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choyeung 2008. 12. 22. 10:36

하나로 TV의 외국씨리즈(중국)에서 재미있는 드라마 (40편)로 긴 긴 겨울밤을 보내면서 추천해 봅니다. 당태조 이연의 아들인 태종 이세민이라는 걸출한 인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글속에는 현세의 인간모습과 너무나 닮은 온갖 형태의 군상을 볼 수 있답니다. 아래 글은 일부이며 첨부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드라마의 줄거리) 천하가 어지러운 수나라 말, 이연(李淵)의 군대가 최대의 반란군 세력인 와강군을 물리치자 이에 내심 불안함을 느낀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약석(若惜)공주를 이연의 장남 이건성과 정략 결혼시키려 한다. 하지만 궁궐을 도망친 약석 공주는 이연의 차남인 이세민과 사랑에 빠진다. 후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세민은 형제간의 우애를 위해 약석공주에 대한 사랑을 정리한다. 어쩔 수 없이 궁에 돌아온 약석공주는 건성과의 결혼 조건으로 한 달안에 궁궐을 지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를 이연 집안을 몰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긴 간신 우문화급(宇文化及)은 양제가 궁궐을 건축하라는 성지를 내리도록 종용한다. 양제의 신임을 얻고 훗날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이세민은 진양궁 건축에 사활을 건다. 하지만 설계상의 헛점으로 건축도중에 궁궐은 무너지고, 약석공주는 자신의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이세민이 막다른 길에 내몰리자 기일 내에 궁궐건축을 마칠 수 있도록 그를 도와준다. 궁궐이 완성되자 약석공주와 이건성과의 결혼은 다가오고, 이세민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약석공주에 대한 사랑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면서 두 형제는 약석공주를 사이에 두고 연적관계가 된다.

 

한편, 이 때 반란을 일으킨 우문화급이 양제를 살해하자 이연은 군사를 일으킨다. 이에 약석공주는 우문화급을 죽여 부친의 원수를 갚는 자와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내건다. 세민은 묘책으로 우문화급을 붙잡지만 훗날 천하통일이란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형제간에 여자를 놓고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위정(魏征)의 충고와 모든 걸 포기하고 승려가 되겠다는 건성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의 공을 형 건성에게 양보한다. 결국 약석공주는 형 이건성과 결혼하고 이세민은 롱아(瓏兒)와 혼사를 치른다.

서기 618년 이연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당나라를 세우고 건성은 태자로, 세민은 진왕(秦王)에, 동생 원길은 제왕(齊王)으로 책봉된다. 당시 새 왕조인 당나라는 군웅이 각지에 할거하고 수나라 말기의 혼란으로 인한 민생의 피폐 등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모두가 승리감에 취해있을 때, 이세민만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여러 차례 형 건성과 치국의 방법을 논의하고자 했지만 도량이 좁은 건성은 세민을 질투하며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심한 가뭄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자 우유부단한 이연은 태자 건성에게 백성 구휼의 책임을 맡기나 국고가 바닥나고 양식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건성도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에 태자의 위세를 꺾고 부친 이연에게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주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세민은 심복 유문정(劉文靜)이 생각해 낸 식량난 해결의 묘책을 들고 형 건성을 찾아간다. 그러나 이를 세민의 음모로 여긴 건성은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민심이 흔들리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져만 가자 이세민은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가뭄피해지역으로 가서 이들 피해지역의 백성들을 식량이 풍족한 등주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한다. 이로써 국가존망의 위기가 민심을 얻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면서 갓 일어난 당왕조는 빠르게 백성들의 추대를 받게 된다.

이세민은 멸망한 수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세금과 부역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균전제, 부병제 등을 실시하면서 개혁을 단행, 천하의 민심을 얻어나간다. 이에 조정의 충신들이 세민을 태자로 옹립할 것을 이연에게 계속 권하면서 이연의 마음도 흔들리지만 세민은 자신의 관심사는 황제의 자리가 아니라 대당제국을 훌륭히 건설하는 데 있다며 태자의 자리를 한사코 거절한다. 한편, 세민을 태자로 옹립하자는 목소리가 건성의 귀에도 들어가고, 태자 건성은 극심한 불안감에 동생 원길과 음모를 계획한다.

