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규의 글 한 모금

움직임은 생각이며 생각은 글이 된다.

촌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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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며 느끼며

2005. 2. 17.

▣ 장광규 씨의 글을 읽고 - 안도현

< 전철을 타며 >

고향 두고 떠나 온 나그네 
근로자란 이름으로 탄 전철 
하루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가는 지친 몸을 
가끔 종점까지 데려다 주기도 하고 
자주 이용한 경인전철은 
내 기쁨 내 슬픔 다 안다 

세월은 자꾸 흘러가고 
전철 속의 풍속도도 변해가고 
나의 겉모습 속마음도 
자꾸 빛바래간다 

아쉬운 사연 간직하고 
오래 다닌 일터 그만두니 
지금은 실업자가 되어 
전철에 오른다 

전철을 타면 
사람들 틈에 끼어 
자는 듯 눈감고 
생각에 잠길 수 있어 좋다

 


장광규 씨의 ,『전철을 타며』를 읽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경험을 시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 일상을 시로 형상화할 때,

흔히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속에는 적지 않은 함정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일상 속의 ‘나’와 시를 통해 등장하는 구체적 경험 속의 ‘나’는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가? 일상 속의 ‘나’가

작품 속으로 들어갈 때는 보다 객관화된 ‘나’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일상의 경험을 시로 표현할 때는 일상 속의 ‘나’가

아닌, 구체적 경험 속의 ‘나’를 형상화하는 화자의 객관화된 눈이 필요하다. 일상의 ‘나’가 객관화된 눈을 통해 구체적

경험 속의 또 다른 ‘나’로 변모되면 작품 속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시는 그저 개인의 일상을 기록해 놓은 글에 그치고 만다.

 

이 시를 보면서 나는 문득 백석 시의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시인은 가난과 외로움,

높음과 쓸쓸함 뒤에 사랑과 슬픔을 첨가한다. 그러나 이 시는 가난과 외로움만이 있을 뿐이지, 그 배면에 존재하는

높음과 쓸쓸함, 그리고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사랑과 슬픔의 깊이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백석의

시에는 한결같이 작고 사소한 것, 소멸해 가는 낡은 것, 쓸쓸하고 처량한 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배어 있다. 이러한

정조가 어떻게 시에서 효과적으로 표현되는지 백석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오늘 저녁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우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 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짓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전문 화자는 어느 저녁, 작은 방에 홀로 앉아 ‘흰 바람벽’을 무심히 바라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흰 바람벽에 지나가는 글자를 통해 자신이 처한 삶을 꿰뚫어 보고 있다. 

이 시의 시제는 현재형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 현재? 미래가 한 편의 시에 다 들어앉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흰 바람벽’을 보면서 떠오르는 단상을 주관적인 감정으로 직접 술회하였다면 이와 같은 효과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전철을 타며』는 일상의 애잔한 경험을 노래하고 있지만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이 시의 전면에 지나치게

노출되고 있다. 이 시에서 ‘경인전철―나’(『전철을 타며』)의 관계는 구체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사실을

단순히 전달하는 매개일 뿐이다. 단순한 것 속에도 얼마든지 생의 깊은 울림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시인 안도현 님의 월요 촌평 - 2001년 5월 14일