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규의 글 한 모금

움직임은 생각이며 생각은 글이 된다.

가고 싶었다 / 장광규(張光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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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2009. 3. 4.

1960년대 후반 선배들은 군대에 가더니 월남에 갔다는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난 갑종 합격을 받았는데 인력이

넘치다 보니 대기하며 징집영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자원해서 군대에 가려고 했다.

빨리 군대에 가서 나도 월남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 병사 담당을 찾아다녔으나 병무청에서

지원자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원입대는 할 수 없다고 했으나 귀찮게 쫓아다녔더니 지원서를 작성해 주었다.

그러면서 확정된 건 아니니 너무 믿지 말라는 말도 한다. 소집일이 되어 소집장소에 갔더니 내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징집대상자 중에 빠진 사람이 많으면 대신 갈 수 있었는데, 빠진 사람이 없어 추가 명단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일 년 이상 기다리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간다.

1969년 8월 전주에 있는 향토사단에 입소를 하게 되었다. 8월이지만 늦더위가 계속되고 있어 땀을 많이 흘리는 나로서는

그만큼 애로사항도 있었다. 그래도 오고 싶은 군대에 왔으니 불만이나 불평은 하지 않았다. 훈련은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산들산들 불어오는 10월 초에 끝난다. 훈련이 끝나고 간 곳은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되는 광주 포병학교였다. 그곳에서

통신교육을 받게 된다.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게 된 곳은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밤이면 이북방송이 귓가에

시끄럽게 들리는 최전방이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이 있는 강원도 원통이었다. 그때가 12월

중순이었다. 이튿날 인사계를 찾아가 월남 파병에 지원한다.

월남 파병에 지원한 지 한 달쯤 지나 교육을 받기 위해 오옴리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3월 초순에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월남으로 향했다. 배에서는 뱃멀미로 병사들이 여기저기 드러눕기도 했는데 가끔씩 모이도록 해 군인으로서

정신을 가다듬기도 했다. 선상에서 음식은 양식으로 아주 잘 나왔지만 뱃멀미로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싱싱한 과일도 다

귀찮게 느껴졌다. 그런 상태로 일주일을 항해해서 월남에 도착한 것이다. 배어서 내리니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대학생들이, 도로 양쪽에 서서 태극기와 월남 국기를 흔들며 우리들을 환영해 주었다. 우리는 군가 <맹호는 간다>를

힘차게 부르는 것으로 답례를 한다.

총소리 대포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나라였다. 모기도 많았다. 더운 날씨에 타국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교량을 지키는

곳에 파견이 되었다. 통신병이기에 무전기를 가지고 상황실에서 근무를 한다. 전우들은 철조망 주위 초소에서 근무를 한다.

아침이면 도로 정찰을 나가고 밤이면 매복을 나가기도 한다. 월남 사람들은 우리보다 체질이 약해 보였다. 그러나 더운

곳에서 생활해서인지 더위 하나는 잘 견디는 것 같았다. 그곳의 계절은 건기와 우기가 있다. 건기에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데도 그들은 반소매 옷을 잘 입지 않았다. 바나나.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이 많았다. 그곳 사람들은 한국군을

태권도도 잘하고 잘 사는 나라의 용감한 군인으로 생각해 주었다. 한국군이 지나가면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따이한,

따이한' 하며 쫓아다닌다. 과자나 콜라 등 먹을 것을 주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따이한 넘버원'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전쟁을 하는 나라에 갔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래서 일 년 동안의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외국 여행지로 월남을 선택하기도 한다. 월남에서 근무할 당시 전우들하고 웃으며

우리가 귀국 후 전쟁이 끝나게 되면 다시 한번 오자고 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잘 다녀오는데 아직까지 가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무더운 나라를 찾아가 젊음의 한때를 보냈던 추억의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

                                                         2009년 3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