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야기)

choyeung 2008. 12. 24. 23:12

미술품에 관한 12가지 이야기


[1] 아쉽게 못 구한 유화 기억해 직접그려


 일반인에겐 아직도 순수미술은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분야다. 미술작품을 산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최근 발간한 '그림과 그림 값'에서 지난 10년간 월급-보너스를 쪼개그림 수백점을 사고 판 경험을 털어놓아 화제를 일으킨 경제학자 컬렉터 김재준씨의 체험담을 통해 미술과 거리를 좁혀볼 기회를 마련한다. 

①당신도 컬렉터가 될 수 있다.

최근 나는 '그림과 그림값'이라는 책을 내고 "돈이 얼마나 많길래 그렇게 그림을 모았느냐"는 이야기를 여러군데서 들었다. 우리의 잘못 된 상식중 하나가 미술품 컬렉팅을 일부 호사가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 이다. 그러나 첫 직장에서 내연봉은 2천5백만원이 채 못됐고 지금도 4천만원 정도다.

어느 해 늦가을 저녁 나는 인사동을 배회하다 우연히 부산공간화랑 의 성냥갑만한 서울 분점을 발견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낡은 액자속 의 유화 소품과 연필 드로잉 몇점. 나는 거기서 김흥수 화백의 것으로 느껴지는 사인도 없는 드로잉 하나를 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그린 한 소녀의 뒷모습 누드. 시원한 선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당장 사고 싶었지만 가게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혹 주인이 있다 해 도 내 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었다. 유리문 아래로 메모를 남겨 놓고 몇 번을 더 찾아간 끝에 드디어 신옥진 사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단숨에 인사동으로 직행한 나는 인사를 교환하고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저 벽에 걸린 스케치가 김흥수 작품인가요?" 어떻게 알았느냐는 놀라움과 함께 "그렇다"는 대답. "그러면 얼마인가요." 정확히 기억은 나 지 않지만 70만원선. 예상외로 싼값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계약금으로 10만원을 맡기고 돈이 생기는 대로 곧 찾아가겠다고했다.

그는 내가 가난한 미술애호가로 보였던지 나중에 달라고 하면서 그 림을 둘둘 싸서 내 손에 들려주었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예술을 다루는 사람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며 몇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날 저녁 내 조그만 서재에그 작품을 걸어놓고 자정이 넘도록 보 고 또 쳐다보았다. 드로잉과는 이렇게 만났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 더.

어느 초겨울 나는 강남의 한 화랑에서 김종학의 매화나무 유화를 보았다. 나무 줄기가 옆으로 하나 굵게 뻗어 있는데 가지가지마다 연분 홍꽃이 푸르른 바탕색 위에 피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쌓여 이루어진 두 터운 마티에르. 지나치게 요란한 꽃그림으로만 화가를 연상하던 나에게 는 충격이었다.

값을 물어보니 No Discount! 1주일을 고민하다 다시 들러보니 그 사이 딴 사람이 달랑 집어갔다고 했다. 그날밤 나는 쓰라린 가슴을 움 켜쥐고 내 머리 속의 매화나무를 캔버스 위에 옮겨 놓았다. 새벽까지 칠하고 또 칠해서 완성한 어설픈 그 그림을 책상 위에 놓고 아쉬움을 달 랬다.

일반인들이 미술품 수집에 관해 갖고 있는 편견은 또 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어렸을 때부터 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만이 미술을 보고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나는 금년봄 뉴욕의 한 고서점에서 산 책에서 감명깊 게 읽었다. 미국의 한 컬렉터 이야기였다.

허시혼(1899∼1981)이라는 뉴욕 빈민가 출신의 유태인 소년은 13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문화적 소양은 커녕 학교교육 도 제대로 받지 못한 불쌍한 주인공은 18살때 판화 2점을 우연히 사게 된 다. 허시혼은 타고난 성실함으로 마침내 광산을 가진 큰 자산가가 됐고 그림은 평생에 걸친 그의 열정적 사랑의 대상이 돼 40년에 걸쳐 6천점의 회화, 조각, 드로잉 등을 수집했다.

그는 화랑 또는 작가에게 작품을 사면서 그림에 대한 안목을 높여 갔다. 하도 인정사정없이 값을 깎는 통에 화상들은 그가 나타나면 긴 장하곤 했다. 그러나 수전노 같아 보이는 그는 가난에 시달리는 신인들 의 그림을 많이 사 주기도 했다.

그의 안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사들인 드 쿠닝같은 신인 들이 거의 모두 유명작가로 성장한 데서 알 수 있다.

컬렉터의 작품 보는 눈은 그가 어떤 신인작가의 그림을 사느냐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만년에 그의 컬렉터로서의 명성은 미국 영국 프랑스가 그의 소장품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벌인 치열한 경합에서 잘 입증됐다.

마침내 존슨 대통령의 설득으로 그는 스미소니언박물관 내의 허시 혼미술관 기공식에 참석하게 됐다. 사업가 허시혼은 잊혀졌지만 컬렉터 허시혼의 명성은 미국 워싱턴에 세워진 그의이름을 딴 미술관에서 영생하 리라.

재력이나 안목 모두 미술수집의 걸림돌은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이 가을 당신의 인생을 바꿔놓을 운명의 그림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2] 미술작품 불황때 사라


1990년 가을, 서울의 어느 화랑. 화랑가를 배회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L씨가 묻는다.

"H화백의 10호가 있나요?" "네 마침 하나 있습니다. 운이 좋으시군요.".

"얼마죠?" "네, 호당 100만원에 10호니까 1000만원입니다." "10%만 빼 주시지요.".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화랑 대표 C씨.

"그러고 싶지만 이젠 저도 이 가격에 살 수가 없어요. 엊그제 H선생 님이 호당 150만원으로 가격을 올리겠다고 통보했거든요. 아직 딴 화랑 에는 소문이 안 났을거예요. 특별히 옛날 가격에 드리는 거예요.".

