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떠나기

choyeung 2020. 6. 23. 22:36

올해에 들어 제대로 여행을 한 적이 없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사회생활을 올해 2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19로 인하여 제대로 하지 못한지 벌써 5개월째가 되어 가고 있다. 다들 갑갑한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신문기자들은 사람의 심리를 잘 간파하여 전국에 인적이 드문 해안과 산간 벽지를 소개하면서 트레킹을 권유하고 있다. 마음이 흔들려 며칠을 궁리하다가 가급적 사람이 없는 낯익은 해변과 명산이 함께 있는 곳으로 한번 나서 보았다.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아무래도 자연을 찾아 발품을 팔아야 감흥이 일기 때문이다.

 

작년 혹서에는 속초쪽으로 방향을 정하여 네비게이션을 찍어보니 자연히 코스가 가장 거리가 짧은 코스인 인제-양양고속 터널(11km) 방향으로 들어서게 한다. 그러나 모두가 한꺼번에 몰린 지경으로 고속도로가 온통 정체되어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고 이번에 달리 정했다. 영동고속도로로 강릉을 경유하여 속초로 올라가는 길을 잡았다. 해안도로 중간쯤에는 강원도의 3대 미항(美港) 중의 한 곳이며 해돋이가 멋진 남애항과 남애해수욕장이 있어 도중에 잠간 들려 보았다. 날씨는 흐렸으나 간혹 동해바다의 특징인 너울파도가 심하여 방파제 주위는 하얀 거품이 솟구치고 굉음을 내고 있었다.

 

● 남애항의 너울파도

 

너울파도는 계절과 날씨와 관계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높고 거친 파도를 말한다. 즉 바람과 관계없이 생기는 파도인데 파고가 3m 이상이며  주기도  9초 이상인 파도이다.

 

↓↑ 강원도 3대 미항인 남애항의 너울파도

↓↑ 위아래에는 바다쪽으로 나간 방파제에 등대가 보인다

● 낙산해수욕장의 일출과 너울파도

 

낙산해수욕장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주청리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길이가 1.8km나 된다.  부산의 해운대 해수욕장, 강릉의 경포 해수욕장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해수욕장의 하나이다. 보통 일출시각 30분전부터 아름다운 색갈의 여명(黎明)이 시작된다.  오늘은 수평선 위에 구름이 펼쳐져 있어 여명과 일출이 바로 보이지 않다가 한참 지나서 구름 사이로 비로소 일출을 볼 수 있었다.

 

 

↓ 2020.5.20.동해 낙산비치의 일출과 너울파도

↓ 낙산비치의 일출

 

●  설악산 비선대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金石文)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방문록

 

 

윤순 (尹淳 1680-1741)의 비선대(초서) 금석문

 

비선대 주위는 과거에 기념품과 음식을 파는 상점들이 길을 차지하여 계곡의 암반에 새겨진 금석문 글씨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점포가 철거되자 바위 위에 새겨진 글씨가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는 조선의 3대 서예가의 한 사람인 윤순의 [비선대 飛仙臺] 라는 초서 글씨가 한가운데 보인다.

 

윤순(숙종과 영조시대)의 호는 백하(白下)이다. 벼슬은 대제학, 공조판서와 예조판서 등을 지낸 학자와 정치가이다. 또한 당대 서예계의 중심에 있던 소론의 명가 집안사람이었다. 조선시대의 명필 3대가로는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 석봉 한호(韓濩 1543-1605)와 더불어 백하 윤순을 들고 있다.

 

■ 안평대군의 송설체 즉 안평체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1453)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호는 비해당(匪懈堂)이다. 세종은 편안하고 태평의 뜻인 안평(安平)’의 군호(君號)로 혹시나 안이하고 게으른 마음을 가지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 있는 안평의 집 당호(堂)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비해당(匪懈堂)으로 지어 내렸다. 이는 장차 임금이 될 맏아들 문종(1414-1452)에 대하여 게으르지 않고 잘 섬기라는 의미가 있었고 결국 안평의 호가 되었다.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또한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222축의 수많은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 중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다.  많은 책은 문인들을 초청하 견문을 넓혀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서풍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를 따랐다.

 

 

조맹부(趙孟頫 1254~1322)는 원나라 관료로 문학가이며 유명한 서화가다. 호는 송설(松雪)이다. 왕희지(王羲之 303-361) 글씨의 정통적인 서법 전통이 당나라때 황폐화함을 개탄하여 왕희지로의 복고주의를 표방했다. 그의 글씨는 법도가 근엄하고 체세가 수려하면서 우아한 운치가 있었다. 필법은 둥글고 윤택하면서 굳세며 섬세하나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으로는 근골을 함유하고 밖으로는 아름다움이 흘렀다. 이토록 뛰어난 글씨였기에 후세에 조맹부체 또는 그의 호를 따서 송설체라고 불렀다.

