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choyeung 2008. 12. 23. 13:59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이는 한국 최초의 미학 미술사학자인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의 수필제목이다. 1985년 우현선생의 반일(反日)의지를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1985.6월에 동해구에 세운 돌비인데 경북 감포 앞바다에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이견대(利見臺)에서 내려와 감은사와 대왕암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서 있다. 평소 우현은 신라의 제30대 문무대왕(661~681)의 위업을 후학들에게 갈파하였고 문무대왕의 산골처(散骨處)인 대왕암(일명 문무황제 수중릉)을 소재로 시를 남겼다

 

대왕암

 

대왕의 우국성령은

소신(燒身)후 용왕 되사

저 바위 길목에

숨어 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敵鬼)를 조복(調伏)하시고

 

우국지정이 중코 또 깊으시매

불당에도 들으시다

고대(高臺)에도 오르시다

후손은 사모하여

용당(龍堂0이요 이견대(利見臺)라더라

 

영령이 환현(幻現)하사

주이야일(晝二夜一) 간죽세(竿竹勢)로

부왕부래(浮往浮來) 전해주신

만파식적(萬波息笛) 어이하고

지금은 감은고탑(感恩孤塔)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대종천(大鍾川) 복종해(覆鐘海)를

오작아 뉘지마라

창천이 무섭거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뜻 있어 운다 하여라

-1940년 高麗時報에서

 

 

신라 문무대왕 유언- 新羅 文武大王 遺言 (屛風)

 

 

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君臣以遺言葬東海口 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추칠월일일 왕훙 시왈문무 군신이유언장동해구 대석상  속전왕화위용 잉지기석위대왕석

가을 칠월일일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문무라 하고 군신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큰바위 위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고 그 돌을 대왕석이라 한다.

<東海口 大王岩의 由來와 化龍에 대한 三國史記의 記錄>


遺詔曰 『寡人運屬紛紜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携 聿寧 遐邇  

유초왈 과인운속분운 시당쟁전 서정북토 극정강봉 벌반초휴 율영

하이 

왕이 遺言하시기를 “나는 國運이 마침 어지럽고 戰爭하는 時代를 當하여 서쪽(백제)을 정벌하고 북쪽(고구려)을 쳐서 능히 疆土를 平定하고 叛逆하는 자를 치고 協助하는자를 불러들여 드디어 먼곳과 가까운 곳을 두루 便安하게 하였다.

<文武王의 三國統一과 戰後平和를 위한 治績>


上慰宗祧之遺顧 下報父子之宿冤 追賞遍於存亡 疏爵均於內外 鑄兵戈 爲農器 驅黎元於仁壽  

상위종조지유고 하보부자지숙원 추상편어존망 소작균어내외 주병과 위농기 구여원어인수

이리하여 위로는 조종이 돌보아 주심을 慰勞하고, 아래로는 百姓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랜 怨恨을 갚아 주었고,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널리 賞을 주고 內外에 官職을 고루 나누어 주었으며 兵器를 녹여 農具를 만들어 百姓들이 泰平歲月을 누리게 하였다.


<三國統一 大業成就後 社會的, 政治的 安定圖謀와 태평성세>


簿賊省徭 家給人足 民間安堵  域內無虞 倉廩積於丘山 囹圄城於茂草 可謂無愧於幽顯 無負於士人   

부적생요 가급인족 민간인도 역내무우 창름적어구산 영어성어무초 가위무괴어유현 무부어사인

또 租稅를 가볍게 하고 賦役을 덜어주며 집집이 넉넉해지고 사람마다 豊足해져서 百姓은 安定되고 나라안이 걱정이 없어졌으며 倉庫에는 穀食이 산처럼 쌓이고 監獄은 텅비어 풀이 茂盛해졌으니 남이보지 않는 데서나 보는데서나 부끄럼이 없었으며 벼슬아치와 百姓들에게도 저버림이 없었다고 하겠다.