할 말이 막힌 L씨. "그럼 포장해 주세요.".

직원이 그림을 싸는 동안 함께 커피를 마시며 C사장은 묻는다.

"그림은 마음에 드십니까." "H선생님 그림 맞지요?".

"네" "10호 맞지요?". "그러믄요." "그러면 됐지요.".

핸드백에서 100만원짜리 수표 10장을 꺼내 그 자리에서 지불하고 그 림과 함께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L여사 뒤에서 미소짓는 C사장.

이번에는 중견 인기화가 L화백의 전시회. 끊임없이 몰려드는 애호가 들. 이미 팔린 그림 아래에는 빨간 점이 찍혀 있다. 갑자기 나타난 한 고객. 그림이 걸린 벽을 가리키며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순간 귀를 의심한 여직원은 사장님을 급히 부른다. 전시회가 끝나기 도 전에 전부 매진. L화백은 그림 값을 호당 30만원에서 80만원으로 올 리겠다고 선언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7년이 지난 1997년.

전시를 열고 하루종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단골 컬렉터들. 뜨내 기 구경꾼과 전시회 팸플릿을 미술숙제로 내려는 학생들만 간간이 들어 온다. 화랑사장은 단골 고객이 위탁한 원로 작가 S씨의 그림을 팔기 위 해 몇년전만 해도 자주 들르던 K사장에게 전화한다.

"여보세요. 사장님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요새 경기가 하도 나빠서 좀 바쁘네요.".

"S화백 그림이 아주 싸게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다음 주 초에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며 C사장은 혼잣말한다.

"전에는 딴 사람에게 팔지 말라며 그 날 저녁으로 득달같이 달려오더 니…".

1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K사장. 기다리다 못해 다시 전화한다.

"정말 바쁘신가 보네요. 작품 내놓은 분이 급하다고 하던데…" "죄송하지만 내일 출장을 가야 하는데, 이번 주말에 꼭 들를게요.".

토요일 오후 늦게 나타난 K씨. 작품을 보더니 "좋긴 좋은데, 나도 돈 이 없어서요.".

다급해진 C사장.

"그럼 300만원만 주십시오. 소품은 귀해서 찾기 어려울 겁니다. 옛날 에는 상상도 못하던 가격이잖아요." "그렇게 급하시다니 제가 사지요. 대신에 일단 100만원 드리고 다음 달에 나머지 드려도 될까요?".

우울한 표정의 C사장.

"알아서 하십시오.".

화랑을 나서며 K사장은 흐뭇해 한다.

88년에서 90년까지 우리 미술시장은 단군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 작품내용은 보지 않고 인기작가의 이름만 듣고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화랑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더니 91년부터 시작해서 94년까지 미술시장은 계속 하향세였다. 95년에 잠깐 반짝하고 살아나더니, 95년말 두 전직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일어나면서 경기는 완전히 죽어버렸다. 지금은 한보, 기아사태와 비자금 파문으로 바닥을 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림을 살 때라고 볼 수 있다. 작년만 해 도 원하는 가격에 원하는 그림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계속 가격이 떨어지는 그림도 일부 있지만 좋은 그림은 잘 나오지도 않고 급 하게 구하려면 작년보다 더 주어야 할 때도 있다.

어려울 때 그림 산 고객을 화랑들은 잊지 않는다. 호황이 왔을 때 그 제야 찾아가면 좋은 작품은 다른 고객의 몫이다. 이번 주말에는 화랑에 가서 그림값을 물어보자.


[3] 그림값은 안아끼는 `즐거운 구두쇠들'


 

흔히 컬렉터라면 돈이 많고 시간이 넉넉한 한량쯤으로 생각한다. 다 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돈은 오 로지 그림을 사기 위해서다. 남편이 옷 사입으라고 준 돈으로 그림사는 주부들을 화랑에선 자주 볼 수 있다.

여러 해 전 어느 토요일 오후 큰손으로 소문난 한 컬렉터를 우연히 인사동에서 만났다. 내가 간 화랑에 다소 낡아 보이지만 진한 감색이 생 생한 재킷을 입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신사가 들어왔다. 내가 "옷이 좋다"고 하니까 그 분은 "선친이 일제때 동경의 양복점에서 영국 옷감으 로 맞춘 것인데 부자가 2대에 걸쳐 50년 이상 잘 입고 있다"고 말했다. 그분은 그림 사는 방법도 특이했다. 김환기 과슈를 잠시 쳐다 보다가 1천만원 정도에 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화랑주인은 꼼짝을 못하고 응했다.

그는 흥정을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 어느 작가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컬렉터들끼리는 서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상대방의 수준을 탐색하는 습 관이 있다) 당시 나는 미술가나 미술시장 상황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 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나는 김환기 말년, 나무의 나이테가 휘돌아 가는 것 같은 푸른색 점화와 이응로의 종이를 콜라주해 은은하게 채색한 문자추상이 좋다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답했다.

그 컬렉터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나이도 젊은 친구가 그림에 관 심이 많은 걸 보니 내가 처음 그림에 빠져들 때가 생각나는구먼"하더니 점심이 나같이 먹자고 했다. 일식집으로 데리고 가기에 생선초밥쯤은 먹 을 줄 알았다. 그런데 메뉴를 보더니 음료 한 병 없이 4천원짜리 김초밥 만 2인분을 시키는 것이었다. 1천만원짜리 그림은 주저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두 사람 점심값으론 1만원을 안쓴 셈이었다. 점심 메뉴는 영 기 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지만 그날 식사는 4천원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대 선배로부터 여러 수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똑 떨어진 것을 사라(누구라도 인정할 좋은 그림을 사라는 뜻)" "좋은 그림은 아무리 돈이 궁해도 팔지 말라" "화랑의 말을 믿지 말아라. 컬렉터는 화랑 주인의 머리 위에서 놀아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안목뿐이다" "절대 무리하게 사지는 말라" 등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 후 수입이 좀 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그 런데 한번 시작하니까 자꾸 그 규모가 커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주로 1백만원 이하였는데 백만원 단위로 올라가니까 또 금세 몇백만원, 1천만 원, 심지어 그 이상으로 올라간 적도 있다. 당시의 내 모습은 '간이 부 었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다. 나중에는 통장에 돈이 한 푼도 없는 지 경까지 이르러 필요한 소파도 사지 못했다. 지난 3년 동안 우리 집 경제 상황은 벽마다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돈이 없어 쩔쩔매는 '흑자도 산'상태였다.