 

 

세종은 물론이고 문종,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강희안 등 집현전 학사 모두 송설체의 대가였다.  훈민정음에 보이는 한자는 그 자체가 또한 송설체의 표본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도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화된 송설체, 즉 ‘안평체(安平體)’가 조선의 국서체(國書體)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왼쪽-조맹부(1254-1322)의 해서-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記

오른쪽-조맹부(1254-1322)의 행서 -노자도덕경

 

 

왼쪽-안평대군 초서 글씨, 집고첩발(集古帖跋) 1443년(25세의 글)

오른쪽-안평대군이 1449년(31세의 글)에 쓴 지장보살본원경(地裝菩薩本願經)의 금니사경,

하버드 대학 소장품

 

위-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거니는 꿈을 꾼 후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견)].

위-안평대군 [몽유도원도]의 발문 글씨, 1447년, 44x38cm  -일본 덴리대학교 소장

안평대군이 꿈에 박팽년과 함께 도원을 걸었던 내용을 안겸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그림으로

발문(跋文)은 안평체로 직접 썻다

 

■ 한석봉의 글씨 (석봉체)

 

 한석봉 글씨 -천자문 일부

한석봉의 야운처사

 

조선 초기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조맹부의 송설체가 보이는 굳세고 유려함이 이름났고 그후는 한호의 석봉체가 보이는 장중하고 순박함이 특징이었다.  

 

■ 윤순의 백하체

윤순은 송나라의 미불(米芾 1051-1107)과 명나라 초의 문징명(文徵明1470-1559),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정묘하고 유려함을 본받았다고 한다. 백하는 당대 서예가의 장점을 잘 소화하여 모든 글씨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어떤 체를 써도 격조가 있고 빼어난 글씨를 보였다. 그래서 그의 글씨체를 두고 백하체(白下體)라 불렀다. 시문뿐만 아니라 산수·인물·화조 등의 그림에도 능하였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가로 알려졌다.

 

백하는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에 이어 더욱 발전시켰으며 그의 문하에는 이광사(李匡師) 등이 배출되었다. 중국과 다른 우리의 독특한 맛을 지닌 동국진체를 발전시킨 그의 자주적 창조정신은 오늘날에도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그는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 1533-1601)와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 형제의 5대손이다.

 

윤순의 필적 (尹淳 筆蹟) 고시서축 (古詩書軸) 위(해서)와 아래(초서),

1737, 비단에 먹, 45.2×404.5㎝, 보물 제1676호

 

위-백하 윤순의 '백하필첩' 글씨

위-백하 윤순선생 필제발 白下尹淳先生筆題跋 54.8x47.0cm  종이에 그림

 

비선대에서 신흥사로 내려오는 계곡옆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점심을 들다

위-비선대를 내려보는 웅장한 장군봉(미륵봉)과 형제봉  

  

 

비선대에 주로 조선시대부터 많은 방문객의 방명록이 새겨져 있는다.

몇 사람을 찾아보았는데 주로 관직을 가진 상류의 사람들이었다.

 

● 비선대 금석문 표기자

 

금석문(金石文) 혹은 금석문자(金石文字)는 철이나 청동 등의 금속성 재료나 석재에 새겨진 글이다. 고대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일반적으로 금속성 재료에 쓴 금문(金文), 석재에 기록한 석문(石文)뿐만 아니라 토기에 기록한 토기 명문(銘文), 다듬은 나무에 쓴 목간(木簡),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씨로 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나 전돌의 명문(銘文) 등을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때 토기 명문 가운데 기와나 벽돌은 석문으로 보기도 한다.

 

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금석학(金石學)이라 지칭하며, 조선조의 추사 김정희는 전국의 저명한 금석문을 조사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했던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였다.

 

한국에도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서 울산 태화강 암벽에 새겨진 반구대 암각화가 알려져 있고,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와 신라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한 수많은 비석들이 남아 역사의 면면을 고증해 주고 있다.

 

비선대 암반에 새겨진 사람들 중에 몇몇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그런데 확실치 않은 점도 있을 것 같다.

 

방문자의 글씨체가 다른 것을 보면 각자의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고종삼 ( 高宗三)

전라도 사람 가운데 일본으로부터 표류민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강진이었다. 이는 강진 사람들의 해양활동이 그만큼 활발했음을 증명한다. 모두 107건에 1,461명이나 되었다. 18세기에는 3~4년 간격으로 발생했고, 19세기에는 거의 매년 발생했다. 표류 도중 일부는 질병이나 기아로 죽고 일부만 살아서 표착했다. 죽은 사람의 경우 일부는 현지에 뭍이고 일부는 송환되었다. 그리고 산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쪽에서 외교를 통해 귀국시켜 주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겠다.

