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이야기)

choyeung 2008. 12. 24. 22:19

- 인생에 있어 2가지의 비극

 

 

하나는 세익스피어의 비극 즉 우유부단했기 때문에 일어난 햄릿의 비극처럼 하나의 결점이 커다란 비극을 초래한 것으로 인간의 힘 이상의 것이 작용하는 운명적인 비극이 있다.

다른 하나는 성격에서 오는 비극 즉 인간성에서 초래하는 것으로 영악하지 못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오직 남을 믿는 마음속에만 살아온 이중섭의 일생은 손실의 연속이었다. 꿈에 살면서 현실을 모르는 그의 성격은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순수했던 것이다.


이중섭 그의 작품속에도 잘 나타나지만 순진무구한 것이 바로 그의 참된 인간성이었다.그의 작품은 주옥같이 고귀하고 순일하며 청순하였다. 즉 한국의 모딜리아니(Amedo Modigliani 1884~1920)인 것이다.


- 이중섭의 예술


1.천재들과 같이 너무나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거미가 거미줄을 짜듯이 거리낌없이 나오는 그의 기상천외한 구상, 구도의 묘미 및 형태와 색감은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천생의 소질이 이룩하는 고유의 영토였다.,닭,소 새,조개등 황토적인 주제를 다룬 대담한 필촉과 단순한 포름으로 독창적으로 제작하였다.


2.너무나 한국적이다..

<괴테>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고 하였듯이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선으로 구성된 조형미 즉 그의 작품에서 3차원적인 입체를 무시한 채로 선으로만 구성된 선조감각을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3.과감한 재료의 확대

전쟁중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것보다 생각나면 닥치는 대로 종이, 시험지, 합판, 은지에 연필이나 송곳등으로 기성미술에서 파격적인 탈피를 시도했다.


4. 비극적인 인생과 예술

일제와 전쟁이 격동하는 시대적인 역사배경 속에 스스로 무력자로 자인하여 우울의 나날과 더불어 생의 자학과 자독을 초래하고 결국 자아분열을 일으켰으며 결국 생의 무관심으로 실심 실어 실망의 연속속에 생에 항거하여 자기와의 세계에서 복수를 하였다. 즉 생명의 반역속에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 이중섭의 파란만장한 생애

이중섭은 (1916~1956)은 평남의 부유한 집안의 셋째로 출생하였으나, 5세때 부친을 여윈 충격으로 그 시절부터 먹는 것보다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평양의 공립보통학교 (초등학교) 시절에는 화가 김병기, 소설가 황순원과 동기였다. 33인 민족 대표의 한사람인 이승훈선생이 설립한 평북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는 미국 예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유럽을 둘러본 훌륭한 미술교사였던 임용련(임용련)의 미술지도를 받았다. 이중섭은 민족혼이 담긴 학교의 영향으로 유독 한글자모의 회화적 구성을 많이 그였던 유래가 되었고 또한 작품 이니셜도 영어보다 한글로 ㅈㅜOㅅㅓㅂ이나 ㄷㅜOㅅㅓㅂ으로 하였다.


19살인 1934년에 일본동경으로 유학하여 시험에 도전한 일본제국미술학교는 포기하고 이듬해 1935년인 20살에 문화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여 24살 때인 1940년에 드디어 졸업하였다. 이때 화가 김환기는 재학 선배동창이였다. 당시 그학원 야마시다(산하)선생은 이중섭 그림이 피카소 흉내를 낸다고 하자 수십장의 데상을 내어놓고 화를 내면서 항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재학시절 미술전문가와 일본신문에서는 파격적인 비평을 실어주었다.


1941년에 귀국하여 국내에서 화가 김환기 등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구성하여 서울에서 전시활동을 하다가 다시 원산에 정착하였다. 1935년부터 일본 문화학원에 입학하여 미술을 배울 때에 미술후배이면서 오랫동안 교제하였던 부호의 딸인 야마모도 마사꼬(산본방자)는 부모의 결혼반대로 고민하다가 이를 피하여 일본에서 원산에 건너오자 해방되던 해인 1945년 4월에 결혼하고 이남덕이라는 한국이름을 얻었다.


1946년에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작품활동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되어 단지 일주일만에 사직한다. 일화로서 1949년경에는 논둑에 메어논 황소를 하루종일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려 파출소에 고발당한 적도 있었다


1950년 6.25 동란시절 국군.유엔군의 북진시 화가인 최영림,장리석은 금강산에 피난하였다가 조우하였고 그들이 제주도로 피난하자 이중섭은 중공군 개입시 부산으로 남하하였으며 모든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때부터 고난의 시절이 계속되었다. 부산에서는 부두노동을 하다가 1951년에 가족을 데리고 제주도로 건너감. 그해 12월에는 부산으로 다시와서 범일동 골짜기 변전소 뒤의 판자집 단간방에서 생활함.


1952년에 생활고로 고생하던 부인과 두아들은 영양실조에 헤메다가 이를 피하기 위하여 부산의 일본인수용소로 들어갔으며 장인이 일본에서 사망후 딸에게 유산을 남겨놓자 일본으로 건너감. 이때부터 1956년 이중섭이 타계하기까지 절절한 사랑과 연민의 편지가 서로 오갔다. 


혼자 살던 그해 12월에는 부산의 르네상스 다방에서 쟁쟁한 5인의 근대화가인 손응성,박고석,이봉상,한묵과 함께 <기조전>을 개최함,


1953년 환도에 서울로 왔다가 다시 경남 통영으로 내려감. 1954년에는 진주에서 화가 박생광의 초대로 다방에서 작품 10여점을 전시함. 195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유화 41점등으로 개인전을 개최, 성황리에 작품은 절반이 팔려나갔으나 수금이 되지않고 일부는 떼였으며 연일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매일 술로 지내다가 결국 빈털터리가 되면서 이때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함.


1955년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서울의 여관방을 전전하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미국공보원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나 극도의 심신쇄약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킴. 1956년에는 그의 작품이 미국 뉴욕현대미술관(Newyork Mordern Art Museum)에 은지화 3점이 영구소장품으로 결정되는 해이기도 하였으나, 영양실조 등으로 청량리 뇌병원 무료환자실에 입원하였고 간장염으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가 40세의 일기로 비참하게 혼자 죽어갔으며 이때는 무연고자로 간주되어 3일간 시체실에서 방치되었다가 뒤늦게 친지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 김춘수의 시  -   이중섭

아내는 두 번이나

마굿간에서 아이를 낳고

지금 아내의 모발은 구름위에 있다.

봄은 가고

바람은 평양에서도 동경에서도

불어오지 않는다.

바람은 울면서 지금

서귀포의 남쪽을 불고 있다.

서귀포의 남쪽

아내가 두고 간 바다,

게 한 마리 눈물을 흘리며,

마굿간에서 난

두 아이를 달래고 있다.


- 이중섭의 그림엽서

이중섭이 1941년 귀국하여 일본에 있던 마사꼬에게 보낸 戀畵

현해탄의 섬과 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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