마음이 급해진 건성은 동생 원길과 현무문에 매복하며 속임수에 걸려든 세민이 입궁하면 바로 그를 암살하려 한다. 불길한 예감에 위정은 태자비 약석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며 세민이 우문화급을 사로잡은 공을 건성에게 양보했다고 말한다. 사실을 알게 된 약석은 세민이 형제간의 의리를 위해 자신의 한평생 행복을 희생시켰다며 질책하고 이에 세민은 비통해하며 사죄한다. 약석은 세민에게 건성과 원길이 현무문에 매복해 있다가 그가 밤중에 입궁하면 살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민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형의 분노를 삭히고 모든 분쟁을 마무리 짓겠다는 생각을 하며 현무문으로 향한다. 그러나 위정의 도움으로 때마침 적시에 구원병이 도착해 세민을 구하고 원길을 죽인다. 대패한 건성은 약석과 함께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약석은 세민의 앞날에 화근이 될 건성을 검으로 찌르고 자신도 자결을 택한다. 서기 627년 이세민이 황제로 등극하니 이가 바로 당 태종이다. 이로써 중국 역사상 찬란한 역사의 첫 페이지가 열리게 되었다. 

 

 

수나라 양제(煬帝) 양광(楊廣)은 무남독녀 약석(若惜)공주를 이연의 장남 이건영에게 결혼시키려하나 동생인 이세민(후에 당나라 태종)을 좋아한다


 


서기 626년 8월 갑자일(甲子日) 이세민은 아버지 고조 이연에게서 강제로 황위를 선양받고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쳤다.

황제에 즉위한 후 이세민은 역대 제왕 중 걸출한 정치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후의 봉건 통치자들에 의해 덕망을 갖춘 성군의 전형으로 받들어졌다. 그러한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간언을 잘 받아들였다.

이세민은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잘 듣고 시비를 분명히 판단한 후에 옳은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는 일찍이 대신 소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활을 좋아하여 좋은 활을 수십개나 손에 넣은 후에 더 이상 좋은 활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소. 그런데 근래에 그것을 장인에게 보였더니 그게 좋은 활이 아니라고 하더이다.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장인은 목심(木心)이 바르지 않으면 나뭇결이 비스듬해 활은 좋아도 화살이 똑바로 날아가지 않는다더군요. 활로써 천하를 평정한 내가 아직 활도 제대로 못 보는데 천하의 일을 어찌 알 수 있겠소."

 한번은 그가 위징(魏徵)에게, "군왕이 어찌 해야 현명하다 할 수 있고, 어찌 해야 어리석다 할 수 있소?"라고 묻자, 위징은 "여러 쪽 이야기를 들으면 현명해지고, 한 쪽 이야기만 들으면 어리석어집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대단히 공감한 이세민은 대소신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서기 630년 이세민이 낙양궁(洛陽宮)에 놀러 가려고 복원 공사를 명하자, 급사중(給事中) 장현소(張玄素)가 간언을 올렸다.

"지금 전쟁이 막 끝나 사회가 아직 정상 회복을 하지 못했는데도 폐하께서 먼저 낙양궁을 복원하라 명하시니, 만약 그것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면, 수 양제, 하 걸왕, 상 주왕과 같은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세민은 이렇게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고 진지하게 검토하여 결국 낙양궁 복원을 중단하고 장현소에게 상을 내렸다.

간언을 하는 신하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위징이었다. 그는 자주 간언을 올리면서 자기 주장을 펴다가 이세민과 충돌하곤 하였는데, 설령 이세민이 크게 화를 내더라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서기 626년 이세민은 장병 징집 명령을 내리면서 10세가 안되어도 키가 큰 남자는 징집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위징은 이 조서를 거머쥐고 발송하지 않았으며, 이세민이 여러번 재촉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크게 노한 이세민은 당장 위징을 불러 그의 대담한 항명 행위를 꾸짖었다. 그러자 위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연못의 물을 다 없애고 물고기를 잡으면 나중에 잡을 물고기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지금 18세도 안된 건장한 장정도 병사로 징집하시면 나중에는 어디에서 병사를 충당하시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국가의 조세를 누구에게 부담시키겠습니까? 또 폐하께서 그전에는 18세 이상의 남자를 징집한다고 선포하셔 놓고, 지금 다시 조서를 내리시면 천하의 신뢰를 잃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이세민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한참 지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 조서를 철회하였다. 그리고는 위징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승진시켰다.