1822년 12월 14일, 일본 규슈의 사쓰마(薩摩, 현재 가고시마)에 강진 사람 11명이 표류했다. 그중에 김순득이라는 이름의 사망자가 1명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의부(義父, 의붓아버지) 송응대란 사람과 이종사촌 고종삼이란 사람이 표류했다. 송응대와 고종삼은 표류인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외교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쓰시마(對馬島)에 한글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현재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계미(1823년) 6월 7일 조선국 전라도 강진현 표민 김순득 시신

분부한 사연은 감격 무량하오나, 지금 이 뜨거운 날씨에 여러 날 된 시체를 조선 법대로 다시 관에 넣고 염습을 하라고 하였는데, 당초 사쓰마 관가의 분부에 의해 일본법대로 하라고 시켜 그렇게 한 일이오니, 이차이피(以此以彼,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에 다시 염습하려 하면 망인(亡人)을 도리어 두 번 송장(送葬)하게 되오니, 당초대로 두고 빨리 쓰시마로 배로 보내면 시간이 지체되지 않게 되오니, 다시 관념(棺殮)하는 일은 그만 두시고, 향후 무슨 뜻밖의 말씀 들리거든 한 번 뵐 것을 다짐하며 올립니다.

김순득 시신의 의부(義父) 송응대, 이성4촌 고종삼

 

사쓰마 관부는 표류한 강진 사람들을 죽은 김순득 시신과 함께 쓰시마로 일단 보내야 했다. 이를 위해 우선 김순득 시신을 일본식으로 염습을 했었다. 그러나 쓰시마 쪽에서는 조선과의 외교적 관계를 의식해서 김순득 시신을 조선 방식대로 염습해서 보내라고 사쓰마에 요구했다. 그러자 송응대와 고종삼이 직접 쓰시마에 한글 편지를 보내어 김순득을 다시 조선식으로 염습을 하면 더운 날씨에 시간만 지체되니 그냥 그대로 보내도 괜찮으니 그렇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김순득의 시신을 데리고 쓰시마를 거쳐 그곳 통역관과 함께 8월 2일 부산에 도착했다.  

 

서석순(徐奭淳)

그의 아들이 서상륜(徐相崙)1848-1926)으로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다. 부유하였으나 서석순은 34세에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아들은 한문에 능통하고 글씨도 명필이어서 한글성경 발행에 크게 기여하였다.

존 로스 John Ross 1842-1915 목사가 서상륜에게 세례를 주고 한글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언더우드 목사가 새문안교회 설립하였으나 실제적인 창립자는 서상륜으로 14명의 신자들이 서상륜의 전도를 받은 자들이었다. 서상륜은 또한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서상륜의 동생은 서경조((徐景祚 1852-1938)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바도 구한말의 목사로 기독교 운동가이었다.

변홍규(邊弘圭)

1854년 철종 5년 경상좌도 임행어사 박규수의 서계書啓(출처 일성록)에 의하면,

변홍규는 언양 현감으로 현(縣)의 종6품직 관직이었다 변홍규는 요역(노동으로 세금을 내는 것)을 감면해 주고 진휼하고 구제해 줌을 계획대로 했으며, 얇은 봉록을 자주 내 놓았으니 이 모두 알찬 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다.

<내용> 咸豊5年(1855) 彦陽縣監 邊弘圭(변홍규) 발행 <언양현충훈정훈세계단자(彦陽縣忠勳正勳者世系單子)>로 상태 양호하다. <크기> 59×102cm

<참고> 1854년(철종 5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박규수의 書啓

성우석 成禹錫
1795년 정조가 화성행궁의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을 비롯한 노인관료 양로연 역의 노인들에게 베푸는 양로연에  참석한

수원부 노인명단에 절충장군( 조선시대 정3품 당상관의 품계) 이었다.

이장엽(李長燁)

행수 선전관(行首宣傳官) 이장엽(李長燁)왕실족보 인물

이돈수(李敦秀)

1849-?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왕실족보 인물

이상우(李尙愚)

연안(延安)1803 순조3년 계해 알성문과에 장원하였다. 조선시대 실시되었던 비정규 문과·무과 시험으로 알성과(謁聖科)라고도 한다. 국왕이 문묘에 참배한 뒤 성균관 유생에게 제술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에게 급제를 주는 것으로, 이 과거는 1414년(태종 14)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설악산 비선대 일대의 장군봉과 계곡의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

 

추사(秋史, 완당(阮堂) 김정호(金正浩 1786-1856)

신흥사의 문화재 보관기록관이 2017년에 건립되었다. 소장품 중에 추사의 무량수각의 글씨가 보관되어 있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조선국 승문원 검교 등을 지냈다.

통일대불좌상은 서가여래좌상으로 높이 18m이며 1987년부터 완성에 10년간 소요되었다

사천왕들은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산을 수호하는 신장들이다.

위의 왼쪽-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오른쪽-칼을 든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아래의 왼쪽-용과 여의주를 든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오른쪽-보탑과 창을 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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