<國家 경제제도로서 租稅와 賦役에 대한 輕減策>


自犯冒風霜 遂成痼疾 憂勞政敎 更結沈痾 運往名存 古今一揆 庵歸大夜 何有恨焉  

자범모풍상 수성고질 우노정교 갱결심아 운왕명존 고금일규 암귀대야 하유한언

그러나 스스로 어려운 苦生을 무릅쓰다가 드디어 고치기 어려운 病에 걸리고, 政治와 敎化를 위하여 걱정하고 애쓰다가 다시 깊은 痼疾에 걸렸다. 命運은 가더라도 이름이 남는 것은 古今에 한결같은 法則이니 문득 죽은 들 무슨 유한이 있으랴.


<文武王 自身의 病患과 死後 對備>


太子早蘊離輝 久居震位 上從群宰 下至庶寮 送往之義勿違 事居之禮 莫闕 

태자조온이휘 구거진위 상존군재 하지서료 송왕지의물위 사거지례 막궐


太子는 일찍부터 德을 쌓아 오래도록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宰相들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官僚들에 이르기 까지 가는 사람을 잘 보내는 義理를 어기지 말고, 있는 사람을 잘 섬기는 禮節을 잃지마라.


<아들 신문왕에게 君子의 道理, 즉 義理와 禮節을 가르침>


宗廟社稷之主 不可暫空 太子卽於柩前 嗣立王位 且山谷遷貿 人代椎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종묘사직지주 불가잠공 태자즉어구전 사립왕위 차산곡천무 인대추이 오왕북산지분 거견금부지채 위주서능지망 유문동작지명


그리고 나라의 임금은 잠시라도 비위 놓을 수가 없으니 太子는 곧 내 棺 앞에 王位를 잇도록 하라. 또 산 골짜기가 바뀌고 世代도 변해가니, 저 오왕의 北山 부덤에서 어찌 金香爐의 光彩를 볼수 있으며, 위주의 西陵을 바라봄도 歲月이 흐르면 오직 동작대의 이름만을 듣게 되는 것이다.


<華麗하고 번폐로운 墳墓 葬禮를 禁하는 儉素한 哲學>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寃穴其旁 徒費資財 貽譏   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己 如此之類 非所樂焉 

석일만기지영 종성일봉지토 초목가기상 호원혈기방 도비자재 이기 간독 공노인력 막제유혼 정이사지 상통무기 여차지류 비소락언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던 영주도 마침내 한 무더기 흙무덤이 되어 나뭇꾼과 목동들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여우와 토끼들은 그 곁에 구멍을 뚫고 사니,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비방을 서책에나 남길 뿐이며, 헛되이 사람만을 고되게 하고 죽은 사람의 넋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아픔이 그지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나의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大王이 지닌 平素 儉素한 生活哲學과 思想>


屬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由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속광지후십일 편어고문외정 의서국지식 이화소장 복경중 자유상과 상제도 무종검약


임종한 후 열흘이 되면 곧 고문 바깥뜰에서 서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스스로 정해진 법이 있거니와 상례의 제도는 힘써 검소하고 절약함을 좇을 일이다.


<新羅 國王 중 最初로 埋葬대신 자신의 火葬을 遺言하고 喪禮는 儉素하게 치르도록 당부 >


其邊城․鎭遏及州縣課稅 於事非要者 並宜量廢 律令格式 有不便者   卽便改張 布告遠近 令知此意 主者施行』 

기변성․진알급주현과세 어사비요자 병의량폐 율령격식 유불편자

즉편개장 포고원근 영지차의 주자시행


 변방의 성읍을 지키는 일과 주와 현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에서 요긴한 것이 아니면 모두 마땅히 요량하여 없앨 것이며 율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고 원근에 포고하고 이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이는 이를 시행하라“ 하시었다.


<國防의 重要性과 國家經濟를 위한 租稅의 輕減과 各種 稅制改革에 대한 遺言>

『三國史記』 卷第七 「文武王<西紀 661-681년 在位>」條에서

(주) 三國史記는  高麗의 문종 23년에 金富軾이 1145년에 편찬함

 


■ 문무대왕 유언이 쓰인 병풍(屛風)의 製作

 

현재 경주시 양남면 소재의 월성원자력 방문객 실에 10폭의 병풍이 제작되어 있으며 이는  신라 문무대왕의 유언을  취하여 제작된 글로서 書藝家는  당시 東國大學校 송하경 교수 (元老書藝家 강암 송성용(宋成鏞 1913∼1999)의 아들)에게 의뢰하여 1997.6월에 제작하였다. 


송하경 교수, 오른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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