사람이 돈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주관적인 결정이다. 일반인이 보기 에 1천만원짜리 그림 살 돈이 있으면 반가운 사람들 식사 한번 잘 대접 하고 혹은 그 돈 잘 두었다가 두고두고 잘 쓰겠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컬렉터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림값 지불이란 '열정'의 다른 이름이 다. 한눈에 1천만원짜리 그림의 가치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 4천원의 점심을 맛있게 먹는 검소함. 컬렉터는 둘 사이의 모순을 잘 조화시킬 줄 아는 특이한 사람들이다. 


[4] 애인처럼 신선한 첫 느낌 오래 가야


 좋은 그림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마티스는 "예술은 안락의자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좋은 그림은 항 상 소장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존재라는 해석이다. 또 좋은 미술 작품은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 소장가에게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 어야 한다. "그것 참, 점 하나 찍어놓은게 무척 신경 쓰이게 하네." 화 가 김종학이 이우환의 1백호가 넘는 큰 캔버스에 큰 점 하나 그려진 추 상화를 보고 한 말이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복합성(complexity) 이 좋은 작품을 고르는한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좋은 와인을 시음할 때 도 바닐라, 라스베리, 호두 등의 향이 복합돼 혀끝에 느껴진다는 식의 복합적인 맛, 이런 것을 와인평론가들은 중요시한다. 세계적인 화상중엔 와인애호가들이 많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좋은 그림은 또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처음에 가졌던 잘못의 하나는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딴 사람의 의 견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의 아집이었다. 경험많은 컬렉터의 조언을 무시 하면서 "나는 이 작품을 10년, 20년후에도 애장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 곤했다.

하지만 10년은 커녕 1년도 지나지 않아 그 그림이 싫어졌다. 일견 세 련되어 보이나 외국작품을 솜씨있게 차용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최근에 내가 가끔 놀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시 좋아한다는 점이다. 미인대회가 열릴 수 있는 것도 미의 보편성 같 은 것이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또다른 기준은 그 작가 특유의 느낌이 어느 작품에서나, 또 한 작품의 어느 구석에서도 살아나느냐를 보는 것이다. 90년대초 나는 화려한 색감 으로 남도의 산을 반추상적으로 잘 표현한 진양욱을 좋아했다. 화려한 색점이 분분이 찍힌 30호 정도 되는 작품을 한 화랑에서 보았는데 아쉽 게도 그 그림을 사지는 못했다. 3년후 태국출장 중 우연히 들른 한 화랑 에서 남국적인 화려한 색의 반추상 풍경화를 몇점 보았다. 방콕의 한 미 술대학 교수라는 이 작가의 화풍이 진양욱과 상당히 비슷해 반가운 나머 지 그때 못샀던 진양욱 작품과 가장 흡사한 것을 골라, 비행기에 들여오 느라 액자도 빼고 캔버스만 들고 왔다. 그런데 이 작품을 집에서 오래 보니까 처음 살 때만 못했다. 작품을 잘 보는 친지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보였더니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직사각형을 만들어 작품의 한 구석에 그 직사각형을 대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의 일부를 잘라냈을 때 이 작가의 특징과 색감을 한눈에 알아낼 수 있겠냐"고 물어 보았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고 하 니까 아주 좋은 작품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진양욱과 이 태 국화가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경우의 대표적 예로박수근의 작품은 화강암같은 마티에르의 특색이 작은 부분에 서도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한지 위에 모자를 해학적으로 그린 최영림의 드로잉같은 유화작품이 있었다. 올리브색이 은은한 따뜻한 느낌의 이 그림은 내가 산 지 얼마되 지 않아 딴 그림을 사느라 팔았는데 그 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 만한 작품은 또 있겠지 하고 자위하곤 했는데 내 기준으론 여태 더 좋은 작품 을 본적이 없다. 인사동에서 만난 패션 디자이너이자 컬렉터인 서정기씨 에게 그 그림의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더니 자신이 본 최영림의 종이 유 화작품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좋은 그림은 곁에 있을 때 는 그 가치를잘 모르다가도 '죽고난 후에 더욱 더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라고 노래한 영국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역설처럼, 없어지면 눈 앞에 어른어른한 존재인가 보다. 그래서 어떤 그림이 얼마나 소중한 존 재인지 테스트 해보려면 아는 분에게 장기간 빌려주고 다시는 볼 수 없 다고 상상해 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권고해 보기도 했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배운다. 특히 잘못 사고 후회를 많이 해 본 사 람만이 좋은 작품을 살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5]  비싼 소파 대신 그림으로 공간연출


 

철따라 벽지 바꾸지 말고 그림으로 변화…값오르면 일석이조 .

뉴욕 맨해튼 57번가의 러시안 티룸(Russian Tea Room). 카네기홀이 이웃에 있어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뉴욕의 문화계 인사들이 사랑방처럼 드 나드는 이곳을 유학생활 중 몇 번 들러보았다.

옆 테이블 손님들처럼 블리니(러시아식 얇은 팬케이크) 위에 캐비 어를 얹어 샴페인과 함께 먹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보르슈라는 러 시아식 수프는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위의 유명인사나 미각적 인 즐거움보다는 붉은 가죽 의자 위로 촘촘히 걸려 있는 그림들이었다.

