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이야기)

choyeung 2020. 11. 15. 12:02

11월 중순이 지나 토요일을 맞았다. 인근지역에서 가족과 함께 스산하지만 아름다운 만추의 가을을 느끼기 위해 숙소에서 빵과 물로 점심을 준비하고 승용차로 불과 10km 떨어진 지지대 주차장으로 나섰다. 무료주차장이라 100여대 주차면적에는 벌써 만차가 되어 있어 겨우 주차를 할 수 있다.

지지대 주차장에서 광교산으로 오르는 산행길은 수원둘레길 8색길중에서 6색길로 통신대헬기장까지 4.3km의 능선을 타는 산림길이다. 4계절동안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고 북쪽으로 관악산과 안양시를 내려다 볼 수 있어 시야가 시원한 편이다. 그리고 남쪽은 광교산이 가려서 수원시를 볼 수가 없으나 우거진 수풀사이로 만추의 멋진 풍경을 조용한 분위기속에 느껴 볼 수가 있다.  봄철에는 진달래와 철쭉의 높이가 사람키보다 큰 자세로 산행을 반기는데 인적을 따라 밝은 산새들의 노래를 항상 들을 수 있어 좋은 곳이다.  2년전에 광교 헬기장 부근이 자연발화로 산불이 나서 소나무와 잡목이 상당히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제 거의 복원되어 지고 있었다.  

지지대의 북쪽에는 안양시가 있고 관악산까지 보이지만 남쪽은 수원시가 위치해 있는데 수원하면 화성(華城)의 성곽 그리고 정조대왕을 생각나게 한다.

 

 

[수원화성-서북공심돈의 가을], 45.5x53.0cm (10호), 캔버스에 유채, 2019년, 조영규 작품, [경기미협 주관의 <화성을 그리다전>에 출품]

■ 정조와 수원 화성과 현륭원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대왕(1752-1800)은 탕평을 실시한 군주이며 1776년에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연구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1785년에 호위군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1794~1796년에 군사적 방어와 상업적 기능을 겸비한 5.5km의 수원화성(水源華城)을 축성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재위동안 전국행차를 66회를 하였으며 수원행차는 13차례나 거행하였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1995년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의 세계유산 등재 후 창덕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번째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수원화성의 이름을 올린 것이다.


정조는 그의 나이 27세에 아버지 사도세자 (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 (莊獻世子))의 무덤을 이장하여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조성하였고 1789년에 어서(御書)인 현륭원지(顯隆園誌)를 직접 지었다.

 

그 내용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英祖)의 아들로 세자로 책봉된 이후에 매우 영민하고 독서에 부지런하였으며 서연(書筵)에서 행한 여러 강론들을 열거할 정도로 명석하였다. 항상 무명옷을 입었고 타고난 품성이 검소하였다고 적었고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쓸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픔을 누르고 참아가며 피눈물을 떨구면서 써나가겠다' 라고 썼다.

정조는 재위 20년인 47세인 1795년에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6천명의 수행원과 위풍당당하게 수원행차를 하여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長安門)에 입성하고 8일간 체류하였다. 이때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베풀어 효심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 수원과 안양의 경계의 언덕에 위치한 지지대(遲遲臺)

 

정조대왕 조각상 - 효행공원 지지대

『정종대왕실록正宗大王實錄』에 따르면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莊憲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는 화성시 융건릉(隆健陵)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매번 미륵현彌勒峴(후에 지지현(遲遲峴)으로 변경)에서 행차를 멈추고 현륭원을 바라보며 아쉬워하였다. 미륵현 위쪽 평평한 곳을 지지대라고 명명한 뒤 아래쪽 축대에 ‛遲遲臺(지지대)’라는 세 글자를 새기도록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지지대비(遲遲臺碑), 효(孝)의 이정표

 

정조 지지대 비문 (순조 7) 12월 건립. 비문 서영보, 글씨는 윤사국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4호인 <지지대비(遲遲臺碑)- 총흔이 보인다

비석의 거주지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47-2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지지대비(遲遲臺碑)>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1807년(순조7년) 12월에 화성어사 신현(申絢 1764~1827)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높이 150㎝에 너비 60㎝의 금석각 형태이다.

비의 비문은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썼으며, 화성유수 홍명호(洪明浩)가 소전(小篆)으로 ‘지지대비명(遲遲臺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을 썼다.

 

지지대(遲遲臺)라는 이름을 남기게 된 정조의 마음은 시에도 잘 나타난다.

