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떠나기

choyeung 2008. 12. 22. 12:42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  1762~1836)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정약용의 초상화   
왕명으로 다시 상경했으나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급서하자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적들은 일제히 삼사를 동원해 탄핵했으니 신유박해(辛酉迫害)이었다. 형 약종은 천주교를 버리지 않자 사형 당하고 셋째 형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그리고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귀양살이의 시작에 불과했다. 10월에 황사영 사건으로 다시 탄핵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모진 고문 끝에 11월에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 현지의 민심은 냉랭했다. 부득이 동문 밖 주막에 방 한 칸을 얻어 우거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그 토방에 ‘사의제’라는 당호를 붙였으니 몸과 마음을 근신하며 살겠다는 네 가지 의지의 표현이었다. 시간이 나면 뒤로 북산에 올라 고성사의 스님과 담론했다. 겨울에는 절 방 하나를 얻어 이를 ‘보은산방’이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기거했다. 다산은 만덕산 백련사에서 혜장선사를 만나 주역과 선을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며 교유했다. 혜장은 제자인 초의를 다산에게 소개하여 배우게 하였으니 그는 훗날 초의대사로 차에 대한 숱한 이야기를 남긴 큰스님이었다.


47세 되던 1808년 봄에야 정약용은 안정된 처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동안 정약용의 학자적 삶에 감명을 받고 자식들의 교육을 부탁하던 고을 유지 중에서 해남 윤 씨 집안의 윤단이 만덕산 귤동에 있는 자신의 산정을 숙소로 빌려준 것이다. 정약용은 이 산에 차나무가 자생하는 것을 보고 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으로 했다. 그리고 산정에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을 걸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당의 동쪽에는 자신의 숙소인 동암을 짓고 서쪽에는 제자들이 기숙할 서암을 지었다. 또 초당 옆에는 뒷산골짜기의 물을 대통으로 받아 작은 연못을 만들었으니 다산의 여린 마음이 위로 받았을지 모르겠다.


강진읍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도암만이 시작되는 바다 오른쪽에 수려하게 솟은 만덕산이 보인다. 그 산 남쪽에는 신라의 고찰 백련사가 있고 조금 더 가서 다산초당이 있다. 백련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혜장선사와 교유하던 절인데 계곡에 가득한 동백숲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귤동 마을 입구에는 1977년 세운 ‘다산정약용선생유적비’가 서 있다. 그리고 골목길로 올라가면 한옥이 몇 채 보이고 다산초당 입구가 나타난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마치 궁벽한 암자 길 같아서 좁고 오르막이다.


다산초당에서 10년간 귀양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저작에 몰두했으며 <주역심전> 24권, <시경강의산록>, <아방강역고> 10권, <논어고금주> 40권, <맹자요의> 9권, <악서고존> 12권 등 참으로 엄청난 500권의 저술을 했다. 1817년 그의 귀양은 17년째이고 그는 이미 56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18년간을 보내면서 가장 귀양살이를 오래한 조선왕조의 선비가 된 셈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생가


1910년 규장각 제학으로 복권되어


이제 귀양이 풀리더라도 다시 벼슬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다산은 집필하던 <경세유표>의 원고를 옆으로 밀어 놓고 <목민심서>의 저술에 들어갔다. 1818년(순조 18년) 봄에 <목민심서> 48권이 완성되었다. 8월에야 18년 간의 귀양이 풀렸으니 다산의 나이 57세였다. 9월 14일에 그렇게 그리던 고향 마재에 돌아왔다. 그는 이미 늙었고 모함에 의한 귀양도 풀렸으나 정적들은 여전히 그를 미워해 <목민심서>를 실행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다산은 1836년 2월 22일 마재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다산이 심혈을 기울여 쓴 <목민심서>는 1902년에야 절약본으로 3책이 나왔고 1911년 나라를 빼앗긴 다음에 일제는 이 책을 일역해 통치의 참고서로 했으니 다산은 자신의 철학을 시험할 기회를 영영 갖지 못했다. 1910년 7월 18일 다산은 조선조의 마지막 결의로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며 복권되었다. 시호는 문도공(文度公)이다.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에 있는 정약용의 생가와 묘가 성역화되어 끊임없는 참배 객을 맞이하고 있다. 묘는 옛날과 다름없으나 생가는 복원되었고 입구에는 기념관이 섰다. 수원성 축성에 쓰였던 거중기의 모형이 뻗치고 서서 다산의 백성 사랑의 마음을 기리고 있다.