주로 인상파식의 유화 소품과 수채화, 드로잉들이 모던한 그림들과 함께 천장까지 서너 줄씩 걸려 있었다.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뿜어내는 묘한 에너지가 이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듯했다.

내가 방문했던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의 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것 은 거실소파 위로 보이는 작은 그림들, 판화, 옛날 흑백 사진, 샤갈이 디 자인한 샤토 무통로쉴드같은 와인 레이블의 액자같은 것이었다.

돈이 잔뜩 들어간 것 같은 화려한 인테리어보다는 이들 예술품들은 그 집 주인의 취향은 물론인생역정까지 읽을 수 있는 개성적인 공간을 보 여준다.

우리는 큰 공간엔 큰 그림, 작은 공간엔 작은 그림이라는 고정 관 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은 방에 1백호 정도의 큰 그림을 걸 수도 있고, 큰 거실의 하얀벽에 1호 크기의 추상화 2점을 걸어 긴장감을 줄 수 도 있는 것이다. 또 큰 공간에 작은 그림들을 여러 점 걸고 조명에 신경을 쓴다면 운치있고 개성있는 각별한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미술관들도 작은 작품들을 미적으로 활용하여 마치 집에서 그림 보는 듯한 독특한 디스플레이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평소 나는 그림 수집만큼 경제적인 취미는 없다고 말하곤 한다. 다른 취미는 한참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아있는것이 없지만, 그림 컬렉팅은 그래도 한 무더기의 그림이 자식처럼 남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을 꾸밀 때도 비싼 소파, 비싼 벽지를 고르기보다 는 단순하고 기능적인 응접실 가구에 그림 몇 점이 벽에 걸린다면 가족들 의 정서안정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유리할 것 같다.

예를 들어 3백만원에산 이탈리아 소파는 1년 후에 50만원도 받을 수 없지만, 그림의 경우는 아무리 집안 장식을 위해 산 것이라도 같은 기 간 후 적어도 80%의 가치는 유지가 된다.

뿐만 아니라 안목을 갖고 작품을 선택했다면 가격이 오를 수도 있 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재판매 가치(resale value)가 유지된다고 한다.

오디오 취미를 가진 사람 중에는 마란츠나 웨스턴 일렉트릭같은 과 거의 명기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최첨단 기계가 좋을 때도 있지만 사자 마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싫어서라는 대 답을 들었다. 아트 인테리어의 또다른 장점은 변화를 주기 쉽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벽지라도 한 번 바른 것을 뜯어내어 다시 쓰기는 어렵 다. 철따라 벽지를 바꾸는 것 보다는 여름엔 시원한 푸른색의 추상화, 겨울에는 붉은 색의 꽃 그림으로 바꿔 거는 것이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변화를 주는 것은 예술에서나 생활에서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 다.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나는 우선적으로 그림을 바꾸어 걸어 본다.그 림은 나만의 공간을 꾸밀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청전 이상범의 차분한 설경이 걸려 있는 한옥의 사랑방과 이대원의 화려한 농원이 벽을 장식한 아파트의 서재는 그 분위기는 다르지만 인상 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우리네 생활이다. 그렇지만 작은 아파트 거실벽에 할아버지 할머 니의 빛바랜 결혼사진이나 유치원 다니는 딸의 크레파스 그림, 또는 신인 작가의 작은 수채화등을 솜씨있게 걸어놓는다면 뉴욕의 대컬렉터 부럽지 않은 만족감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소파를 살까, 그림을 살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6] 박수근 그림값 30년새 10만배 올라

 

박수근.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화가로까지 사후에 추앙받는 사람이 다. 그러나 생전에 그는 물감 살 돈이 없어 쩔쩔 맬 정도로 가난에 시 달렸고, 심지어 1957년 국전에 낙선하는 등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아기 업고일하는 어머니, 공기놀이 하는 소녀, 동네 어귀의 할아버 지와 손자 등 50년대 가난했지만 사람사는 정이 살아있던 시절 우리의 삶 을 그만큼 진솔하게 그려낸 작가도 없을 것이다.

그의 그림값은 그의 인생 이상으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1959년에 박수근의 3∼4호 정도 소품은 4만환(62년 화폐개혁 후 기 준으로 4천원)정도.

지금 생존한 원로화가들과 가격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싸게 팔렸 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79년 전시회 때 호당 3백만원, 89년 엔 2천만원으로 오르더니 1991년 호당 1억원 이상 호가하는 신화를 만들 었다. 절대액수로 무려 10만배가 오른 셈이다.

상대적으로 비교해도 30여년전 박수근과 같은 가격에 팔렸던 화가 들의 호당 가격이 91년 경에 1백50만∼4백만원 했으니 30∼60배나 격차가 난다.

당시 그림을 산 소장가들도 순간의 선택이 한 세대가 지난 후 이런 엄청난 차이를 만들 줄은 상상도 못했으리라.

최근 소더비 경매에서 '곡식 빻는 어머니'라는 제목의 박수근 6호 소품이 38만7천5백달러(대략 4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박수근이 활동하던 60년대초 일반 샐러리맨 월급의 3분의 1이면 그 의 유화소품을 살 수 있었다고 원로 컬렉터들은 말한다.

요즘은 일반인이 한 푼도 쓰지 않고 10년을 모아야 소품 하나 집에 걸 수 있으니 구매력 기준으로 대략 4백배에 육박하는 돈이 더 필요한 것 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면 미술을 포함한 문화상품의 가치가 가속 적으로 오르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부가 축적되면 단순한공업생산품 이 아닌 새로운 가치있는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최근 한 컬렉터가 재미있는 질문을 했다. 박수근 그림값이 앞으로 더 오를 여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분은 달이 둥실 뜨고 하얀 백자가 있는 김환기 초기 작품이 어 머니와 아기를 그린 박수근보다 작품성으로는 절대 못하지 않은데 가격은 몇분의 1에 불과하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과거 그 시절을 애틋하게 기억하는 기성세대가 사라진 후에 도 과연 박수근의 그림이 정감어린 호소력을 갖겠느냐는 의문도 솔직하게 토로했다.

