동 집이 사기꾼한테 잘못 사서 나중에는 보상도 몇 푼 못 받고 전농동 집을 샀을 때 아버지 그림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창신동 집보다 좀 크고 깨끗한 집이라 우리 식구는 희망에 차 있었지만 전농동 집은 내 기억에서 떠올리고 싶지가 않다. 그 집에서 아버지께서 편찮으셨고 편찮으시면서도 가끔 일어나셔서 그림을 그리시던 모습이 가끔 꿈에 나타나면 안타깝다. 아버지가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뜨신 집이기 때문에 별로 정이 안간다.


세상을 뜨시면서도 어머니께서 "여보, 죽지 마세요." 하고 우시니까 느린 목소리로 "내가 죽긴 왜 죽어. 걱정들 하지마." 하시던 아버지. 돌아가시면서까지 식구들을 걱정하시는 아버지의 착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께서 남다른 데가 있다면 일생동안 그림과 어머니 그리고 우리들을 사랑하셨다는 점이다. 고지식하셔서 일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시지는 못하셨지만, 가난한 사람을 아끼고 측은히 여기는 애정어린 진실이 아버지 그림 구석구석에 배여 아버지의 모습이 곧 그림이 아닌가 생각한다. 끝으로 전시회를 마련해 주신 박명자 사장님 이하 아버지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일일이 찾아뵙지 못하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스럽다.

감사합니다. 


장남 박성남


버지는 노래를 못하신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진다. 어머니는 이런 표정을 재미있어 한다. 성화에 못이겨 하모니카로 노래를 대신한다. 뻐꾹 왈츠서부터 신나게 서너곡 불어 젖힌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음악 소녀가 된다. 정말 아버지의 뻐꾹 왈츠는 신나는 곡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은 엄마 닮으면 어여쁜 앵무새가 되고 아버지를 닮으면 총대 없는 뻐꾸기 병정이 되곤 한다.


놀이에 미친 나의 유년시절은 언제나 아버지의 걱정거리를 하나 더해 주었다. 그림에 열중하시는 아버지에겐 커다란 방해꾼이었고, 더더욱 어머니 심부름엔 철저한 방관자였다. 풀떡, 보리밥, 강냉이죽 주는 대로 뚝딱 해치우고 밖으로 줄행랑친다.

배추밭에 물을 주어야 했고, 자동차길 따라 작은 집에 가야했던 심부름도 놀이에 까맣게 저당잡힌 채 달이 뜰 때까지도 잊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의 종아리는 아버지의 큰 손에 쥐어진 붓대로 불이 나는 것이다.

'창신동 집'은 아버지가 월남하신 후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하신 소산으로 마련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미닫이 문이 없는 마루를 중심으로 마주 보노라면 오른편에는 안방과 부엌, 왼편에는 내가 종아리를 맞을 때면 나의 역성을 들어 주시던 형권이 아주머니가 살던 건너방이 있다. 그리고 화장실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남향의 ㄷ자 형의 한옥이었다.

아버지의 화실인 마루는 동네 아주머니와 기름장사 아주머니 그리고 각종 행상인들이 잠시 걸터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부채 할아버지의 장사길을 재촉하는 쉼터이기도 했고, 때때로 몇 사람의 외국인들이 서성이며 그림을 감상했던 화랑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틈틈이 나의 개구장이 친구가 온통 소란을 피우거나 북적거리기도 하고, 한겨울 따뜻한 햇살 한구석에 땀과 먼지에 버무려 놓은 옷가지를 조용히 빨래하시는 어머니의 빨래터이기도 한 생활터였다.

이렇게 사노라면 으레 궁색한 우리집에 찾아주는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그림에도 등용된 연미형의 꼬리를 가진 제비이다. 이들의 성화는 어찌나 극성인지 배설물을 안방이며 마루며 두루 다니며 그림에까지 발라 놓는 것이다. 얼핏 보아도 아버지 그림의 주조색과 너무 흡사하다. 제비들의 배설물을 닦아내는 곤욕이 우리 가족들의 심심찮은 소일거리가 되곤 했다.

"얘야. 제비가 알을 많이 품으면 풍년이 된단다."