선생의 묘를 참배하고 바로 아래를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배들이 오가던 그 강은 지금 팔당호가 되어 수도권 2천만 백성의 젖줄이 되어 있는데, 선생은 아직도 몸을 단정히 하고 말을 삼가고 행동을 신중히 하는 ‘사의(四宜)’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남녘에서는 벌써 동백꽃, 유채꽃, 매화가 다투어 피어난다는 꽃소식이 들려오고, 사람들은 새 천년 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이 봄소식에 귀 기울인다. 하지만 남녘의 봄을 찾아가기에는 다소 멀고, 앉아서 마냥 기다리자니 좀이 쑤셔온다. 그렇다면 짐을 꾸려 강변으로 나가보자.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1762∼1836년) 선생 유적지는 문화답사는 물론 봄내음을 맡으며 강변 드라이브까지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의 위대한 실학자였던 다산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강변 풍경이 내내 펼쳐진다. 겨우내 한강을 뒤덮었던 꽁꽁 언 얼음은 어느새 녹았고, 도로 옆의 벚나무와 버드나무도 새 천년을 맞이할 꿈으로 잔뜩 부풀어있다. 차창을 열면 찬 강바람이 와락 달려들지만 거기엔 어김없이 봄내음이 한 움큼 묻어있다.


다산의 생가와 무덤이 있는 능내리 마현마을은 「강나루 건너서」 「술 익는」 강변마을. 먼저 다산기념관으로 들어간다. 거기엔 다산 영정이 2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나그네를 반기고,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실학사상이 담긴 저서와 다산이 직접 그린 서화가 전시되어있다. 수원성 축조할 때 사용하였던 「거중기」와 「녹로」 모형은 당시의 수준을 되짚어보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산이 강진의 유배생활 때 머물던 「다산초당」과 가족이 그리우면 올라가 바라보던 「천일각」 등도 모형으로 꾸며놓아 남양주 강가에서 강진 18년 유배생활을 더듬어 볼 수 있게끔 배려했다. 「다산」은 차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강진 만덕산의 별칭이었는데, 정약용 선생이 만덕산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다산은 그 와중에서도 학문에 열정을 쏟아부어 정치, 경제, 농학, 문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저술에 몰두한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양평의 두물머리 부근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살림을 하는 사람이 없어 「박제된 동물」 같은 느낌이 들지만 아쉬운 대로 다산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집필하며 마음을 다잡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다산의 정신을 되새기며 몇십 걸음 걸어 뒷동산에 오르면 다산의 묘. 아래로 한강의 한 자락이 내려다보인다. 유적지를 나와 밤나무 숲을 지나 한적한 강가로 간다. 바다 같은 팔당호가 이른 봄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강바람이 조금 차갑지만 강 파도 일렁이는 길을 좋은 사람과 걷는 즐거움은 다산 유적지를 찾은 보너스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은 좋아라 뛰놀고, 팔짱 낀 연인들은 이른 봄볕 터지기 시작한 강가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새 천년의 첫봄은 그렇게 오고 있다.


서울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쪽으로 가다 팔당대교를 지나면 「다산 정약용 선생 묘역」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우측의 구도로로 빠져 5km쯤 가면 다산 유적지가 있는 마현마을. 청량리에서 능내행 시내·좌석버스를 이용하든지,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능내역에서 내리면 된다.

(민병준 여행칼럼니스트 )www.dasan.or.kr

 

부임육조(赴任六條)


다른 벼슬은 다 구해도 좋으나 목민관만은 구할 것이 못된다.

임관 발령을 받아 처음에 재물을 함부로 나누어 주거나 써서는 안 된다.

저보(邸報)를 처음 내려보낼 때 그 폐단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줄여야 한다.

부임할 때 여비를 국비로 받고서도 또 백성들에게 거둔다면 임금의 은혜를 감추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니 하여서는 아니 된다.


 부임길의 행장은 그 의복이나 안장을 얹은 말(鞍馬)은 옛것을 그대로 쓰고 새로 장만하지 말아야 한다. 함께 가는 사람이 많아도 안 된다.

 이부자리와 속옷 외에 책 한 수례를 싣고 간다면 청렴한 선비의 행장이라 할 것이다.


 양사(兩司)의 서경(署經)이 끝난 후 임금에게 부임 인사를 드려야 한다.

 공경(公卿)과 대간(臺諫)에게 부임 인사를 드릴 때에는 자신의 재기(材器)의 부족함을 말할 것이며 녹봉(祿俸)의 많고 적음을 말해서는 안 된다.