미술품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이 역시 수요와 공급이 라는 경제원리에 좌우된다. 평론가들이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고, 대중 적 인기가 있고, 작품이 귀하면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다.

와인의 예를 봐도 일반적으로보르도 적포도주 중 최고가인 '페트루 스'는 '라피트 로쉴드' 보다 4배 정도 더 비싸다. 그렇다고 후자가 전자 의 4분의 1의 품질은 아니다. 그러나 워낙 '페트루스'의 절대 산출량이 적고 그 독특한 맛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않아 비싼 가격이 유지되는 것이 다.

"당신 그림의 마티에르가 도자기 같소"라고 외국 화상이 평한대로 김환기 특유의 귀족적인 마티에르도 좋지만 마애석불의 화강암같은 거칠 거칠한 박수근식 소박함이 그림값에 상관없이 소중한 것이리라.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은 시대를 초월해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물랭루즈의 무희를 그린 로트렉이나 노동자 아버지와 아 들을 목판에 새긴 오윤의 판화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수근이 그린 사람들의 선을 보면 부분적으로 직선인 듯 싶지만 전체적으로 곡선미를 나타내는 특이한 아름다움이 있다.

할아버지의 손은 작은데 일하는 어머니의 손은 얼굴만큼이나 크게 그려 우리 어머니들의 생활력을 표현한 것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박수근의 그림값이 얼마까지 오를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20년전에 이중섭, 박수근의 그림값이 호당 1백만원을 넘자 언론에서 너무 비싸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20년후에는 지금 가격이 싸다고 느낄 지도 모를 일이다.


[7] 그림수집은 증권투자와 다르다

 

내가 근무하는 서울 양재동의 빌딩 1층엔 한 증권사 객장이 있다. 붉은색과 푸른색 숫자들이 무수히 점멸하는 시황판을 보면, 짤막한 경구를 옥외전광판 등에 내보이는 미국 설치미술가 제니 홀저(1950∼) 의 대형 작품이 연상된다. 주가지수가 올라가 전광판이 온통 붉은색 으로 물들 때 백만장자가 된 듯 기뻐하고 폭락장세일 땐 의자에 깊 이 파묻혀 고뇌하는 투자자들을보면, 이 세상 어느 미술작품인들 이 런 감동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는 주식투자와 미술품컬렉션의 본질적인 차이를 간과한, 순전히 상상일 뿐이다.

80년대말 다량의 주식을 팔아 90년, 91년에 걸쳐 그림을 많이 산 컬렉터들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다. "주식을 가지 고 있었으면 더 손해를 보았을텐데 불행 중 다행"이라는 답이었다. 89 년에 5만8천원하던 증권사 주식이 지금은 7천2백원, 1만9천원하던 은행주식이 액면가 이하인 3천원까지 폭락했다는 것이다. 그림값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상당수 원로작가들 작품이 91년 가격의 대략 절반수준보다는 비싼 값으로 아직 거래가 가능하다. 그림 가격이 떨 어졌다고 낙담하는 분들에게 다소 위안이 될 지 모르겠다.

증권과는 달리 미술품이란 미적효용(미적효용)을 주는 소비재의 역할과 투자의 수단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투자가치도 중요하 겠지만 일단은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사는 것이다. 오늘 만난 이 여 자가 앞으로 좋은 아내가 될 지 그 확률을 계산하기에 앞서 그냥 한 눈에 반해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주식투자하듯 미술품에 접근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한 원 로작가의 그림값이 호당 2백만원에서 1백만원이 되고, 다시 80만원 이 된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바닥이다"라고 생각한 중견 업체 사장이 주식시장에서 작전하듯 한번에 40여점을 사들였다. 다시 오 르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값은 더 떨어졌다.

고객의 자금을 위탁받아 주식, 채권을 사고 팔며 고수익을 올려 커미션을 받는 사람을 펀드 매니저라고 부른다. 나도 미술품의 단기 매매를 통해 수익을 올려 보겠다는 생각으로 일종의 아트 펀드 매니 저를 작년에 한 6개월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했다. 그 러나 불경기에 한보사태 등까지 겹쳐 일부 그림들은 손해까지 보며 팔아 간신히 본전을 맞춰주고 빠져나왔다. 수익은 커녕 스트레스만 받았다. 예술을 예술로서 보지않고 단기적인 투자의 대상으로만 본 데 대한 처절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반면에 정말 그림이 좋아서 산 사람 중에는 나중에 큰 돈을 번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미국인 마거릿 밀러는 한국에 있을때 박수근의 예술혼에반해서 여러 점을 샀다.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계 속 박수근의 그림을 샀고, 박수근이 밀러 여사에게 보낸 감사 편지 가 아직도 남아있따. 훗날 몇십배의 값을 치르고 우리가 다시 사 온 셈이니 이 컬렉터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이처럼 그림을 살 때는 안목과 작품에 대한 사랑이 요구될 뿐이다. 값이 오르냐 마느냐는 그 다음문제다. 내가 매입하는 한 주, 두주가 모여 그 회사를 살리 고 나아가 경제가 발전하다는 큰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국민소득 1만달러인 나라에서 소비는 2만달러 수준이라는 말을 요즘 우리는 듣고 있다.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낮은 루마니아가 세계적인 조각가 브랑쿠시를 배출했고 매일 저녁 오페라가 열리면 객석이 꽉 들어찬다고 한다. 문화가 침체된 채 규격화된 제품만 만 들다보니 선진국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물건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제니 홀저가 지금의 한국경제를 보고 작품을 만든다면 '순수미술이 경제위기의 해답이 될 수도 있다'는 글을 옥외전광판에 올릴지도 모른다. 