 

이십일 일이 어느 날이던고.
와서 초상(肖像)을 참배하고 젖은 이슬을 밟아 보니,
어버이 사모하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다.
화성(華城)에 돌아와서는 비 때문에 어가(御駕)를 멈추었는데,
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 마음에 맞아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새벽에 다시 길을 떠나 지지대(遲遲臺)에서 머물렀다.
구불구불 길을 가는 도중에 어버이 생각이 계속 마음에 맺히어
오랫동안 그곳을 바라보면서 일률(一律)의 시로 느낌을 기록하다.

 

(弘齋全書 卷七)라는 설명을 달고 있는 시가 특히 그렇다. 당시의 정조 마음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혼정신성의 사모함 다하지 못하여
(晨昏不盡慕)
이날에 또 화성을 찾아와 보니
(此日又華城)
침원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寢園雨)
재전에선 방황하는 마음이로다
(徘徊齋殿情)
사흘 밤을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若爲三夜宿)
그래도 초상 한 폭은 이루었다오
(猶有七分成)
지지대 길에서 머리 들고 바라보니
(矯首遲遲路)
바라보는 속에 오운이 일어나누나
(梧雲望裏生)


먼저 밤새 안녕을 돌보고 여쭙는 자식의 예인 ‘혼정신성’ 그 ‘사모함’을 다하지 못한 아픔이 짙게 배어 나온다. ‘침원엔 가랑비’마저 ‘부슬부슬’ 내려 가누기 힘들던 정조의 마음은 ‘사흘 밤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토로에서도 여실히 묻어난다. 그런 그리움이 지지대고개 위에 닿으면 다시 길어졌으니, 아버지 묘가 있는 화산(花山)을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고개였기 때문이다.

고갯길에서의 긴 멈춤과 돌아봄의 시간은 다른 시에도 잘 나타난다.

 

시의 마지막 구절


‘새벽에 화성 떠나 머리 돌려 바라보며(明發華城回首遠)/
지지대 위에서 또 한없이 머뭇거렸네(遲遲臺上又遲遲)’

 

라는 대목은 정조의 깊은 그리움을 겹쳐 보인다. 멀리 화산을 돌아보며 차마 발을 뗄 수 없어 머뭇거리던 정조의 회한 어린 모습. 그 심중을 ‘지지대 길에’ 올려놓고 보니 한숨소리마저 밟히는 듯 아릿하게 잡힌다.

 

■ 정조 어제(御製) 시에 화답한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시(詩)

다산 정약용의 초상, 작가 미상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은 정조 시대 청년기에 벼슬에 나가 정조의 깊은 총애를 받아 임금의 측근에 있었다. 조선왕조 시대에 사도세자 문제를 두고 나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투쟁이 심했다. 시파(時派)는 조선 후기 사도세자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붕당 대립에서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그 아들인 정조의 정책에 편승하는 부류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
정조를 지지하는 입장을 가진 시파에는 노론의 일부 및 소론과 남인세력 등이 참여했다. 정조의 정책에 반대했던 벽파에는 대체로 노론의 다수가 참여했고, 원래 벽파는 정조대의 정국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시파가 큰 탄압을 받았다.
정조는 보수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僻派)의 공격에 시달리며 순탄치 못한 관료기를 보내게 된다. 지지대의 길목에서 돌아볼 멈춤의 시가 또 있다. 화성 축성에 과학적 기여가 특히 컸던 조선 최고의 학자이며 시인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시다. ‘
정조는 오언 율시 1편을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리게 했다
아래 시는 정조 어제(御製) 시의 화답으로 심금을 더 울린다. 임금과 신하가 시를 주고받던 전통을 물론 지지대에도 마음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지지대에서 행차를 멈추며(奉和聖製遲遲臺駐韻)-다산 정약용


지지대에서 행차를 멈추며
(奉和聖製遲遲臺駐韻)
대 아래 푸른 실로 꾸민 행차길
(臺下靑繩路)
아득히 화성으로 곧게 뻗었네
(遙遙直華城)
상서로운 구름은 농부 기대 맞추고
(瑞雲連野望)
이슬비는 임금의 심정을 아는 듯
(零雨會宸情)
용 깃발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龍旗色)
의장대 피리 소리 퍼져나가네
(悠揚鳳管聲)
그 당시 군대 행렬 어제 일처럼
(戎衣如昨日)
상상하는 백성들이 지금도 있어
(想像有遺氓)

 