 신영하기 위해 아전들이 하인들이 오면 그들을 접대함에 과묵하고 장중하며 또 온화하게 한다.

 임금을 하직하고 대궐 문을 나서게 되면 백성들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여야 한다.

 가까운 이웃 고을로 관직을 옮겨져서 지름길로 부임하게 되면 사조(辭朝)하는 예는 갖추지 않는다.


 부임길에서도 장중하고 화평하며, 간결하고 과묵하여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하여야 한다.

 길을 갈 때에 미신으로 꺼리는 곳이라 하여 바른 길을 버리고 딴 길로 돌아서 가려고 하거든 마땅히 바른 길로 가서 사괘(邪怪)한 말을 깨뜨리도록 해야 한다.

 청사에 귀신과 요괴가 있다고 해서 아전이 기피할 것을 말하여도, 조금도 구애받지 말고 선동하는 습속을 진정시키도록 해야 한다.

 관부를 두루 찾아가 마땅히 먼저 임관된 자의 말을 귀담아 들을 것이며 해학으로 밤을 보내서는 안 된다.

 부임 하는 전날 하룻밤은 마땅히 이웃 고을에서 묵어야 한다.


 부임할 때는 날을 가리지 않는다. 우천시에는 날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부임하여 관속들의 인사를 받아야 한다.

 인사하고 물러가면 단정히 앉아서 백성을 다스리는  길을 생각한다. 너그럽고 엄정하고 간결하고 치밀하게 계획해서 시의(時宜)에 알맞도록 하고, 이를 스스로 굳게 지켜 나가야 한다.


 그 이튿날 새벽에 자리를 펴고 정사에 임한다.

 이날 선비와 백성들에게 명을 내려 병폐에 대한 것을 묻고 여론을 조사하도록 지시한다.

 이 날에 백성들의 소장(訴狀)이 있다면 그 판결은 간결하게 한다.

 이 날 몇 가지 명을 내려 백성들과 약속하고, 바깥 기둥에 북 하나를 걸어 놓도록 한다.

 관에서 하는 일은 기한이 있는데, 이 기한내에 이행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법령을 가볍게 여길 것이므로 기한의 믿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날 책력에 맞는 적은 책자를 만들고 모든 일의 정해진 기한을 기록하여 잊어버림이 없도록 대비토록 하라.

 그 이튿날 늙은 아전을 불러 그림 그리는 화공(畵工)을 모아 고을의 지도를 그려서 벽 위에 게시토록 하라.

 도장의 글씨는 마멸되어선 안 되고, 도장대신 서명하는 글은 초솔(草率)해서도 안 된다.

 이날 나무 도장을 몇 개를 파서 여러 마을에 나누어주도록 한다.

註  순막(詢막) : 병폐가 되는 일을 묻는 것. 제비(題批) : 소송의 판결문(判決文).  완령(玩令) : 법령을 우습게 여김.  적력소책(適曆小責) : 책력에 맞는 작은 책자.  보(補) : 돕는 것. 유망(遺忘) : 잊어버리는 것.  사경도(四境圖) : 관할 지역을 그린 그림.  인문(印文) : 도장의 글씨.  만멸(漫滅) :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아니하는 일.  화압(花押) : 도장 대신 서명하는 글자. 즉 지금의 사인.

 

 

율기육조(律己六條)


 기거에 정도가 있으며 복장(관대(冠帶))를 단정히 하고 백성을 대할 때에 장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옛날의 도이다.

 공사에 틈이 나면 정신을 집중하여 생각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책을 생각하며 지성으로 선을 찾아라.

 말을 적게하고 갑자기 성내지 말라.

 아랫 사람을 너그럽게 거느리면 따르지 않을 백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윗 사람이 되어 너그럽지 아니하고 예를 행할 때 있어서 공정함이 없으면 무엇을 보겠느가?」하였으며 또한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는다」고 하였다.

 관부의 체통를 지키기 위해 엄숙함에 힘써야 하고 수령의 곁에는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군자가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없으니 백성의 윗사람이 된 자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색을 끊으며 소리와 풍류를 물리치고 공손하고 단정하며 엄숙하여 큰 제사를 지내듯 하며 유흥에 빠져 정사를 어지럽히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한가하게 놀이를 즐기며 풍류로 새월을 보내는 것은 백성들이 기뻐하는 바가 아니다. 몸가짐을 단정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만 못하다.

