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choyeung 2008. 12. 30. 10:52

亂中日記는 이순신이란 인물의 삶, 활동, 지혜, 지략, 전투, 시대 상황, 고뇌와 고난, 공로, 전사 등 그의 전모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다. 아래는 7년동안 이어진 임란의 과정에서 쓴 일기와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서 따온 한 부분이다. 그리고 임란에 참여한 明의 도독 (陳璘)과 왜장 와키자카의 글을 같이 올려본다.

 

 

난중일기 전문일기 : http://www.e-sunshin.com/e-sunshin/nanjung/nanjung.html


임진년 1592년 9월 1일 [정사/10월5일]


 

「장계」에서  

닭이 울자 출항했다. 낮 여덟 시에 몰운대를 지날 무렵 샛바람이 갑자기 일고 파도가 크게 일어, 간신히 배를 저어 화준구미에 이르러 왜대선 다섯 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여덟 척, 서평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대선 아홉 척, 절영도에 이르러서는 왜대선 두척을 각각 만났는데, 모두 기스락을 의지하여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삼도의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와 조방장 정걸 등이 힘을 합하여 남김없이 깨어 부수고, 배 안에 가득 실은 왜의 물건과 전쟁 기구도 끌어내지 못하게 하여 모두 불태웠으나, 왜인들은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며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절영도 안팎을 모조리 수색하였으나, 적의 종적이 없으므로 즉시 소선을 부산 앞바다로 급히 보내어 적선을 자세히 탐망케 하였더니, "대개 500 여 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의 언덕 아래 줄지어 대었으며, 선봉 왜대선 네 척이 초량목으로 마주 나오고 있다'고 하므로, 원균 및 이억기 등과 약속하기를, "우리 군사의 위세로써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고 말하고 독전기를 휘두르며 진격했다.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 귀선 돌격장 군관 이언량,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 등이 먼저 곧바로 돌진하여 선봉 왜대선 네 척을 깨부수니, 적도들이 헤엄쳐 뭍으로 오르므로 뒤에 있던 여러 배들은 곧 이 때를 이용하여 승리한 깃발을 올리고 북을 치면서 '장사진'으로 돌진했다.


이 때 부산성 동쪽 한 산에서 5리쯤 되는 언덕 밑 세 곳에 둔박한 왜선이 모두 470여 척이 있었는데, 우리의 위세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여러 전선이 곧장 그 앞으로 돌진하자, 배 안과 성 안, 산 위, 굴 속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가지고 거의 다 산으로 올라 여섯 곳에 나누어 머물며 내려다 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처럼 우레처럼 쐈다. 그런데 편전을 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같았으며, 혹 대철환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가 모과만 하며, 혹 수마석을 쏘기도 하는데 크기가 주발덩이만한 것이 우리 배에 많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한층 더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다투어 돌진하며서 천자ㆍ지자 총통에다 장군전ㆍ피령전, 장전과 편전, 철환 등을 일시에 일제히 쏘며 하루 종일 교전하니 적의 기세는 크게 꺾이었다. 그래서 적선 백 여 척을 삼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쳐부순 뒤에 화살을 맞아 죽은 왜적으로써 토굴 속에 끌려 들어간 놈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배를 쳐부수는 것이 급하여 머리를 벨 수는 없었다.


여러 전선의 용사들을 뽑아 뭍으로 내려서 모조리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무릇 성 안팎의 예닐곱 곳에 진치고 있는 왜적들이 있을 뿐 아니라, 말을 타고 용맹을 보이는 놈도 많은지라, 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가벼이 뭍으로 내리게 한다는 것은 빈틈없는 계획이 아니며, 날도 저물었는데 적의 소굴에 머물러 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될 환란이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배를 돌려 한밤중에 가덕도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그런데 양산과 김해에 정박한 왜선이, 혹은 말하기를 "점차 본도로 돌아간다"고 한다마는, 몇 달 이내로 세력이 날로 외로워짐을 스스로 알고 모두 부산으로 모이는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부산성 안의 관사는 모두 철거하고, 흙을 쌓아서 집을 만들어 이미 소굴을 만든 것이 백여 호 이상이나 되며, 성 밖의 동서쪽 산기스락에 여염집이 즐비하게 있는 것도 거의 삼백 여 호이며, 이것이 모두 왜인들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중의 큰 집은 층계와 희게 단장한 벽이 마치 불당(절간)과도 비슷한 바 그 소행을 따져보면 매우 분통하다