하루는 이세민이 매를 데리고 놀다가 위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무랄까 봐서 그것을 품속에 감췄다. 위징은 그것을 못본 척 하고 태종에게 업무를 보고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보니 매는 이미 숨이 막혀 죽어 있었다. 한번은 이세민이 조회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서는 노기충천하여, "언젠간는 이 촌놈을 죽여 버리고 말테다!"라고 하였다. 장손황후(長孫皇后)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고 묻자 이세민은, "위징이 항상 면전에서 나를 반박하며 난감하게 만드니 정말 짜증스럽소!"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장손황후가 잠시 물러났다가 예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들어와서 이세민에게, "군주가 현명해야 신하가 감히 직언을 올릴 수 있는데, 위징이 감히 면전에서 폐하를 반박하는 것은 폐하가 성군이라는 뜻이 아니옵니까!"라고 축하의 말을 올리자 이세민의 노기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정관(貞觀: 627~649) 중기 이후에 태평성세가 지속되자 대신들 모두 이세민의 은덕을 극구 찬양하였지만, 오직 위징만은 맑은 정신을 잃지 않고 이세민의 열 가지 결점을 지적하여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세민은 그것을 정중하게 병풍에 옮겨적어 아침 저녁으로 읽어보며 좌우명으로 삼고 위징에게 말하였다.

"이제 나의 부족한 점을 알았으니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를 다시 볼 면목이 없겠소." 

서기 643년 위징이 병사하자 이세민은 매우 비통해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의관이 똑바른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왕조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위징이 죽었으니 나는 거울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이세민은 신하들의 간언을 아주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의 재위 전기에 국정을 운영하면서 실책이 아주 적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인재를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였다.

이세민은 일찍이 위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관리를 선택하는 일은 절대 대충대충 해서는 안됩니다. 선한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선한 사람들이 모두 몰려오고, 악한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악한 사람들이 모두 몰려오지요."

 

그가 대신 봉덕이(封德彛)에게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자 봉덕이는 "신이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대에는 정말로 뛰어난 인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럴리 없다고 생각한 이세민이 말하였다.

"사람을 쓰는 것은 기물을 사용하는 것처럼 각자의 장점을 취해야 하오. 옛날에 태평한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유능한 인재들을 다른 시대에서 빌어왔겠는가! 그대 자신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 어찌 당대에 뛰어난 인재가 없다고 단정하는가!"

 

그는 당시에도 인재가 많다는 것을 굳게 믿고 언제나 세심히 살피면서 새로운 인물이나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물론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인재를 구했다.  그가 가장 신임한 맹장 울지경덕도 원래는 그의 적 유무주(劉武周)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는데, 그가 유무주를 물리쳤을 때 울지경덕은 수나라 장수 심상(尋相)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얼마 후 심상이 당나라를 배반하자 이세민 휘하의 장수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울지경덕도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세민은 오히려 그를 석방하고 자기의 휘하에 들어오기를 청했다.

"대장부는 서로 의기가 투합하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법이니 이런 사소한 일은 따질 필요가 없소이다. 나는 결코 남을 비방하는 말을 믿거나 함부로 선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울지경덕에게 수많은 금은보화를 선사하자, 울지경덕은 매우 감동하여 이세민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건성이 그를 거금으로 매수하려 하고,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고도 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끝까지 이세민을 추종하여 그의 유능한 부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무문(玄武門)의 변'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오국공(吳國公)에 책봉되었다.

 

위징도 원래는 이건성의 참모로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죽이라고 건의했던 인물이다. '현무문의 변'이 있은 후에 누군가가 그 일을 폭로하였다. 이세민은 위징을 데려오게 한 다음 탄식하며,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 하였는가?"라고 묻자 위징은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 당시에 저는 태자의 참모였으니 당연히 그 분을 위한 계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자는 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말로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세민이 한맺힌 적장을 사형에 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두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의 솔직한 말을 들은 이세민은 그가 정직하고 담력과 식견이 있는 인재임을 알아보고 처벌은 커녕 오히려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서기 629년 이세민은 백관들에게 국가의 기본 방침에 대해 논의한 후 의견을 제출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중랑장(中郞將) 상하(常何)가 20개의 의견을 내놓았는데 구구절절 사리에 맞는 말 뿐이었다. 이세민은 상하가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무관임을 알고 그가 어떻게 이런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그래서 알아보니 그것은 상하의 친구 마주(馬周)가 대신 쓴 것이었다. 마주는 비천한 출신의 문인이었다. 이세민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즉시 그를 불러들였다. 마주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본 후에 이세민은 그가 유능한 인재임을 알아보고 곧장 그를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하였으며, 그 후에 다시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시켜 조정의 대소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세민은 인재 등용 정책을 펴면서 친인척이나 연공서열을 배척하였다. 그는 항상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군주는 반드시 공평무사(公平無私)해야 천하의 인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관리는 고하를 막론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야지, 친분 관계나 자격 요건으로 관직의 고하를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서기 627년 이세민이 논공행상을 하면서 방현령(房玄齡), 장손무기(長孫無忌), 두여회(杜如晦) 등 5명을 일등공신에 명하자, 그의 숙부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紳通)이 불복하며 따졌다.