수원 화성의 남대문격인 팔달문과 서장대


화성 축성에 과학적 기여가 컸던 정약용이 정조의 참배 때 함께 다녀오면서 지지대에 이르러 정조의 효심을 담은 어제(御製) 시에 화답으로 심금을 울린 글을 지었다

시를 보면 지지대고개를 넘을 때 환궁 가마를 멈출 수밖에 없었던 정조의 심경이 전해진다. 그 고개야말로 아버지 묘를 모신 화산을 잠시나마 더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휴식을 한참 취한 뒤에도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워서 정조의 행차는 항상 느릿느릿 움직였다고 한다. 느릴 ‘지(遲)’를 따서 지지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의 배경은 지금 다시 봐도 우리네 마음을 지긋이 당긴다.

현재 지지대비(遲遲臺碑)는 비각에 둘러싸여 자세히 보기가 어려운 모습이다. 비문이 결락된 곳도 있는 데다 비신 곳곳에는 한국전쟁 때 맞은 탄흔도 남아 있다.

 

■ 현존하는 조선 임금의 어진(御眞)

 

어진 제작에는 국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린 도사(圖寫), 생존시에는 그리지 못하여 돌아가신 후에 그린 것으로 흡사하게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추사(追寫),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거나 새로운 진전이 봉안될 때 기존에 그려진 어진을 뽄 떠 그린 모사(模寫)이다.
어진은 단순한 예술작품으로서 초상화가 아니다. 왕 그 자체로 인식된 어진을 통하여 불멸의 존재인 조선의 왕을 볼 수 있게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태조 이성계의 이모본(移模本), 원종, 영조 2점(영조 51세의 어진 (보물 932호 이모본 移模本으로 1900년에 조석진과 채용신이 모사한 어진)과 영조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연잉군의 어진(보물 1491호)만 도사본이다. 그외 순조, 문조, 철종(보물1492호), 고종, 순종 어진 초본 등이다.

 

■ 세 번이나 그려진 정조의 어진

 

[정조어진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수록본]

선원계보기략은 일명 선원보략으로 조선시대의 족보이다. 여기에 정조의 어진이 있다. 마치 삼국지의 장비가 연상되듯이 무인의 기품이 보인다. 실제 활을 잘쏘고 병법의 책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고 무예 또한 출중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도 관운장의 언월도를 잘 다루었다. 1910년에 일제가 화성행궁에 모신 것을 창덕궁에 옮기고 6.25 한국전쟁시에 부산으로 피난중에 화재를 입어 없어졌다. 
[정조어진 열성어진(列聖御眞) 수록본]

실제에 가깝게 묘사된 외모를 볼 수 있으며,
[정조영정 우당 이길범 1989년 175x110cm 수원 화성 박물관]

수원시 효행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정조의 어진은 세손 때를 포함해서 3번 그려졌으나 모두 소실된 상태이다


다만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일명 '선원보략')』이나 『열성어진(列聖御眞)』에 수록된 모사본을 통해 실제에 가깝게 묘사된 외모를 볼 수 있으며, 『순조실록』과 『홍재전서(弘齋全書)』 등에 기록된 정조의 외모 관련 글들을 통해서도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외모에서부터 건장한 무인의 기풍이 흐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뛰어난 활솜씨와 무예를 갖추어,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앞머리와 뒷머리가 영조를 닮았으며, 이마가 반듯했고 턱이 겹턱이었으며, 콧날이 우뚝하고 눈자위가 펑퍼짐했으며, 입이 크고 깊숙하며 네모났고, 또래보다 나이가 들어보였다고 한다.

 

■ 만안교(萬安橋)의 유래

만안교(萬安橋)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 조선시대 다리이다. 1789년(정조 13년)~1795년 준공,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역인 현륭원을 참배하고자 놓은 것이 시초이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한강을 넘어 노량진에 닿은 뒤 과천을 지나 남태령을 넘어 인덕원을 지났다. 남태령을 넘는 길이 험했기 때문에 정조는 수원 화성까지 능행에 편리함을 도모하고자 새롭게 길을 닦았는데 이 길이 시흥대로의 시초이다.

만안교는 아치를 사용한 홍예교(虹蜺橋)로 다리 밑에는 박석을 깔아 물의 흐름이 거세도 다리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다리 기둥의 끝도 물의 흐름에 따른 마찰을 줄이도록 마름모꼴로 하였다. 위로는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사람과 짐이 지나다니는 길을 만들었다. 

 

만안교의 모습

 

만안교의 비석과 표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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