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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 2021. 9. 27. 15:21

    고려왕조실록(99) 원종 4
    -삼별초의 난과 원종의 죽음


    그해 12월 쿠빌라이의 부름으로 원종이 몽고에 가게 되었는데 안경공 창과 임연도 동행 할 것을 명받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낀 임연은 자기 대신 아들 임유무를 보내는데 그마져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 병을 얻게 됩니다.
    그의 근심과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결국 그것이 병이 되어 죽고 맙니다. 이리하여 교정별감 자리는 아들 임유무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권력을 차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아무래도 애비인 임연보다는 카리스마가 부족할 게 뻔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원종은 몽고의 요구대로 개경 환도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모든 대신 문무관 들은 물론 그 가족들 그리고 강화로 건너간 일반 백성들까지도 모두 원위치하라고 명합니다. 이에 임유는 참모회의를 열어 원종의 명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게 되는데 임유의 기대와는 반대로 모두들 원종의 명을 따르겠다고 하자 분노한 임유무는 관원들과 백성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막고 나섭니다.
    이러한 보고를 접한 원종은 어사중승 홍문계에게 명하여 임유무를 제거하도록 합니다. 명을 받은 홍문계는 바로 임유무를 처단하고 그 일당들마저 모두 잡아들여 처단하거나 귀양을 보내고 실질적인 권력기구인 별감회의 마저 없애버립니다. 임유무가 죽자 개경 환도는 빠를 속도로 진행되어 다시 개경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개경으로 도성을 옮길 때 삼별초는 조정의 시책에 극력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은 삼별초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한편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해 버립니다. 이처럼 조정이 강경하게 나가자 삼별초의 장군들 배중손과 노영희는 반란을 일으켜 원종을 폐하고 승화후 온을 새 왕으로 옹립한 뒤 대몽항쟁과 자주권 사수투쟁을 벌여 나가기 시작합니다.
    삼별초는 무신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고려 최강의 군대로 그간 몽고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크나큰 공을 세운 집단으로 그 영향력이 막강하였는데, 만약 개경으로 환도하여 육지로 나가게 되면 몽고의 세력에 의해 군대의 해산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큰 보복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형국으로 고양이에게 몰리는 쥐 꼴이 된다는 우려가 강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몽고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왕실에 등을 돌린 일반 백성들의 여론에
    힘입어 반몽 반정부 자주독립 전쟁을 선포하게 됩 것입니다.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세운 배중손 등은 관청 조직을 설치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나서 공사 재물들을 접수하고 배 1천척을 동원하여 그를 따르는
    귀족, 고관의 가족들과 강화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전라도 진도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몽고의 공격을 막아내자면 강화도 보다는 바다를 장악하기 쉬운 진도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삼별초는 진도로 거점을 옮기고 전라도 일대와 경상도 지방의 해안과 일부 내륙을 점령하고 차츰 인근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가게 되고 이에 조정은
    여몽 연합군을 투입하여 진압에 나서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삼별초의 군대에 번번히 패하게 되고 조정은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의 대량의 물자를 운송해오던 뱃길이 막혀 오로지 육로로 수송되는 소량의 물자 조달로 인하여 큰 곤혹을 치르게 됩니다. 그나마도 삼별초가 제주도까지 장악해 버리자 몽고는 대군을 고려에 파견하여 전격적으로 삼별초의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여몽 연합군의 대규모 군대가 토벌에 나서자 수적으로 열세인 삼별초는 연합군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점차 세력이 붕괴되면서 왕으로 옹립된 온과 배중손의 사망으로 완전 진압되고 맙니다. 이리하여 1270년부터 73년 2월까지 거의 3년에 걸친 삼별초의 난은 해결이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고려는 완전히 몽고의 복속국으로 전락해 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몽고는 원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여러 삼별초의 난이 평정되자 방면으로 고려에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1274년 3월 경술일에는 군사 5000명을 징발하여 일본 징벌에 원조하라고 명령하고 이를 수송할 병선의 제작을 고려에게 떠넘깁니다. 또한 남편 없는 부녀자 140명을 선출하여 원으로 보내라고 닦달을 합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홀어미 역적의 처 중의 딸 등을 샅샅이 뒤져 그 수를 겨우 채워 몽고로 보내니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원종은 원나라의 힘을 빌려 왕권을 회복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나라의 운명을 송두리째 몽고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속국의 처지에 빠뜨린 임금이라고 평하고는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대제국 원나라의 힘을 감안하여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원종은 그해 병들어 몸져누웠다가 얼마 안가서 6월 기유일에  세자 심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숨을 거두게 되니 재위 15년 향년56세입니다.



    고려왕조실록(100) 충렬왕 1
    -원나라의 부마 충렬왕
     
    원종의 뒤를 이은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은 이름이 거 또는 심 또는 춘이라 불렸습니다. 그는 1236년 2월에 원종과 순경태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일찍이 고종이 죽었을 때 아버지 원종이 원나라에 가 있었던 관계로 고종의 유서에 따라 임시로 국사를 대리한 바가 있었습니다. 1267년 태자로 책봉 되고나서 5년 뒤에 원나라에 체류하게 됩니다. 몽고는 속국에 해당하는 고려의 차후 보위에 오를 태자나 왕족을 본국에 데려다 세뇌교육을 시켜왔는데 말하자면 명색만 다르지 볼모나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은 고려 왕실과 원나라 사이에 맺은 첫 번째 혼인으로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우선 고려 왕실은 막강한 원나라 왕실과의 혼인으로 절대적인 지원을 받게 됨에 따라 대신들에게 억눌렸던 힘과 지위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고 양국의 우호관계가 돈독해지는 효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원나라의 세력권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사사건건 원의 간섭을 받아야하는 종소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충렬왕이 제국대장 공주와 혼인을 허락받고 이듬해 귀국할 때 몽고족과 같은 변발에 호복을 착용하여 고려 백성들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내게 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모든 사회성이 몽고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1274년 8월 원에서 돌아온 충렬왕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해 10월에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결심하고 군사 25,000명을 파견하자 고려에서는 8,000명의 군사와 600여명의 뱃사람을 동원하여 일본으로 출정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일본 일기도에 도달한 정벌군은 1,000여명의 일본인을 살해하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는데 가는 길마다 일본인의 시체로 들판을 매울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은 밤이 되어 폭풍우가 무섭게 일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적지 않은 수가 파손 침몰되어 1차 일본 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일본 정벌군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조정에서는 제국대장 공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10월 신유일 제국대장 공주를 맞이하러 나간 왕의 수행원 중에 몇몇 대신들이 변발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왕이 심하게 책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얼마나 몽고의 영향이 컷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해 11월 왕과 공주의일행이 개경에 도착하였을 때 재상과 관원들이 국청사 문 앞까지 나가 왕 일행을 영접하였는데 이때 호복을 입지 않은 자들을 골라내어 회초리로 마구 때리게 한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왕이 앞장서서 몽고의 풍속을 쫓으니 제구대장 공주 역시 고려의 풍습을 무시하고 자기나라의 풍속만을 고집하니 자연 이러한 풍속이 사회전반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