장계(狀啓)  : 조선시대 관찰사·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등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자기 관하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 또는 청하는 문서.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개인사찰에서 보관해왔던 이순신장군의 친필

 

 친필에 적힌 이순신 장군의 서명과 낙관

 

임진년 1592년 9월11일[정묘/10월15일]

 

「장계」에서 

녹도만호 정운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 만한 사람이다.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격발하여 나라를 위해서 제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하여 나라를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더욱 더하므로 믿을 사람은 오직 정운 등 두 세 사람이다. 세번 승첩을 했을 때 언제나 선봉에 섰고, 이번에 부산포해전에서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했으며, 하루 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힘을 다하여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 바, 이는 정운의 힘이 컸다.

그런데 그날 돌아올 무렵에 철환을 맞아 죽었지만, 그 늠름한 기운과 맑은 혼령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뒷 세상에 아주 알려지지 못할까 애통하다. 이대원의 사당이 아직도 그 포구에 있으므로 같은 제단에 초혼하여 함께 제사를 지내어, 한편으로는 의로운 혼령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남을 경계해야겠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변방 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써 네번이나 적을 무찌를 적에 반드시 앞장을 서서 분격하였으며, 당항포에서 접전할 때에는 왜장을 쏘아 목을 벤 그 공로가 월등하다. 뿐만 아니라 사살하는 데만 전력하고 목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들어 별도로 장계하였는데, 이번 포상의 글월 중에 이순신(李純信)의 이름만 들어 있지 않으니 해괴하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ㆍ이순신ㆍ어영담ㆍ배흥립ㆍ정운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약속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데, 권준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으나 오직 이순신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했으므로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는 장계를 올렸다.

임진년 1592년 5월7일 [병인/6월16일]

 

「장계」에서  

새벽에 일제히 출항하여 적선이 머물고 있다는 천성ㆍ가덕으로 향하여 가다가 오정 때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자,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급변한 일을 알리므로 적선이 있음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에게 신칙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신중히 행동하라!"고 전령한 뒤에 옥포 바다 안으로 대열을 지어 일제히 들어가니, 왜선 50여척이 옥포선창에 나뉘어 정박하고 있는데, 대선은 사면에 온갖 무늬를 그린 휘장을 둘러치고, 그 휘장가에는 대나무 장대를 꽂았으며, 붉고 흰 작은 깃발들을 어지러이 매달았고, 깃발의 모양은 여러 가지 인데 모두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들어졌드며, 바람결 따라 펄럭이어 바라보기에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도둑떼들은 그 포구에 들어가 분탕하여 연기가 온 산을 가렸는데, 우리 배들을 돌아보고는 허둥지둥 어찌 할 바를 모르면서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급하게 노를 저었지만 중앙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스락으로 배를 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여섯 척은 선봉으로 달려 나오므로 내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일심분발하여 모두 죽을 힘을 다하니, 관리와 군사들도 그뜻을 본받아 분발하여 서로 격려하며 죽음으로써 기약했다. 그리하여 동서로 포위하면서 바람처럼 우레처럼 총통과 활을 쏘기 시작하자,  