[8] `문화사랑방' 화랑에 자주 가자


약속장소로 활용해볼만...화집-미술책 살피며 안목 키워야 .

뭐니뭐니 해도 미술품 컬렉션은 화랑에서 시작된다. 특히 우리나라 처럼 미술관 문화가 불모상태에 가까운 경우 화랑은 일반 시민들이 그 나마 오리지널 미술품을 접할 수 있는 값진 공간이다.

화랑은 그냥 들어가 휘 돌아 보고 나와도 입장료 받는 사람이 없 다. 화랑에서 전시하는 작품들은 기획전이니 상설전이니 하며 그때그 때 바뀌니까 언제나 다양한 그림을 접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친구 중에 그림 살 여유는 없지만 화랑에서 항상 데이트 약속을 한다는 사람이 있었다. 커피 값을 절약할 수 있어 좋고,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아 다행이며, 잠시나마 교양 인 행세를 할 수 있으니 더욱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랑의 문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다.

화랑이란 무엇일까. 좋은 전시회를 기획하고, 도록을 만들고, 작품 의 이해를 돕는 세미나도 열고, 무엇 보다도 애호가들이 알맞은 값으 로 좋은 작품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화랑의 역할이다. 컬렉터들 은 좋은 화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나름대로 터득한 감별법은 이렇다.

첫째, 미술책이 몇 권이나 있는지 또 어떤 작가의 화집이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 보라. 인사동의 모던화랑이나 청담동의 주영갤러리는 전 시공간은 7∼8평 남짓 작은 화랑들이다. 그런데 안쪽의 사무실을 보면 화집과 전시회 카탈로그가 빽빽이 들어 차있다. 이 화랑들은 미술전문 서점들 사이에서도 책을 많이 사는 것으로 잘 알려진 곳들이다. 그래 서 그런지 좋은 작품들을 종종 잘 찾아 내는 것 같다. 우연히 들른 청 담동의 전갤러리는 마침 젊은 사진작가의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필자 의 눈길을 끈 것은 벽면 한쪽에 잘 분류되어 꽂혀 있는 마크 로스코,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외국화가들의 화집과 '미술관의 경제학'같은 전 문서적들이었다.

둘째, 어떤 그림이 있는지를 보면 화랑 주인의 취향과 수준이 드러 난다. 나는 독특한 구작이나 드로잉이 많이 걸려 있는 화랑에 점수를 더 준다. 출장길에 그 지역 화랑에 들러 구경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다. 부산의 조현화랑에 가 보면 박서보, 윤형근 등의 추상작품이 걸려 있었고, 대구의 맥향화랑은 인상적인 구상회화 작품이 많았다.

셋째, 화랑 주인과 얘기를 해보자. 그로리치화랑이나 모인화랑은 남관, 김환기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 주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 화랑은 항상 싸게 팝니다'를 필요이상으로 강조 하는 사람, '그 조각가 작품은 시각 공해예요'라는 등 다른 화랑의 작 가를 거침없이 깎아내리는 사람, 말을 현란하게 많이 하며 혼을 빼 놓 는 사람은 일단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컬렉터가 아닌 화랑 주인의 입장에서 그림을 잘 파는 방법 은 무엇일까. 고객에 대한 친절, 그리고 미술작품에 대한 진정한 사랑 과 이해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몇 년 전만해도 내가 워낙 젊어 보여 설마 저 친구가 그림을 사랴 싶어서였는지 그림값을 물어 보아도 마지 못해 대답하던 화랑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한 화랑에서 나중에 내가 돈이 생겼을때 10여점을 산 적이 있다. 문화재 나 미술품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아는 만큼 팔린 다고 말하면 어떨까?.

공공미술관이 태부족인 우리 현실에서 화랑은 곧 문화의 전도사이 기도 하다. 안목을 가진 화랑은 유망한 젊은 작가를 발굴해서 키울 수 있고, 그런 자부심에서 상업적인 성공도 나온다.뉴욕이나 파리의 일류 화상들이 최고의 사회적 대우를 받는 것은 사회가 그들의 역할을 인정 하기 때문이다.

. [9] 미술은 역경 속에 꽃핀다

뉴욕 현대미술관, 증시붕괴 열흘뒤 개관 .

IMF 구제금융의 한파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다. 화랑가도 예외가 아 니다. 경기변동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문화분야다. 요새 인 사동이나 청담동 같은 서울의 대표적 화랑가들도 소품조차 안 팔린다고 비명이다. 문화라는 것은 의식이 풍족하고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사치스 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경제를 살리기 위해 화랑은 문을 닫 고 모든 미술활동은 중지되어야 할까.

1929년 11월8일. 대공황의 서곡, 뉴욕 증시가 붕괴한 지 겨우 10일이 지난 이 날 영문 약칭 MOMA로 잘 알려진 현대미술관이 뉴욕에 문을 열었 다. 그 시점에 미술관 설립을 후원한 블리스, 설리번, 록펠러 세 여성 컬렉터의 용기도 놀랍지만 27살의 알프레드 바를 책임자로 하여 기획한 첫 전시회에 5주 동안 5만명의 관람객이 왔다는 사실도 감동적이다. 미 국에서조차 실업자가 1천3백만 명에 달했고 미술가들의 삶은 비참해져서 국가가 나서서 보조를 해 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에도 호퍼, 오키페등 걸출한 화가가 배출되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 딩도 지었다.

1936년 유럽에서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사실적인 그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반론까지 나왔다. "무엇이 현실인가.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만이 현실인가. 인간의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이 아 니냐"는 한 예술가의 절규도 인상적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30년 대에 마티스의 댄스와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나왔으니 예술은 역경에서도 꽃피우는 것 같다.

