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연수

배디링 2017. 11. 30. 18:59

 

<11월 29일 오후, 난생 처음으로 부산, 부천의 방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문경새재길을 신나게 걸었다>

제1관문에서 제2관문까지 3km 50분 소요, 제 2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3.5km 70분 소요됩니다

가장 오래된 길, 하늘재
하늘재의 가을은 맑다. 차로 닿는 문경 쪽의 하늘재 정상에서 출발, 나지막한 내리막 따라 이어지는 3.2㎞ 숲길은 청량하다. 낙엽송은 이제 가을에 걸맞은 색(色)을 취하려는 참이고 사이사이 전나무가 짙은 녹(綠)으로 방점을 찍는다. 이끼 낀 석축은 길의 오랜 세월을 알리고 멀거나 가까운 계곡소리가 가는 길을 동행한다.

하늘재는 낮다. 정상 552m.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의 경계에 자리한 포암산의 낮은 목을 넘는다. 짧고 낮지만, 이 고개가 품은 역사는 길고 높다. 하늘재는 문헌에 기록된 한반도 최초 계획도로다. 삼국사기는 신라 아달라왕 3년 4월에 계립령을 열었다고 기록한다. 아달라왕 3년은 서기 156년이요, 계립령은 하늘재의 다른 이름이다. 하니 하늘재는 올해로 1854년 됐다. 문경새재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 길은 영남과 경기 충청을 오가는 간선도로였다.

당시 간선도로는 무인(武人)의 길이었다. 아달라왕은 백두대간 너머 북진을 위해 이 길을 개척했다. 고구려 온달과 후삼국 궁예도 이 길을 밟았다. 신라가 개척했으되, 각기 다른 군사적 야심을 가진 이가 하늘재를 눈독 들였다.

물론 피비린내 나는 흔적은 이제 없다. 문경새재 개통으로 하늘재는 버려졌고 근대엔 이화령 터널 개통으로 다시 한 번 버려졌다. 두 차례의 버림으로 하늘재는 간선도로의 기능을 잃고 전쟁을 위한 연결의 기능을 잃었다. 다만 그 아름다운 숲길로 길의 형태만을 보존했다.

문경 쪽 하늘재 정상에서 시작한 길은 충주 미륵리사지에서 마감한다. 한때 고갯길 넘어온 길손을 맞았을 절은 없고 터만 남았다. 터 위에 우뚝 선 미륵리 석불입상은 두 손을 가슴에 맞댄 채 북쪽을 바라본다. 생각하니 하늘재가 잇는 문경 쪽 마을 이름은 관음리요, 충주 쪽 마을은 미륵리다. 관음은 자비와 소망의 보살이요 미륵은 미래세상을 구원하러 온다 했으니, 하늘재는 그 현세와 미래의 어느 사이다.



낙향, 혹은 금의환향의 길
하늘재와 토끼비리에 비한다면 문경새재는 넓다. 넓은 길은 흙으로 푹신해 신발을 벗고 걷기 좋다. 아찔함도 아련함도 없어 발걸음은 쉽게 경쾌해진다.

문경새재는 길다. 제1관문 주흘관에서 제3관문 조령관까지 약 6.5㎞다. 길손이 하룻밤 묵었을 조령원터와 주막, 관찰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구정이 주흘관∼주곡관 사이에 띄엄띄엄 서 있다. 고도를 높이며 경기·충청 방향으로 바싹 다가서는 조곡관∼조령관은 건물 없이 호젓하다. 멀리 산 능선이 이어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푸르다.

이 길을 걷는 현대인의 걸음은 유쾌하다. 하지민 과거에는 기쁨보다 슬픔이 많이 묻어난 길이었다. 고갯길은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노선 중 한양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금의환향을 꿈꾸며 수많은 영남 유림이 고개를 넘었다. 그 꿈을 이룬 이는 소수였다. 안동 처사 유우잠은 새재 마루턱에서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라고 낙향 길을 묘사했고, 박득녕은 "해마다 올라오는 한양이었으나 금년처럼 우울하고 쓸쓸한 여행길은 없었다"라고 썼다.

지금의 문경새재에서 이 슬픔은 지연되다, 미뤄지다, 마지막 관문 조령관에서 가까스로 실감된다. 백두대간 줄기는 걸어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첩첩이 가로막는다. 고향도 한양도 보이지 않아 멀다. 이때 느껴지는 막막함은 고개 넘기의 고단함이다. 고단함이 묻어나는 슬픔은 쉽게 전염된다. 진도 아리랑은 노래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가/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로구나."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