적들도 총과 활을 쏘기 시작하자, 적들도 총과 활을 쏘다가 기운이 다하여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에 내어 던지느라고 바빴고 화살에 맞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헤임치는 자도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고, 또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뒤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한 척을 때려 부수고 머리 한급을 베었으며, 배안에 있던 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하다. 우부장 보성군수 김득광은 왜대선 한 척을 때려 부수고 사로잡혔던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을 산채로 빼앗았다.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은 왜대선 두 척을,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은 중왜선 두 척과 소선 두 척을,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은 왜대선 한 척을,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한 척을, 우부기전통장 사도진군관보인 이춘은 왜중선 한 척을, 유군장 발포가장 내군관 훈련봉사 나대용은 왜대선 두 척을,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왜중선 두 척을,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중선 한 척을 때려 부수고,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 전봉사 유섭은 왜대선 한 척을 쳐부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로잡혔던 소녀 한 명을 산채로 빼앗았으며, 한후장 군관 급제 최대성은 왜대선 한 척을, 참퇴장 군관 급제 배응록은 왜대선 한 척을, 돌격장군관 이언량은 왜대선 한 척을, 대솔군관 훈련봉사 변존서와 전봉사 김효성 등은 힘을 합하여 왜대선 한 척을 각각 때려 부수었다.

 경상우도 여러 장수들은 왜선 다섯 척을 때려 부수고, 우리나라의 사로잡혔던 사람 세 명을 산채로 빼앗았는데, 합하여 왜선 스물 여섯 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히고 때려 부수고 불태우니, 넓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도둑떼들은 숲속으로 숨어 엎드려 겁내지 않는 놈이 없었다.

나는 여러 전선에서 용감한 사부를 뽑아 산에 오른 적을 따라 잡으려고 하였으나, 거제도는 산이 험준하고 나무가 울창하여 사람들이 발붙이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막 적의 굴속에 들어 있는데 전선에 사부가 없으면 혹 뒤로 포위될 염려도 있고, 날도 저물어가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등포 앞바다로 물러나 머물면서 군졸들에게 나무 하고 물 긷는 일을 시키면서 밤을 지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 “멀지 않는 바다에 또 왜대선 다섯 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쫓아서 웅천땅 합포(진해시 웅천2동 합개. 학개라고도 함)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므로 사도첨사 김완이 왜대선 한 척을, 방답첨사 이순신이 왜대선 한 척을, 광양현감 어영담이 왜대선 한척을, 부통속 방답진에서 귀양살던 이응화가 왜소선 한 척을, 군관 봉사 변존서ㆍ송희립ㆍ김효성ㆍ이설 등이 힘을 합하여 활을 쏘아 왜대선 한 척을 모두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밤을 타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이순신장군 수결 (手決)연습

 


임란에 참여한 明의 도독 진린(陳璘)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 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이순신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진린(陳璘, 생몰연대 미상 / 40대 후반-)

1597년 정유재란 시 명나라의 원군. 어왜도총관 전군도독부 도독으로서 수병 5천을 거느리고 참전,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웠다.노량해전 직전 고니시와 비밀 협상을 맺어 일본의 연락병의 도주를 돕기도 한다.전공과 작전을 두고 이순신과 갈등을 빚지만 언제나 이순신의 양보를 얻어낸다.참전 중 이순신의 치밀함과 인격에 차츰 감화되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세 번이나 쓰러지면서 통곡했던 인물이다.