어려움을 딛고 미술문화를 이끈 이야기는 동서양을 초월한다. 1920년 대말 요코하마에서 일본 최초의 서양화 화랑을 연 하세가와의 이야기는 매우 인상적이다. 불황이 극에 달했던 그 시절 보자기에 그림들을 싸 가 지고 팔러 다니며 오늘 팔지 못하면 걸어서 집에 간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런 정성들이 모여 오늘날 일본의 미술문화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1·4후퇴 이후 부산은 피난민들로 초만원이었다. 이때 밀다원 다방은 문인, 화가들의 집합지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 화가들의 전시회도 자주 있었다. 이중섭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서정적 인 작품들을 다수 남겼으니 어려운 시절이라고 위대한 예술가의 창작의 지가 꺾이는 것은 아니리라. 서울 수복 후에는 명동의 다방에서 화가들 이 모여 꺼져가는 우리 미술의 명맥을 유지했다.

이제 우리는 새 대통령을 뽑았다. 요즘 미술관련 예산을 증액하는 것 은 어려울 지 모른다. 하지만 외국 정상 내외가 왔을 때 우리 영부인이 외국 정상 부인과 나란히 인사동 화랑에 들러 작품을 관람하는 자연스런 모습이 언론에 보도된다면 그보다 더한 문화진흥책이 있을까.

. [10] 미술가의 서한도 훌륭한 수집 대상


뉴질랜드의 행정개혁이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됐을 때 그 나라 공무 원이 불평을 했다고 한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며칠 간격으로 방문 하여 똑같은 질문을 하고 동일한 자료를 챙기고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이 기록을 잘 보관하여 후임자나 다른 사람들이 잘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전통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대 조적이다. 미술 분야 역시 우리 작가들에 대한 1차 자료들이 잘 기록 되고 보관되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술가들의 편지만을 모은 2권짜리 서한집을 미국 프린스턴의 벼룩 시장에서 금년 봄 산 적이 있다. 고호부터 자코메티에 이르는 거장들 의 연애 편지, 창작의 고통을 친구에게 호소한 편지들은 그 작가의 작 품을 이해하기 위한 귀중한 연구자료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훌륭한 문 학 작품이다. 이런 서한집이 나오기 위해서는 편지 하나라도 소중히 보관하고 꼼꼼히 연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최근에 서울 신사동에 작은 화랑을 운영하는 박영인씨에게서 2년전 작고한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문신과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오 간편지를 미공개 상태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집 을 방문해 보니 과연 문신의 육필 서한 16통이 편지봉투와 함께 소중 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작품 스케치도 있었고 일련 번호가 매 겨진장장 69페이지에 이르는 중편소설 분량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컬렉터와 문신과의 인연은 컬렉터가 초기 작품인 '고기잡이'를 산 후 프랑스로 보낸 편지에 문신이 1974년 연말 답장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이 편지에는 1940년대 말 화신 백화점에서 이 그림 을 전시했을 때의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 관람객이 남자 누드를 보고 왜 옷을 벗고 고기를 잡느냐고 문신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그림 을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니 초창기 예술가 들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센강 위에 걸린 다리 위에 서서 자살하려고 하다가 다시 마음을 돌 이켰다는 이야기, 파리 전시회에서의 좋은 평가에 기쁘다는 소식, 여 러 화가들에 대한 작가의 평가 등이 담담한 필치로 써있었다. 운보 김 기창화백이 먼저 타계한 부인 박래현 유작전을 파리에서 갖기 위해 자 신을 찾아와 의논했다는 것과 문신이 그 부부애에 코끝이 찡한 감동을 받았다는 구절이 인상에 남는다.

이 서한에는 재미있는 미술계의 뒷얘기도 많이 있다. 예로 1950년대 대구에서 열렸던 문신의 전시회에서 기성 화단의 방해로 한 점도 팔지 못한 적이 있었다. 보다 못한 청마 유치환의 소개로 경주의 한 다방에 서 전시회를 다시 열었는데, 그때 화가 김준식이 1950작 '생선'이라는 제목의 유화를 샀다. 그후 박영인이 이를 구입해서 애장하고 있다가 문신이 재구입했다고 한다. 화집을 보면 이 그림의 왼쪽 아래에 동그 란 점이 있다. 작가는 "구상이지만 추상적 표현을 위해서 점을 일부러 찍었다"고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미 50년대에 추상을 향한 열의가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겠다. 구상은 그려진 사물 이상으로 무한히 확산되지 못하며 따라서 추상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해석이 붙어있다. 그런데 안타깝게 도 이그림을 비롯한 초기 유화 10여점이 마산의 문신 미술관에서 몇 년전 도난당해 우리가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 고 말았다.

청년시절 고학으로 미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술에 대한 신념에 불타 자기수련에 매진한 사람, 도불 후 파리 근교의 고성을 복원하는 일을 근 3년 동안 맡아 석공, 목수, 미장이 일을 하면서 그 역경을 통해 오 히려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조각적 재능을 발견하였다는 문신. 그는 남불의 항구도시 바르카레스에서 열린 야외국제 조각전에서 13m가 넘 는 거목과 대결하여 '태양의 인간'이라는 거대한 토템을 제작하면서 세계 조각계에 데뷔하게 된다. 예술작품은 보기 좋은 하나의 장식품이 아니라 작가와 생의 치열한 대결에서 나오는 피와 땀의 소산이라는 것 을 이예술가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이런 일깨움의 매개가 되 는 것이 바로 그가 남긴몇 통의 편지였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하찮은 기록물 하나라도 얼마나 중요한 컬렉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새삼 깨닫는다.

[11] 인사동은 외국인들에 `메리의 골목' 

 

화랑-음식점 오밀조밀 `친근한거리'…청담동 화랑가도 유력 .

