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choyeung 2019. 10. 26. 21:05
     

오늘은 일가(一家) 가족 모두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다묵(多黙 토머스) 안중근의사가 19091026,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10주년이 되는 뜻깊은 기념일이다.


[안중근의사의 초상화] 캔버스에 유채, 117x92cm(50), 2010

 

안중근은 하얼빈역 현장에서 곧장 뤼순감옥으로 압송된다. 재판에서 안중근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의 거사는 나 일개인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다. 러일전쟁에 대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宣戰詔勅)에 의하면, 러일전쟁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다는 것이었다.”그래서 일본이 개선(凱旋)했을 때, 한국인은 마치 자국이 개선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이토가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의 상하(上下) 인민들을 속여 5개조의 조약이 체결됐다. 이는 일본 천황의 뜻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은 모두 통감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어서 또 7개조의 조약을 체결당함으로 인해 한국은 더욱더 불이익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일로, 황제의 폐위까지 행해졌다. 그래서 모두 이토 통감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삼 년간 도처에서 유세도 하고, 또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에도 참가했다. 이번의 거사도 한국 독립전쟁의 하나로,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결행한 것이지 보통의 자객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나는 피고인이 아니라 적군에 의해 포로가 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일본 법관이 그의 학문과 배움에 대한 질문에 말하기를,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경서와 통감(通鑑)을 읽었다. 그리고 만국역사와 조선역사를 읽었다. 해주와 신천에서 사립학교를 두고 천자문과 조선역사, 맹자, 통감을 공부했다. 그리고 신부를 통하여 프랑스어를 배웠다. 열일곱살에 천주교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경성에 천주교 대학을 설립하려다 프랑스 선교사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 5개조약 성립에 대하여 사람들로 듣고 신문을 보면서 협약의 성격과 목적을 알게 되었다.” 라고 대답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英雄으로 칭송받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東洋 平和論)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의거 후 19103월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의 유고(遺稿)이다. 32년의 짧은 인생을 오직 겨레와 나라을 위하여 살신성인한 안중근 의사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의 육필로 기록되어 남아 있다.

전체가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가운데에서 서문(序文) 전감(前鑑) 일부만 작성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A4용지 78장 분량이었다.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안 의사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운 지표(指標)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이다.

 

안중근의사는 언제나 동양평화라는 대의를 잊지 않았다. 안중근의사의 평화론은 보편적 도덕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고 각국이 독립적 주권을 가진 상태에서 서로 연계하여 평화를 이룩하자는 생각이었다. 그의 깊이 있는 사상과 인도주의적, 보편 도덕적 가치에 많은 일본인들도 존경을 표하고 있다. 지금 일본에서 일고 있는 안중근 추모운동 또한 안중근의사의 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동양평화론 전감(前鑑)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오호라!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동종인방을 해치는 자는 끝내 독부의 환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는 같은 황인종이면서 한국을 침략하여 지배하려고 한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정책을 전면 공격하여 언젠가는 그 값을 치를 것이라고 강하게 논하였다. 비단 그 당시의 일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에도 국가 간에 수없이 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희생시키는 경우도 많다.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은 자는 끝내 독부의 환을 면치 못하리라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안중근의사, 그는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의사, 열사일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외친 뛰어난 사상가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안중근의사동양평화론을 재조명 하는 이유는 시대를 뛰어넘는 평화를 향한 그의 외침 때문이다.

 

최봉룡 중국 다롄(大連)대 교수는 최 교수는 특히 "안 의사가 소년 시절부터 받았던 유교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사상적 기반, 천주교의 '천명사상'(天命思想), 그 시대의 국제정세인식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동양평화사상의 원천적인 기저를 이뤘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의 동양평화론에는 인류사회가 반드시 지향해야 하는 자유(自由)와 평등(平等), 공존(共存)의 보편적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더욱 빛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본인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서 2010년 전부터 3년간 안중근의사를 포함하여 50인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하여 독립기념관 들을 방문하고 자료를 준비하면서 작업에 몰두했다. 드디어 201011월에 남산에 새로 신축된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12월에 안양의 평촌아트홀 두 곳에서 화가로서 보람을 느끼보며 특별 기획전시를 가졌다. 그 이후에는 [대한독립50]이라는 828쪽의 책을 발간하여 현재 교보문고를 통하여 보급되고 있다. 그로부터 어느듯 10년이 흘러 안중근의사 순국 110주년이 다시 맞으니 감회가 더욱 새로워진다.

 



[안중근의사 약력]

안중근[安重根 Ahn, Joong-Keun 1879~1910.3.29]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출생지는 황해 해주, 아명은 안응칠 어려서 한학 수학, 승마·궁술·사격을 익혀 문무를 겸하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 빌렘(Wilhelm) 신부로부터 도마[多默(다묵) Thomas]라는 세례명 1907년 삼흥학교, 돈의학교 설립, 민족교육 실시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의병군 참모중장,아령지구 군사령관 직책 1908년 국민회·일심회와 동의회를 조직,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 담당 1909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를 조직,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암살키로 맹세 1909.3.29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처단 1910년 뤼순 감옥에서 많은 유필을 남기고 동양평화론 저술중 사형 순국 안중근 의사로부터 힘을 얻은 항일 독립운동은 후일 중국국민당 장개석 총통의 적극적 지원과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의 호응을 얻어 카이로선언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사항이 특별 기록되고, 8.15 광복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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