◯ 明의 도독 진린이 황제에게 올린 장계 전문


전하, 애통하여 붓을 들기가 어렵고 떨어지는 눈물로 먹을 갈아 올리나이다.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 지난 전투에서 전사하였나이다. 소장도 순신과 함께 전장에 나섰던 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노량의 바다를 덮어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를 구하려 흉폭한 칼을 앞세우고 도전하여 왔나이다.이에 순신이 자신이 대장됨을 잊고 용감히 나가싸우매 도적들의 사나운 칼을 두려워함이 없었나이다. 마침내 수백 척의 적함들을 격침하고 수만의 적들이 고기밥이 되었으나 저 간악한 고니시는 싸움이 치열한 틈을 타 제나라로 도망쳤으니 이처럼 비분한 일이 없다할 것이나,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 동틀 무렵하여 어지러운 전투 중에 패잔병이 허투루 쏜 총알에 맞으니 이런 비통한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비보를 듣고 급히 순신을 소장의 배에 옮겨 독의를 다그치며 순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어찌 애통하다 아니할 것이겠습니까?  마침내 순신이 그 숨을 거두니 이를 지켜본 소장과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애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순신이 이르기를 ‘싸움이 끝나기까지는 나의 죽음을 아군에 이르지말라’ 하였다는 소자의 말을 듣고 짐짓 이를 감추어 큰 승리를 거두기까지 적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소장은 이미 지난 순천전투에서 순신이 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머나먼 낯선 바다에서 도적들의 횟감이 됐을 것입니다. 소장이 약관의 나이에 임관하여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았으나 천국에서도 소방에서도 순신과 같은 충신을 보지 못하였고 순신과 같은 맹장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마침내 순신이 아니었다면 소장의 목숨도 온전치 못하였을 것 입니다. 그러나, 순신은 소장의 목숨을 건져주었으나 소장은 순신이 도적들의 흉탄에 쓰러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이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일찌기 소장이 순신의 용맹하고 충성됨을 장계하매 상국의 천자께서도 이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탐내시어 마침내 상국의 수사 제독을 제수하셨으나 이제 순신을 잃으니 이를 어찌 전하의 애통함으로 그친다 하겠습니까?


일찌기 상국의 천자께오서 왜국의 도적들이 전하의 나라를 침노하여 마침내 상국을 향하여 그 창 끝을 돌렸기로 진노하시기를 지옥의 불길처럼 하시고 천군을 내려 도적들을 소탕하려 하셨으나 이에 도적들이 간교한 꾀를 부려 저희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물러나는 듯 하다가 다시 천자를 능멸하고 재차 도전해오니, 이에 천자께서 소장을 불러 이르시기를 내가 마침내 저 도적들을 내 위엄 앞에 쓸어버릴 것이니 너는 내 명을 받으라 하시기로 소장이 하늘의 뜻을 받잡고 남도에 이르러 순신과 대면하였나이다.


그러나, 그의 지략은 하늘이 내렸으며 그의 용맹은 자룡이 두려워할만 하였나이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소장도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순신을 스승으로 여겼나이다. 선천에 이미 이와 같은 장수가 없었으니 감히 비교하자면 남송의 악비가 소방에 환생한듯 하였나이다. 소장뿐만 아니라 제가 휘하에 거느린 모든 부장과 장교들,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병졸에 이르기까지 순신을 존경하고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 어찌 전하의 홍복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순신이 옛사람이 되었으니 애통한 마음 감출 수가 없습니다. 순신을 잃고 전하의 어안을 어찌 볼 것이며 또한 상국으로 돌아가 천자의 용안을 어찌 보겠나이까? "그대는 순신과 함께 전장에 나가더니 어찌 그대는 살아 돌아왔으나 순신은 어디있는가?" 하시면 소장은 무엇이라 천자 앞에 말할 것입니까?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고 무릎이 떨려 일어설 수가 없나이다.


이제 소장이 순신을 잃으매 이 참담함이 마치 현덕이 공명을 잃음 같고 어룡이 여의주를 잃음과 같사옵니다. 이에 삼가 전하께 아뢰오니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 치열한 전투끝에 300 척이 넘는 적함을 깨버리고 3만이 넘는 도적들을 어룡의 밥으로 주었으나 마침내 흉적의 탄환에 목숨을 잃으니, 하늘이 분하여 울고 산천초목이 애통하여 떨었나이다.