세계 어디를 가든지 화랑들이 모여있는 문화의 거리가 있고 나는 이런 곳들을 꼭 둘러본다. 영국 런던에서 한 화상을 만났는데 "1백 50년째 가업으로 화랑을 운영하는데 아버님이 판 그림을 내가 다시 사들입니다"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뉴욕에서는 맨해튼 57번가 의 작지만 고급스런 화랑들과 소호(Soho)의 창고를 개조해 실험적인 작품을 전시하는 화랑들이 대조적으로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도 인 사동과 청담동이라는 두개의 대표적인 화랑가를 갖고 있다.

처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면 인사동을 가보게 된다. 인사동은 외국인들에게 메리의 골목(Mary's alley)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왔 다. 골목 골목 들어가보면 수많은 골동품점, 화랑과 각종 전통 음식 점들이 어우러져 살아있는 거리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안국동 로터 리에서 인사동 사거리를 지나 파고다공원까지 뻗어있는 거리를 나는 '인사동 브로드웨이'라고 부른다.

인사동 화랑가의 특징은 가나화랑, 학고재, 선화랑 등 대표적인 기획전시화랑들과 세모, 모던, 동성방 같은 작은 판매화랑들이 뒤엉 켜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림값이 바로 마주보고 있는 화랑 사이 에도 전부 다르다는 것이 나의 체험이다. 이에 반해 청담동은 화랑 들이 대체로 비슷비슷한 규모여서인지 가격 편차가 많이 나지는 않 는다. 인사동은 미국식 앤틱 숍, 일본고미술 전문점, 터키 수공예품 가게 등 없는 것이 없고 '하나로 경매'에 가면 직접 경매에 참가하 여 작품을 살 수도 있다.

인사동과 관련해 기억나는 일화 하나. 인사동에서 60년도 더 되 어 보이는 꽃그림정물화를 본적이 있다. 오래되어 물감도 군데 군데 떨어져 나가고 사인도 희미한 그 작품을 보는 순간 일제시대에 요절 한 김종태의 미공개 유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파는 사람도 누구 작 품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가 미상, 작품 진위 불문으 로 그냥 내 눈을 믿고 사기로 했다. 우여곡절끝에 나중에 진품으로 판정이 되어 지금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특별전시회 '근대를 보는 눈'에 걸려 있다.

청담동은 80년대 말 미술붐을 타고 형성된 새로운 화랑가이다.갤 러리아백화점부터 반원을 그리며 청담 사거리를 지나 청담동 성당에 이르는 화랑,패션 부티크, 웨딩숍이 늘어선 이 길을 나는 가끔 산책 삼아걷는다.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 건물을 지은 샘 터화랑이나 인테리어가 세련된 화랑들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기 도 한다.박영덕, 나비스, 박여숙, 포커스, 이목, 조선, 시몬화랑 등 이 이길에 있는 기획전 위주의 화랑들이다. 처음에 나는 주위의 아 는 친지들과 어울려 큰 화랑에서 그림을 샀다. 그래서 강남의 큰 화 랑들과 인사동의 작은 화랑들은 별개의 세계인 것으로 생각을 했었 다. 그러나 부지런히 돌아다닌 결과 청담동 화랑 중에도 누가 인사 동 중간상인들과 거래가 활발한지, 누가 작가에게서 주로 그림을 받 아오는곳인지 알게 되었다. 일종의 네트워크 같은 것이 있는 셈이다.

외국에 나가 보아도 청담동 정도로 깔끔하게 화랑이나 카페가 늘 어선 곳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조금만 더 잘 정비하고 지원을 한 다면 소비문화의 대명사에서 벗어나 문화예술이 꽃피는 새로운 관광 명소로 부각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태원 쇼핑이 외국 관광객이 거쳐 가는 필수 코스인 것처럼 인사동, 청담동 화랑 가를 둘러보는 문화관광 일정을 구체적으로 개발해 보면 어떨까.


[12] 미술품 수집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미술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중학교 때 데생시간에는 지루함을 참지 못해 하품을 하다 벌까지 섰다. 그랬던 내가 미술에 빠진 것을 보면 누구든 미술애호가, 나아가 컬렉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화가들 중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2차세계대전의 소용 돌이 속에서 수채화를 그렸던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박정희 김종필씨 등은 '처칠은 수상일 때도 그림을 그렸다 '는 주위의 권유로 일요화가회 회원이 되기도 했다. 68년 호남에 물 난리가 났을 때 JP는 '수재민 돕기 개인전'을 열어 수익금을 수재민 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미술은 좋은 취미의 차원을 넘어 그 효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는 "한 점의 그림 속에는 책 수십 페이지의 내용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림을 많이 보면 한 사물이 나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긴다. 피카소는 정면 과 측면이 동시에 보이는 얼굴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이전에 그렸으니 화가의 직관에서 학문적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년 가을 나는 '그림과 그림값'이란 체험적 미술시장 이야기를 책으로 낸 바 있다. 그 후 춘천의 치과의사 선생님부터 부산의 대학 생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격려 전화와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내가 느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은 있지만 정보 부족으로 접근을 못하고 미술컬렉션이 소수의 전유물에 머물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 이었다.마지막으로 내가 만든 컬렉션 5계명을 소개하고 이 시리즈를 끝내려 한다.

첫째, 안목은 사 보아야 생긴다. 10만원하는 작품이라도 꼭 하나 직접 사보자. 둘째, 처음에는 신인의 그림을 사지 말고 원로나 중견 작가의 그림을 사라. 원로작품도 소품이나 수채화는 비싸지 않다.셋 째, 안목이 생긴 후에 신인의 그림을 사라. 좋은 작품을 고를 확률 이 높아진다. 넷째, 좋은 작품은 가격에 구애받지 말고 사라. 시간 이 지나면 그 가치가 나타난다. 다섯째, 중간 수준의 그림은 가능한 싸게 사라. 단기간에 재판매할 가치는 유지된다.

-그림애호가 김재준박사의 이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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