"태원(太原)에서 거병했을 때 신이 제일 먼저 호응하였고, 수년 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글재주나 부리는 자들로 전쟁에 나가본 적도 없는데,  지금 그들의 공과 관직을 신보다 높게 책정하시는 것은 정말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이에 이세민이 "숙부께서는 나라의 지친이신데 제가 어찌 신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자 이신통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원래 진왕부(秦王府)에서 이세민의 부하였는데 이세민이 황제에 등극한 후에 승진이 되지 않자, "우리는 수년 동안 생사를 무릅썼는데도 지금은 이건성의 휘하에 있던 사람보다도 지위가 낮다!"라고 원망하였다. 그러자 태종 이세민은 "인재 선발은 신구(新舊)나 선후를 따져서는 안된다. 신인이 현명하고 구관이 우둔하면 신인을 등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전에는 진왕(秦王)이었지만 지금은 일국의 군주이다. 그대들이 이렇게 원망하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 보고 그러는 것인가?"라고 대답하였다. 오로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이세민의 인재 등용 정책으로 각계의 우수한 인재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당왕조의 부강에 제각기 역량을 발휘하였다.

서기 643년 공신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이세민은 장손무기와 두여회, 위징, 방현령 등 공신 24명의 화상을 능연각(凌煙閣)에 걸어두었다. 역사에서는 그것을 '능연각화상(凌煙閣畵像)'이라 일컫는다. 그는 자주 거기에 가서 화상을 감상하면서 공신들의 행적을 찬양하고 기념하였다.   

3. 백성들의 역량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세민은 직접 수나라 전복 전쟁에 참가하여  강대한 수왕조가 농민봉기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 등극한 후에 수왕조의 멸망을 거울로 삼아 세심하고 신중하게 국가를 경영하면서,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켜 백성들의 봉기를 예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합니다. 백성들을 착취하여 군주를 섬기는 것은 자기 몸의 살을 도려내어 먹는 것과 같습니다. 배는 부를 지언정 육신은 망가져 버리듯이 군주는 부유해도 국가는 망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주의 재앙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군주가 향락에 심하게 빠지면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가중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게 되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위태로워지며 군주도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항상 이러한 이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결코 탐욕에 빠지지 않습니다."

"나는 조정에서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실수로 백성들을 해치게 될까 염려되어 몇 번이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감히 말을 많이 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주 태자 이치(李治)를 교육시켰다. 밥을 먹을 때 그는 "네가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항상 밥을 가질 수 있다."라고 하였고, 말을 탈 때는 "네가 말의 부릴 때를 알고 말의 체력을 다 소진시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을 탈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배를 탈 때는 "물은 배를 가게 할 수도 있고 가라앉힐 수도 있다. 백성은 물과 같고 군주는 배와 같다."라고 하였다. 또 "군주가 정도(正道)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백성들이 그를 보호하고, 정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그를 몰아낸다."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민본사상(民本思想)에 의거하여 이세민은 형벌과 법률 완화, 부역과 조세 경감, 균전제(均田制), 조용조법(租庸調法), 부병제(府兵制) 등을 추진하여 백성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줄였다. 대외정책에서도 그는 "중국이 안정되면 사방의 오랑캐가 스스로 복종한다"는 방침을 채용하여 가볍게 군사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의 침입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격하였다. 서기 641년 그는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족(吐蕃族: 지금의 티벳족)의 제32대 찬보(贊普: 국왕)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시집보내어 티벳족과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세민이 취한 이러한 조치들로 당왕조는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여 국력이 막강해졌으며, 이로써 중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봉건국가가 되었으니, 이 시기를 역사에서는 '정관지치(貞觀之治: 정관 시기의 태평성세)'라 일컫는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이세민은 사치스런 생활에 빠져들었다.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조세와 부역을 가중시키고 해마다 군사력을 동원함으로써 계층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서기 649년 3월 이세민은 이질에 걸려 백방으로 치료해도 효험이 없자, 태자에게 금액문(金液門)에서 국정을 대신 처리토록 명했다. 그 해 5월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이세민은 태자와 비빈, 장손무기와 저수량(褚遂良)을 불러 고명(顧命: 왕이 임종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언)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수량에게 유서를 작성하라 명하였다. 기사일(己巳日) 장안궁(長安宮)의 함풍전(含風殿)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세민이 죽은 후에 그의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드라마 제목  秦王 李世民   

첨부파일 당태종이세민.hwp총 3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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