마침내 소장이 순신의 몸을 염하여 천자께서 내리신 비단으로 덮어 통제영에 이르니 백성 중에 놀라 까무러치지 않는 자가 없고 엎어져 울부짖지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처럼 놀랍고 슬픈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들의 모습이 마치 전란 중에 부모를 도적의 칼에 잃고 길바닥에 나앉아 우는 어린 아이들과 같았으니 소장의 장졸 중에도 눈물을 감출 수 있는 자가 없었나이다. 실로 애통하고 애통하며 애통하다 아니할 수 없었나이다.


소장이 감히 전하께 주청하오니 7 년에 걸친 참담 한 전란 중에 섬나라의 도적들이 그이름만 듣고도 떤 것은 오직 전하의 충성된 신하, 순신이었으니 이에 그의 공을 높이시어 그를 뒤늦게나마 승상으로 삼으시고 순신의 죽음으로 애통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국상을 허락하시기를 비나이다. 전하께옵서 이같이 하시면 이나라의 백성으로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답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옵니다.


다시금 북받치는 애통함에 붓을 들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일찍이 순신이 소장의 목숨을 구하였으나 소장은 죽음이 순신을 데려가는 것을 막지못하였나이다. 전하, 소장을 용서하시옵소서.


◯ 임란에 참여한 왜장, 와키자카(脇坂)가 본 이순신

 ◯ 한산대첩 (閑山大捷) 1592년 7월 7일

  ▶조선측 전력: 이순신 24척(李舜臣), 이억기(李億祺) 25척, 원균(元均) 7척  도합 56척

  ▶일본측 전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도합 73척

  ▶결과: 76척의 대함대중 왜선 59척 격침, 9천명의 왜군을 섬멸, 왜장 와키자카 사베에(脇坂左兵衛), 구사일생으로 도망, 왜장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 전사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정벌의 야망을 꺾음.

 

  ▶ 이순신의 전술

넓은 바다에서 왜적의 배와 왜 수군들까지 모조리 잡을 계획을 세움.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이며 넓은 곳도 600m 를 넘지 않는 좁은 해협이라 전투하기에 매우 좁았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들의 행선에 지장을 줄 것이 분명했음.]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이끌어낸 뒤 완전히 봉쇄하다.

 

13척의 배로 적에게 소규모의 군세로 여겨지도록 하자 적장 와키자카는 이 13척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전부라고 생각함. 유인작전으로 조선 수군은 조금씩 후퇴하고 왜적들은 한산도 앞 바다까지 뒤쫓아 옴. 이순신 장군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지금까지 후퇴하던 조선 수군의 전 함선은 일제히 뱃머리를 돌리고 학익진을 형성하며 적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

모든 장졸들은 온 힘을 다하여 총포와 불화살을 쏘아대니 왜적들은 기가 꺾이어 전의를 잃고 도망가므로 전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정됨. 적선 73척 중에서 대형 층각선 7척, 대형선 28척, 중형선 17척, 소형선 7척으로 도합 59척이 격파되거나 불태워졌고 왜장 와키자카는 도망쳤다고함. 왜군의 전사자는 무려 9천여 명이나 되었음.

 

한산대첩의 가장 큰 의미는 왜군들의 수륙병진작전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이고 또한 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하였음을 들 수 있음. 한산대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에 대한 사형선고이며, 그가 꿈꾸던 대륙정벌의 야망을 꺾어버린 해전임.

 


임진년 1592년 7월 7일 한산대첩에서 참여한 와키자카 왜장의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장군 탄생 때 온다는 것.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을 알게된 건 한산도대첩 때 인데,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아뭏든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 랄까 그런 묘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 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중에 명장입니다.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읍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2천의 군사로 5만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장군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죠.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 탄생일 때 오는가 봅니다.


◯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 영웅은 피로 만들어 진다. 전쟁 영웅은 만인들이 우러러 보게 끔 만든다. 알랙산더 대왕도 그러 했고 케사르도 그러 했고, 징키스칸도 그러 했고, 나폴레옹도 그러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 분. 이순신 장군을 볼 때면 문득 그 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 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 전의 한 청년이 그래햇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셨다. 그러고보니 한국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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