이렇게 말씀하신 아버지는 고향 금성에 두고 온 처마밑의 제비둥지를 연상하시곤 한다. 그럴 때면 사선을 넘어 온 이야기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줄줄이 엮어져 나온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정경어린 신혼 시절의 그림, 불에 타 버린 그 숱한 스케치들을 생각하시면서 아버지는 다시 붓을 잡으신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 말은 아버지의 담백하고 솔직한 예술관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그림으로 이 예술관을 실천해 보였다. 다시 우물물을 긷고 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하는 소박한 생활과 더불어.

철부지 시절, 놀이에 정신을 팔아 버린 나에겐 아버지의 그림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나뭇잎 하나 없는 나무도 그렇고, 때때로 눈, 코, 입이 생략되어 버린 인물화도 그렇다. 어쩌다 학교 선생님의 지시로 부탁해서 그려 주신, 노란 바탕의 간략한 선으로 그려진 삼일운동 포스터도 그랬었다. 어린 나에게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그림도 못 그리며 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일가친척 외에 대다수의 동네사람들도 인정하는, 무능력한 성남이 아버지였다. 어머님이나 아버지를 이해하는 주위의 소수를 제외하곤 아버지의 일이나 아버지의 정신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차남 박성인

아버님은 제가 12살 되던 해에 고인이 되셨기 때문에 저는 아버님을 직접 겪었다기보다는 어머니를 통해서 또는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아버지를 접하고 느끼며 자라왔습니다.

어려서 기억으로 아버님은 별로 말씀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말보다는 실천을 더 중시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님의 사상과 철학은 글이나 말로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 보다는 행동하셨던 것과 그림에서 그분을 느껴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그분을 알 수있는 행동과 그림을 통해서 제게 느껴지는 아버지에 대한 부족한 소견이나마 적으려 합니다.

행동에서 아버님은 서민이셨습니다. 아마 그 분이 부자였다면 그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고 서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도 서민이었고 마음까지도 서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분은 서민을 사랑하셨고 풍요로움의 교만보다도 없는 것에 대한 아주 작은 인정을 더욱 더 좋아하셨고 고통 속에서도 서로서로 도와주려는 서민의 아름다움을 아셨습니다.

한가지 예로, 돌아가신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마당을 쓸다 신문 뭉치가 있어 펼쳐 보니 쇠고기 한근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어머니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고 고마움과 감사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짐작하건대 그것은 아마 잘 살지도 못하는 친구분이 주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고기가 절실하게 필요했었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님이 왜 이렇게 유명하셔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분은 서민들이 말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그것에 대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비오는 날 과일을 살 때 주로 노상에서 사곤 하셨는데 한 곳에서 전부를 사시는 것이 아니라 세 군데에서 나누어 사곤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시면 아버님은 물질적으로는 손해지만 벌면 되고, 마음에는 평등한 사랑의 실천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바로 그것이 그분의 예술세계에 부각 되곤 했습니다.

아마 아버님은 작은 것을 희생하면서 더욱더 큰 것을 가지려 하는 아름다운 욕심이 있었나 봅니다.

지금 저의 눈에 비추어지는 아버님은 아주 큰 거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평범한 사람 눈에는 무능한 호인으로 비추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세계의 말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화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그림 속에서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그림을 보면 아버님이 살아 생전에 못한 무수히 많은 말들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저는 여기서 두 번째로 그림을 보면서 그분의 무수히 많은 말의 일부분을 적으려 합니다.

아버님의 그림을 보면 흙의 일부가 캔버스에 묻어서 아주 자연스러운 그림을 나타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리 민족의 길과 장래 염원 소망 등 여러 가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님은 향토적이고, 우리나라 민족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것이 기본이 되는 흙의 진리를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생각한 흙의 진리는 기독교 사상일 것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하신 말은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더니 멀어 멀어..." 하시면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버님의 그림을 보면 평화와 온유한 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자세히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리고 그림을 더 자세히 보면 인내, 절제, 염원 등이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고싶은 말들이 들려오곤 합니다. 그것은 그분의 기도소리로도 들려오곤 합니다.

"주여 더욱더 작게 해 주시고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는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윗 글은 아버님의 철학이 담겨져 있는 유일한 글입니다.

선함과 진실함을 본다는 자체도 어려운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작업, 과연 이것이 평범한 견해일까요?

아버님의 악이 없는 선한 인간이었다면 선함과 진실함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님이 욕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많은 사람의 평온함을 위해서 그리셨다면 선함과 진실함도 그림으로 쉽게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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