 다스리는 일도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마음도 이미 즐겁다면 풍류를 마련해서 백성들과 함께 즐기는 것 또한 선배들의 성대한 일이었다.

 따르는 하인을 간략하게 하고 그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민정(民情)을 뭇는 다면 기뻐하지 않을 백성이 없을 것이다.

 정당(政堂)에 글 읽는 소리가 나면 이는 곧 청사(淸士)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시를 읊고 바둑을 두면서 정사는 아전에게 맡긴다면 그릇된 것이다.

 전례에 따라 일을 살피고 대체를 지키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시대가 맑고 풍속이 순후하여 지위와 명망이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염결(廉潔)이란 목민관의 기본 임무 이며 모든 선(善)의 원천이요.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청결하지 않고는 목민을 할 수 있었던 자는 사람도 없다.

 염결이란 천하의 큰 장사와 같다. 그러므로 크게 탐하는 자는 반드시 청결한 것이니 사람이 청결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지혜가 깊은 자는 청결로써 교훈을 삼고 탐욕으로써 경계를 삼지 않은 자가 없었다.

 목민관이 청결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그를 도둑으로 지독하여 마을을 지나갈 때에 더러운 욕설이 높을 것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한밤중에 한 일이 아침이면 드러난다.  비록 물건이 사소하다 하더라도 은정(恩情)이 맺어졌으니 사사로운 정이 오고간 것이다.

 청결한 벼슬아치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지나가는 곳의 산림이나 천석(泉石)도 모두 그 맑은 빛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무릇 물건이 고을에서 나왔다면 반드시 고을의 폐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라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야만 청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무릇 교격(矯激)한 행동이나 각박한 정사는 인정에 맞지 않아서 군자의 취할 바가 아니다.

  청렴하나 치밀하지 못하며 재물을 쓰면서도 실효가 없는 것은 칭찬할 것이 못 된다.

  무릇 민간의 물건을 사들일 때 그 관식(官式)이 너무 헐한 것은 마땅히 시가대로 사들어야 한다. 무릇 그릇된 관례가 전해 내려오는 것은 굳은 결의로 이를 고치도록 하고, 고치기 어려운 것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무릇 포목과 비단(布帛)을 사들일 때는 인첩(印帖)이 있어야 한다.

날마다 쓰는 장부는 자세히 볼 것이 아니니 끝에 서명을 빨리 해야한다.

 목민관의 생일날 이교제청(吏校諸廳)에서 혹 성찬을 올리더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희사하는 일이 있더라도 소리내어 말하지 말며 생색내지 말며 남에게 이야기하지도 말고 전임자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청결한 자는 은혜롭게 용서하는 일이 적으니 사람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긴다.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로 돌리고 남을 책하는 일이 적으면 된다.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청결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렴한 소리가 사방에 펴저서 아름다운 이름이 날로 빛나면 또한 인생의 지극한 영광인 것이다.


  자신을 닦은 뒤에야 집안을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이치이다. 그 고을을 다스리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한다.

 국법에 어머니를 모셔 봉양하면 나라에서 그 비용을 지급하고 아버지를 모셔 봉양하면 그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데 그것은 뜻이 있는 것이다.

 청렴한 선비가 관직에 부임할 때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 가족은 처자(妻子)를 이르는 것이다. 형제간에 서로 생각이 날 때는 가끔 왕래할 것이나 오래 머물러선 안 된다. 내행(內行)이 내려오는 날에는 아주 겸소하게 행장을 검약하게 해야 한다.

 의복의 사치스러움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귀신이 시기하는 바이니 복을 꺾는 것이다.

 음식을 사치스러움게 하는 것은 재정을 소모시키는 것이며, 물자를 탕진하는 것이니 재앙을 부르는 것이다.

 규문(閨門)이 엄하지 못하면 집안의 도리가 어지러워진다. 한 가정에 있어서도 그와 같거든 하물며 관서에 있어서 어떠하랴. 법을 세워서 금하고, 우뢰와 같고 서리와 같이 해야 한다.

 청탁이 없고 뇌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바른  집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건을 살 때 그 값을 따지지 않고, 위엄으로 사람을 부리지 않으면 그 규문은 곧 존경을 받을 것이다.

  첩을 두면 부인은 이를 질투한다. 행동을 한번 잘못하면 소문이 널리 퍼진다. 일찍이 끊어서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어머니의 인자한 가르침이 있고 처자가 그 계율을 지킨다면 이는 법도 있는 집안이라 말할 수 있고, 백성이 이것을 본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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